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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9) 연기기둥 같이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신부 성도에게 은혜 베푸시는 신랑 예수님을 노루와 사슴에 비유하신다. 이는 내 속에 그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리된다면 내가 나가서 그분을 자랑하며 증거하리라. 이렇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노루와 들 사슴 같다는 것이다. 3:6 연기기둥과도 같이, 몰약과 유향과 상인들의 모든 향료로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5절까지 남편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신부 성도의 심령에 아구까지 충만하게 채워진 이후가 6절이다. 그래서 그분은 내게 연기 기둥과도 같이 오신다고 말씀한 것이다. 연기 기둥은 무엇인가? 구름 기둥을 가리킨다. 연기가 자욱하면 구름 기둥이 되는 것이다. 출1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또 성막을 지었을 때(출40장)와 솔로몬 성전을 지었을 때(대하5:13~14)에도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했다. 그리고 계15:8에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로부터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찼다고 했다. 연기, 즉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상징한다. 이와같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연기 기둥과 같이 광야에서 오시는 것은 영광의 주님이 영광스럽게 내게 오신다는 말씀이다.    또 몰약과 유향과 향료로 향내를 내며 오시는 분이 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향료로써 죽음과 관련된다. 예수님은 몰약 향내를 내며 오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 피 흘림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한 것이다. 즉 영원 속죄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몰약 향이다. 또 유향은 기도를 의미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다.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거룩한 성전이 된 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한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응답하실 뿐만아니라 나를 온전케 해 주신다. 나를 온전케 하시는 것은 결국은 신부되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부 신앙에 서 있는 나를 데리러 오시는 분이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과 모든 향료로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시는 신랑 예수님이다. ‘광야에서 오시는 이’는 신랑 예수님이다. 여기서 광야는 짐승들이 우글대는 곳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이 연기기둥과 같이 영광중에 오실 때 광야의 짐승들이 대적한다. 짐승 중에 우두머리는 적그리스도요, 다음은 거짓 선지자와 그와 함께하는 음녀 교회들과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해당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고 아마겟돈 전쟁이 있다(16:12이하). 그때에 짐승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인다.     즉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땅의 왕들이 모여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대적할 때 주님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들을 멸하고 재림하신다(계 19:14~21). 이렇게 연기기둥과 같이, 몰약과 유향의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시는 분은 내 남편이고 만왕의 왕·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시다. 아가서는 요한계시록을 깨닫고 난 후에 상고해야 수월하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아가서를 먼저 깨달았고 그 후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요한계시록을 남겼다. 오늘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가서를 증거 받아도 확인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반대로 계시록을 먼저 깨달은 후에 아가서를 상고하니까 쉽게 소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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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성서와 생활 [27] 그리스도인의 영성- 아버지(들림)의 영성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다.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임을 알아야한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1:7 인간의 가장 큰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이 교육의 사명을 주셨다. 부모는 육체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 힘써야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명자이다. 지혜와 지식의 성장을 도와 세상에서도 부족함이 없이 소통하게해야한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는 자녀로 세우는 길이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완전한 인격자로 성장해 가도록 돕는 부모라야한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길이 인생 최고의 복이며 행복의 지름길임을 알게해야한다. “~지혜를 가진자는 복되도다”잠3:13-18 창조주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 되심을 경외하는 지식을 전수해야한다. 십자가의 은혜와 정신과 생명을, 부활과 승천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자로 세워야한다.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신4:10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결코 작은 계명이 아니다. 이 계명을 사랑한 에녹은 영적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된다. 에녹은 선한 아버지의 삶을 살다가 들림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며 높은 계명이다. 가정에 주신 주님의 명령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하는데 필요한 법이다. 하나님은 가정에 천국을 실현하시기 위해 가족을 주셨다. 에녹이 구약에서 보여준 것은 부모의 사명이 큰 축복이며 구원의 완성을 위한 길이다. 오늘날 믿는 가정마다 이 영적인 사실을 주의하여 배워야만한다.   아버지의 길을 온전히 간 에녹은 들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명을 감당한 에녹의 영적 깊이는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초림주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재림주님을 예언하고 있다. 영적 부모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구원으로 인도한다. 오늘날 부모된 자들마다 들림의 축복인 큰 상급이 예비된 부모의 영성을 사모해야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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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변영혜작가의 「영생의 빛 3」
