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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5] 그리스도인의 영성 -기억의 영성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레26:42.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성취하신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찬양해야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기백성과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26:45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 민15:39 해야한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심,시111:5은 하나님이 그 자녀와 언약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그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시111:4.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신7:19 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돌보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로 그의 심판아래 두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20:8는 명령은 순종의 여부를 알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안식을 통해 육신의 일을 쉬고 성령안에서 살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자하심(사랑)을 찬미하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하신다.   오늘날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며 찬미 드리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멘 예배자를 찾으신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함이 우리의 삶이며 예배이다. 우리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실로 인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 딤후2:8하는 일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23:42라는 강도의 고백 속에 주의 나라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약속한 나라를 구할 때 그 나라를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구제를 기억해 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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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8
  • [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외국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역동성이다. 그 느낌이 상쾌하다. 내 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활발해 진다. 나보다 늦게 걷는 이들이 있으면, 추월도 한다.   아내와 함께 걸으면, 거의 매번 듣는 말이 ‘천천히 걸으라’는 것이다. 따라 걷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힘들다’고 말하면 속도를 조금 줄이게 된다.   2022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민생활체육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보행 속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완보, 산보, 속보, 급보, 강보, 그리고, 경보이다. 이들 중에 급보부터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 있던 경보 수준까지의 세 단계는 일상적 보행 속도는 아니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시간당 4.8km 라고 한다. 노인의 평균 보행속도는 1분에 64m 로, 시속 3.8km 였다. 완보와 산보 사이에서 완보에 가까운 속도이다. 속보에 근접한 젊은이들의 속도에 비하면, 시간당 1km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6,472명을 비교한 결과, 가장 빠른 속도였다(The Journals of Gerontology, 2023.04.08, 분당서울대병원).   한국 국민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전 세대에서 빠르게 달려 왔던 노년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세대와의 조화에 신경이 쓰이고 눈치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지금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한다. 청년들과 노년들이 열심과 성취에 대해 비교 할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의 생물학 교수 카라 월 셰플러는 걷는 속도로 대인관계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실험했다. 시애틀과 우간다 중부의 무코노(Mukono)라는 타운의 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1,700명이상의 사람들이 걷는 시간을 재고, 분석하여, 2018년 9월 호 <PeerJ-Life and Environment>에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혼자 걸을 때의 속도는 우간다의 사람들이 시애틀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평균 11%가 빨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그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동반했을 때의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약 16%가 더 느렸다고 한다. (2018.10.02. 뉴욕타임스 특약-한국일보 기사 참조)   환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애틀은 여유로운 도시였다. 나도 대학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앞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시애틀의 주민들이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오히려 빨랐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와 걸을 때 빨랐고, 다른 남성보다 앞에 서면, 그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남녀 모두 아이들과 함께일 때도 속도가 빨랐다. 자녀를 안고 동행할 때의 보행 속도가 혼자 걸을 때보다 20% 빨랐다는 부분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셰플러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의 사정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사회의 대인 관계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걷다가, 가끔 연상되는 말이 있다. ‘혼자 가려면 빨리 가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인도의 격언이다. 우리 사회는 늘 앞에 가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 일등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 사는 사회는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없고, 후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들을 제치며 치열하게 얻어낸 내 승리의 보상을 가족 외의 남들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썬다 싱이 30살 때, 티베트의 눈 산을 넘게 되었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높이 쌓인 눈길을 걷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파른 비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를 구조하여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행하던 동료는 나도 힘들다며, 먼저 가 버렸다. 썬다 싱은 그 부상한 사람을 등에 업고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어렵게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걷는 중에, 얼어 죽어서 쓰러져 있는, 앞서 먼저 떠났던 친구를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체온으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싱은 부상자를 업고 힘들게 걷는 동안, 더워진 체온 때문에 부상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잘 사는 자들의 힘과 젊은이들의 희망이 손을 맞잡아야 따뜻해 수 있다. 