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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22)
          윤동주의 서시, 한강의 서시         한강의 '서시'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끄트머리에 ‘서시’가 있다. 어째서 일까?  죽음은 누구나 인생의 끝에서 만난다. 한강은 그의 문학에서 제주 4.3,광주 5.18의 영혼을 우리들 안에 가만가만히 불러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윤동주의 ‘서시’나 한강의 ‘서시’는 누구에게나 다가올 생의 마지막 순간을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죽음과의 대면을 미리 상상한다. 운명의 ‘얼룩진 뺨’에 두 손을 얹음은  윤동주의 ‘서시’ 처럼 한강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가 보겠다는 다짐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생명이고 사랑해야 하기에 그러하다.  윤동주와 한강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생명을 사랑한다. 살아 있었거나 살아있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기에.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르는 의미      2024년 12월 10일, 오후 4시 40분쯤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작가이자 평론가이며 스웨덴 한림원 종신위원인 엘렌 맛손이 한강의 문학 세계를 연설했다.    한강의 글에서는 흰색과 빨간색, 두 색이 만납니다. 흰색은 그녀의 많은 작품에 내리는 눈이자, 서술자와 세계를 구분 짓는 방어막 같은 커튼입니다. 동시에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빨간색은 삶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고통, 피, 칼에 깊게 베인 상처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혹적으로 부드럽지만,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함,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학살이 끝나고 켜켜이 쌓인 시체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짙어지며, 호소하고, 질문합니다. 글이 답을 하지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을요. 우리는 죽은자, 강탈된자, 사라진 자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빚지는가? 흰색과 빨간색은 한강이 그녀의 소설을 통해 되 짚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합니다.  2021년 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雪)은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그 사이 아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떠다니는 것들이 만나는 장소를 만듭니다. 소설은 눈보라 속에서 전개되며, 기억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서술적 자아는 시간의 층을 미끄러지듯이 지나갑니다. 죽은 자들의 그림자와 상호작용하며, 그들의 지식을 배우면서요.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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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21)
    돌이킬수 없는, 5‧18과 12‧3   그로부터 45년이 지나 ‘계엄’은 재연할 수 없는 명사로 굳혀 졌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령 포고문 1호를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8일의 전국 계엄으로 확대 발표한 과정을 생략하고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 외 그외 작품이 노벨문학상작이 되었다. 세계인들이 한국의 12.3 '계엄'불발 되어진 것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발휘한 문학의 힘이라 여겼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이전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영화의 메시지처럼 그 자신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는 시대를 넘어서 읽혀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 '폭력'은 5월 광주에 그친 것이 아니고 계속 발생될 수 있는 것은 카인에서 시작된 폭력 유전자가 시대와 지역을 떠나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기에 그러하다. 윤석열은 위법한 군사력을 행사하여 2024년 12월 14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탄핵소추 되었고, 2025년 4월4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파면되었다. 윤석열은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은 ‘도량발호’ 권력부리며 함부로 날뛰다가 그 자신이 폐기처분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윤동주의 서시, 한강의 서시   한강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가장 한국적인 사건들을 자신만의 시적 문장으로 담아낸 한강만의 독창성에 있다. 한강은 역사적 장소와 사건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활용해 산 자와 죽은 자가 어떻게 얽혀 있는 지, 트라우마가 한 세대를 넘어 어떻게 대대로 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한강의 매우 부드럽지만 정확한 산문이 폭력의 잔인한 힘에 대응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고 노벨위원회는 밝혔다. 시인 한강의 ‘서시’와 윤동주의 ‘서시’는 시대를 넘어선 생명과 사랑에 대한 연대가 있다.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한강의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계속)   /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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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30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20)
    2024년 12월 5일, 한국기독교성령센터 황희자채플에서 기독교문화예술원 주관으로 ‘한강의 노벨문학상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문학포럼을 가졌다. 발표자 김삼환 박사는 한강 작가에게 있어서 철학적 깨달음으로 ‘생명현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생명현상의 아름다움과 대척점을 이루는 것으로 생명을 죽이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한강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국가의 폭력이든 어떤 주의나 이념이나 신앙이 내포한 폭력성이나 <<채식주의자>>에서 보듯 인간이 자신의 건강을 위한 육식으로 인해 다른 생명체에 대해 저지르는 살해든 간에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살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철학과 문학 사이에는 ‘과’로 연결되는 현상학적 연결이 있다. 인식론적으로는 단절이지만 현상학적으로는 연결이다. 그러나 신학은 철학을 거친 문학과는 현상학적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학을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다루는 까닭이다. 