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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사랑’ 율법의 요구 10회] 주께서 오시어 이루신 일들과 연계
    온 인류가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 백성 되게 하시는 성탄과 십계명의 사랑   이천년 전 주께서 육신을 입고 유대 땅에 오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주신 십계명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한다. 주께서 이루신 사역이다. 곧 사단에게 종살이하는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어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땅에서 평화이다. 또한 하늘에는 영광이다. 주께서 지신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마귀의 일을 멸해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생활은 온 인류가 사단에 놓인 종된 삶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애굽은 사단의 나라를 예표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이라고 표현하시어 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사단에게 매여 종살이 하는 죄인들임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성탄은 죄인된 사람의 나라와 그 죄에서 구원해주실 두 줄기 역사를 상고하게 한다.   구원과 언약의 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사랑의 승리이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이심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어 십자가 사역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는 구속사역의 예표이다. 곧 십계명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백성으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지침이다. 더불어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창조주 절대자이신 구원자이심을 알고 경외하도록 주셨음을 찾는다. 온 인류가 사단의 종노릇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한 십계명과 성탄의 목적임을 깨닫는다. 그런즉 영적 사단에서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구속의 예표라 할 수 있다. 십계명은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가나안을 차지하기까지 주를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강령이다. 어떤 하나님인지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 이에 지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임을 아는 지혜이다. 잠언2장 1~4절 증거와 같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길이다. 이를 위해 주신 십계명의 목적을 찾게 하시어 좇게 하셨음을 확증케 한다. 창조 목적대로 이끄시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피조물로 회복이다. 더불어 말씀에 순복하여 주의 뜻을 알고 지켜 백성의 의무와 몫을 발견케 한다. 곧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게 하신 주께서 죄인들을 살리시어 거듭나게 하신 이유이며 목적과 같다. 이러한 정체성을 알고 회복한 자들은 이에 합당한 몫을 하며 산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을 받은 그들의 몫과 연계이다. 신약의 거듭나게 하신 목적의 관계성이다. 성령과 동행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는 영적 구속사역의 몫으로 이루어지는 주의 제자화로 영광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믿음으로 하나님의 원하심을 알고 종으로서 몫을 하는 깊은 성화의 확증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오시어 십자가 사역을 이루신 그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이를 담은 성경이며 이를 줄인 십계명의 교훈이다. 곧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 하신 지침이다.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말씀과 연계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것들을 위해 사는 여정이 될 수 있는 지혜와 지식과 명철임을 확증케 한다. 이와같이 십계명은 지혜의 앎을 가져 주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이 되고 악에서 떠날 수 있는 명철로 성탄의 기쁨과 믿음으로 제자된 삶을 성화로 사랑 계명의 연계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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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5
  • [향유옥합] 순전한 나드 향의 위로
      러시아에서 정교회의 성탄 예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콘으로 가득한 성당은 촛불로 밝혀졌고, 처음 맡아보는 향기로 채워져 있었다. 오감을 통해 오직 예수의 생애에 집중하게 돕는 낯설고 아름다운 예배는 온몸을 전율케했다. 성호를 긋고 예를 갖추는 5시간의 서서 드리는 예배는 모태 신앙인으로 살아온 삶을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예배였고, 이 경험은 이후 안식년을 그리스 정교회 예배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말씀을 귀로만 듣는 수동적 신앙이 아니라 촛불을 켜고, 이콘을 보고, 무반주에 가까운 악보없는 찬양을 귀로 익혀 부르며, 향내를 맡고, 정교회인이 아닌 예비신자에게 선물로 주는 거친 빵의 담백함을 느끼며 온몸으로 능동적이며 풍성한 예전을 맛봤다.   대림절의 시기 정교회 예배의 감격을 회상하며 베들레헴 마굿간을 그려본다. 강보에 싸인 아기와 이제 막 엄마가 된 마리아를 어떻게 만나야할까. 별을 따라 온 동방박사들이 준비한 황금과 유향, 몰약은 값비싼 물질의 상징만이 아니라, 치료제의 기능을 지닌다. 