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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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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7
  • [부활절특집: 부활절 에세이] 부활이 가져온 능력
      진실로 ‘성령 받은 자’가 숨길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셨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평강을 주셨다. 평강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될 때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제자들의 모임 중에 받은 기름부음이었다. 제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에 평강이 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교회도 제자들처럼 모임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본능이다.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영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생활이 영적인 현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지체는 서로 교통하며 연합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별적인 역할을 위해 택함 받지 않고 주님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순기능에 속한다. “모이기를 힘쓰는~”(행2:46),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10:25)는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평강의 축복임을 알수 있다.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주님의 두 번째 축복은 바로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은 것이다. 숨을 내쉬며 주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성령의 생명이시다. 이 생명을 주심으로써 저들을 우리 중에 하나와 같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일이 성취되었다.(요17:11) 성령을 주심으로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물의 역사를 증거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받았음을 알게 하신다.(요일5:13)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의지하여 천국 시민의 삶인 거룩한 생활을 살게 된다.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힘없는 믿음이 될 뿐이다. 옛사람을 의지하는 본능적인 삶을 떠나 성령이 인도하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생명은 믿는 자 누구든지 새사람의 삶이 가능하도록 축복하셨다. 죄 사함의 권세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명령하셨다. 성령을 받은 자가 행하는 일이 기사와 이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자가 숨길 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이다.   만약 우리들의 믿음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 해도 이 죄 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성령의 속성을 약화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죄 사함의 권세는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이다. 주님은 주기도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구하기 전에 죄 사함받는 길을 가게 하셨다.    우리는 매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이 권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한 신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죄사함의 권세로 형제를 용납하는 만큼 용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며 악의 사슬이 끊어지는 죄 사함의 권세를 회복하는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자.   이러한 일에 놀라운 영성과 축복의 주인이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영성은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은 죄 사함의 권세에 있었다. 부활의 아침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이 세 가지의 축복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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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6
  • 이해경시집 「사랑의 향기」 화제
      이해경시인(사진)의 시집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사랑의 향기〉를 도서출판 사랑의 장막에서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시인은 2013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노래〉란 첫 시집과 함께 등단했다. 그러나 2018년 『시선』 신인추천으로 재 등단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목사이며, 간호사와 상담사, 선교사란 직책을 지니고 있다.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형상화 행복한 삶의 여정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길로 인도      ‘끝없는 사랑’의 길   이해경시인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그 사랑은 순수한 사랑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오늘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근원’인 아가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늘은/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하늘은/또다시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이제야/그 말의 의미를/조금씩 깨닫는 오늘이다 -「하늘의 사랑」의 전문     이 시에서는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하나님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표현했다. 첫연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보라고 일러 준다”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제2연과 제3연은 첫 연의 가르침에 대한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제4연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의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고 또다시 가르쳐 주고, 제5연에서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첫 연에서 “산 너머 있는 것을”이란 구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한다. 화자가 위치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너머’란 장소를 지칭한 것은 ‘산’이 주는 신비스러움으로 ‘산 너머’를 신비스럽게 격상시켜 준다. 그 ‘산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란 구절은 제1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연유한 가르침이다. 제2연과 3연은 결과이다. “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제2연)거나, “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제3연)고 하나님을 향한 초보적인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   기독교인의 행복한 삶은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보상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 즐겁고 복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몸과 마음이 흐뭇하고 만족하여 부족이나 불만이 없는 삶이다. 