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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오늘날은 은혜 시대요, 이방인들의 구원의 날이다. 그다음은 큰 환란이 있은 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란과 재림 시(時)를 대비해야 한다. ⑥재림 주를 맞이할 대비책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팔절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곧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주님이 [마24:37]에 말씀하신 것에서 그 대비책을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만일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지난 노아의 날들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또 그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영적으로 예비해야만 한다. [히11:7]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므로 그의 집을 구원하였다. 또 [히3:6]에서 만일 우리가 끝까지 견고한 확신과 굳건한 소망의 기쁨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 대비책은바로그리스도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노아 방주와 같은 심령 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노아 당시에 철갑선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더 튼튼한 배들이 존재했을지라도 홍수 심판 시, 모든 배가 부서졌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만든 노아의 방주만이 온전히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튼튼한 배가 아닌, 하나님 말씀을 믿은 노아에게 주님이 지어준 방주만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의 우리에게는 노아 방주가 곧 우리의 심령 성전을 의미한다. 이 심령 성전의 짓는 재료는 무엇인가? 바로 오늘 이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즉, 잣나무 같은 진리이다. 잣나무 특성은 절대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고, 위로 곧바로 자라는 것이다. 산에 있는 것이 잣나무요, 들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잣나무는 마치 천수답(天水畓)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여 자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사는 것을 계시한다. 한마디로, 잣나무 같은 진리는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는 말씀이다. 즉, ‘첫째 부활의 진리’를 가리킨다. [계20:4~6]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목 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이 주 재림 시 부활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천 년 동안 통치하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심령 성전을 세우는 성전 재료와 똑같다. 즉 환란 날에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 정절을 굳게 지키며 순교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의 진리’이다. 이 진리로 우리 심령이 무장되어 있으면 우리는 장차 7년 환란 날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 즉, 순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큰 환란과 주 재림 시,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대비책이다. 할렐루야! ⑦결론신학적으로 주 재림 시 죽은 성도가 모두 부활한다는 주장도, 또 7년 환란이 되기 전에 휴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천년왕국에서 부활체요, 영체로서 유대인인 혈육체와 함께 살아간다는 주장도 모두 성경에 맞지 않는다. 이는 인본적이고, 학문적인 주장일 뿐 하나님 말씀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절대 최종권위로 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에서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예언의 비밀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요컨대 반드시 하나님 하신 말씀대로, 나팔절의 실현이 모든 성도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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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님이 오신 목적은 다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분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위해 오셨다는 데 있다.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죽음을 거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 나셔야만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종노릇에서 건지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죄를 그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한 길이 되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영원한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그 이상의 뜻이 있다. 바로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영원한 성령으로 다시 임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 영광의 아름다움은 바로 성령이 되셔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함에 있다. 자신을 속죄양으로 내어 주시고 죽으심이 끝이 아니셨다. 다시 부활하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요7:38-39) 주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통해 그의 권세도 주셨다. (마16:19)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셔서 그의 부르는 자는 구원받게 하셨다. 이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우리는 천국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증거하는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게 하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전함으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이 되어 주셨다. 천국의 열쇠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증거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성령이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이로써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고 호흡할 수 있는 교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위해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엡1“23)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언제나 교통할 수 있는 ‘길’(요14:6)이 되어 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를 통해 자유에 이르게 한 것이다.(요8:32) 주님은 구원의 힘이시며(요3:16),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떡’(요6:35,48)이시며 ‘생명수의 샘물이’(렘17:13,계21:6)이 되어 주셨다. 또한 교회의 몸이 되어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 은혜를 날마다 더하고 계신다. 교회는 단순히 주님만을 예배하는 곳이 아닌 주님을 닮아 가고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높은 뜻을 주신 아름다움을 보는 전진이 필요하다./대전반석교회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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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해마와 함께 주변에 있는 비피질 영역들은 해마와 함께 기억형성을 담당한다. 또한 해마는 파페츠 회로라고 알려진 기억회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파페츠 회로는 유두체-유두시상로-시상전핵-대상회-해마방회-해마-유두체 감정과 기억형성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뇌 회로이다. 후두엽은 뒤통수엽이라고도 하며 바깥쪽 표면에서 두정후두고랑 위쪽 끝부분과 후두전 패임을 잇는 가상적인 선의 뒤쪽 부분이고, 안쪽 표면에서는 두정후두고랑의 뒤쪽 부분이다. 시각연합영역과 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의 처리를 담당한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의 위치, 모양, 운동 상태를 분석한다. 눈의 시력이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후두엽에 이상이 있으면 시각정보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된다. (2) 소뇌와 뇌간 소뇌는 감각 인지의 통합과 운동근육의 조정과 제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으로 교뇌 등쪽의 제4뇌실에 들씌워지듯이 존재하는 큰 구조이며, 가로 10cm, 세로 5cm, 높이 3cm, 무게는 약 150g 정도이다. 소뇌의 주된 작용은 골격근의 활동 조절을 하는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지,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은 대뇌 피질의 전두엽에서 하지만, 실제로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그 계획대로 여러 활동이 세밀하게 실현하도록 하는 것은 피드백 기구로 관여하는 것은 소뇌이다. 소뇌로 들어갈 감각정보는 몸의 주변부에 있는 체성 수용체와 내이 안에 위치한 반고리관과 전정기관으로부터 보내진다. 또한 소뇌는 대뇌 피질의 뉴런으로부터 오는 운동정보를 받아 움직임을 조절하게 된다. 