       변영혜작가의 「영생의 빛 3」은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흔히 귀한 사람들을 빛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빛의 근원이시고 어느 빛과 견줄 수 없는 큰 빛이요 참 빛이 되신다. 그 빛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빛이 곧 생명이요 인생들을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신다. (요 1:1-12) 이 빛을 영접하는(믿는)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빛을 아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요17:3)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그 죄의 값은 사망이지만 주 안에 있는 은혜의 선물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롬6:23, 엡2:8~9) 그렇기에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이 보장된 것이다. (요3:16-36)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 사이로 흐르는 빛이 매우 인상적이다./대석교회 원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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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관념적 애국보다 실천적 애국을
     사람은 저만을 위해 살 수도 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 수도 있다. 나라와 민족이 안중에 없노라고 억지 쓸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대다수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노라고 자처한다. 평상시에 별로 개의하지 않다가도 유사시를 당하거나 외로운 환경에 처하면 누구나 나라와 민족을 그리워한다.    사랑이 관념에 그칠 때에 도리어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고, 한낱 감상에 그침으로써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 비분강개와 호언장담이 애국의 실증이라고 오인하면 허무한 메아리만 거둘 것이요, 나아가서 광포와 망동이 뒤따르면 그 해독은 사랑 없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파시즘이나 미디어의 일면에는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러한 경우를 위하여 사랑은 실천적이어야 하고, 실천은 이성적이라야 한다.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가 정치를 바로잡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 할 경우, 만일 독선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면 관념적이요, 비이성적인 예라 하겠고, 투자 효과를 무시하고 재원을 낭비한다면 역시 그러하다. 경제 개발을 연구하는 학자나 실무자들이 시정의 투자 효과를 논하고 투자 순위를 야무지게 따지는 데 반하여, 항간에 비경제적인 투자 행위가 없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슨 까닭에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무원칙적인 자원 분배를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절대 비애국적인 행위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애국심이 관념적이어서 무엇이든지 큰 사업이나 큰 시설을 일으키면 큰 개발이 될 줄로 안다거나, 외국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을 능사로 안다거나, 타인에게 과시하고 국민에게 과시하는 것이 국위를 높이고 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투자 효과의 과학적인 분석의 내용이 결여되어 한정된 자원을 절도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을 비과학적인 애국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정자는 물론이요, 국민 전체가 크게 각성해서 관념적이 아닌 실천적인 애국심을, 독단적이 아닌 과학적인 애국심을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실천적인 사랑은 숭고한 정열을 욕할 뿐 아니라 심원한 이성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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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향유옥합] 아무튼, 환대
       바늘 귀에 실을 길게 꿰는 사람은 멀리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던가. 평소 실을 1미터 정도나 꿰었던 나는 사랑 따라 무려 태평양을 건넜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면서 한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다양한 사회에서 30여년을 지냈다. 하나님의 딸, 부모님의 딸로 사랑받던 나는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오랜 여정을 지냈다. 겹겹이 쌓인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바탕에서 나를 지탱해준 힘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고 포용해주는 환대였다. 나그네 혹은 이민자로 살아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떠남, 여정, 환대 같은 화두는 나의 삶과 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환대는 물론이지만, 일상을 떠나 낯선 길에서 받는 환대의 경험은 때로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된다. 화끈한 문신으로 새기지 않아도 내 피부 어딘가, 눈과 마음 속 기억의 나이테로 아로새겨진다. 길 위에서 만나는 환대는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선물처럼 놀라움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경험한 무수한 환대의 추억은 자양분과 촉매제가 되어, 씨앗이 싹을 틔우듯 다시금 나와 타인을 환대하는 새로운 에너지로 순환한다.    얼마 전 어머니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나의 성년기를 외국서 보내고 고향에 돌아와 체류하고 있는 이즈음, 어느새 80대 노모가 되신 나의 엄마와 함께한 몇 주간의 여행은 애틋하고 즐거웠다. 마음에 남는 따스한 기억이 여럿 있지만, 그 중 몽마르뜨 언덕을 보고 내려온 일이 생각난다. 낮에는 미술관을 보고 저녁이 돼서야 지하철로 그 곳을 향했다. 다음 날 저녁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 숱한 예술가들이 살았다는 그 언덕 골목을 거닐며 파리 야경을 내려다보는 시간은 아름다웠다. 정상의 대성당에서 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어 함께 기도했던 마무리 또한 더없이 뜻깊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와 호텔로 가는 길을 검색해야 했는데, 하루 종일 사진도 많이 찍고 길도 헤매서 나도 올케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다. 우리가 의존할 방법은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대중교통 정류장 근처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길을 물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녀 청년은 우리 일행에게 바로 주의를 집중하고 길을 찾아 주었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을 자신들의 전화기로 검색해서 버스 한번만 타면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젊은 여성은 자기 노트를 꺼내 타야할 버스와 열세 정류장만 가면 되는 것과 내려야할 정류장 이름을 써주었다. 남자 청년은 15분 후 버스가 올 것이고, 버스가 하차할 정류장 직전에 좌회전을 하지만 호텔은 오던 길에서 곧장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명료하고도 상세한 안내에 거듭 고마워하면서 우리는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얼마 후 기다렸던 버스가 오는데 저 방향에서 손 흔드는 게 느껴져 보니, 아까 길을 알려줬던 두 젊은이가 우리 일행이 버스를 제대로 타는지 그때까지 살피다가 ‘그 버스 맞아요,’ 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칠까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던 거였다. 어둠 속에서도 돌봄과 환대의 미소는 또렷이 보였다. 나는 ‘고마워요, 이 버스 타고 잘 갈게요,’ 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엄지를 올렸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또 지금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얼굴이 생각나곤 한다. 앞으로도 종종 몽마르뜨 언덕과 함께 소환될 것이다. 