성경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나와 있다     다음의 시는 행복주의적인 삶을 볼수 있다. 행동과 행위에 의해 성취되는 삶이며, 윤리적 목적 및 궁극적 목표가 행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대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세상의 눈을 감고/세상의 귀를 닫고/빛의 음성을 듣는다//그의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빛의 눈을 뜨고/빛의 귀를 열고/빛의 옷을 입는다.  - 「그대 곁에서」의 전문     이 시에서의 ‘그대’는 하나님을 가르킨다. 첫 연의 ‘빛’과 제2연의 ‘빛’의 의미가 다르다. 첫 연의 ‘빛’은 하나님을 지칭하고, 제2연의 ‘빛’은 화자의 ‘신앙’을 의미한다. 화자는 신앙적인 삶 속에서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신앙에 두고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행복주의 자의 삶이다. 첫 연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나, 세상의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신앙의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 신앙의 옷을 입는 것이다.    어머니·아버지의 삶 속에 나타난 사랑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시들은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그 자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고, 그것은 사랑에 연유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임을 보여 준다.      「어머니의 하루」란 시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삶을 간결하게 형상화했다. 오직 가족을 위한 삶이었음을 보여 준다. “차가운 하루의 문을 열고”란 구절의 ‘차가운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함축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이다. 또한 “우리의 밭을 일구셨다”란 구절의 ‘우리’란 화자를 비롯한 가족을 의미하고, ‘밭’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로는 비바람이 되고”나, “때로는 햇빛이 되어”서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인 ‘밭’을 일구신 것이다. 이 ‘비바람’과 ‘햇빛’은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표현이다. 화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희생을 떠올리는 오늘이다. “어머니의 의자에 앉아”란 구절은,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의 무게」란 시는 가정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형상화했다. 아버지의 삶을 ‘무게’로 표현했다. 무거울수록 힘든 생활임을 보여 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아버지가 가장(家長)이 되고, 가정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세상의 세찬 비바람에”란 구절로 집약된 삶에 대한 어려운 환경이고, 그 어려움은 “쌓이고 쌓인 아픔의 세월”인 것이다. 그래서 밤마다 가족들 몰래 눈물을 흘린다. 주위 환경으로 인해 “날마다 무게를 더하고”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극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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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6
  •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복음의전함서 전도 플랫폼 세미나
    ◇광교선교단체 복음의전함은 들어볼까 세미나를 연다. 사진은 인천지역 세미나.   유명인 간증과 목회자들이 풀어낸 콘텐츠를 짧은 영상에 담아 지역별 각 교회서 「들어볼까」란 세미나로 새로운 전도법 소개   사단법인 복음의전함(이사장=고정민)은 광고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다음달 13일까지 전국의 교회에서 「들어볼까 세미나」를 진행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완화와 함께 이전에 참여했던 교회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7개 지역 교회에서 열린다. 7월 5일 10시에 고양시 일산광림교회를 비롯한 7월 7일 10시에 서울시 여의도침례교회, 7월 8일 10시에 서울시 광림교회, 7월 8일 20시에 춘천시 순복음춘천교회, 7월 11일 10시에 강릉시 강남성결교회, 7월 12일 10시에 부산시 포도원교회, 7월 13일 10시에 용인시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가진다.   세미나는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이 대표연사로 참여한다. 전도 플랫폼 「들어볼까」 구성을 안내하고, 새신자를 교회에 오게 하는 「들어볼까」의 활용방법을 설명한다. 또한 코로나19를 겪으며 온라인 위주로 바뀐 문화의 흐름에 따라 SNS 등 미디어를 활용한 실질적인 전도 방법을 제안한다.   세미나 참석 교회에 제공되는 특별혜택도 있다. 「들어볼까」 내에 지역교회 연결 서비스인 ‘교회찾기’에 교회를 무료로 등록할 수 있다. 또한 명함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명함을 받은 사람이 교회로 찾아올 수 있게 하는 ‘복음명함’의 원본 디자인 파일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미자립교회에 제공되는 혜택도 있다. 세미나에 사전 신청한 미자립교회 중 각 지역 선착순 30교회에 복음 광고 전도지가 무료 제공될 예정이다.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세미나를 통해 미디어 전도가 전국 각지 교회에서 시작되어 5천만 국민 전도운동으로 이어지고, 주님의 복음이 곳곳으로 흘러가 대한민국 교회가 새롭게 믿음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전국 교회의 참여를 독려했다. 「들어볼까」를 통해 제안되는 새로운 전도 방식은 대한민국 복음의 불씨를 다시 한번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동 단체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전도플랫폼 「들어볼까」를 공개했다. 「들어볼까」에는 유명인의 간증과 목회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낸 기독교 교리 콘텐츠가 5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담겨있다. 동 단체는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나,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올바르게 소개하고 전도하기 위해 「들어볼까」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동 단체는 교회에서 「들어볼까」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교회 대상으로 설명회를 계속 개최해 오고 있다. 기존 설명회는 사전신청한 교회를 대상으로 줌 온라인 설명회로 개최됐었다.     이전 설명회에 참여했던 목사들은 “전도에 대한 막막함이 있었는데 너무 좋은 정보와 콘텐츠를 알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며,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콘텐츠를 이용해서 비신자들과의 접촉점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사하고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단법인 복음의 전함은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비영리 광고선교단체다. 광고라는 도구를 통하여 비신도들을 대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노출하고 사람들의 생활권 안에서 녹아든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광고선교사역의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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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5) -김말봉의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 윤창섭은 언니 허윤숙의 애인이었다. 