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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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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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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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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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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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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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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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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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관
    ▲ 김국경목사 며칠 전에 지인이 찾아와서 30대 중반인 자신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축하해 달라고 하면서 청첩장을 건네주고 갔다. 청첩장 뒷면에는 ‘저희 두 사람은 행복한 꽃길만 걷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뜻으로 풀이 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인에 의하면 결혼할 당사자들은 명문대를 나와서 일찍이 대기업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결혼 후 두 사람의 연봉을 합치면 행복한 꽃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꽃가마를 타고 밀월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좋은 환경에서 특수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여건에 놓여있다고 할지라도 ‘행복한 꽃길만 걷겠다’는 표현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자만일 뿐 아니라 실업자나 가난해서 결혼을 미루는 청년들에게는 큰 충격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영업을 하다가 빚만 지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생존경쟁이 치열한 오늘날에는 재벌과 능력자인 부모를 잘 만나야 좋은 대학도 가고 출세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龍)난다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가난한집 자녀들의 성공사례가 다반사였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이면서 주일이면 교회를 성실하게 섬기는 장로님이 있었다. 그분의 간증에 의하면 당시 그의 가정이 비교적 부요했으나 부친이 아들 삼형제에게 일단 고등학교만 졸업시키고 대학은 너희들이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약간의 생활비를 주어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 형제는 부친의 권고대로 객지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어 공부를 했고 삼형제가 모두 성공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을 과잉보호 하면서 유약하게 기르기 때문에 그들이 고난을 당하면 도전 의식 없이 두려워하고 역경을 만나면 쉽게 넘어진다. 독일 속담에 쓴맛을 모르는 자는 단맛도 모른다고 했다. 자신을 위해 꽃길만 걸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보람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성경과 우리의 길 되신 예수님에게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엠마오영성부흥협의회 대표, 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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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9-02-24
  • 대한LED 스크린 대표 양영규장로
    ▲ 양영규장로   고화질 디스플레이 보유, 여러 교회서 예배당 스크린 설치 최신제품 개발하고 최고의 부품을 사용하며 향후 AS 보장 양영규장로(꽃동산교회·사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직한 기업을 세워 스크린 사업 해 나가고 있다. 양영규장로가 대표로 있는 대한LED 스크린은 친환경, 저전력, 고품질, 긴 수명을 자랑하는 고화질 단일화면인 LED 비디오 디스플레이를 최첨단 기술로 생산·보급하고 있다. 양장로는 제품의 질, 서비스, 신뢰, 정직을 바탕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가고 있으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경영이념으로 더 좋은 제품개발과 대량 생산, 유통구조 개선을 통한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은 교회와 기업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대한LED는 여러 교회에 스크린을 설치한 만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수원중앙침례교회, 꽃동산교회, 평강교회, 용현동교회, 대전중앙교회 등 여러 교회가 대한 LED에서 스크린화면을 설치했다. 대한LED는 △정밀과정으로 이음선 없는 대형화면 △부드럽게 변화하는 이미지 △보정기술 우수 △저전력 구동으로 화면의 열 40%이상 감소 등의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동 업체는 최신 제품을 개발하여 최고의 부품을 사용하며, AS정책을 무상으로 2년 동안 제공한다. 이와 함께 디스플레이 화면 외에도 교회 방송 시스템에 필요한 스위처, 자막기, HD 카메라 등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동 업체는 교회, 학교, 컨벤션홀, 예식장 등 실내에서 볼 수 있는 적절하고 우수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파노라마 3면 분할 스크린도 설치 가능하며, 대한 LED 스크린이 설치하는 디스플레이 제품은 높은 명암비와 주사율, 30% 밝기 이하에서의 완벽한 그레이 스케일, 밝기와 색상의 균일성, 낮은 발열과 에너지 절약으로 구동될 수 있다.  ▲ 대한LED 스크린은 LED 비디오 디스플레이를 최첨단 기술로 여러교회와 기업에 생산·보급하고 있다(사진은 꽃동산교회 예배당에 설치된 스크린).   한편 양영규장로는 사업에도 열심이지만 꽃동산교회(담임=김종준목사)에서 총괄교육위원장을 맡고 있어 다음세대를 향한 사역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다. 양장로는 주일학교와 다음세대 사역에 대해 “한국교회 미래는 주일학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출산 저하로 인해 숫자가 적어지고 전도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주일학교 부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개인주의에 따라 모든 세대간의 차이가 나고 있다. 한 사람의 더불어 아름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사는 세대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준비된 교사의 열정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고 교사들도 세상에 휩슬려 세상 밖으로 나간다. 교사와 아이들이 멀어질수록 주일학교가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며, “교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양장로는 평신도 사역자가 더욱 많아져야 하며,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평신도사역자가 많은 교회가 부흥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새신자가 정착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데, 새신자들이 들어왔을 때 그 분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정착하게 해야 한다”며, “어린아이들도 헌신된 일꾼으로 세울 수 있다. 어린아이가 예배가 주체가 되어 헌신하면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전했다. ▲ 여러 교회에 스크린을 설치한 만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사진은 수원중앙침례교회 예배당에 설치된 파노라마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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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19-02-22
  • “중국교회의 아픔 외면하지 말아야” - 한국순교자의소리 대표 현숙 폴리목사
    ▲ 한국순교자의소리의 대표 현숙 폴리목사는 한국교회가 순교자의 정신을 회복해 이웃교회와 함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순교자들의 신앙·영성 회복통한 한국교회 변화 도모 “이웃교회의 고통 외면하는 역사로 기록되선 안돼” “한국교회 초창기 있던 여러 순교자들의 신앙을 한국교회가 하루 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현숙 폴리대표(사진). 현숙 폴리대표는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을 바탕으로 하던 뿌리를 점차 잊고 있다고 말했다. 폴리대표는 “일제강점기 직후까지 세계 어디에 내놓아서 흠이 없을 정도로 순수했던 한국교회의 신앙이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고 있다”며, “이전까지는 정말 순수하고 정말 좋은 신앙으로 양육했던 한국교회가 이런 역사와 과거를 잊은 채 방황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교회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교회와 신앙을 지키고자 피를 흘리며 죽었던 한국의 여러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한국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을 지키고자 순교했던 선배들의 신앙심이다”고 밝혔다. 이어 “그렇기에 한국순교자의소리는 매순간 한국교회가 잊고 있는 순교자들의 목소리를 조명해 그들의 신앙과 영성을 한국교회가 이를 듣고 깨달아 순수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무너지고 있다는 한국교회를 다 함께 노력해서 다시 살릴 수 있도록 뿌리부터 재건하는 데에 집중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중국정부의 박해로 고통받는 중국교회를 위해 현숙 폴리대표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폴리대표는 “여러 사진과 영상, 문서들을 보면서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중국교회 교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다”며, “중국 이른비언약교회의 왕 이목사가 공개한 선언서를 처음 봤을 때 지금 중국에서 진행 중인 교회 박해가 가슴 깊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 매우 적은 정보만 해외에 알려지는 것이 현실이다”며, “한국교회가 중국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시는 깨달음을 우리 모두 기도를 통해 간구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길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현숙 폴리대표는 한국교회가 그들과 원래부터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폴리대표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21세기가 중국교회의 핍박에 대해서 침묵했다는 기록만으로 남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중국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중국 정부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이들을 러시아로 재배치하고 침묵해 중국교회 선교가 끝났다고 기록되지 않길 소망한다”고 전했다. 또한 “만약 이런 역사로 21세기 한국교회가 기록된다면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수치스러울 것이다”며, “적어도 왕 이목사가 발표한 ‘기독교신앙을위한선언서’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중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서 있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 큰 역할을 맡았던 중국교회에 은혜를 갚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하나 되어 희노애락을 함께해야 함이 마땅하다”며, “중국교회가 겪는 고통에 우리가 침묵한다면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큰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가 벌이고 있는 기독교 박해정책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현숙 폴리대표는 말했다. 