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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5)
    ▲ 최종인목사   보건복지부 2016년 보고서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노인의 고민들을 보고하고 있다. 건강 및 기능약화(51.3%), 경제적 어려움(18%), 자녀와의 관계(4.5%), 자녀 결혼(2.7%), 소외 및 고독감(2.6%), 무료함(1.8%), 배우자의 건강 및 기능약화(1.6%), 배우자와의 관계(1.3%), 주거문제(1%), 그리고 기타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벌써 삼천년 전에도 노년의 문제는 수고와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노인이 되면 인적 관계도 줄어든다. 201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노인실태조사에서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어도 가깝게 지낸다는 노인은 46.2%밖에 되지 않는다. 노인에게는 동네 친구도 줄어들고 있다. 친한 친구나 이웃이 있다고 답하는 노인은 57.1%에 불과했다. 전체 노인의 21.1%는 우울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역사회 노인들의 대표적 소통의 장소인 경로당 이용률도 많이 줄었다. 2017년 경로당 이용률은 23%로 2011년 34.2%보다 11퍼센트 줄었다. 노인들이 경로당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로, 다른 노인과 맞지 않고(37.1%), 자신이 경로당을 이용하기에 젊다고 했다(29%).   일본에서는 나이듦을 향해 간다는 뜻의 향로(向老)학회가 활발한데, 반면에 우리나라는 나이듦에 저항하는 항로(抗老)하는 분위기가 강하고, 노인들이 내면을 가꾸는데 약해 세대갈등으로 이어진다. 앞으로 더욱 가족의 지원이 감소하고, 비정규직 증가등 노동시장의 갈등과, 1980년대 이후 정부의 복지정책이 보편적 정잭이 아니라 장애인, 빈곤층, 노인들에게 선별적, 수혜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복지 대상과 소외 대상들 간의 갈등도 심화될 전망이다.   성경이 모든 인생 문제의 해답서는 아니지만, 시편 92편은 노인문제의 해답서이다. 첫째, 만족하며 살라는 것이다.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침에 눈뜨고, 밤에 잠들때까지 감사로 살라고 조언한다. 나는 기회있는대로 ‘감사’야 말로 최고의 보약이며, 최상의 약이라고 선전한다. 감사할 때 피곤이 사라지고, 고통이 지나가며, 축 처진 내 몸이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노인이 될 수록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은 감사여야 한다.   둘째,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라는 것이다. 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때 기대한다. 오늘도 주님이 내 주변에 어떤 일을 행하실까?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새롭다. 힘이 솟는다. 그리고 기대하며 출근하게 된다. 노인에게도 여전히 주시는 은혜가 있다.   셋째, 악인들은 멸망하나 의인들,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다고 믿으라. 악인들은 당장에 풀처럼 자란다(7절). 그러나 풀이 시들듯 악인들은 시들고 만다.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고 만다(9절). 의인들은 어떠한가? 들소의 뿔과 같다(10절). 어디 풀에 비교할까?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론의 백향목과 같이 성장한다(12절). 상상만 해도 멋진 표현이 아닌가?   넷째, 노인들에게 14절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 고민이 노인에게만 있을까? 어느 세대에도 고민들은 있다. 그러나 오늘도 예배하며, 묵묵히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젊은 설교자의 허망한 설교에도 아멘으로 화답해 주는 노인들은 고민을 딛고 일어서기 바란다. 여전히 노인이어도 결실할 수 있다. 진액이 풍족하여 나눠주는 삶을 산다. 빛이 청청하여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준다.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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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9
  • 역동적이고 생명력 있는 목회 방법
    ▲ 김진오목사   현대목회의 역동성을 고려할 때 왜 디지털코드로 읽어야 하는가? 1. 대부분의 현대교회는 정체기를 겪고 있기에 절대 다수의 소속교단 교회의 목회환경은 “1인 소상공기업”처럼 절대적인 환경적 제약에 놓여 있다. 목회자는 설교자이지만 때로는 사찰, 운전사, 사무직원, 전도사, 찬양인도자 등의 모든 직임을 다 감당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에 놓여 있다. 2. 다음세대의 붕괴와 첨단의 디지털 환경은 시대를 읽어내는 소통방식의 부재를 실감하며 또한 증거 제일주의와 실증적 인식론의 경향을 고려할 때 반드시 디지털코드로 접근하고 새로운 활로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3. 목회자의 영성강화를 위한 텍스트의 신학화 작업과 콘텍스트를 읽어내는 독해력을 강화하는데도 디지털매체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시공간의 경계를 뛰어넘고 상호작용적이며 창의적 에너지를 배가시킬 수 있는 힘이 디지털매체에는 무궁무진하게 잠재되어 있다. A. 연구동기와 목적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모든 목회자들의 공통적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목회자가 ‘어떤 맥락과 어떤 강조점을 가지고 목회에 임하여야 역동적이고 생명력 있는 목회를 할 수 있을까?’이다. 이 질문은 현장목회자인 필자에게도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한때 필자는 시대적, 상황적, 방법론적 한계로 인하여 이 질문의 답을 구하는 것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시대와 상황의 한계를 항상 뛰어넘었던 것이 사실이다. 역동적 목회와 생명력 있는 목회를 위한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시대적 사명과 강한 책임감이 필자에게 새로운 역사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현장 목회자들의 여러 고민들을 목회적 영역별로 정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답변의 일환으로 영역별 새로운 방법들과 대안들을 제시하게 되었다.   