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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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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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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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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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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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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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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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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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5]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억의 영성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레26:42.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성취하신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기백성과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26:45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 민15:39 해야한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심,시111:5은 하나님이 그 자녀와 언약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그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시111:4.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신7:19 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로 그의 심판아래 두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20:8는 명령은 순종의 여부를 알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안식을 통해 육신의 일을 쉬고 성령안에서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자하심(사랑)을 찬미하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하신다.   오늘날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며 찬미 드리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멘 예배자를 찾으신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함이 우리의 삶이며 예배이다. 우리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 딤후2:8하는 일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23:42라는 강도의 고백 속에 주의 나라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약속한 나라를 구할 때 그 나라를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구제를 기억해 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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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8
  • [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외국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역동성이다. 그 느낌이 상쾌하다. 내 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활발해 진다. 나보다 늦게 걷는 이들이 있으면, 추월도 한다.   아내와 함께 걸으면, 거의 매번 듣는 말이 ‘천천히 걸으라’는 것이다. 따라 걷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힘들다’고 말하면 속도를 조금 줄이게 된다.   2022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민생활체육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보행 속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완보, 산보, 속보, 급보, 강보, 그리고, 경보이다. 이들 중에 급보부터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 있던 경보 수준까지의 세 단계는 일상적 보행 속도는 아니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시간당 4.8km 라고 한다. 노인의 평균 보행속도는 1분에 64m 로, 시속 3.8km 였다. 완보와 산보 사이에서 완보에 가까운 속도이다. 속보에 근접한 젊은이들의 속도에 비하면, 시간당 1km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6,472명을 비교한 결과, 가장 빠른 속도였다(The Journals of Gerontology, 2023.04.08, 분당서울대병원).   한국 국민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전 세대에서 빠르게 달려 왔던 노년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세대와의 조화에 신경이 쓰이고 눈치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지금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한다. 청년들과 노년들이 열심과 성취에 대해 비교 할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의 생물학 교수 카라 월 셰플러는 걷는 속도로 대인관계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실험했다. 시애틀과 우간다 중부의 무코노(Mukono)라는 타운의 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1,700명이상의 사람들이 걷는 시간을 재고, 분석하여, 2018년 9월 호 <PeerJ-Life and Environment>에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혼자 걸을 때의 속도는 우간다의 사람들이 시애틀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평균 11%가 빨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그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동반했을 때의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약 16%가 더 느렸다고 한다. (2018.10.02. 뉴욕타임스 특약-한국일보 기사 참조)   환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애틀은 여유로운 도시였다. 나도 대학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앞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시애틀의 주민들이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오히려 빨랐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와 걸을 때 빨랐고, 다른 남성보다 앞에 서면, 그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남녀 모두 아이들과 함께일 때도 속도가 빨랐다. 자녀를 안고 동행할 때의 보행 속도가 혼자 걸을 때보다 20% 빨랐다는 부분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셰플러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의 사정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사회의 대인 관계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걷다가, 가끔 연상되는 말이 있다. ‘혼자 가려면 빨리 가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인도의 격언이다. 우리 사회는 늘 앞에 가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 일등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 사는 사회는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없고, 후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들을 제치며 치열하게 얻어낸 내 승리의 보상을 가족 외의 남들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썬다 싱이 30살 때, 티베트의 눈 산을 넘게 되었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높이 쌓인 눈길을 걷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파른 비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를 구조하여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행하던 동료는 나도 힘들다며, 먼저 가 버렸다. 