윤창섭의 돌연한 출현이 최순애의 생활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이다. 언니의 애인이 왜 순애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을까. 윤창섭은 말하자면 염상섭의 <삼대> 속의 김병화와 같은 인물이었다. 당시의 유행어로 ‘마르크스 보이’인 셈이다.     그 청년 앞에서 순애는 돌연 <삼대> 속의 홍경애의 위치로 변해버린다. 술집 바커스의 여급 신분이었던 홍경애가 김병화(마르크스 보이)와의 관계를 성숙시켜 가면서 여걸의 위치로 점차 격상되듯이, 최순애 역시 윤창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여성 사회운동가로 서서히 변화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참다운 동지를 얻게 되어 기뻤던 윤창섭은 최순애에게 처음엔 동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더니, 다음에는 자기 애인 허윤숙과의 합의를 거쳐서인지 윤숙의 언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구혼 공세를 해 온 것이다. 언니(윤숙이)가 자기 애인 윤창섭을 최순애에게 넘겨주기로 작심해 버렸다는 뜻이었다.     순애가 반신반의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언니 허윤숙은 주의자(主義者)로서의 윤창섭이 동지애로 긴밀히 결속되어 있는 최순애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두 사람, 또는 세 사람 모두에게 결과적으로 좋을 일이라고 하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망명녀>(1932)에서의 이런 상황 전개는 그보다 1년 앞서 나온 염상섭의 <삼대>(1931)에서의 경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지금껏 보아온 윤창섭·허윤숙·최순애의 삼각관계는 <삼대>에서의 이필순·김병화·조덕기의 삼각관계의 변이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망명녀>에선 남성 윤창섭을 가운데에 놓고 두 여성이 서로 사랑을 양보하는 모습이지만, <삼대>에서는 여성 이필순을 가운데에 놓고 남성들이 사랑을 양보하는 형국이다. <삼대>의 이런 국면이 <망명녀>에 와서 하나의 변이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망명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어떻든 결과는 세 사람 모두가 순조로운 합의에 이르게 되고, 한 쌍의 남녀는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에 이르러 의외의 돌발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최순애가 각기 두 사람 앞으로 쓴 편지들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만 것이다.     순애는 윤창섭의 동지들로부터 날아온 어떤 지령(암호문)을 접한 뒤, 자기 예비 신랑을 대신해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 일방적 파혼 선언을 해버린 뒤 목적지를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망명녀>는 한마디로 ‘사랑의 노래’이다. 이 사랑의 노래는 결코 애가(哀歌)일 수 없고, 찬가(讚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비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의 모처에서 망명녀의 신세로 살아가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최순애는 자신이 바라서 스스로 그런 지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조금도 비극적이지 않다.     윤창섭은 결혼식 당일에 신부가 될 여인이 잠적해 버리는 불행에 잠시 처해지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코 비극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윤창섭이 최순애의 지극한 사랑을 당시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보하였던 사랑을 되찾게 된 허윤숙의 경우도 결코 비극에 이른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약간의 해프닝을 치른 코믹한 감정에 그녀가 빠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또 그들 세 사람 중에 어느 누구가 그런 것 외에 다른 경망한 감정에 휘둘린 일은 있었던가? 아니, 세 사람 모두가 매우 엄숙하리만큼 진지하기만 할 뿐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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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6-11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4)-김말봉의
        김경순, 여운영 등에 이어서 전상범의 세 번째 부인이 된 바 있었고, 또한 이석현, 전상범에 이어서 세 번째 남자 이종하와 또다시 결혼을 한 바 있는 김말봉은,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속칭 인생의 쓴맛과 단맛은 다 경험해 본 바 있는, 어찌 보면 최적의 통속(대중) 작가 감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그 결실이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데뷔작 <망명녀>(1932)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명녀>를 무슨 통속소설의 샘플(모범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기에는 그 작품 자체가 결코 허락하지 않는, 그 결과 어느 정도의 품위는 스스로 지니고 있는 소설 작품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이 소설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하겠다. 김말봉의 작품 <망명녀>에는 세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등장하여 ‘사랑’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여기서 세 명의 젊은이들이란 최순애(산호주), 허윤숙, 윤창섭 등, 두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애정의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생 신분인 산호주(최순애)는 요리집 명월관에서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힘겨운 하루하루의 삶을 버텨 나간다.   그런데 오 주사의 몰인정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오 주사에게 폭력적 자세로 맞서게 되고, 그 결과 순사에게 끌려가기까지에 이른다. 얼마 뒤 훈방되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허윤숙의 명함이 놓여 있었고, 저녁때 만나자고 하는 내용의 글발도 거기에 함께 적혀 있었다. 허윤숙은 최순애(산호주)의 여학교 시절 상급생 언니였는데, 그동안 외국 유학을 갔다가 그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던 것이다. 이 허윤숙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산호주(최순애)는 8년 전의 과거사를 회상해 보게 된다.   C여학교 3학년 시절, 최순애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 십 원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그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딸(그녀) 때문에 직장마저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자기(그녀)가 직접 직업전선에 나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신분, 곧 명월관의 기생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허윤숙이 나타나 산호주에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내용인즉슨, 허윤숙이 요리집 명월관 주인의 요구대로 몸값 3백 원을 지불하고 산호주를 기생 신분에서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후 최순애는 언니 허윤숙을 따라 그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녀는 점차로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명월관에서 나온 이래 잠깐 잊고 있었던 모르핀 주입의 악습마저 되살아나게 되었다. 궐련을 자기(언니) 면전에서 빨고 몰래 모르핀 주사도 맞는 최순애를 구원하기 위해 언니 허윤숙은 그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석 달을 겨우 넘기고 최순애는 교회 출석마저 그만둬 버렸고, 하나님 앞에서의 간구(기도)까지도 ‘아이들의 숨바꼭질 장난’ 정도로 여겨 중지하고 말았다. 