유향과 몰약은 향기 나는 오일(Anointing oil)이며, 그 효과는 고대로부터 알려져 여성 교회박사 빙엔의 힐데가르트에 의해 대체 의학으로 보급돼 아로마 테라피에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미가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신약에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이들이 모두 여성이었음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아기 예수를 감싼 ‘강보’는 한 장의 천이 아닌 붕대처럼 얇고 긴 천으로 탯줄을 자른 뒤 소금으로 씻고, 기름을 몸에 바른 아기를 둘러싸는 형태다. 이는 아이를 따뜻하게 보호하고 몸이 바르게 자라도록 돕는 하나님의 돌보심, 즉 ‘품’을 상징한다. 에스겔 16장 4절에서 이스라엘을 ‘강보’가 풀린 상태, 즉 버림받음을 상징하며 사용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품인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in Christ) 머무는 것이다. ‘강보에 싸여있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허물을 씻겨주시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위로해주시며 강보에 감싸 덮어주신 그 사랑을 떠올리니 가슴이 따스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향유 옥합에 담긴 ‘순전한 나드’의 향이 궁금했다. 우연한 기회에 아토스 성산의 수도사들이 만든 나드향 향료를 갖게 되었다. 산스크리트어로 ‘향기를 발하다’는 뜻의 나드는 히말라야 고산의 풀에서 채취되는 유향의 한 종류다. 때로 예수님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나드향을 맡곤한다. 성서 속 장면과 향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일까 늘 큰 위로를 받는다. ‘마리아는 이렇게 좋은 향을 예수님께 드렸구나. 나는 무엇을 드려야할까.’   목사이며 신학자이기 이전에 여자며 엄마이기에 오래 기다려온 예수의 탄생의 기쁨 이면에 감추어진, 엄마 마리아의 산고를 기억하고 그녀를 먼저 안아주고 싶다. 출산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다. 마리아에게도 향기로운 기름이 그녀를 위로해 주는 치료제로 사용되었기를 바란다. 또한 한파 속에서 환대받지 못한채 홀로 생명을 맞이하는 소녀 마리아가 있지 않는지… 교회 담장 넘어 시선이 닿지않는 곳을 살피고 따스한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향기가 우리의 몸짓에서 배어나오길 소망한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여성영성연구소 'The품' 대표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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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3
  •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
      역사는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뉜다. 기원전 BC(Before Christ)는 예수님 이전 시대이고, 기원후 AD(Anno Doimini, in the year of our LORD)는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년대가 시작 된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 예수님 이땅에 오신지 2022년이 되었다고 말한다. 역사의 기점이 예수님이시고, 역사(History)는 바로 그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AD 500년경 라틴어가 세계어였었을 때, ‘주님의 해’란 의미인 AD로 표기되어 11세기 무렵 유럽 전역이 사용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 1월 1일부터 서기력을 사용하여 이에 2333을 더하면 단기력이다. 올해는 단기 4355년이다.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중 가장 늦게 기록됐다(AD98년경). 골고다 이후 사도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다녀야 했으므로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에베소에서 자연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마태·마가·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했는데 요한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주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눈으로, 가장 곁에서 정확하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그가 곧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빛으로, 생명의 떡으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전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3:16, 20:31) 주님의 해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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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3
  • 성聖과 속俗, 그 첨예한 대립상(1)-유재용의
      단편소설 <관계>로 제4회 이상 문학상(1980)을 수상한 바 있으며, 또한 장편소설 <성역>(1980)의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유재용(1936~2009)이 1992년에 같은 장편소설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를 내어놓았다. <성역>의 발표 이후 그가 기독교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어떤 기대를 독자들에게 안겨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역>이란 그 작품 자체가 곧 기독교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볼 때,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의 출현은 특히 기독교문학 작품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걸었던바 먼젓번의 그 기대를 결과적으로 실현시켰다고 하는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 유재용의 확실한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낸 작품으로서, 그 후에 나온 그의 또 다른 중편소설 <위대한 환상>(1996)과 더불어 그의 기독교소설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를 통해서 본 작가 유재용의 기독교소설 세계는 성(聖)과 속(俗)이 엄격하게 구별된, 이원적 대립 구도 속에서 그 스토리가 전개되는 그(유재용)만의 개성적인 