썬다 싱은 그 부상한 사람을 등에 업고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어렵게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걷는 중에, 얼어 죽어서 쓰러져 있는, 앞서 먼저 떠났던 친구를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체온으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싱은 부상자를 업고 힘들게 걷는 동안, 더워진 체온 때문에 부상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잘 사는 자들의 힘과 젊은이들의 희망이 손을 맞잡아야 따뜻해 수 있다. 먼저 살면서 쌓은 것들을 나누는 자들과 뒤에서 뛰는 자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가 어두워진다. 지치도록 달려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청년들에게 그 연령대를 살면서 많은 것을 갖게 된 어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만 돈을 주면 자기들끼리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회에 빵을 나누면, 좋은 나라에서 그 후손들도 함께 잘 살게 된다. 먼저 얻은 부가 사회의 공존 자원으로 흘러야 한다. 그 격차가 줄어야, 서로의 손이 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한 속도가 시속 2~3마일(4~4.8km)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대열에서 어떻게 남는 시간을 썼을까? 그들은 가끔 뒤돌아 보며, 뒤에 오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부축하거나, 업기도 하고, 마차에 앉히느라 그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노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청년들을 잠잠히 축복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시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가시던 하나님도 그런 그들을 보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국이 함께 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1:31, 29:5).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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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4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세례의 은총의 기적, 그 영원한 각인 ② - 정광숙의
      ‘여성동아’지의 장편소설 현상 공모의 당선작이기도 한 정광숙(1945- )의 가톨릭소설 <순교자의 피>(1992)는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지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일종의 가족사소설 형식을 빌려 탄탄하게 전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지은은 순교자 집안에 밀어닥친 몽유병의 간헐적 발작과 정신분열 증세 및 근친상간 행위 등의 음산한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다.   이 소설의 이런 분위기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면을 상기시키는 비극적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문학 작품 가운데서 비극적 원죄소설의 성격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순교자의 피>가 아닐까 한다. 특히 서구의 비극적 원죄소설들이 가톨릭적 배경 하에서 써진 것이 대부분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점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그것들과 상당한 친근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4명의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6명이 처형된 후 당시의 법대로 시체는 만3일간 방치해 두기로 돼 있었다.” 이 서술은 1866년에 일어난 이른바 병인교난과 관련되어 있다.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조선인들 중의 하나인 이기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인 것이다.   얼른 위 인용문의 첫머리만 보아서는 무슨 천주교 수난사화를 전개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내용을 기록한 무슨 역사소설 형식의 순교사화는 아니다. 순교자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어느 천주교 집안의 후대의 이야기를 가족사소설 형식을 빌려 기록한 가톨릭소설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로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주 간결한 문체로 웅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끌어 가기 때문에 독자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하는 강한 호기심에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숨죽여 가며 다음 장면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은 그러나, 맑고 밝은 내용의 이야기만은 결코 아니다. 아니 상당히 어두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이 몽유병과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병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진(세례명 빌립보)이란 친척과 지은 사이에 벌어진 근친상간 행위, 곧 진이 미성년 학생 지은에게 가한 성폭력 행위와, 지은 자신이 미국 땅에 이주한 뒤 특수한 상황 하에서 벌인 매춘 행위, 또 진이 지은에게 죄를 덮어씌운 채 자살하는 일, 그리고 배경적 역할을 하는 친인척들의 이(李) 정권 하에서의 친독재 부역행위, 또 그런 이들의 권력 붕괴 및 그들에게 가해지는 테러 행위, 지은의 남편(승선)의 자기 아내에 대한 정신적 학대, 승선 자신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세, 그의 다발적 여성 편력과 대학생 제자 폭행 사건, 그리고 그의 아들 준호의 경기(驚氣) 발작 증세… 등 음울하고 비극적인 작품의 분위기 위에 여러 죄악의 세계가 덧씌워져 있는 실상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이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예기치 않게 살인 혐의마저 입고 10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주인공 지은에게 의외로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 것은 이 작품 속의 ‘믿음의 조상’ 격 인물인, 이미 고인이 된 이장현 할아버지의 꿈속에서의 출현이었다.   호호프에 의하면, 이 세계가 비록 죄악으로 타락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신의 은총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런 그 세계는 거룩한 곳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써 이 세계의 죄악과 은총의 변증법적 대립의 상을 그리는 작품이 곧 원죄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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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4
