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16(목)

출판/문화/여성
Home >  출판/문화/여성  >  문학

실시간뉴스
  • [현대문학산책]한강,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2)
    박완서의 <그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나목><엄마의 말뚝>은 6.25 한국전쟁에서 작가의 가족사와 동화백화점 초상화부에서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 화백에 대한 증언을 하고자 했다. 이문열의 소설<영웅시대>,<변경>에서 보듯 분단 현대사에 있어서 그의 가족사는 이문열 문학의 원류이고 그 겪어온 삶 자체가 현대문학을 형성한 것이다. 이념의 허상을 좇아 월북한 아버지를 둔 그 불우하고 회한에 찬 이문열 작가의 가족사는 이데올로기의 이면이고 증언 문학인 것이다. 황석영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남과 북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한 그의 큰 외삼촌에 대한 실화를 의사 한영덕을 중심인물로 <한씨연대기>로 썼다. 황석영의 외할아버지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7년간 감옥생활을 했던 전흥걸 목사이고 그의 어머니는 평양의 기독교 목사의 딸로서 진취적이며 문학적 감수성을 황석영에게 이어 준 것이다. 백도기의 <은제의 십자가>, <저 문 밖에서>,<젊은 나목>,<땅의 뿌리>,<조용한 개선>은 그의 부친 백남용의 순교에 대한 증언소설이다. 그의 소설에는 대부분 목사, 신부, 신학생, 그리고 아버지가 목사인 소년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버지가 목사였으며 자신이 목사인 작가가 체험한 삶의 경로를 증언하는 것이다. 이병주, 박완서, 이문열, 황석영, 백도기의 증언 문학을 계승한 한강은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로 매김했다. 제주4.3, 작별하지 않는다   노벨 문학위원회 안나 카린 팜은 한강에 대해 “부드럽고 잔인하며 때로는 초현실적인 강렬한 서정적 산문을 쓴다.”고 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와 인선과 그녀의 엄마 정심의 시선으로 제주 4.3의 비극을 풀어냈다. 경하는 광주 5.18을 소재로 소설을 쓴 작가이고 경하는 한강 자신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인선은 베트남전 한국군 성폭력 사건을 영상으로 만들어 주목받았다. 정심은 인선의 어머니로 제주 4.3에 대한 상실의 기억을 평생 안고 있다. 한강은 제주 4.3의 역사적 사건을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과거의 상처와 마주해서 치유되고 회복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성근 눈, 생명과 죽음의 진혼곡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문장이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강 작가의, 익숙하지 않는 형용사 ‘성근’으로 시작되는 첫 문장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간결하고 담백하게 압축하는 모두어 이다. 성근은 ‘성글다’의 형용사형으로 변화된 표현이다. ‘성글다’는 “물건의 사이가 뜨다”라는 뜻으로 눈이 함박눈처럼 펑펑내리는 것이 아니고 굵직하지만 띄엄띄엄 내린다는 의미이다. 한강의 문장은 시적 은유를 담고 있다. 소설가 한강은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다.   서울의 겨울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내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5-01-14
  • [현대문학산책]한강,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1) - 왜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가
     스웨덴 한림원은 한국의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을 선정한 이유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들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다.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밝혔다.    한국의 노벨문학상 첫 수상자 한강의 소설에는 생명과 사랑,평화와 인권을 서사하고 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는 “역사 속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증인 문학 (witness literature)이라는 장르에 접근해 간다.”고 했다. 작가는 역사적 폭력에 대한 증언과 기억을 되살려내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치유하고자 했다.    응어리 맺힌 한을 건드려 해소하는 “한강의 스타일은 간결하지만 우리의 기대에서는 벗어난다. 죽은 자의 영혼을 몸에서 분리해 자신의 소멸을 목격할 수 있도록 한다. 묻히지 못하는 신원 미상의 시체를 보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모티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한강 작가의 사상적 원천이 바로 그리이스 극에서 이어온다. 그 속에는 철학과 시가 공존한다. 공포와 희열이, 사랑과 미움의 원색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가지는 모든 상극과 비극성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앞에서 사라지지도 감해지지도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다. 시인이고 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인간의 존엄을 한강의 문학은 세계의 독자들에게 근본적인 공감을 갖게 하고 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3일에 봉기한 이들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과 연루돼 있다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민간인들이 ‘토벌’의 대상이 되어 3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광주 5.18’ ‘제주 4.3’ 에는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영역이 있다. 한강은 광주, 제주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그곳에 살아있는 이들로부터 꿈처럼 스며드는 사랑의 기억을 끌어냈다. 한강은 역사적 폭력에 대한 증언으로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사랑만이 치유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채색주의자> 등을 프랑스 한국문화원 최경란 팀장과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한 피에르 비지우는 “한강의 글은 영혼의 심연을 헤집는다. 고통과 감정의 바닥까지 파고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무한한 섬세함’을 발견하게 된다. 한강은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구하면서도 고요함과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강의 문장은 악몽마저 서정적 꿈으로 만들어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것이다. 그는 “한강의 소설들은 내면의 은밀한 경험이 역사와 어깨를 마주하고 고통과 사랑이 눈밭에서,숲에서.그리고 격정의 불길 속에서 흔적의 길을 남기는, 가슴아린 작품들이다.”고 덧붙였다.    한강의 증언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데는 이병주의 실록소설<지리산>에 근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의 소설은 해방직후, 이데올로기를 고발적이고 비판적으로 증언하였다.    이병주가 빌려왔다는 뉴저널리즘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일종의 증언소설로 사회, 역사적 사건을 허구화하는 소설적 방법이다. 뉴저널리즘의 방법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을 증언소설의 관점에서 읽어야함을 확인시켜주는 단서이다. 그의 처녀작<관부연락선>(1972)은 현대사를 소재로 역사적 진실을 탐색하려는 이병주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5-01-04