초월의 차원에서 신학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김삼환 박사는 제시했다. 이는 한국 기독교내에서 한강의 소설을 좌우로 나누어서 비판하는 현상에 대해 객관적이고 타당성 있는 해석이다. 생명현상을 파괴하는 십자군 전쟁이나 온갖 종류의 폭력성은 모두 타락한 원죄의 심성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까닭에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것들로 부터는 구원의 길이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한강의 작품에는 정자체로 전개되다가 이탤릭체의 기울인 체가 상당부분 차지한다. 한강 작가가 이탤릭체로 쓰게된 것은 쓰다가 보면 감정의 밀도가 차오르게 되어 정자체로는 이를 담을수 없어서 이탤릭체로 기울여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한강 작가는 인물의 독백, 심리적으로 중요하거나 시적인 부분을 이탤릭체로 표현해 감성을 자아냈다.   돌이킬수 없는, 5‧18과 12‧3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1979년 10월 26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전두완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이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자 1980년 5월 17일 24시에 군부를 장악했다. 전국으로 비상 계엄을 확대하였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 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 검열 강화 같은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수천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였고,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부터 5월 18일 직전까지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스파르 노에 감독,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2002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역순으로 보여준다. 처음의 끔찍한 폭력의 현실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의 행복했던 과거로 가면서 이젠 그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에 모두 좌절한다.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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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3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9)
    생생히 번쩍이는 눈으로 영혜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 더 큰소리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 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마침내 그녀는 영혜의 몸을 힘주어 밀었다. 과연 다리부터 바닥으로 털썩 무너졌다. 그녀는 영혜의 목에 팔을 받쳐 들어 올렸다. ……언니. 영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언제 왔어? 마치 좋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혜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보고 있던 보호사가 다가와 그녀들을 로비 한 켠의 면담실로 안내했다. 원무과 옆의 면회실로 내려오기 어려울 만큼 증상이 무거운 환자들은 이곳에서 가족과 면회한다고 했다. 아마 의사와의 면담이 진행되는 곳인 것 같았다. 그녀가 탁자에 음식을 풀어 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홀린 듯이 영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밝은 영혜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그녀는 물었다. 아까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까르륵 영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 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 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 없어. 물이 필요한데. 영혜는 가부장제라는 육식 문화에 채식이라는 소극적 저항으로 탈주하려 했다. 그녀는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고 싶다며 물구나무서서 햇빛과 물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죽어가고 있는 영혜를 실은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이길을 달려가고 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폭력과 억압의 공동체를 탈주시키고자 했다. 가부장적 폭력으로 무너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자연과 화합하게 하는 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한강의 은유가 가득한 이 산문은 여성의 삶에 대해 뚜렷하게 느껴지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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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8)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213쪽)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5.18민주광장의 광경   <소년이 온다>의 1장부터 6장까지 등장하는 6명의 인물은 오월 광주의 희생자이고 피해자이다. ‘은숙’ ‘선주’ ‘나’ ‘동호 어머니’는 각각 자기 위치에서 5.18을 증언한다. 은숙이 도청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영혼이 부서졌다’고 생각한다. 은숙은 검열 경찰에게 ‘뺨 7대’를 맞으며 5.18의 트라우마를 기억해 낸다 임선주는 광주를 치루며 참혹한 성고문을 당하고 그후유증으로 여성성을 상실한다. 선주는 자신에게 광주의 상처와 고문을 증언하라는 유신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들, 노동 운동할 때 믿고 의지하던 성희 언니조차 모른척 한다. 이는 고통의 기억을 거부하고자 한 것이다. 동호 어머니는 두 아들을 다 잃을 수 없어 동호에게 집에 오라고 하고 발걸음을 돌린 것을 평생을 자책한다. 동호의 실제인물,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인 열여섯 살 문재학이 우리에게 온다. 2024년 10월, 노벨문학상의 수상작 <소년이 온다>의 동호가 되어 나라마다, 도시마다 온다. 넋이 온다. 한강은 5월 광주를 기억하고픈 이에게 영혼들이 못다한 말들을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고통스럽지만,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인간 존엄의 서사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다가 두 개의 질문을 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었다.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으리라고 체념을 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5월 군인들이 되돌아 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 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시는 겁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박영준의 마지막 밤에 쓴 ‘양심’에 대한 증언은 한강에게 현현이란 이피퍼니가 되었다. 오월 광주에서 쓰러진 이들은 그들에게 죽음이 다가옴에도 인간의 양심이란 눈부신 한순간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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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05-29
