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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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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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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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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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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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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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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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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기의 뇌 발달 (2)
    청소년기는 학습기억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다. 뇌의 신경회로망이 10세 전후로 급격히 성장하여 완성되면서 학습기억이 10세 전후로 급격히 증가하고 25세에 절정에 이르다가 35세에는 안정적이고 60세 이후에는 급격히 줄어들어 신념기억이 크게 우세한다.    뇌 구조상의 차이가 청소년기의 남, 여 행동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측두엽의 일부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신경세포가 11% 더 많다. 그래서 여성의 언어가 톤이나 멜로디에 탁월한 능력을 갖게 된다. 뇌의 좌우 대뇌피질을 연결하는 신경다발인 뇌량이 여자가 20%정도 더 크다. 특히 후두엽 부분에서 더 두드러진다. 뇌량은 시각이나 주변의 공간인식 그리고 언어이해와   관계되는 영역들을 연결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좌우 반구를 이어주는 전교련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크다. 그래서 여성들이 정서와 관련된 감각과 말솜씨가 더 뛰어난 것이다. 남자들은 좌반구보다는 우반구에 있는 대뇌피질이 더 두껍다. 반면 여자들은 양쪽 반구의 대뇌피질 두께가 같다.    감정의 뇌인 변연계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크다. 그래서 여성이 우울증에 더 잘 걸리는 소인이 된다. 남성은 정서, 성, 공격성을 지닌 변연계 시스템의 여러 구조에서 뇌가 활성화 되어있으며 여성은 감각, 몸단장, 즐거움, 정서 등과 관련된 부분의 뇌가 활발하게 움직인다. 대뇌피질의 활동에서도 남녀의 차이를 볼수 있다. 시각(보는 것),청각(듣는 것),그리고 촉각(느끼는 것)등 외부세계를 이해하는 능력(공간인지)은 남성 쪽이 더 우세하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정서적 기복이 심하다. 만 15세까지의 10대들은 자신들이 만 10세였을 때보다 감정조절이 훨씬 어렵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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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바른 앎에 의한 믿음의 성화
    이웃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여 믿음의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   성경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이들을 향해 바른 구원의 서정과 믿음의 성화를 제시해 주셨다. 주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이를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고 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하시어 분별케 하셨다.    구원의 섭리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시어 이웃을 사랑하여 전도로 계명 지킴임을 확증케 하신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이다. 이를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 전도로 구속사역에 성령과 동행하여 계명을 지킨 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메시야인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이심을 믿고 이름을 부른다할지라도 제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 곧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다면 믿음이 온전치 못하여 생명에 이르지 못함을 확증해 주셨다.    이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시어 지혜를 얻게 하신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의 나라 확장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 행함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섭리이다.    그러므로 사람 살리는 영혼구원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게 한 목적임을 알게 된다. 또한 전도로 구원에 이르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많아지도록 지체들의 서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제자 화에 존재의 목적을 두고 이를 행하도록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늘 말씀을 묵상하며 지혜를 얻게 하신다. 이런 자에게 성령께서 주 경외하는 법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구원의 서정으로 순복하여 좇도록 말씀을 주셨다.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주님 주신 사랑으로 평안을 누리며, 생명 주신 기쁨으로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과 동행임을 확증한다. 믿음과 성화의 여부는 주의 뜻을 이루는 구속사에 존재의 목적을 삼고 십자가를 지고 좇는 행함이다.  주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증거 하심과 같이, 믿음의 성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모범을 보이신 주님의 그 자취를 좇아가는 제자 화에 충성임을 확증케 하신다.    즉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하신 말씀에 순복하는 믿음과 성화이다. 이와같이 예수를 영혼구원자로 믿고 영이요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증거하여 주의 제자 화하는 열매로 달란트를 많이 남기는 사랑 실천의 성화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를 믿고 주를 경외하게 하셨음을 확증하는 바이며, 믿음의 성화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사람 살리는 구속사에 성령과 동행하는 사랑 더해감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오이코스대학원객원교수·아태아지도자선임연구원·바이블아카데미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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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향유옥합] 웃다가도, 벌어지는 입술 안타까워