  • 기독교문화예술원,「한강의 노벨문학상과 한국교회」 포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한강작가의 생명현상 근원을 설명 철학과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평가되고 바른 비평할 것을 제안   기독교문화예술원(원장=안준배목사)과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대회장=소강석목사)는 지난 5일 한국기독교성령센터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과 한국교회」란 주제로 송년문학포럼을 진행하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사랑과 화해의 치유메시지로 전했다고 강조했다.    한강의 작품을 살피며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이유와 한국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관점에 대해 나누었다. 또 한강의 작품이 말하는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결하는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날 포럼은 김창곤 목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김삼환 목사(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가 포럼 주제에 대한 발제와 안준배 박사(대학로순복음교회)가 문학평론을 했다.   ‘법과 이념’의 용서, 표현 못하는 ‘생명의 아름다움’   김 목사는 “한강작가가 특정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특정 문제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설득력 있게 현실을 표현해 내는 능력이다”면서, “제주 4.3사태나 5.18운동과 같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증언 문학의 특징을 넘어서 순수문학으로 평가되는 것과 노벨문학상 수상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좌우의 이념을 떠나 법이 용서할 수 없고 이념이 용서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아름다움을 함께 그 문학에서 누리고 함께 축하하는 그런 장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될 것이다”고 말하며, 한강의 작품의 문학적 성취와 평가에 대해 말했다.   ‘참여문학’이 아닌 ‘순수문학’분명    김 목사는 <채식주의자>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품에서 비춰진 생명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 생명이란 우선 <채식주의자>에서 보듯 피 흘릴 수 있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얽혀져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보듯 한 사람의 개별적인 생명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이 그리고 죽은 생명과 죽어가는 생명과 살아있는 생명들이 다 함께 참여하는 한 덩어리로써의 ‘생명현상’이다”고 말했다. 또 한강 작가의 생명현상의 근원을 기독교가 주의해서 봐야 할 관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폭력을 배태한 역사적 사건들, 즉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어 일어난 사건들은 그 사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면서, “이는 죽이는 폭력을 규탄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애착과 안타까움을 호소한 것이다. 그렇기에 한강의 문학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거나 참여문학이 아날 순수문학인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철학과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평가돼야    또한 신학의 관점에서도 전했다. “삶의 아름다움과 폭력의 모순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철학이다. 그 모순의 문제를 표현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학이며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초월적인 신학이다”면서, “한강은 문학작가이며 모든 문학작품이 그러하듯 그녀의 작품들은 이 모순의 해결을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은 기독교 교리와 신학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며, “한강의 작품은 철학과 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평가되고 비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나 신앙인, 목회자들에게는 “한강의 작품이 말하는 생명현상이 아름다움과 폭력의 모순이 가져다주는 이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결하는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강 작가에게 바라는 것으로 낭만주의에 대해 말하며 “생명현상에 대한 애착에서 생명구원의 신앙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이 될 것이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폭력에 대해 “우리의 신앙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내포해 쉽게 이데올로기로 환원되고, 이를 위해 폭력을 가하는 역사도 있다”면서, “우리는 ‘할례냐 무할례냐’를 따지는 이념적인 것으로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생명과 사랑, 평화와 인권을 서사    안준배 목사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산문」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안 목사는 “한강의 소설은 생명과 사랑, 평화와 인권을 서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광주 5.18’,‘제주 4.3’에는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들어나는 영역이 있다”면서, “한강은 광주, 제주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그곳에 살아있는 이들로부터 꿈처럼 스며드는 사랑의 기억을 끌어냈다. 한강은 역사적 폭력에 대한 증언으로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사랑만이 치유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고 말했다.   피해자들 향한 애도의 윤리를 실현   안 목사는 <소년이 온다>란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여 ‘증언 문학’으로 평가되지만, 역사적 폭력과 트라우마의 치유를 사랑을 통해 이야기함을 말했다.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연속체를 창조해 독특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정신적 공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임을 말했다. 특히,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는 시적 산문을 통해 20세기 한국 역사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며, 피해자들을 향한 애도의 윤리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들이 소설을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간다는 평가는 작품의 깊이를 보여준다”면서, “이는 사랑의 고통스러움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며, 이별하지 못하는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또 안 목사는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단지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그 폭력에 저항하며 마지막에는 ‘나무’가 되버린 영혜를 통해 생명에 대해 질문을 한다”고 말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폭력과 억압의 공동체를 탈주시키고자 했다. 