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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산책]한강,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17)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2-133쪽)  그들이 도청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내면속 양심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그들의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느꼈다. 도청의 어린 학생들까지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동호가  온다. 넋이 온다  상무대 공터에 군법재판소가 지어졌다. 최종 조서가 넘어간 지 열흘 만에 재판이 열렸다. 하루에 두차례씩 닷새 동안 재판이 열렸다. 한 번에 약 삼십 명씩 들어가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던 영재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의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되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피고인들이 조용히 노래하는 동안 무서운 군인들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린 영재는 지난 십년 동안 여섯차례 손목을 그었다. 매일 밤 수면제를 술에 타서 먹고 잤다. 그 어린 영재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 영원히 살아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김진수와 교대 복학생 나는 비녀 꽂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 고문을 당하고 수사관이 원하는 거짓 자백을 했다. 그들은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다.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숟가락질을 했다. 계엄군은 그들을 굶기고 고문하면서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깨닫게 하려 했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란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김진수는 5.18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0년을 버티다가 자살했다. 그는 유서와 도청 앞마당에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직선으로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이 찍힌 사진을 남겼다.    한강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5월 광주의 열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가는 열 살이었다. 한강은 초등학교만 다섯 곳을 다녔다고 한다. 이사를 자주해서이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학교 교사 봉급으로 손아래 형제들을 맡아 키웠던 아버지가 막내고모까지 대학을 졸업시키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 한강은 가난했지만 한승원의 서가에 있는 갖가지 책들을 읽으며 공상을 했다. 불꺼진 방안에서 홀로 머리를 굴렸다.     한승원이 광주의 누군가를 조문하러 갔다가 그 도시의 터미널에서 구했다는 사진첩을 몰래 펼쳤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했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어린 한강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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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05-20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6)
      김진수가 자신의 총을 챙겨 굳은 얼굴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와는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수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총을 벽에 세워 놓더니, 창 아래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 버렸습니다. 내가 흔들어 깨우자 신음하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잘께요. 이상한 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별안간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 했습니다. 나도 막막한 마음이 되어 김진수가 누운 소파 옆에 웅크려 앉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오기는커녕 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곤두서야 할 시간, 냉정한 정신력에 의지해야 할 그 시간에, 우리들은 눈도 귀도 없는 뭉클뭉클한 잠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110-111쪽) 대학생 김진수는 도청이 진압되고 체포되어 7년형을 받고 이듬해 성탄절까지 특사로 석방되었다. 김진수는 여성적인 외모로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 치겠다며 위협당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 그는 석방된뒤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어 도청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9년형을 받았던 스물세살의 교대 복학생의 증언이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김진수는 도청을 빠져 나가지 않은 중학생 아이에게 마지막 순간에 항복해서 목숨을 건지라고 설득했다. 가장 길었던 5월의 깊고 검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중에 직선으로 쓰러져 죽은 아이들이 보였다.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 이었습니다.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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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5)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 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 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 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맨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46-48쪽) 정대는 이미 죽어 혼만 있는 상태에서 5.18 희생자들의 죽음을 증언한다. <소년이 온다>의 등장인물은 고립된 상황에서도 타인의 삶과 죽음을 관찰하고 증언한다.