      아주 어린 꼬마일 적에 우리 동네에는 여러 별명으로 불리는 이웃들이 있었다. 비단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길을 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그런 분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꼬마들은 ‘혹부리 할아버지’, ‘곱추’, ‘난쟁이’, ‘언청이’ 같은 단어들을 아무 생각도 없이 내뱉기 일쑤였다. 이런 어릴 적 기억을 끌어낸 건 필리핀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이런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이런 질병들을 ‘후진국 질병’이라고 혼자 이름 붙였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이런 질병들이 필리핀에서는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런 질병들을 부촌이 아닌 빈민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 유전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발병 원인은 태아 시기 산모의 영양부족이기 때문이다.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순구개열이 심한 ‘안드레이’라는 아기를 만났다. 단순히 입술과 인중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입천장까지 크게 갈라져서 수유조차도 어려워 보였다. 아기는 또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나를 보고 활짝 웃을 때면 기분이 좋아 같이 웃다가도, 마치 이 나간 부채처럼 벌어지는 입술과 훤히 보이는 입천장이 못내 마음이 쓰렸다. 아직은 뭘 모르는 초짜 선교사가 이 예쁜 아가를 수술시켜줘야겠다는 생각에 아이 엄마와 안드레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안드레이가 수술을 할 수 있는 개월 수는 되지만 현재는 불가하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15개월이나 된 아이가 고작 6.7kg이라니. 5개월도 아니고 15개월... 게다가 영양실조에 폐렴까지 있다며, 일단은 폐렴 치료를 먼저 시작하고, 최소 몸무게를 9kg까지는 늘려서 와야 수술이 가능하니 아이에게 살도 찌우고 영양도 챙길 수 있는 페디아슈어라는 분유를 먹이라고 했다. 아이를 수술시켜 환하게 웃는 얼굴을 곧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영양실조와 폐렴이라는 복병에 적잖이 당황했다. 장기전이 될 줄도 모르고 그저 마음만 앞섰던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약국에서 안드레이에게 먹일 분유를 샀다. 며칠 후 사역지를 돌다가 안드레이와 안드레이 엄마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고 안드레이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하니 잘 먹여야 한다고 당부를 하던 차에 나를 당황하게 한 그녀의 한 마디. “왈라 낭 가따스 뽀” 한국말로 “분유가 없어요”다. 고작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분유가 없다 하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용량을 잘못 탔나?’ 하는 생각도 잠시 엄마가 자신 뒤에 매달려 빼꼼 내다보던 아이들을 가리킨다. 지금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다섯. 바깥에 놀러 나간 큰 녀석들까지 이 집에는 9명의 아이들이 있다. 배가 고픈 아이들이 엄마가 자리를 비운 틈에 분유통을 보고 마구 먹어댄 것이다.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머릿속에는 저거 비싼 건데 하는 계산들이 온통 뒤죽박죽인데, 다행히도 마음 한 켠에 측은지심이 몰려왔다.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배가 고플까. 빈민촌에서 아이들 9명을 건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미안한 마음에 주눅이 든 엄마를 다독이고 아이들 먹을 비스킷과 약간의 쌀, 그리고 계란 한 판을 사주었다. 입이 많으니 곧 이것도 금방 동이 날 터이지만 안드레이가 9kg이 될 때까지 분유를 건드리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다른 아이들의 먹거리도 챙겨야만 한다. /필리핀 빈민지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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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건강교실] 신체 운동과 스트레스 해소
    신체 운동은 신체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연구에 의하면 스트레스는 각성상태를 초래하여, 정신적 경계상태를 쉼 없이 유지하게 한다. 호흡은 거칠어 질 수 있고 심박수는 빨라져 혈압의 상승이 초래되기도 한다. 또한 인체의 대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운동은 그 형태와 종류와 상관없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각종 임상 연구에서 운동은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 등을 대처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보고된바 있다. 그러므로 무리하지 않는다면 야외 활동은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에 도움을 준다. 성공적인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아래와 같은 처방을 제안한다.   먼저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거나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다면 스포츠 의학 전문의와 상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자칫 자신의 운동목표치를 달성하려고 무리를 하다가는 잘못된 습관과 자세로 인해 예기치 않은 질환을 야기할 수 있다.   둘째로 달리기 전에 충분히 걷기 운동을 할 것을 추천한다. 걷기 운동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피트니스 레벨을 서서히 끌어 올릴 수 있다. 걷기 운동은 관절의 유연성 향상과 근력 강화에 좋다. 단, 무릎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아스팔트 길보다 흙길이나 잔디 등에서 걷는 것을 추천한다. 처음부터 강도 높은 운동을 하면 신체에 과부하가 걸릴 수 있고 부상의 염려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셋째로 본인이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운동은 그 형태와 종류에 상관없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운동을 하면 동기부여가 되고 스트레스 해소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로 운동을 중요한 약속을 지키듯이 스케줄을 잡아서 하기 바란다. 친구와의 약속이나 회식만 스케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운동도 자신의 스케줄에 꼭 포함시켜 규칙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에게 배려해야 한다.   다섯째로 운동은 친구들과 함께 하면 좋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나와 함께 하고자 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동료, 친구, 가족과 함께 연습하고 경쟁한다면 새로운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한양대학교병원 정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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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보리떡의 진리 (1)