그들의 친절과 환대는 여행에서 만난 어떤 풍경과 작품보다도 내 마음에 닿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 환대(歡待):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그리스어로 환대는 ‘필로제노스(φιλόξενος, philoxeno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우정 또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이방인을 뜻하는 ‘제노스(xenos)’가 합쳐져 ‘이방인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우리라는 공동체 밖의 이방인을 맞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곧 환대라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손님(guest)으로 풀이된 ‘제노스’라는 단어는 외국인(foreigner), 낯선 사람(stranger), 이국인(alien) 등의 뜻이 있지만, 재미있게도 주인(host)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환대의 주체는 주인만이 아니고 손님도 해당되며,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 상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주인이 환대를 베풀지만, 방문한 손님도 환대를 베푼다. 하나의 시공간에서 그렇듯, 우리 일생을 두고 영원한 주인도, 영원한 손님도 없다. 서로 베푸는 환대를 서로 주고 받는다.    환대는 특별한 대접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이 이 지상에 사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 생존 권리가 환대다. 이러한 권리는 마땅히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환대받을 권리를 내세운다면 타자의 환대받을 권리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환대권의 평등한 상호성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성경의 황금률 (Golden Rule)은 환대의 정신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환대는 특권 행사가 아니다. 환대받을 권리의 평등성이 우리가 누리는 환대권의 기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타인을, 창조세계의 모든 타자를 내 몸처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사람이 사람을 반갑게 맞아 존중하고 아끼고 잘 대접하는 환대의 세상이 아니다. 제노포비아(xenophobia), 호모포비아(homophobia) 같은 혐오증이 코로나처럼 퍼져, 자신의 공동체 밖의 사람을 환대하기보다는 냉대하고 홀대하고 적대한다. 우리는 자신이 환대받는 데는 열심이지만 타인을 환대하는 데는 인색하며 서투르기 짝이 없다. 환대는 특권이 아니지만 부단히 갈고닦아야 할 특별한 능력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그런 친절함, 다정함의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그런 사람 옆에서는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호텔(hotel), 호스텔(hostel), 병원(hospital)이 다 라틴어 ‘호스피탈리타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환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고대 신성한 여행자들에게는 숙박을 제공하고 그들이 아플 때는 정성껏 치료해 주었던 환대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의 여정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며, 전쟁터 같은 이 세상, 상처받고 아픈 이들에게 야전침대를 펼쳐 치료의 손길을 내미는 병원 같은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나처럼 오랜 시간 타국에서 나그네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벗님이 얼마 전 우리 부부에게 음반을 보내주었다. <고향의 봄>이라는 뜻밖의 선물, 감동적인 환대였다. 무반주로 나직이 부르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은 내 속에서 울긋불긋 꽃대궐을 차려주고 호수처럼 내내 출렁거렸다. 외국에서 음악 공부와 활동을 하며 나그네로 오래 산 이방인의 경험이 있는 베이스 성악가의 목소리는 그래서 내게 남다르게 들렸다. 지난 주말, 다른 벗님의 초대로 음반으로 들었던 한국 가곡을 독창회 공연으로 접하는 호사를 누렸다. 더없이 뭉클한 환대의 자리였다. 관람 중 한곡 한곡 마칠 때마다 우리 부부에게서 각기 다른 뉘앙스의 감탄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성악가의 목소리로 듣게 된 곡들은 그리움과 외로움 같은 나그네의 심경을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려 영혼의 교감을 깊이 느끼게 했다. 가사집을 보지 않아도 마지막 절까지 속으로 따라부를 수 있는 익숙한 곡들이 대부분이어서 좋았지만, 새로운 곡들도 참 좋았다.    그 중 마음에 등불을 켜듯 따스한 불빛을 간직하고 돌아온 노래가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산속에서>이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갖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환대하는 이 대림절, 누군가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깜깜한 밤을 지나는 자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에게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처럼, 맞잡을 손처럼, 어깨를 감싸는 힘처럼 나그네에게 계속 걸어갈 동행이 되어준다는 것은.../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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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3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8) 내 사랑을 흔들지 말라
       큰도성, 큰 길로 달리며 신랑 되신 주님을 찾았으나 찾기는 커녕 봉변만 당한다. 어렵사리 다시 되찾은 그분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4절 하반절에서 그분을 놓지 아니하였다.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그를 데려올 때까지 놓지 아니하였도다. ‘내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가 자녀를 잉태하고 낳은 곳을 의미한다. 아가서의 주인공인 신부 성도를 낳은 곳이다. 최초로 신부 되게 한 교회가 ‘어머니의 집’이다. 그러면 누가 신부 되게 낳았는가? 성령이시다. 성령이 신부 교회로 인도하여 거기서 나를 신부 되게 한 것이다. 즉 성령이 어머니와 같이 역사한 것이다.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은 어디인가? 그 방은 ‘내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야 있다. 또 성령께서 우리를 어머니의 집인 신부 교회, 즉 계2장, 3장의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 하신다.     그리고 신부 되게 하는 말씀을 주시고 믿게 하여 순교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잉태하여 세우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를 잉태하여 낳은 방이 된다. 나를 순교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성령님이 낳는 역사를 하시는 곳이 ‘어머니의 방’이다. 또 옛 사람 이었던 우리를 성령이 중생케 한 곳이 어머니의 방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성령이 잉태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에게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종말의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받은 것이 어머니의 집이다. 또 우리를 잉태 한 방은 어디인가? 일곱 금촛대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계속 신앙이 자라면서 순교신앙으로 세워진 것을 말한다.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어 진 신부성도가 신랑 예수를 꼭 붙들고 자기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왔다. 이는 순교신앙으로 세운 그곳으로 돌아와서 영원히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는 또다시 신랑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3:5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아가서의 주인공인 신부 성도와 구별된다. 그들은 아1:5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적 신앙에 속한 성도들이다. 