동호는 정대의 삶을, 정대는 공터에 버려진 시신들을 증언한다.  한강 작가는 5월 광주를 증언하는 900여 명의 증언록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광주 뿐만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다른 사례와 자료를 구해 인간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에 대한 책을 읽었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나미 검정볼펜으로 고문을 당한 23살의 교대 복학생 ‘나’는 평범한 모나미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였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어진 볼펜을 이용한 고문을 당했다. 하얗게 뼈가 드러나고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 들어 갔던 자리를 쓸어본다. 그들은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었고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거였다고 자조했다.  ‘나’는 대학 신입생 진수를 증언한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 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 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건, 유난히 가냘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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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9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 (14)
       오늘밤 시민군이 모두 죽더라도 유족에게 확실히 연락이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동호 혼자서 여섯 시 안에 이것들을 정리해 관마다 붙여 놓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동호야아 ”하고 부르며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동호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 냈다. “군대가 들어 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동호는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다 떼어내고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쳤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동호의 엄마는,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에 가로 막힌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데요 엄마” “문 닫으면 나도 들어 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동호가 목격한 정대의 죽음은, 그로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에 남게 했다. 그렇게 해야된다는 그날의 양심이 죽음을 회피하지 못한 것이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 끝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은숙은 동호를 데리고 가려 했다. 동호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선 동호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동호의 눈꺼풀은 떨렸다. 작가는 동호를 ‘너’라고 2인층으로 서술한다. 동호는 친구 정대와 시위대 선두에 같이 있다가 정대가 총에 맞는 것을 목격한다. 그후 동호는 도청에 남아 시신을 거두고 기록하며 정대의 시신을 찾는다. 정대는 시위대에 있다가 총탄에 맞아 죽은뒤 유령으로 남아 버려진 시신을 목격한다. 검은 숨, 공터에 버려진 시신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 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 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도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 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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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3)
       동호는 키 순서로 배정되는 교실에서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열일곱살 고1 어린 동호를 보고 여기 있는건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동호는 고3이라고 둘러대며 상무대 자리를 지켰다.  동호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은 진수가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사자의 몸을 덮고 있는 흰천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흰천은 죽은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입관을 마친뒤 약식으로 치루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 놓았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그 앞에서 애국가를 부른다. 왜일까?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 군인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총을 쐈다. 그들은 나라가 아니기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쓰러진 사자를 추도하며 유족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빼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24-25쪽)  동호는 일요일에 천변길에서 목격한 성경 찬송가책을 손에든 신혼부부가 군인들에게  곤봉으로 마구 난타당하는 광경이 뇌리에 박혔다. 동호네 사랑채에 세들어 살던 정대와 그의 누나 정미는 방직공장에 다니며 검정고시 보기 위해 공부를 했다. 동호 친구 정대가 광장에서 옆구  리에 총을 맞는 것을 봤다. 동호는 친구 정대와 정미 누나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동호는 상무관 출입구의 탁자 앞에 앉아 있다. 탁자 왼편에 장부를 펼쳐놓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일련번호, 전화번호나 주소를 십육절 갱지에 큼직하게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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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1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2)