특유의 문학세계라고 하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 경우, 작가 자신에 의해 엄격하게 식별된 ‘성’과 ‘속’의 이원적 대립 구도가 그의 기독교 세계관의 범위 안에서 궁극적으로 지향되어야 할 그런 당위적인 세계로 작품상에 설정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즉 그의 이 소설 속에서 성(聖)의 세계와 속(俗)의 세계가 엄격히 구별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소설의 스토리 전개를 위한 제재(題材) 선택의 차원에서 동원된 일종의 구조적 장치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작가의 전작(前作) 장편 <성역>과 이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호 유사한 세계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두 장편소설들은 이른바 ‘텍스트 상호관련성’을 매우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투명한 상관성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은 <성역>이 성과 속이란 대립적인 세계의 의미를 천착하는 작품이라고 할 때,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 역시 성과 속의 대립적 세계의 의미를 캐내려고 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두 작품들의 제목 모두가 ‘성(聖)’ 자(字)로 시작되고 있지만(‘성역’과 ‘성자’란 용어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나 ‘성역’이란 말 속에는 그것의 상대적인 뜻을 지닌 ‘세속’(속세·속계)의 의미가 원천적으로 중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성자’란 말 속에도 그 상대적 의미인 ‘속인’이란 말뜻이 암묵리에 중첩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소설들은 이른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즉 ‘추적과 도주(또는 역추적)’의 모티프를 근간으로 하여 성과 속의 사회적 관계 의미를 해부하는 작품들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가 전작 <성역>보다는 그 밀도 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추적과 역추적의) 모티프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이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성역>과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 두 장편소설 모두가 성과 속의 사회의미론적 상관성(또는 상대성)의 주제를 천착하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상호 ‘텍스트 관련성’을 긴밀하게 맺고 있는 소설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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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1
  • 주의 제자가 되려면?(1)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0절의 제자 신앙이다. 오늘날 교회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실상 영적 공백기가 있었다. 교인들의 신앙 상태는 침체 되었다. 교회에 나와서 현장 예배드리는 것에 소홀하다. 그간 익숙해진 온라인으로 예배하며 신앙 생활하기 일쑤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신앙이라면 아무런 영향이 없다. 이같은 환란을 기쁘게 여긴다. 장차 더 큰 환란을 바라보며 더욱 영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것이 예수님 제자의 신앙인 것이다. 주님은 먼저 누구든지 자기 부모, 형제, 처자들을 미워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한 채 내게 오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육신적인 것의 모든 것을 온전히 초월하고 주님만을 따르라는 말씀인 것이다. 설령 육신의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 장례를 치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마8;21). 또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마16:25). 특히 종말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순교하지 못하게 막는 누구도 그가 집안 식구일지라도 원수이니 그들에게서 나와 산으로 도망하라.   다음으로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이는 주님의 고난과 그 발자취를 따르는 자만이 주님의 제자가 되리라는 말씀이다. 자기 육신의 영달,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의 것이 되라는 것이다.   아직도 자기라는 존재, 즉 자기의 영광,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산다면 자기가 부인된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오직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는 바울의 고백같이 자기가 죽어지고 부인되어져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이 제자 될 수 있는 것은 망대 공사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즉 완공할 수 있는 비용이 완비되어야 하듯 주님 제자로서 믿음, 즉 순교의 믿음이 미리 마련되어 있어야 될 것을 말씀해주신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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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1
  • [건강교실] 일상을 방해하는 어지럼증 (하)