  • [현대문학산책]한강,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17)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2-133쪽)  그들이 도청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내면속 양심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그들의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느꼈다. 도청의 어린 학생들까지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동호가  온다. 넋이 온다  상무대 공터에 군법재판소가 지어졌다. 최종 조서가 넘어간 지 열흘 만에 재판이 열렸다. 하루에 두차례씩 닷새 동안 재판이 열렸다. 한 번에 약 삼십 명씩 들어가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던 영재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의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되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피고인들이 조용히 노래하는 동안 무서운 군인들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린 영재는 지난 십년 동안 여섯차례 손목을 그었다. 매일 밤 수면제를 술에 타서 먹고 잤다. 그 어린 영재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 영원히 살아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김진수와 교대 복학생 나는 비녀 꽂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 고문을 당하고 수사관이 원하는 거짓 자백을 했다. 그들은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다.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숟가락질을 했다. 계엄군은 그들을 굶기고 고문하면서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깨닫게 하려 했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란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김진수는 5.18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0년을 버티다가 자살했다. 그는 유서와 도청 앞마당에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직선으로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이 찍힌 사진을 남겼다.    한강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5월 광주의 열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가는 열 살이었다. 한강은 초등학교만 다섯 곳을 다녔다고 한다. 이사를 자주해서이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학교 교사 봉급으로 손아래 형제들을 맡아 키웠던 아버지가 막내고모까지 대학을 졸업시키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 한강은 가난했지만 한승원의 서가에 있는 갖가지 책들을 읽으며 공상을 했다. 불꺼진 방안에서 홀로 머리를 굴렸다.     한승원이 광주의 누군가를 조문하러 갔다가 그 도시의 터미널에서 구했다는 사진첩을 몰래 펼쳤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했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어린 한강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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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마주보고 웃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녀가 그렇고 사라가 그렇다. 얼마 전 내가 쓴 글이 활자화 되어 나왔다. 카톡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던 글이 생명을 가지고 꽃이 피었다. 물론 그 글이 나오기까진 산파의 아름다운 손길 사랑과 도움이 있었다. 사라는 말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고. 그 글을 읽는 데는 2분 정도 걸릴 거다. 그런데 나는 안다 가슴 뛰며 쓴 글은 친구의 가슴도 뛰게 된다는 것을. 한때는 시를 쓴다고 글을 다듬었다. 그것은 마음을 다듬는 것이었다. 그때는 마음을 보이는 것도 글을 주는 것도 쉽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편지나 책이라서 지금처럼 바로 날아가는 속사포가아니라 종이비행기, 종이배였다. 지식과 지혜 감성의 글들은 인터넷의 문을 열면 가득 차있다. 과거 세계역사 시작이래로 오늘까지 모든 것이 저장되어있고, 오늘 지금도 수많은 글이 생산되어 마치 나이아가라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미궁 속에서 나온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오 듯 수많은 글, 수많은 책들이 수산시장의 생선처럼 산채로 펄펄뛰면서 날마다 나오고 있고, 채소가게의 채소처럼 생산되고 있다. 우리의 글도 ‘농사지은 농부의 노고의 결과인가? 저 푸른 대양에서 건져 올린 생선인가?’ 아니면 ‘그를 만든 신의 산물인가? 우리의 생각은 어디서 오며 우리의 글은 또 어디서 오는 건가?’ 데이브호킨스는 고민했다. ‘인간의 행복은 왜 이렇게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늘 깨어지며 옮겨 다닐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유도하는 감정, 그 감정은 생각과 경험에서 만들어지고, 그 생각으로 감정의 애착관계가 만들어진다. 호킨스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애착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것은 본인의 의존성에 문제가 있지만 독재자와 같이 사람을 노예화 시키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도둑과 악마는 돈을 노리고 물질을 노리는 것 같으나 사람의 마음을 먼저 강탈하고 영혼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는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이고 마음을 약탈하듯 수많은 시스템과 기술, 글들도 이와 같이 본마음을 숨기고 장사하는 것이 많다. 오늘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남의글로 양털 옷을 입고 다가서는 세상, 어쩌면 더 악랄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는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자기생각을 버리고 자기내면을 남의 글이나 말로 포장하며 사는 세상, 그래서 수많은 위선자가 생긴다. 보통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말만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말과 글 대신 푸른 나무 잎을 읽어본다. 나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위대함도 구별해야한다. 참과 진리처럼~.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인가?’ 글은 사람의 인격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제 세대가 달라져서 수많은 글이 일초도 안 되어 복사되어 나온다. 성경을 인용하고 왜곡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만드는 인간들, 개탄해야하는 세대에 나는 산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하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뿌리 깊은 나무’도 생겼다. 그런데 생각을 내려놓고, 감정을 내려놓고, 욕망을 내려놓고 사는 길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레팅 고 서렌더>라는 기전도 결국 글이라는 매체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좋은 방법이다. 글, 글, 글, 글에서도 정직하자. /화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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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중)
