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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유옥합] '희년'오늘,다시
     이 소영       “오랫동안 꿈을 그리던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13년 전에 처음으로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적어 놓은 글귀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é Gide)가 남긴 명언이다. 그 당시 좋아했던 문구였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났다. 이 글을 페이스북에 처음 남긴 그 날의 나를 기억해 보면, 지금 내가 ‘희년함께’라는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꿈같이 여겨진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적었을까? 그때가 아마 나의 꿈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던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여러 기독교 단체와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성경의 희년 정신을 바탕으로 토지정의를 위한 실천운동을 하고 있는 ‘희년함께’를 만나게 되었다. 사적인 믿음에서 공적인 믿음(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독서 모임에서 내 인생의 책들을 마주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예수원 설립자인 故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와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이었다. 희년 강의가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빠지지 않으려,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트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성경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공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공부하고 훈련하며 배움의 열정과 기쁨이 있던 시절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서 드디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끓어오른다. 지금 세계에는 강한 정신과 고결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있고, 인생에서 피어나는 진선미를 철의 수레바퀴가 깔아뭉개고 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中 -   그 이후로 오랫동안 희년함께 회원의 자리에 머무르다 지난 2022년 2월부터 정식으로 희년함께 실무자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희년함께/희년은행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며 간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2년이지나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13년 전에 처음 참여했던 독서 모임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난 주부터 ‘헨리조지와 함께 기도하기’라는 주제로 희년함께 실무진뿐만 아니라 단체회원들도 함께 《진보와 빈곤》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13년 만에 인생의 책을 다시 만나니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새로움과 깨달음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특별히 “왜 사회가 진보할수록 빈곤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사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그 시대가 지닌 과거 경제사상을 깨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펼쳐가는 헨리조지의 노력에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헨리조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멋진 글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함께 읽고 대화하고 나의 인생 구절을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의 기도가 되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제2의 헨리조지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땀의 가치는 땀 흘린 이에게, 땅의 가치는 모두에게”   올해는 특별히 희년함께가 출범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희년함께가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롭게 그려갈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내가 희년함께에서 일하고 있는 자리는 2년 전 하나님 품으로 떠난 남편이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며 아픈 몸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의 숨이 다할 때까지 희년의 사역을 감당해온 남편의 자리였다. 그리고 내가 남편의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희년함께’는 40년 동안 희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운 숙제들을 잘 감당하며 풀어가고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이끌어주고 배려해주는 헨리조지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 틈에서, 올해부터 새로운 멤버로 합류하게 된 사역팀장과 함께, 단체의 역사를 배우고 책 모임을 하면서 새롭게 알아가며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희년함께의 사역 활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며 공부하는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13년 전 내가 희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주했던 기쁨과 열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놓치지 않으려 노트에 빼곡히 적었던 것처럼, 헨리조지가 가진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희년함께가 땀 흘려 걸어왔던 길을 희년의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려 한다. 천천히 오래 꼭꼭 씹으면서.. / 희년함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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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향유옥합]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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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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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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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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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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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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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하나님의 은혜 통치를 바라자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 생각하게 된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처처에서 전쟁의 소식과 재난으로 인해 많은 고통의 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어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오늘이지만 하나님이 새해를 주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끄시는 놀라운 행위로 여기게 된다.   2024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 통치가 임하기를 소원한다.   