•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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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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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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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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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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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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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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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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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강교실] 슬관절 주변 손상(1)
      슬관절은 인체 내에서 가장 큰 관절이지만 골구조로 보아 매우 불안정한 관절이다. 슬관절의 병변은 다른 관절에 비해 그 진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인대 손상이나 반월상 연골 파열은 단순 방사선 사진으로 진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자의 병력, 손상기전 등에 관한 세밀한 문진과 정밀한 이학적 검사를 시행해야만 한다. 최근에는 자기 공명 영상 검사로 인대, 반월상 연골, 슬관절 주위의 연부조직 손상의 정확한 진단에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외상의 병력없이 슬관절의 종창과 동통이 발생하면 관절염의 가능성이 많으며, 비교적 장기의 만성 관절염으로는 골관절염, 류마토이드 관절염, 결핵성 관절염, 통풍 등이 많으며, 급성으로는 화농성 관절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관절경은 슬관절 병변의 진단과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와 관절경을 관절 내에 삽입하여 관절 내의 병변을 직접 보면서 정확한 진단을 할 뿐만 아니라 관절을 절개하지 않고 조그만 몇 개의 구멍을 통하여 관절 내의 거의 모든 종류의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즉 관절경을 이용하여 유리체 제거술, 반월상 연골 적출술 혹은 봉합술, 활액막 절제술, 전방 및 후방십자인대 재건술, 관절 연골 성형술 등을 시행할 수 있으며 관절경 수술은 관절을 절개하지 않기 때문에 수술 후 동통이 없으며 관절 운동의 빠른 회복과 수술 후 합병증을 최소화하고, 치료비 절감 등의 많은 장점이 있다.   슬관절 주위에는 11개 혹은 그 이상의 점액낭이 있으며, 점액낭의 염증성 변화에 의하여 동통, 종창 등을 일으키는 것다. 점액낭은 활액막과 유사한 막으로 싸여있는 주머니로, 관절 주위나 골의 돌출 부위를 지나는 피하조직, 건, 혹은 근육주위에 위치하여, 마찰을 감소시키고, 섬세한 조직을 압박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지닌 구조물이다. 외상성 점액낭염은 직접적인 급성 외상으로 점액낭의 출혈에 의하여 혹은 반복되는 만성 외상이 원인이 되며, 무릎을 꿇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서 슬개전 점액낭염이 잘 발생된다. 급성 감염성 점액낭염은 화농성 염증으로 심한 통증이나 종창, 발열 혹은 관절운동 제한의 증상이 나타나며, 만성 감염성 점액낭염은 결핵, 류마토이드 관절염, 혹은 통풍 등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된다. 치료는 안정, 압박붕대로 압박, 더운 찜질, 고정 등이 있으며, 점액낭에 고여 있는 삼출액을 뽑고, 외상성인 경우는 스테로이드를 국소 주사하고, 감염성인 경우는 균 검사를 하여 항생제를 사용하게 된다.   수술적 치료로는 절개 배농 혹은 점액낭 절제술을 시행하게 된다. 특히 낭종 절제술만 시행하면 낭종이 재발하므로 수술적으로 슬와 낭종을 절제할 경우, 반드시 슬관절 내 병변의 유무를 확인하여 적절한 치료를 병행하여야 한다. /한양대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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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7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8
        한국장로교총회 설립 100주년 역사, 「한국장로교회와 민족」이라는 책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을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지의 땅 조선에 입국하여 생명과 열정을 바쳐 복음의 씨앗을 뿌린지 13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분들의 사역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성장케 하였으며, 그 열매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위에 우뚝 서 있어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중에 몇 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마산과 통영지역 선교에 힘썼던 앤드류 아담슨을 소개한다.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 손안로 1860-1915)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이다. 1894년 조선에 파송되어 1914년까지 한국에 거류하였다. 그는 1895년 6월 부산 초량지부 선교관을 완공하였다. 초량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울산, 양산, 함안, 의령, 고성지역으로 선교구역을 확장하고 통영과 거제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선교활동 지역을 넓혀 나갔다. 경남 마산 창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고 마산 및 통영에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이러한 그의 열정과 헌신으로 모두 2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아담슨 선교사는 1914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간 다음해인 1915년 런던에서 소천 했다   두 번째로, 부산 최초의 여학교를 세운 벨 멘지스를 소개한다. 벨 멘지스(Belle Menzies, 민지사 1856-1935)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이다.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한 여선교사 중 한사람으로 1891년 부산에 도착하였다. 