    여러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우리의 한 문제작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겠다. 배교와 인간구원의 문제,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나약한 인간이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의 심리적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강한 질문을 던지는 농도 짙은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리고 비록 이 작품이 순교와 배교의 문제, 특히 그중에서도 배교의 문제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다음의 문제, 곧 배교자가 되지 않으려고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는 교도들의 극단적인 수난 사례들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결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선교회 최고위 성직자요 교주 격인 권일신 사교(司敎)와, 작품상 그저 안가(安哥)라고만 알려진 평신도 등의 경우에서 확인되는 사례이다. 권일신은 실학자였던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요, 그 자신이 신분상으로도 양반인 지체 높은 분이었지만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부풀려진 사교(邪敎) 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금부에 자진 출두했다. 국문이 시작되었다. “천주교란 나라의 임금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무지막지한 미신인데, 네 어찌 양반으로서 그 같은 사교를 신봉하느냐.” 또 이어졌다. “너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 바른 대로 대어라.” “천주교에선 제사를 금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해괴한 짓이로군.” 둘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은 후 아래와 같은 주문과 응답이 서로 교환되었다.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선언만 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게야.” “백 번 죽어도 배교는 못합니다.” 이제 상황은 극한의 지경으로 바뀌어졌다. 다음날엔 그가 형틀에 묶이고, 고문을 당할 채비가 되었다. 고문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니 여기서 굴복함이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권일신은 “천주님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단칼에 잘랐다. 이에 지체 없는 명령이 떨어진다. “무릎을 쳐라.” 곧 아랫도리는 온통 붉게 물들고 살점들이 해어졌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정강이를 쳐라.” 명한다. 곧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두부(頭部) 경련 현상도 일어났다. “아직도 개심할 생각이 없느냐?” 권일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금부도사가 또다시 다른 말로 달래본다. 그러나 권일신은 답한다. “천주님의 명이 더 소중하니 죽는 길밖엔 없을까 합니다.” 결국 국왕이 그의 목숨만은 다치지 말라고 해서 그를 예산으로 귀양 보냈다고 한다. 안가(安哥)의 이야기는 더 처절하다. 그는 군월(軍月)에서 아홉 친구들과 함께 붙잡혀 왔다. 한 차례 고문을 받고 나자 일곱 명이 배교를 선언하고 말았다. 옥사(獄事)가 시작된 지 닷새째, 남은 둘 중의 하나로 그가 심문을 받고 있다. 천주를 버리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회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사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겠소이다.” 식이었다. “저놈을 쳐라.”는 명령과 함께 그의 엎어진 벌거숭이 등허리로 무자비한 곤장 세례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사또가 “안 되겠다. 주리를 틀라.”고 더 무서운 형벌을 명했다. 처절한 비명이 긴 여운을 남긴다. 처음 정채가 넘쳐흐르던 그의 용모는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다음에도 “어서 끌어내다 매를 쳐라.”는 분부였다. 지속적으로 고문을 당하던 마지막 날 그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들것에 실려 나온 안가가 장판(杖板) 위에 엎어져 사지가 붙들려 매어있다. 그런데 이번엔 단 한 방의 곤장에 온몸이 뒤틀리고 거품마저 뿜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순교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7
  • 이인영시인 활발한 유튜브 활동
    이인영시인(사진)이 시집 「신의 선물, 어머니」는 출간하고 유투브 방송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한양대 유성호교수 평론에 의하면 이인영은 자신의 시 쓰기를 통해 자아와 타자를 동시에 품어 안는다. 그녀의 따뜻한 성정(性情)이 반영된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세상의 거칠고 막막하고 가파른 속도감을 넘어서는 위안과 치유의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다. 따스한 마음을 통해 번져오는 그녀의 언어 안에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의 가없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아름답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인영 시인은 성찰과 다짐이 반영된 성숙의 언어로 낯선 시를 쓴다. 서정시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모티프를 얻고 언어적으로 완성되어간다.   그런가 하면 이인영의 시는 만만찮은 사회적 상상력을 담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기억이든, 시간이 지나간 후의 흔적을 통해 그녀는 우리가 겪어온 삶과 죽음의 역사, 신생과 소멸의 상황들을 찾아내고 그 안에 자신을 투사(投射)해간다. 그녀에게 ‘역사’란 정지된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현재형일 때가 많다. 그것이 오래된 그녀만의 시적 존재론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설의 언어가 부조(浮彫)해내는 힘은, 공동체 차원이건 개인 차원이건, 일종의 ‘희망의 전언’으로 이어져가게 된다./안계정기자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2
  • 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상)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