    다 쓴 음료수 병에 꽂은 양초들이 그들의 얼굴 곁에서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다. 강당의 안쪽 끝까지 너는 걸어 들어간다. 구석 자리에 뉘어 놓은 일곱사람의 기름한 형상을 본다. 이들은 정수리까지 완전히 흰 무명천으로 덮어 놓고, 젊은 여자나 아이를 찾는 사람들 에게만 잠깐씩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모습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맨 끝 모서리에 있는 사람의 상태가 가장 나쁘다. 처음 네가 보았을 때 그녀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딸이나 여동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천을 걷어 보일 때마다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정강이를 넉넉히 덮었던 물방울무늬 주름치마는 이제 부풀어오른 무릎을 다 덮지 못한다. 너는 출입문으로 돌아온다. 탁자 아래 둔 박스에서 새 양초를 꺼내들고 모서리의 사람에게 돌아간다. 머리맡에서 가물가물 타고 있는 몽당초 불꽃에 새 초의 무명 심지를 기울인다. 불이 옮겨붙자 입김을 불어 몽당초를 꺼버리고, 데지 않게 조심조심 유리병에서 빼낸뒤 새 초를 꽂는다. 아직 뜨거운 몽당초를 한 손에 쥔 채 너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다.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시취를 견디며 초의 불꽃을 들여다본다. 냄새를 태워준다는 반투명한 겉불꽃이 어른어른 타오른다. 주황색 속불꽃은 눈을 홀리듯 따스하게 너울거린다. 그 속에 작은 심장이나 사과 속씨 모양으로 흔들리는, 심지를 둘러싼 파르스름한 불꽃심을 노는 본다.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더 갈아줘야 할 초들이 없는지 찬찬히 살피며 너는 출입구를 향해 걷는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 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10-13쪽) 동호는 키 순서로 배정되는 교실에서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열일곱살 고1 어린 동호를 보고 여기 있는건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동호는 고3이라고 둘러대며 상무대 자리를 지켰다. 동호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은 진수가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사자의 몸을 덮고 있는 흰천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흰천은 죽은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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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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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일, 과학과신학의대화서 북토크
    과학과신학의대화(대표=우종학교수)는 오는 22일 청어람아카데미 청어람홀에서 「우주의 신비, 블랙홀을 찾아서」란 주제로 북토크를 진행하고,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조명하는 지적 여정을 제공한다. 이번 북토크는 우종학교수(서울대)가 강사로 나서 블랙홀의 탄생에서부터 최근 연구 성과에 이르기까지 교육하고 이를 통해 피조물인 인간이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행사 관계자는 “블랙홀과 우주 진화를 연구해 온 우종학교수가 나서 블랙홀의 개념이 처음 제시될 때부터 블랙홀에 관한 최신 연구성과까지 낱낱이 알려주는 강좌를 준비하고 있다”며, “중학생도 쉽게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강의를 모색하고 있으니 남녀노소 많은 이들이 참여해 블랙홀을 통해 우주의 신비에 다가가는 시간을 갖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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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3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4] ‘하나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 - 김태규의 「편지」
    나에게 온 편지는 그이의 말씀 다사로운 미소파아란 하늘에 피어오른 꽃구름처럼 내 눈길을 황홀케 하시더니 그이의 말씀은 언제나 나긋한 입김 오롯이 스며오는 사랑의 속삭임인가 호심(湖心)에 파도가 인다 어느 날엔가 그이의 말씀은 내 영혼의 잠을 깨우는 우룃소리가 되어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시더니 그이의 말씀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예리한 칼 아픔을 이긴 자에게 평화를 주시는 복된 소식이었다 편지는 언제나 새롭다.                                                   - 「편지」의 전문  김태규의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인 편지로 인식해 형상화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겐 기쁜 소식인 복음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오늘의 모두에게 보낸 기쁜 소식의 편지이다. 날마다 읽는 성경은 하나님이 보낸 편지를 읽는 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쁜 소식과 함께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기 때문에 편지로 인식한다.  이 「편지」는 기독교시의 전형을 보여준 역작이다. 재치있는 시적 발상이나 전개, 그리고 무리없이 펼친 이미지는 기독교시의 극치를 보여준 시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고, ‘사랑의 속삭임’과 ‘평화를 주시는 복된 소식’인가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그것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함몰된 신앙인의 고백이다. 날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는 편지이다.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되었다. 5연을 제외한 4연까지는 ‘그이의 말씀’이 전제된 후, 시적 이미지가 전개된다. 각 연의 시적 구성을 지탱한 중심적인 기둥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 시의 핵심적인 구절이다. 이 ‘그이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이의 말씀’은 ‘다사로운 미소’, ‘나긋한 입김’, ‘사랑의 속삭임’, ‘내 영혼의 잠을 깨우는 우룃소리’,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예리한 칼’, ‘평화를 주시는 복된 소식’으로 형상화했다.  제1연과 제2연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의 복음’임을 일깨워 준다. 제1연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화자인 나에게 온 편지이다. 그것은 ‘다사로운 미소’로 파아란 하늘에 피어오른 꽃구름처럼 황홀케 한다고 감탄한다. 