  • 성서와 생활[4]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4)-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크나큰 복음에 대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게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 대로 사는 길이 바로 성취된 복음 안에서 사는 길이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한다.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고 주님의 생명이 나로 천국생활을 구현하게 하실 것이다 이미 성취된 사실인 복음에 감사함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신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와 청결함을 얻게 된다. 마음이 청결함은 매우 중요하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감사가 우리로 풍성한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승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을 때 만이 가능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를 다음과 같이 부탁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주님의 간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의 승리로 인해 믿을 수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시점에서 감사함이 종료되지 않는다. 애굽에서의 구원 이후에 오는 보호하심의 더 큰 구원의 섭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시136:23)고 하신 점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비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에 매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돌보시사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할 자는 바로 그의 자녀들 뿐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생활에 감사로 깨어있는 자가 그분의 자녀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구속 함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늘의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의무이며 성품이 되어야 한다. 감사를 배우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된다.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믿음의 역사를 소망할 뿐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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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2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8회] 주님의 뜻을 위해 부르신 선한 목적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성화로 순복케 하시는 은혜, 감사와 감격의 여정  성경은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을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성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신다는 말씀에서 발견케 한다. 새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주와 복음을 위해 쓰시기 위함임을 찾는다. 주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의 길로 인도이다.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이켜 예수를 창조주 구원 주로 믿어 새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선을 위함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들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역에 순복케 함이다. 이는 주를 믿지 아니하여 거듭나지 못한 채 죄에 머물러 있는 죄인들을 주의 백성으로 회복하시어 주의 나라 확장이 주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몫에 참예이다.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육신이 이끄는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구속이다.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섭리의 화답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도록 하는 몫이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죄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전도의 몫이 존재의 목적으로 사명임을.... 이에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라”고 몫을 발견케 하신다. 거듭난 자들은 주의 영이 있기에 주의 뜻과 요구하심을 믿음으로 순복할 수 있다. 주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그 자취를 좇도록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곧 주께 받은 새 생명의 가치와 새 피조물의 몫은 주의 제자화이다. 이를 알고 선하신 뜻에 몫을 존재의 목적에 두는 새 가치관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사랑을 주께로부터 받았기에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구속함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이다.     모두가 주의 제자가 되게 하는 제자화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주를 믿고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그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심과 더불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 죄라 하신 의미를 연계하여 본다. 또 어떻게 하여야 주의 일을 하오리이까? 묻는 물음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살피도록 이끄신다. 믿는 것이란 단순한 예수의 그리스되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그의 자취를 좇는 것까지이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이를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 이를 확증해 준다. 곧 성경 기록 목적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다. 또 디모데후서 4장 17절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하심과 같은 사명 감당이다.    그러므로 거듭나게 하심의 선하신 목적대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명의 여정임을 알고 실현케 하신다. 복음을 전하여 전도로 승리하는 감사의 여정이 되도록 주님을 위해, 주님을 향해, 주님에 의한 순복의 그리스도 사신의 삶이다. 거듭나게 하시어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이다. 곧 주와 복음을 위하여 순복하는 삶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이며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감사와 감격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새기며..../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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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2
  • 정성구박사 칼럼
      며칠 전 LG 트윈스가 29년 만에 우승하며 정상에 올랐다. 구단주도 선수들도 펜들도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20대에 LG의 우승을 봤던 사람이 이제는 장년이 되었고, 장년 때 LG의 우승을 보았던 사람이 어느덧 노인들이 되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승리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가 하면, 나이든 사람들 중에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꺽꺽 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다른 팀을 응원하는 펜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고 보니 우리 가정도 3대에 걸쳐 LG 펜이었다. LG와 KT가 자웅을 겨누는 다섯 번의 시합은 울고, 웃고 괴성을 지르며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완전히 신들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내 편의 승리가 바로 나의 승리로 착각하는 일종의 대리 만족이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운동과는 열 촌이 넘는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체육 점수는 늘 60점이었다. 겨우 과락을 면하고 턱거리한 셈이다. 나는 본래 병약하게 태어났고, 일제 강점기에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구 떡>을 해 먹던 아이였다. 그러니 발육이 잘되지 않아 4세까지 일어서지를 못했다. 또한 해방은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지구상에 가장 가난했고, 6.25 전란으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도시락을 싸간 일도 없고 미국의 구호물자 옷을 줄여서 입고 미국에서 보내 준 분유를 물에 타서 먹으면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나는 하도 병약해서 목이 너무 가늘어 보이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구야! 