      서기원 작가의 장편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1979)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서기원(1930-2005)은 〈암사지도〉(1956)로 등단한 후 1961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당시 사상계사가 주는 동인문학상 후보상을 받으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여 〈혁명〉이나 〈왕조의 제단〉과 같은 장편소설들을 통해 작가 특유의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의식은 또 다른 작품 〈조선백자 마리아 상〉에 이르러서는 ‘정치권력과 종교’에 관한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본고와 관련하여 우리가 특별히 관심 두어야 할 부분은 국가권력과 기독교회와의 상호 대립관계이다. 때의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국가권력이 교회에 집요한 탄압을 가할 때에는 기독교 신자들 중에 부득불 배교자가 생길 수밖에 없고, 한편 자랑스러운 순교자도 구별되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 후에는 이들 배교자와 순교자 그룹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내분이 또한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그 대립의 실상이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고 본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한국의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의 전도 사업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싹이 튼 지 겨우 5년 만에 약 4천 명을 헤아리는 신도수로 증가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입교한 신도들 가운데에는 권일신·권철신 형제와 정약전·정약용 형제들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의 어느 누구도 닥쳐오는 정치 파쟁의 와중에서 수난과 희생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역사적 결과만을 이야기하면 이승훈, 정약종이 참수 당했고 권철신, 이가환 등이 혹형으로 옥사했으며 정약용, 김범우 등은 지방으로 유배당했던 것이다(김범우는 거기서 곧 죽었다). 전라도 진산 땅의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또한 앞서 참형되었었다.  이런 인물들이 살아 있었던 당시를 그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써진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은, 그러나 그들이 거의 생존해 있는 상태로 작품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순교’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작가의 애초의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이 작품이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가 ‘배교’의 문제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초기 천주교 전래시의 박해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기원의 이 소설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비견될 수 있겠다. 같은 기독교 역사소설로서 순교와 배교의 면에(그중에서도 특히 배교의 면에) 더욱 작가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상호 유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감동의 비중에 있어서 서기원의 것이 슈사쿠의 것을 따라잡기엔 다소 부족하지 않나 느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지나친 간결체 문장의 연속이 오히려 중후한 감동을 감쇄시키는 역효과를 내지 않았나 생각되며, 동시에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묘사가 단순히 대화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치 소설이 아닌 희곡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데, 그러나 그 희곡적 구성이 가져다주어야 할 성격묘사나 긴박감 조성을 이 소설은 별로 형성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평면적 인물설정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또한 이 소설이 너무 대화 중심으로만 전개됨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효과적인 지문의 서술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약점도 지니고 있으므로(즉 너무 압축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사건의 실상이 난삽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결점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1
  • 모든 순간 나의 마지막 순간
    모든 순간, 나의 마지막 순간, 난 어제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나는 당뇨환자라 모두가 걱정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가에 빛이 환히 비치고 나는 눈을 뜬다. 나는 그 순간을 느낀다. 밖으로 나와 당을 체크해 내본다. 신문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무슨 주제로 쓸까’ 잠깐 고민하고 글 제목을 써 내려갔다. 신앙 고백 철학 여행 등 나의 과거를 이야기할까 하다 오늘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을 적기로 한다. 글 쓰는 이와 글 보내는 이 생각하는 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여야 하니까. 글의 홍수시대에 산다. 한 사람의 생각과 글은 순식간에 모든 사람에게 퍼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남의 좋은 생각을 공감하여 보내면 나는 사라지고 그분만 남는다. ‘비워라, 너를 비워라’ 지난달 나는 등산 중에 어느 사찰을 갔다. “스님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생각은 무슨 생각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생각해봤자 모두 잡생각 아닙니까?” 옳거니, 나도 가끔 오늘 무얼 할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생각하다 ‘주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하고 묵상을 시작해 본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면 무엇이 남을까? 작은 여인, 소녀, 질투, 시기, 부러움, 겨우 하는 게 청소 독서 그림 그리기 정도 아닐까? 그래서 소아적 나를 버리고 기도해본다. 오늘 언니가 직장을 가지 않고 쉬는 날이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을 끝내고 수지로 아침을 먹으러 갈 것이다. 눈을 뜬 아들이 먼저 괜찮냐, 열이 안 나느냐 묻는다. 딸 지희의 전화가 온다. 괜찮냐고~ 어젯밤에는 구미코가 전화를 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할 때, 그들은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주님 혹 저가 염려하고 걱정해 주어야 하는 영혼이 있나요? 제가 지금 입고 있는 노란 원피스처럼 노란 신호등을 주셔요.‘ ‘말씀이라는 지도, 성령이라는 내비게이션, 기도라는 파워 전력-이런 것이 제 옆에 있네요’ 여행을 하면서, 기차를 타며, 비행기를 타며 늘 읇조린 말 ‘주여 내 영혼을 거두소서, 당신의 품에’ 오늘 나는 또 다른 묵상을 한다. 집에 앉아서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당신의 깃털로 써주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기도하는 순간, 글을 읽는 순간. 또 카톡이 온다. 우리는 수도 없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최후 마지막 말이다. 나의 최후는 어떨까? 지난 2월 21일 나는 내 어머니 박소년여사를 내 품에 안고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대명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가끔 그를 그분이라 부르고 그녀를 그 사람이라 부른다. 내게 하나님은 그분이 아닌 내속의 사시는 분, 나를 이끄시는 혼 속에 계신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 속에, 꽃이 피는 순간, 꽃이 지는 순간, 모두가 시를 사는 순간, 신을 사는 순간이다. ‘주여 나를 돌아보소서, 당신의 딸이옵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떴다, 오늘 아침 여기 있는 나를 본다 세상을 본다 하늘 바다 산 수많은 나무들 수많은 생각 속의 사람들 그들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 속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나./화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18