먼저 살면서 쌓은 것들을 나누는 자들과 뒤에서 뛰는 자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가 어두워진다. 지치도록 달려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청년들에게 그 연령대를 살면서 많은 것을 갖게 된 어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만 돈을 주면 자기들끼리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회에 빵을 나누면, 좋은 나라에서 그 후손들도 함께 잘 살게 된다. 먼저 얻은 부가 사회의 공존 자원으로 흘러야 한다. 그 격차가 줄어야, 서로의 손이 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한 속도가 시속 2~3마일(4~4.8km)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대열에서 어떻게 남는 시간을 썼을까? 그들은 가끔 뒤돌아 보며, 뒤에 오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부축하거나, 업기도 하고, 마차에 앉히느라 그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노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청년들을 잠잠히 축복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시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가시던 하나님도 그런 그들을 보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국이 함께 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1:31, 29:5).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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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4
  • 성서와 생활[4]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4)-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크나큰 복음에 대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게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 대로 사는 길이 바로 성취된 복음 안에서 사는 길이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한다.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고 주님의 생명이 나로 천국생활을 구현하게 하실 것이다 이미 성취된 사실인 복음에 감사함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신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와 청결함을 얻게 된다. 마음이 청결함은 매우 중요하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감사가 우리로 풍성한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승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을 때 만이 가능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를 다음과 같이 부탁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주님의 간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의 승리로 인해 믿을 수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시점에서 감사함이 종료되지 않는다. 애굽에서의 구원 이후에 오는 보호하심의 더 큰 구원의 섭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시136:23)고 하신 점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비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에 매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천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돌보시사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할 자는 바로 그의 자녀들 뿐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생활에 감사로 깨어있는 자가 그분의 자녀이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구속 함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늘의 아버지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의무이며 성품이 되어야 한다. 감사를 배우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  감사가 없는 삶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된다.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믿음의 역사를 소망할 뿐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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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2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8회] 주님의 뜻을 위해 부르신 선한 목적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성화로 순복케 하시는 은혜, 감사와 감격의 여정  성경은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을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성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신다는 말씀에서 발견케 한다. 새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주와 복음을 위해 쓰시기 위함임을 찾는다. 주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의 길로 인도이다. 죄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이켜 예수를 창조주 구원 주로 믿어 새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선을 위함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들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역에 순복케 함이다. 이는 주를 믿지 아니하여 거듭나지 못한 채 죄에 머물러 있는 죄인들을 주의 백성으로 회복하시어 주의 나라 확장이 주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몫에 참예이다.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육신이 이끄는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구속이다.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섭리의 화답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도록 하는 몫이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죄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전도의 몫이 존재의 목적으로 사명임을.... 이에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라”고 몫을 발견케 하신다. 거듭난 자들은 주의 영이 있기에 주의 뜻과 요구하심을 믿음으로 순복할 수 있다. 주께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그 자취를 좇도록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곧 주께 받은 새 생명의 가치와 새 피조물의 몫은 주의 제자화이다. 이를 알고 선하신 뜻에 몫을 존재의 목적에 두는 새 가치관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사랑을 주께로부터 받았기에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구속함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이다.     모두가 주의 제자가 되게 하는 제자화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주를 믿고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그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심과 더불어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 죄라 하신 의미를 연계하여 본다. 또 어떻게 하여야 주의 일을 하오리이까? 묻는 물음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살피도록 이끄신다. 