최순애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자기신세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점차로 자학적인 몽상에 사로잡히고, 더할 수 없는 자신의 비운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갑작스런 어떤 새로운 인물의 출현으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 새로운 인물이란 일본에서 최근 귀국한 윤창섭이란 이름의 청년이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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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5)-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의 주인공 최문선은, 자신이야 이왕 실명(失明)되었지만 이 청년(이치한)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실제적으로 그 청년 대신, 자신이 모든 범행을 저지른 당사자라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진범인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마는 것이다. 이리하여 최문선은 꼼짝없이 인순이란 이름의 여인을 살해한 살인범이 되고 만다. 그가 사형이란 극형을 언도받기까지, 수사를 받던 과정에서 형사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악형(고문)을 받고 있었으며 그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일시 유혹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진범(이치한)을 고해바치지 않았다.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아픔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간 살인 누명에 따른 정신적 고통에다가 고문이라는 육체적 고통까지 극한에 달해 있었던 그의 처지를 헤아리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곧 진리를 말로만 하거나 글로만 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생활(실천)할 수 있는 첫 문이 열리게 된 기회가 그 혐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신에게 찾아오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받아들이자 문선은 진리를 비로소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기쁘게 여기게 되었고, 또한 진리를 생활(실천)할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준 그 청년에 대하여 우정마저 느끼게 되었다. 불행의 근원인 원수가 당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친구로 변했던 것이다. 결심 공판에서 문선은 자신의 추악한 누명을 “나의 십자가로 여겨 기뻐한다.”고 하였다.   강간(미수) 살인이라고 하는 추악한 누명조차도 십자가의 기쁨으로 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문선의 신앙에 깃들어 있는 ‘고난의 신비주의’ 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십자가의 고난의 신비주의로 인하여 문선은 사형이라는 극형을 언도받고서도 그 얼굴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실망하는 빛도 없이 태연할 수 있었으며, 객관적인 부당한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항소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기가 앞으로 당하게 될 처형(處刑)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신 은혜요 선물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느끼면서 감격의 오열마저 터뜨리는 최문선의 경지는 가위 ‘사랑의 신비주의’의 극한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다는 감격과 함께 그러한 사랑의 은혜를, 이웃(이치한)에 대한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갚음으로써 곧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는 최문선의 심적 상태는 ‘사랑의 신비주의’의 한 전형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이용도의 신비주의적 태도를 대비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드리고 싶은 그 의복을 불쌍한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주님께 대접하고 싶은 그 음식을 거지에게 나눠 먹이어 이로써 예수를 사랑하고 싶은 애끓는 정을 표하는 것이올시다.”   최문선의 이치한에 대한 사랑은 곧 그(치한)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주님께 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랑의 신비주의’ 정신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원수를 친구로 여기며, 불행을 행복으로 여기는 일, 그리고 누명 쓴 것을 십자가로 여겨 기뻐한 일, 게다가 앞으로 당할 처형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 내지는 사랑이라고 여겨 ‘감격의 오열’을 터뜨린 일 등, 이러한 사실들은 곧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라는 관점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특이 사항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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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창조문예」서 시상식 · 300호 발행 감사예배, 한국문학 발전과 향상에 기여키로
    25년동안 한 호도 결호없이 300호까지 발행한 저력을 과시 ‘창조문예’통해 한국문학 속에 기독교문학의 육성에 기여 월간 『창조문예』(발행인=임만호시인)는 제18회 『창조문예』문학상 및 제9회 『창조문예』문예상, 그리고 지난 해에 등단한 신인 5명에 대한 등단패 수여식을 지난 18일 밀알학교 강당에서 갖고, 한국문학의 발전과 향상에 기여키로 다짐했다. 『창조문학상』은 김년균원로시인, 『창조문예』문예상은 권은영시인이 수상했다. 또한 『창조문예』 300호 발행과 크리스찬서적 46주년을 맞아 감사예배도 드렸다. 이날 제1부 감사에배는 『창조문예』문인회 부회장인 김광영시인의 사회로 시인인 김상곤목사의 기도, 시인인 소강석목사의 「사과나무 아래서 쓴 연서」란 제목의 설교, 시인인 박종구목사의 축도 등 순서로 진행했다. 제2부 시상식은 『창조문예』주간인 최규창시인의 사회로 진행했다. 임만호 발행인의 인사말에 이어 문학평론가인 이명재교수(중앙대)의 심사평, 시상식, 등단패 및 공로패 수여. 축사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인 이광복작가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직전 이사장인 손해일시인, 복음성가 가수인 김석균목사의 축가, 케익절단 등 순서로 진행했다. 특히 『창조문예』문학상 수상자인 김년균원로시인과 『창조문예』문예상 수상자인 권은영시인에게 상패와 상금을 수여했다. 또한 지난해부터 ‘제2회 추천’제도에 의해 등단한 최귀례시인과 박예손소설가, 신현숙시인, 신길자수필가, 김영애수필가에 대한 등단패수여식과 『창조문예』문인회 직전회장인 김송수시인에게 권은영회장이 공로패도 수여했다.   이날 『창조문예』문학상을 수상한 김년균시인의 시집 『자연이다』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연환경 문제에 대한 걸맞은 소재와 주제로 형상화했다. 심사위원 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전’이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해 주셨고, 우리는 그대로 보전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전보다는 파괴만 일삼아 왔음을 일깨워 주는 잠언적인 시들이다. 이러한 그의 시들은 자연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꽃을 비롯한 풀과 산 등 시적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은유와 상징의 기법으로 깊은 의미를 담아 감동을 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박하고 순수한 서정적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간결한 서정적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의 창출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시어의 배열과 간결함, 구성의 통일된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시의 틀이 견고한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다. 