      ‘이석’이 본래의 자리를 이탈하여 옆에 위치한 세반고리관으로 들어가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석증 외에도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다양한 원인질환으로 메니에르병, 전정편두통 등이 있다. 이러한 원인질환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에 맞게 약물 치료, 재활 훈련, 고실주입술이나 수술 등의 방법을 이용한 알맞는 치료를 해야 한다.   이석증은 이탈한 이석을 전정기관으로 되돌려보내는 물리치료를 반복 시행하면 호전된다. 전정신경염에서는 이환된 쪽의 평형기능이 저하돼 정상인 반대측과 양측의 균형이 어긋나, 가만히 있어도 몸이 빠르게 회전하는 느낌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이로 인해, 급성기 증상을 조절하는 약물치료를 하면서 전정 기능이 균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정재활운동을 하게 된다. 또한 메니에르병은 약물치료를 기본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고실 내 약물주입술을 시행하고, 난치성 메니에르병의 경우 수술을 시행하기도 한다. 전정편두통은 약물치료를 하면서 증상을 조절한다.   어지럼증이 갑자기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어지럼은 증상이 심할 때 검사를 할수록 결과가 정확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지럼을 일으키는 질환이 다양한 만큼, 증상이 사라지기 전에 내원하는 것이 진단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 다만 평소보다 잘 넘어지거나 중심을 잡기 힘들 수 있으므로 반드시 보호자와 함께 이동해야 하며, 비교적 가벼운 어지럼이라 할지라도 직접 운전을 하거나 자전거, 오토바이 등을 타는 활동은 전문의와 상의 후에 하는 것이 안전하다. 실제로 어지럼으로 인해 낙상사고와 골절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특히 고령 환자의 경우는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한다.   다행인 점은 귀 질환으로 인한 어지럼은 초기에 그 강도가 극심할지라도 시급을 다투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대부분 양 팔로 벽을 짚거나 보조를 받으면 바르게 서서 제자리걷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뇌 질환의 경우는 뇌졸중이나 뇌출혈과 같은 중추성 질환에서 어지럼이 나타나는 경우는 빠른 진단과 치료가 필수적이며, 심근경색이나 부정맥과 같은 심장질환 때문에 어지럼이 나타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몸통이나 다리가 흔들리고 양 발의 간격을 넓게 벌려 불안정하게 서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동반 증상 없이 단순히 어지럽기만 한 뇌 질환도 있으므로 정확히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따라서 응급실에 어지럼으로 내원하게 되면 뇌 영상검사와 기본 혈액검사를 먼저 시행하고 소견에 따라 이비인후과 진료를 보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지럼 환자가 뇌질환이나 심장질환과 같은 전신질환의 위험인자나 기저질환이 있거나 특히 마비, 두통, 구음장애, 의식저하, 실조증상 등을 동반하는 경우에는 즉시 응급실로 내원토록 해야 한다.   끝으로 내이 질환은 단일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유전적 요인, 호르몬, 바이러스, 혈류 장애, 면역계 이상 등이 다양하게 영향을 준다. 일반적으로 규칙적인 전신운동, 건강한 식습관, 충분한 수면과 숙면이 권장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나 과로, 음주, 흡연, 짠 음식, 신체활동 부족 등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한양대학교 이비인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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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9
  • 자기희생적 그리스도인의 표상(3) -현길언의
      실로 선우백은 아래로 투신할 것인가? 이런 의문과 여운을 남겨 놓은 채 <사제와 제물>은 한 노동 사제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 소설은 노동자 이채원의 죽음(투신)을 계기로 하여, 노동 사제 선우백이 관계한 노동 공동체의 체질 개선과 예상되는 변화상을 그려보려는 기미를 내비치고 있다. 과거엔 노동 사제가 제물(노동자들)과 서로 유리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사제 자신이 제물(노동자들)과 하나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노동 공동체(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노동 운동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참 사제가 될 때, 지금껏 하나의 제물로서 희생만 당해 왔던 노동자들의 천국(진정한 삶의 터전)도 이루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양심을 결코 저버리지 못하는 사제라는 의미에서 선우백은 <신열>의 강성수 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로 보인다. 주인공 선우백이 목사의 신분인지, 단순한 평신도 신분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한 처지인지 작품 자체만을 가지고서는 말하기가 어렵다. 평론가 김윤식은 어느 글에서 선우백을 분명하게 ‘목사’라고 표현하곤 있지만, 그의 단정과 같이 그가 반드시 목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 윤성호가 분명히 목사 안수를 받은 교역자이기는 하지만, 어느 때 소속 노회에 목사직을 사임하고서 단순한 평신도 신분으로 돌아간 뒤 오히려 목사 때보다 더 의의 있는 실질적 목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선우백이 신분상 목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 별 큰 문젯거리는 되지 못한다고 보겠다.   특히 그가 노동 현장에서의 산업 선교사 위치(신분)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문제는 사제로서의, 희생을 각오한 그의 순교자적 자세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된다고 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다짐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제물로 바침(던짐)으로써 사회의 여론을 불러일으켜 사용자 측에 경고를 주고, 또한 노동자들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주자는 의도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신열>의 주인공 강성수 목사가 일제 강점기에 야학을 운영하면서 문맹을 깨우치다가 후에 개척교회를 세워 일선목회에 뛰어든 후(광복 시기 이후) 좌익 폭도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나, 노동 해방이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선우백이 1980년대 노동운동의 마지막 단계에서 예언자적 각성에 이르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참 사제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며 