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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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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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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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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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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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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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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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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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서술하면서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1:16)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썼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교부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인간에게 해로운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은 사탄의 짓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안톤 반 레벤후크가 최초로 발명한 현미경을 통해서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즉 생물의 세포와 같은 미세 구조물과 미생물 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로베르트 코흐에 의하여 원생생물인 1μm(μm: 10⁻⁶m=1,000분의 1mm) 크기의 박테리아가 발견되고, 그것에게 질병의 인자에 따라 탄저균, 결핵균, 콜레라균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질병은 사탄의 짓이 아니라, 세균 곧 박테리아의 감염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때부터 인류는 질병의 인자인 박테리아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는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으나, 기독교는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탄저병, 광견병, 닭콜레라 등의 박테리아에 대한 백신을 만들어 치료법을 개발했다. 그 무렵에 박테리아를 걸러낼 수 있는 여과기를 개발했다. 그런데 담배모자이크병이나 돼지 구제역, 그리고 사람에게 감염되는 황열병 등은 그 여과기를 통과할 수 있는 더 작은 미생물에 의하여 감염된다고 추정되었다. 그 실체인 바이러스는 대개 0.1μm 크기보다 작았으므로 광학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었고, 전자현미경이 발명된 1940년 이후에야 관찰되었다. 바이러스는 하나의 DNA 또는 RNA를 단백질이 둘러싸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살아 있는 숙주를 만나기 전에는 생명 활동을 할 수 없는 유기물 결정체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RNA형 바이러스이다. RNA형 바이러스는 DNA형보다 유전자 변형이 쉽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는 백신 개발과 방역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모든 박테리아는 유익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체의 기관에 침입하여 질병을 일으킨다. 바이러스는 종류에 따라 숙주 생물의 세포에 침입하여 자손을 중식하며, 심지어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로 불리는 바이러스는 원핵생물인 박테리아까지 숙주로 삼는다. 바이러스 질병은 침입한 바이러스가 증식하는 과정에서 숙주의 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요즘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코로나 19(WHO 공식명칭: COVID-19) 때문에 난리가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왕관(王冠)처럼 사방에 꽃잎 모양의 돌기가 있어서 코로나(라틴어로 왕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편 국제바이러스분류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Taxonomy of Viruses)가 이 바이러스 이름을 ‘SARS-CoV-2’라고 정한 것을 보면,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인간의 호흡기를 통하여 침입하여 급성 폐렴을 일으킬 수 있는 사스 독감 바이러스 계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코로나 19의 발원지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시로 알려졌고, 원래는 그곳의 동굴에서 사는 박쥐를 숙주로 삼아 생존하던 것이라고 한다. 바이러스는 유전자가 다른 숙주에게는 침투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중간 숙주를 거치면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면 다른 숙주에게도 침투할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사스와 메르스가 박쥐에서 사향 고양이와 중동, 낙타를 중간 숙주로 하여 인간에게 침투한 것과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도 중간 숙주(아직 미확인)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은 왜 눈에 보이는 해충과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창조하여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을 아는 기독교 지식인들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잊으면, 하나님이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시고,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28:21)이라고 말했다. 모세의 말은 하나님이 아담을 앞에 두고 심판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성경에서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이 생겨난 때에 대해 가장 적절한 해석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원죄를 심판하시면서 땅과 모든 생물에게 저주의 말씀을 하실 때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것들에 의해 이미 발생한 질병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조치는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알고 예방법과 치료법을 찾아 대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법칙인 인과율에는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간이 질병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원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을 가진다면 인류가 온전히 회개하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때에 인간에게 해로운 모든 것들이 소멸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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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7
