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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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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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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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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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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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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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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실시간 칼럼 기사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1
      신약성경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시길 원하신다.   필자는 몽골선교를 위하여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몽골현지 10개 지역에 강대상을 기증하여 몽골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전달하였다. 몽골에는 몽골선교의 선봉에 서서 귀한 사역을 하고 있는 ‘몽골기독교총연합선교회’가 있다. 몽기총은 죽음 직전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오직 한 길, 3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사역에만 전념하며 한국기독교계의 큰 흐름을 주도하셨던 김동근 몽기총 법인 대표회장이 몽골복음화, 한 영혼사랑에 감동으로 2015년 7월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몽골 땅에 첫 발을 내딛어 시작되었다.   몽골 현지인들도 10~20여 년 동안 받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종교 법인을 주님께서 주신 지혜로 2015년 12월 몽골 종교법인을 취득하였다. 라마불교가 대다수이며 사회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몽골에서 당당하게 십자가 불을 우뚝 밝히며 몽골 복음화를 위해 지금까지 활발히 일하고 있다. 몽기총은 타성에 젖어 퇴락하거나 정체중인 몽골선교문화를 일깨우며 바른 복음, 능력 있는 복음을 심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몽골기독교총연합선교회는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철도와 중국과 울란바토르 시내로 이어지는 국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선교센터에 높이 세워진 불 밝힌 빨간 십자가는 이제 많은 몽골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몽기총은 몽골 복음화를 위해 교회가 필요한 곳에 지름 12미터 대형 ‘게르성전’을 건축하고, 현지 목회자를 세우며, 열악한 몽골 교회들의 강대상보급운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게르성전 건축운동과 강대상 보급운동은 2018년 4월에 시작하여, 2019년 8월 현재 35개의 교회를 세우고 350여 교회에 몽기총에서 직접 만든 강대상을 전달하였다. 몽골 경제에 복음을 심고자 하는 목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경제활동을 추진하며, 동사무소, 고아원 등 지역이웃을 섬기고 성실히 사역하는 현지 목회자를 후원하며, 부활절에는 지역 교회와 연합하여 감사예배를 드리고, 몽골교회들과 함께 몽골 전 교회의 공동기도제목인 2020년까지 몽골 복음화율 10%를 위한 ‘2010’기도운동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몽기총의 주일예배는 모두 십자가를 보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현지인들과 선교회 직원들, 특히 김동근 법인대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 현지인들과 함께 드린다. 몽기총은 몽골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몽골복음주의협회와 협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몽골 각 도의 교계 지도자들이 찾아와 협력과 도움을 구하는 상황이다. 이름대로 <몽골기독교총연합선교회>로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있다. 또한 통나무집(선교관1.2)과 게르, 아파트 등 게스트하우스에 80여명이 숙식 가능한 깨끗하고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몽기총을 방문하시는 분들께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교회단위로, 가족단위로, 개인으로 2년여 동안 1,500여명의 방문객을 기록할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몽골 땅을 밟으며 몽기총을 통한 김동근 대표의 귀한 사역에서 회복과 치유 등 치유의 사역이 활발하다.   몽기총의 사역은 오시는 분들이 영과 육이 회복되고 치유되어 각자의 자리에 돌아가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는 역방향 선교인 동시에 몽골 복음화와 몽골을 통한 북한, 러시아, 중앙아시아에 복음 전파의 비전을 품고 일하는 쌍방향 선교를 지향하고 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땅 끝까지 이르러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사명을 실천하며 기도에 힘쓰고 주님이 오실 그 날까지 구원 받은 은혜 감사하며 예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몽기총 선교회 가족들은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사태로 몽골로 가는 하늘 길이 막혔다. 속히 해결이 되어 김동근 대표와 선교사들이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천국을 전파하여 몽골,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까지 선교의 영역이 넓혀지길 기도한다. 한국교회 성도여, ‘몽골기독교총연합선교회’를 위해 기도하자. 몽골복음화를 위한 게르성전 건축과 강대상 기증 사역에 합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몽기총의 선교사역이 더 큰 일들을 이루도록 함께 동역하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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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9