폴리대표는 “중국 정부는 처음 기독교를 박해할 때 조그만 교회를 폐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해외 기독교계가 이에 침묵하자 점차 규모가 큰 교회를 치기 시작했다”며, “감금이나 폭행사건, 불법재판 등으로 인해 해외 교계에서 관심을 갖으면 중국 정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중국교회의 이웃으로 있는 한국교회가 여기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며, “조그만한 일이라고 한국교회가 함께 대대적으로 나서서 중국의 박해정책을 비판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중국교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는 것으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위험해지면 어떠한가”며, “중국교회와 함께 고통받게 된다면 하나님께선 박해를 나누는 이들을 칭찬해 주실 것이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폴리대표는 “우리는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며, “훗날 중국교회가 회복될 때 한국교회의 모습이 핍박받을 때 그들을 찾아가 함께 고통을 나눈 형제로 기억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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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 “자기감정과 생각에 복음을 전하기를 권한다” - 자기돌봄학교 대표 김유비목사
      “목사든 성도든, 목소리 큰 사람이 교회 주인이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주장의 근거는 자기감정, 자기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김유비목사(사진). 김목사는 바울과 베드로를 예를 들어 바울이 전파한 복음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바울은 베드로가 잘못하자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바울은 자기 권위를 앞세워 감정적으로 베드로를 비난한 것이 아니다”며, “베드로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복음을 타협하고 왜곡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바울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고 전했다. 이어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생략한 간편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팔아먹는다고 비난했다. 그들의 관점으로는 바울이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타협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떤 순간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복음을 왜곡하지 않았다”며, “교회 안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무엇을 주장하든 교회 갈등은 반드시 복음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김목사는 “자기 기준으로 주장하면 세력 다툼하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누가 먼저 왔나, 얼마나 오래 다녔나, 누가 더 잘 배웠나, 누가 더 열심히 했나. 직분이 뭔가 예수님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며, “누구도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 누군가를 책망하고 싶거든 자기감정, 자기 생각에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기를 권한다. 책망을 들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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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7
  • “말씀통한 믿음의 회복을 간절히 희망한다” - 인크라이스트 대표 송민아
    ▲ 송민아대표   “한국사회에서 점차 책을 읽는 이들이 줄고 있지만 가장 가치 있는 콘텐츠는 책으로 나온다고 본다”고 말하는 송민아대표(용인 아름다운우리교회·사진). 송민아대표는 세상 문화와 견줄 수 있는 기독교 콘텐츠가 많이 생산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송대표는 “카드 뉴스나 유튜브 등을 통해서 기독교 콘텐츠를 생산하고 배포할 수는 있다”며, “하지만 이를 제작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마감에 쫓겨 정말 우리가 계획했던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고 말했다. 이어 “세상 문화에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은 콘텐츠를 내놓아야 젊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며, “이 일을 위해 함께 고민한 사람들과 논의한 끝에 우리가 바라는 콘텐츠는 책을 통해서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출판사를 차렸다”고 전했다. “2040세대의 신앙심이 점차 사라져 가는 사실을 교회가 놓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송대표는 질문을 남겼다. 송대표는 “2040세대가 다음세대를 키우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의 허리인데 정작 이들이 필요한 점을 교회가 잘 채워주지 못하는 듯하다”며, “이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여 사회에 건강한 영향을 펼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데에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송대표는 “현재는 그림을 곁들인 요한복음 묵상집을 준비하고 있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아름다운 그릇에 담아 많은 이들의 손에서 읽힐 수 있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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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7
  • 잘못된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자(2)
