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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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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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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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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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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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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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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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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5] 그리스도인의 영성예절의 영성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고전14:3 아니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품위있고 질서있는 삶’고전14:40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 이 사랑의 생명은 고린도전서에 이름과 같이 선한 열매를 풍성히 나타내는 능력이다. 그 중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랑은 예절을 알게 한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는 말이며 이것은 곧 혼란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의 생명이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예절을 잃지 않게 한다.    이러한 질서에는 말의 예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부터 예의 있는 말을 배워야 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의 예절을 통해 가정에 천국의 질서를 세워야한다. 부부의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부의 도리가 된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해야한다. 이러한 가정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예의 바른 가정이 되게한다.    행동과 태도와 의복에도 마땅한 예절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의복을 가정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향한 예의이다. 특별히 문둥병에 걸린 옷과 같은 형태나 남녀 구분이 없는 옷을 피해야한다.신22:5 물건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에는 던지지 말아야한다. 쟁반에 받히거나 공손히 손으로 전달해야한다. 칼이나 가위 등은 위험한 부분을 돌려서 전달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이러한 예의를 잘 행하여 평안한 가정을 세워야한다. 가장 친밀한 가족 간에 마땅한 예절이 실종되면 악한 본능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예절에는 음성의 예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말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음성에 미움과 사랑이 드러난다. 악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합당한 음성의 예절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말에는 부드러운 어조가 필요하다.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된 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거친 어조와 교만한 억양도 예의가 없다. 자신을 동정하는 억양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억양도 합당한 표현이 되기 어렵다. 자신의 희생을 나타내는 표현도 합당하지 않다. 오직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무례하지 않은 언어의 영성을 갖춘 예절을 필요로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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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0
  • [향유옥합] 마음화장
    마음화장   김영임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는 화장하기를 멈추었다. 아이가 엄마를 맘껏 만지게 해 주고 싶었고, 아이와 맘껏 얼굴을 비비고 싶어서였다.  첫째 아이 하늘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며칠 전, 나는 화장품 세트를 새로 구입했다. 첫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라 드디어 나도 학부모가 된다는 기대와 설렘이 마음에 가득했다.  주변에 초등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킨 선배 엄마들 얘기를 들으니 같은 반 학부모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반 모임'을 한다고 했다.  결혼과 출산이 30대 초에 시작된 터라 마흔 살 가까운 나이에 처음 학부모가 되는 나로서는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분위기는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하늘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화장을 하고 최대한 단정하게 옷을 입었다.  거울을 보고 또 보며 학교를 향해 출발하려는데 여덟 살 아들 하늘이가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엄마! 얼굴이 왜 그래?" 임신, 출산, 육아를 계속하며 화장을 한 적이 몇 번이 안되다 보니 하늘이는 화장한 엄마 얼굴이 너무 낯설었나보다.   사실 화장한 얼굴이 어색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나 딴엔 처음 학부모가 된다는 설렘과 기대로 나름 심혈을 기울여 찍어 바르고  꾸민다고 꾸몄건만... 이 충격적인 말을 듣고도 나는 간단히 화장을 지우려 했지만  시간이 없어 바로 입학식에 참석했다.  입학식 내내 다시는 화장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후에 준비한 화장품세트는 언니에게 무료나눔을 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화장을 지우며, 이제는 '얼굴화장' 대신 ‘마음화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사회생활에서 여자가 화장을 하는 건 ‘기본예의’라고 말한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예쁜 옷을 입고 말도 행동도 품위 있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음 안에 미운 생각과  미운 말로 가득 차 다른 사람의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면 참 안타까운 일 아닌가. 