1883년 버림 받은 소녀들을 보살피고 신앙으로 기르기 위해 부산 지역 최초의 고아원인 미우라 고아원(Myoora Institute)을 설립했다. 이후에 미우라 고아원은 일신여학교로 발전하였고 초대 교장을 지냈다. 멘지스 선교사는 미혼의 몸으로 은퇴할 때까지 낮선 한국 땅에서 전도와 교육과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세 번째로, 함경북도 지역에서 의료선교를 한 로버트 그리어슨을 소개한다.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1868-1965)은 캐나다 장로교 출신 선교사이다. 그는 캐나다 핼리팩스 출생으로 1890년에 델하우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파인힐신학교를 거쳐 1897년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인 1898년 캐나다장로회 초대 선교사로 파송됐다. 함경도 성진의 욱정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제동병원을 창설하여 의료 활동에 전념하였고, 보신학교 등을 세웠다. 또한 성진을 본부로 삼아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살고 있던 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도 선교여행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1934년까지 조선에서 사역하고 은퇴 후 1965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네 번째로, 온 몸을 바친 헌신적인 선교사 월리엄 멕켄지를 소개한다. 윌리엄 멕켄지(William John McKenzie 1861-1895)는 캐나다 장로교 출신 선교사이다. 캐나다 케임프 브레톤 출생으로 델하우지 대학교와 장로교 대학을 졸업하고 1893년 내한하였다. 그는 황해도 솔내에 정착하여 헌신적으로 선교하던 중 무리한 사역으로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련읍 전도를 강행했다가 일사병에 걸렸고, 1895년 여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멕켄지 선교사는 1893년 10월에 내한하여 1895년 7월 23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짧은 생이었지만, 한복에 한식을 먹으며 초가집에서 생활하면서 한국 최초의 토착 자생교회인 소래교회의 건립을 독려하며 선교활동에 헌신했던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였다. 멕켄지는 동학혁명 시기에 동학과의 차이를 표시하기 위해 소래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를 세웠으며, 이후 십자가는 한국 교회의 상징물이 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네 분과 같이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학교를 설립하여 지도자를 양성하였고, 교회를 설립하여 전도하였다. 그리고 고아원을 설립하여 약자들을 보살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국가에서 얼마든지 육신적, 정서적으로 매우 편안한 사역과 삶의 질이 높은 생활들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머나먼 동방의 작은 나라, 한반도에 정착하여 다양한 선교를 펼쳤던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선교사로 소명을 받아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았던 모범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 맡은 위치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초기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한국교회가 존재하고 성장하였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그 선교사들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사역에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최 선 박사(Ph.D., Th.D.)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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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5-20
  • [건강교실] 골다공증성 골절 (2)
      골다공증성 골절은 교통 사고나 추락과 같은 심한 사고로 발생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뼈가 이미 약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가벼운 넘어짐이나 작은 충격에도 골절이 발생할 수 있다. 대부분 골절이 일상 중 낙상에 의해서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고령에서는 낙상을 방지하는 것이 예방에 중요하므로 균형 감각과 근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며 전문의의 관리를 통해 골강도가 더욱 약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또한 낙상의 원인이 되는 질환이나 어지럼증을 유발할 수 있는 약물 복용에 주의를 해야 하며, 가구와 전기 코드 정리, 밝은 실내 조명, 계단 난간 설치 등의 일상 생활 환경에 대한 관리와 개선이 필요하다. 진료를 하다보면, 골다공증성 골절 환자의 대부분이 큰 사고에 의한 손상보다는 생활 중 가벼운 외상에 의해 골절이 발생하여 병원을 찾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실제 환자 중에 평소 골다공증이 심해서 넘어질까봐 외출도 잘 하지 않았던 한 여성 환자분이 집 안 욕실에서 미끄러진 후 대퇴골 간부 골절로 내원하여, 수술적 치료를 받고 잘 나은 경우가 있었는데, 정형외과 외래를 다니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집안을 꼼꼼히 정리하고 특히 욕실 바닥을 잘 치운다”라고 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골다공증성 골절이 발생한 환자는 골절 치료와 더불어 골다공증 치료를 시작한다. 그러나 골다공증성 골절은 예방이 더욱 중요하여 골절이 일어나기 전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골다공증성 골절이 발생한 후 골다공증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이후에 발생하는 이차 골절을 예방함에 목적이 있다. 현재 사용되는 골다공증 약제는 파골 세포의 골흡수를 억제하는 약제와 조골 세포에서 골형성을 증가시키는 약제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약제는 골흡수 억제제이며 부갑상선 호르몬 제제와 스트론튬이 골형성 촉진제에 해당한다. 어느 약제를 사용할 것인가는 환자의 골교체율을 고려하여야 한다. 폐경기 여성과 같이 골교체율이 증가한 경우에는 골흡수억제제 사용이 좋으며 노인성 골다공증에서는 골형성이 저하된 것이 문제이므로 골형성 촉진제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골흡수와 골형성은  연관되어 있으므로 투여기간과 골변화에 따라 적절한 약제를 선택하여야 한다.   