  • [마라나타 1] 마라나타!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 약속이다.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말씀의 언약을 믿고 다시 오시겠다 하신 예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다.   내일의 약속이 있는 사람은 오늘 행복하다. 어제의 서러움과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약속이 신실할수록 우리의 인내는 기쁨이 되고 소망이며 살아가야 할 존재감이다.   마라나타(maranatha)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당시의 제자들이나 성도들은 그들 생전에 예수님께서 곧 오시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인사말로 사용하였다. 다시 오실 그때를 그 누구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자는 환난의 징조로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가 미혹하고, 불법이 성하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일월 성신에 징조가 있으리라.   그때에 인자가 구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니 천사들이 나팔소리로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 하리라.   주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 우리는 들려 올라가리니 그곳에서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리라.   옛 약속과 새 약속은 오직 하나이다. 사랑을 기다리는 것, 약속을 믿으면 기다릴 수 있다.   요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간에 거리 두기가 마음 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초대교회 베드로 바울 요한처럼 우리도 그렇게 인사하고 싶다.   마라나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수필가·한강교회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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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6-07
  • [세계명작과 성경의 만남 11]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화 - 헤밍웨이의 「큰 두개의 심장을 가진 강」
      창세기 2장 10~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을 이루고 사방으로 흘러가게 함으로써 인간이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셨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요 소설가 헤밍웨이(1899~1961)는 단편소설 〈큰 두개의 심장을 가진 강〉 1~2부에서 닉 아담스가 전쟁에서 부상당하고 정신적 쇼크로 쇠약해졌지만, 자연 가운데 강에서, 흥미 있게도, 송어잡이를 함으로써 심신이 회복되고 삶의 구원을 누리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기(송어)는 초기 교회에서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내용과 관계가 있다. “두개의 큰 심장 가진 강”은 상징적으로 고기(음식)의 형태로 생명(삶)을 주고 그리고 구속(치유)을 해주기 때문이다.   닉 아담스는 제일차 세계대전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상처를 받고 환멸을 느껴, 집으로 돌아와서 북 미시간으로 캠프여행을 떠난다. 그는 혼자서 여행을 떠나서, 자연(숲속)속에서 천막을 치고, 고기를 잡을 준비를 함으로써, 부상(어떤 부상인지 말하지 않음)과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헤어 나와 평화와 균현감각을 회복하려고 한다.    숲으로 가는 도중에, 닉은 폐허가 되고, 파괴되고, 잿더미가 된 미시간 주의 “세니” 도시를 통과하게 된다. 도시는 없어지고, 남은 것은 철로와 황폐한 풍경뿐이었다. 황폐한 세니 도시는 닉으로 하여금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게 된 육체적 부상과 파괴된 황폐함과 전쟁 이후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정신적인 갈등과 연결 지어 생각게 한다.   닉은 “내가 만일 부상을 당하여 미쳐버려서 충격적인 악몽에 사로잡히면 어떡하지?”하고 생각한다. 허리까지 오는 습지에서 공격당하고 공격하는 전투에서, 닉은 부상을 당한 후 신고 있는 두 장화가 따뜻한 피로 채워져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기억한다. 닉은 황폐해진 땅에서 메뚜기들이 검댕이로 덥혀 있는 것을 보고서, 닉은 자기 자신이 전쟁에서 검댕으로 덥혀져 있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검게 타버려 검댕이 투성의 세니 도시는 전쟁의 흉악함과 닉의 정신과 정서에 끼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나타낸다.   닉은 타버리고 파괴된 세니 도시를 뒤로하고서, 큰 두개의 심장을 가진 강의 풍요롭고 푸르고 기름진 강둑을 바라보았다. 도시를 지나 강위의 다리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강은 시간과 무시간을 상징하고, 치료와 삶과 죽음의 자연적인 순환을 상징한다.   닉은 다리위에 멈추어 서서, 다리 저 아래 있는 강과 송어를 바라보았다. 닉은 송어가 빠르게 흐르는 깊은 강물 속에서 건실하게 떠 있는 것을 보고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의기양양함을 느꼈으며 심장이 강해짐을 느꼈다. 숲속에서, 닉은 예배처소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늘어선 작은 숲속에서 잠을 잤다. 그 숲에서 닉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잠을 잘 잤다. 그 곳에서 닉은 치료받기 시작한 것이다. 예배처소처럼 보이는 숲속은 종교적인 차원의 평화와 안정을 상징한다.   닉은 푸른 초장이 있는 곳에 캠프를 세웠다. 땅을 고르고, 말뚝을 박고, 천으로 덮었다. 이 모든 것은 닉을 행복하게 했다. 닉은 돼지고기, 콩, 스파게티가 혼합된 깡통음식으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했다. 단순한 캠프의 삶은 닉으로 하여금 스트레스와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정된 삶을 누리게 했다.    시편 23편 2절에서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라이프신학원 총장, 국제크리스천학술원 원장,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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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4
  • [실로암] 뉴 노멀 시대의 놀이 인식