그날 이후로 나는 접착식 거울을 사서 내가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씽크대 앞에 붙여두었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도, 과일을 씻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곤 한다.  환하게 웃는 연습도 해보고, 재밌는 표정도 지어보고, 가장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 뭘까 생각도 해봤다. 무엇보다 씽크대 앞에 붙여둔 거울을 보며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매일 반복되는 분주한 일상 속에  나의 표정이 어느새 굳어져 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나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가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차 한잔하고 싶다며 별안간 찾아온 손님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함으로,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채워가야겠다. 쉽게 드러나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움이 더해가는,  '마음화장'을 해야겠다.                                                                                                                                                                                                     / 서예가, 춘천벧엘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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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변두리 소수자13] 억울한 빛과 소금
      어느 사회에서나 타 인종과 타 문화권의 소수자에게 차별적인 마음과 우월적인 자세를 보이는 개인들이 있다. 그러나 친절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사회를 좋게 하려는 좋은 분들도 많이 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그들은 사회에서 빛으로, 살맛 없는 세상에서 ‘맛소금’이 되고자 힘을 내는 이들이다.   이 세상에서 나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 좋은 시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역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공존하는 사회에서 누구든지 그 마음의 관리 상태에 따라 ‘갑질’ 아니면 ‘을질’을 저지르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갑질이나 차별적 경험, 혹은 나의 오해와 편견을 다스리지 않은 행동은 역차별을 가하는 원인이 된다.   미국 대학원 시절에 한인 학생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한인 학생들로부터 학교의 행정 담당자 한 사람이 유독 한인들을 향해 너무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자세를 보인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과의 면담을 위해 그분의 사무실이 있는 행정 건물에 찾아갔다. 먼저 비서가 나에게, 그를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들은 비서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내가 만나려는 분이 나왔다. 그분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나를 사무실로 정중하게 인도를 하고, 착석을 권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친절한 모습에 나는 내 소개를 우물쭈물하고 앉았다. 그가 내 말을 가만히 듣고는, 고마워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분과 마주앉아 대화하는 동안, 다른 이들에게 들었던 대로, 그 분은 나를 보지 않고, 눈을 감고 말을 하였다. 이는 그의 습관인데, 이를 문제로 말한 학생들은 자신들을 하대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분도 오해를 감내하며 사는 한 사람이었다. 이 경우에 ‘인종 차별을 당했다’라는 ‘마음 상태(State of Mind)’는 ‘피해 의식(Victim Mentality)’이며, 그 대상자는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을 받은 피해자라고 나는 해석된다.   비슷한 다른 경험도 있었다. 캠퍼스 안밖의 기숙사들과 아파트의 제공은 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한 혜택이었다. 그런데 매년 졸업 때가 되면, 졸업하는 한인 학생들에게 같은 이슈가 반복 되었다. 학교의 건물을 배정하고 관리하는 사무실에서 한인 학생들에게 불공정한 행정 집행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무실을 찾아가, 그 담당자와 이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나비넥타이를 한 그 분은 감정을 잘 조절하며 점잖게 설명을 해 주었다.   학교는 신입생과 졸업생 숫자를 계산하여 모집을 하고, 기숙사와 아파트도 그에 따라 배정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3년의 석사 과정이 끝난 학생의 아파트는 같은 과정의 신입생 가정을 위해 배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마치고 1년의 다른 과정을 하려는 한인 학생들이 통보를 받고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현상을 인종 차별처럼 이슈화 하니 화가 난다는 것이다. 오해도 아니었고, 오히려 역차별과 민폐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찾아갔던 나는 미안하기까지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그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몇 학생이 ‘그래도 인종 차별이 맞다’고 하며, 나에게 ‘무슨 특혜를 받았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갑’은 가해자로, ‘을’은 피해자로 공식화 되는 경우를 의외로 많이 본다. ‘약자는 희생자’라는 인식은 오히려 무능한 가해자를 만들 수 있다. 고마운 혜택이 악용되거나, 책임에 충실한 사람들이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혜택을 받은 피선교인이 선교사를 고소하여 이윤을 취하는 극단적인 사건들도 있다. 때문에 선교사들이 사랑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계속 보게 된다면, 누구나 경계해야 하는 사안이 되지 않겠는가? ‘이래도 괜찮을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며 선행의 용기에 영향을 받는다. 마지막 때에 사랑이 식어지는 현상들은 사랑의 용기를 주저하게 하는 그런 망설임들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 그저 있으니, 더욱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나 보다. 억울하게 오해를 받으면서, 역차별을 당하면서, 그래도 소명을 다하는 이들이 빛과 소금인 것 같다. /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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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에레모스 영성 3] 광야의 의미