  • [목회자 칼럼] 아름다운 세상 (1)
      우한폐렴(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미쳤다.   손님으로 북적이던 마트와 시장과 거리, 특별히 명동거리에는 사람보기가 힘들 정도로 한산한 거리가 되었다. 많은 모임과 행사와 심지어 학교의 개학, 졸업식까지 연기 내지 폐지가 되기도 한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배를 줄이기도 하고 예배시간에도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해서 사람 모이는 곳에 사람들은 가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2장 26절)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들이 흑암의 세상, 죄악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어떤 지인들은 나라를 정치인들이 망치고 백성들은 나라를 살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참으로 힘들고 염려스럽고 어려운 때에 살고 있다.   어떤 분은 적폐청산과 개혁을 한다고 하더니 도리어 적폐를 만들고 있어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서로 도와가며 살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특별히 개혁은 나부터 하는 것인데 남부터 개혁하고 감옥에 보내고 없는 죄를 씌워서 죄인을 만들어 놓으니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다.   성경에 보면 잘나가던 나라가 망한 나라들이 있음이 보여 지고 있다. 특히 애굽 사람들은 그 당시에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나라이다. 이 애굽의 왕은 백성의 원성을 짐승의 말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업신여기고 청종치 않다가 벌과 저주를 받아 백성과 국가는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정치인은 민심이 천심인줄 알아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욕심이 많아 저주 받은 것이다. 궁궐 앞에 포도원을 보고 욕심을 내어 부인 이세벨이 포도원 주인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다. 악행을 저지르니 왕의 가정에 저주가 임하여 죽고 나라는 3년간 가뭄이 들기도 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다. 세금을 올리고 백성을 못살게 하니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갈라졌다. 한 나라가 두 나라가 됐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성경은 어느 사회나 어느 국가나 개인에게까지 변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을 잡은 정치인은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지 적폐청산을 한다는 명목아래 자기와 반대 의견이 있는 사람들을 감옥에 넣으면 자신도 반드시 심는 대로 거두게 된다. 더불어 요즘 세금이 너무 많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지 국민의 재산을 빼앗는 기관이 아니다. 상속세를 위시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금이 너무 많아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것을 깨닫기 바란다. /예장(합동)해외총회 총회장·생명의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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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6
  • [성경의 죽음 8] 비극적인 두 사람의 죽음
      중국 땅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는 많은 생명들의 목숨을 가져갔다. 아마도 언론에 소개되지 않은 더 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은 전염병뿐 아니라 온갖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교통사고나 화재로 아깝게 희생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에 와서는 전쟁에서 나가 죽은 이보다 자살로 죽는 이가 많다고 하니 참으로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레위기 10장에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이 있음을 소개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다.   모세의 형제인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으로 위임받았고 네 명의 아들들은 제사장들로 위임받았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이 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종종 어떤 개인이나 민족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며 비밀스런 경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성막과 성막의 물건을 취급하게 하셨다. 레위 지파 중에서도 오직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으로 섬기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영광스런 선택에 의해 직분을 맡은 나답과 아비후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다.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다”고 말한다(레위기 10장 1절). 본래 아론과 그 아들들은 아침저녁으로 성소에 있는 금촛대에 등불을 손질하며 분향단에 향을 피워야 했다(출애굽기 30장 7~8절). 다른 불은 무엇인가? 번제단에서 취한 불이 아닌 그외 모든 ‘이상한’ 불을 가리킨다. 향로에 담아 옮겨 성소의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는 불은 오직 희생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의 불을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여기에 답이 나와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 때문에 죽었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기에 실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곧이어 3절을 보면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레위기 10장 3절). 이 말씀 앞에 아론은 ‘잠잠하고’ 있다. 