또한 『창조문예』문예상을 수상한 권은영시인의 시집 『길 위에서』는 자연과 고향, 그리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했다. 깊은 서정과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신앙의 시각이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들은 서정과 신앙을 접목해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시들은 선명한 이미지와 부드럽고 따뜻한 시어로 추구해 ‘일깨움’과 ‘깨달음’의 감동을 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이미지로 구성하고 전개하는 기법의 성숙함을 보여 준다. 시적 대상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신앙의 삶을 그대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화된 삶의 모습으로 대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 대부분은 ‘일깨움’과 ‘깨달음’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권은영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적 대상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삶이 지닌 이미지를 객관화된 삶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존재하는 대상을 설명해 전달하기 위한 수식적 형식이 아니라, 역동적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로 변용시킨다.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에 의존하여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며 감성적이다. 이미지는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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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4)-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타난 기독교 정신은 한마디로 말해 고난과 사랑의 정신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사실상 극도의 아픔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고통은 마치 예수께서 커다란 아픔(고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작 장본인인 예수는 그 아픔을 통감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그런 성격의 것일 뿐이다.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제삼자(독자)의 처지에서 보면 무척 고통스러울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등장인물)들은 신비스럽다고 할 정도로 ‘태연스러운’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순애보>의 등장인물은 일종의 ‘이용도의 분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쫓기는 위치에 처해 있는 한준명이나 최태용, 또는 김성실과 같은 사람들(모 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멀리함으로써 지금껏 자신에게 가해져온 오해를 스스로 풀어볼 궁리는 전혀 해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포용함으로써 그 자신이 그들과 똑같다는 평가를 받는 위치에 처해짐으로 인해 완전히 피해만 입는 이용도였지만,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거나 하지 않는 경지에 들어가 있었으니 그가 괴로울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마찬가지이다.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은 거개가 이용도의 이러한 마음을 닮아 있다. 그러나 이용도의 그 ‘고난을 감내하는 마음’이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그 무한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듯이,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의 그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마음’들도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있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용도에게 있어서 ‘고난과 사랑’이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의 그 ‘고난과 사랑’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때의 고난과 사랑은 거의 신비적인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신비주의에 깊이 빠진 이용도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견딜 수 없는 고난, 또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실천에 옮기기 힘든 사랑, 마치 산상수훈에나 나타나는 그런 극한적인 사랑이 박계주의 <순애보>엔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순애보’) 속에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가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등장인물들은 고난 속에서도 극한적인 사랑을 기울이는, 무아와 황홀의 지경에 빠져 있는 열광주의적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그 때문에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이 작품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이라고 표현하여 대과(大過)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강조적으로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이용도에게 있어서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결코 무슨 신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것은 언행일치의 실천 단계로 곧장 이어진 것이란 바로 그 점이었듯이, <순애보>의 등장인물들도 그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최문선은 자기를 눈멀게 하고 강간 살인범으로 몰아넣은 진범(이치한)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에게 원망의 감정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인공이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돼 있으면서도 진범을 고해바치지 않은 행위 속에는 거의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 수반되고 있으며, 그의 그런 행위 속에 극한적 이웃사랑의 정신이 엿보인다 하겠으니, 이런 이상주의적이고 현실초월적인 장면 설정 속에서 우리는 예의 그 신비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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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1-26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3)-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타난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용도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이용도 사상의 골자는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이다. 