믿는 것이란 단순한 예수의 그리스되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주께서 본을 보이신 그의 자취를 좇는 것까지이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이를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 이를 확증해 준다. 곧 성경 기록 목적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다. 또 디모데후서 4장 17절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하심과 같은 사명 감당이다.    그러므로 거듭나게 하심의 선하신 목적대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명의 여정임을 알고 실현케 하신다. 복음을 전하여 전도로 승리하는 감사의 여정이 되도록 주님을 위해, 주님을 향해, 주님에 의한 순복의 그리스도 사신의 삶이다. 거듭나게 하시어 말씀으로 견인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이다. 곧 주와 복음을 위하여 순복하는 삶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이며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감사와 감격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새기며..../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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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2
  • 성서와 생활[3]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주 예수그리스도가 베풀 세례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나온 것처럼 장차 아들도 사망을 이기고 나옴을 보여 주신다.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심을 받았다. 죄의 종살이에서 주님의 승리로 자유함을 얻게 된 사실을 감사하게 하신다.    먼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는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감사로 끝나지 않는다. 실로 감사는 구원의 관문인 세례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다. 수많은 악의 세력에서 건지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모든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구속의 감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예표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를 원수 마귀 대적에게서 건지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어 감사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시편 136편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라고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음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신다. 우리도 전에는 악이요, 육이요, 죄인이요, 멸망할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악을 주님이 이기신 사실로 인해 이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감사는 오늘날 주님의 승리로 완전한 감사에 이르게 하셨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눅10:19)주심을 감사함으로 아들의 영으로 충만케 하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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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성서와 생활[2]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2)-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시136:6) 천지창조의 둘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에 노아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조성되어진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땅에 대한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도래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땅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하신다. 땅을 물 위에 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질 나라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권위가 충만한 땅에 대한 약속을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해로 낮을 주관하신 자에게’,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를 더욱 강조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주께서 빛으로,그의 몸된 교회로 큰 광명이 되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손과 팔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친히 구원하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오직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낳으시고 돌보신다. 이에 대해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일이다. 그 일은 아들의 영으로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그의 인자한 사랑을 아는 아들을 통해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준다. 감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자들로 아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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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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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9] 기후 위기 시대 교회의 사명, 창조 세계의 보전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곽호철 목사  기후 위기는 올여름 기록적인 장마를 통해 우리에게 가슴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극한 기후’라는 말을 남기며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재해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고지대로 혹은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하며 기후 위기의 고통 가운데 있다.     이처럼 창조세계의 신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이는 외면하거나 방임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대처할 과제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지구를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급변하는 지구 생태계 위기는 비단 우리 시대, 우리 교회만의 도전과 관심사가 아니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도 파괴된 숲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초에 창설된 시토 수도회도 다른 영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삼림복구를 위해 나무 다시 심기 운동을 벌였고, 훼손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힘썼다. 우리 시대의 주 관심사인 생태운동(生態運動)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역사에서 진행되었던 일이다.    현재 인류의 주소는 423이라고 한다. 423은 무슨 숫자일까?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이다. 마리아와 요셉,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약 275ppm이었다.   2020년에는 415.49ppm, 2021년에는 423.1ppm,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우리 다음 세대에는 450ppm을 초과할 것으로 예측한다. 450ppm 하에 살아가야 할 우리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극한 기후와 재난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떤 신앙인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철수계획(Evacuation Plan)으로 이해한다. 