      우리는 이미 기드온과 그에 속한 300명 용사에 대해 상고하였다. 이 같은 종들을 오늘날도 똑같이 뽑으시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신령한 역사도 살펴봤다. 하나님은 사사기 7장13-14절에서 기드온을 적군 미디안 진영으로 가게 하셨다. 그들이 꿈꾼 이야기와 해석을 듣게 된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서 장막에 이르러 쳐 무너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이 꿈을 그 동료가 해석한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이를 들은 기드온은 곧바로 이스라엘 300명 용사에게 말하되 ‘하나님께서 미디안군대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도다.’ 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보리떡 한 덩어리이다. 이는 기드온의 칼이라 했으니 이 칼은 하나님 말씀을 가리킨다.    즉 보리떡 한 덩어리인 기드온의 칼은 첫째부활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보리는 모든 곡식 중 가장 먼저 익은 곡식이다(왕하4:42). 죽은 자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이 곧 보리와 같다(고전15:20).    또 이 부활의 첫 열매에 함께 붙은 자들 즉 첫 열매들은 주 재림 시에 그에게 붙은 자가 되어 성도들 중에서 제일 먼저 부활한다. 즉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서 말씀하신바 ‘그러나 부활은 각각 자기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 붙은 자가 되게 하신다.’ 바로 이들이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는 자들이다. 이 첫째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곧 보리떡의 진리이다.   요한계시록의 핵심도 하나님께서 장차 7년 환란을 성도들에게 겪게 하시어 그때 악한 자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세우고 성도들을 그들에게 붙이는 것이다.    3년 반 동안 고난, 핍박받으면서 신앙정절을 끝까지 지켜 결국 순교케 해 주시는 것이다. 앞서 말씀 상고한 바와 같이 환란 날에 순교자들이 주 재림 시 곧 첫째부활영광을 받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됨을 예언해주시고 있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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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5
  • 기드온과 300명 (2)
      앞서 기드온이 왜 큰 용사라고 부르셨는가를 깨달았고 이어서 그에 속한 300명 용사를 상고하고자 한다. 먼저 기드온에게 나온 32,000명중에서 처음 돌아간 22,000명은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위해 자신들의 열정을 다해 적과 싸우러 온 자들이지요,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전쟁임을 깨닫지 못하고 수많은 적군을 보고 두려워하며 그 두고 온 가족걱정, 전쟁걱정, 자신의 안위 등을 걱정하는 자들 즉,  육적신앙인임을 보여줬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문제가 생기고 큰 환란이 일어났을 때 그 문제나 큰 환란만 보이고 그것들을 주관 섭리하시는 실상 되신 예수님이 안보이면 우리들도 이 돌아간 22,000명처럼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은 자 1만명은 기드온과 같은 신앙안목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도구로 쓰시며 이스라엘을 구원시키실 것을 확신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참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들과 같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물 먹을 때 무릎 꿇고 벌컥벌컥 마셨다. 이는 마치 적에게 항복한 자의 자세이다. 또 물이 독물인지 오염수인지 무분별하게 다 마셔버리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물을 손에 담아 핥아먹은 300명은 무엇을 나타내나요? 이 300명의 용사들은 물을 미리 구별하여 손에 떠서 맛있게 먹는 자들이다. 이것이 용사로서 합당한 자인 것이다. 물먹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는 것을 가리킨다. 즉 에베소서 5장 26절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신다는 말씀과 같다. 따라서 더욱 중요한 그 실상은 바로 요한계시록 10장 2절의 천사 손에 있는 펴놓인 작은 책을 가져다 꿀처럼 달게 남김없이 먹는 것을 계시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말씀, 주 재림의 예언의 말씀을 잘 깨달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영 즉 일곱 영을 부어주어 또다시 예언하리라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은 우리들에게 요한계시록 10장 8-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천사의 손에 펴놓인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으라. 그리고 네가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11)’. 이와 같이 종말의 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기드온과 300명 용사 같은 자리에 들 수 있기를 사모합시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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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종말론적 창조론-15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5): 여섯째 나팔 ③ (성전과 두 증인)   힘센 천사의 역할은 11장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고, “성전 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말한다. 그는 성전 바깥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이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글 성경이 그리스어 동사 μετρησον을 ‘측량하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 오해를 유발한다. 그렇게 번역하면 구약시대에 희생제물을 드렸던 성전을 목적어로 이해하게 된다. 앞에서 유브라데 강의 네 천사가 풀려난 이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는 사라졌고 성전은 파괴되어 없어졌다.   