대표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약제는 골흡수 억제제로 투여 방법은 약제에 따라 다양하다. 경구 복용 방법과 주사 투여 방법이 있고, 복용 및 투여 기간에도 차이가 있으므로 환자의 편의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약제의 임상 연구 결과, 대퇴골 및 척추의 골밀도를 5~10% 정도 증가시킬 수 있고 척추 골절 및 비척추 골절을 40~50%정도 감소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골다공증 치료와 더불어 골절이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운동, 뼈 건강을 위한 음식 섭취, 낙상의 위험이 있는 생활 환경의 관리 및 개선 등이 필요하며 의료진과 환자 모두 이에 대한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양대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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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5
  • [향유옥합] 우리와 함께 거하는 주님의 말씀
      언젠가 책을 읽다가 과학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중 눈길을 끌었던 법칙이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이다. 이 법칙에 의하면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나아간다고 한다. 정리 정돈이 잘 돼있던 교회 예배당도 예배 후에는 깨끗한 모습이 사라지고, 의자도 삐뚤빼뚤, 바닥에는 작은 쓰레기 조각들이 떨어져 있다. 우리 인생도 어렸을 때는 건강이 튼튼하지만, 세월이 육체에 나이테를 하나씩 새겨나갈수록 건강도 무너지고, 힘도 약해진다. 한 때는 좋은 친구였지만, 이제는 내 마음을 딱딱하게 만드는 원수처럼 느껴진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인간 세상의 모습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이사야 40장 8절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마르고, 시들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고 그 생명의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그 말씀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 말씀은 빛으로 모든 어둠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이 질서를 잃어버린 인생을 향하여 은혜로 찾아오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다. 모든 만물이 그 질서를 잃어버리는 이 세상속으로, 영적으로 매말라가고,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을 잃어버린 인생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럼, 이 변하지 않는 은혜의 주님이 우리의 삶속에서 행하시는 사역은 무엇일까? 바로, 말씀으로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본질적인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잔치에서 배푸신 기적을 보면, 주님은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자칫 잃어버릴 뻔 했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다. 눈먼자를 다시 보는자로, 죽은 자를 불러내서 살아있게 하시는 역사처럼, 주님은 절망을 바꾸신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방주에 있던 노아가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을 때, 비둘기의 입에는 새로 움튼 감람나무의 잎사귀가 물려 있었다. 작은 잎사귀였으나, 그것은 노아에게 하나님의 응답과 같았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가고, 새로운 시작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방에 물로 둘러 쌓인 채 방주에 머물던 노아에게 그 잎사귀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뀌는 기적과 같았다.   죽은 나사로로 인해서 낙심에 빠져 있던 마르다의 마음속으로 예수님은 말씀의 잎사귀를 물고 찾아가셨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노아에게 소망의 잎사귀를 보내주신 하나님, 마르다에게 말씀의 잎사귀를 보내주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은혜의 숲에서 말씀의 가지를 꺾으셔서, 인생의 문제와 염려로 낙심해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이 세상의 법칙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은혜의 법칙은 모든 무질서를 돌이켜 질서가 되게 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인을 돌이키사 하나님 앞에 자녀로써 당당히 서 있게 하시는 말씀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임마누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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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5
  • 정성구박사 칼럼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지금부터 51년 전, 나는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장교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 때 소령 계급장을 단 멋진 교관이 단상에 오르더니 흑판에 <전쟁은 예술이다>란 제목을 크게 쓰고 나서 열변을 토해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말한 <전쟁은 예술이다>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외교전쟁, 무역전쟁, 경제전쟁, 문화전쟁 등등 다양하다. 그런데 나는 오늘의 사회에서 여러 가지 소리 없는 전쟁은 <세계관 전쟁>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소총으로 적의 심장을 향해 쏘고, 전투기와 탱크로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미사일로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것만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전쟁도 있는가 하면, 근래에는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굳이 전면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미국 본토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무인 공격기로 적장을 간단히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이란 솔레마이니 장군의 제거」이다.   모든 나라들이 평화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아직도 이 땅에 평화는 없다. 