  • 상처받은 심령들을 보듬는 시골교회 교역자 -박혜원의
     고 박혜원 작가의 문단 데뷔작 <구만리 하늘>(2002)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편소설은 강원도가 그 지역적 배경으로 되어 있다. 강원도 정선의 나전 마을에 세워진 한 시골교회에 새로 부임한 젊은 전도사가 신앙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단순한 내세지향적·보수적 신앙이 아닌, 하나님나라 지향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신앙에 새로이 눈을 떠가는 한 젊은 교역자의, 삶의 성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데에서 2천 년대에 나온 기독교소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아직 목사 안수조차 받지 못한 전도사 신분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건주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금 그 지역 교회에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 정선의 나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는, 아직도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교회 전도사 건주는 그 마을 교회에 부임한 후, 아직 음주의 타성을 버리지도 못한 처지였는데, 당시 그의 음주 사실을 안 그 교회 성가대의 이은희 반주자가 "말도 안 돼. 진짜 전도사 맞아요?"란 질문을 그에게 던졌으며, 또 이런 비판도 그에게 가해 건주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렇잖아도 전도사님의 설교에는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이 빠져 있어요. 항상 조심하셔야 한다구요." 그런가 하면, 그로 하여금 신학 공부를 하게 한 그의 절친한 친구, 한의사 영빈이 그에게 각별한 충고를 한 일까지 있었다. 목사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힘들면 기도해라. 기왕지사 택한 길, 의심 없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안 되겠니?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이 없이는 전도란 불가능한 거야." 이처럼 교역자로서의 자신의 내적인 부실과 허약성도 문제이지만, 시골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시무 조건의 취약성 또한 그의 근무 의욕을 떨어드리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끝없는 교회보수 공사, 교회기둥 역할을 해야 할 황 집사의 간암말기 확진, 첫 아이의 죽음으로 실성한 강릉댁의 정신이상 증세, 이미 헌금했던 패물을 되돌려 달라는 신도가정 내 불신자의 강압적 자세, 거기에다 군청에서 지시한 경로행사를 교회가 대행해 달라는 면사무소 직원의 청탁… 등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런 속에서 그가 목회하는 그 시골 교회의 교세나 재정 상태는 어떠했던가. "겨우 스무 명을 웃도는 신도들 중, 그나마 반은 폐광으로 직업을 잃고는 날품팔이로 가난했고, 반은 아무 능력도 없는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달에 만 원의 헌금도 벅차 보였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목회 여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그 나름의 믿음의 성장을 보이는 건주의 건강한 교역자 상은 다음의 인용문이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것 같다. "(그는) 이곳의 가난한 신도들을 놔두고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 시골 교회는 이제야 처음으로 목회자다운 목회자를 맞이하게 될 모양이다. 자기 출세(?)를 위해 이 시골 교회를 무슨 정거장마냥 가벼이 거쳐 가는 그런 목회자가 아니라, 상처받은 심령들이 신음하고 있는 이곳에다 뿌리를 든든히 박고 일생[종신]의 목회사역에 투신하기를 마음 다짐하는 젊은 목회자 건주의 앞날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일을 위해 그에게는 이은희와 같은 그 고장 출신 '토박이 처녀'가 또한 배우자로서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녀는 이제 이 교회 목회자의 '비판적 조력자'가 되어 이 시골 교회공동체가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열심히 그를 도와나갈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18
  • 신도들의 결연한 ‘마음 비우기’ 실천운동(하)-김병로의 〈산촌의 소리〉
                                                한편 김병로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를 읽고 나서 필자는 G.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혀 이질적인 것 같은 이 두 작품들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게 된 것은 독일 신학자 타이센이 그의 신학적 연구 결과를 소설로 형상화했듯이 우리 목회자 김병로도 그의 목회 체험을 같은 소설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타이센은 그의 소설을 통해 예수 시대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는데, 예수 시대에 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그런 소설을 그가 써 냈던 것이다. 그 원리가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의 목회 경험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써 내기 힘든 작품을 김병로 작가는 그의 나이 회갑을 넘긴 때 써낼 수 있었다.  그의 노련한 목회 경험에 의해 수집된 각종의 소재(또는 에피소드)들이 이 작품 속에는 허다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런 소재들은 생경한 자료들로 나열돼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답게 등장인물의 실천적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사실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오랜 목회체험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리라. 소설 작품 속에서 ‘묘사’가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묘사(‘보여주기’showing) 같은 것은 이 작품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간체 소설의 형식이므로 단순한 서술(‘말하기’telling)이 있을 뿐이다. 서술 일변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경지가 거의 묘사의 수준으로까지 독자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의 근원은 아무래도 작가의 실제적 체험의 반영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사이비 그리스도인은 모두 작가의 준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태삼 목사나 한용범 장로 같은 분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용범 장로를 위시해서 장도환 장로, 김상수 장로와 같이 그들은 후에 대부분이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된다. 