      네덜란드의 역사가 겸 철학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코앞에 둔 1938년 인간의 정신적 창조 행위로서 나타나는 유희 활동과 인간 본질의 연결성을 고찰한 명저 〈호모 루덴스〉를 공개했다. 그가 이야기하길 예부터 인간의 정신은 동물을 사냥하고 씨를 뿌리며 철을 두드리는 생산 활동에서 창조적인 사고를 이루는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아이들처럼 뛰놀며 몸과 마음을 소진하는, 물리 세계에 아무런 생산성을 지니지 않는 잉여 활동 속에서 창발적 사고를 성취하는 힘을 얻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데에만 치중하기보다 순간순간 유희 활동을 통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저미는 즐거움이란 감정을 사고의 확장을 이끄는 중요한 동인으로 여긴 것이다.   전 세계가 전쟁의 암운으로 드리우던 시절 발표된 하위징아의 저서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되짚어볼 수 있는 유익한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런 연유였는지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나, 로베르토 베니니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타이카 와이티티감독의 「조조 래빗」 등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미디어 콘텐츠를 보면 마냥 우울하거나 비참함만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작지만 아름다운 선행과 유머,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자그만 미소와 웃음 그리고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간간이 보여 준다. 이를 통해 거스를 수 없을 듯한 거대한 힘 앞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 의지를 우리에게 비친다.   이렇듯 비극의 역사 안에는 인간은 거기에 절망하지 않고 웃음으로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무수한 시도가 기록됐다. 그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시지 않은 지금 WHO에서 집 안에 머물길 권하면서 독서와 음악, 영화와 함께 비디오 게임을 권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 이뤄지는 것이라 본다.   코로나19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코로나19 이전의 생활상이 더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예측하고 있다. 오프라인을 통해 누군가 실제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된 지금 자택 근무가 사회적으로 큰 반발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듯, 놀거리를 향유하기 위한 인간 본연의 흐름을 타기 위해서라도 비디오 게임을 중심으로 하는 놀거리에 관한 사회적 인식의 재고가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회사와 학교, 음식점과 클럽, 심지어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프라인 모임을 탈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지금 온라인 환경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유희를 제공하며 젊은이들에게 위기를 극복할 힘을 주는 비디오 게임계를 향한 따가운 눈초리를 코로나19 시대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젊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한 명의 인격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부모나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는, 경제적 생산 활동의 도구로 키워내는 데에 혈안을 내는 우리네 사회에서 타인의 인격을 인정하고 드높이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할 모임인 교회가 이를  선도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라면서 어린이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며 존중하셨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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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1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3)
      여러분 !!!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평가는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평가와 우리가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의 상처받은 말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라고 평가해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평가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본문 43장 7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로 하십니다. 나의 나된 존재의 목적은 영광에서 우리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1)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루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0 : 10 “ ...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운동 / 구령운동 / 치유운동입니다.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운동 예수 믿는 백성이 거의 다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을 퇴치하는 길은 예수 운동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잘 살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는 일입니다. 살전 5:23 “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네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것은 정신건강을 영적건강과 똑같이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건강과 마음과 정신 건강, 몸의 건강을 위해 사역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요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배롭고 존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치유운동이요, 정신건강의 회복도 치유운동입니다. 이 말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창조하는 교회를 세우시고 너의 영광을 위한 치유상담사역이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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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1