필자의 낯선 논문제목인 “현대목회의 역동성 강화를 위한 디지털 방법론 연구”가 하나님의 신적 권위와 성령의 임재,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두를 주제로 삼아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오늘날 목회현장에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교회가 바로 인식하고 그 동력의 회복과 강화를 위해 적극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우선 필자가 현대교회의 경향을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필자는 지난 15년 동안 청소년 전문사역자로 전국을 순회하며 청소년 집회를 인도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교회의 다음 세대 주역이 될 청소년들이 초교파 연합집회에는 수천 명씩 몰려들지만, 기성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이런 시각을 갖게 된 주된 이유는 교회 내 ‘불통’과 ‘위화감’의 정서 때문이었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들은 현대교회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이 초교파 연합집회에 몰입하는 이유는 집회의 역동성과 문화 친밀성의 연대감이 가장 큰 배경이었다.   둘째로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서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정보통신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 초강대국으로, 정부나 민간조직 혹은 군조직과 같은 특수조직 등 전 영역에서 디지털매체를 통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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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3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4)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   인생 누구나 환난을 만난다. 죄를 지은 사람도 환난을 당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애매하게 환난을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선한 일, 좋은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음에도 환난을 당한다. 벧전 2:19~21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한다.    환난이 축복이 되는 사람이 있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환난 때문에 겸손해 지는 사람이다. 환난을 통해 변화되는 사람이다. 환난을 만나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고물상에 쌓여있던 지저분한 쇳조각들을 모아 용광로에 녹여 쇳물을 받아 귀한 도구를 만들 듯이, 하나님은 큰 환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귀한 일꾼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우리를 하나님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과정이며 하나님이 어떤 큰일을 시키기 위해서 특별히 우리를 키우시는 과정인 것이다. 하나님은 축복은 고난의 수레에 실려서 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환난을 만나도 축복을 받지 못한다. 첫째는 깨닫지 못해서이며, 둘째는 깨어지지 않아서다. 쇳덩어리, 돌덩어리와 같이 사람이 깨어지지 않아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어려운 환난과 고난이 왔을 때 더 완악해지고 악해진다.    본문에서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약속하신다. 2절에 하나님은 ‘피난처’이시다. 이곳은 은밀한 곳이며, 전능자의 그늘안에 있는 곳이다(1절). 우상숭배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이 ‘크게 견고한 산성’이라고 착각했다(단 11:39).  그러나 진정한 피난처는 하나님 한분 밖에 없으시다. 3-6에서 하나님은 보호를 단단히 약속하셨다. 사냥꾼의 올무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신다(3절). 방패와 손방패가 되신다(4절). 밤의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도 막아주신다(5절). 어두울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에서도 건져주신다(6절). 완벽한 보호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특별한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지켜 주신다.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막아주신다(7절). 악인들은 보응하신다(8절). 재앙이 장막에 근접할 수 없다(10절). 천사들을 통해 지켜주신다(11절). 단순히 환난을 막아주실뿐 아니라 높여주신다(14절).   이처럼 완벽한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려면, 첫째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한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리고 영화롭게 하리라”(15절). 약 5:13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환난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한다. 환난은 성도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고, 건지고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담아져 있다(15절). 시 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다. 환난은 축복이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면 오히려 간증이 된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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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2