평화 쇼를 멋지게 한다고 이 땅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MI소총 가스 마게 앞에 새겨진 PAX는 곧 평화이다. 즉, 「평화를 원한 다면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전쟁이든 전쟁은 승패가 나기 마련이고, 전쟁에 패한 쪽은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되고 한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영국과 청나라와의 아편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1,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중동전쟁, 월남전쟁, 6•25전쟁 등 헤아릴 수 없는 전쟁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쟁중인 나라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이다. 남북한은 지금 휴전상태가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70년전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울산 방어진까지 피난길에 올랐고, 그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또 하나의 전쟁이 있으니 이른바 <세계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세계관 전쟁>이라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들릴지 모르겠다.   세계관이란 단어는 영어에는 없다. 그냥 World View란 조어를 만들어 쓴다. 그러나 독일어는 세계관을 Weltanschauung이라 쓰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도 세계관이란 말을 보편적으로 쓰고 있다. 세계관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 또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입장, 무엇을 기준으로 역사와 세계와 인간을 보는 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 질 수 있다. 세계관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가장 가까운데 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배경 즉 사상의 배경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삶의 결과도, 걸음걸이도 서로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중립이란 것이 없다.   또한 사회적 분위기나 시스템이나, 정치방향도 「세계관의 결정」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가령 사회주의적 생각에 물든 사람들이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면, 그 작품에서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적 세계관이 나오게 되어 있다. 최근에 한국의 영화들이 오스카상과 아카데미 상을 석권했다. 참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 세계관과 연관성이 있다고 들었다. 오늘날 문화, 예술가들은 그냥 소설은 소설로, 영화는 영화로 단순하게 보자고 한다. 그동안 한국에는 종북소설도 많았고 사회주의적 영화도 많았다. 금번에 상영된「기생충」이라는 영화에서도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가난한 자가 식칼로 부자를 찔러 죽여도 된다’는 공산주의적 혁명의 사상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유럽과 미국 영화계의 상을 휩쓸었고 세계적인 화제작이 되었다.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계도 벌써부터 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빈부격차를 다룬 문제작이라고 추겨세웠다.   나는 1980년부터 대학총장의 책임을 졌기에 그 때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전교조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고 가르쳤고, 은근히 계급투쟁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실 그 동안 수십 년간 북한의 세작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법조, 교육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세뇌교육을 했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른바 민주화의 깃발을 앞세우고 평등, 평화를 내세워 서서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적패를 부추기고, 중•고등부, 대학생, 청년들과 각계 각층에 사회주의 사상이 문화와 예술이란 이름으로 파고 들었다. 이런 것을 이른바 문화 맑스주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정치권, 교육계, 문화계 등 광범위하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유물주의 세계관>, <사회주의 세계관>에 물들어 버렸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종교이다. 지금은 사이비 종교적 신념을 굳게 믿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두고 TV에서 많은 학자들이 미래를 전망했다. 어떤 학자는 촛불 혁명의 위대함을 예찬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교수라도 그가 비뚤어진 세계관에 붙잡혀 있다면 애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 또는 한국교회는 이런 거대한 물결과 대항할 수 없는 위기에 놓여있다.   이런 이데올로기와 대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적 세계관>, 또는 <칼빈주의 세계관>뿐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먼저 깨어나야 하고, 강단을 맡은 목회자들이 철저히 성경적 세계관 교육에 올인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한국교회 강단은 오직 현세적인 행복만을 선포하는 낙관주의 세계관이 지배했고, 이 세상과의 <영적 전투의 의지>를 심어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 전투적 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관 전쟁>에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철저한 <기독교 세계관>을 갖도록 교육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리적 교육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젊은이들에게 영적 전사로서 세속적 세계관과 투쟁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관 전쟁중이다. 