가부장적 폭력으로 무너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자연과 화합하게 하는 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다”며, “한강의 은유가 가득한 산문은 여성의 삶에 대해 뚜렷하게 느껴지는 공감대로 이루었다”고 전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깨닫게 되고     토론시간에서 백충 목사는 “이번 포럼을 통해 한강작가가 노벨문학상 받은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또 역사적인 사건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용순 목사는 “르네지라르의 말에 따르면 어느 국가나 인신제사를 드리는 게 다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에 위기가 생기면 사람을 죽이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며, “거기에 유죄인 희생양이 있고, 무죄인 희생양이 있을텐데 예수님은 무죄인 희생양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주 4.3사태나 광주 5.18운동에도 무죄로 죽은 희생양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우리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그 죽음이 너무나도 억울하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된 것이 있는 줄 믿는다”고 말했다.   유중한 목사는 “순수문학으로 평가한다면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어 기독교적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면서, “김박사가 말한 것과 같이 한강작가가 낭만주의를 만나고 기독교신앙으로 오게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박흥일 장로는 “발표에서 한강작가의 작품 속 나타난 역사적 트라우마, 보이지 않는 규칙 등 예리한 작가의 눈으로 해석해주었다”면서, “작품 속 등장한 두 역사적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12-16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2)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
        이하에선 <에리직톤의 초상>의 그 질적 변화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보기로 하련다. 이러한 논의는 원작 중편과 개보작 장편 상호간의 비교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일이다. 이에 우리는 먼저, 1981년 발표된 원작 중편이 별로 대중의 눈길을 끌지 못한 채 외면당하다시피한 그 주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한마디로 말하면, 원작 중편은 작가의 종교사상, 곧 기독교적 세계관을 피력하는 일종의 토론장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어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또는 현학적인) 소설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그런 자리에 위치한 작품이었다. 그러므로 장편 제2부의 새로운 등장인물인 신태혁, 즉 이 소설의 ‘충격 인자’로서 출현하기 시작한 새 인물 등장 이전의, 일종의 미완성작에 해당하리라고 보이는 원작만으로써는 독자 대중의 관심도, 비평가의 호응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원작 중편은 마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비평가들로부터 받았던 평가 그 이상을 뛰어넘기가 어려웠다고 보겠다. 아니, 일단은 스토리 전개 면에 있어서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는 중편 <사람의 아들>보다는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스토리의 그 미완의 성격 때문에서도 비교적 더 혹독한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작 중편의 ‘장편으로의 변형’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의 진입이란 문제를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제1부의 만연체, 화려체 중심의 문체가 제2부에 들어와서 간결체, 건조체 형식의 직설적 문체로 바뀐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결과, 이런 문체의 변화로 작품내(특히 제1부)의 정태적 분위기가 후반(제2부)에 들어와 역동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지적될 만하다. 물론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제2부의 상황(장면) 변화가 결과적으로 그 문체의 변화를 동시에 초래했다고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체의 변화를 수반한 제2부의 상황 변화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는 바로 신태혁이란 인물의 새로운 등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신태혁의 새 출현으로써 이 소설의 상황은 급전한다. 제1부에 있어서의 수직·수평 관계의 종교적 논의라고 할 일종의 관념적 유희 분위기가 제2부에 이르러 실천적 참여의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되는 것도 신태혁의 출현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신태혁은 이 소설에서 하나의 큰 ‘충격 인자’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가 수행한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가 시위의 주동자로 모모 건물들에 방화를 주도하거나 노동운동가로서 일선 지휘를 맡은 일이었다기보다는, 이 소설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女性] 정혜령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충격 인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그 점일 것이다.  정상훈 교수의 딸로서 철두철미한 완고성을 지닌 보수주의적 신앙인 상을 결코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정혜령에게 ‘새로운 존재’(new beings)로의 변화를 가져다준 일, 이것이 곧 신태혁의 역할 가운데서는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정혜령의 변화가 신태혁의 수평축으로 완전히 수렴된 것은 결코 아닌 채, 그녀는 그녀 나름의 제3의 길로 그 자신의 행보를 내딛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옛 애인 혜령을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하는 화자 ‘나’(김병욱)의 점진적인 변화까지 예고해주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면, 그런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촉진시킨 충격적 요인이 바로 신태혁이란 점에서 그의 역할은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10-18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10-09
  • [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10-07

실시간 문학 기사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사랑과 정의, 그 변증법적 통일의 낙원 ④ - 백도기의
    가룟 유다는 스승 예수와의 일대 접전을 작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까지 스스로 표현한 그런 접전을…. 유다는 이 땅에서의 자유를 그 누구보다도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이 땅이 하늘나라보다는 몇 백만 배 더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제 뜻대로 무슨 결심을 실현시키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런 그 자신의 뜻을 그는 고우(故友) 시므온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여보게, 시므온. 스승은 너무나 순진해. 이 세상의 악이 얼마나 견고하고 교활하고 뿌리 깊은 것인지를 모르고 있네. 나는 스승을 그 악과 직접 대결시켜 보고 싶었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말일세. 그러면 사랑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절감할 수 있게 되겠지.”   가룟 유다는 불가사의한 인물, 곧 신과 같은 인간 예수가 그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왜 유대 민족을 위해 원수들에게 사용하지 않는지 알 수 없어 하였다. 결국 그는 그 수수께끼라도 풀려는 듯 자기 스승을 은 삼십 냥에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의 스승이 어떤 행동적 반응을 보일 것을 기대하고 있는 성싶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그러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대신 그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예수의 유죄 판결이 결정 나자 그는 전에 받았던 은 삼십 냥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줘 버리고 어딘가로 잠적하고 말았다. 