또 ‘내가’는 신부 성도를 가리킨다. 그가 원하기까지는, 즉 신랑 예수님이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4절에 신부 성도가 잃어버렸던 신랑 예수님을 찾아서 그분과 잉태한 방에 함께 있는 상태이다. 다시는 밤에 침상에서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하리라. 이는 그분의 사랑을 신부 성도의 심령의 아구까지 채우는 일을 예수님이 하심을 뜻한다. 그래서 그분과 신부 성도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지면 얼마든지 자기 남편, 즉 신랑 예수를 나가서 거침없이 자랑하며 증거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육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예루살렘의 딸들은 자기 남편을 증거 하지도, 자랑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영적 신앙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신랑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처럼 육적인 성도들이 영적인 성도들을 방해하고 핍박한다. 그래서 노루나 들 사슴으로 부탁한다고 했다. 이는 신부 성도에게 지금 은혜 베푸시는 신랑 예수님이 마치 노루와 사슴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는 내 남편이신 그분의 사랑에 내가 푹 빠져 들리라. 그리하여 내 속에 그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그리된다면 내가 나가서 그분을 자랑하며, 증거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이렇게 해 주시는 주님이 바로 노루와 들 사슴 같다는 것이다. 노루나 들 사슴이 귀가 밝아서 세미한 소리에도 놀라서 급히 달아나지 않느냐? 그러하니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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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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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년에세이] 기도 제목을 적어서 기도하라!
      기도 제목을 적어서 기도하면 기도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 기도 응답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믿고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헨리엔트 앤 클라우는 그의 저서 “종이 위의 기적, 쓰면 이루어진다.”에서 말한다.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면 그것을 기록하라. 목표달성에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목표를 기록하라. 행동이 다른 곳에서의 움직임을 이끌어낼 것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일단 목표를 기록하라.” 우리가 기도 제목을 정하여 종이에 쓰고 마음에 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해주신다. 기도 제목을 정하면 목표와 방향이 정해지고 기도하면 행동하면 이루어갈 수 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어려서부터 기도 제목을 적어 놓고 기도하고 행동하였다. “나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 할 것이다. 나는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훗날 워싱턴은 “자기가 기도한 것을 다 응답받고 다 얻었다.”고 말했다. 에어브러햄 미니 슬로가 “목표는 별과 같아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역경은 구름 같아서 잠시 머물다 떠난다. 목표애서 눈을 떼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기도 제목을 적어서 73세인 지금까지 기도하여 왔다. “책을 내 키만큼 쓸 것이다.” 시집, 유머, 성공학, 기도문등 갖가지 책을 210권 출간하여 내 키를 넘었다.     "나는 강사가 되어 강의를 만 번 이상 할 것이다." 한국 강사협회와 한국경제신문사 선정 명강사 제38호로 전국에서 외국을 다니며 강의를 만 번 이상하였다. “시를 3만 편 쓰겠다!” 시를 3만 편 이상 쓰고 지금도 계속 출간하고 있다.    “아내와 세계 여행을 하겠다.” 아프리카, 남미. 쿠마 카나다, 미국 유럽, 호주, 네델란드, 러시아 아시아등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였고 앞으로도 여행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단칸방에 살아서 “방 5개가 있는 집에서 살겠다."고 했는 데 지금 방 5개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성경을 많이 읽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구약 500독 신약 2500독을 하였다. 지금도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기도하고 20분 성경을 읽는다. 저녁에도 기도한다. 20분 성경을 읽으면 보통 4일에 한 번 신약 성경을 읽는다.    "시집도 많이 읽겠다." 그동안 3만권 이상의 시집을 읽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종이에 기도 제목을 적어서 기도하면 마음에 확신을 생기고 그것을 이루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말로만 아니라 살아있는 생생한 믿음의 응답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생명이 살아있는 기도를 드리자.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응답을 받으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함께 하신다.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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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사랑의 실천] 하나님의 은혜 통치를 바라자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 생각하게 된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처처에서 전쟁의 소식과 재난으로 인해 많은 고통의 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어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오늘이지만 하나님이 새해를 주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끄시는 놀라운 행위로 여기게 된다.   2024년을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 통치가 임하기를 소원한다.   먼저,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긍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복 받을 이유나 공로는 없다. 오직 주의 긍휼하심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9:15-18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간절히 바라며 사모하고 있다는 강한 의사 표현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의 심정(신앙)도 바울과 같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긍휼)를 베푸사 모든 것을 허락하실 것을 믿고 바라며, 주실 때 즉시 받아 누리는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새해에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공평한 통치는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만 가능하다. 사람이 세운,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통치는 공평한 통치를 기대할 수 없다.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들어와 살게 될 때 공평한 통치를 받게 된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은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이 나라 민족을 넘어 세계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통치로 인해 공평함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새해에는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바르게 섬기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주 안에 있는 자들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데 있음을 확실히 가르쳐주고 있다. 이처럼 2024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공평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바른 섬김이 있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목사·서울한영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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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건강교실] 눈 건강을 지키는 법 (하)