먼저,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긍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복 받을 이유나 공로는 없다. 오직 주의 긍휼하심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9:15-18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간절히 바라며 사모하고 있다는 강한 의사 표현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의 심정(신앙)도 바울과 같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긍휼)를 베푸사 모든 것을 허락하실 것을 믿고 바라며, 주실 때 즉시 받아 누리는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새해에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공평한 통치는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만 가능하다. 사람이 세운,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통치는 공평한 통치를 기대할 수 없다.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들어와 살게 될 때 공평한 통치를 받게 된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은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이 나라 민족을 넘어 세계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통치로 인해 공평함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새해에는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바르게 섬기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주 안에 있는 자들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있음을 확실히 가르쳐주고 있다. 이처럼 2024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공평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바른 섬김이 있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목사·서울한영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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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건강교실] 눈 건강을 지키는 법 (하)
      또한 햇빛이 강한 날 외출을 하는 경우에는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 좋다. 자외선은 백내장 외에도 흰자위에서 검은 동자쪽으로 섬유혈관조직이 증식되어 침범하는, 익상편이라고 하는 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자외선은 망막의 퇴행성 질환인 황반 변성을 유발하는 인자로 알려져 있다. 눈의 여러 조직에 해를 끼치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햇빛이 강한 날 장시간 외출을 해야 하는 경우에 모자와 선글라스 착용이 권고된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해도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태양 광선에 완전히 노출되면 망막 중 가장 민감한 황반 부분이 손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 건강을 위한 음식 섭취에 대해 알아보자. 전반적으로 건강에 유익하고 영양적으로 잘 균형 잡힌 식단은 눈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비타민C와 E, 루테인, 제아잔틴, 오메가3 지방산 등은 눈을 건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분이다. 이런 영양소는 특히 황반 변성으로 인한 시력감퇴를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망막 변성 질환은 밤눈이 어두운 야맹증 증상으로 나타나는데 비타민A는 이 병의 진행을 늦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메가3 지방산은 안구 건조증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도 알려져 있다. 이는 연어나 정어리와 같은 생선에 들어있는 성분다.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오메가3 영양제로 대신할 수 있다.   화학 제품이나 전동 공구를 사용하여 일하는 경우, 화학 제품이 눈에 들어가서 화상을 입을 수 있고, 파편이 눈으로 튀어 안구를 관통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용접할 때 나오는 빛에 의해서도 눈의 표면인 각막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운동 중에 공 등에 의해 눈에 외상을 입을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안구 내에 출혈이나 망막 손상, 망막 박리 등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눈에 위해 요소가 있는 작업이나 운동 시엔 반드시 고글이나 보호 장구를 착용하여 외상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눈 건강을 위해 생활속에서 유의할 사항들이 있다. △강한 직사광선을 피할 것 △어두운 환경에서 고개를 숙여서 스마트폰 등 뭔가를 보는 자세는 안압을 급격히 올리는 급성 폐쇄각 녹내장이 잘 발생할 수 있어 피할 것 △눈을 너무 자주 비비지 않을 것 △눈이 불편하다고 수돗물로 씻지 않고, 인공 눈물을 점안하는 것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는 주기적으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것 등이다.   특히 ‘찬바람 불면 시리고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눈물은 눈을 촉촉하게 유지하고 눈물의 분비가 줄어들거나 눈물이 잘 증발하는 상황이 되면 눈 표면의 수분층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눈물 흘림 혹은 안구 건조증 증상이 심하거나 지속되는 경우, 안과를 찾아 전문의의 검진을 받고 이에 따른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찬 바람이 불고 건조한 겨울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눈 건강을 위해 가습기를 틀어 실내 습도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히터나 난방기기의 바람이 눈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한다. 겨울철 스포츠를 즐길 때는 자외선 차단 고글, 선글라스 등으로 눈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한파가 심하고 바람이 강한 날 외출해야할 때에는 보안경을 착용해 자극 증상을 일으키는 찬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해 주는 것이 좋다. /한양대병원 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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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향유옥합] 하나님의 장막