죽음 앞(직전)에 서게 되는 것이나 모두 다 참다운 희생의 길을 취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가 오생근이 어떤 글에서, 현길언의 소설들은 여러 가지 삶의 양식을 통해서 통일되게 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 도덕적인 삶”의 모습들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과도 같이 강성수나 선우백의 삶은 확실히, 오늘에 있어서 찾아보기 어려운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 도덕적인 삶”의 모습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어떤 작품의 제목(‘껍질과 속살’)을 빌려 그대로 표현해 보자면, 이들의 삶은 분명히 ‘껍질’로서의 삶이 아니라 ‘속살’로서의 삶을 산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이 바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표현해 보자면, 자기희생적인 ‘참 그리스도인 상’인 것이다. 작가 현길언은 <신열>이나 <사제와 제물> 등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자기희생적인 참 그리스도인 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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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6
  • 더 큰 일을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2절의 이 말씀은 12사도들에게나 또는 훌륭한 몇몇 능력 받은 목사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씀 아닐까? 그러나 분명 주님은 나를 믿는 자들은 이런 일을 하리라고 하셨다. 믿는 자는 예수의 구원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자다. 즉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들이다. 이들은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18까지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다. 이 믿는 자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귀신을 내쫓고 병자에게 안수하면 병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자신이 능력이 있음이 아니라 내 속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축사, 신유의 이적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사도행전 3장 6절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내가 은과 금은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다. 그 말대로 됐고 그가 일어나 성전에 뛰어 들어가 찬양했다. 이와 같이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도구로 하여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여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며 귀신을 쫓고, 병 고치는 치유 사역도 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 주님은 이보다 더 큰일도 믿는 자들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이다. 즉 승천하시어 성령을 부어주실 것임을 가리킨 것이다.   주님이 12제자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지역 중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120명의 주님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고 이들이 성령시대의 기둥으로 출발,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성육신하신 주님이 직접 일하실 때, 즉 성자 시대는 성령 받지 않은 12제자들이 기둥이었으나 성령시대에는 120명으로 열배로 확대됐다. 그 복음 받은 지역도 이스라엘을 넘어 전세계로 확대됐다. 이것이 성령으로 이루신 더 큰 일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의 이 성령시대인 2천년이 끝나면 환란시대가 온다. 이때는 다시 내 영을 내 남종들, 여종들에게 부어주어 예언하리라. 이 남·여종들이 곧 144,000이다(계7;2-4). 1,200배로 확산된 이들은 환란시대의 기둥이 된다. 즉 일곱영을 부음 받아 더 큰 권세로써 주 재림의 길을 예비한다. 이것이 더 큰 일이다. 우리 믿는 자들이 여기에 들수 있도록 사모합시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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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6
  • [‘그 사랑’ 율법의 요구 8화] 주님의 멍에 메고 배우라 하신 이유
    주를 사랑하여 사람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영혼 구원의 도와 영생   하나님 말씀의 대략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주께서 죽으심도, 죄인들을 살리시어 그 자취를 좇게 하시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함이다. 주의 영으로 거듭난 자들과의 서로 사랑 역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주님 사랑과 하나이다. 곧 용서와 죄사함을 위함이다.   주께서 긍휼을 베푸시며 자비를 원하시어 주님의 뜻이 사랑으로 빛을 발하게 하는 주의 백성화로 견인이다. 누구든지 마음의 쉼을 얻기 원한다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이유와 목적임을 찾게 하신다. 마음의 쉼을 얻는다는 것은 사단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속하여 주와 화평케 된 심령의 상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희락과 평안이다. 죄사함의 결과 얻는 영생으로 두 계명을 지켜 받는다. 곧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심과 같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심을 깨닫는다. 이를 위해 주께서 오시어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고 은혜로 사랑을 주셨으며 그 사랑을 알게 하셨다. 주로 인한 사랑이기에 세상은 이 사랑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사랑은 영적인 새 생명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자요 영적인 주의 나라 주의 백성의 왕이시다. 