철수계획은 창조세계에 대한 포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포기하는 것은 창조의 원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지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시고 선한 청지기가 되어 잘 보전하길 부탁하셨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신앙의 선조들은 그 사명을 감당해 왔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환경을 사랑하고 생태 보전을 위해 힘썼다면 더 악화하는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각성하고 선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힘써야 할 것이다.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는 노동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창조세계를 주신 것은 타자인, 우리와 생명세계를 위함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다른 이웃들과 생태계 모든 구성원에게 봉사하고 협력하는 차원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태계 훼손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창조 목적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신성모독이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이 땅에서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대한 방기이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창조 세계의 보전,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께서 주신 근원적 사명이다. 이전에는 소수의 신앙인이 산발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했다면, 이제는 이 땅의 교회와 기독인이 모두 함께, 전방위로 그 사명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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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12
  • 정성구박사 칼럼
      <단식(斷食)>은 특정 목적을 위해서 일정 기간 음식과 음료를 자발적으로 끊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금식(禁食)>은 일정 기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개인적인 결심으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절식>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건강을 위하거나 다이어트를 위해서 일정한 기간 또는 간헐적 단식을 하기도 한다. 우선 금식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금식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요하고 경건한 삶이었다. 그래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은 종교가들은 일주일에 며칠을 금식하는가에 따라서 신앙의 성숙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금식도 형식적이거나, 보여 주기 위한 의식적 종교로 전락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보면 금식에 대해 아주 명쾌한 지침을 주었다. 즉 금식할 때는 외식하는 자들처럼, ‘내가 지금 금식 중이다!’라고 티를 내거나, 일부러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식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거나, 동정을 받으려는 행위는 금식이 오히려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금식하는 자는 사람의 눈길을 의식하지 말고, 오히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진실한 성직자들과 성도들이 금식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 지난봄에 필자는 그리스의 14세기에 세워진 마테오라 수도원을 다녀왔다. 메테오라 수도원은 하늘 기둥 즉 깎아지른 수직 바위 위에 세워진 이상적 수도원이다. AFC 일행들과 마테오라 수도원을 오르는데 억수로 쏟아지는 빗 사이를 뚫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꼭 죽는 줄만 알았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 제국을 무너뜨리자, 정교회 수도사들은 도피처로 마테오라 수도원에 둥지를 틀고 생활했었다. 그들의 삶은 경건한 생활 즉 성경 묵상, 기도, 그리고 금식 등으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독교를 크게 3가지로 보면 동방교회 즉 <희랍정교회>와 서방교회 즉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세워진 <개신교>가 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에는 금욕과 금식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과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데 공통적인 목표가 있다. 우리 한국교회에도 금식기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특히 오산리 금식기도원과 여러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분들도 있다. 대부분의 금식을 하는 분들은 삶의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문제 해결을 얻으려고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몇 주 또는 40일 금식 기도하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상당한 훈련을 받고 해야 하기에, 40일 금식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금식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생사(生死)를 걸만한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간구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흔한 일이다.   나는 천마산 기도원에서 기도 생활을 해 보았지만, 금식기도는 하지 못했다. 기껏 42일 동안 먹어가면서 맑은 정신으로 기도원에서 기도 생활을 해 봤는데, 당시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었다. 교수 생활이란 영적으로 참 메마르기 쉽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에 익숙해 있었지만, 총신대학교회를 개척하고서부터 이론으로만 아는 기독교가 아니라, 생명 살리는 영적인 능력을 얻으려면 기도 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줄 알기에 천마산에 올라가 40여 일 동안 뒹굴고 묵상하며 기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근에 야당(野黨) 대표가 단식 투쟁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절대다수의 의석을 갖고 정책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야당 당수가 무슨 일 때문에 단식 투쟁을 하는지 국민들은 별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식하는 대표의 주변에는 야당에서 일찍이 내로라하는 투쟁 경력이 많은 의원님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사실 단식하면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시절 단식 투쟁으로 병원에 실려 갔고, 황교안 전 총리의 열흘간 단식도 있었다.   단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금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텐트 안에서 지지자들을 만나면서 싱글싱글 웃는 모습에 진정성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지지하는 열성 당원들은 그와 악수 하면서 ‘악수한 손은 씻지 않겠다’하고, 어떤 사람은 넙죽 엎드려 절을 했고, 그 대표는 지지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식하는 사람이 출퇴근도 하고, 여러 모임에 참석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까지 했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카메라에 잡힌 그는 텐트 안에서 뭔가를 오물오물 먹으면서 영양보충을 하는 것이 보였고, 심지어 파운데이션으로 화장하고 있는 것까지 보였다. 그러니 그의 단식은 검찰의 소환을 피해가려는 꼼수라는 것이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술수(術數)에 능한 사람이다. 다수당의 대표가 무슨 꼼수를 부리려고 국회 앞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깔고 그 짓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열흘 단식이면 몸을 가눌 수 없는 것이 통상적인 예인데, 그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번쩍 들고 입장 문까지 읽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찬송가에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라는 가사가 있다. 남자답게, 사나이답게, 떳떳하게 검찰의 조사를 받아드리고, 재판받고 후일을 기약함이 어떨는지! 그러나 그는 끝내 검사의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을 꺾을 수 있는 분들은 조병욱과 신익희를 이은 야당 의원들이 아닐까 한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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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11