물론 기독교의 핵심은 복음 그 자체이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자는 자연히 세계와 역사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세계관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자들 중에서도 사회주의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많아서 큰 걱정이다.   화란의 칼빈주의 대학자인 정치가요, 신학자, 언론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박사는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성경적 중심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독교 세계관, 인생관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는 말하기를 “칼빈주의가 신학적 체계만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과 방향을 제시하는 근본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했다.   코로나19 이후, 오늘날 한국교회의 당면과제로 우리는 복음을 통한 영혼구원은 말할 것도 없고, 삶의 전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영역에 침투된 유물주의적,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막아내고, 기독청년들에게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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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7
      낡은 승합차로 출퇴근 하며 대학교 스쿨버스를 손수 운전하시고 총장의 월급은 물론 외부 특강료까지 모두 대학교에 헌납했으며, 평소 몸에 밴 근검절약과 소탈한 습관 덕분에 학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대화하고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하신 다정한 모습의 파란 눈과 하얀 머리카락을 갖고 계셨던 ‘국내 최초 외국인 총장’이자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로 불렸던 나의 참 스승 나사렛대학교 명예총장(미국명, William H. Patch 월리엄 패치·78)을 소개하고자 한다.   월리엄 패치(백위열 전 총장)박사는 1942년 미국 매사추세추에서 출생하였다. 뉴욕 로체스터대학교에서 상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고 새마을 운동이 한참 불붙기 시작할 때인 1973년 10월 31세 나이에 부인 백경희 사모(미국명, 게일 패치·73)와 함께 나사렛성결교단 선교사로 한국에 오셨다. 패치 부부는 미혼모가 버린 남자아이(캐빈)를 입양해 미국 메릴랜드대학교를 졸업시키고 미국인과 결혼을 하여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시킬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키워왔다. “김포공항에 내려 처음 마주친 황량했던 당시 한국의 첫인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는 그는 “이렇게 빨리 한국이 발전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천안과 한국은 패치 총장에게 제2의 고향이며, 대학교에서 미래를 꿈꾸는 젊은 학생들을 위해 언제든지 좋은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백위열 명예총장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대학교에서 선교사로 38년 동안 재직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 특히 그는 장애인 교육신장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교육과 선교에 에너지를 쏟았다. 총장이지만, 학교 내 7평의 게스트룸에서 부인과 함께 생활 했다. 그의 부인(게일 패치)은 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53개국의 유학생을 배출하였다. 패치 명예총장은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했지만, “한국말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인보다 오히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패치 명예총장은 “38년간 한국에 살다보니 내 몸에 흐르는 피 가운데 절반은 한국인의 피가 됐다”며, “남은 삶도 한국인으로 남아 귀국 이후에도 한국을 자주 오가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패치 총장은 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장롱을 비롯해 한국 냄새가 나는 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미국에 보낼 작정이다”며, “섭섭한 마음도 있지만 나사렛대학교가 이만큼 성장하고 한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성숙해지고 있는 만큼 매우 뿌듯한 마음을 안고 떠난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일궈낸 대표적인 일 중 하나가 장애인 교육을 신장시킨 것입니다. 패치 총장은 뇌성마비 장애로 태어난 딸을 8개월 만에 천국으로 보냈던 아픔을 되살려 나사렛대학교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활복지특성화대학으로 만들었다. 대학교 총장 부임 후 학교의 최우선 학사행정을 장애인 교육에 두기로 결심하고 전국 최초로 대학교 부설 특수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개설했다.   1996년에는 국내 대학교 가운데 최초로 장애인 입학전형을 실시했다. 당시 국내 대학교들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로 장애인들이 대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장애학생은 있어도 이들을 교육하는 데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월리엄 패치 총장의 지론이었다. 그는 “지역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준비해 나가는 것은 지구촌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특권이자 의무라 생각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고 모험을 실천한다면 세계는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고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하였다. 또한 “한국사회의 민첩성과 역동성은 다른 나라 국민이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이며. 