신중의 신이시며 표적과 부활을 나타내 영생의 하나님, 유일신 구원자이심을 확증시켜 주셨다. 이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주로서 계명으로 주신 전도의 목적이다. 온 세상이 죄 가운데 있기에 이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도로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어 누구든지 그 길로 들어가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사랑이다. 이 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영혼 구원임을 누가복음10장25~28절은 증거해 준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신 말씀이다.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든지 주를 믿고 좇아 살리움을 받는 구원의 도이다. 이어진 물음에 유대인의 이웃은 자신들의 형제자매만이 아니라 헬라인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임을 지혜로 발견케 하셨다. 새 언약이 도래되어 누구든지 구원의 도를 지키는 자는 새 생명을 얻어 영생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출현은 새 언약의 도래로 유대인들의 이웃은 온 인류이다. 모든 인류를 주의 백성으로 구원을 위하심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이를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 갈수 있음을 연계시켜 알고 좇아야 한다. 반드시 두 계명의 지킴으로 인한 구원의 도이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는 주의 섭리임을 확증케 한다. 주께서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심이기에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모든 믿는 자에게 능력이 됨이라 하셨다. 곧 십자가 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자에게 주시는 마음의 쉼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이를 위한 멍에이며, 이를 위한 배움이 되어 아버지의 뜻을 알고 종의 몫을 할 수 있음이다. 이와같이 그 사랑과 주의 뜻을 알고 그 구원의 도를 좇아 이르게 되는 영생이며 이를 위한 멍에임을 확증하는 바이다/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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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5
  • [향유옥합] 다문화시대 교회의 역할
          교회에서 지역 이주민과 2세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있는 「토요학교」를 소개한다. 동네마다 십자가가 있는 교회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언니, 오빠, 형, 누나가 있는 그곳에서 마음의 안식을 누리고, 공부도 하고, 한국인을 만나며 조금씩 사회와 문화에 융화되도록 돕는다. 이처럼 부족한 언어에, 아는 사람도 없이 한국에 들어와 많은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교회가 품어줬으면 한다. 실제로 토요학교를 다니며 마친 아이들은 공교육 현장에 놓여졌을 때 학교생활 적응력이나 학습능력이 훨씬 좋았다.   우리나라는 글로벌 이민·다문화 이주민 공존시대로 접어들었다. 현재 전국 각 지역 3분의 1 이상이 이민·다문화가정이다. 관련 분야 전공자이자 실무자로서 몇 가지 정책 제언을 해본다. 이민·다문화교육이 좀 더 전문성을 갖춰, 각 분야에 전문적 활용가치를 의무교육화하고, 국외로 이동하는 송출업무에 이어, 국내로 유입하는 수민업무가 가능한 교류인력 관리가 우선 필요하다. 기존 E-9(비전문인력) 외국인근로자를 고용하는 기업들은 전담인력을 고용하거나 지원센터 등을 활용해 효율적인 외국인 근로자 관리를 해야 한다. 또한 D2나 D4 외국인 유학생들이 학교 밖 취업 시에 체류 자격 외 활동허가를 받고 일을 하도록 하여 불법취업을 방지하고, 비자연장이나 구직, 취업비자 변경 시에는 불법취업 전력으로 인한 불이익(출국명령)을 줄이고, 학교 밖 유학생들의 근로 관리를 위해 유학생 근로담당자라는 전담인력을 채용하여 학사행정 등 외국인 유학생들이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관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각 지자체는 농번기를 맞아 수백 명의 E-8(계절근로제도) 외국인 근로자가 한꺼번에 입국하여 농어가에 배정할 때, 지자체 담당자가 현실적으로 수백 명의 근로자를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농어가에도 외국인 근로자 관리 전문인력을 통한 획기적인 관리모델이 준비돼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체류 외국인에 대한 이해도도 높이고 국내 유입 외국 인력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대안을 위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시기이다. 현재 국내로의 인력 송출국은 필리핀, 베트남, 몽골, 타이 등 16개 국가이다. 따라서 외국 인력 관련 직업군을 자연, 인문계열 학문과 현장에 융합시켜 물류가 아닌 인간이동의 노동력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을 주장하는 바이다. 특히 외국인 정책의 사각지대를 찾아내고 끊임없이 정책적 지원 마련을 촉구함에 심혈을 다하며 정보전달의 외부 강의를 비롯하여 포럼, 행사 등 현장에서도 외국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편, 그렇게 이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안정이 되면, 추후 다문화가정을 꾸릴 수 있고, 한국으로 다시 유학을 올 수도 있고, 이곳에서 새 직장을 잡을 수도 있다. 이처럼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외국인 근로자, 다민족, 이주민들이 편하게 들락거릴 수 있는, ‘문턱이 낮은’ 교회가 되어 ‘진정한 선교’를 하길 바라는 소망이 있다. 또 한국사회와 이주민을 잇는 ‘가교’ 역할을 교회가 감당하길 바란다. 한국인 선교사를 외국으로 파송하는 것도 좋지만, 국내 이주민들에게 먼저 손을 뻗어 이들에게 쉼과 교육을 제공하는 체계와 인력을 갖추는 것이 더 시급하고, 꼭 필요한 선교의 한 방편이란 생각이 든다. /명지산업대학원 이민다문화학 국제교류경영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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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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