  • 연합하고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호용한목사   사람은 공존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동역하는 존재이다. 공존의 원리가 삶의 기초라고 한다면 동역의 원리는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 같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주님께 헌신할 각오는 되어 있는데 함께 주님을 섬겨갈 각오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란 동역을 의미한다. 동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절대 목표가 있을 때 가능하다. 두 사람의 어떤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남을 지배하면서 동역하기는 쉬우나 남을 섬겨가면서 동역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남의 것을 인정해 가면서 동역하고 자기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동역하기란 더욱 어렵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의 벗’이라 했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나의 친구’라고 불러 주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동역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첫째는 부부관계에 있어서의 동역이다. 특별히 부부관계는 동역의 관계이다. 돕는 배필인 하와는 남편의 주인도 아니요 종도 아니다. 오직 돕는 배필일 뿐이다. 사도행전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보라.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를 갖고 있었던 부부의 모델이다. 부부동역의 원리는 사랑과 순종에 있다.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는 이유는 이 동역의 원리를 포기한 데 있다.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순종을 통해서 행복한 가정은 시작된다.    두 번째 동역의 관계는 사역자들 사이의 동역이다. 일반적으로 같은 사역자 간의 관계는 동역의 원리보다는 라이벌 원리가 더 적용되기 쉽다.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은 잘 화합이 되는데 윗사람의 경우일수록 화합이 되지 않는 것을 자주 본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델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모세가 죽은 후 그 지휘권이 여호수아에게 넘겨졌다. 갈렙의 경우 모세를 섬기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지라도 같은 동료였던 여호수아를 지휘자와 상관을 모시고 동역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85세가 되도록 불평 한마디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감격적인 동역을 해내었다.    셋째로 동역의 관계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따르는 자 사이의 동역이다. 즉 성직자와 평신도와의 관계이다. 요즘 한국 교회에는 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두 계급이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교회 안에 투쟁이 전개되기도 한다. 신앙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한 관계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 불편한 관계라면 그것은 동역의 관계가 아닌 계급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이 아닌가? 예수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고 멀고 가까움이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살고 행동해야 한다. 동역의 극치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결코 홀로 사역하시지 않고 3년 동안 제자들과 동역하셨다. 제자들을 키우시는 일에 구원 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일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훈련시키실 때도 둘씩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70인을 파송할 때도 팀으로 보내셨다. 팀 사역의 원리를 보여주시기 위해 친히 제자들의 발을 대야에 담그고 찬찬히 닦아 주셨다.    동역하는 당신의 대상이 당신 마음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동역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지 않겠는가?  /옥수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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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2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3)
    ▲ 최종인목사   미국에 살다가 잠시 한국에 방문한다니까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 쉬운 것이라며 남대문시장엘 가서 짝퉁 가방 두어개를 사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야 짝퉁의 존재를 알았고, 어디서 어떻게 구입해야 하는지 알았다. 정품 가방과 가품 가방은 같은 모양, 같은 색, 같은 바느질, 같은 치수를 가지고 있기에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구분하기 힘들다. 가품들도 브랜드 상표를 떡하니 가방 외부에 달아놓아 진품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도 왠만한 사람들은 짝퉁을 쉽게 안다고 했다.   짝퉁 가방은 물에 젖었을 때 또는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정품과 다른 방식으로 빛이 바랜다. 가장 중요한 소지품을 넣는 내부 주머니는 이음새가 완성되지 않아 엉성하다. 작가 세르반테스가 말했다. “거짓은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날 수 있고, 진실은 기어서 따라갑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속임수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거짓을 먼저 따라간다.   가짜 친구도 비슷하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기에 적당히 좋거나 아니면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친구들은 불편함과 두통거리를 안겨준다. 가짜 친구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불평이나 험담을 많이 말한다. 