황홀할 정도로 매혹적인 말씀, 즉 다사로운 미소를 지닌 편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제2연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긋한 입김’이며, ‘오롯이 스며오는 사랑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호수에 이는 파도처럼 ‘나긋한 입김’과 ‘사랑의 속삭임’으로 화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은 ‘황홀’의 경지에 이르도록 감동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가치성을 표현했다.   제3연과 제4연은 하나님의 말씀이 화자에게 ‘가르침’과 ‘깨우침’, 그리고 ‘치유의 도구’임을 표현했다. 제3연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날엔가, 내 영혼의 잠을 깨우는 우룃소리가 되어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가르침과 깨우침을 준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내 영혼의 잠을 깨우며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함몰된 화자의 신앙고백이다.  제4연은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예리한 칼이며, 이 아픔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복된 소식임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못된 스스로를 회개하고, 치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치유의 도구로 평화의 복된 소식임을 고백했다.   마지막 연은 “편지는 언제나 새롭다”란 한 줄로 화자의 느낌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황홀하게 하며 마음속 깊이 감동을 주고, 무지의 잠을 깨우며 치유의 도구이다. 그래서 언제나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형상화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의 생명성을 집약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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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3] 예수를 맞는 신앙인의 자세 - 석용원의 「종려」
      사철 푸른 너를 심었노라 애타게 그리움이 스미여 쌓여 향방을 잃은 내 가슴 뜰에 노란 네 꽃을 어여삐 피워 연상 기다리노라 님만 기다리노라. 먼 훗날도 아닌 어느 날 구비치는 왕의 대열이 홀연히 뜰을 메워 내 앞뜰에 흐를 적에 잎을 깔고 비단처럼 너를 깔고 가지를 들어 횃불처럼 너를 들어 호산나——— 호산나——— 목쉬게 터지게 외칠 날 내게 있어 아아 종려 사철 푸른 너를 심었노라.          - 「종려(棕櫚)」의 전문 이 시는 오늘의 삶 속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의 의미와 상징을 형상화했다. 종려나무가 주는 성서적 상징성을 이 시의 바탕에 두고, 예수의 재림을 갈망한 신앙적인 고백시이다. 예수를 기다리는 열렬한 갈망의 신앙이 승화되었다.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인 구성은 예수를 기다리기 위해 준비하는 성숙된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재림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성숙한 신앙의 결과이다. 제1연은 내면적인 신앙의 표현이다. 화자인 자기 가슴의 뜰에 푸른 종려나무를 심어 놓고 예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애타게 그리움이 스미어 쌓여”란 구절은 예수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다. 그것은 “노란 네 꽃을 어여삐 피워”와 “연상 기다리노라”란 구절에서 그리움의 절정을 볼 수 있다. 사철 푸른 종려나무를 심어 놓고 노란 꽃까지 피워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리고 ‘연상’이란 언어를 통해 단시적인 마음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의 마음을 표현해 준다. 제2연과 3연은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된 마음이다. 먼 훗날도 아닌 어느 날 재림할 예수가 앞뜰을 지날 때에 종려나무 잎을 비단처럼 깔고 가지를 횃불처럼 들어 환영하겠다는 마음의 의지이다. ‘먼 훗날’도 아닌 ‘어느 날’은 이미 성숙한 신앙으로 예수의 재림을 예측하는 시기이다. 예수의 재림은 모든 정황으로 ‘먼 훗날’이 아니라, ‘어느 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신앙적 예측이다. 또한 ‘내 앞뜰’은 내면적인 성숙한 신앙의 표현이다. 1연의 사철 푸른 종려나무를 심은 ‘내 가슴 뜰’이다. 그리고 3연은 재림한 예수를 맞이하는 자세이다. 종려나무 잎을 ‘비단처럼’ 깔고나, 종려나무 가지를 ‘횃불처럼’ 들고서 맞이한다. ‘비단처럼’이나 ‘횃불처럼’이 주는 이미지가 예수를 귀한 존재로 부각시켜 준다. 제4연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목이 터지게 ‘호산나’를 외치던 승리의 그때를 연상시켜 준다. 화자는 그때처럼 ‘호산나’를 목이 쉬고 터지게 외치며,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서 가슴의 뜰에 사철 푸른 종려나무를 심어놓았다고 고백한다. 이 시는 어느 날에 재림할 예수를 기다리고, 맞이할 성숙한 신앙인의 마음을 노래했다. 그 기다림은 가슴의 뜰에 종려나무를 심어놓은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특히 예수가 재림할 때에 종려나무 잎을 비단처럼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횃불처럼 들고서 맞이하겠다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로 형상화했다. 이러한 그의 첫시집인 〈종려〉의 대부분의 시들은 가장 순박한 믿음의 자세에서 기다림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제2시집인 〈잔〉은 고뇌자로서의 열도하는 자세이다. “이 잔을 나에게서 면케 하소서/나는 방초동산 사슴되어 뛰놀고 싶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마신 잔을 그가 마신다는 동행자로서의 결의를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그 자체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려는 몸부림과 고통 속에서 고민하고 얻는 귀중한 유산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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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9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삶 - 임인수의 「서시」