      새로운 2024년이 밝아왔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한해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신앙 안에 있는 크리스천들조차도 동일한 하나님의 장막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라고 무조건 모두 ‘하나님의 장막’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같이, 인간의 행위로 이러한 장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영적권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되고 성취되는 장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되는 장막으로서, 땅에 있는 장막이지만 사탄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로 통치되는 장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막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구축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눈이 열린 자들이 이러한 기도를 해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교회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영적 초신자들에게만 맞는 설교를 하기보다는 수준높은 영성의 설교를 해서 성도들을 바르게 이끌어가고 리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이러한 하나님의 장막을 더욱 더 크게 확장해나갈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게 됩니다. 성도들이 동일한 영적수준에 있지 않고, 각자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재정구축을 목적으로 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추구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목표를 위해 살아갑니다. 특히, 재정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가진 자들이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재정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인데다가, 재정은 많은 편리함을 주기 때문에,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기본적으로 재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주님이 너무 대단하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계속 확장해나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이 주인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게 일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정이 힘이 되고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으로 이 악한 세상에 대해 승리할 것을 다짐하지만, 이는 너무나 연약해보이기만 합니다. 많은 영적공격과 사탄에게 쓰임받는 사람들이 곳곳에 즐비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이 모든 노력이 귀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33:20)     더욱 기도에 매진하며, 주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봅니다!  주께서는 악한 자들의 생각이나 선한 자들의 생각이나, 그 모든 것을 관통하여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히 선한 자도 아니기에, 오직 주님의 온전한 뜻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024년 한해동안 주님의 영광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기 원하나이다!/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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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4
  • 브니엘의 축복
      야곱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장자권을 약속받았고,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내고, 삼촌 집에서 20년 봉사하고, 애급의 총리대신이 된 아들 요셉의 인도로 바로왕 앞에 서매 험악한 나그네 세월 ”130년“을 보내었다고 고백하지만 바로 왕을 축복하였다. (창 47:9~10)  야곱은 장자권의 중요성을 알았고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창25:34) 장자는 집안의 대(代)를 이어가고 가문의 대표가 되어 상속자가 되고 통치권과 축복권을 갖는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야곱은 에서를 위하여 준비한 예물을 미리 보내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얍복강을 건너 먼저 보내고,  그 밤에 야곱은 홀로 남았다. (창32:13~22)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더니 그가 야곱의 허벅지를 치매 뼈가 어긋났으나 축복하기 전까지 절대로 놓아 주지 않았다. 그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바꾸어 주었으며,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하였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인하여 절었더라”(창 32:31) 새날의 해가 돋았고 야곱은 하나님 사랑의 흔적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으나 그 밤에 하나님 응답의 증거를 확실하게 몸에 지니게 되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두 발과 두 손바닥의 못자국을 남기시고, 바울이 다메섹의 흔적을 위해 세번씩 기도 했으나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8~9) 새로운 날을 시작하며  이번 한해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의 표증으로  이런 흔적 하나 지니게 되기를 소망한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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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조희자작가의 「휘장을 가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조희자작가의 「휘장을 가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운명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는 가림 막) 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사건(마27:51)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악으로 가로 막혀서 구원이나 소통이 없었던 것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거기에서 흘리신 보혈을 주 모티브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보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죄로 인한 피가 아니라 이 못난 나의 죄로 인한 피가 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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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2024년 국내외교회의 전망] 기후위기 해결과 평화위한 운동 활발