      또한 햇빛이 강한 날 외출을 하는 경우에는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 좋다. 자외선은 백내장 외에도 흰자위에서 검은 동자쪽으로 섬유혈관조직이 증식되어 침범하는, 익상편이라고 하는 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자외선은 망막의 퇴행성 질환인 황반 변성을 유발하는 인자로 알려져 있다. 눈의 여러 조직에 해를 끼치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햇빛이 강한 날 장시간 외출을 해야 하는 경우에 모자와 선글라스 착용이 권고된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해도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태양 광선에 완전히 노출되면 망막 중 가장 민감한 황반 부분이 손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 건강을 위한 음식 섭취에 대해 알아보자. 전반적으로 건강에 유익하고 영양적으로 잘 균형 잡힌 식단은 눈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비타민C와 E, 루테인, 제아잔틴, 오메가3 지방산 등은 눈을 건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분이다. 이런 영양소는 특히 황반 변성으로 인한 시력감퇴를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망막 변성 질환은 밤눈이 어두운 야맹증 증상으로 나타나는데 비타민A는 이 병의 진행을 늦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메가3 지방산은 안구 건조증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도 알려져 있다. 이는 연어나 정어리와 같은 생선에 들어있는 성분다.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오메가3 영양제로 대신할 수 있다.   화학 제품이나 전동 공구를 사용하여 일하는 경우, 화학 제품이 눈에 들어가서 화상을 입을 수 있고, 파편이 눈으로 튀어 안구를 관통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용접할 때 나오는 빛에 의해서도 눈의 표면인 각막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운동 중에 공 등에 의해 눈에 외상을 입을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안구 내에 출혈이나 망막 손상, 망막 박리 등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눈에 위해 요소가 있는 작업이나 운동 시엔 반드시 고글이나 보호 장구를 착용하여 외상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눈 건강을 위해 생활속에서 유의할 사항들이 있다. △강한 직사광선을 피할 것 △어두운 환경에서 고개를 숙여서 스마트폰 등 뭔가를 보는 자세는 안압을 급격히 올리는 급성 폐쇄각 녹내장이 잘 발생할 수 있어 피할 것 △눈을 너무 자주 비비지 않을 것 △눈이 불편하다고 수돗물로 씻지 않고, 인공 눈물을 점안하는 것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는 주기적으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것 등이다.   특히 ‘찬바람 불면 시리고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눈물은 눈을 촉촉하게 유지하고 눈물의 분비가 줄어들거나 눈물이 잘 증발하는 상황이 되면 눈 표면의 수분층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눈물 흘림 혹은 안구 건조증 증상이 심하거나 지속되는 경우, 안과를 찾아 전문의의 검진을 받고 이에 따른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찬 바람이 불고 건조한 겨울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눈 건강을 위해 가습기를 틀어 실내 습도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히터나 난방기기의 바람이 눈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한다. 겨울철 스포츠를 즐길 때는 자외선 차단 고글, 선글라스 등으로 눈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한파가 심하고 바람이 강한 날 외출해야할 때에는 보안경을 착용해 자극 증상을 일으키는 찬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해 주는 것이 좋다. /한양대병원 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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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5
  • [향유옥합] 하나님의 장막
      새로운 2024년이 밝아왔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한해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신앙 안에 있는 크리스천들조차도 동일한 하나님의 장막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라고 무조건 모두 ‘하나님의 장막’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같이, 인간의 행위로 이러한 장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영적권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되고 성취되는 장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되는 장막으로서, 땅에 있는 장막이지만 사탄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로 통치되는 장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막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구축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눈이 열린 자들이 이러한 기도를 해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교회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영적 초신자들에게만 맞는 설교를 하기보다는 수준높은 영성의 설교를 해서 성도들을 바르게 이끌어가고 리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이러한 하나님의 장막을 더욱 더 크게 확장해나갈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게 됩니다. 성도들이 동일한 영적수준에 있지 않고, 각자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재정구축을 목적으로 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추구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목표를 위해 살아갑니다. 특히, 재정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가진 자들이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재정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인데다가, 재정은 많은 편리함을 주기 때문에,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기본적으로 재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주님이 너무 대단하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계속 확장해나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이 주인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게 일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정이 힘이 되고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으로 이 악한 세상에 대해 승리할 것을 다짐하지만, 이는 너무나 연약해보이기만 합니다. 많은 영적공격과 사탄에게 쓰임받는 사람들이 곳곳에 즐비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이 모든 노력이 귀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33:20)     더욱 기도에 매진하며, 주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봅니다!  주께서는 악한 자들의 생각이나 선한 자들의 생각이나, 그 모든 것을 관통하여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히 선한 자도 아니기에, 오직 주님의 온전한 뜻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024년 한해동안 주님의 영광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기 원하나이다!/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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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4