특히 한 회장(한 장로)의 변화된 모습은 놀랄 만한 정도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가히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은 한국 교회의 한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의 노년 결혼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장면 설정은 이 작품의 초반에 이미 설정해 놓은 처녀 여전도사들의 독신 생활 중도 포기에 대한 풍자와 수미상응(首尾相應)한 구성법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민 교수(목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작가는 한국교회의 병폐 한 가지를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민 목사(교수) 자신은 이런 교계의 치부에 자기가 한 사건을 더 보태 줄지도 모를 ‘성직자의 노년 결혼’에 대하여 스스로 회개(포기)하고 결연히 제 길을 찾아 떨쳐나서는 것이다. 민 목사의 ‘마음 비우기’ 결단에 우리의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마지막은 주인공 송상희 전도사가 몸담고 있는 기도원의 공석 중인 원장 자리를 그녀 자신이 취하지 않고 선배인 하 전도사에게 양보하기 위해 편지를 띄우는 것으로 끝나지만, 짐작건대 하 전도사 역시 그 청을 흔쾌히 수락할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마음가짐’이 이 작품 속에서는 크게 강조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11
  • 신도들의 결연한 ‘마음 비우기’ 실천운동(상) - 김병로의 〈산촌의 소리〉
    김병로 작가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1988)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병로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좀 생경하다는 반응을 일으킬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 이 작가에 대하여 조금은 소개해야 될 것 같다.   1926년 평안북도 태생인 김 작가는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신교회(예장)에서 상당 기간 실제 목회를 한, 일명 ‘목사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을 작가였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후 수십 편의 단편소설들과 수(數) 권의 장편소설을 써낸 역량 있는 소설가였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지 않은 것으로 그의 신상 기록에 보이는데, 몰沒 연대가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는 시종일관 ‘준열한 비판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 작가는 보수 정통적 신학이론에 굳게 서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으로 신자(목회자)의 생활을 영위하되, 다른 신도(평신도·교역자)들의 교회공동체에서의 삶이 비(非)기독교적(또는 反기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준열한 비판을 가하는 위치에 서있다.   작가는 오로지 절대자 하나님을 믿고 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권능을 힘입어 우리 신도들이 교회공동체의 삶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며, 또 어떻게 거듭난 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구호를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변화를 입어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참사람이 되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인인 체 행세하는 허다한 군상들을 향해 사이비 그리스도인의 자리에서 과감히 뛰쳐나와 참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줄기차게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외침이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타락성에 대한 그의 ‘준열한 비판’과 함께 토로되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의 ‘인간화’를 목표로 한 ‘새로운 존재’(New being)에의 열망과, 중생(重生) 지향적인 작가의 문학적 메시지가 어느 면에서는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자기(기독교) 옹호적이고 나아가서는 체제 옹호적인 것으로 평가받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일그러진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비인간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준열한 비판을 견지하는 예언자적 선포의 정신이 충일한 작품이라 볼 수 있기에, 이 작품이 아무리 자기(기독교) 옹호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선교 목적적이거나 교권(체제) 옹호적인 그런 의도의 작품으로까지 평가 절하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N. 호손의 〈주홍 글씨〉와 같이 기독교문학 작품으로서 순수문학(본격문학) 계열에 드는 작품이 될 수 없으리란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 소설이 코리 텐 붐의 〈피난처〉나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와 같은 간증문학적 특성을 지닌 신앙수기 계열에 드는 작품으로 볼 수도 없으리란 판단이다.   일인칭 시점의 서간체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것이 픽션(소설)이므로 좁은 의미의 간증문학이나 신앙수기로 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본격문학(순수문학)으로 분류하기에도 미흡하다 하겠으므로 결국 〈산촌의 소리〉는 양자 절충 양식의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이란 데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08
  •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예수의 사랑 - 정을병의 〈본회퍼의 죽음〉
      정을병의 단편소설 〈본회퍼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주는 제2회 한국소설문학상(1976)을 수상한 작품인 〈본회퍼의 죽음〉은 아마도 한신대학교에서 수학한바 있는 작가 정을병(1934-2009)이 불세출의 독일 진보적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의 생의 말기 행보를 만천하의 독자들, 특히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광포(廣布)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작품을 써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게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울림이 매우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본회퍼(1906-1945)는 독일 히틀러 총통의 세계 정복 야욕을 미리 간파하고 나치스 제3제국의 잘못된 야망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앞서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과 어울려 그 계획을 실현하려고 동참했다가 실패함으로써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1943.4.5.) 수형생활을 하던 도중,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1945.4.9.) 