결국 이런 국민성이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며, 요즘 젊은이들이게 민첩성과 역동성에 창조성을 더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지구촌으로 나아가라고 말했다.   1973년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었던 우리나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부인과 함께 선교사로 이 땅을 밟은 월리엄 패치 전 총장의 사역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과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경제 원조를 받았던 우리나라를 이제는 외국에 굶주린 국가에 베푸는 나라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 성도들도 받는 것에 익숙하기보다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 언론, 방송사들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나의 세계관을 넓히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계를 향해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월리엄 패치 총장의 삶을 통해 지식과 우정을 나누고 세계평화와 발전에 대한 나눔을 실천한다면 급증하는 지구촌 분쟁과 빈곤문제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을 기억하며 남은 생애를 길과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소중한 사역자로 살아가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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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1
  • [참된직분 3] 봉사는 하나님의 일을 돌보는 것
      Ⅲ. 참된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셨습니다.  성경본문 12절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1:23, 2:22)인데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요 믿는 자는 지체인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도덕성과 지성과 능력 등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충만하게 이루어 가야 합니다(고전 12:24).     1) 온 몸을 머리를 의뢰합니다.(16절)   교회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자라는 것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    스도를 의지하여 활동하며 지배받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영혼이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     2) 지체가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16절)  머리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연합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머리의 지배를 받아 지체가 연합되듯이 교회가 서로 연합되어야 합니다(고전 2:26). 즉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각 지체에 지시를 하면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연합되어 영향을 받게 됩니다.     3) 각 지체의 불량대로 역사합니다.(16절)   연합된 우리 지체도 온 몸을 중심 삼아 각각 맡은 기능을 발취하여 지체의 사명을 감당하듯이 교회는 각각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지체 중에 한 지체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온 몸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교회에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교회는 성장해야 하며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16절)   서로들이 서로 연결하여 자기의 받은 은혜의 분량대로 역사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진리대로 세워 나아가며 점점 성장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유치한 면은 버리고 초등학문을 버리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4:14).    5) 교회는 사랑으로 서야 합니다.(15, 16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터 위에 세워 사랑 가운데 행하며 반석 위에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고전 10:4, 사 17:10, 마 16:18). 서로들 사이에 상호 간의 사랑은 영적인 성장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덕을 세워 나아가는 것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 나아도록 힘써야 합니다. 반면에 서로 분쟁하여 싸우는 것이 서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직분은 명예가 아닙니다. 교인 확보를 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도 아닙니다. 우리가 목사, 장로, 집사가 아닐지라도 교사요, 전도자입니다. 모두가 직분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값진 선물은 주님을 위해 발휘해야 합니다.    성도를 온전케 해야 합니다. 믿음을 키우고, 장성한 지식에 이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또 우리는 교회를 위해 힘써 섬기며 봉사해야 합니다.    헌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큰 충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서로 힘을 다하여 일하므로 그리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견고히 하며 성장시키도록 다 함께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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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 [성경의 죽음 11] 가장 부러운 죽음