그런 오해의 대표적인 산물이 소위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다.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제3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이다. μετρησον 동사에는 ‘숫자를 세다’는 뜻이 있다. μετρησον을 그렇게 이해하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경배를 드리는 자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   이어서 힘센 천사는 그의 “두 증인”을 세웠으니, 그들이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했다. 여기서 나온 “두 증인”은 수많은 이단 종파를 만들어낸 말이다. 촛대와 그것에 기름을 공급하는 감람나무는 성전을 표현하는 전통적 비유어이다. ‘힘센 천사’가 말하는 “두 증인”은 두 사람의 증인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의 권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신약교회들을 가리킨다. 모세는 출애굽처럼 성도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교회적 역할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언하는 역할을 대표한다. 신약교회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실행해야 한다. 굳이 유대인의 증언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면, 성경이 한 증인이 될 수 있으므로 성경을 증언하는 모든 성도를 “두 증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을 악용하여 말세의 “두 증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 또는 마귀의 미혹에 빠진 자들로 대개 이단 종파를 만든다.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서술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두 증인” 부분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두 증인”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목자들은 대개 “두 증인”의 승천이 환난의 시작이며, 그때 공중에서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휴거하여 극심한 환난을 면하게 한다고 예언한다. 심지어는 휴거의 시간표까지 예언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죽으면서 저절로 입증되고 있다. 그때는 언제인가? 요한은 ‘힘센 천사’의 입을 빌려 이방인들이 성전 바깥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예언한 것과 같이, “천이백육십 일” 또는 “사흘 반”과 그 외에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등의 말들을 사용하여 그에게 계시된 사건들의 시간을 서술한다. 이들 시간에 관련된 용어들은 대개 다니엘서의 후반부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하는 데 쓰인 말들이다. 다니엘서 등의 구약 예언서는 모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시를 유대인들의 시간 틀에 적용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시간표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 시간표를 만드는 자들은 대개 사탄의 무리에 미혹된 자들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그런 사탄의 거짓 시간표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하나님 자신도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애굽 노예 생활을 정하신 기간은 400년(창15:13)이었으나, 실제로는 430년 후에 출애굽이 이뤄졌다(출12:40, 갈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시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그 수가 차기까지”(계6:11)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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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건강교실] 천식치료의 실제 (1)
      천식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와 그 가족은 천식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환경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적절한 약물로 치료하면 정상인과 같이 거의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다. 천식은 창피한 것이 아니며 현대인의 많은 사람이 천식과 같은 알레르기질환을 앓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치료원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천식이란 어떤 병인지 이해하여야 한다. 둘째는 천식은 꾸준히 치료하여야 한다. 증상이 없더라도 일 년에 2-3회는 주치의를 만나 건강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셋째는 천식의 원인은 환자마다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넷째는 천식 증상은 환자에 따라, 또는 치료 경과에 따라 다르다   다섯째는 천식을 치료하는데 있어 치료 약제나 방법은 환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료 약제의 기구 사용법을 충분히 알고 사용하여야 한다.   천식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관리다. 이것은 천식을 일으키고 증상을 악화시키는 것을 피하거나 최소한으로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관리는 크게 실내 환경 관리와 실외 환경 관리로 나눌 수 있다.   실내환경 관리는 집먼지진드기, 애완동물, 바퀴벌레, 곰팡이 등의 관리를 말하는데 총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집안 청소로 물걸레나 특수 필터가 장착된 진공 청소기를 사용한다.   둘째는 침구류의 선택과 세탁에 신경써야 한다. 이불, 요, 침대 매트리스 등을 특수 커버로 씌운다. 커버는 주 1회 섭씨 55도 이상의 뜨거운 물로 세탁한 후 말려서 사용한다.   셋째는 적절한 온도 및 습도의 유지다. 집먼지진드기나 곰팡이의 번식이 어렵도록 실내 습도를 40-50%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넷째는 카페트, 소파 및 커튼을 관리하고 두터운 천으로 된 가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는 애완동물을 기르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내의 오염원인을 제거하고 방지해야 한다. 특히 난방 및 취사 시 나오는 연소물질, 담배연기, 가구 광택제나 방향제 및 자극성 스프레이 등은 천식환자에게 해롭다.   천식환자는 실외에서의 환경 관리에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환자들의 질환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는 꽃가루, 대기오염, 직장 내 환경, 감기 등이 있다.   꽃가루가 날릴 때는 외출을 삼가고 실내 창문을 닫고 외출 시에는 마스크를 착용한다. 대기오염이나 황사가 심한 경우에는 실외에서 과도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또한 항상 감기를 조심하고 인플루엔자 예방 접종을 한다.  /한양대학교병원 호흡기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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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향유옥합] 하나님과 광야에서 살기