  • [칼럼]물가에 심겨진 나무
      예레미야 17장 5절부터 8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신뢰하고 육신을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로부터 떠난 자들은 결국 저주를 받으리라. 주님도 산상보훈의 결론에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자요, 결국 무너지고 말리라.’ 말씀 하셨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이를 믿음으로 받지 아니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지 아니한 자가 자신의 행함이나 육신으로 맺은 열매는 주님과 아무 상관 없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렘 17장 5~8절은 사람을 신뢰하고 육신을 자랑하는 자는 광야 마른땅, 소금 땅에 사는 자와 같다. 열매 없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또 이들은 좋은 일이 오는 때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의 좋은 날은 주님 재림의 그날이요, 그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좋은 일의 날을 보지 못하리라.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를 신뢰하고 그의 소망을 주께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주를 믿는 자요, 이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주가 되신다.   또 은혜, 능력을 베푸시고 특히 성령까지 주셔서 하늘나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은혜의 주님이 되신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하늘나라 영광을 더해주시는 영광의 주님이 되신다. 이 영광의 주님은 장차 7년 대환란날에 나를 순교시켜 주시는 재림하실 신랑 예수님이시다. 이것이 가장 복된 자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 주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며 사는 자가 되십시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택정하여 가나안 땅으로 옮기고 그 율법인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은혜로 살게 하신 것을 가리켜 심겨진 나무라고 했다(시편1:3). 이는 그림자요, 그 실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복음과 진리로 물가에 심겨진 나무이다. 즉 마귀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복음으로 불러 교회로 나오게 하신 것이요, 교회에서 늘 하나님 말씀으로 살게 하셨으니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된 것이다.   이 나무는 하나님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케하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이들은 잎이 시들지 않고 사철 푸르르며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일곱 금 촛대 교회로 옮겨 첫째 부활의 진리 말씀의 생수의 강에 뿌리를 박고 살며 그리스도의 신부되게 해주시니 곧 더 좋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된 것이다.    이 심겨진 나무가 된 우리들은 어떤 극심한 더위나 가뭄의 때에도 항상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으리라. 장차 7년 대 환란의 날에도 너끈히 승리하는 자가 되리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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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11
  • [칼럼 8] ESG 측면에서 본 교회의 기후 위기 대응
    박희정 한국조정협회 ESG위원장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이 주최하는 2023 한국교회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나부터 실천’ 사업이 시작되었다.   회개와 회복 그리고 행동이 필요한 시기에, 생존과 공존을 위한 '나부터 실천’ 다짐은 이미 변화의 시작이다.     기후 위기 ‧ 탄소중립의 환경적 요소(Environment)를 포함한 사회적 책무(Social) ‧ 지배구조(Governance) 등 비재무적 요소를 기업경영이나 투자 결정에서 재무 수익과 함께 적극 고려하자는 전 세계적 움직임이 ESG로 표현된다. 환경(E) ‧ 사회(S) ‧ 지배구조(G)에 대한 논의는 효율성뿐만 아니라 회복력(resilience)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국제기구는 2050년까지 연간 2~5조 달러, 현재보다 2~6배의 추가 기후금융 수요를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후금융 수요도 2050년까지 누적 1,722~2,471조원, 연간 57조~82조원으로 추정되고, 향후 기후금융 부족이 심각할 것으로 전망한다.   정부는 지난 4월 탄소중립 ‧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선포한 바 있다. 골자는 올해부터 5년간 90조원의 예산으로 청정에너지 확대와 저탄소 산업구조 전환에 투자하며 범국민 실천 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 ESG 흐름으로 국가와 기업은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의무적인 영역을 만들고 있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될 예정이며 보다 강력한 법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수출이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ESG 법제화에 더욱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다. 좋은 상품을 만들었더라도, 기후변화 ‧ 탄소중립에 맞지 않게 생산되었다면 그 나라 ESG법에 따라 수출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기후변화 ‧ 탄소중립은 국제기구와 정부 정책에서 그만큼 중요해졌다. 따라서 법으로 기업과 개인의 활동을 옥죄기 전에 먼저 대비하고 변화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 명령하셨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세상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사명과 참여를 강조하는 말씀이다.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와 저출산, 불평등과 양극화의 문제는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를 취하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인한 무책임과 무질서의 모습이 투영된 듯하다. 이러한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올바른 기후 위기 인식을 통하여 개인은 친환경 제품 애용, 냉난방 적정온도 유지, 쓰레기 재활용 분리배출, 이면지 재활용, 절전형 조명, 개인용 텀블러 이용 등으로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으며, 교회는 정기적으로 기후환경 교육을 실시하여 교인들의 인식개선에 앞장서고, 교회 내 전기충전소와 자전거 거치대 설치, 인터넷 전자 주보 이용, 자가용 차량 대신 교회버스나 대중교통 이용 등을 통해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지구환경을 회복키시고 지속가능하도록 변화된 돌봄의 행동을 적극 실천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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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칼럼]재림이 늦다고 하는 자