예수는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흥정에서 지고 말아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각에 시온의 언덕 골짜기에서도 한 사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예수의 운명 장면을 목도하고 나서 시므온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그 점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우리는 비로소 그가 왜 죽음을 향해서 치달아왔는지, 왜 죽음을 수납했는지, 왜 그처럼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어떤 놀라운 섭리가 우리들의 역사 속에 개입해 들어왔는지,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에 나오는 첩자 안드레아가 뒤에 서서히 예수의 인격에 동화되어 갔던 것처럼, 백도기의 이 작품 속의 첩자 시므온도 종국에 가서는 예수의 인격에 감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므온은 자신이 유다를 책임지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후회를 한 것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억지로라도 그를 이끌고 골고다로 갔었더라면… 그는 스승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준 행동에서 사랑만이 모든 악덕과 불의와 부자유와 고통을 몰아낼 수 있는 영원한 힘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를 철저히 따라다니던 유다는, 이제 오히려 예수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침투되었던 한 밀정(시므온)에 의해 심판받는 자리에까지 떨어지게 된 셈이다. 글쎄, 이것도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그 성경 말씀(막10:31)의 원리에 해당될는지? 어떻든 시므온에게도 새로운 열림의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의 ‘정의’와 예수의 ‘사랑’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로마의 극한적 억압 속에서 민족적 활로를 찾고자 노력해온 므나헴의 시카리당이나 기스칼라 요한의 젤롯당의 처지에서 볼 때, 당대의 유대나라가 정의가 매몰된 사회로 인식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였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01-25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사랑과 정의, 그 변증법적 통일의 낙원 ③ - 백도기의
      자기 나라를 지배하는 강대국 로마에 대한 증오의 감정으로 들끓고 있는 유대 민중들에게 사랑만을 강조하는 예수의 메시지가 그대로 먹혀들 리 만무한 것이었다. 유대 민중의 반응은 가룟 유다와 젤롯당원 시몬 사이에 이뤄진 아래와 같은 대화로써 이미 대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룟 유다는 젤롯인 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보게 시몬. 스승은 우리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이미 꿰뚫어보고 계시네. 오늘 해변에서의 설교는 사실상 우리들에게 둘려준 말씀이었어. 그건 거절이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스승의 목줄기를 물어뜯고 싶었네.”   예수의 그 사랑의 설교가 있은 뒤, 시므온의 말에 의하면, 허다한 무리가 예수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극소수의 추종자는 남아 있었는데, 그중에 유다와 시몬이 끼여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앞에 나온 첩자 시므온과, 여기 새로 나온 젤롯인 시몬은 서로 별개의 인물들이다. 새 인물 시몬은 유다와 함께 바로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시므온은, 물론 정탐 업무의 결과 보고를 위해 안나스 대제사장을 만났다. 교활한 늙은 여우 안나스 대제사장은 예수단이 균열과 내분으로 약화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적 동요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자신이 일개 나사렛의 목수 한 사람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꼴을 결코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일개 나사렛의 목수 따위가 대제사장 자신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들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 사람들이 눈치 채지나 않을까 해서 몹시 두려워하고 있음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의 민족적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 명절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이 최고조로 앙양되는 시기였다. 메시아가 이 기간에 출현하여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고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신앙이 재확인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예수가 지난번 갈릴리 호반의 설교에서 그들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무슨 방도가 없었음인지, 또는 예수 이상의 인물을 발견해 내지 못했음인지 다시금 그에 대하여 기대를 걸기 시작하였다. 유월절을 기하여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의도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리고 성에 이르러 행한 설교 가운데서 예수는 여전히 사랑의 강조만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해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때 가룟 유다의 얼굴은 비탄과 저주,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 심하게 뒤틀리고 일그러져 있었다. 죽마고우인 시므온은 이런 유다 앞에 갑자기 나타나 10년 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격정에 사로잡혀 있던 유다는 갑자기 나타난 옛 친구 시므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는 능력이 있어. 그러나 그 능력을 정작 써야할 곳에는 쓰지 않고 있네. 세상이 썩어 시궁창 냄새가 나는 판인데 어느 하 세월에 문둥병이나 혈루증 따위의 병을 고쳐주고 있단 말인가? 시궁창의 밑바닥을 파헤쳐 없애야 해. (…중략…) 나는 이제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볼 셈이야. 사랑이 불의(不義) 앞에 섰을 때 현실적으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몸소 체험하게 해 준다면… 그는 달라질지도 모르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01-12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기독교 실천운동의 건강한 생명력 ③ - 김영현의