너 목 떨어질라! 조심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체육 시간이 제일 싫었다. 그런데 내가 장년이 되고 난 후에 가끔 <야구>와 <축구>를 T.V를 통해 참 재미있게 본다.   최근까지 나는 T.V를 잘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편 방송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요즘 누가 종편 방송의 뉴스를 보는 분들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방송들은 말 그대로 편파 방송이고 고약한 이데올로기와 인본주의 사상을 방송하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어느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의 배경에는 북한의 인공기처럼 생긴 것을 띄웠다. 그래서 나는 방송국에 항의를 했고, 방송국 직원의 ‘윗선에 알아보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요즘 종편 방송국들이 국회 중계방송을 여과 없이 방송하고 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다. 정책 질의는 거의 없고 장관을 불러놓고 이놈 저놈 하지를 않나, 인신공격으로 상대에게 무안을 주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마치 상대를 죽일 듯이 욕하고 빈정대는 국회의원들은 다음번 선거에는 꼭 심판이 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더구나 사기 치고, 거짓말 하고, 돈 해먹은 사람의 동영상을 방송에서 특종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식 밖의 인물들이 국회의원이랍시고,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청문회 후보자를 몰아세우고 면박을 주는 것을 민주투사로 부각시키는 것도 참으로 꼴불견이다. 그러던 차에 이번 야구는 모든 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나는 야구의 룰도 모르고 할 줄도 모르지만, 오래전에 미국 L.A에서 박찬호 선수가 나오는 ‘LA다저스팀’을 구경한 것이 야구장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 경기는 참 재미가 있었다.   40년 전의 일이다. 당시 MBC 청룡의 사주는 이웅희 사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웅희 선생은 언론이면서 정치가였다. 그는 후일 문공부 장관을 거쳐, 용인에서 국회의원만 내리 3번을 했던 정치 9단이다. 1980년대 초 내가 대학 총장이었을 때, 정신 문화원 지도자 교육을 받은 바 있다. 그때 나는 이웅희 당시 MBC 사장과 한 조가 되어 며칠을 같이 보낸 것이 생각난다. 당시 이웅희 사장은 우리에게 MBC 청용(오늘의 LG) 을 말하면서, ‘야구가 참 재미있는 것이 꼭 윷놀이와 같다. 한순간에 순위가 뒤바뀌고 한 방의 홈런으로 역전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것이 야구다’라고 했다. 즉 윷놀이도 상대방의 말이 앞서가다가도 우리 쪽에서 갑자기 <모>와 <윷>이 나오면 상대를 단번에 집어삼키고 세를 역전 시키는 재미와 감동은 야구와 윷놀이가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야구는 투수와 타자들의 고른 실력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야구공도 둥글고, 야구 배트도 둥글게 생겼으니 한 번의 홈런, 한 번의 안타가 전세를 바꾸는 짜릿한 재미는 불안한 현대인들에게는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하지만 우연한 한방, 우연한 안타를 기대하고 살면 안 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한 방에 기대를 걸고 도박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더구나 민주화를 구호로 30여 년 동안 써먹은 방법으로 또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해 엉터리 사기술로 국민을 사지로 몰아가려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한방을 기대하고 사기로 돈을 끌어모으고, 온갖 미사여구와 허풍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홈런을 기대하는 정치꾼들은 이제는 배제해야 된다고 본다. 그리고 기독교계에서도 착실한 성경 연구와 경건 훈련을 쌓아서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일꾼을 키워야지, 자기희생도 없고, 세상의 소금과 빛도 못되면서 우연의 한방이 있을 것이라는 축복의 기대를 가르치면 안된다.   ‘야구는 윷놀이와 같다!’는 이웅희 사장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러나 인생은 야구도 아니고, 윷놀이도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말씀과 성령을 따라서 거룩한 걸음을 걸어야 한다.   <역전인생>은 <오직 말씀>과 <오직 성령>을 따라 사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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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성서와 생활[3]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주 예수그리스도가 베풀 세례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나온 것처럼 장차 아들도 사망을 이기고 나옴을 보여 주신다.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심을 받았다. 죄의 종살이에서 주님의 승리로 자유함을 얻게 된 사실을 감사하게 하신다.    먼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는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감사로 끝나지 않는다. 실로 감사는 구원의 관문인 세례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다. 수많은 악의 세력에서 건지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모든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구속의 감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예표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를 원수 마귀 대적에게서 건지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어 감사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시편 136편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라고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음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신다. 우리도 전에는 악이요, 육이요, 죄인이요, 멸망할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악을 주님이 이기신 사실로 인해 이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감사는 오늘날 주님의 승리로 완전한 감사에 이르게 하셨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눅10:19)주심을 감사함으로 아들의 영으로 충만케 하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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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성서와 생활[2]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2)-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시136:6) 천지창조의 둘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에 노아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조성되어진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땅에 대한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도래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땅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하신다. 땅을 물 위에 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질 나라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권위가 충만한 땅에 대한 약속을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해로 낮을 주관하신 자에게’,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를 더욱 강조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주께서 빛으로,그의 몸된 교회로 큰 광명이 되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손과 팔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친히 구원하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오직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낳으시고 돌보신다. 