      시베리아 하면 하얀 설원이 떠오르고, 몽골 하면 푸른 초원이 연상되며, 스위스 하면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가 그려진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둘러싸인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북쪽 지방의 헤르몬 산지와 갈릴리 호수가 있기는 해도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이어지는 유대 산악지대는 일컬어서 광야로 불려진다.    광야는 연단과 시험의 현장이다. 용광로에서 달구어진 쇠붙이가 풀무질과 담금질을 거쳐 강한 철근으로 만들어지듯이 사람에게도 때때로 그러한 과정이 요구된다. 유대 민족이 선택의 집단이 되고 택하신 분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그러한 집단 훈련 장소로서의 광야가 필요하였으며, 세례요한이 본격적으로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기 전에도 광야의 삶이 요구 되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 기도, 그 안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광야 생활이 농축 되어있으며 세례 요한의 오랜 광야 수도 기간이 함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품고 세례자 요한을 품고 인류역사와 더불어 하늘의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쳐야 하는 시험대 위에 그분 자신도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인간 조건, 인생 여정, 삶의 애환을 모두 한 몸에 쓸어 담으셨다. 곧 체화, 체득, 체휼의 영성을 쌓아갔던 것이다.   겹겹 첩첩의 토양과 토질 그리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대하며 이런 것이 마치 우리네 삶의 인생여정이 아닐까 하는 상념을 잠시나마 가져보았다. 지난여름 방문했던 유대 광야에서.  /가락재 영성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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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건강교실] 신장 이식 (하)
      신장이식을 받은 환자의 예후는 어떨까?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 매년 보고되고 있는 통계에 따르면, 국내신장이식을 받은 환자의 생존율은 신장이식 기증자와의 관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혈연이나 비혈연간의 생체 이식에서는 5년 이상 환자 생존율이 약 96.01%이고, 뇌사자 신장이식에서는 약 90.27%로 보고되고 있다.   ‘신장이식 환자의 이식신 생존율’은 이식을 한 신장의 정상기능 여부에 따른 확률을 가리킨다. 이 역시 신장이식 기증자와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년에 약 85.4%로, 이는 미국 장기이식관리센터(UNOS)가 발표한 이식신 생존율인 1년에 98.5%, 5년에 90%, 10년에 77.1%과 대등한 수준이다.   또한 이식 신장의 거부반응으로 기능을 잃었더라도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며, 다시 투석을 하거나 신장이식을 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신장이식을 받은 후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장 이식은 수술만으로 치료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장이식을 받고 나면 투석으로부터 해방되지만, 수술 이후에 조심하시고 신경써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수술 후 회복기에는 몸의 변화에 대해서 적응하고 안정화 되는 기간이 필요하다. 수술 후 영양 관리도 중요하다. 적절한 열량과 단백질의 공급, 충분한 수분섭취를 통한 안정된 체중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식수술 후에는 이식된 신장이 우리 몸의 면역체계로부터 공격받지 않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감염에 특히 취약한 시기들을 거칠 수밖에 없다. 초기에 예방적 항생제, 항바이러스 치료를 잘 받더라도 거대세포바이러스나 BK 바이러스처럼, 감염이 빈번히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손 씻기, 가글, 마스크 착용 등 위생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익히지 않은 해산물이나 고기를 주의해야 하며, 예방접종은 의료진과 상의하여 진행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면역억제제를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으며, 정기적으로 외래진료를 받는 것이다. 규칙적인 복용, 즉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용량의 약을 잘 복용해야 하며, 적절한 혈중 농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정기적인 혈액검사를 통해 적정 복용량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이처럼 수술도 중요하나,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한 치료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말기신부전이 진행되어 이에 대한 투석은 노폐물을 제거하는 신장의 기증을 어느정도 대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장이 하는 모든 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는 한계점이 있다. 하지만 신장이식의 경우는 이식된 신장이 기능을 함으로써 평균수명의 연장, 투석과 신부전의 진행으로 인한 다양한 합병증의 진행을 막는다. 또 투석으로 인한 시간, 비용, 불편함이 해소되는 부분이 있어 삶의 질이 향상되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금기사항이 없는 경우에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라고 할 수 있기에, 신장이식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고려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병원 간이식팀은 생체 간이식뿐만 아니라 응급으로 진행되는 뇌사 간이식 또한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의료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또한, 기증자 간 절제 수술을 100% 복강경으로 시행하고 있다. /한양대병원 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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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6)