  • [목회자 칼럼] ‘실언’의 위기에서
      “권사님 때문일지도 몰라요, 아니 권사님 때문이에요” 이렇게 속으로 뇌까리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밖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속회가 잘 모이지 않아서 속상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권사님의 푸념은 그 속의 교인님들의 근황을 지나 당신의 근황을 들러 어느덧 끝이 보이지 않는 자랑으로 이어진다. 긴 얘기 끝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이 그 많은 내용들을 형식적으로나마 간증으로 만들어 주곤 했다. 누군가의 자랑이 내 자랑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속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자랑하는 사람의 탓도 있으리라. 그래도 몇몇 자랑거리를 움켜쥐고 힘겹게 생을 견뎌내는 중이시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니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 나는 내가 비껴지나온 그 어떤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예수님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이나 죄를 사해 주시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주었고 예수님을 죽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가르쳐주셨다. 같이 죽자는 말씀이신가? 주기도문은 놀라운 선언이 담긴 부름으로 시작한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불렀기 때문에 족보가 이상하다는 그야말로 이상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교인들이 서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가족처럼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형제고 자매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가족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이만큼 잘 드러내주는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 좋은 말이 지금의 교회에서는 직분을 받지 못한 대상을 부르는 어색한 부름이 되어버린 게 애석하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까지도 예수님은 가르쳐주셨다. 예수님이 바알세불, 귀신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나라도, 사탄도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가족이 밖에서 예수님을 불렀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가족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성경에서 미쳤거나 바알세불을 지폈다는, 예수님에 대한 지독한 오해를 만들고 전달하는 자들로 강하게 대비된다.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   자본주의의 산업사회에서 가족은 부와 그 대물림을 꿈꾸는 집단이기주의의 단위가 되어버렸다. 성직자들은 잘못된 축복관 등으로 그 흐름을 부추기는 무리가 되고 있다. 부가 축복과 신앙의 척도가 되니 힘겨운 여염집 살림을 꾸려나가는 대부분의 교인님들은 누군가의 간증 같은 자랑을 듣고만 있어야한다. 비교가 강제되는 순간은 교회가 스스로 분쟁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선포되어야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고, 가족으로서의 사명도 감당 할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가족과 함께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교인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한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은 많은 오해에 노출된다. 개독교 정도 얘기 나왔으면 더 이상 어떠한 설명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개교회들이 그 규모를 유지하는 데에만 온 정신과 시간과 물질을 쏟는 형국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결코 걷어낼 수 없다. 소멸해갈 뿐이다. 아무리 자신의 가족을 위해 온갖 노력을 쏟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와 내 가족에게 그리고 교회와 세계에 더 좋다는 것을 믿는다면, 더 믿자. /산돌교회 교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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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1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0
      우리나라는 오천년 역사가 흘러오기까지 외세의 침략을 수없이 받았다. 특히 6.25는 우리 민족끼리 전쟁으로 무고한 국민들의 많은 피를 흘렸고, 우리는 그 날들을 기억한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와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시 일어섰지만 아직도 휴전상태이며,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정은 이 시대의 요청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242대 탱크와 170대의 전투기를 앞세운 북한군이 서부, 중부, 동부 전선에 걸친 전면 남침을 개시하여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일 후인 6월 27일,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로 UN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UN군의 일원으로 전투참가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 및 재정지원 39개국, 지원 의사 표시 3개국 등 총 63개국이 한국전쟁에 함께 했다. 한국전쟁은 핵무기만 제한된 세계 3차전쟁과 다름없는 대전 속에서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북한군 93만, 중공군 100만, 민간인 250만, 이재민 370만, 전쟁미망인 30만, 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1,90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 동안 민족상살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었다. 이에 필자는 반세기 이상 세월이 지나 잊혀져가는 ‘6.25 70주년’을 기념하여 전쟁의 참사를 현장에서 느끼고 자유역사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참전 용사와 함께하는 ‘6.25 격전지 탐방’에 참가했다. 1박 2일 동안 ‘한국근현대사 역사탐방훈련원’ 주최로 진행되었다. 