먼저,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특징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의 목표는 십자가를 진 고난의 주를 몸소 체험하고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아픔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는 데 두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그는 주로 요한복음을 통해 받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시작하자 곧 그에게 죽음의 위협(고난)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내용 설정이라면, 예수의 고난은 숙명적이요 불가피한 것이며, 그런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야 할 이용도나 다른 신도들의 고난도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자연히 성 프란체스코처럼 가난을 거룩하게 보고 청빈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이용도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 실천적인 삶을 스스로 살았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 사상은 그의 그런 삶의 실천이란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는 동시에 ‘사랑의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그에게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는 불가분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할 것이다. 이용도의 그리스도 사랑의 이해 기반에는 시무언(是無言)의 사랑, 곧 침묵의 사랑이 개입되어 있으니, 이는 곧 무차별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아가서적 모티브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그 열도가 역시 아가서의 한 구절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정도만큼 강렬하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에는 예수께서 그 중심에 있다. 이용도는 예수를 요한복음과 아가서에 기준하여 아픔(고난)과 사랑의 본질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용도는 예수의 사랑의 지상 명령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켰지만, 그러나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어느 면에서 사랑의 무제약적인 면을 보이는 약점도 노출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문학자 조동일이 <순애보>를 논하는 가운데 아래와 같은 해석을 내린 것이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함에 역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같다.   “주인공이 강간, 살인의 누명을 쓰게 한 원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주인공이 사형언도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무의미한 희생이 기독교 정신의 발로라고 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물론 주인공의 그런 행위가 ‘무의미한 희생’일는지도 모르며, 어느 면에선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기독교 정신’ 발로의 결과인 것만은 분명한데, 그 정신이 곧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때만 그 ‘사랑의 무제약적인 면’, 또는 주인공의 ‘소박한 무차별의 사랑’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국문학자 조동일은 이 작품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이광수 소설에서보다 더욱 강하게 역설했다.”라고 했는데, 여기 ‘이광수의 기독교적 사랑’보다 더욱 강하게 역설된 내용이란 것이 달리 말하면 곧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적인 사랑이 곧 이광수의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사랑보다 더 강렬할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평론가 홍정선이 “<순애보>의 사랑은 이광수 소설의 사랑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란 요지로 말한 것이 실은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1-16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2)-박계주의
    박계주가 이용도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된 역정(歷程)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박계주가 ‘예수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전후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박계주(朴啓周, 1913-66)는 만주의 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그곳의 영신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해(1931)에 이용도 목사가 간도의 용정에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운(曙雲) 박계주는 중학교 4학년 시절부터 기독교회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증거는 미약하지만, 박계주가 1931년 감리교회와 관련을 맺게 되었던 것은 감리교의 부흥목사 이용도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 특히 그의 그 후의 행적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그는 1932년 중학을 졸업하고서 곧 어느 감리교 계통의 소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33년 미국 유학의 길을 찾기 위해 감리교 신학교를 지망해 스칼라십을 얻어냈지만, 안타깝게도 연령 미달로 대기 상태에 있다가 새로이 뜻한 바가 있어 사설수도원인 신학산(神學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백남주(白南柱) 목사등의 권유를 받아 평양의 중앙선도원으로 가게 되는데, 그해(1933) 6월 그곳에서는 백남주와 이용도 등이 중심이 되어 ‘예수교회’란 새 교파가 창설되었고, 그때 초대 선도감으로 이용도가 선출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이용도는 이 일이 있은 몇 달 뒤, 불행하게도 서거하였다.)   백남주 목사의 권유로 박계주는 그해(1933)에 중앙선도원의 기관지인 월간 <예수>를 창간하고 그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중도에 <예수>지 편집 일을 그만둔 적도 있었지만, 1937년 또다시 <예수>지 편집 일을 맡음으로써 그는 <예수>지 편집에 전후 4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초대 선도감 이용도의 정신이 크게 지배하고 있던 ‘예수교회’의 중앙선도원에서 기관지 <예수>를 발간하는 편집 책임자로서 4년여 재직하던 그 시기에 그는 <순애보(殉愛譜)>란 소설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작업을 완성해 1938년 매일신보에 응모하여 당선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박계주가 1933년 <예수>지 편집 책임을 맡기 그 이전, 그는 한 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赤貧>(1930)이 가작으로 뽑힌바 있으며, 그 다음해 다른 작품 <혁명전선에 나서는 소년형제>를 <민성보> 한글판에 발표하기도 하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고 보겠다. ‘예수교회’ 창설자 이용도는 1933년 10월 서거했으나 그 자신이 뿌린 씨앗, 곧 그의 기독교 정신은 박계주의 <순애보>를 통해 5년 뒤 그 문학적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이런 단정을 내리는 것은, 박계주가 ‘예수교회’의 회원으로 그 기관지 <예수>를 편집하는 책임을 맡았었다고 하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의 소설 <순애보>가 그 교파의 초대 선도감이었던 이용도 목사의 사상을 영향 받게 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에만 기대어 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연성으로 충분하다.   박계주의 <순애보>가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다분히 영향 받았다고 할 때에는 그 작품의 내용과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 사이에 분명한 일치점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외의 몇 가지 점 등이 합해져, 이 작품이 틀림없이 이용도의 영향 하에서 집필된 것이란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하에서 이와 같은 면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보기로 한다. 이는 곧 이용도의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어떻게 <순애보>에 반영되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1-04