    부모로부터 언어적 학대나 정서적 방임을 당하거나, 무관심도 충격적 경험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모두 충격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군대에서 선임이나 동료에게 당하는 구타나 성폭력 등 모든 가혹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충격적 경험이나 반복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 외상이 되어 인지적, 감정적 및 사회적응을 잘하지 못하도록 한다. 정신적 외상은 환경이나 대인관계, 그리고 정신건강의 취약성을 지니게 함으로써 마침내는 임상적인 증상이나 장애(병)로도 얼마든지 발전되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의 근원지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부모의 언어폭력이나 학대, 그리고 정서적 방임들이 애착 외상의 기본이 된다. 그리고 학교폭력이나 왕따, 집단따돌림은 정신적 외상의 소인이 되고 이후 충격적 경험을 하게 되면 자아가 무너져 여러가지 정신병리를 야기시키게 된다.   어릴 때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실패하면 인간관계나 사회적 부적응, 그리고 마침내 정신건강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취약성의 기질을 만들 수 있다./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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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2
  • [건강교실] 신장 이식 (상)
      신장 이식은 말기신부전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사구체 여과율이 15~29%로 감소되는 4단계부터는 신장내과 의사의 진료를 받고 투석 혹은 이식과 같은 신장 대체요법에 대해 준비 및 시작을 고려해야한다. 하지만 투석을 시행하더라도 점차적으로 말기신부전은 진행이 되고, 이로 인한 심혈관 병증과 같은 여러 합병증들이 발생하여 사망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신장 이식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공여자는 수혜자와 어떤 조건이 맞아야 할까? 이식을 고려하게 되면, 우선 신장 내과나 이식 외과 진료 후 장기이식센터의 전문 간호사에게 상담을 받게 된다. 공여자가 있는 경우 생체 신장이식을 시행하게 된다. 이 경우 공여자, 수혜자가 충분히 결정할 시간을 준다. 이식 진행을 결정하게 되면 기증자, 수혜자 각각 건강상태에 대한 검사를 시행한다. 또한 사회복지사가 이식대상자와 기증자 간의 서류심사 및 상담을 통해 이식의 순수성에 대한 상담 평가 후 공여자가 이식이 가능하다. 또, 수혜자가 이식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의 승인 후 수술을 진행한다.   우선 공여자와 수혜자 간의 면역학적 일치가 어느정도 되는지 검사를 시행하고, 전신건강상태에 대해 평가한다. 신장 기증자는 만 16세~65세 사이, 신체검사 상 건강한 자로, 신장기증을 자의로 원해야만 한다. 또한 검사를 통해 신장이 해부학적 및 기능적으로 정상인 것이 확인되어야 하며, 당뇨병, 심한 고혈압, 간염, 악성 종양, 정신과적 문제가 없어야 한다. 최근에는 신장기증을 위하여 혈액형이 일치할 필요는 없게 됐나, 조직 적합성 교차 반응 검사에서는 거부 반응이 없어야 한다.   적절한 이식 공여자가 없는 경우 투석을 시작한 후,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등록하여 뇌사공여자이식 즉 뇌사자 이식을 기다리게 된다. 가족이나 친척 등이 기증하는 ‘생체 신장이식’도 흔히 이루어지고 있다. 장 한쪽을 기증한 공여자의 경우 일상 생활에 문제는 없을까? 신장 한쪽을 기증한 공여자의 경우에는 한쪽 신장을 기증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약 70-80%까지 기능이 회복된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말기 콩팥질환으로 진행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고 수술 후 기대수명 또한 일반인보다 짧지 않다. 대부분의 기증자의 경우 기증을 하더라도 안전하다.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신기능 및 전신상태에 대한 추적관찰은 필요하다.   신장이식 수술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선 전신마취를 시행 후, 피부는 서혜부에서 우측이나 좌측 하복부를 따라 20∼25㎝ 정도 비스듬히 절제하게 된다. 신장 이식할 위치로 가장 좋은 곳은 장골와 부위이다. 양측 하복부의 서혜부와 방광이 가까워서 이식신장의 동정맥과 요관을 환자의 동정맥과 방광에 연결하기 쉽다.   기증자에서 떼어낸 신장은, 동맥은 동맥끼리, 정맥은 정맥끼리 그리고 요관은 방광에 연결되어 이식된다. 수술은 보통 4시간 가량 소요되나 상황에 따라서 더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환자의 나이나 상황에 따라 적응증이 올 가능성이 높은 경우, 기존의 절개 방법이 아닌 로봇을 이용한 수술도 시행되고 있다. /한양대병원 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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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5)
      현대사회의 문화발달은 가속화 되지만 스트레스는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자고 제도를 만들고 개혁하고 노력하는데도 스트레스나 각종 사고는 정신적 외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눈만 뜨면 수많은 사건과 사고, 질병과 불행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흔들고 예기치 않던 불안과 불안전한 환경으로 정서적 혼란까지 야기시키고 있다.   트라우마는 병명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폭넓게 쓰는 단어이다.   스트레스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그리고 군대 어느 곳에서든 출현되며 보편화되고 이것이 반복되거나 그 외 충격적인 사건들이 가중되면 곧바로 정신적 외상에 노출된다. 이처럼 충격적 경험은 스트레스가 되고 외상이 되는 것이다.   대학에 낙방하는 것도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충격적 경험이 될 수 있다. 폭력을 당하는 것도 무시를 당하는 것도 충격적 경험이 될 수 있다. 직장에서 명퇴되거나 조기 퇴직하는 것도 충격적 경험이며 그 무엇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화재사고, 재해나 재난을 당하는 것은 더 충격적 경험이 될 수 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든가 자해나 자살하는 것도 충격적 경험이 될 수 있고, 교통사고나 사기 당하는 것도 충격적 경험이 될 수 있다./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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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 주님은 엔게디 포도원의 캠퍼 송이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면 순전한 눈이 되어진다   주님은 내게 영원히 썩지 않는 몰약향이 되신다. 또 온 밤을 이기는 주님의 몰약 주머니가 내게 있도다.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 송이로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한다. 엔게디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던 엔게디 광야에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삼상23:29). 