소뇌는 근육운동, 평형감각 조절을 한다. 만약에 소뇌가 없다면 땅에 있는 물건을 잡으려고 할 때 손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조절할 수 없고,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서 있지도 못한다. 뇌간은 뇌의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부분으로 척수가 확대 팽창해서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뇌간의 무게는 약 200g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뇌간은 중뇌, 교뇌, 연수가 있다. 뇌간의 가장 아래쪽인 연수 부분은 호흡과 심장 운동을 조절하는 생명 중추가 있다. 그 외에도 혈관의 수축과 이완, 하품, 기침, 재채기, 구토 등의 반사 작용도 뇌간에서 이루어진다. 연수 위에 있는 뇌교는 온 몸의 신경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전달하고 두개의 소뇌 사이의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중뇌는 뇌간의 가장 앞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뇌의 앞에는 시상과 시상하부라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 시상은 두 개의 작은 타원형 모양이고, 이것이 좌우 대뇌반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시각, 청각, 피부 감각 등의 주요 감각계가 바로 시상을 거쳐서 대뇌 피질로 이어지게 된다. 시상하부는 대뇌 아랫부분과와 시상, 중뇌의 교차점에 존재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콩알만한 크기에 4g에 불과한 조직이지만 자율 신경의 중추가 모여있어서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다./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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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빛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4절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다. 이토록 예수님과 말씀과 빛은 같은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말씀(헬,로고스)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성이라고 해석하는데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그리스)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인 교회 당이 하단에 위치하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시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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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김미선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어린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이내, 내 시야권으로 들어온 그 울음의 주인공은 이제 제법 자기 고집을 부릴법한 ‘미운 네 살’의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아이 엄마는 꽤 지쳐 보였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는 아이를 훈육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실랑이의 시작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빵 봉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는 아이는 지금 당장 그 빵을 달라고 생떼를 부렸고, 엄마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단호함으로 일관했다. 둘의 신경전이 어찌나 팽팽하던지,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들에게 다가갔다.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차분히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 공주님, 뭐가 그렇게 속상할까? 빵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줘서 속상하구나?” 지원군을 만났다는 희망과 위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는 울 힘조차 남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이내 생떼를 그쳤고, 빵이 진짜 먹고 싶다고 꺼이꺼이 남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켜보던 나도, 단호했던 엄마도 일순간 무장해제를 당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는데,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빵 봉지를 주섬주섬 열어 빵 하나를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젊은 날의 내 모습 같았던 그 ‘어린 엄마’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잘하고 계시는 거라고, 힘내시라고 응원하며 두 모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한 주간 묵상했던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말씀이 떠오르며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10)”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벗의 비유’를 들며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어떤 한 사람에게 긴 여행으로 지쳤던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를 돌보며 먹이고 싶었으나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늦은 밤 염치 불고하고 이웃에게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 떡을 빌리고자 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간청함을 인하여어느 누가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지 않겠느냐? 당연히 일어나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울 만큼의 간절한 간청의 기도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기도 제목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고, 개인적인 소망이라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일이라면 더 담대하고 끈질기도록 간절하게 간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세이자 응답받는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에겐 빵 한 조각이 너무나 간절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엄마도 주변 사람도 개의치 않고 부끄러움 없는 생떼를 부려가며 간절한 용기로 빵 한 조각을 얻어낸 것일 테다. 나에겐 그 ‘간절을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가 그 아이만큼 있기는 한 것일까. 그날, 아이를 통해 내 기도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간절(懇切)을 간청(懇請)하라. 다시금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그날까지 간청의 자세로 기도하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권사,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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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우린 “나는 중 2 때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걸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영화 8번 출구는 시간이 나서 볼 게 없어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을 줄 저는 몰랐습니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원래 이 영화의 원제목은 쇼생크구원 혹은 쇼생크구속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탈출이라는 단어의 속에는 ‘어떤 곳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탈출이라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속을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뜻인데 우리는 이것은 혼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의미가 많이 상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쇼생크탈출에서 탈출이 의미하는 바는 구속입니다. 주인공 엔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가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냥 단순히 그곳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단어가 바로 탈출, 다시 말해 구속이라는 뜻이고 구원이라는 말의 뜻은 구속 이후의 단계까지 내포하는 더 포괄적이고 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8번 출구라는 영화에는 구원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6하 원칙 중 주인공과 아저씨와 어린 소년(누가)과 지하철 0~8번 출구(어디서)와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가라는 세 가지 원칙이 중요하게 깔리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갑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저씨와 똑같이 둘 다 소년과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게 있게 되는 상황에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정이 탈출의 성패를 결정 짓게 됩니다. 