서부전선 강화도, 김포, 연천 등의 격전지를 거쳐 중부전선으로 자리를 옮겨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 철원 백마고지, 노동당 당사, 철원제일교회를 방문하였다. 특히 북한군과 치열하게 전투한 동부전선 강원도 양구군에서 펼쳐진 ‘도솔산전투지구’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난공불락이던 도솔산(1,148M)지구전투에서 1951년 6월 4일부터 개시한 미국 해병대 제1사단 제5연대와 임무 교대하여 국군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고 17일간의 혈전 끝에 완전 탈환함으로써, 그 용맹을 만천하에 떨쳤다. 당시 이 작전은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암석지대를 이용한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특히, 그 지역을 점령, 방어하던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12 및 32사단 정예부대였다. 따라서 우리 군은 주간 공격을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작전을 감행한 끝에 6월 20일 24개고지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어 교착상태에 빠졌던 아군의 전선에 활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우리 해병대는 이 작전에서 3,265명의 적을 사살한 반면 아군은 123명에 그치는 사상자를 내었으니, 해병대 전통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루는 이 전투야 말로 이 나라 대한민국 유일한 산악전 사상 유래 없는 피의 대공방전으로서 청사에 길이 빛날 기념비가 되었다.   1고지부터 24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특히 6월 17일 2대대는 19고지를 점령 후 미국 해병대 5연대와 연계하여 20고지를 점령 미국 해병대의 항공, 포병 화력지원으로 21고지 점령 도솔산 방향으로 계속 공격하여 야간 공격 10중대가 전원 공격 개시를 하여 도솔산 정상 24고지 모두를 점령하였다. 도솔산 전투의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원도 양구군에 위치한 도솔산을 직접 방문하여 ‘무적해병대’휘호를 하사했다. 특히, 결혼 후 바로 도솔산 전투에 참전하여 장렬하게 죽어가며, 죽는 순간 집에 두고 온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자신을 닮은 쌍둥이 나무를 이용하여 마음을 표현했다. 현재도 도솔산 전장의 상처 입고 그을린 소나무로 “해병전사의 영원한 기상, 도솔산의 전투, 무적 해병대, 충성스런 해병대 이곳에 잠들다, 해병이여 영원하라, 불사조 해병, 무적해병 당신은 대한민국입니다.”등의 문구들로 국가를 위해 순국한 이들의 마음을 담아 자리하고 있다. ◇도솔산전투 승전비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산하를 황폐하게 만들고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의 아픔만을 남긴 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선(線)70년간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치유하기 힘든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서부전선, 중부전선, 동부전선으로 이어진 막강한 화력으로 전쟁의 현장을 느꼈던 것은 소중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군과 한국군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이 70여 년 동안 전쟁을 극복하고 경제순위 세계 12위로 발전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적 중에 기적이었다.   이제는 피로써 겪은 전쟁을 소중한 문화의 에너지로 삼는 역사의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 때이다. 민족의 상처를 회복하려면 자유민주주의 의식개혁을 수반한 평화 통일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단의 은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책임과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가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통일로 가기 위해서 남북이 힘을 합쳐 세계 복음화와 민족의 재도약을 위한 평화 통일을 반드시 이룩하는 것에 귀하게 쓰임 받는 국가 지도자들과 국토방위에 전념하는 군인들과 국민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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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1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9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선교사로써 교회 개척과 영혼구원을 위해 50여년을 걸어 오셨고,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십자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선교단체와 애국운동, 샬롬나비, 신학대학교, 학회 등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시는 육호기선교사의 생애와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해방 전 1945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가난한 빈농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하였지만 부모님의 기독교 신앙 안에서 매일 가정예배로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 당시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고려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로 진급하지 않고 농사일을 돕는 농부가 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대전에 있는 어느 중학교 입학원서를 가지고 오셔서 모든 서류를 제출하셨다며 그에게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는 합격이었다. 학교 전체의 자랑감이 되었지만 두메산골 가난한 농촌 집에서 어떻게 등록금을 내며 과연 공부를 시키겠는가? 어린 그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호기, 네 생애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고 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육선교사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안은 아들을 공부시키느라 얼마 안 되는 논밭 다 팔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미사리)으로 이사했다.   