대화의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으로 채운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자기들이 비판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서 잘 어울리는 것처럼 행동한다. 둘째,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지 않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스스로를 매우 흥분시키며, 상대를 더욱 흥분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런 친구를 상대하기는 매우 지치는 일이다. 셋째, 그런 친구들은 나에게는 행복하게 긍정적으로 살라고 조언하고 권유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앞에서는 열심히 침을 튀기면서 조언하지만, 본인들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넷째, 가짜 친구는 정작 내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의 만족이나 무언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접근할 뿐이다. 나의 성취에도 관심이 없고, 내 문제에도 피상적으로 대할 뿐이다. 다섯째, 가짜 친구는 의욕을 꺽는 발언을 한다. 만나고 오면 힘빠지게 한다.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고 말해도 “안돼 그런 것은 성공할 수 없어”라든가 “현실을 직시해”라는 말로 힘빠지게 만든다. 여섯째, 가짜 친구는 나의 유머에도 반응이 없다. 오히려 냉소적이기도 한다. 일곱째, 가짜 친구는 집요하게 내게 묻는다. 다른 사람에 대해 묻고, 교회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진정한 관심이 아니라 평가하려는 의도를 가진것 처럼 보인다. 이런 가짜 친구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은 소중한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며, 교회안에 이런 사람이 많으면 교회 조직이 흔들릴 수 있다.   시편 88편은 다윗 당시 음악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헤만이 지은 노래이다. 처절한 고통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본다. 문제는 ‘재난이 가득하며’(3절),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4절), ‘무덤에 누운 자 같으며’(5절), ‘주께서 고난을 주시는’(7절),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에 나를 도울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내게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다”(8절).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셨다”(18절)고 고백한다. 잠시동안에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지만, 고통의 순간에 떠나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 때 남아 지켜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이다. 13절에, “여호와여 오직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이처럼 하소연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행복하다. 가짜 친구는 수백명이 있어도 무익하다. 진짜 친구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인생에 크게 유익하다. 하나님을 친구로 곁에 모신 성도들은 행복하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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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02
  • 다음세대를 향한 고민
    ▲ 이효상원장   우리는 우리의 심각한 현실을 알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미 고령화되고 노화되었다. 젊은 인구가 대량으로 유입되지 않으니 평균 연령은 지속적으로 치솟는다. 젊은 층의 유입은 간헐적이고 단기적이고, 이슈나 의미 등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다.   대한민국 다음세대 청년의 현주소를 먼저 짚어봐야 한다. 2018년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청년’ 키워드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한국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다음세대 청년의 현주소를 먼저 짚어봐야 한다.   현장에서 젊은이들을 만나보면 현재 자신의 신앙생활 유지에 가장 큰 어려움’에 대해 대부분 학교나 직장 등에서 일로 인한 ‘시간과 여유 부족’을 꼽는다. 젊은이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면, 학업, 가족, 취업, 건강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종교는 소수에 불과했다. ‘피곤한 일요일, 교회에 가면 밥 먹여주나요?’라고 묻는 청년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 각박한 사회생활 속에서 정신적, 심리적 위안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교회로 불러오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보수는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진보도 이미 전통의 일부가 되었으며 기성세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 어느새 진보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신선한 시도, 과감한 도전, 날선 비판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대마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방식의 효과는 무엇보다 교회가 계속해서 젊음을 유지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 그 새로움을 담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새로운 시각,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시대를 가르는 논객이 없다.    더 나아가 그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한 평신도 전문사역자 양성이다. 평신도들 사이에는 미래의 전문가를 준비하는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은 상당히 많다. 