      한국교회와 신학교에서 여성 신학자가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보수적이고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합동교단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은 환경이다. 이런 이유로 합동 교단의 경우 활동하고 있는 여성 신학자의 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전 총장의 갑질로 10년 넘게 강의하던 총신에 더 이상 출강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나마 생존하던 척박한 변두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내몰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예비해 두신 것이 바로 지금 소장으로 있는 ‘비블로스 성경인문학 연구소’이다. 2014년에 총신에서 강사를 하고 있던 4명이 학교 근처 교회에 작은 사무실을 빌려 공부할 책상 몇 개 두고 시작했었다. 처음엔 공부할 곳이 생긴 것이 좋았다. 강사들은 연구실이 따로 없기에 공부할 책상 하나 갖는 것이 절실했는데 그것이 해소되었고 함께 모여 공부하니 서로 자극도 되고 정보도 공유하며 힘든 강사 생활 동안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다. 그러다 유학을 마쳤거나 학위를 막 마쳤지만 오갈 곳이 마땅치 않은 학자들 혹은 주류에 들어가지 못한 다양한 전공과 교파를 배경으로 한 학자들이 합류하면서 인원도 늘었다. 그러는 와중에 여성이란 이유로 총신에 출강하지 못하고 여성 신학자로서 교단과 신학계에서 다양한 차별을 받으며 광야로 내몰렸을 때 연구소는 나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우리 연구원들이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연대해 주었고 그들을 통해 광야에 있지만 혼자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혼자라는 고독감 때문이다. 엘리야가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굴속에 숨어버린 것도 놀라운 능력을 행하지 못해서나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만 남았다는 고독감 때문이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그와 같이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이렇게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 엘리야를 위로하고 그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처럼 연구소는 합동교단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내가 학문하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여성 신학자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연구소는 절반이 여성학자들이다.    현재 우리 연구소는 매 학기 주제를 정해 공부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래서 우리 연구원은 의무적으로 한 학기에 한 번은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발표한 글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서로 솔직하게 비평하고 의견을 나눈다. 이러다 보니 연구원들은 발표한 글을 논문으로 완성하여 부지런히 학회지에 발표하면서 활발히 학문 활동을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는 신학적 인문학적 주제를 잡아 같이 공부하고 글을 써서 발표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내고 있다. 그 결과 “혐오를 부르는 이름, 차별(2020)”과, “생태위기와 기독교(2021)”가 나왔고 현재는 가을에 낼 책을 준비하고 있다.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들을 소장파 학자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격려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책을 내며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연구원들의 자발적 회비로 운영되기에 늘 힘든 살림이지만 지난 7년을 되돌아보면 광야에 있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양식을 공급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셨다.   /비블로스 성경인문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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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바리톤 고성진의 예배음악 (13) - 예배용 찬송가의 필요성
    예배 때 예배하는 자가 부를 찬송가를 간절히 원한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과 온 세상 만물들이 조물주 즉,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책이 대안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 하지만 예배를 위한 찬송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지금 사용하는 찬송가책을 살펴보면 찬송보다는 복음성가와 복음찬송이 70%다. 성삼위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찬양하는 복음찬송은 찬송으로 한다 하더라도 복음성가는 예배와 무관하기에 예배와 복음성가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본다.   복음성가는 찬송가학 학문적으로 예배에 사용할 수 없다. 가사, 노랫말이 우리 인간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에 왜 이런 복음성가를 하는지 성찰할 때이다.   여러 번 이야기 하며 강조하면 ‘성삼위 하나님께 찬송하세, 찬송 하자, 찬송 드리자, 찬송하라, 찬양 하여라’ 등등 이러한 노랫말 가사는 찬송이 아니고 우리들 끼리 나누는 이야기 이다.    더 나아가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어서 돌아오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등의 노랫말은 예배시간에 드리는 찬송이 아니다.   찬송을 분별없이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찬송을 할 때 가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길 권면한다. 예배 드리고 찬송 드린다며 딴 짓 하면 안된다.    성가대는 예배 때 드릴 찬송을 미리 따로 모여서 연습하여 예배 때 찬양을 드린다. 그와 같이 성도들도 회중찬송을 공부하고 연습하여 신령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한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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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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