      인생 마지막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고 순종 참된 그리스도인은 소유·흔적 없이 죽음으로 되돌아가  성경에서 죽음에 관한 기사를 찾아 나누고 있다. 죽음이란 누구나 고통스럽고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인생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다(히브리서 9장 27절). 만약 내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게 되면 본받고 싶은 죽음이 있다. 바로 모세의 죽음이다. 모세는 ‘정말 잘 와서 큰일하다 잘 간’ 인물이다.    세상에 잘 오기 쉽지 않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세는 난지 백일만에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궁중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유대인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그는 애굽 왕자의 위치에서 내려와 오히려 히브리 사람으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사람들마다 큰일을 원하지만, 실제로 이 땅에 와서 큰일을 하면서 사는 인물은 많지 않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만든, 유대 역사 가운데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을 성취한 인물이다.    모세의 삶은 롤러코스터 인생이라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 노예 후손으로 죽을 위기에 있었으나 애굽의 왕자가 되었고, 애굽의 왕자로 최고의 인생을 누릴 때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갔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아 유대민족의 지도자가 된다. 광야에서 보낸 40년은 모세에게 영광이지만, 때로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게 된다.    무엇보다 모세의 위대한 점은 그가 잘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지막을 크게 배려해 주셨다. 그의 마지막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잘 죽은 것은 그의 인생이 ‘여호와의 종’으로 살았다는 점이다(신명기 34장 5절). 사람의 종도 많고, 물질의 종도 많다. TV에서 기인을 소개하는데, 일생동안 모은 수집품을 집안 가득 채워놓은 사람을 보았다. 가족들도 반대하고, 주변에서 손가락질하지만, 자신은 행복하다고 한다. 그 사람 나름대로 특별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교인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여호와의 종’으로 살다가 가고 싶다.    모세의 죽음이 부러운 것은 건강하게 살다가 갔다는 점이다. 죽을 때에 나이가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역이 쇠하자 아니하였더라고 했다(신명기 34장 7절). 눈이 흐리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 시력을 의미하겠지만, 영적인 시력도 쇠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3장에 엘리 제사장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모세는 마지막까지 시력이 좋았다. 120세까지 사는 사람도 드물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 병들고 아파 누워 지내다가 죽음에 이른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60대의 경우 앞으로 요양원에서 10년 이상 지내다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모세는 인생 마지막까지 건강했으니 부럽다.    모세의 죽음이 부러운 것은 끝까지 믿음으로 살다가 간 점이다. 처음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종국에 비참하게 끝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모세는 인생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포하셨을 때(신명기 34장 4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요단강 앞까지인 것을 깨닫고 순종한 점은 모세의 큰 장점이다. 마지막에도 그는 무덤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이것 역시 본받고 싶은 죽음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나 그는 소유 없이 흔적 없이 그렇게 죽음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뒷모습이며, 바람직한 마무리이다. 그래서 모세의 죽음이 부럽다.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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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 [목회자 칼럼] 재앙의 때에 그리스도인의 자세
       중국에서 촉발된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깊은 슬픔과 한숨 속에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가? 이러한 때에 교회 공동체가 취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법궤가 성막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왕이 된 지 4년 만에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안에 모시고 봉헌식을 하는데, 이때 솔로몬이 성전 봉헌기도 7가지 내용 중 ‘기근과 전염병에 대한 기도’가 있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역대하 20장 9절)    지구촌 곳곳에서 재앙 앞에서 인간의 무능함을 깨닫고, 거리로 쏟아져나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들이 SNS를 통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재앙은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열왕기상 8장 38절)    하나님은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회개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열왕기상 8장 48절)라고 한다.    칼뱅은 말하기를 “죄에 대한 증오심이 회개의 시작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를 처음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것이며, 경박한 사람들은 회개를 겨우 며칠 동안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빚었으나,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고 했으며, 복음 전체가 회개와 죄 용서라는 두 표제로 표현될 수 있고, 주께로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 것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것이 참된 회개에 속하는 일이고, 회개하라는 선포는 죄의 짐에 눌려 지친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로 돌아서며 용서와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으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솔로몬은 죄를 인정하고 그분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만 그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였다. 성경은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하기도 한다. 사실 재앙의 근본적 원인은 마음에 있다. 