또한 전국의 신대원생 가운데 상당수가 여기 해당할 것이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신앙을 키우며 묵묵히 공부하는 미래의 일꾼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전문 지식이 교회를 위해서도 사용되었으면 하는 아름다운 꿈을 품고 있다. 더욱 전문화된 사회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주류 종교로서 복음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미래교회는 이들의 전문성과 열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교회와 어떤 ‘전문적 연결고리’를 원한다.   청소년들이 교회로 유입되지 않는 현실에서 교회안의 청소년들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나가야 한다. 그곳이 학교이자, 캠퍼스이다. 가령 예를 들어 학교와 교회를 이어줄 수 있는 청소년 적성, 진로상담사를 교회의 중고등학교 교사 중에서 키워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세대를 위한 설동주목사(과천교회)의 ‘쉐마교육’과 서길원목사(상계교회)의 청소년 연합사역은 다음세대의 대안으로 한국교회를 주목하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와 교회에서 가능한 역할을 고민하고 나눌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미래 교회의 주역들, 미래의 다양한 평신도 사역자들의 발굴은 무더운 여름 이렇게 사역현장에서 시작된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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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01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2)
    ▲ 최종인목사   겸손은 모든 인생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성품이다. 특히 성도들은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이 겸손하도록 도우신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난한 마음이 있다. 물론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늘 하나님을 찾는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1절). 실제로 가난하고 궁핍하여 찾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의미한다. 욥은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기 22:29)”고 말했다. 여기서 겸손한 자는 “눈이 낮은 사람”이다. 솔직하게 성찰해 볼 때,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작게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다윗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편 22:6)”고 한 말에 동의한다.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경건을 찾는다. 2절에서 “나는 경건하오니 나의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했다. 여름철 과일의 계절이 되었다. 상점에서 사온 과일을 펼쳐 먹으려 하면 가장 달콤한 부위에 벌레가 먹은 흔적이 있다. 인생 스스로 교만한 부위에는 꼭 사탄이 침투한다. 내가 능력이 있다고 느낄 때, 내가 모자람이 없다고 느낄 때, 나는 매우 잘한다고 자만하는 그때에 사탄이 역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경건하려 노력한다.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은혜를 구한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3절). 장마철이 되고, 뜨거운 여름이 되니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찾는다. 시원한 음료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많다. 여전히 겸손한 사람들은 항상 은혜를 찾는다. 셋째 하늘까지 경험했던 바울도(고후 12:2)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했다(고후 12:7). 진짜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오히려 자신의 무지와 믿음이 부족함을 알기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역경이 왔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한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4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7절). 이처럼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찾는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8절).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최고로 여긴다. 어려울 때나 형통할 때나 오직 하나님께 관심이 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언어를 주목해야 한다. 입만 열면 항상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이다. 반대로 언제나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모든 칭찬을 자신에게서 주님께 돌린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다.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니”(10절). 교만이 가득한 사람은 자신이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불평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받고 누리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감탄하며 산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설때 까지는 끝난 것이 절대 아니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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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26
  • [더불어 생각한다] 러시아 월드컵을 보며 한국교회를 생각하다