사실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면서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항상 여호와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주를 가까이 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습관적인 제사장 직분은 감당했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가까이하지 않았기에 죽음을 당했다고 본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극적 사건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레위기 10장 8~9절).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후에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는 거룩한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으로 독주를 마시고 제단에 나간 듯싶다. 교인들은 두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경고를 받아야 한다. 이미 교인들 역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베드로전서 2장 9절). 그렇지만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며 거룩한 직분을 맡아 헌신할 자들이 속되다면 누군들 살려주실까?/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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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6
  • 여호와의 그날(2)
      주님의 심판 본문 1절에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라고 했으며 2절에는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어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예루살렘”은 지리적인 곳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재물이 약탈되어 성도가 재물의 소유권을 잃어 버립니다.   성읍(교회)이 함락되어 예배의 자유를 상실해 버립니다. 가옥이 약탈되어 주거의 자유를 잃어 버립니다.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노예가 되어 생명의 자유가 유린을 당합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처참한 대 환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전쟁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 하반절에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대 환난은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를 위해서 그 환난의 날을 감하여 주시어서 남은 자가 계속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환난을 이기고 은과 같이 금과 같이 연단된 남은 백성은 큰 영광의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여호와의 그날에 주님이 심판하러 재림하십니다.(3-5절) 3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4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1) 심판하러 재림하신 주님이 먼저 친히 싸우십니다.   본문 3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친히 나가사” 라는 말은 재림하신 주님이 친히 이 전쟁을   진두지휘 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큰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계시다가 즉시로 그 대적을 심판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전쟁을 통해 사탄은 최후 멸망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에겐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2) 재림의 주님이 감람산은 나누어 골짜기를 이룹니다. 본문 4절에 “...그 날에 그의 발이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그 가운데서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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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6
  • 목자가 이끄는 쉴만한 물가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목사님, 목사님은 정말 행복해 보이고 사랑이 넘쳐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의 증거들을 보면서 아무런 시험이나 고통이 없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오랫동안 주의 일을 하면서 영혼은 하나님으로 인해 항상 행복했지만, 육체적으로 환경적으로 상황적으로 힘들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인생 일기장을 펴보면 날씨는 항상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많았고 예상하지 못한 시험과 고난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순간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고통의 파도 속에서도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났다. 내 인생이라는 배 위에 오르시사 평강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경험했다. 몸은 늙어가고 이제 많이 쇠약해져 가지만, 주님은 나의 영혼을 성령의 강력으로 채우시고 제목이 없고 내용이 없던 저의 매일을 은혜의 시가 되게 역사하셨다.   사랑하는 당신이여! 오늘 인생의 현장에서 연약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가시로 인해 힘든가? 오늘 당신은 은혜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 바란다다. 육신의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하늘의 축복과 성령의 손길,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이 열리게 되었음에 감사하자.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셨듯이, 365일 매일의 삶에 동행해 주실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모든 흑암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자연 만물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의미 없이 지나가는 당신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은혜로 풍성한 한 편의 시로 쓰이게 될 것을 믿길 바란다. 그러니 오늘 하루 주 안에서 안심하자! 주 안에서 승리하자! 당신의 인생에 쓰일 주님의 시를 기대하며 살아가길 축복한다.    성경 표지를 펼치는 나의 손이 항상 떨린다. 한 절 한 절 마음에 새겨질 때마다 내 마음도 떨린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내 가슴의 떨림이 부드러운 구름 위에 머리 베고 있는 듯 편안함으로 바뀐다. 몇 해 전 시집을 처음 출판하면서 내놓은 고백들은 삶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동시에 그분의 마음에 대한 나의 고백을 읊었다. 인생은 사계절과 같아서 때로 따스한 봄날일 때도 있고 열정으로 소리치는 여름일 때도 있다. 