    이원론적 사고에 의해 생깁니다.흑백논리의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이원론적 사고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도덕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은 사물을 관찰한 자체의 진실보다는 모든 것을 왜곡되게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성본능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거나 의심은 사단이 준 씨앗이라거나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일, 거룩한 일이고 세상의 일은 죄악된 것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사고는 모두 이원론적 사고인데 이원론적 사고에서 형성된 선악의 문제는 잘못된 가책인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가정에서 생깁니다.잘못된 죄책감은 많은 개인이나 사회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높으며, 최고의 지위와 권위를 융통성이 없이 무조건 숭배하고 절대시 합니다. 반면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 경멸하게 됩니다. 또한 주일성수 못하는 사람과는 교제도 꺼려하고 술, 담배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못을 박기도 합니다. 목사의 실언이나 실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잘못된 죄책감을 만들어 냅니다. 교회나 가정에서 율법적인 가르침에 중점을 두고,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비판적인 분위기 가운데 있다면 쉽게 죄책감에 빠져 고민하게 됩니다. 이때 죄책감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거나 율법을 범한 죄를 통회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형벌의 두려움, 분리의 두려움,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비난 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특히 어릴 때 부모들의 높은 기준과 죄 없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교회에서의 생활은 성인이 되어 부모의 기준의 신학적 기준을 이어 받아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삶의 초기에 옳고 그름의 기준과 죄책감을 배우게 됩니다. 그릇된 사회적 암시에서 생깁니다.인간은 누구나 그의 성장과정에서 많은 양의 잘못된 암시(Suggestion)를 받고 그것에 예속되어 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녀가 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울지 않는 것을 미덕인 것처럼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자녀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화병으로 떠났다고 암시를 받을 때 부모의 죽음은 지울 수 없는 가책을 가져다줍니다. 교회에서는 특히 부모가 죽었을 때 천당에 갔으니 울지 않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사회적 암시로 작용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암시는 수많은 죄책감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념에서 생깁니다.“나는 우둔하다”, “내가 좀더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선하지 않다”, “만약 …하기만 한다면”, “나는 …해야만 한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등의 비합리적 신념들은 죄책감의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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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7
  • [디지털코드로 풀어내는 현대목회 21] 영상예배의 특징들
      1)영상예배의 특징이런 영상 예배의 특징과 장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현대인은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시공간을 뛰어넘고, 속도감이 있는 스토리 전개에 익숙하여 시각 중심적이기 때문에 영상 예배는 이런 예배자의 기질과 패턴에 부합한 예배이고, 교감의 수위를 높이거나 확장하는데 유용하다. 둘째로, 영상 매체는 이미지의 형태로 시청자들의 뇌와 정서에 각인되는 특징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종교적 가치나 사건들을 오랜 시간, 장기적으로 기억 속에 머무르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실례로 예배에 참여한 자들은 당일 예배의 본문과 주제는 기억을 못해도 영상 이미지는 정확히 기억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셋째로, 영상 매체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시청자의 전인격과 더불어 과거의 경험과 상호작용하여 더 집중하고, 확장되는 상상력의 나래를 펴게 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상 예배자는 예배의 순서 속에 더 몰입하게 될 수 있다. 2)영상예배의 한계와 주의점그러나 영상 예배가 이처럼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 조기연은 다음과 같이 약술하고 있다. 현대 영상 예배가 좀 더 역동적이고, 온전한 대안이 되는 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첫째로, 예배의 신비감에 대한 축소나 결여이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경외감과 그리스도의 중심성, 종말론적 성격 등의 개념이 예배에서 잘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상 예배는 이러한 예배 신학적 개념들을 잘 담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멀티미디어라 할지라도, 이런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들을 영상으로 담아내기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어떻게 영상으로 담을 수 있겠는가? 인위적으로 이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어색함과 부작용만을 가져올 뿐이다. 둘째로, 설교의 신비성에 관한 문제이다. 