  • 브니엘의 축복
      야곱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장자권을 약속받았고,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내고, 삼촌 집에서 20년 봉사하고, 애급의 총리대신이 된 아들 요셉의 인도로 바로왕 앞에 서매 험악한 나그네 세월 ”130년“을 보내었다고 고백하지만 바로 왕을 축복하였다. (창 47:9~10)  야곱은 장자권의 중요성을 알았고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창25:34) 장자는 집안의 대(代)를 이어가고 가문의 대표가 되어 상속자가 되고 통치권과 축복권을 갖는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야곱은 에서를 위하여 준비한 예물을 미리 보내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얍복강을 건너 먼저 보내고,  그 밤에 야곱은 홀로 남았다. (창32:13~22)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더니 그가 야곱의 허벅지를 치매 뼈가 어긋났으나 축복하기 전까지 절대로 놓아 주지 않았다. 그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바꾸어 주었으며,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하였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인하여 절었더라”(창 32:31) 새날의 해가 돋았고 야곱은 하나님 사랑의 흔적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으나 그 밤에 하나님 응답의 증거를 확실하게 몸에 지니게 되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두 발과 두 손바닥의 못자국을 남기시고, 바울이 다메섹의 흔적을 위해 세번씩 기도 했으나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8~9) 새로운 날을 시작하며  이번 한해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의 표증으로  이런 흔적 하나 지니게 되기를 소망한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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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조희자작가의 「휘장을 가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조희자작가의 「휘장을 가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운명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는 가림 막) 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사건(마27:51)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악으로 가로 막혀서 구원이나 소통이 없었던 것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거기에서 흘리신 보혈을 주 모티브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보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죄로 인한 피가 아니라 이 못난 나의 죄로 인한 피가 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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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2024년 국내외교회의 전망] 기후위기 해결과 평화위한 운동 활발
       WCC, 기후정의 위원회 신설로 신학적·실천적 모색 진행중 세계 각지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교회의 입장 전해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었던 2023년을 보내고 다시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는다. 그러나 발발 2년을 넘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으로 세계는 양분된 가운데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눈물과 아픔의 소식을 들으며 맞는 2024년에 이 땅의 교회는 더 많은 기도와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2022)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와 실행위원회는 2023년 6월 스위스 제네바, 2023년 11월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모여 구체적인 정책과 조직 구성을 결정하였다. 두 회의의 논의를 기반으로 2024년에 세계교회가 기도하고 소망하는 방향을 공유한다. 한국교회가 같은 믿음과 소망으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교회    2022년 11차 총회에서 제안되어 2023년 6월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신설된 “기후정의와 지속가능한 발전 위원회”(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Climate Justice and Sustainable Development)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정의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교회의 대응을 신학적, 실천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성공회 대주교인 훌리오 머레이(Julio E. Murray) 위원장과 회원교회에서 추천한 34명의 위원들로 조직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역사에서 신앙과 직제위원회나 삶과 봉사위원회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기후정의와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의 신설은 세계교회가 기후위기 시대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새해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이 위원회는 세계교회는 기후위기를 하나님의 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창조세계를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교회의 사명과 실천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 위원회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명칭을 정했고, 관련 단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또한 2023년 11월 열린 유엔 기후위기협약당사국회의(COP28)에 참가한 정부 대표들에게 화석연료 사용과 그로 인한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촉구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은 전 인류가 처한 기후위기를 창조세계의 위기로 받아들이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것이다.   폭력에 반대하는 교회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인리히 스트롬 세계교회협의회 의장은 실행위원회에서 이러한 전쟁의 결과를 지적하였다. 그는 “지구적인 경제위기와 불의,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인류를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나타나는 극심한 양극화”라고 지적하였다. 갈등하고 대립하는 진영의 어느 한 쪽에 서게 될 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교회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평화를 외치고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한 걸음 더 나가 폭력에 반대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2023년 6월,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는 네 개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성명서”를 비롯하여 “유엔 인권선언 75주년 성명서”, “인공지능 개발 규제를 위한 성명서”, “필리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성명서”이다. 