그들의 결정은 그 소년의 말을 듣는가, 아님 거부하는가에 따라 나뉘는데 그 소년의 의미는 제가 볼 때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여자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구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구속을 얻기 위해 우리가 동행하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나오는 아저씨의 경우처럼 자신의 결정에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구속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아닌 종교의 힘을 빌어 수행하고 선행을 베풀기만 하면 마치 구속을 얻고 더 나아가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영화의 내용처럼 한 인간을 지옥이라는 공간, 다시 말해 출구 탈출불가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인공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그때는 구속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몸을 던져 희생하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견대내고 마침내 나아가서는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온유한 한 사람의 몸부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구속 이후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이루어나가는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나 혼자 이루어내는 구원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사람의 실패한 존재인 아저씨의 초라하고 반복되는 형상으로 나타내어 놓은 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성경말씀은 이 영화의 설정처럼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이 가을 여러분에게 좋은 영화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몇 자 적어봤습니다./새맘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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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 오늘날은 은혜 시대요, 이방인들의 구원의 날이다. 그다음은 큰 환란이 있은 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란과 재림 시(時)를 대비해야 한다. ⑥재림 주를 맞이할 대비책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팔절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곧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주님이 [마24:37]에 말씀하신 것에서 그 대비책을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만일 우리가 재림 주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는 지난 노아의 날들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또 그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영적으로 예비해야만 한다. [히11:7]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므로 그의 집을 구원하였다. 또 [히3:6]에서 만일 우리가 끝까지 견고한 확신과 굳건한 소망의 기쁨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 대비책은바로그리스도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노아 방주와 같은 심령 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집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노아 당시에 철갑선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더 튼튼한 배들이 존재했을지라도 홍수 심판 시, 모든 배가 부서졌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만든 노아의 방주만이 온전히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튼튼한 배가 아닌, 하나님 말씀을 믿은 노아에게 주님이 지어준 방주만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의 우리에게는 노아 방주가 곧 우리의 심령 성전을 의미한다. 이 심령 성전의 짓는 재료는 무엇인가? 바로 오늘 이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다. 즉, 잣나무 같은 진리이다. 잣나무 특성은 절대 휘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고, 위로 곧바로 자라는 것이다. 산에 있는 것이 잣나무요, 들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잣나무는 마치 천수답(天水畓)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여 자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사는 것을 계시한다. 한마디로, 잣나무 같은 진리는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는 말씀이다. 즉, ‘첫째 부활의 진리’를 가리킨다. [계20:4~6]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목 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이 주 재림 시 부활 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천 년 동안 통치하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심령 성전을 세우는 성전 재료와 똑같다. 즉 환란 날에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 정절을 굳게 지키며 순교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의 진리’이다. 이 진리로 우리 심령이 무장되어 있으면 우리는 장차 7년 환란 날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 즉, 순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큰 환란과 주 재림 시,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대비책이다. 할렐루야! ⑦결론신학적으로 주 재림 시 죽은 성도가 모두 부활한다는 주장도, 또 7년 환란이 되기 전에 휴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천년왕국에서 부활체요, 영체로서 유대인인 혈육체와 함께 살아간다는 주장도 모두 성경에 맞지 않는다. 이는 인본적이고, 학문적인 주장일 뿐 하나님 말씀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절대 최종권위로 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에서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예언의 비밀을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요컨대 반드시 하나님 하신 말씀대로, 나팔절의 실현이 모든 성도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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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8) 주 재림과 나팔절[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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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 주님이 오신 목적은 다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분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위해 오셨다는 데 있다.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죽음을 거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 나셔야만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종노릇에서 건지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죄를 그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한 길이 되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영원한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그 이상의 뜻이 있다. 바로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영원한 성령으로 다시 임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 영광의 아름다움은 바로 성령이 되셔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함에 있다. 자신을 속죄양으로 내어 주시고 죽으심이 끝이 아니셨다. 다시 부활하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요7:38-39) 주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통해 그의 권세도 주셨다. (마16:19)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셔서 그의 부르는 자는 구원받게 하셨다. 이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우리는 천국의 은혜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증거하는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게 하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전함으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이 되어 주셨다. 천국의 열쇠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증거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성령이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이로써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고 호흡할 수 있는 교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위해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엡1“23)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언제나 교통할 수 있는 ‘길’(요14:6)이 되어 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진리를 통해 자유에 이르게 한 것이다.(요8:32) 주님은 구원의 힘이시며(요3:16),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떡’(요6:35,48)이시며 ‘생명수의 샘물이’(렘17:13,계21:6)이 되어 주셨다. 또한 교회의 몸이 되어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 은혜를 날마다 더하고 계신다. 