      괴로움과 슬픔이 다하는 그날 나는 백지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외로이 무심은 불타올라 임의 품에 안기는 버릇 모습은 말씀이 되고 글자가 되고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림이어 임은 항상 나를 부르시도다. - 시집 〈땅에 쓴 글씨〉의 「서시(序詩)」 전문 임인수는 1955년 〈땅에 쓴 글씨〉(새사람사 간행)란 첫 시집을 발간했다. 이 시집에는 37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시」는 이 시집의 첫 장에 편집되어 시집 전체의 시세계를 암시해 준다. 이 「서시」 는 기독교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습과 지향하는 삶의 지표를 추구했다. 이 시의 ‘임’은 삶 속에 나타난 감상적 대상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이다. 즉 하나님을 ‘임’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것은 ‘임’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가까운 관계로 설정했다. 특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나, ‘신’이란 어휘는 시어로서는 관념적인 시어이다. 이 어휘를 ‘임’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감정이 어색함이 없도록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를 개척했다. 이 시는 3연과 마지막 연 뒤에 작은 활자로 4행의 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1, 2, 3연을 감상하기에 앞서 마지막 부분의 4행을 이해해야만, 그 맥락에서 시 전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4행은 “보이지 않는 손길에/이끌림이어/임은 항상 나를/부르시도다”라고 적고 있다. 전형적인 신앙인의 삶에 대한 고백이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이끌리어 살아왔고, 그는 나를 부르고 있다고 고백한다. “임은 항상 나를/부르시도다”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삶이다. 이 「서시」 의 본문 말미에 있는 귀절은, 시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출발점의 역할을 감당한다. 제1연은 만나고자 하는 ‘임’, 즉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의 ‘백지’상태를 표현했다.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괴로움과 슬픔이/다하는 그날”로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날에는 “나는 백지로/돌아가리라”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육체적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괴로움과 슬픔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관문이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백지’상태,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의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을 지니겠다는 다짐이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순수한 모습 그 자체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제2연은 제1연의 순수한 신앙의 삶을 심화시키고 있다. 즉 신앙적인 삶에 대한 표현이다. “이렇게 외로이/무심은 불타올라”는 현실적 삶에서 벗어나, “나는 백지로/돌아가리라”란 다짐의 신앙을 승화시킨 구절이다. 그래서 신앙의 삶을 “임의 품에 안기는 버릇”으로 표현했다. 신앙의 삶은 ‘임’,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그의 품에 안기는 삶이기 때문이다. 제3연의 “모습은 말씀이 되고/글자가 되고”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을 떠올리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중략”(14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습 자체가 ‘말씀’이 되고, ‘글자’가 되는 삶을 표현했다. 그것은 신앙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체가 된 경지, 즉 영적 자각의 상황이다. 이 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했다. 육체의 죽음 이후 ‘백지’상태로 돌아가고, 일상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버릇, 그리고 “모습은 말씀이 되고/글자가 되고”란 신앙의 깊은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 삶은 신앙의 육화, 즉 신앙의 생활화에서 비롯되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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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5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1] 사랑의 실천위한 희생정신 - 황금찬의 「촛불」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 「촛불」 의 전문 황금찬(黃錦燦)의 「촛불」은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형상화했다.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 희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 시이다. 촛불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존재한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몸을 태우는 촛불의 희생으로, 누구나가 밝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촛불의 희생은 순수한 사랑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촛불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촛불의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신의 몸을 드렸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이 시는 촛불, 그 자체를 생명체로 인식하고 기독교정신의 시각에서 형상화했다. 촛불의 생명은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데에 있다. 즉 촛불의 생명, 산다는 것은 생명의 연소이며, 그 연소가 순수하고 온전한 것일수록 아름다운 희생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사상에서 비롯된 형상화의 결과이다. 특히 촛불의 존재, 그 생명의 가치성을 통해 사랑의 실천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제1연은 촛불의 존재, 제2연은 촛불의 임무, 제3연은 촛불의 운명, 제4연은 촛불의 정신을 형상화했다. 제1연은 촛불의 ‘시작’과 ‘종말’을 노래하고 있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은 촛불의 탄생이며 출발이다. 그것은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출발하는 것이다”고 생명성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즉 촛불의 생명은 심지에 불을 붙이면 시작되고, 그 생명은 종말인 죽음을 향해 출발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제2연은 촛불의 임무, 즉 책임과 역할을 노래하고 있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밝음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촛불의 희생에서 연유한다. “어두움을 밀어내는/그 연약한 저항”은, “누구의 정신을 배운/조용한 희생일까”라고 물음을 던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희생정신을 배운 촛불의 희생을 극대화시켰다. 