    ▲ 이효상원장   지난 한 달간 러시아 월드컵으로 잠 못드는 밤을 보냈다. 우승은 프랑스가 감동은 크로아티아가 가져가며 마쳤다. 전 세계에서 축구 좀 한다는 나라들이 예선을 치루고 지난 6월부터 러시아 월드컵의 우승 트로피를 향해 32개국이 발진했다.   우리나라 축구도 독일을 이기기는 하였지만 그리 썩 만족할 만한 성적은 아니어서 전략과 전술의 부재라는 오명과 함께 손흥민과 조현우 골키퍼라는 우수한 선수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4년 전 축구’, ‘동네축구’라는 국민들의 비난은 축구협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1998년 ‘아트샤커’로 전 세계를 호령한 프랑스는 20년만에 팀을 다시 우승후보로 올랐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즐비한 프랑스의 팀워크가 결국 우승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주목했다. 프랑스는 선수 개개인의 뛰어난 능력을 하나로 모을 조직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기를 계속할수록 안정되어가며 평균 24.9세의 연령으로 ‘새로운 황금세대의 출현’이라는 이름에 맞게 크로아티아를 4대 2로 이기고 우승하였다. 프랑스의 유능한 감독과 공격수 음바페가 있고, 세트피스에 능하다는 장점과 더불어 디데에 데샹감독의 전략과 전술로 인하여 프랑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축구 경기를 보면서 개인기를 넘어 조직력이 가장 중요한 것은 축구만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제 위치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주는 선수, 도는 실무자가 조직을 승리로 이끈다.   축구나 조직이나 사실 감독자는 자기 말을 듣고 자신에 충성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에 거슬리거나 다른 의견을 가지고 말하면 싫어하고 멀리한다. 말로 약장수처럼 말로 파는 말꾼이나 구경하다 잇속만 챙기며 조직의 미래와 상관없는 구경꾼을 좋아하면 조직이 끝난다. 축구협회나 감독이 실력 있는 선수들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동료의식이 없이 자신의 맘대로 하고 싶으면 그때에는 본인이 선수로 뛸 할 각오로 해야 한다. 그래서 아마추어 감독이 실력 있는 선수를 못 챙기는 것이다. 자기 수준이하의 선수를 데리고 무슨 경기가 되겠는가.   축구협회나 어느 조직이든 다양한 의견의 허심탄회하게 수렴되는 과정이 생략되기에 그래서 발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조직의 발전은 치열한 의식화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결의를 집행할 때 강력해진다. 치열한 토론과 헌신 등을 통하여 다듬어 지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라는 ‘정체성’과 ‘공동체성’을 몸으로 체감하므로 구성원 모두가 건강한 미래를 만든다. 어느 조직이나 우려스러운 것은 발전을 위한 치열한 논의구조를 건너뛰고 외면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의사결정 구조, 교회가 접하는 이슈에 대한 논의구조가 전근대 방식이다. 교회말로 하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70년대 개척교회당회식 운영’이다. 조직이나 기관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몇 몇 임원들의 이야기 몇 마디로 ‘배는 산으로’ 간다. 사실 감독자나 실무자는 이런 유혹을 뚝심있게 이겨내고 논의와 설득, 조정 작업을 거쳐 조직을 유연하게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는 사람이다.   러시아 월드컵이 전 세계와 인류에게 전한 메시지는 대단했다. 개인기가 뭉쳐 팀워크를 이룰 때,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월드컵 16강을 다시 밟으려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건강한 시스템을 만들고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하고 키우며, 다시 팀워크를 맞추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광을 재현하려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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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8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21)
    ▲ 최종인목사   교회안에서 사별자들이 늘어나면서 사별자들은 어떻게 지낼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병들어 오래 앓다가 죽은 이들의 가족들도 여전히 슬프다. 더구나 갑자기 생을 달리하는 경우 가족들의 충격이나 아픔을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앙인들은 슬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 보내고 혼자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현실적으로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멍하게 하고, 우울함과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한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충분한 지원은 슬픔과 고통을 이기는 필수 요소가 된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지지 그룹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슬픔을 이기는 속도가 달랐다. 시편 84편의 저자는 ‘만군의 여호와’를 지지자로 삼았다. 그러기에 여호와를 모신 처소인 주의 장막을 사모하고, 그곳에 자주 가서 슬픔을 이기려 했다(1절). 물론 슬픔의 이유는 다르지만, 오늘날도 슬픈 사람들은 주의 성전인 교회를 찾아야 한다. “주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12절)고 하시지 않는가?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슬픔을 이기는 최상의 방법이다. 가만히 있으면 절로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명렬히 부르짖고 기도할 때 슬픔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기쁨이 샘솟듯 한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절). 부르짖음이 괴롭고 슬픈 상황을 이기게 한다. 사별의 아픔 뒤에 찾아오는 고통은 피할 길이 없다. 아무 때나, 어디에서나 눈물이 쏟아져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특히 고인이 좋아하던 장소, 고인이 즐겨먹던 음식, 고인이 쓰다 남긴 물건들을 보거나 만지게 되면 슬픔이 목언저리까지 차고 넘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 기도할 때 슬픔을 이길 수 있다. 물론 사별자들이 처음부터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기 어렵다. 