교회는 단순히 주님만을 예배하는 곳이 아닌 주님을 닮아 가고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높은 뜻을 주신 아름다움을 보는 전진이 필요하다./대전반석교회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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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91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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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 해마와 함께 주변에 있는 비피질 영역들은 해마와 함께 기억형성을 담당한다. 또한 해마는 파페츠 회로라고 알려진 기억회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파페츠 회로는 유두체-유두시상로-시상전핵-대상회-해마방회-해마-유두체 감정과 기억형성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뇌 회로이다. 후두엽은 뒤통수엽이라고도 하며 바깥쪽 표면에서 두정후두고랑 위쪽 끝부분과 후두전 패임을 잇는 가상적인 선의 뒤쪽 부분이고, 안쪽 표면에서는 두정후두고랑의 뒤쪽 부분이다. 시각연합영역과 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의 처리를 담당한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의 위치, 모양, 운동 상태를 분석한다. 눈의 시력이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후두엽에 이상이 있으면 시각정보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된다. (2) 소뇌와 뇌간 소뇌는 감각 인지의 통합과 운동근육의 조정과 제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으로 교뇌 등쪽의 제4뇌실에 들씌워지듯이 존재하는 큰 구조이며, 가로 10cm, 세로 5cm, 높이 3cm, 무게는 약 150g 정도이다. 소뇌의 주된 작용은 골격근의 활동 조절을 하는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지,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은 대뇌 피질의 전두엽에서 하지만, 실제로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그 계획대로 여러 활동이 세밀하게 실현하도록 하는 것은 피드백 기구로 관여하는 것은 소뇌이다. 소뇌로 들어갈 감각정보는 몸의 주변부에 있는 체성 수용체와 내이 안에 위치한 반고리관과 전정기관으로부터 보내진다. 또한 소뇌는 대뇌 피질의 뉴런으로부터 오는 운동정보를 받아 움직임을 조절하게 된다. 소뇌는 근육운동, 평형감각 조절을 한다. 만약에 소뇌가 없다면 땅에 있는 물건을 잡으려고 할 때 손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조절할 수 없고,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서 있지도 못한다. 뇌간은 뇌의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부분으로 척수가 확대 팽창해서 생겼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뇌간의 무게는 약 200g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뇌간은 중뇌, 교뇌, 연수가 있다. 뇌간의 가장 아래쪽인 연수 부분은 호흡과 심장 운동을 조절하는 생명 중추가 있다. 그 외에도 혈관의 수축과 이완, 하품, 기침, 재채기, 구토 등의 반사 작용도 뇌간에서 이루어진다. 연수 위에 있는 뇌교는 온 몸의 신경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전달하고 두개의 소뇌 사이의 정보를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중뇌는 뇌간의 가장 앞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뇌의 앞에는 시상과 시상하부라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 시상은 두 개의 작은 타원형 모양이고, 이것이 좌우 대뇌반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시각, 청각, 피부 감각 등의 주요 감각계가 바로 시상을 거쳐서 대뇌 피질로 이어지게 된다. 시상하부는 대뇌 아랫부분과와 시상, 중뇌의 교차점에 존재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콩알만한 크기에 4g에 불과한 조직이지만 자율 신경의 중추가 모여있어서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다./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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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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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 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빛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을 뜻한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4절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다. 이토록 예수님과 말씀과 빛은 같은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말씀(헬,로고스)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성이라고 해석하는데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그리스)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인 교회 당이 하단에 위치하고,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시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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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작가의 「빛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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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 김미선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어린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이내, 내 시야권으로 들어온 그 울음의 주인공은 이제 제법 자기 고집을 부릴법한 ‘미운 네 살’의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아이 엄마는 꽤 지쳐 보였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는 아이를 훈육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실랑이의 시작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빵 봉지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는 아이는 지금 당장 그 빵을 달라고 생떼를 부렸고, 엄마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단호함으로 일관했다. 둘의 신경전이 어찌나 팽팽하던지,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들에게 다가갔다.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차분히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 공주님, 뭐가 그렇게 속상할까? 빵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줘서 속상하구나?” 지원군을 만났다는 희망과 위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는 울 힘조차 남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이내 생떼를 그쳤고, 빵이 진짜 먹고 싶다고 꺼이꺼이 남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켜보던 나도, 단호했던 엄마도 일순간 무장해제를 당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는데,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빵 봉지를 주섬주섬 열어 빵 하나를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젊은 날의 내 모습 같았던 그 ‘어린 엄마’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잘하고 계시는 거라고, 힘내시라고 응원하며 두 모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한 주간 묵상했던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말씀이 떠오르며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10)”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벗의 비유’를 들며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어떤 한 사람에게 긴 여행으로 지쳤던 친구가 찾아왔는데, 그를 돌보며 먹이고 싶었으나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늦은 밤 염치 불고하고 이웃에게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 떡을 빌리고자 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간청함을 인하여어느 누가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지 않겠느냐? 당연히 일어나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울 만큼의 간절한 간청의 기도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기도 제목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고, 개인적인 소망이라도 그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일이라면 더 담대하고 끈질기도록 간절하게 간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세이자 응답받는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에겐 빵 한 조각이 너무나 간절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엄마도 주변 사람도 개의치 않고 부끄러움 없는 생떼를 부려가며 간절한 용기로 빵 한 조각을 얻어낸 것일 테다. 나에겐 그 ‘간절을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가 그 아이만큼 있기는 한 것일까. 그날, 아이를 통해 내 기도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간절(懇切)을 간청(懇請)하라. 