때로는 외로움과 쓸쓸히 흩어지는 낙엽이 겹치는 가을날을 지날 때도 있고 온 세상이 하나의 표정을 짓는 겨울날을 지날 때도 있다. 그러나 인생의 계절은 바뀌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 두려워할 때 선한 목자께서 안으시고 영의 눈으로 아버지의 선한 길 바라보게 하신다. 육체가 잠자는 그 날까지 언제나 주 음성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 날 버려도 하나님은 끝까지 날 위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삶에 지쳐 쓰러져있을 때 내게 다가오셔서 날 일으켜주시며 세상의 먼지로 어두워진 눈을 만지시고 소망의 빛 보게 하신다.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구름기둥, 불기둥 날 인도하신다. 악한 사단 날 괴롭힐 때 두 팔 벌려 날 안아주시고 말씀의 물맷돌로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 또 감사다.   세상의 파도에서 인생의 노를 젓다 지쳐있는 영혼을 위로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이에 온 누리에 꽃씨를 퍼트리는 민들레처럼 영혼의 입을 열어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혼의 시를 쓰기를 원한다. /임마누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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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6
  • [목회자 칼럼] 국가의 책무
      국민의 4대 의무가 있듯이 국가 혹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책무가 있다. 국민의 4대 의무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납세, 국방, 교육, 근로의 의무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혹은 정부도 마땅히 국민을 위하여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첫째는 안보이다. 국민들이 외국의 침략을 받아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 우리나라는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반만년 역사에 대략 구백 삼십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대략 5년 꼴로 전쟁이 있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임시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완벽하게 해봐야 전쟁 터지면 헛것이 되기 때문에 집도 임시로 짓고 무슨 일을 할 때에 대충대충 임시로 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6.25전쟁 이후로는 어찌 전쟁이 없었을까? 그것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문정부는 미국과는 관계를 깨고 친북, 친중을 더 중요시하여 대통령이 중국에 가서 중국몽에 함께 하겠다고 하고 중국과는 공동운명체라고 하니 미국에서 볼 때 좋게 생각을 하겠는가? 반미 친중으로 기울어지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매우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우리나라에 투자하는 것은 최강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안보를 튼튼히 하려면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경제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는 말이 있듯이 국민이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때부터 삼대를 내려오면서 모든 인민이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 살고 고기국에 쌀밥을 먹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의식주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탈북민이 날로 늘어만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문정부가 들어선 후로 경제가 매우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소득주도 성장이니 주 52시간 근무라든지 그리고 시간당 근로수당을 갑자기 대폭 인상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친 노조를 하고 경영인들의 주장을 묵살함으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폐업하고 빈 가게가 늘어만 가고 있다. 이민자는 급증하고 기업들도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외국으로 떠나고 정부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세금으로 몇 십만 원짜리 일자리를 만들어 놓고 일자리가 어느 때보다 늘어났다고 자화자찬을 하고 있습니다. 문정부는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인정하고 궤도 수정을 해야 하는데 그냥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고 있으니 좋아질 희망이 없는 것이다.   셋째로 바른 교육을 해야 한다. 역사도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된다. 김일성과 북한은 미화시키고 대한민국은 형편없는 나라로 왜곡된 교육을 하면 안 됩니다.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에 하기 싫은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을 부모가 하라고 강요하면 국가인권위원회에 고발하라고 양식과 전화번호까지 나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교육 할 때에 동성애도 정상이고 여러 가지 성에 대하여 비정상을 정상으로 교육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성 정체성을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어서 남자인데 나는 오늘부터 여자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여자로 인정해야 하며 여성도 마찬가지로 나는 오늘부터 남성으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대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교육을 하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겠는가? 성은 창조주께서 남녀로 태어나게 하셨는데 완전히 창조주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희락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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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1
  • [건강교실] 레포츠와 관절염(1)