분명히 영상예배가 어떤 사실과 주장을 전달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은 재고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배의 근원적 질문인 ‘하나님이 예배하는 인간을 만나시고, 예배자는 이 감격에 거룩하게 반응한다’는 전제를 생각할 때,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데 멀티미디어의 중재나 도움으로 온전하여 질 수 있다는 논리로 와전될 수 있기에 대단히 위험한 접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셋째로, 영상예배를 통한 회중의 수동적 참여의 문제이다. 본래 멀티미디어의 역할은 예배에 참여한 예배자들이 더욱 역동적이고, 본질적인 예배를 돕기 위한 역할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현실은 뛰어난 멀티미디어의 ‘친절하고 과도한 기술적 지원’과 틈을 보이지 않는 ‘주도성’과 뛰어난 ‘시인성’과 ‘다양함’의 조력 때문인지 점점 수동적이고, 관망적 태도의 예배함을 부추기는 경향 또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넷째로, 화면의 정당성과 오남용 문제이다. 영상 예배는 그 영상 예배를 기획하고 운용하는 주체자에게 가능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 하거나,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려고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다. 이로써 예배당을 압도하는 큰 스크린은 예배와 신앙적 심상에 상관없는 화면을 빈번히 내보내고, 특정인물에게 주목할 수 있으며, 이를 더욱 강조하려다 보니 기독교의 가장 귀한 상징물인 십자가를 아예 가려 버리거나 또는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일들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한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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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7
  • [실로암] 이전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나는 모태신앙이지만 정말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는 누구인지, 교회는 어떤 곳인지, 공동체는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동유럽을 돌아다니며, 함께 했던 팀원들, 선교사님들, 자연들, 사역들 등 내가 마주했던 순간 순간에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인지 보게 되며,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전에 나는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1학년 때에 겪었던 개인적인 아픔으로 인해 어두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휴학도 하며, 나 스스로를 사회에서 가두고 감추던 삶을 살았다. 내 삶의 모든 주변을 항상 배회하며 지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에도 하나님은 상황과 사람들을 통해 나에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그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외면하며 세상에서 아파하면서 그 가운데 머무르기를 바랬던 어리석은 모습이었다.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길에서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나의 첫 선교의 발걸음이 그랬다. 그 인격적인 만남 이후, 한국에 돌아와 내게 말씀하셨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8-19). 이 두 말씀을 내 삶의 소망으로 품게 하셨다. 이전 일을 생각하지 말라. 너는 내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너는 새 것이라. 너를 통해 새 일을 행할 것이며 영원히 함께 하리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 이후부터 나는 교회 공동체로 들어가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내 삶에 영향을 주었던 죄에서 비롯된 것들, 세상적인 가치관들을 하나님은 하나씩 하나씩 벗겨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삶에서 하나님을 잊으며 살아갈 때도 많고, 내 연약함에 깊이 빠져있을 때도 있으며, 내 이웃들을 인간적인 마음으로 사랑하려는 수고와 노력으로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나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항상 회복으로 결론을 지어주시니 참 감사하다. 이제는 개인적인 신앙의 성장을 위해, 또 이전과 같이 일상의 피난처와 같이 선택한 길이 아니었으면 한다. 오늘의 나의 일상에서도 이 마음으로 살아가기 소망한다. 그리고 나에게 회복과 생명 주신 복음을 맡은 자,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내 삶이 되기 소망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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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7
  • [성경의 노인 5] 교회 - 노인들의 대안 공동체가 돼라
      사랑과 우정, 기쁨과 슬픔 나누는 신앙 공동체 되어야 사회 경제적 상황 변화는 가정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의 많은 가정이 예전과 같지 않게 노인들을 부양하거나 공경하는 의식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노인들은 가정에 머물러도 가족들과 고립되거나 단절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어떤 노인들은 독립하여 밖에 나와 홀로 살기도 한다. 노인의 고립과 단절은 또 다른 사회문제로 비화하고 빠르게 증가하는 고령 인구와 맞물려 문제들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홀로 사는 노인은 사회적 관계 및 가족관계 단절, 사회적 배제, 낮은 일상생활 수행능력, 나쁜 건강상태, 빈곤, 제한된 사회활동, 낮은 생활만족도, 심각한 심리 정서적 문제 등 다양한 어려움을 가진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역할 상실로 인한 고립을 겪게 되므로 가족과 사회,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상황에 처한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노인들의 취약한 사회적 관계는 고립감을 높이게 된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더라도 심리, 정서적 독거 상태로 지내는 이들도 있다. 