    거듭, 이어서 나온 박 목사의 말은 이러했다. “진짜 훌륭한 운동가라면 농사꾼과 같을 거야. 적당한 온도와 햇빛만 주어지면 하늘을 향해 무성히 솟아나오는 식물들이 곧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이구. 일시적으로 죽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죽는 법이 없다네.”이미 몹시 지쳐 있는 그에게 들려준 박 목사의 말이 그를 새롭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늘 한가로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 같았던 박 목사의 보이지 않는 예지에 그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에서의 자연의 생명력을 본받아 그도 다시 기운을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포도나무 밭을 향해 돌아서서 바지춤을 끄르고 요란스럽게 갈겨대는 박 목사의 황소 오줌과도 같은 오줌발 소리가 그의 건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김선생)도 이제는 다시 원기를 회복해야 할 차례였다.    이 작품은, 조금 각도만 바꾸면, 박 목사의 건강한 생명력을 결과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그리하여 새로이 의식의 변화를 겪게 되는 그(김선생) 중심의 서술 관점을 보여준 삼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결국 기독교 실천운동이 무슨 요란 법석대는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그러므로 평범한 곳에서부터 기독교적 실천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시 그런 건강하고도 평범한 진리를 이 작품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소설 <포도나무집 풍경>을 읽고 나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김영현의 이 소설은 상당한 면에서, 앞서 살펴보았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을 연상시키는 면이 농후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이다. ‘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김 선생이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백헌 원장과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곧 김 선생은 자신의 신념에 철저했던 조백헌 원장과 같이 그 나름의 신념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가 민주 투사로 저항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던 전력이 그 점을 증명한다. 그리고 오마도 간척사업을 추진하다가 황희백 장로등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그 섬(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조 원장과 같이, 김 선생도 수감생활과 그 후 대통령 선거 참패등으로 의지가 꺾여 일종의 도피생활과도 같은 침체기를 거치게 되는 것이 양자(兩者) 상호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병원을 떠났던 조 원장이 이후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오는데, 그때는 과거의 지배자(통치자) 상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단순히 일개인 자격으로 그 섬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정신만으로 복귀했다고 하는 사실이 그(조원장)의 인격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 선생도 선거 패배 이후 열패감, 배신감, 허탈감 등으로 무력해진 모습을 보이다가 강화 지역 주민들과 박 목사의 건전한 생활방식과 삶의 자세 등에 영향을 받아서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게 되었다는 데에서 결국 그의 인격변화를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으로 젊음을 불태웠던 김 선생이었지만,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선택했던 후보가 낙선했다고 해서 열패감과 허탈감에 빠져 의기소침해져 버렸다는 것은 지나친 단견 또는 조급증에 그가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한 실례라고 보겠다.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의 현실적 모형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누가 천국 건설을 위한 투쟁에 주저할 리 있겠는가. 그가 뒤늦게라도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그의 인격변화의 결과였다고 판단된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3-12-22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3-12-07
  • [부활절특집: 부활절 에세이] 부활이 가져온 능력
      진실로 ‘성령 받은 자’가 숨길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셨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평강을 주셨다. 평강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될 때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제자들의 모임 중에 받은 기름부음이었다. 제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에 평강이 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교회도 제자들처럼 모임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본능이다.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영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생활이 영적인 현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지체는 서로 교통하며 연합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별적인 역할을 위해 택함 받지 않고 주님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순기능에 속한다. “모이기를 힘쓰는~”(행2:46),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10:25)는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평강의 축복임을 알수 있다.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주님의 두 번째 축복은 바로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은 것이다. 숨을 내쉬며 주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성령의 생명이시다. 이 생명을 주심으로써 저들을 우리 중에 하나와 같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일이 성취되었다.(요17:11) 성령을 주심으로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물의 역사를 증거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받았음을 알게 하신다.(요일5:13)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의지하여 천국 시민의 삶인 거룩한 생활을 살게 된다.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힘없는 믿음이 될 뿐이다. 옛사람을 의지하는 본능적인 삶을 떠나 성령이 인도하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생명은 믿는 자 누구든지 새사람의 삶이 가능하도록 축복하셨다. 죄 사함의 권세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명령하셨다. 성령을 받은 자가 행하는 일이 기사와 이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자가 숨길 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이다.   만약 우리들의 믿음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 해도 이 죄 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성령의 속성을 약화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죄 사함의 권세는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이다. 주님은 주기도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구하기 전에 죄 사함받는 길을 가게 하셨다.    우리는 매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이 권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한 신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죄사함의 권세로 형제를 용납하는 만큼 용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며 악의 사슬이 끊어지는 죄 사함의 권세를 회복하는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자.   이러한 일에 놀라운 영성과 축복의 주인이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영성은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은 죄 사함의 권세에 있었다. 부활의 아침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이 세 가지의 축복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3-04-06