다시금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그날까지 간청의 자세로 기도하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 권사,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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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간절을 간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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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 우린 “나는 중 2 때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걸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영화 8번 출구는 시간이 나서 볼 게 없어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을 줄 저는 몰랐습니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원래 이 영화의 원제목은 쇼생크구원 혹은 쇼생크구속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탈출이라는 단어의 속에는 ‘어떤 곳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탈출이라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더 큽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구속을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뜻인데 우리는 이것은 혼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의미가 많이 상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쇼생크탈출에서 탈출이 의미하는 바는 구속입니다. 주인공 엔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가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냥 단순히 그곳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단어가 바로 탈출, 다시 말해 구속이라는 뜻이고 구원이라는 말의 뜻은 구속 이후의 단계까지 내포하는 더 포괄적이고 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8번 출구라는 영화에는 구원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6하 원칙 중 주인공과 아저씨와 어린 소년(누가)과 지하철 0~8번 출구(어디서)와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는가라는 세 가지 원칙이 중요하게 깔리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갑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저씨와 똑같이 둘 다 소년과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게 있게 되는 상황에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정이 탈출의 성패를 결정 짓게 됩니다. 그들의 결정은 그 소년의 말을 듣는가, 아님 거부하는가에 따라 나뉘는데 그 소년의 의미는 제가 볼 때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여자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구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구속을 얻기 위해 우리가 동행하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나오는 아저씨의 경우처럼 자신의 결정에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구속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아닌 종교의 힘을 빌어 수행하고 선행을 베풀기만 하면 마치 구속을 얻고 더 나아가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영화의 내용처럼 한 인간을 지옥이라는 공간, 다시 말해 출구 탈출불가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인공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그때는 구속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몸을 던져 희생하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견대내고 마침내 나아가서는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온유한 한 사람의 몸부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구속 이후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이루어나가는 삶의 여정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나 혼자 이루어내는 구원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사람의 실패한 존재인 아저씨의 초라하고 반복되는 형상으로 나타내어 놓은 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성경말씀은 이 영화의 설정처럼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이 가을 여러분에게 좋은 영화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몇 자 적어봤습니다./새맘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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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구원에 대하여 – 영화 8번 출구를 보고 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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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나작가의 「기다림」
- 이한나작가의 「기다림」은 어린아이들의 감성이 묻어 나는 맑고 깨끗함이 엿보인다. 그야말로 해맑고 투명한 장면이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이다. 푸른 들판이 있고 곡식이 무르익어가는 아름다운 밭이 널려 있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붉은 지붕이 있는 교회당도 보인다. 아름다운 나무들과 연못도 있다. 동시가 흐르고 있다. 쓸모없는 꾸밈이 없다. 이 작가는 기다림 속에 무르익어가는 열매를 보고 있다 아니 어떤 일이든지 기다림이 없이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사람 사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농부들이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님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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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나작가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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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73회) 그리스도인의 삶- 사랑의 생명의 아름다움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4:8) 하나님은 사랑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구원해 주셨다. 이 사랑의 생명으로 태어난 자마다 ‘서로 사랑’함이 가능하다. 이러한 생명이 우리 속에 없다면 감히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는 명령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함을 알게 하셨다. 믿기만 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실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요일4:7)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생명의 길을 갈 때 하나님께로 난 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마태복음의 “긍휼히 여기는”(마5:7)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긍휼히 여김으로써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복을 누리도록 하셨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잃어도 영생의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요일3:10) 주님 안에 거함을 영원한 성령으로 알 수 있게 하셨다.(요일3:24) 이 사랑의 생명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비로소 사망에서 옮겨져서 생명에 거하게 된다.(요일3:14,15)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사망의 세력을 이길 수 없게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영적인 가족을 통해 서로 사랑함으로 그리스도 생명에 이르게 하셨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공존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서로 사랑함으로 완성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사랑이 식어지는 불법이 활동을 하게 된다. (마24:12,13) 예수님은 천국의 가르침만으로 우리를 구원하거나 완성시킨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었다.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어 그의 생명을 나눠 줄 수 있었다. 우리도 이러한 계명 아래 있을 때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게 하셨다.(요일3:22)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자는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사랑의 참된 아름다움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이 마음의 소원을 다 이루게 하셨다. 믿기만 하지 않고, 기도만 하지 않고, 사랑함으로 믿고, 사랑함으로 기도할 때 아름다운 믿음으로 흠이 없게 하신다. 그리하여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영생하는 사랑의 생명이 중요함을 알개 하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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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73회) 그리스도인의 삶- 사랑의 생명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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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65) 내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