       WCC, 기후정의 위원회 신설로 신학적·실천적 모색 진행중 세계 각지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교회의 입장 전해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었던 2023년을 보내고 다시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는다. 그러나 발발 2년을 넘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으로 세계는 양분된 가운데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눈물과 아픔의 소식을 들으며 맞는 2024년에 이 땅의 교회는 더 많은 기도와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2022)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와 실행위원회는 2023년 6월 스위스 제네바, 2023년 11월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모여 구체적인 정책과 조직 구성을 결정하였다. 두 회의의 논의를 기반으로 2024년에 세계교회가 기도하고 소망하는 방향을 공유한다. 한국교회가 같은 믿음과 소망으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교회    2022년 11차 총회에서 제안되어 2023년 6월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신설된 “기후정의와 지속가능한 발전 위원회”(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Climate Justice and Sustainable Development)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정의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교회의 대응을 신학적, 실천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성공회 대주교인 훌리오 머레이(Julio E. Murray) 위원장과 회원교회에서 추천한 34명의 위원들로 조직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역사에서 신앙과 직제위원회나 삶과 봉사위원회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기후정의와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의 신설은 세계교회가 기후위기 시대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새해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이 위원회는 세계교회는 기후위기를 하나님의 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창조세계를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교회의 사명과 실천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 위원회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명칭을 정했고, 관련 단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또한 2023년 11월 열린 유엔 기후위기협약당사국회의(COP28)에 참가한 정부 대표들에게 화석연료 사용과 그로 인한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촉구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은 전 인류가 처한 기후위기를 창조세계의 위기로 받아들이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것이다.   폭력에 반대하는 교회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인리히 스트롬 세계교회협의회 의장은 실행위원회에서 이러한 전쟁의 결과를 지적하였다. 그는 “지구적인 경제위기와 불의,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인류를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나타나는 극심한 양극화”라고 지적하였다. 갈등하고 대립하는 진영의 어느 한 쪽에 서게 될 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교회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평화를 외치고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한 걸음 더 나가 폭력에 반대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2023년 6월,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는 네 개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성명서”를 비롯하여 “유엔 인권선언 75주년 성명서”, “인공지능 개발 규제를 위한 성명서”, “필리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성명서”이다. 인공지능 개발 규제에 관한 성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 모두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교회의 반대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같은 해 11월, 실행위원회 역시 네 개의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하여”, “나이지리아, 아프리카 지역 상황에 대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결과에 대하여”, “기후정의를 위한 COP28 책임에 대하여”이다. 성명서들은 현재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보여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할 것”과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동역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정의와 평화,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다. 성명서들의 주제를 단순하게 평화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동적으로 들린다. 이제 교회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개인 간의 폭력도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이지만 국가 차원의 폭력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묵과할 수 없는 불의이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에서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약자들을 지키는 길은 구호와 치료를 넘어 폭력의 발생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넘어 거부하고 파괴하는 상황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시 정의와 화해, 일치의 순례로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소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는 실행위원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호소하였다. “세상의 모든 격동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낙담하고 소망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람과 피조물들에게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라마에서 통곡하는 라헬에게 다음과 같이 소망을 전했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17).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기대와 소망보다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새해를 맞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소망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정의를 공포하고, 화해와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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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변두리 소수자11] 폭탄과 씨앗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이 약 5-6%가 된 때부터, 나는 한국사회 이주민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1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최근 100여일동안 그들을 위한 가을학기 강의들을 진행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늘어나고 있는 이민자들의 마음이 건강한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민자와 소수자의 경험과 교육, 혜택을 나누고자 한 나의 시도가 적절했음을 다시 확신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2023년도의 활동평가와 2024년도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개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위해 공부하며, 필요를 예비하려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전의 선교사역을 할 때처럼 후원과 지원이 없는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하나님 나라에, 한국에, 그리고 이민 소수자들에게도 중요한 일로 나는 믿는다. 