  • 이해경시집 「사랑의 향기」 화제
      이해경시인(사진)의 시집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사랑의 향기〉를 도서출판 사랑의 장막에서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시인은 2013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노래〉란 첫 시집과 함께 등단했다. 그러나 2018년 『시선』 신인추천으로 재 등단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목사이며, 간호사와 상담사, 선교사란 직책을 지니고 있다.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형상화 행복한 삶의 여정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길로 인도      ‘끝없는 사랑’의 길   이해경시인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그 사랑은 순수한 사랑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오늘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근원’인 아가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늘은/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하늘은/또다시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이제야/그 말의 의미를/조금씩 깨닫는 오늘이다 -「하늘의 사랑」의 전문     이 시에서는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하나님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표현했다. 첫연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보라고 일러 준다”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제2연과 제3연은 첫 연의 가르침에 대한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제4연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의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고 또다시 가르쳐 주고, 제5연에서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첫 연에서 “산 너머 있는 것을”이란 구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한다. 화자가 위치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너머’란 장소를 지칭한 것은 ‘산’이 주는 신비스러움으로 ‘산 너머’를 신비스럽게 격상시켜 준다. 그 ‘산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란 구절은 제1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연유한 가르침이다. 제2연과 3연은 결과이다. “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제2연)거나, “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제3연)고 하나님을 향한 초보적인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   기독교인의 행복한 삶은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보상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 즐겁고 복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몸과 마음이 흐뭇하고 만족하여 부족이나 불만이 없는 삶이다. 성경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나와 있다     다음의 시는 행복주의적인 삶을 볼수 있다. 행동과 행위에 의해 성취되는 삶이며, 윤리적 목적 및 궁극적 목표가 행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대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세상의 눈을 감고/세상의 귀를 닫고/빛의 음성을 듣는다//그의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빛의 눈을 뜨고/빛의 귀를 열고/빛의 옷을 입는다.  - 「그대 곁에서」의 전문     이 시에서의 ‘그대’는 하나님을 가르킨다. 첫 연의 ‘빛’과 제2연의 ‘빛’의 의미가 다르다. 첫 연의 ‘빛’은 하나님을 지칭하고, 제2연의 ‘빛’은 화자의 ‘신앙’을 의미한다. 화자는 신앙적인 삶 속에서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신앙에 두고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행복주의 자의 삶이다. 첫 연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나, 세상의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신앙의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 신앙의 옷을 입는 것이다.    어머니·아버지의 삶 속에 나타난 사랑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시들은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그 자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고, 그것은 사랑에 연유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임을 보여 준다.      「어머니의 하루」란 시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삶을 간결하게 형상화했다. 오직 가족을 위한 삶이었음을 보여 준다. “차가운 하루의 문을 열고”란 구절의 ‘차가운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함축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이다. 또한 “우리의 밭을 일구셨다”란 구절의 ‘우리’란 화자를 비롯한 가족을 의미하고, ‘밭’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로는 비바람이 되고”나, “때로는 햇빛이 되어”서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인 ‘밭’을 일구신 것이다. 이 ‘비바람’과 ‘햇빛’은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표현이다. 화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희생을 떠올리는 오늘이다. “어머니의 의자에 앉아”란 구절은,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의 무게」란 시는 가정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형상화했다. 아버지의 삶을 ‘무게’로 표현했다. 무거울수록 힘든 생활임을 보여 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아버지가 가장(家長)이 되고, 가정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세상의 세찬 비바람에”란 구절로 집약된 삶에 대한 어려운 환경이고, 그 어려움은 “쌓이고 쌓인 아픔의 세월”인 것이다. 그래서 밤마다 가족들 몰래 눈물을 흘린다. 주위 환경으로 인해 “날마다 무게를 더하고”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극대화시켰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9-16
  •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복음의전함서 전도 플랫폼 세미나