나의 사랑하는 이 예수님이 내게 엔게디 포도원이라는 것은 다윗의 경우와 같이 예수님이 나의 피난처이다. 또 요새요, 요새 교회가 되시는 것을 말한다. 신랑 예수님이 나를 신부 되도록 세우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것이 엔게디 포도원이다.     이는 요한계시록 2장, 3장의 금촛대교회이다. 종말에 그리스도 신부 세우는 금촛대교회이다. 또 주님은 엔게디 포도원의 캠퍼송이라고 했다. 캠퍼송이(고벨화)는 중동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마치 우리나라에 봉숭아꽃과 비슷하다. 캠퍼송이는 꽃잎이 노랑 빨강 흰색이 있다. 그중에 노란색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내게 노란 캠퍼송이와 같이 평화·평강이 되심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그분은 '먼저 지옥 갈 염려가 없이 구원해주신 평강이다. 또한 환란날에 배도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해 주실 평강이 되신다. 흰색 캠퍼송이는 성결·거룩을 상징한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분이므로 내게 흰 캠퍼송이시다. 빨간색 캠퍼송이는 사랑을 상징한다. 마치 홍보석 같다고 말씀했고 주님의 보혈을 쏟으시어 날 사랑하신다. 또 성령을 부어주시되 일곱 영으로까지 충만히 부어주시어 예언의 철장권세도 주신다. 또 순교도 하게 하시니 사랑의 캠퍼송이로다.   1:15 보라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도다. 보라, 너는 어여쁘며 너는 비둘기의 눈을가졌도다. 주님이 성도를 보고 어여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어여쁘게 보신다. 우리 자신은 죄악과 부패성만 나오는 존재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의 마음·생각·성품으로 일치 되어져 가면 주님이 어여쁘게 보시는 것이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시므로 나의 신앙이 자라고, 내 안에 주님이 엔게디 포도원의 캠퍼송이가 되시어 나를 순교케 하신다. 주님이 내게 신랑이 되어지면 주님이 '오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아름답구나' 하시는 것이다. 어여쁜 성도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다는 것은 비둘기의 속성을 통해 영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하신다(마 10:16). 제자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고 양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이리들에게로 보내는 것이다. 보냄받은 제자들이 사명 감당하다가 이리들에 의해 죽임당하지만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키는 것이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사랑하는 어여쁜 자는 비둘기의 눈을 가져서 순결한 신앙 안목으로, 신앙의 절개가 있다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네 눈이 순전하면 네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만일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도 어두워 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면 순전한 눈이 되어진다. 비둘기의 눈을 가지면 예수님의 눈을 가진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되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시기까지 신실하시고 순종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많이 바뀐다. 처음 믿을 때와 중간, 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비둘기 눈을 가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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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성서와 생활 [14] 그리스도인의 영성-생명의 영성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가진 자 마다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만 구원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그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어주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장성한 자의 믿음인 것이다.롬8: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잠19:3.이 생명은 우리 안에 없는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이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믿는 자는 이미 이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 영적이 자녀라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은 우리 육체로부터 오는 사망의 생명과 싸워 이기게 한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될 뿐 만이 아니라 그의 생명도 얻게 하시려는 것을요20:31아는 것이 우리의 완전한 믿음이다. 또한 이 생명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더 큰 구원으로 나아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한다.   생명이 왕노릇하는 권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이시다.약1:12.죄가 주장하지 못하는 생명을 사모하는 자마다 모든 시험을 견디게 된다. 이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므로 주님께서 얻으신 부활의 생명에 이르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난보다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서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어야한다. 참된 생명은 죄가 주장하지 못하는 주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자 마다 계:2:10 생명의 왕노릇 하는 길을 가야한다. 이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참된 생명딤전6:19을 확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마다 생명이 왕노릇하도록 사망과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신과 불안의 육적 생각을 영(말씀)이 주는 확신과 기쁨의 생각을 따라롬8:6생명의 법을 적용하는 길이다. 이러한 신앙의 훈련은 우리의 삶을 보다 힘있고 소망적인 길로 안내하여 생명이 왕노릇하는 영성을 미리 누리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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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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