  • 월간목회 「마음이 상하다」를 특집, “정신질환, 신체적 건강 손상된 상태”
    월간목회  성경, 절대적 진리로 행동과 심리에 위대한 교과서 「창조문예」는 300호 특집·문인들 신년설계도, 「신앙계」는 정인찬총장의 인생스토리 게재 SNS 시대에 맞는 종교의 새로운 실천을 고민해야  기독교사상 1월호 기독교잡지들이 발행됐다. 〈월간목회〉는 「광야의 시간(1)-마음이 상하다」를 특집으로, 〈기독교사상〉은 「SNS 시대와 기독교」란 특집을 기획했다. 〈신앙계〉는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 정인찬총장의 인생 스토리가 실렸다. 〈창조문예〉는 300호 특집으로 임만호회장의 기념사를 비롯하여 축시, 축사, 문인들의 신년 설계가 실렸다.   〈월간목회〉는 「광야의 시간(1)-마음이 상하다」란 특집에서 한혜성원장은 정신과 질환을 건강의 문제로 이해하는 관점이 한국 기독교 안에 확장되어야 한다. 정신과 질환을 의지와 영성의 문제가 아닌 신경계의 불균형이 물리적으로 일어나 신체적인 건강이 손상된 상태로 접근해야 한다. 정신과 치료의 본질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곁에 그저 함께 있는 것으로서 교회에도 판단과 정죄, 권면 대신에 그들과 함께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김선화박사는 기독교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관계가 성숙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절대적 진리로서 인간행동과 심리에 가장 분명하고 위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제적 치유의 과정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치유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사상〉은 「SNS 시대와 기독교」란 특집에서 이성민교수(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SNS 시대에 맞는 종교의 새로운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SNS 소통의 특징으로 ‘비동기성’을 꼽았다. SNS를 이용하면 실시간 소통이 아니라 원할 때 소통할 수 있으며, 다수의 사람과 동시에 소통이 가능해진다. 또한 SNS는 권위가 아닌 ‘주목’을 가장 큰 가치로 만들고 상향식 소통을 보편화했다.   또한 조성돈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먼저 매체가 변화하면 콘텐츠도 변해야 함을 강조하며, 유튜브 설교와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 모임을 예시로 들어 그 내용과 구성이 변화해야 함을 지적했다. 두 번째로 필자는 SNS가 개인주의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다’고 말하는 SNS의 관계 맺기를 살폈다. 세 번째로 필자는 SNS로 인해 조직 중심, 건물 중심의 교회와 목회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손승호박사(명지대학교 강사)는 그중에서도 유튜브를 통해 에큐메니컬 진영을 비판하는 세력을 소개 및 분석하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NCCK는 지난 10월 NCCK에 대해 비합리적인 비난을 가하는 채널들에 대해 대응할 것을 결정했다.    〈신앙계〉는 특집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정인찬 총장의 은혜로운 인생 스토리가 실렸다. 베스트셀러 ‘풀꽃’의 나태주 시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노숙인자활쉼터 ‘소중한 사람들’을 운영하고 있는 유정옥 사모,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민 이야기 등이 연재 중이다. 또한 소설가 김성일 장로의 간증, ‘연탄길’의 이철환 작가 등의 글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의 원고 중 엄선해 ‘다시 읽는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연재를 새로 시작했다.   〈창조문예〉는 300호 특집으로 임만호회장의 기념사를 비롯하여 축시, 축사, 문인들의 신년설계가 실렸다. 「작가연구」스물여덟 번째로 김지원시인의 「가을음계」외 9편과 연보 「나의 문학 나의 신앙」 작품론 등을 수록했다. 「신작 다섯 편」으로 허형만, 박재화시인의 시가 수록됐고, 또한 이성교시인의 추모 특집으로 연보, 시 「강릉에 오면」 외, 추모사, 조시, 시평이 실렸다. 그리고 「망우리공원 문인열전(6)」으로 정종배시인의 「일제와 독재에 까칠했던 민족시인 김동명」, 「‘자연’과 ‘인간’, 그리고 ‘회복’의 삶(22)」으로 박정미수필가의 「바다의 정원」이 게재됐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29
  • [신년에세이] 새해 하나님과 동행하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앞에 큰 은혜의 바다물결이 넘쳐오고 새해에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운 사실은 무엇인가? 사람은 마땅히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완성의 밑그림이 되어 줄 깨달음이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삶의 응답은 매우 풍성하고 안정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사람을 향한 역사 또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친히 선포하심으로 알 수 있다(창1:28). 사람이 신의 소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삶의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때로는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 수반되지만, 역사의 체험은 인류애를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당위성과 인간의 선한 의지를 불려온다. 정의와 공의는 강해지고 확장되어 꽃피게 될 것이다.   이사야 11장 9절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는 환희에 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쫓아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으로 견인되어 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온 세상에 가득함으로 모든 전쟁과 다툼과 시기와 분쟁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세상은 자기애가 아닌 이타적인 사랑의 지식으로 충만케 될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오직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사야 5장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요구는 우리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사명을 깨닫는 일은 어디에서나 싹이 틀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믿음의 인지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모든 악함과 약점을 고치시려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임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너무나도 보편적인 사실이 되어 버린 복음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감화와 감동으로 느껴져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느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 모든 것을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이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며 은혜로운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힘 있는 믿음의 소망으로 나아가자. 내가 형통할 때 삶이 가볍고 즐거운 전진을 할 수 있다면 감정에 속한 믿음일 뿐이다. 오직 주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그 사랑에 감화되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런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는 참된 자아가 행한 것이 된다. 안전하고 편안한 삶에 대한 불안한 감정보다 참된 의지로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앞에 큰 은혜의 바다 물결이 넘쳐오는 새해의 아침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위한 새로운 과정 앞에 담대히 사랑에 신뢰를 보내자. 희망의 의지와 벅찬 기쁨의 마음 문을 열고 힘차게 출발선을 향해 나아가자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29