      마태복음 24장 48절부터 51절에서 그 주인이 와서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리니 그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재림 후 복 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정한 때에 따른 양식 나눠주는 자이다. 또 신실하고 현명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오늘날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금촛대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사자를 통해 환란 날 이기는 자들을 배출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는 자이다. 이들은 정한 때에 따른 양식을 나눠주는 자들이니 이는 곧 요한계시록이 그 핵심이다. 계10:2의 펴 놓인 작은 책을 먹고 다시 예언하는 자이다.   이들은 자기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하는 자요, 이들이 신실한 종이다. 또 재림하실 주님이 그 지혜와 그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잘 깨닫고 인도 받는 자가 곧 현명한 종이다. 이들을 주님은 ‘복 되도다.’ 라고 하신다. 반면에 주님은 악한 종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속으로 내 주인이 오시는 것이 늦어지리라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종말에 조롱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고 하는 자들이다(벧후3:3-4). 이들은 주일학교 때부터 주 재림이 가까웠다 했으나 지금 50살이 됐는데도 똑같이 주 재림이 가깝다 하고 있으니 내 생전에 주님 재림이 있겠는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곧 악한 종들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겔12:25과 같이 말씀하신다. 네 생전에 내가 말한 것을 다 이루리라. 더이상 늦지 아니 하리라. 아멘이다. 또 악한 종은 자기 동료 종들을 때리며 술주정뱅이들과 먹고 마시는 자라고 하신다. 왜 동료 종들을 때리는가? 주 재림이 속히 오리라 전하기 때문이다.   또 금촛대교회에 주신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열렬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때린다. 악한 종들은 주 재림이 속히 오리라는 것을 믿지 아니한다. 또 장로교 시조 칼빈 신학자도 요한계시록을 다루지 않고 인봉한 책이라 했거늘 어찌 함부로 계시록을 말하는가? 라고 논쟁하고 결국 이단이라 정죄하며 때린다.   그리고 ‘술주정뱅이들과 먹고 마신다.’ 했다. 이는 일반 술 취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찌 하나님의 종들이 술을 먹을 수 있는가? 이는 암6:6에서 이를 잘 깨닫게 하신다. 포도주를 대접으로 마시는 자, 즉 예수의 속죄구원의 복음으로만 만족하고 있는 자를 가리킨다. 또 온 몸에 기름을 바르는 자, 즉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요셉의 고난을 대비하라는 것이다. 첫째는 7년 환란날 양식을 대비하라. 둘째는 일곱영으로 충만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또 그런 자가 복 있도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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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7
  • [칼럼 7] 기후 위기에 대한 창조신학과 기독인의 역할
      아신대 조직신학 한상화 교수  오늘날 전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정의상 단순히 극단적인 날씨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물 부족, 식량 부족, 해양 산성화, 해수면 상승, 생태계 붕괴 등 인류 문명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하는 전 지구적 위기의 상태를 의미한다.      많은 인자가 계속해서 기후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지난 50년간 관측된 지구온난화가 그 주요 원인이고 이는 대부분 인간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지구 온도 상승을 가능한 섭씨 1.5℃ 이내로 제한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위해 향후 2050년도까지 탄소중립의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한다는 계획이다.      탄소중립이라 함은 인간 활동에 의한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감소시키고, 흡수량을 증대하여 순 탄소 배출량이 제로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국가와 기업이 녹색 경영과 녹색 성장을 꾀함으로 미래를 향한 지속가능성을 추구해야 함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모두 생태 친화적인 삶의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위기의 때에 교회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 기후 위기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홈(home)인 지구를 잘 다스리고 보존해야 할 본질적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환경 문제는 일부 환경 보호 단체나 운동가들의 몫이라 여기며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머나먼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이켜야 할 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 예배와 설교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에 대한 메시지와 자연 친화적 삶의 양식에 대한 강조는 거의 부재하고 성도들의 교회 생활 안에서도 그와 같은 실천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환경주의나 자연보호라는 말이 아니라 창조 세계 돌봄이라고 표현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자연 세계를 이해할 때 기계적인 체계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인류가 당하고 있는 기후 위기의 문제는 신학적 문제요 신앙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이 문제는 단순히 성경과 복음을 떠난 인본주의적 사회 윤리 사상이나 해방신학의 고유 주제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이라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이자 언약 백성의 순종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변화된 삶의 양식은 생태 친화적 삶의 양식이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독교 신앙 진리의 일부인 것이다.     오늘날 기후 위기의 문제는 각 로컬 교회 공동체에 속한 기독인들의 구체적 삶의 변화에서부터 그 해결의 열쇠가 있으므로 한국교회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신행일치의 생태 윤리 실천 운동을 펼쳐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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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7
  • 1주기가 오기 전에
    툭 - 투둑 - 아침부터 하늘이 꾸무럭 거리더니 흙냄새가 올라온다.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제발 빗나가길 바랐건만. 빗줄기나 햇볕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물을 챙겨온 사람들 사이에 무릎 보호대와 목장갑을 착용하거나 피켓을 챙겨드는 이들도 보인다. 하얀 베일과 회색빛의 긴치마를 입은 수녀님들은 우의 위로 입은 보라색 조끼를 서로 묶는다. 그 뒤로 우산을 든 손에 십자가를 쥔 이들이 있다. 자세히 보니 나무결이 보이는 손십자가다. 이름들이 새겨있다.   탁! 하나 , 두울, 세엣 , 탁! 둥둥-두두두두두둥…딱! 북 소리에 맞춰 함께 기도하고 기도하는 길고 긴 행렬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앞선 이들은 목사님, 신부님, 스님, 교무님 그리고 ‘10.29이태원 참사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하라’는 흰색 글씨가 쓰인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유가족들이다. 빵 빠아앙! 빵빠앙! 경찰이 행진신고에 따라 안전을 위해 합법적으로 도로교통 정리와 안내를 이어가지만 간혹 울리는 감정이 실린(것 같은) 경적소리에 행렬을 따라가는 이들의 고개가 돌아가곤 한다. 희생된 아이를 기억하며 간절히 기도의 걸음을 이어가다 유가족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 중 두 분의 발언 일부를 풀어 싣는다.   “지난 6월에도 여기에 왔었습니다. 초여름이었죠. 8월입니다. 가로수에 벌써 낙엽이 지려고 합니다. 우리 유가족의 가슴에는 가슴이 없습니다. 속이 뻥 뚫렸습니다. 어느 때는 너무 꽉 차있습니다..! 앞에서 걷는 분들 절하실 때 보면 다리가 전부 제 다리가 아닙니다. 너무너무들, 다들 아픕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제 아이를 영안실에서 마주했을 때 형사 두 분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흰 천을 벗기려고 손을 내미는데, 아이의 손을 잡아보려고 내미는데 눈빛들이 너무 분주합니다. 무언의 압력입니다. 내리지 말라고 보지 말라고. 여기 계시는 시민 여러분..! 다음에 어떤 참사가 있으면 절대로, 절대로 장례를 먼저 치르지 마세요..! 흰 천을 꼭 거둬보세요..! 아이의 손을 꼭 잡아보세요..!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 꼭 한 번 안아주세요. 저는 그걸 못 해 너무나, 너무나 아이한테 미안합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 되었습니다 …”   “눈에서 피눈물이 나옵니다. 국가는 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를 외면하고 있을까요. 그때도 국가는 없었고 지금도 국가는 없습니다. 왜 우리 아이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요. 왜 응급처치 한번 제대로 못 받아보고 왜 희생 되었을까요. 왜 다목적체육관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신원을 확인하게 됐음에도 유가족들에게 신속히 인계하지 않고 그 먼 서울 각 지역으로 흩트려 놓고 우리 유가족들을 두 번이나 죽였을까요 …”   유가족들은 ‘희생자 이송 및 조치’에 대해서만도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책임있는 진실된 답변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 “누가 용산다목적체육관으로 희생자를 옮기라 지시 했는가? 그리고, 거기서 전국의 병원으로 희생자를 다시 옮기라고 지시했는가? / 왜? 우리 아이들이 서울 외곽 영안실에 있었나요? / 왜? 우리 아이가 영안실에서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나요? / 왜? 아이 핸드폰이 용산경찰서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보호자가 주라고 하는데 수사중인 물건이라고 안주었는지? / 왜? 압사사고가 분명한데 마약검사를 진행하자고 하였는지? / 왜? 아이가 지금도 구급일지를 달라고 하는데도 확인이 안되는지? / 왜? 영안실에서 아이를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재촉을 하였는지? / 신원확인 한 구급대원의 구급일지를 순천향병원에 아이를 인계할때 함께 인계 했음에도 변사체 처리한점 / 친구가 보호자로 구급차를 탔었고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부모가 구급대원의 연락을 받고 병원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신원조회를 한 점 / 부모보다 연고지 공무원이 더 먼저 마지막 안치된 곳을 알게 된 점 / 나체로 부모에게 인계된 점 / 검안과 검시를 두번씩 한 점 / 마지막 검안 당시 부모에게 동의를 얻지 않았고 참여시키지 않은 점”(생명안전시민넷 최희천 교수-“10.29 참사의 경험을 통해 본 생명안전기본법의 의의와 필요성”중에서)   심지어 참사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났던 실권자들은 복귀했다. 8월초 시민분향소 앞에서 진행된 추모와 연대기도회에서 고난함께 전남병 목사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다.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면 그것이 사회적 재난”이라 하였다. 또 “우연한 사고라 할지라도 그것을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느냐, 사회 전체가 숙고해야 하는 사건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10.29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된다”고 하였다. 왜 내 가족이, 사랑하는 이가 목숨을 잃었는지 알아야 그때서야 애도가 시작될 수 있다. 부디 1주기가 오기 전에 온전한 애도를 시작할수 있도록, 다양한 그리스도인들께서 함께 기도하며 동행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목사·NCCK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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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06
  • [칼럼 6] 지구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생명신학포럼 총무 이박행목사  지금은 지구 비상사태이다.  매우 이례적으로 극단적인 이상기후 현상의 빈도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살인적인 폭염, 엄청난 폭우와 대홍수, 통제 불능의 태풍, 빈번한 산불, 극심한 가뭄 등 지구 조절 시스템이 붕괴 직전이다.   지금 우리는 매우 긴박한 ‘기후 비상사태’에 처해 있다. 이 같은 위기의 원인은 산업화 이후 인간이 내뿜는 '탄소'다.   그래서 전 세계는 지금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 순 배출량을 '제로'로 만들자며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회(IPCC)가 최근 발표한 제6차 보고서에서 보듯, 전 세계적으로 탄소 감축을 위해 합의한 행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무한 경쟁과 무한 성장을 추구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 폐기를 반복하고 있는 탐욕의 악순환은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금 당장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 사회적 지위, 행복감을 확인하는 소비지향적 삶을 끊어내고 기후 위기에 비상하게 대처해야 한다.   함께 지속 가능한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  전 세계 과학자들은 2028∼2034년에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 높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상 시기보다 10년이 앞당겨졌다. 1.5℃를 넘어서면 기후재앙이 일상화하고, 상황을 돌이킬 수도 없게 된다. 1.5℃는 인류 생존을 위한 일종의 마지노선이다.   이를 지키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과 자연 파괴를 최소화하는 생태적 경제체제로 바꿔야 한다. 즉,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인해 자원이 고갈되고 온실가스와 쓰레기는 한없이 늘어나는 단선형 경제에서 벗어나, 생산 소비 폐기의 과정이 순환되는 순환 경제로 전환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는 생태적 삶을 실천하여 에너지 수요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생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육류보다는 곡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며,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과포장 등의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대중교통을 즐기며 전기차로의 전환에 힘쓸 것을 호소한다.   생태사회로 전환을 촉구하는 정치 윤리적 책임을 수행해야!  전 세계가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43% 감축하고, 2050년까지 배출량을 제로화하는 탄소중립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이 일은 각국의 정부와 기업이 힘든 희생을 각오하면서 실행하려고 할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다.   이에 정부와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노력을 획기적이고도 과감하게 축소하여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체계에서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산업체계로 구축할 것을 촉구한다.   과연 지구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올 것인가? 종말에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지지 않고 총괄 갱신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기억하며, 모든 생명과 더불어 공생 공존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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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5
  • [변두리 소수자③] 참 떡 믿음