인공지능 개발 규제에 관한 성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 모두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교회의 반대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같은 해 11월, 실행위원회 역시 네 개의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하여”, “나이지리아, 아프리카 지역 상황에 대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결과에 대하여”, “기후정의를 위한 COP28 책임에 대하여”이다. 성명서들은 현재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보여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할 것”과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동역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정의와 평화,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다. 성명서들의 주제를 단순하게 평화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동적으로 들린다. 이제 교회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개인 간의 폭력도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이지만 국가 차원의 폭력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묵과할 수 없는 불의이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에서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약자들을 지키는 길은 구호와 치료를 넘어 폭력의 발생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넘어 거부하고 파괴하는 상황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시 정의와 화해, 일치의 순례로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소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는 실행위원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호소하였다. “세상의 모든 격동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낙담하고 소망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람과 피조물들에게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라마에서 통곡하는 라헬에게 다음과 같이 소망을 전했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17).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기대와 소망보다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새해를 맞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소망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정의를 공포하고, 화해와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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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변두리 소수자11] 폭탄과 씨앗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이 약 5-6%가 된 때부터, 나는 한국사회 이주민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1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최근 100여일동안 그들을 위한 가을학기 강의들을 진행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늘어나고 있는 이민자들의 마음이 건강한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민자와 소수자의 경험과 교육, 혜택을 나누고자 한 나의 시도가 적절했음을 다시 확신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2023년도의 활동평가와 2024년도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개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위해 공부하며, 필요를 예비하려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전의 선교사역을 할 때처럼 후원과 지원이 없는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하나님 나라에, 한국에, 그리고 이민 소수자들에게도 중요한 일로 나는 믿는다. 특히 이민 생활과 더불어, 사역에서 유별났던 아픔, 기쁨으로 얻은 경험들과 배움들이 나만의 고유한 재료인 듯하다.   지난 학기동안 여러 민족을 방문하고 강의를 하면서, 개인적인 부족함과 안타까운 현상들, 그리고 아쉬운 상황들을 실감했다. 우선, 개인적으로 전문적 지식의 한계가 사역에 대한 갈망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 ‘블루오션’이라고 볼만한 새로운 분야에 충분한 자료가 아직 없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한국은 오랜 동안 단일문화(monoculturalism)에 익숙해 있었다. 차별과 배제(differential exclusion)는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동화(assimilation)로의 과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의 독일과 일본이 그랬듯이 이민자의 영주를 막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자연스러웠던 사회가 한국이었다. 다수자와 합류하지 않거나, 대중 유행 기류에 편승하지 않거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면 왕따가 되거나, 유별난 입장이 되던 사회이다.   가끔은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결국 좋은 시민이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류의 매력이 문화화(acculturation)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주자가 자신들의 민족성과 정체성 대신 한국인으로 동화(assimilation) 되거나, 한국의 제도와 시민화(incorporation)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정치인들은 한류에 대한 자부심은 인지하겠지만, 한류 현상이 정치 수준과 상관없는 젊은 세대의 세계관과 시민의식 때문임을 모르는 것 같다. 높은 국민 수준과 새 세대의 의식이 미래 한국의 준비된 터전이다. 이민에 관계된 입법과 행정, 그리고, 집행이 모두 엇박자인 현실을 당국자들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부는 인권과 너그러운 포용 정책으로 함께 잘 살아가는 사회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민 정책을 주도하는 목적으로 연구된 계획이기 보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상황들에 대응하는 정책들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국내의 높은 임금 때문에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유입된 외국인들에게도 국내인과 같은 임금을 지불하자는 ‘인권’ 주장은, 해결하려던 문제의 본질과 이치를 망각한 것과 같다. 그들이 내국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다음 단계의 요구와 함께 불만을 마음에 키우지 않겠는가?   이주자의 건강한 마음에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건전한 시작점이 갖춰진다. 개인의 정체성 정립, 그 정서의 조절, 즉, ‘혼의 자리 바로 매김’이 절실히 필요하다. 개인들과 가족, 그리고, 한국 국민들과의 관계에서 싹트고, 자라고 있는 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긍정적인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폭탄이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99% 가량을 투자하고 있는 언어와 문화, 교육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타민족 이주자들에게 복지 혜택만 많이 베풀어 주면, 좋은 시민으로 동화 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유럽의 각국들이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자인했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영국은 서구적 가치를 거부하는 민족적 혹은 종교적 소수 집단에 대해 불접촉 관용정책을 써왔지만 이 정책은 실패했다”고 했다. 