독일 고백교회 반(反)나치 저항운동의 기수라고 할 젊은 목사였다.   소설 〈본회퍼의 죽음〉은 그 본회퍼 목사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갇혀 지내던 때로부터 그의 죽음(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실제 모습을 다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10월경부터 1945년 4월 9일(본회퍼 처형일)까지 독일의 형무소들에서 일어난 일들을 수형자 본회퍼의 거동과 그에 대한 관변 측의 대응 등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1944년 10월경의 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니 그가 감옥에 수감된 지 1년 반(전체 수감 기간의 4분의 3)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뒤의 사건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이후 그가 1945년 4월9일 처형된 것을 감안하면 그는 구속 수감된 지 만2년 4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로부터 21일, 곧 3주 뒤에 히틀러는 자살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음의 부분이 독자들에게 어필한다. 수감자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 음모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형무관 크노블로흐가 본회퍼의 생명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를 구출하기 위해 탈옥을 권유하고 또한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정작 장본인은 다소의 동요 끝에 탈출 불가 쪽으로 아예 요지부동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본회퍼의 심리적 추이가 독자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것이다.   본회퍼는 수차 크노블로흐 형무관의 우정 어린 탈옥 권고를 받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갈등하는 순간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결국 자기의 탈출로 인해 어느 누구라도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앞으로의 그의 행동 방향을 정했다. 자기가 탈옥할 경우 게슈타포가 자기 부모든 형제든 약혼녀든 잡아다 고문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면 차라리 자기 한 목숨 희생당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형무관 크노블로흐와 수감자 본회퍼 사이의 밀고 당기는 ‘생명 지키기 작전’과 ‘생명 버리기 의지’의 숨 막히는 대결이 이 소설 속에서는 가장 광채 나는 대문으로 보인다. 처형장에서의 그의 최후 진술이다. “나는 기독교의 사랑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국가의 이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며, 마지막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본회퍼는 결국 예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그런 일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5-28
  • 김성한의 단편 〈바비도〉
      김성한의 단편소설 〈바비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1953년 장준하씨가 창간한 〈사상계〉 잡지에 발표되었던 〈바비도〉(1956)는 그 〈사상계〉지가 작가 김성한에게 제1회 동인문학상(1956)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그만큼 문학계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편 역사소설 〈바비도〉는 15세기 초엽의 영국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의 영국 왕은 헨리4세였다. 그는 1399년 사촌형인 상왕 리처드2세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악명 높은 임금이었다. 그는 왕좌에 오른 2년 뒤에 ‘이단분형령’(1401)이란 것을 통과시켰다.    기독교의 이단자들을 골라내어 불에 태워 죽여 버리라는 무서운 법령이었다. 1407년 이후엔 개혁자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 독회를 금지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바비도는 1410년 이런 조치에 의해 ‘이단 분형령’에 따라 화형을 당하게 된, 재봉직공 신분의 독실한 기독 청년이다. 그가 생각해 볼 때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별 못된 일을 저지르고서도 아무 탈 없이 지내면서도 평신도들에게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일은 할 수 없다.   또는 이 사람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번다한 규제들이 그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과 세속권력자들이 합세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규제하는 일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행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 사실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계가 분열하여 교황청이 원래의 로마에도 있고, 또 새로 아비뇽이란 곳에도 세워졌다. 교황청이 두 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그곳을 다스리는 교황이 각기 따로 있었다는 뜻이 된다. 교황이 둘이나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409년 피사종교회의에서 두 교황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새로운 제3의 교황을 선출했다.   그러나 앞서의 두 교황들이 그들의 자리를 절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이젠 교황이 셋으로 불어난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있었던 독실한 기독 청년 바비도가 기성 교회의 권위를 인정할 리 만무하고 또 그들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를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무슨 법이 만들어졌든 말든, 무슨 구실을 대어서 자기들을 규제하려고 하든 말든 자기의 신앙 노선만을 굳게 지키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법 때문에 제 신앙노선을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이것저것 따져 보았으나 자기는 역부족일 뿐이라 생각되었다. 위로 교황부터 아래로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조르는 위압감을 느꼈다. 로마교회 전체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큰 대조가 아닐 수 없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사교가 심문을 시작했다. “밤이면 몰래 영역복음서를 읽었다지?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느냐?” 무슨 물음에도 바비도는 사교의 뜻과는 반하는 말만 해댔다.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사교는 그에게 분형에 처하는 판결을 내리고, 그는 스미스필드 사형장으로 옮겨졌다. 헨리 태자가 나타나 그를 회유해 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바비도는 결국 한 줌의 재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 아니었을까?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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