    ◇무교병 2015년 4월, 케냐에 도착 한 후, 전임 선교사로부터 사역을 인계 받고 거의 1년 동안, 신학교 설립을 위해 부지를 매매하는 중이었다. 주일 오후에 갑자기 미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 부부를 파송한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것이었다. 혼신을 다해 충성한 종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셨는지, 60회 생일 새벽에 주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 목사님은 신학교 시절부터 함께 기도하며 동역해 오던 나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함께하던 선교 정책에도 갑자기 공백이 생겼다. 당시 케냐의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합의하여, 나는 다른 곳에 담임목사로 청빙 받은 것도 사양하고 아프리카에까지 들어 왔건만, 갑자기 혼란스러운 처지가 된 것이다.   우리의 선교 베이스캠프는 나이로비에서 서북쪽으로 약 10시간 운전 거리에 있는 해발 4,321m의 엘곤 산 중턱에 있었다. 그리고 차로 6시간 반경 안에 있는 23개의 마을에 각각 교회와 학교를 세워서 후원하고 있었다. 주중에는 현지 지도자들을 만나 공부하고 후원 사역을 하다가, 주일에는 한 교회씩 순방하며 말씀을 전하곤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파송교회 담임목사의 유고 후 사역 방향을 위해 기도하던 중, 그 주일에는 내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방문했던 티티맷마을(Titimet)에 가서 예배하기로 하였다. 당시 그 교회는 교회 건물이 없어서, 그 지역의 유일한 공공건물인 초등학교의 한 교실을 빌려 예배하던 상황이었다. 그 날 좁은 교실에 빽빽이 서서 찬양을 하는 중에, 찬양지도자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먹먹한 내 마음에,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의 말씀과 함께 단순하고 명확하게 사역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세워주셨다. 그 날 말씀을 전하며 그 내용을 유쾌하게 선포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음식 공급을 체험한 사람들이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떡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배부른 떡’, ‘모세의 떡’, 그리고, ‘생명의 떡’이었다. 이는 육신에 필요한 양식,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모이는 무리, 그리고, 참 구원자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알아보는 참 믿음! 나는 이 세가지를 ‘CCC’, 즉, ‘Corn, Church, Christ’ 라 부르고, 이후 사역 기간 동안 선교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먼저, ‘배부른 떡’으로는 양식과 의료 지원, 신발 보급 등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물리적 공급을 했다. ‘모세의 떡’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의 헌신과 훈련, 청소년들의 건강한 영성과 위생교육, 어린이들을 위한 복음주입을 위해 프로그램화 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공급과 사역 활동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구원 받고, 주님으로 믿어 따라가는 삶, ‘참 떡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를 계속 상기했다.   케냐 인구의 84%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구교를 포함한 수치이지만 어느 시대에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없었고, 국제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같은 선교단체에서도 케냐를 ‘미전도 지역’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런 곳에 왜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필요할까?   신앙의 고백과 표현, 찬양은 많으나, 교회 밖에서 참된 믿음 생활이 없어 혼탁한 사회에 참 복음을 ‘재계몽’시키는 선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쪽과 동쪽은 이슬람, 내부에는 이단들의 도전들이 극심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기독교 경계선으로서 타 종교화를 사수하는 방어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 식민지 역사와 ‘선심성’ 선교의 영향 속에 뿌리내린 기복적 신앙과 의존성을 퇴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속 문화와 혼합된 형태의 신앙에서 ‘탈 무속화’하여, 참된 ‘예수 신앙’을 갖도록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지 않은가? 우리와는 먼 다른 나라, 남 이야기로만 생각되지 않는 현상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기독교인이 국민의 12%이면 그 사회를 기독교화 할 수 있다. 그러나 25%가 되어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면, 그 나라에서의 기독교는 썩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미국은 신앙의 생활화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한때 기독교인이 1~2%에 불과했을 때, 배가 그렇게 고픈 시절, 교회는 민족과 함께 성장을 이끌지 않았던가? 특별한 박해가 있었던 시절에 그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기를 지나 부흥의 전성기를 이뤘다.   그런데 ‘배부른 떡’을 체험한 후, 세상에서 필요한, 세상 사람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의 맛이 약해졌다. 기독교를 종교적인 문화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배고프고 목말랐던 시절에 먹었던 무교병이 이전처럼 감격된 눈물의 빵이 아니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교회들이 팬데믹과 전쟁 등 세계적 진통으로 위축되고, 각 사회의 대립 현상 속에 방어벽을 치며, 세대 간 갈등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동안, 교회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교회들이 지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생명의 떡’을 갈망하는 마음을 부어주셨다.   종교적인 ‘모세의 떡’ 맛에 질린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 하나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생명의 떡’, 독생자 예수를 전심으로 다시 구하는 성도를 찾으신다.   ‘종교성’으로 배부를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허전하다. 무교병이 다시 맛있게 느껴지도록, 광야에 앉아, 배고픔을 느껴 보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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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1
  • [당신의 뇌] 유아 디지털증후군과 정신건강(1)
      뇌 발달의 결정적 시기에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된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말하는 오감의 반응이 극대화돼야 한다. 텔레비전에 대고 아무리 ‘우유’라고 외쳐도 텔레비전은 아이 말에 반응할 수 없고 일방적이기 때문에 상호관계로 연결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TV를 많이 보게 되면 사회적 관계 형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기분변화가 심해지고 짜증을 많이 부리는 등 정서조절 능력에도 많은 문제를 보이게 된다. 언어 이해력이나 표현력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요즈음 유아 자폐증의 아이들에게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영상물을 과도하게 시청했다는 사실이다. 뇌가 급진적으로 발달하는 이 시기에 텔레비전이나 영상물에 직접 노출되면 뇌는 그대로 그것들을 흡수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기 시작한다.   어떤 3살 된 남자아이가 생후 8개월부터 영유아 디지털기기를 접하면서 병이 들기 시작한 사례이다. 이 엄마는 영어 영상물을 접하면서 남다른 열정을 갖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을 시키면 자연스럽게 외국인처럼 영어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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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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