또한 메르켈 독일 총리는 “’우리는 단순히 같이 살며, 서로 행복하면 된다’는 식의 다문화적 접근을 취해왔지만, 이것은 실패했다. 완전히 실패했다. 다문화주의 정책이 무슬림 양성의 온실이 되었다”고 했다. 또 “내 대답은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비난을 예상하며 발표했다.   정책이 현상을 주도하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정도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이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더 긴 세월동안, 더 아량 있는 이민 정책들을 실행해 왔다. 그런 미국의 현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안에 이주자들의 마음 속에 ‘폭탄’보다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기를 바란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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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서 신랑인 예수를 사랑하며 노래  본인이 본지의 “성경과 신앙” 칼럼을 끝낸 후 독자 여러분들과 잠시 소원했다. 그런데 이 ‘아가서 강해’란을 계기로 다시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또 본지의 직원 여러분들, 특히 편집국장님의 큰사랑과 배려이다, 진실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노래이다(1장1절). 히브리 원문 ‘쉬르 하쉬림’이니 ‘노래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하나님 지혜로 충만한 솔로몬은 1,005편의 많은 노래들을 불렀다(왕상4:32). 이 노래들 중에서 가장 깊은 영감과 신비함을 담고 있는 것이 아가서이다. 일반적으로 솔로몬이 결혼한 역사적 사실의 모형으로 해석한다. 또는 인간의 깊고 고상한 순결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 아가서가 성령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즉 그리스도의 초림 뿐만 아니라 재림 하시는 예수님과의 지고지순한 아가페 사랑이라고 본다.    아가서와 함께 시편, 잠언,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등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가서들이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종교 행사마다 이 시가서를 낭독하여 노래한다. 그들은 성전에 이 다섯의 시가서를 비치해 놓는다. 잠언서는 성전 뜰에, 전도서는 성소 안에, 그러나 아가서는 특별히 지성소에 비치한다. 이는 아가서의 영적인 의미와 깊이가 어떠함을 가리켜 준다. 일반 백성들이 아가서를 읽고 자칫 남녀간의 육적 사랑을 자극하는 그런 책으로 오해하지 않게 함이다. 오직 하나님이 세운 종인 제사장들만이 읽게 한 아가서이다. 오늘날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영교하며 노래하는 것이 곧 아가서로 계시했다고 본다. 즉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가서 본문에서 ‘나의 신부야’라고 주님이 여러 번 부르신다. 이 신부는 누구를 말하는가? 주 재림 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 신부로 청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본다. 즉 혼인식의 주인공인 신랑 예수님과 그 신부이다. 이 신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자라고 하였다(계19:8). 즉 이들은 순교자를 계시한다. 주 재림 시 첫째 부활한 자들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도 이런 순교의 신앙에 올라서 있는 자는 주님이 ‘나의 신부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앞으로 이 강해는 스테판 원문 성경을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을 기준하여 강해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가서 1:1로 들어가 보겠다.   1:1 노래들 중의 노래니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 아가서는 솔로몬이 노래한 것이라고 여기서 밝히고 있다. 시편에는 다윗의 노래가 있고, 또 출애굽기의 모세의 노래, 또 요한계시록의 십사만사천의 새 노래(계14:4)들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래들 중에 최고의 노래가 바로 이 솔로몬의 노래요, 이 아가서이다. 아가서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은 예수님이요, 신부는 솔로몬이 된다.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서 신랑 예수님을 사랑하며 노래하는 이 관계 설정이 바로 1절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신랑으로, 또 술람미 여인을 신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1절에서 정확히 답한다. 즉 솔로몬이 하나님 자리에서 노래한 것이 아니다. 신부 성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이 1절, 곧 솔로몬의 노래다. 솔로몬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부 신앙에 섰다면 신부의 노래가 곧 아가서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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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성서와 생활[9] 그리스도인의 영성-용서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특별한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능력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다.   이 생명은 또한 주님 안에 있으며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할 생명이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시105:4. 우리가 찾아야 할 능력의 생명 중에는 주님 안에서 역사한 용서하는 생명이 있다. 베드로의 영성은 설교를 통해 수천 명을 회개시키며 귀신을 쫓아내며 앉으뱅이를 고치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영성이 이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면 우리 믿음이 더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용서의 능력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성향이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시고 죄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다. 베드로는 회개한 이후에 이전의 기사이적보다 더 큰 사역의 길을 간다.   그것은 고넬료랴는 이방인을 향한 교제의 길이 가능한데 있다. 용서는 놀라운 주기도문의 중요한 기도 원칙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6:14 용서하는 마음은 심판을 이기며 주님의 긍휼히 여김을 얻는 길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느9:17은 우리도 주님의 길이신 이 용서라는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과 혐의에 대해 용서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험을 이기고 죄를 다스리는 능력의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며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18:35 또한 용서는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는 통로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형제를 향한 어떤 불만도 용납, 골3:13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마음으로는 가능하다. 용서는 주님이 주신 능력있는 마음이며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풍성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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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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