- 앞서 상고한바와 같이 만일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 형제 같다면 내 어머니의 집에 들여 향기로운 석류즙의 술을 마시게 했으리라. 즉 일곱 금촛대교회에서 주시는 첫째 부활의 진리를 잘 받을 수 있었을텐데··· 이런 안타까움은 3절에서 계속되고 있다.8:3 그의 왼손이 내 머리 아래 있을 것이요 그의 오른손은 나를 껴안을 것이라. 본문이 아2:6 말씀과 문자는 똑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게 계시한다. 아2:6절의 말씀은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왼손으로 신부 성도의 머리 아래로, 또 그의 오른손이 신부 성도를 껴안아서 온전히 하나가 됐음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신부 성도에게 진리의 말씀을 아구까지 가득 채우시는 역사를 하신다. 그 결과 주님과 신부 성도가 온전히 하나 되어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본문 아8:3절은 8:1절의 ‘당신’의 손을 말한다. 신부 성도의 신앙을 멸시하고 비방하는 그가 만약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에서 나와 똑같이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을 마시게 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감격하여 마치 신랑 예수님이 신부 성도를 껴안고 사랑하는 것같이 그도 자신을 인도한 신부 성도와 하나 되어져 사랑하게 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젖으로 양육 받은 것으로 인하여 신부 성도가 증거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비방하고 정죄했던 자신, 즉 죄인의 괴수를 오히려 첫째 부활에 이르게 하는 엄청난 복을 받는 자로 세움 받게 됐다고 가정 한다면, 후일에 이렇게 됐음을 깨달았다면 그의 왼손이 신부인 내 머리 아래 있을 것이요, 깨달은 그의 오른손은 나를 껴안았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이니 너무도 안타깝다는 말씀이다. 8:4 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은 육적인 성도·교회를 말한다. 또 첫째 부활에 이르게 하는 말씀의 젖을 먹지 못하여 신부 성도와 다른 신앙의 길로 달려가는 자들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된다. 3절까지는 신부 성도를 멸시하고 대적하는 자가 ‘그’였는데 4절의 ‘그’는 신랑 예수님을 가리킨다. 신랑 예수님이 원하기까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하였다. 현재 신부 성도의 믿음의 위치에서 더 깊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채워주시는 역사이다. 이는 곧 신랑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의 분량까지 신부 성도에게 채워주시려는 것이다. 아7:13절을 거쳐 온 신부 성도는 합환채의 기쁨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낳는 역사를 하고 있다. 한 생명 한 생명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워지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기쁨과 신부 성도가 기뻐하는 기쁨이 있는데 그 기쁨의 정도는 다르다. 신부로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신랑 예수님의 기쁨이 신부 성도에게도 똑같은 기쁨이 되도록 지금 신랑 예수님이 신부 성도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니 그 사랑이 아구까지 가득 채워지기까지는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원하기까지 내 사랑을 흔들지 말라는 부탁은 앞에서도 여러번 하였다. 처음에는 진리로 아구까지 채우시는 역사가 있었고, 다음은 증거하는 사명과 기쁨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말씀하였다. 8:4절에는 신랑 예수님과 함께 증거하는 가운데 더 큰 기쁨을 채워주시는 역사이다. 만일 신부 성도에게 8:4절이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온전하지만 8:4절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는 신부는 왕이 된 기쁨을 직접 누리면서 예수님의 그것과 같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8:4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결과가 곧 11절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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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65) 내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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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 하셨다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자는 그 있는것도 빼앗기리라 (마13:10~11). 예수께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 하시고 다만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해석하여 주시더라(막 4:33~34) 비유는 대개 은유인데 어떤 사실의 원뜻은 숨기고 다른 것으로 비유할 때 쓰는 기법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겨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첫째, 천국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숨기셨다. 진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노라 (마 7:6) 둘째, 비유를 통해 창세로부터 감추인것을 도리어 드러내고자 함이셨다.(마13:35) 나보다 3살 어린 남동생이 대여섯 살 때쯤 구슬 놀이를 좋아했다. 먼저 땅에 길이 1m 정도 원을 그리고 그 중심에 놀이할 친구들의 구슬을 가운데 모아 놓고, 가장 힘이 좋은 왕 구슬을 검지 손가락을 받침대로 삼아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쳐서 맞고 원 밖으로 튀어 나간 구슬 따기인데, 셔츠 앞부분에 가득 담아 의기양양 집으로 온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은 유리 구슬이다. 가령, 어찌하다 동생 구술 속에 그만한 크기의 보석이 있었다면 동생은 전혀 몰랐을 것이고 제 또래 또한 몰랐을 것이나 보석을 알아보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면 그 가치를 알려주며 조심할 것을 일러주지만, 나쁜 사람이 이를 보고 알게 된다면 동생은 보석을 뺏길수도 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을 은총의 선물로 받는다. 능력도 조건도 없다. 믿기만 하면 되는데 쉽지가 않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가라지와 곡식이 같은 밭에서 함께 자란다 가라지가 따로 있고 곡식이 따로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가라지도 내버려 두어라 가라지 뽑다가 곡식도 뽑힐까 하노라 추수때가 되면 가라지는 먼저 뽑아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 (마 13:24~ 30) 심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의 주권이시다 귀 있는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한국기독교문협 수필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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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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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기작가의 「endless love」
- 임상기작가의 「endless love」 는 어미 양이 어린 양을 귀여워 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식을 버리는 일도 흔한데 참으로 인간들이 크게 깨달아야 할 귀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세상 끝날까지 끝도 없이 사랑하고 계심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로 믿는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소망을 주고 있고 사랑으로 피어난 붉은 꽃은 가족 사랑이 얼마나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믿는 사람들이 깊이 깨달을 교훈이다./대석교회 원로목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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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기작가의 「endles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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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4) 내가 당신을 내 어머니의 집으로