이에 대해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일이다. 그 일은 아들의 영으로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그의 인자한 사랑을 아는 아들을 통해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준다. 감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자들로 아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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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7회] 지혜로 좇는 사랑 실천과 앎에 대해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리는 제자의 삶으로 순복에 의한 성화  로마서 12장 1~2절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시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권하셨다. 오직 주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일에 참예하여 온전하신 뜻을 위한 사랑 실천에 증거이다. 부르신 목적에 연계로 존재의 몫을 하여 선한 열매로 영광 돌려 드리도록 믿음의 성화를 위함이다. 이 세대는 자신을 위한 자들로 육에 속한 자들이다. 이들은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지 못해 아직도 종의 몫을 우선순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이처럼 주의 영이 없는 이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로마서8장5~8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하심의 이유로 확증해 준다. 주의 영이 없는 자들은 주의 일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의 뜻대로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배움을 갖고 종의 자세로 몫을 하려는 사랑의 실천에 힘써야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복함임을 확증케 한다. 결국 존재의 목적이 주의 복음 전하기에 유익함임을 발견케 한다.    죄에서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자유케 하심은 주와 복음을 위해 온전히 드릴 수 있도록 하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신령한 예배라는 표현으로 삶에서 전도로 이웃들을 살리는 일에 참예하여 주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과 동행임을 확증해 준다. 이를 알고 행할 수 있는 주의 종들은 위엣 것에 가치를 두고 주를 경외하여 사람 살리는 몫에 가치를 두고 믿음을 행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화답하는 여정으로 늘 성령과 동행하는 참 주의 친구로 장성한 성화를 이룬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이에 더 큰 사랑이 없음의 연계이다. 곧 주와 거듭난 자의 사랑의 줄은 어떤 것도 끊지 못할 것의 믿음이다.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절대 지키심과 견인으로 믿음의 성화임을 확증케 한다. 곧 주를 안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과 감사로 기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지혜이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믿음의 성화로 얻는 행복과 기쁨은 주 안에서 진리로 자유케 되어 선을 이루는 것들임을 확증케 한다. 곧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화답하는 몫이 기쁨과 행복의 비결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새 생명의 가치를 알고 말씀에 순복하는 자들은 소망을 갖고 오늘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드리는 지체의 삶임을 확증해 준다. 외식하는 자를 본받지 아니하고 정욕을 위해 구하지 아니하며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과 하늘로부터 온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주의 친구된 주의 백성들의 지혜로 행복이다. 곧 바꿔진 새 가치관의 행복은 풍성한 생명으로 범사에 감사이며 온전케 하는 주의 뜻에 가치를 둔 앎으로 견인된 믿음의 성화임을 확증해 준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행복을 영위하는 지혜의 비결임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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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6회] 주와 복음 위해 사는 새 피조물의 몫
      다시 사신 주님의 자취를 좇는 기쁨과 행복을 알고 행하게 하신 주 은혜 성경은 새 피조물이 된 기쁨과 감사를 주님 사랑과 연계하여 행복한 몫을 발견하게 한다. 그 사랑의 감격과 감동을 체휼하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살리신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변화이다. 더불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몫에 자세를 자각하게 한다. 주께서 목숨을 주고 얻게 한 의인으로 칭의이기에 그 값비싼 구속에 대해 사랑의 계명을 지켜 성화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하여 새것이 되었기에 그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그속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존재의 목적을 갖는 신앙인이 됨이다. 살아도 주를 위함이며 죽어도 주를 위함이라는 종의 존재 목적이며 오직 주를 위해 거룩함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과 선함을 위한 성령의 내주임을 확증케 한다. 주님의 사랑에 의한 십자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더 많은 이들이 주의 백성이 되는 일에 몫을 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랑의 실천 몫이다.   주님처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여 듣는 자들이 주와 합하여 한영을 이루는 거듭남에 초점을 맞추는 정체성을 확증해 준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시어 사단의 일이 멸해지고 주의 것이 된 주의 백성들로 더욱 선을 이뤄가시는 주의 섭리로 승리의 선포이다. 주의 자녀로 회복된 자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새 피조물로서 영생을 누리게 될 주의 것으로 인치심이다. 디모데후서4장6~8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는 신앙의 삶에 유종의 미를 확증시켜 준다. 이를 위하여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명하심이다.   곧 성경은 교육하여 의에 이르게 하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 주의 뜻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후서4장13~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는 확증이다.   그러므로 주의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대로 진리를 사수하는 자들을 확산시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본을 삼게 하심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하신 전도자의 말씀을 살피게 한다. 주의 뜻에 합당히 주의 제자가 되는 일에 몫을 하는 지체들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거듭난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자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원하고 고난을 인내로 기쁨을 일궈내는 자들이다. 곧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주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그리스도 사신의 몫을 하는 자임을 확증케 한다. 거듭나게 하신 목적이 주를 위함임을 알기에 사랑의 빚 진자로서 많은 이들이 주 날개 아래 들어와 쉴 수 있는 구속사역에 참예임을 확증해 준다. 주 경외함으로 인한 살리움으로, 주의 원하심을 위한 행함이 참 행복을 위함임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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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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