      최근 여가 스포츠 일환의 하나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 스포츠 중 하나인 야구를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어깨관절의 통증으로 정형외과를 방문하는 환자 또한 증가하고 있다.   야구는 투구, 송구, 구보, 슬라이딩 그리고 타격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으로 야구의 이 모든 동작에서 신체의 각 부분이 손상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동작 중에서 손상의 가장 많은 원인이 되는 것은 투구동작이며 투구로 인한 손상은 어깨, 팔꿈치 및 손목 관절 모두에서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반복적인 투구 동작에 의한 스트레스는 어깨 관절의 회전근개와 이두근의 염증 반응과 파열을 초래하며 관과 순도 이와 같은 자극에 노출되어 파열을 초래할 수 있다. 근육이나 연부 조직의 불균형으로 어깨 관절의 탈구나 상완골의 골절 또한 발생할 수 있다.   SLAP 병변은 주 증세는 통증으로 대부분 어깨를 벌리거나 바깥쪽으로 돌리는 동작 시 어깨에서 소리가 나며 심한 통증을 호소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관절이 느슨한 것 같은 증상을 호소하기도 하다. 염발음이나 통증 및 불안정감 등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질환으로 질병 특유의 증상이 없으며 이학적 소견에서도 특이한 소견이 없어 진단이 어려운 손상이다. SLAP 병변을 진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학적 검사와 방사선학적 검사를 통해 감별이 필요하며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관절 조영 자기 공명 영상 검사가 많이 이용된다.   어깨를 벌리고 앞으로 굽힌 자세에서 상지에 압박 손상이 가해질 때 상완골두가 상완 이두건-관절와 순 복합체에 직접 압박력을 주어 발생하거나 이두근의 견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으며 갑작스럽게 어깨관절을 벌리거나 바깥쪽으로 돌리는 동작 또는 반복적인 상완 이두 장건의 부하로 인해 상완 이두 건-관절와 순 복합체가 벗겨져 파열이 일어날 수 있다. 투구 동작 중 회전근개가 부착된 대결절과 이두 장건이 부착된 관절와순 사이의 관절 내 충돌 증후군에 의해 발생하기도 한다.   SLAP 병변이 있는 경우 먼저 재활 치료를 시도하게 되며 재활 치료는 스트레칭과 더불어 탄력이 있는 고무 밴드나 가벼운 아령을 이용하여 어깨관절의 근력을 키우는 운동을 시행하게 된다. 적절한 재활 치료에도 통증이 지속하는 경우에 수술적 치료가 필요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관절경으로 파열된 관절와순을 봉합하여 치료를 시행하게 된다.   관절경 수술은 진단과 치료가 동시에 가능하며 어깨관절의 동반된 회전근개 파열이나 충돌 증후군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다. 또한 회복기간이 짧으며 국소마취 하에 진행이 가능하여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투구 중 상완골 골절은 부조화된 근육의 갑작스런 수축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특징적으로 환자들은 공을 던지던 중 팔에서 뚝 소리가 난 뒤 팔을 전혀 쓸 수 없었다고 하며 잠시 뒤 심한 통증으로 인해 응급실을 방문하게 된다.   큰 외부적 충격이 없이 투구 동작만으로도 골절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부조화된 근육의 수축으로 인한 강력한 염전력이 상완골의 간부에 작용하여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직업 선수들에서는 체계화된 투구 동작과 운동 방법으로 인하여 골절이 드문 편이나 여가 활동 중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한양대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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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0
  • [향유옥합] 수치심의 언덕을 넘어 희망으로
      상담실을 찾은 20대 여성 야생화는 “저는 자존감이 낮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저는 어린시절 엄마의 죽음, 왕따, 친구관계에서의 부적응 가족관계에서 소외, 7살 때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초등시절 2학년 때 친구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큰 문제는 없었는데 4학년 때 학원에 가면 친구가 다른 한 명과 합세하여 나를 괴롭혔습니다. 변기통에 빠지라고 하고 죽으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라고 나지막이 말하면서 울먹거렸다. 그 당시 영이란 친구는 학원에서 나를 심하게 괴롭혔는데 집에 갈 때는 꼭 같이 가서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는 구강성교를 시키는 듯 이상행동을 보였으며 뿌리치지 못한 잘못도 있지만, 칼을 들고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친구의 협박이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거의 3달 동안을 친구에 이끌려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알아서 마무리되었지만 제 상처를 외면하는 아빠를 굉장히 많이 원망하였다고 고백했다.   야생화는 아직도 트라우마가 있어서 친구가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한다든가 하면 더 깊은 상처를 받고 내면세계에서 폭풍처럼 분노가 일어난다고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싫은데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야생화는 자신을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고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다 가짜라고 말한다. 또다시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할 방법은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외부와 차단하고 방어벽을 치고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어벽이 야생화에게는 정작 필요한 사랑과 애정, 관심까지도 막아버린다.   야생화의 내면화된 깊은 수치심은 보통 자신을 숨기려고 하고 멀리하고자 한다. “난 단지 구멍을 파서 그 안에 꼭 숨어버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듯이 영어의 ’Shame‘은 ’숨다‘라는 뜻을 지닌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처럼 창피함을 느끼며 숨고 싶다. 수치심으로 인한 정서는 속상하고 창피해서 누구와도 눈을 쳐다볼 수 없다. 몸의 반응은 두려운 감각으로 현기증이 나며 어지럽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자기 비난과 수치심은 서로 연관이 있어서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친구의 학대나 비난을 나로부터 분리하듯이 외재화하지 못하고 자신이 ’나쁜 존재‘,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틀에서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이제는 자기 공감과 수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얼마나 너 힘들어했니” “얼마나 슬프고 속상하고 화가 나고 역겨웠니”라며 공감해주므로 자신에 대한 변화하려는 동기와 의지를 심어준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열등감을 내려놓도록 한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과 자연스럽게 좋거나 나쁘거나, 잘나거나 못나는 등 이분법적인 사고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인 나를 인정하고 받아 줄 거라는 긍정적인 사고로 접한다. “넌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며 비난하고 심판하고 수치심을 주는 사람들은 멀리하고 나의 모습 그대로를 좋아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더 가까이 지내고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말이나 지지를 보내면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수치심의 언덕을 넘어서 높은 자존감의 희망으로 갈 수 있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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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성경의 죽음 7] 이민자 요셉의 죽음