- 만일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 형제 같다면,8:2 내가 당신을 인도하여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에 들여서 내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을 마시게 하였으리이다.이는 가정법으로 쓴 것이요, 실제는 당신이 내 형제가 아니란 말이다. 여기서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첫째 부활의 영광의 복음과 진리 말씀으로 난 곳이다. 계2장과 3장에서 계시한 일곱 금촛대교회이다. 만일 당신이 내 형제였다면 일곱 금촛대교회로 ‘당신’을 인도하여 들여서 내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을 마시게 하였으리라. 여기의 술은 포도주요, 복음을 상징한다.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에서 먹는 술은 곧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이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순교케 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눅22:17절 이하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이 제일 먼저 잔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 ‘이것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빵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또 식후에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빵과 식후의 잔은 오늘날의 성찬식이다. 그러나 이 성찬식에 앞서서 주신 잔은 ‘이것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하셨다. 이 잔은 주님과 똑같은 길을 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이 마신 이 잔은 주님이 받으신 십자가의 죽음의 잔과 똑같은 것이다. 즉 순교의 잔을 말한다. 이 잔을 마신 제자들이 그 이후 주님을 따라 기쁘게 순교의 제물로 드려졌다. 이 잔이 본문의 내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이다. 현재는 깨닫지 못하여 환란 전 휴거를 소망하거나 또는 천년왕국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당신’을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일곱 금촛대교회)으로 들이겠다. 그리고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을 마시게 하였으리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도 그 교회 안에서 주는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길러지리라. 그리되면 신랑 예수님이 순교케 해 주시는 그 도를 깨닫게 되어 기쁨으로 당신도 나처럼 순교의 길로 가게 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신부 성도가 고통하며 괴로워하면서 1절에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 형제 같다면!’ 하고 가정법으로 말하고 있다. 결국 일곱 금촛대교회에서 주시는 진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를 받았다면 당신은 겸손하게 와서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고 진리를 받았으리라. 그리하면 당신은 은혜를 받고 나의 형제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되기가 너무너무 어렵다. 왜 그럴까? 성도 각자에게 견고한 이론의 진이 있어 그것이 쉽게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첫출발부터 중요하다. 처음에 어떤 말씀의 씨가 심령에 뿌려졌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진리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심겨졌다면 그것이 그의 모습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에게 견고한 이론의 진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항아리란 그릇이 와장창 깨지듯이 자신이 깨져버려야 그 견고한 진이 없어질 수 있으리라. 마치 청년 유두고가 바울의 설교를 못 듣고 삼층에서 떨어져 죽듯이 말이다. 그가 다시 살아나니 청년, 즉 네아니아스 유두고가 아닌 파이다인 아이가 된 것 같이 새로워지게 되리라(행20:7-12). 만일 당신이 그리됐었더라면 내가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에서 주시는 첫째 부활의 진리를 순하게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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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4) 내가 당신을 내 어머니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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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72회) 그리스도인의 삶- 양심의 아름다움
-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이 조상때 부터 내려오는 “청결한 양심”(딤후1:3)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디모데가 흘리는 신앙의 눈물을 위로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이는 자기의 기쁨이라고 전한다. 젊은 디모데가 연약함을 극복하는 길은 바울의 안수에 있었다. 그 은사는 이미 바울 안에 있던 것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바울의 안수로 인해 디모데 안에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딤후1:7)이 공존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바울의 말기 로마사역이 고난과 투옥으로 인한 역경 속에서 동역자인 디모데의 흔들림 없는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 “복음과 함께 고난”(딤후1:8)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하지 않음과 같이 디모데가 같은 마음으로 “바른 말을 본받아”지키기를 부탁한다. 성령 안에서 부탁한 아름다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길은 오직 “청결한 양심”의 사역에 있으며 양심을 버린 자들은 바울을 배신하여 복음을 버렸고 주님을 떠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의 말년은 모든 아시아의 사람들이 바울을 배반하여 떠나게 되었다. (딤후1:15) 이러한 배신과 고통 속에서 바울은 다른 한 사람을 소개한다. 그는 바로 오네시보로였다. 유독 말기 사역에서 바울은 신앙이 부패하지 않음이 양심에 있음을 알게 되며 그 양심이 디모데 안에 있음으로 인해 기뻐한 것이다. 바울은 “선한 양심”(딤전1:5), “착한 양심”(딤전1:19), “깨끗한 양심”(딤전3:9). “청결한 양심”(딤후1:3)으로 양심에 관하여 디모데서에서 고린도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격려한 자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투옥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투옥된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으며 고난의 현장에 위로를 보낸 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봉사한 사실도 주목하고 있다. 디모데가 오네시보로와 교제함으로 연소함과 고난으로 인해 복음을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바울과 함께 고난 받기를 부탁한다. 이러한 길이 배신자의 길을 걸어간 많은 아시안인들과 비교되는 부끄럽지 않는 일군임을 알게 하셨다. 믿음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선한양심의 간구”(벧전3:21)로 인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을 버리면 믿음은 깨어지고 만다.(딤전1:5) 아름다운 믿음은 청결한 양심에서 나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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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72회) 그리스도인의 삶- 양심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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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건강이 예전 같지 않는 중년의 단상 그리고 깨달음
- 하워드 클라인벨(Howard Clinebell, 목회상담학자, 1922~2005)의 글이 눈길을 잡는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힘을 공급받지 않으면 자기를 실현할 수 없다’ 왜였을까?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3차 이후 눈이 불편하더니 조금만 무리하면 눈이 아프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삶의 질이 떨어지는 느낌, 중년인 것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여기려 하지만 앞으로 계속적으로 나이가 들고 늙을 터인데 이렇게 계속 염려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건강에 대한 염려가 온 것이다. 많은 경우 40세가 넘으면 소화 기능 등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젊음, 건강의 상실로 인해 우울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노화, 늙음의 현상을 우리 각자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스승의 주일, 카네이션 화분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화분 키우기에 소질이 없던 나는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잘 돌봤다. 햇볕 주기, 물 주기, 신성한 공기에 노출하기. 그런데 오후 늦게 카네이션 꽃을 보고 화들짝 놀았다. 생생하던 카네이션 꽃들의 목이 모두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뭐가 문제지? 나는 서둘러 물을 꽃의 뿌리까지 충분히 적셔 주었다. ‘살아나라. 아직은 아니지 않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줄기가 꺽인 듯 축 늘어진 카네이션 꽃들이 예전처럼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있지 않는가!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 때 감격을 잊지 못한다. 같은 날, 일을 마치고 건물 현관문을 열자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머금는 잎들은 이전보다 한층 푸르러지고 성장해 있었다. 그 순간 깨달음이 내 마음 속에 빛처럼 지나갔다. 이게 바로 생수의 강물이신 생명님이시구나! 왜 나는 아픈 눈에 이 생명이신 성령님의 능력의 임재를 구하지 않았을까? 마치 다 나은 듯 내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 차고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시다(갈5:25; 욥 33:4; 고후3:6). 그런데 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를 어떻게 삶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있을까? 하워드 클라인벨 학자의 글이 익히 알고 있던 성령님을 나의 삶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게 했다. 하워드 클라인벨은 그의 책 『전인 건강』에서 개인 내적· 외적 성장, 대인 관계 및 생명계와 관계를 갱신할 것을 말하면서 더불어 영성적 성장을 말한다. 