  • [신년시 - 새해 새 아침의 선물] 박이도 시인의 내 각성의 눈을 뜨게 하소서
      새해 새 아침이 밝았다 내가 매일 꿈꾸던 내일에의 희망 그 희망의 날이 오늘 또 내 앞에 찾아왔다 오늘은 한 해의 첫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날 생명의 선물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 벅찬 아침 내 각성의 눈도 뜨게 하소서 매일매일 새 생명을 주시고 새 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경배하세  신령한 노래로 경배하세 새봄에 씨앗 뿌리고 노고지리 지저귀는 동산에 올라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자연의 세상 봄의 전령사 제비도 날아오르는구나 하늘을 가르며 곡예를 펼치는 날렵한 몸매 사랑과 소망의 포물선을 그리니 여기가 지상낙원일세 무지개 뜨는 언덕에 보라 새날이 밝았도다 동해의 수평선을 가르며 새날을 밝히시는 우리 주님에게 기쁨의 찬송 부르세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해님을 마주하며 감사의 기도 드리세.                                     *시편 119편 18절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29
  • 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5)-심훈의 「상록수」
      이제 마지막으로, 좀 다른 방향에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심훈의 <상록수>(1935)가 어쩌면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1982)이란 유명한 소설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하는 판단이 들어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이 이야기를 하자고 하니 그 <여자의 일생>에 대하여 독자 측에서 최소한의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주(!) 간략히 그 작품의 이야기 골자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가난한 여주인공 기꾸는 가톨릭 신자인 남주인공 세이기찌를 몹시 사랑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해서 결국 그가 투옥되고 말았다. 기꾸는 옥중의 세이기찌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치금을 마련해야 했고, 마지막 수단으로 환락가에서 몸을 팔아 영치금을 마련해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세월이 흘러 세이기찌가 징역살이를 끝내고 출소했으나, 중병에 걸린 기꾸는 이미 운명을 하고 만 뒤였다.    이런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는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이 그보다 훨씬 앞서 나온 심훈의 <상록수>와 구조적 일치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우리의 관심을 유발한다. 만일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이 심훈의 <상록수>로부터 소설 구조상의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하나의 가정이지만), 우리가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두 작품 상호 간에 어떤 영향을 서로 주고받은 문제는 명확히 실증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영향사적 관점에서 분명한 ‘영향의 주고받음’이 증명될 수 있는 형편은 지금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두 작품 상호 간의 결과적 일치점 내지는 유사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선에서, 단지 시기적으로 앞서 나온 우리 소설(‘상록수’)로부터 뒤에 나오게 된 일본 작품(‘여자의 일생’)이 막연하게나마 어떤 영향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적 관점에서의 개연성만을 시사(示唆)하고자 한다.    <상록수>의 구조가 그러하듯 <여자의 일생>의 구조 역시 남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각기 번갈아서 지그재그식으로 엮어나가는 이른바 격자소설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두 주인공이란 (동혁과 영신에 대응하는) 세이기찌와 기꾸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구조는 흔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이 뒤따를 법도 하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식의 구조가 흔한 게 아니라 오히려 희귀한 편이란 데 우리의 관심이 기울어지는 것이다.    박동혁과 채영신, 이 두 청년들은 그들 각자가 추진하는 농촌계몽 사업, 또는 농촌봉사 활동에 있어서 거의 막상막하의 열정을 보이면서도 그 사업을 중심축으로 하여 두 사람 다 사랑과 이념에 깊이 빠져 있는 편인데, 특히 채영신은 사랑에, 박동혁은 보다 더 이념에 몰두해 있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인물 설정 면의 특징이 일본 작가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채영신·기꾸 등의 소박한 사랑의 소유자(여성)들이 박동혁·세이기찌 등의 강력한 이념의 소유자(남성)들을 만나 그 소박한 사랑이나마 꽃피워 보지 못한 채 희생·봉사의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 두 작품들은 서로 흡사한 구조적 일치점 내지는 유사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런 개연성에 대해서만 소루하게 언급했지만, 이후 작가들의 생애 연구, 또는 전기적인 자료 연구, 나아가서는 한일문학의 교류사 연구 등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이끌어내는 후속적인 논의가, 그 누구에 의해서든 나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19
  • [성탄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우리는 지금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습니다. 백향목 숲 향기가 도열해 있는 길에 샛별은 청보석처럼 손짓합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태어나신 베들레헴 마굿간으로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성결한 분이 처음 누우셨던 말구유,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베푸실 은혜와 기적을 생각하며, 두 다리에 힘을 모으고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걷습니다. 해는 이미 졌지만 어둡지 않고 처음 딛는 땅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손에 손에 아기 예수께 드릴 선물을 들었습니다. 어떤 손에는 찬양을 어떤 손에는 감사를 어떤 손에는 사랑을 어떤 손에는 영광을 어떤 손에는 소망을 어떤 손에는 감격을 어떤 손에는 아, 어떤 손에는 뜨거운 눈물을. 황금의 쟁반에 받쳐 들고서 믿으며 노래하며, 노래하며 믿으며 걸어갑니다. 바람은 은빛 종을 흔들면서 어서 오라, 오라고 부릅니다.   동서와 남북, 사방천지에서 구름 같은 사람들이 베들레헴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가는 사람들, 기뻐하러 가는 사람들. 등성이를 넘어서 산굽이를 돌 때마다 주님의 생명은 샘처럼 솟아나고 주님의 진리는 대양처럼 파도쳐 우리의 발걸음이 환희로 넘칩니다. 가다가 벼랑을 만나면 날아서 갈 것입니다. 가다가 가시덤불에 갇히면 주님의 지팡이로 헤치고 나갈 것입니다.  어떤 짐승도 우리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러 갑니다. 길은 길을 불러 이어지고 마음은 타올라 발부리를 지킵니다. 아무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우렁찬 행군,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세계의 만민이 한마음으로 가는 길,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감사하러 가는 길, 경배하러 가는 길. 우리는 주님의 병사, 아기 예수 만나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이향아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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