어느 날 담임목사께서 육선교사에게 한강 상류 지류인 강 건너(지금의 조정 경기장)편에 기도처로 있던 작은 풍산교회에서 담임전도사로 사역을 하라고 해서 그는 당시 한남노회에서 전도사 고시를 시취했다. 또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입학원서를 가지고 와 총신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시험을 치라고 했고, 입학하면 교회에서 등록금 일체를 마련하겠다고 해서 육선교사는 그대로 순종했다. 육선교사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1966년 9월에 화전중앙교회(현, 항공대학교 앞)를 개척하였고, 총신대학교와 신대원을 졸업하고도 1969년 12월에 군입대할 때까지 계속 화전중앙교회를 시무했다. 1969년 12월에 군에 입대하여 훈련마치고 오산 비행장에 있는 방공포사령부에서 군인교회를 섬기면서 평택제일교회도 시무했다. 1972년도에 전역을 하고 곧바로 평택제일교회에서 위임목사로 목회하였으며, 1976년 12월에 서울 충현교회(고 김창인목사 시무) 후원으로, 총회가 파송하는 유럽 1호 독일선교사(GMS 소속)가 되었다. 육선교사는 1977년 5월 25일 비스바덴한인교회를 개척하여 19년간 시무하였으며, 1978년 5월 3일 뷔르츠부르크 한인교회를 개척 13년간 시무했고, 1978년 5월 하나누 한인교회를 개척 17년간 시무하였다. 위 3곳의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시간을 11시, 오후 4시, 오후 7시로 정하고 주일에는 각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였고, 주중에는 수, 목, 금요일 오후에 성경공부 하였으며, 절기 때에는(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세 교회가 한곳에서 연합예배로 드렸고, 수련회와 야유회를 년 1회 연합으로 행사를 가졌다.   ◇육호기선교사     개척한 한인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성장되자 세 교회가 연합하여 1982년 5월에 터키 이즈밀에 최초 서머나 한인교회와 터키현지인교회를 개척하여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1999년 10월에는 아프리카 브리키나파소에 두 곳 교회당 건축을 하여 헌당식을 가졌다.   1989년도부터는 구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구권에 공산권 선교를 하면서 성경을 보급하는 사역도 했고, 1998년도 유럽예수교장로회총회를 설립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교포 2세들 중에 현지 신학공부를 마친 이들에게 강도사와 목사고시를 시취하여 목사로 임직케 하고 현지인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활동을 하면 협조하기로 하였다.   육선교사는 학원선교사역에도 매진했는데, 2001년 불가리아 개혁 신학교 이사와 교수로 사역을 하였고, 2007 - 2010년 미주 칼빈성서신학대학 선교학 객원교수로, 2011년 6월 인도 켈카타 현지인 사랑의 교회에서 영어예배 설교자로 섬겼다. 아울러 2012년 10월 - 2016년 6월까지 인도 켈카타 로고스신학교 교장과 교수로 학원 선교사역을 감당하했고, 2016년 9월 - 2018년 4월 필리핀 보홀에서 현지인 교회를 섬기며 설교자로 사역하였다. 육선교사는 2019년 4월 미주 칼빈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 명예 대학원장과 2020년 4월 18일 칼빈국제학술원 선교대학원 원장으로 왕성하게 귀한 사역을 감당하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육호기선교사는 고난과 시련이 연속되는 상황이 올 때에 절대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 보자. 육선교사의 개척 정신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불굴의 도전의식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사업 그리고 인간관계의 복잡한 환경 속에서 포기하거나 실망하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일어나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해 주신 소중한 사명을 감당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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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1
  • [성경의 죽음 14] 기드온의 죽음이 주는 교훈
      주어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참된 지도자의 부재로 여호와 신앙 잊어버린 이스라엘   성경에서 기드온의 등장과 그의 활약은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교회학교에서 부르는 찬양에도, 성경학교의 주제가인 ‘하나님의 용사’에도 기드온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시골 농부 출신이었고, 성격도 소심해 보이는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가 된 것만 보아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불과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10만이 훨씬 넘는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전쟁 때문에 기드온의 명성은 높아가고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사사기 8장 22절).   다행인 것은 기드온이 그의 사사로운 욕망을 내비치지 않고 백성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시골로 낙향했다는 점이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리라’(사사기 8장 23절). 여기서 아쉬운 점 하나는 엉뚱하게도 적들에게서 탈취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사사기 8장 24절).   누구든지 완벽하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은 드물다지만, 하나님께 붙들려 크게 쓰임 받았던 기드온의 말년은 매우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주변에서 젊은 시절에 크게 쓰임 받다가 노년에 이르러 버림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성경의 교훈을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2절).   기드온은 은퇴하면서 물질을 요구했고, 그것으로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기념으로 만들었는데 결국 사람들은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게 된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았을 기드온은 당장에 에봇을 녹여 다른 용도로 사용했어야 하는데, 그냥 방관했다.    무슨 의도가 깃들어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기드온의 이러한 선택은 결국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빌미를 남긴 것이다.   