그는 영성적 성장의 근원을 성령으로 보고 있는데, 성령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고 본다. 하워드 클라인벨이 영성적 성장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통한 힘의 공급이 없이는 자기 자신을 실현할 방법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아픈 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의 힘을 계속적으로 구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 저 눈에 생명의 능력을 주옵소서” 햇빛을 받으며, 바람이 스치는 길을 걸으며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아픈 눈에 생명을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계속 간구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한결 괜찮아진 시력을 느낄 수 있었다. -예장 통합총회 상담학교 담당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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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건강이 예전 같지 않는 중년의 단상 그리고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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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3)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면
- 앞서 상고한 바와 같이 성문 앞에 놓인 많은 실과들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 오래된 것은 묵은 열매로써 율법과 계명에 의한 열매, 즉 회개의 열매라고 깨달았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법인 계명으로써 계속 생활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을 폐기한 소위 구원파는 이단이고 성도를 회개치 못하게 하는 잘못된 악령의 역사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오시었다. 또 본문에 ‘이것들은 내가 너를 위하여 쌓아 놓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새것과 묵은 것을 쌓아 놓았다는 것은 결국 열매 맺은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대로 내게 줄 영광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열매는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맺게 하였고, 그 열매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입혀주시기 위하여 성문 앞에 쌓아 놓은 것이 있다는 말씀이다. 새것의 열매는 우리가 신부 신앙에 올라서 있은 후에 맺은 열매이다. 자신과 같은 신부 성도를 낳은 역사이다. 이것이 성문 앞 존귀하고 아름다운 새것과 묵은 것의 실과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열매 맺은 대로 신부에게 입혀줄 영광이 예비 되어 있음을 계21:10절 이하에 찬란한 보석 성 새 예루살렘으로 계시하고 있다. 8:1 오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 형제 같다면! 내가 밖에서 당신을 만날 때 당신에게 입맞추리니, 정녕 내가 멸시받지 아니할 것이요 신부 성도가 말하기를 ‘오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형제 같다면!’하고 가정법을 써서 말한다. 이는 실제 내 형제(오라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당신’은 신부 성도의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아니한 다른 젖을 먹은 성도를 말한다. 신부 성도는 앞서 7장에서 첫째 부활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말씀으로 기뻐하며 증거 하는 자였다. 그런데 이 신부 성도는 자신이 증거 하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과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는 종들로부터 비방과 멸시를 받고 너무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오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내 형제 같았더라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 되셔서 똑같은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면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아니고 예언의 영이 아닐 때는 참된 진리를 말하고 기뻐하는 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멸시, 비방하고 급기야 이단으로 정죄하고 만다. 신부 성도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 어머니에게서 젖을 먹은 형제지간이었다면 서로 멸시를 하거나 멸시를 받는 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젖을 주는 어머니는 말씀을 증거 하는 교역자 또는 교회를 말한다. ‘밖에서 당신을 만날 때 당신에게 입맞춘다’는 것은 한진리 안에서 서로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같은 젖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멸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오늘날 이 말씀을 인본적으로 잘못 깨닫고 변질시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참된 요한계시록의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하면 인본적으로 깨닫고 있는 비진리가 진리를 멸시하고 비방한다. 또 요한계시록을 아예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장로교 시조인 칼빈도 인봉한 계시록을 왜 건드리느냐?’며 비방한다. 8:2 내가 당신을 인도하여 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에 들여서, 내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을 마시게 하였으리이다.‘나를 가르친 내 어머니의 집’은 성령이 진리의 영이 되셔서 나를 양육하고 가르친 교회를 말한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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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3)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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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71회) 그리스도인의 삶- 영으로 보는 분별의 아름다움
- 처음 구원을 받을 때 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의 구원에 이르는 영적 성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생명의 부요를 위한 소망은 범사에 자신을 분별하며 사는 신앙이 요구된다. 다만 죄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한 삶이라면 선을 향한 분별력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빌1:6)이 계속 되어야 한다. 사랑과 기도는 성령의 풍성한 분별의 사역에서 나올 때 선한 것이 된다. 의식으로 흘러가는 믿음을 방지하기 위해 선한 일에 깨어 있으라 하셨다. 즉,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빌1:10)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예배나 일상의 생활에서 “진실하여 허물 없이”(빌1:10)행하는 믿음을 말한다. 원망이나 불평이 없는 믿음은 육에서 나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이나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 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한 은혜와 평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바울에게는 투기와 분쟁으로 주의 일을 행하는 자나 순수하지 못한 다툼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자들도 그의 사역을 막지 못했다. 형식에 치우치거나 참된 방도로나 다 주님을 전파하는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분은 사도 바울이었다.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도 이러한 사명감으로 지체들의 육성을 뛰어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주의 일에 화목을 도모하는 사도 바울의 영성이 요구된다. 믿음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에 베드로는 이방인을 부정하게 대하던 일에서 영으로 분별하는 체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믿음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고넬료를 영접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부정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의롭게 보는 분별력을 얻게 된다. 구제와 기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훈련은 부정하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했다. 의로운 육적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빌1:27)하는 훈련은 분별하는 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한마음으로 협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무슨 일에든지 두려움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만 주를 믿는 믿음을 위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빌1:29) 하셨다. 선한 것을 분별하여 진실함에 이르는 영적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오직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히5:14)하는 훈련을 통해 얻는 아름다움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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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71회) 그리스도인의 삶- 영으로 보는 분별의 아름다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