즉 죄의 재앙이 진짜 재앙이며 다른 모든 재앙의 근본 원인이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왜 성전 봉헌식을 하는 기쁜 날에 이런 기도를 올렸던 것인가? 건물인 성전도 성전이지만 마음의 성전이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솔로몬의 봉헌기도가 끝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역대하 7장 1~2절)    다음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개인방역을 잘 준수하여 예방할 뿐 아니라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고 구해야 한다.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 임이로다”(시편 91편 3절)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편 91편 6절)    셋째로, 예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솔로몬도, 다윗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예배의 삶을 살았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넘기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내게 넘기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제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전염병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하니”(역대상 21장 22절)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예배 열풍이 불고 있지만 이에 대한 우려와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다. 즉 온라인 예배가 적절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번 계기로 드러났다. 모 교회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담임 목사님의 설교만 듣고 대다수가 나가더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환경으로인해 온라인 예배를 드릴 때 교회에서 예배하듯 똑같은 자세로 예배해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재앙의 때에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정부의 방역대책을 잘 지키며,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방역에 철저히 하여 공동체가 한곳에 모여 예배해야 한다.  /예장에녹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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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 [건강교실] 골다공증성 골절(1)
      뼈는 살아있는 조직이다. 따라서 뼈는 인체의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일생 변화를 계속하며 오래된 뼈는 일정하게 파괴되고 다시 새로운 뼈를 만들어내는 재형성 과정을 지속한다. 소아에서는 뼈가 흡수되는 것보다 생산이 더 많아 크기와 강도가 증가되어 성장이 일어나고 골밀도가 최고치에 도달하는데 30대 이후에는 뼈의 흡수가 많아져 골질량이 감소하게 된다. 이러한 뼈의 흡수는 갱년기 전에는 매년 0.3~0.5% 정도씩 감소하나 갱년기에 이르면 10배나 빨라진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피부의 노화가 진행하는 것처럼 뼈 조직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뼈의 생산은 적게 되고 흡수가 많아져 뼈는 약해지기 시작한다.    세계보건기구는 골다공증을 “골량의 감소와 미세 구조의 이상을 특징으로 하는 전신적인 골격계 질환으로 결과적으로 뼈가 약해져서 부러지기 쉬운 상태가 되는 질환”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미국국립보건원에서는 이를 축약하여 “골강도의 약화로 골절의 위험성이 증가하게 되는 골격계 질환”으로 규정하였다.    골다공증의 두 가지 위험 인자는 청장년기에 낮게 형성된 최대 골량과 노화 및 폐경으로 인한 빠른 골소실이다. 따라서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골소실이 증가하기 시작하는 폐경 이후 노년층에서 골소실을 막는 노력뿐만 아니라 청소년기에서부터 30세까지 골량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젊었을 때부터의 관리가 필요한 질병이라 할 수 있다.    골다공증은 일차성 골다공증과 이차성 골다공증으로 분류되며 일차성 원발성 골다공증은 폐경으로 인한 제1형 골다공증과 노화로 인한 제2형 골다공증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 두 형태는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므로 정확히 분류하기는 어렵다. 폐경으로 인한 골다공증은 일차성 골다공증의 80%정도를 차지하며 에스트로겐 결핍이 폐경 후 골다공증의 주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골다공증은 남성보다는 여성에서 훨씬 흔하게 나타난다. 제 2형인 노인성 골다공증은 70세 이후에 발생하는 것으로 일차성 골다공증의 20%정도를 차지하며 연령 증가로 인한 골소실로 인해 골다공증이 발생하게 된다. 이차성 속발성 골다공증은 특정 질병이나 수술, 약물 복용 등에 의해 골량의 형성 장애가 있거나 골소실이 증가되는 경우에 발생하며 스테로이드는 골량을 감소시킬 수 있는 대표적인 약물이다.    골다공증은 증상이 없으므로 모르고 지내다가 골절이 발생한 후에 심한 골다공증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골절 후에 골다공증에 대한 치료를 시작하는 것보다는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폐경 여성 및 고령에서는 골밀도 측정과 함께 골다공증 골절에 대한 위험 인자를 파악하여 골다공증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골다공증 골절의 주요한 위험 인자에는 낮은 골밀도, 전에 골다공증 골절의 과거력, 가족 중에 골다공증 골절이 있었던 경우, 저체중, 흡연 등이 있다. 이외에 치매, 뇌졸중, 균형 감각의 이상, 활동량이 매우 적은 경우, 과음 및 과도한 카페인 섭취 등은 골다공증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골다공증 치료는 골다공증 치료 약제와 더불어 충분한 칼슘 섭취와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 도움이 되며 체내 비타민 D 농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햇빛을 쪼이는 것도 중요하다. 비타민 D는 장에서 칼슘 흡수를 촉진 할 뿐만 아니라 근육에도 작용하여 재활에 도움을 주며 넘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한양대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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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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