물론 노인들에게도 한때는 가족, 사회, 그리고 자신에게도 충실했던 젊고 건강한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의 품에서 멀어진 노인이 되면서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낮아짐은 물론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을 노인들은 절벽 앞에서 버티는 삶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립, 지지자의 부재, 소속감 박탈로부터 파생된 외로움, 억울함, 섭섭함과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과 담배에 의존하기도 한다. 가족의 낮은 지지와 고독감은 죽음 불안을 높이게 되며, 죽음 불안은 고독사 염려로 이어지게 된다. 룻기에 나오는 또 다른 주인공 나오미는 노인이 되어 만나기 쉬운 고독을 잘 견디고 극복한 인물이다. 그를 통해 노인들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찾아보려 한다. 첫째로 나오미에게는 자부 룻이 있었다(룻기 1:16). 함께 살든지 따로 살든지 곁에 ‘가족’이 있다는 것은 노인들의 삶과 정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회는 노인들에게 룻과 같은 가족과 같은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나오미에게는 더불어 사는 이웃이 있었다. 나오미가 돌아왔을 때 마을 전체가 맞아주었다(룻기 1:19). 이들은 나오미의 가정에 아기가 태어났을 때 모두 환영해 주었다(룻기 4:14). 이웃 여인들 가운데는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룻기 4:17). 노인들에게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교회는 나오미의 이웃들처럼 우정을 나누며,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나오미에게는 어려울 때 양식을 얻으러 갈 수 있는 농지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룻기 2:2). 마침 그 밭이 남편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이어서(룻기 2:3), 훗날 자부가 재혼하는 기회가 되었다(룻기 4:13). 교회는 외로운 노인들이 언제나 찾아와 위로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넷째로 나오미는 보아스를 통해 새로운 울타리를 찾게 되었다(룻기 2:20). 누군가 함께 할 수 있고, 급할 때 도와줄 수 있다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 해도 든든한 일이다. 노인들은 교회를 통해 ‘동반자적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일상적인 안부를 위해 연락을 주고받거나 어려움을 해결 받을 수 있는 공동체이다. 노인들에게 가족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큰 위로요, 힘이 된다. 외로운 나오미에게 도움을 주는 공동체는 바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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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7
  • [목회자 칼럼] 어명을 받들라!
      절대 군주인 왕이 다스리던, 이전 시대에는 왕의 명령은 곧 법이었다.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때 그것은 곧 왕에 대한 반역이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왕의 사신이 신하에게 이르러 “어명을 받들라! 지금부터 모든 벼슬을 박탈하고 귀향을 보내노라!”고 한다면 그는 아무리 억울해도 항의하거나 대적할 수 없다. 또 어떤 신하에게 이러저러한 죄를 지었기에 “사약을 내리노라”할 때에도 그는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하여 “성은이 만극하옵나이다”를 외치면서 두 손으로 독약을 받아 마시고 죽는다. 선교는 어명이다. 온 인류와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지상 최고, 최대의 명령을 유언으로 내리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어명세계선교회는 지난 12년간 세계 30개국에서 선교집회와 지도자 세미나 등을 갖고 복음을 전해왔다. 지난해 9월에는 세계 23개국, 250여명의 세계교회 지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세계선교대회를 가졌다. ‘Back to the Bible’을 모토로 마지막 때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며, 세상과 구별 된,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교회로 단장하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자는 취지의 선교대회였다. 이후 몽골(2018.10)과 이집트2018.11), 인도(2018.12), 대만(2019.1)에서 집회를 가졌고, 이어 불가리아, 러시아, 일본, 미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멕시코, 우크라이나, 네팔 등에서 집회가 계속된다. 특히 지난 2018년 12월 3일부터 10일까지 집회를 가졌던 인도 나갈랜드는 인도 동북부 미얀마 국경의 인구 200만의 작은 주로서, 마지막 때 인도 선교를 위하여 애급의 고센 땅과 같이 하나님께서 흰두교 등 악한 세력의 공격을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기독교 주였다. 핍박을 피하여 각처에서 모여든 제자들이 여러 신학교에서 말씀과 기도의 집중 훈련을 받고 인도 북부 등 전역으로 파송되는 은혜의 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까지만 해도 타 부족의 목들을 따 집에 걸어놓고 자신들의 용맹을 자랑했던 헤드헌터 족속이 지금은 95%의 복음화를 이루어 인도 선교의 제사장 족속으로 준비되는 기적의 선교 현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순수한 선교지의 영혼들에게 만족한 은혜를 내리시고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케 하시니라”(막16:20)는 주님의 약속을 지키신다. 비록 육체적, 경제적, 영적인 많은 도전과 핍절함이 있더라도, 감사함으로 부르짖어 간구할 때 마다 풍성히 공급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는 말씀대로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선교의 주체로서 그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겸손한 어린 나귀 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주예수이름교회 목사, 어명세계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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