    ◇광교선교단체 복음의전함은 들어볼까 세미나를 연다. 사진은 인천지역 세미나.   유명인 간증과 목회자들이 풀어낸 콘텐츠를 짧은 영상에 담아 지역별 각 교회서 「들어볼까」란 세미나로 새로운 전도법 소개   사단법인 복음의전함(이사장=고정민)은 광고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다음달 13일까지 전국의 교회에서 「들어볼까 세미나」를 진행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완화와 함께 이전에 참여했던 교회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7개 지역 교회에서 열린다. 7월 5일 10시에 고양시 일산광림교회를 비롯한 7월 7일 10시에 서울시 여의도침례교회, 7월 8일 10시에 서울시 광림교회, 7월 8일 20시에 춘천시 순복음춘천교회, 7월 11일 10시에 강릉시 강남성결교회, 7월 12일 10시에 부산시 포도원교회, 7월 13일 10시에 용인시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가진다.   세미나는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이 대표연사로 참여한다. 전도 플랫폼 「들어볼까」 구성을 안내하고, 새신자를 교회에 오게 하는 「들어볼까」의 활용방법을 설명한다. 또한 코로나19를 겪으며 온라인 위주로 바뀐 문화의 흐름에 따라 SNS 등 미디어를 활용한 실질적인 전도 방법을 제안한다.   세미나 참석 교회에 제공되는 특별혜택도 있다. 「들어볼까」 내에 지역교회 연결 서비스인 ‘교회찾기’에 교회를 무료로 등록할 수 있다. 또한 명함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명함을 받은 사람이 교회로 찾아올 수 있게 하는 ‘복음명함’의 원본 디자인 파일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미자립교회에 제공되는 혜택도 있다. 세미나에 사전 신청한 미자립교회 중 각 지역 선착순 30교회에 복음 광고 전도지가 무료 제공될 예정이다.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세미나를 통해 미디어 전도가 전국 각지 교회에서 시작되어 5천만 국민 전도운동으로 이어지고, 주님의 복음이 곳곳으로 흘러가 대한민국 교회가 새롭게 믿음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전국 교회의 참여를 독려했다. 「들어볼까」를 통해 제안되는 새로운 전도 방식은 대한민국 복음의 불씨를 다시 한번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동 단체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전도플랫폼 「들어볼까」를 공개했다. 「들어볼까」에는 유명인의 간증과 목회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낸 기독교 교리 콘텐츠가 5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담겨있다. 동 단체는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나,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올바르게 소개하고 전도하기 위해 「들어볼까」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동 단체는 교회에서 「들어볼까」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교회 대상으로 설명회를 계속 개최해 오고 있다. 기존 설명회는 사전신청한 교회를 대상으로 줌 온라인 설명회로 개최됐었다.     이전 설명회에 참여했던 목사들은 “전도에 대한 막막함이 있었는데 너무 좋은 정보와 콘텐츠를 알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며,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콘텐츠를 이용해서 비신자들과의 접촉점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사하고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단법인 복음의 전함은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비영리 광고선교단체다. 광고라는 도구를 통하여 비신도들을 대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노출하고 사람들의 생활권 안에서 녹아든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광고선교사역의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24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5) -김말봉의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 윤창섭은 언니 허윤숙의 애인이었다. 윤창섭의 돌연한 출현이 최순애의 생활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이다. 언니의 애인이 왜 순애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을까. 윤창섭은 말하자면 염상섭의 <삼대> 속의 김병화와 같은 인물이었다. 당시의 유행어로 ‘마르크스 보이’인 셈이다.     그 청년 앞에서 순애는 돌연 <삼대> 속의 홍경애의 위치로 변해버린다. 술집 바커스의 여급 신분이었던 홍경애가 김병화(마르크스 보이)와의 관계를 성숙시켜 가면서 여걸의 위치로 점차 격상되듯이, 최순애 역시 윤창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여성 사회운동가로 서서히 변화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참다운 동지를 얻게 되어 기뻤던 윤창섭은 최순애에게 처음엔 동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더니, 다음에는 자기 애인 허윤숙과의 합의를 거쳐서인지 윤숙의 언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구혼 공세를 해 온 것이다. 언니(윤숙이)가 자기 애인 윤창섭을 최순애에게 넘겨주기로 작심해 버렸다는 뜻이었다.     순애가 반신반의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언니 허윤숙은 주의자(主義者)로서의 윤창섭이 동지애로 긴밀히 결속되어 있는 최순애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두 사람, 또는 세 사람 모두에게 결과적으로 좋을 일이라고 하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망명녀>(1932)에서의 이런 상황 전개는 그보다 1년 앞서 나온 염상섭의 <삼대>(1931)에서의 경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지금껏 보아온 윤창섭·허윤숙·최순애의 삼각관계는 <삼대>에서의 이필순·김병화·조덕기의 삼각관계의 변이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망명녀>에선 남성 윤창섭을 가운데에 놓고 두 여성이 서로 사랑을 양보하는 모습이지만, <삼대>에서는 여성 이필순을 가운데에 놓고 남성들이 사랑을 양보하는 형국이다. <삼대>의 이런 국면이 <망명녀>에 와서 하나의 변이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망명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어떻든 결과는 세 사람 모두가 순조로운 합의에 이르게 되고, 한 쌍의 남녀는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에 이르러 의외의 돌발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최순애가 각기 두 사람 앞으로 쓴 편지들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만 것이다.     순애는 윤창섭의 동지들로부터 날아온 어떤 지령(암호문)을 접한 뒤, 자기 예비 신랑을 대신해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 일방적 파혼 선언을 해버린 뒤 목적지를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망명녀>는 한마디로 ‘사랑의 노래’이다. 이 사랑의 노래는 결코 애가(哀歌)일 수 없고, 찬가(讚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비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의 모처에서 망명녀의 신세로 살아가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최순애는 자신이 바라서 스스로 그런 지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조금도 비극적이지 않다.     윤창섭은 결혼식 당일에 신부가 될 여인이 잠적해 버리는 불행에 잠시 처해지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코 비극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윤창섭이 최순애의 지극한 사랑을 당시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보하였던 사랑을 되찾게 된 허윤숙의 경우도 결코 비극에 이른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약간의 해프닝을 치른 코믹한 감정에 그녀가 빠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또 그들 세 사람 중에 어느 누구가 그런 것 외에 다른 경망한 감정에 휘둘린 일은 있었던가? 아니, 세 사람 모두가 매우 엄숙하리만큼 진지하기만 할 뿐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11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4)-김말봉의