그러나 기도가 습관이 된 사람들은 곧장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마음에 대로를 만든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절). 죽음 뒤에 찾아오는 아픔이나 슬픔은 피할 길이 없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말라, 마음 아프지 말라, 평안하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아 모른다. 시온의 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큰 마음을 만들면 많은 슬픔을 담을 수 있다. 사별자 가족들은 작은 소리에도 상처를 받게 되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건에 마음을 상하기 쉽다. 만약 마음에 대로를 만들었다면, “그저 지나갈 뿐이다”면서 이길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미국 삼나무가 있다. 이 큰 거목들은 그동안 홍수나 태풍, 지진에도 살아남았는데, 결국 개미들에 의해 갉아먹혀 쓰러지고 말았다. 시온의 대로를 만들지 않으면 왠만한 작은 소리에도 넘어지고 만다.   슬픔 뒤에 유익이 있다. 슬픈 일이 있다고 계속 인생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슬픔의 경험을 보낸 후 더 큰 은혜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5절). 당장 눈물 골짜기를 가는 것은 아프기 짝이 없는 나쁜 상황이다. 그러나 그 길을 가다보면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눈물 많고 상처도 많은 세상에서 살다보면 상심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런 눈물 골짜기를 지낼 때에 오히려 유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슬픔도 이기기 쉽다. 많은 샘은 여행자들에게 기쁨의 장소요 생명의 장소이다. 이른 비는 메마르고 딱딱한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 곡식의 씨앗을 파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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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8
  •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취할 자세
    ▲ 추영춘목사  목사안수를 받고 가장 하고 싶지 않는 설교는 저주에 관한 것이다. 자칫하면 목회자가 성도들을 저주하는 것인 양 착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목회 초기에 전도사로서 어느 교회에서 시무할 때였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한 성도가 시험이 잔뜩 든 얼굴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도사님이 오늘 저를 저주하셨어요” 나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는데, 내가 그 성도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그냥 웃고 넘어갔지만, 성도들은 이 ‘저주’라는 단어에는 아주 민감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순종에 따른 축복도 많지만, 불순종에 따른 저주도 많다. 당장 창세기부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범하고 저주를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가 저주를 받아 불과 유황으로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천사의 말을 무시하고 끝내 뒤를 돌아보았던 롯의 아내는 저주를 받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다윗에게 훌륭한 점이 있다면 주님의 뜻에 오직 순종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국가와 왕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던 다윗이었다. 그러나 사울왕은 백성들로부터 자신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다윗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윗을 죽이려 했다. 결국 다윗은 사울왕을 떠나 10년 세월을 도망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의 진영에 다윗과 몇몇 부하들이 몰래 잠입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들은 잠든 사울 곁까지 다가갔다. 이제 다윗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한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삼상26:9).   오늘날 기름부어 세운 주의 종 목회자를 교인들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본다. 목사의 실수, 허물, 약점 등을 들어 교회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하나님께로부터 큰 심판을 받는 경우를 본다. 기름부어 세운 종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힐난하기 보다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경청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에 수용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소원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로마서 15장 1-6절 말씀을 통해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자세를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면 안된다(벧전5:3). 근신하고 깨어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려면 성장 성화 성숙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형상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다(요일2:9).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한다(요일3:18).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이 돼야한다(요3:8).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  /순복음신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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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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