특히 이민 생활과 더불어, 사역에서 유별났던 아픔, 기쁨으로 얻은 경험들과 배움들이 나만의 고유한 재료인 듯하다.   지난 학기동안 여러 민족을 방문하고 강의를 하면서, 개인적인 부족함과 안타까운 현상들, 그리고 아쉬운 상황들을 실감했다. 우선, 개인적으로 전문적 지식의 한계가 사역에 대한 갈망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 ‘블루오션’이라고 볼만한 새로운 분야에 충분한 자료가 아직 없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한국은 오랜 동안 단일문화(monoculturalism)에 익숙해 있었다. 차별과 배제(differential exclusion)는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동화(assimilation)로의 과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의 독일과 일본이 그랬듯이 이민자의 영주를 막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자연스러웠던 사회가 한국이었다. 다수자와 합류하지 않거나, 대중 유행 기류에 편승하지 않거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면 왕따가 되거나, 유별난 입장이 되던 사회이다.   가끔은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결국 좋은 시민이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류의 매력이 문화화(acculturation)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주자가 자신들의 민족성과 정체성 대신 한국인으로 동화(assimilation) 되거나, 한국의 제도와 시민화(incorporation)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정치인들은 한류에 대한 자부심은 인지하겠지만, 한류 현상이 정치 수준과 상관없는 젊은 세대의 세계관과 시민의식 때문임을 모르는 것 같다. 높은 국민 수준과 새 세대의 의식이 미래 한국의 준비된 터전이다. 이민에 관계된 입법과 행정, 그리고, 집행이 모두 엇박자인 현실을 당국자들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부는 인권과 너그러운 포용 정책으로 함께 잘 살아가는 사회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민 정책을 주도하는 목적으로 연구된 계획이기 보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상황들에 대응하는 정책들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국내의 높은 임금 때문에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유입된 외국인들에게도 국내인과 같은 임금을 지불하자는 ‘인권’ 주장은, 해결하려던 문제의 본질과 이치를 망각한 것과 같다. 그들이 내국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다음 단계의 요구와 함께 불만을 마음에 키우지 않겠는가?   이주자의 건강한 마음에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건전한 시작점이 갖춰진다. 개인의 정체성 정립, 그 정서의 조절, 즉, ‘혼의 자리 바로 매김’이 절실히 필요하다. 개인들과 가족, 그리고, 한국 국민들과의 관계에서 싹트고, 자라고 있는 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긍정적인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폭탄이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99% 가량을 투자하고 있는 언어와 문화, 교육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타민족 이주자들에게 복지 혜택만 많이 베풀어 주면, 좋은 시민으로 동화 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유럽의 각국들이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자인했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영국은 서구적 가치를 거부하는 민족적 혹은 종교적 소수 집단에 대해 불접촉 관용정책을 써왔지만 이 정책은 실패했다”고 했다. 또한 메르켈 독일 총리는 “’우리는 단순히 같이 살며, 서로 행복하면 된다’는 식의 다문화적 접근을 취해왔지만, 이것은 실패했다. 완전히 실패했다. 다문화주의 정책이 무슬림 양성의 온실이 되었다”고 했다. 또 “내 대답은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비난을 예상하며 발표했다.   정책이 현상을 주도하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정도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이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더 긴 세월동안, 더 아량 있는 이민 정책들을 실행해 왔다. 그런 미국의 현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안에 이주자들의 마음 속에 ‘폭탄’보다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기를 바란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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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서 신랑인 예수를 사랑하며 노래  본인이 본지의 “성경과 신앙” 칼럼을 끝낸 후 독자 여러분들과 잠시 소원했다. 그런데 이 ‘아가서 강해’란을 계기로 다시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또 본지의 직원 여러분들, 특히 편집국장님의 큰사랑과 배려이다, 진실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노래이다(1장1절). 히브리 원문 ‘쉬르 하쉬림’이니 ‘노래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하나님 지혜로 충만한 솔로몬은 1,005편의 많은 노래들을 불렀다(왕상4:32). 이 노래들 중에서 가장 깊은 영감과 신비함을 담고 있는 것이 아가서이다. 일반적으로 솔로몬이 결혼한 역사적 사실의 모형으로 해석한다. 또는 인간의 깊고 고상한 순결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 아가서가 성령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즉 그리스도의 초림 뿐만 아니라 재림 하시는 예수님과의 지고지순한 아가페 사랑이라고 본다.    아가서와 함께 시편, 잠언,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등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가서들이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종교 행사마다 이 시가서를 낭독하여 노래한다. 그들은 성전에 이 다섯의 시가서를 비치해 놓는다. 잠언서는 성전 뜰에, 전도서는 성소 안에, 그러나 아가서는 특별히 지성소에 비치한다. 이는 아가서의 영적인 의미와 깊이가 어떠함을 가리켜 준다. 일반 백성들이 아가서를 읽고 자칫 남녀간의 육적 사랑을 자극하는 그런 책으로 오해하지 않게 함이다. 오직 하나님이 세운 종인 제사장들만이 읽게 한 아가서이다. 오늘날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영교하며 노래하는 것이 곧 아가서로 계시했다고 본다. 즉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가서 본문에서 ‘나의 신부야’라고 주님이 여러 번 부르신다. 이 신부는 누구를 말하는가? 주 재림 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 신부로 청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본다. 즉 혼인식의 주인공인 신랑 예수님과 그 신부이다. 이 신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자라고 하였다(계19:8). 즉 이들은 순교자를 계시한다. 