      원수 용서통해 이웃사랑 실천하는 기독교인의 삶 절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요셉과 같은 유언 남길 의무가 존재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이후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시대는 요셉의 죽음으로 마감하게 된다. 야곱의 죽음에 이어 요셉도 곧 아버지의 뒤를 따라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창세기 5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읽게 된다. 창세기 저자는 1-14절에서 야곱의 장례식을 소개하고, 15~21절에는 요셉이 자신의 형들을 위로하는 것을 적었다. 22~26절은 이민자였던 요셉의 죽음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17세에 형들의 시기에 애굽으로 팔려가 110세에 임종하였으니 실로 90여 년의 긴 세월을 이민자로 살았던 요셉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죽었다. 창세기 50장은 요셉이 얼마나 부친을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아버지 야곱을 위해 무려 70일간을 애곡하였다(창세기 50장 3절). 곡하는 기간이 지난 후 야곱의 유언을 따라 애굽에 많은 매장지를 두고 가나안 땅에 매장하게 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할 때 가족뿐 아니라 애굽의 많은 사람들도 동행하였다. 그것은 요셉의 지위뿐 아니라 그가 애굽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가나안 매장지에서도 그는 7일 동안 애곡하였다(창세기 50장 10절).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그 동네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장미’, ‘가시’라는 뜻인데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정성껏 고향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지낸 후 돌아왔다(창세기 50장 13절). 끝까지 부친을 위한 아들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효도의 인물이다.   그는 형제들에게도 호의를 베풀고 죽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사후에 혹시 동생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웠다(창세기 50장 15절).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 스스로 동생 요셉에게 악을 행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참았다가 이제 돌아가신 후에 복수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형들은 요셉을 찾아와 용서를 구한다(창세기 50장 17절). 요셉은 형들의 이 말을 듣고 울었다. 게다가 형들은 요셉에게 자신들을 종처럼 부려달라고 요청한다(창세기 50장 18절).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한다(창세기 50장 20절). 도리어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자신이 애굽에까지 와서 이민자로 살게 된 것은 형들의 박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들을 살리시기 위한 섭리로 바라본다. 그래서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그는 성경적인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미래를 믿음으로 예언하였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했다(창세기 50장 24절). 그는 자신의 해골이라도 가지고 가나안에 가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또한 짧은 유언이지만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리라. 하나님이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실 것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유언한 것이다. 무릇 신앙인들은 국내에서 살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이민자로 살든지 요셉과 같은 죽음을 살아야 한다.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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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여호와의 그날 (1)
      열국의 전쟁 스가랴 14장 1절 - 8절    1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4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6그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7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 세상 종말의 역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인봉된 예언의 계시가 두렵고도 장엄한 한편의 드라마로 영광의 주님의 재림을 고(告)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날을 가리켜 성경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시간 여호와의 그날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그 날에 지상 최후의 전쟁이 있습니다.(1-2절)   1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1) 이 전쟁은 하나님이 열국을 모아 공격 합니다. 본문 2절에 “내가 열국을 모아 싸우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내가 .... 싸운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 하셔서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열국을 모아서 공격합니다. 이 열국은 사탄의 정체요, 교회와 성도를 대적하는 정체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열국을 동원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는 지상 최후의 대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이래로 전쟁을 통해서 선민에게는 징치의 수단으로 악인에게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2)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대환난을 당합니다.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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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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