누구든지 인생 마지막에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데, 기드온 같은 용사도 마찬가지 예외는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던 기드온은 성경에 의하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사사기 8장 32절)고 증언한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죽음 이후였다. 몇 가지 현상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다.   첫째는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속히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사사기 8장 33절). 바알브릿은 사사기 9장 46절에 보면 ‘엘브릿’이라고 했다. 바알브릿, 또는 엘브릿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생산신이다. 살아있을 때 당연히 중요하지만, 죽은 이후에도 백성들이 엉뚱한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평소에 잘 가르쳐야 한다.   둘째는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사사기 8장 34절). 모세는 죽기 전에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가르쳤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장 18절).   셋째는 기드온이 죽은 후 사람들은 기드온에 대한 고마움도 잊고 그의 집을 후대하지 않았다.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에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사사기 8장 35절).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사랑과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다. 그것이 인생의 본성인줄 알고 기대하지도 말고, 살아있을 때 너무 잘 해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본성이 잘 대하는 사람이라도 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아쉽고 안타까운 기드온의 죽음이다.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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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9
  • [향유옥합]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도서관의 역할
      맛도 있고 몸에도 좋은 표고버섯을 자연에서 키우는 농부의 이야기이다. 재배 장소는 야트막하고 약간 그늘진 곳에 X자로 비스듬히 나무를 세워놓고 키우면서, 세워놓은 나무들을 작대기로 툭툭 때려 주면, 표고 포자들이 주위에 골고루 퍼지면서 잘 번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표고버섯은 보통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에서 포자도, 버섯도 튼실하게 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농부의 말에서 고난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본다. 때로 절대자는 우리를 고난의 작대기로 때린다. 우리의 잠든 영혼을 깨우는 섭리이다. 그래야 자아를 성찰하며 하늘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기치 않게 우리는 고통의 비바람에 쓰러진다.   코로나19도 우리에게 예기치 않게 와서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우리에게는 답이 없다. 다만 이웃에 아픔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성숙한 태도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겸손함을 가져할 때라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6장 25절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가 코로나19에 걸리면 어떡하지?’라는 염려보다 감탄하며 사는 삶을 산다면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내리시지 않을까?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 교회 식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안녕을 기원하며 활기차게 오늘을 맞이하듯 말이다.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시며 감탄하셨다.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그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이 시간을 걱정 대신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계기로 만들면 어떨까!   현재 도서관에선 대출은 되지만 도서관 안에서의 활동은 금지되어 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장소의 구분이 어디 있을까! 무엇을 읽을까, 어떻게 읽을까 고민하지 말고 책을 빌려 무조건 읽어 보자.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책을 읽자’라는 말처럼 책을 읽으며 상상력을 키워가고, 책을 읽는 것을 통해 타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경청할 기회를 갖는다면, 코로나19로 인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우리에게 조금 더 주어진 시간을 값지게 쓸 수 있지 않을까.   독서를 통해 내가 읽은 책 속에서 나에게 적용할 단 한 문장을 찾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매일 행복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우리의 스트레스를 가라앉혀 주고, 우리 몸에도 최고의 휴식을 가져다주며 사회성을 높여주고, 정신적 노화도 막아준다. 또한 강력한 치유의 힘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란 무릇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자세히 분석하거나 산과 들, 바다와 하늘에서 비치는 아름다움을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노래하길 염원하는 존재임을 알기에 정신을 가꾸는 가장 유익한 수단은 독서야말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큰 효과를 누릴 수 있으리라 본다. 지금의 코로나 19 상황을 불평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주어진 것에 감탄하며 살아가자. 모든 필요를 때에 맞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희망한다.  /마중물도서관 관장, 소명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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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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