주 재림 시 첫째 부활한 자들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도 이런 순교의 신앙에 올라서 있는 자는 주님이 ‘나의 신부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앞으로 이 강해는 스테판 원문 성경을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을 기준하여 강해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가서 1:1로 들어가 보겠다.   1:1 노래들 중의 노래니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 아가서는 솔로몬이 노래한 것이라고 여기서 밝히고 있다. 시편에는 다윗의 노래가 있고, 또 출애굽기의 모세의 노래, 또 요한계시록의 십사만사천의 새 노래(계14:4)들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래들 중에 최고의 노래가 바로 이 솔로몬의 노래요, 이 아가서이다. 아가서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은 예수님이요, 신부는 솔로몬이 된다.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서 신랑 예수님을 사랑하며 노래하는 이 관계 설정이 바로 1절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신랑으로, 또 술람미 여인을 신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1절에서 정확히 답한다. 즉 솔로몬이 하나님 자리에서 노래한 것이 아니다. 신부 성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이 1절, 곧 솔로몬의 노래다. 솔로몬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부 신앙에 섰다면 신부의 노래가 곧 아가서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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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성서와 생활[9] 그리스도인의 영성-용서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특별한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능력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다.   이 생명은 또한 주님 안에 있으며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할 생명이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시105:4. 우리가 찾아야 할 능력의 생명 중에는 주님 안에서 역사한 용서하는 생명이 있다. 베드로의 영성은 설교를 통해 수천 명을 회개시키며 귀신을 쫓아내며 앉으뱅이를 고치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영성이 이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면 우리 믿음이 더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용서의 능력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성향이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시고 죄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다. 베드로는 회개한 이후에 이전의 기사이적보다 더 큰 사역의 길을 간다.   그것은 고넬료랴는 이방인을 향한 교제의 길이 가능한데 있다. 용서는 놀라운 주기도문의 중요한 기도 원칙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6:14 용서하는 마음은 심판을 이기며 주님의 긍휼히 여김을 얻는 길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느9:17은 우리도 주님의 길이신 이 용서라는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과 혐의에 대해 용서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험을 이기고 죄를 다스리는 능력의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며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18:35 또한 용서는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는 통로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형제를 향한 어떤 불만도 용납, 골3:13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마음으로는 가능하다. 용서는 주님이 주신 능력있는 마음이며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풍성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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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성서와 생활[8] 그리스도인의 영성-말의 영성-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척도는 그의 말에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게 되면 말씀 속에 감추인 주님의 지혜를 얻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식이 우리 마음에 있고 이 지식이 우리 마음에 보존되고 이 지식이 우리 입술에 있음이 아름다운,잠22:8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한다면 말에 주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더 큰 구원을 사모한다면 반드시 말에 실수가 없는 자,약3:2의 길을 가고자 할 것이다. 말의 권세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날에 함께 참여하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말씀에는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신의 권세, 하나님의 권세가 들어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이처럼 말은 하나님께로 나왔으며 ‘믿음으로만이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히1:3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게 말씀하시고 파도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태양에게 멈추기를 명령했으며 그 말대로 되었다. 그러므로 더 큰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채워 권세 있는 말의 선포자가 될 수 있는 영적인 길을 가야만 한다.    입술의 열매로 부요가 결정되기 때문에 영성있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듣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듣고 부르게 된다면 영적인 사람이 된다. 이러한 사람의 말은 덕스러운 말을 하게 됨으로 힘 있는 자에 앞에 서게 된다. ‘마음이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잠22:11.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이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연유도 증거가 될 수 있다. 10살 때부터 시를 쓰고 가수가 되어서는 시어로 언어와 목소리와 음악의 상호작용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입술의 열매를 히13:15, 호14:2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제사보사 탁월하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 배부르게,잠18:20 되도록 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통해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셨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미14:28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기 원하시기에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말은 돈처럼 아껴서 힘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잠17:27을 기억하자.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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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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