        김경순, 여운영 등에 이어서 전상범의 세 번째 부인이 된 바 있었고, 또한 이석현, 전상범에 이어서 세 번째 남자 이종하와 또다시 결혼을 한 바 있는 김말봉은,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속칭 인생의 쓴맛과 단맛은 다 경험해 본 바 있는, 어찌 보면 최적의 통속(대중) 작가 감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그 결실이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데뷔작 <망명녀>(1932)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명녀>를 무슨 통속소설의 샘플(모범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기에는 그 작품 자체가 결코 허락하지 않는, 그 결과 어느 정도의 품위는 스스로 지니고 있는 소설 작품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이 소설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하겠다. 김말봉의 작품 <망명녀>에는 세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등장하여 ‘사랑’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여기서 세 명의 젊은이들이란 최순애(산호주), 허윤숙, 윤창섭 등, 두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애정의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생 신분인 산호주(최순애)는 요리집 명월관에서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힘겨운 하루하루의 삶을 버텨 나간다.   그런데 오 주사의 몰인정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오 주사에게 폭력적 자세로 맞서게 되고, 그 결과 순사에게 끌려가기까지에 이른다. 얼마 뒤 훈방되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허윤숙의 명함이 놓여 있었고, 저녁때 만나자고 하는 내용의 글발도 거기에 함께 적혀 있었다. 허윤숙은 최순애(산호주)의 여학교 시절 상급생 언니였는데, 그동안 외국 유학을 갔다가 그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던 것이다. 이 허윤숙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산호주(최순애)는 8년 전의 과거사를 회상해 보게 된다.   C여학교 3학년 시절, 최순애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 십 원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그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딸(그녀) 때문에 직장마저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자기(그녀)가 직접 직업전선에 나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신분, 곧 명월관의 기생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허윤숙이 나타나 산호주에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내용인즉슨, 허윤숙이 요리집 명월관 주인의 요구대로 몸값 3백 원을 지불하고 산호주를 기생 신분에서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후 최순애는 언니 허윤숙을 따라 그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녀는 점차로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명월관에서 나온 이래 잠깐 잊고 있었던 모르핀 주입의 악습마저 되살아나게 되었다. 궐련을 자기(언니) 면전에서 빨고 몰래 모르핀 주사도 맞는 최순애를 구원하기 위해 언니 허윤숙은 그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석 달을 겨우 넘기고 최순애는 교회 출석마저 그만둬 버렸고, 하나님 앞에서의 간구(기도)까지도 ‘아이들의 숨바꼭질 장난’ 정도로 여겨 중지하고 말았다. 최순애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자기신세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점차로 자학적인 몽상에 사로잡히고, 더할 수 없는 자신의 비운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갑작스런 어떤 새로운 인물의 출현으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 새로운 인물이란 일본에서 최근 귀국한 윤창섭이란 이름의 청년이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08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2)-김말봉의
    끝뫼 김말봉이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한 해가 1923년이고 졸업한 때는 1927년이었다. 그 가운데(중간) 해인 1925년에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공모에 <시집살이>란 소설 작품으로 응모해 ‘입상’을 한 바 있다. ‘당선’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앞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자신감)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졸업하고 나서 귀국한 뒤, 1929년 중외일보 신춘문예 현상 공모에 <고행>이 당선되었고, 이어서 1932년에는 <망명녀>가 조선중앙일보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끝뫼가 문학에의 열정을 어떤 하나의 목표(문단 데뷔)를 향해 치열하게 불태우던 시기, 곧 1920년대 중반으로부터 30년대 초반까지의 7년여의 시기라고 하면, 문학사적으로 대단한 의의를 지닌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특히 이 기간에 국내의 신경향파 문학 내지는 카프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학운동이 국제적 추세에 발맞춰, 즉 러시아에서의 라프 문학이나 일본에서의 나프 문학 운동처럼, 한반도 내에서도 맹위를 떨치던 실정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다녔던 일본의 도시샤대학이 자리한 도시 교토(京都)가 유독 사상범들이 들끓는 곳이었다는 점 역시 참고가 될 만한데, 그녀가 받았을 정신적 영향 같은 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도시샤대학의 그의 후배 문인들, 곧 정지용이나 윤동주 같은 시인들과 함께, 그(끝뫼)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본다고 한다면 이들 세 문인들이 모두 기독교도였다는 사실과, 또 하나, 그들 모두가 당대의 현실 문제나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결코 눈감지 않은 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정지용은 가톨릭교도, 김말봉과 윤동주는 개신교도, 이렇게 3인은 모두 넓은 의미의 기독교도였는데, 정지용은 해방기의 문맹(文盟)과 그들의 문학에 대하여 포용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현실 문제에 어두워지지 않으려 노력했고, 윤동주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자신의 시를 통하여 드러냄으로써 그 자신의 역사의식을 확고히 세웠으며, 김말봉 역시 일면으로는 윤락녀의 구제와 공창 폐지운동에 앞장섬으로써 여권 신장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세운 동시에, 타면으론 동반작가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상에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말봉과 정지용은 1년 선후배 관계로 도시샤대학 캠퍼스에서 같이 공부한 인연으로 제법 우의가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만은 그들과 연령 차이가 커서 훨씬 뒤에 그 대학에서 수학했으니 함께 만나지는 못했다.) 1926년 여름방학 때 김말봉이 정지용과 함께 ‘조선지광’이란 월간잡지사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이 잡지는 당시 카프 문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였으며, 경성제국대학에 재학 중인 유진오·이효석 등의 작가들이 이른바 동반자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던 월간지였다. 김말봉이 정지용과 함께 이 잡지사엘 더러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시사(示唆)하는바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1931년 초부터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었으니, 끝뫼 역시 그 소설(‘삼대’)의 주요인물 김병화(또는 홍경애)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 사상가들의 활동상에 일말의 동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반 사정이 그 1년 뒤인 1932년 초의 그녀의 조선중앙일보 데뷔작 (‘망명녀’)에는 혼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겠다. 이로써 보건대, <망명녀>에게서 보게 되는 김말봉 소설의 언필칭 동반자적 성격도 어느 면 그 근원을 짐작케 해 주는바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5-1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