이 시에서 ‘누구’로 지칭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촛불의 희생은 조용한 희생이며, 그 조용한 희생은 댓가 없는 희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3연은 촛불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촛불은 초 한자루의 한정된 생애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시간의 국한”인 것이다. 이러한 촛불의 생애를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고 단정하고 있다. 촛불의 운명, 즉 “존재할 때/이미 마련되어 있는/시간의 국한을/모르고 있어”라고 일깨워 준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제4연은 촛불의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그 정신은 희생이다. 촛불의 운명인 “한정된 시간”을 지니고 있다. 어둠 속에서 밝음을 주기 위해 “불태워 가도/슬퍼하지 않고”라고 희생정신을 형상화했다.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춤추는 촛불-.”은 촛불의 아름다운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촛불의 ‘한정된 시간’인 ‘순간’을 아름다운 꽃으로 향유하는 삶이다. 그 삶은 아름다운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 시는 촛불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고, 순수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촛불은 성서적으로 희생의 제물이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렸던 것처럼, 촛불의 희생으로 우리들에게 밝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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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19-07-25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0]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소망 - 김찬양의 「보이는 길
      눈물날 때 하늘 보면 바람 길 보이고 볼을 비비며 다가와서 하늘소식 전해요 기다리고 참고 있으면 무지개가 길되어 꿈망울을 가득 싣고 다가오지요 기쁠 때에 하늘 보면 분홍 길 보이고 다웃지 못한 함박 웃음 뭉개구름 되어요 몽실 몽실 기쁜 꽃망울 휘파람 소리되어 가슴마다 소망의 빛 비춰주어요 - 「보이는 길」 의 전문 김찬양의 동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특징을 지닌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모습을 지향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 위안과 희망,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어린이다운 마음의 상태에서 관찰하고, 포착한 동심의 세계를 시적 표현 속에 담아내는 것도, 그의 독특한 시적 발상이다. 「보이는 길」은 ‘하늘’이 주는 소망의 길을 형상화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하늘’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에는, 우리 조상들이 하늘을 향해 빌었다.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계속되면 기우제를 지내고, 가을에 풍년이 들면 감사의 풍년제를 지냈다. 그리고 가정마다 문제가 생기면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하늘을 향해 모든 문제를 아뢰고, 위안과 소망의 응답을 간구했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의 행위였다. 하늘에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초월할 수 있는 신이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은 상징적이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다. ‘하늘 보면’은 기도의 행위이다. 하늘을 보면 ‘보이는 길’이 있다. 기독교 신앙인들만이 볼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한마디로 집약하면, ‘구원’의 길이다. 그래서 ‘하늘 보면’이란 행위의 그 자체는,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슬플 때나 기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인의 삶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슬플 때나 기쁠 때에 위안과 소망을 준다. 화자는 눈물 날 때와 기쁠 때에 하늘 향해 기도한다. ‘눈물이 날때’와 ‘기쁠 때’의 기도의 모습에서 응답되는 상황을 전개했다. 눈물이 날 때, 즉 슬플 때에 하늘을 보면 바람의 길이 보인다. 그 바람의 길을 통해 기쁜 소식을 전해 온다. 그 눈물을 참고 견디면 무지개가 길이 되어 꿈을 가득 담아준다. 그것은 희망과 소망이다. 그리고 기쁠 때에 하늘을 보면 분홍의 길이 보이고, 다 웃지 못한 웃음이 뭉게구름이 된다. 그 뭉게구름은 기쁜 꽃망울과 휘파람소리가 되어 소망의 빛이 된다. ‘하늘소식’과 ‘무지개’, ‘꿈망울’과 ‘분홍길’, ‘함박웃음’과 ‘꽃망울’ 등이 위안과 소망을 가득 담아주는 이미지이다. ‘눈물 날 때’와 ‘기쁠 때’는 인간의 삶이다. 누구나가 이러한 일상사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기도생활로 극복한다. 눈물 날때는 간구의 기도를 하고, 기쁠 때도 감사의 기도를 한다. 기도를 통해 위안과 소망,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찬양의 시는 오늘의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되찾아 준다. 그의 시에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의 갖가지 나무와 꽃, 사물들이 등장하고, 그 자연물과 생활의 소재가 되어 동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러한 그의 시들은 정형시로의 묘미를 통해 적절한 음악의 노랫말이 되기도 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자연 친화성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인도해 준다. 또한 눈에 보이듯, 손으로 만져지듯, 지금 여기 앞에 서 있듯이, 생생하게 표현해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7-18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9]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 소강석의 「눈물·1」
      아직도 멈추지 않는 두 볼에 흐르는 눈물 당신과의 추억, 사랑, 기다림 홀로 기다리던 지상의 시간이 홀로 정원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쓸쓸하고 고독하였을지라도 당신을 가슴에 새긴 사랑이었다면 당신을 가슴에 품은 기다림이었다면 아픔과 고통을 넘어 슬픔의 파도를 지나 어렴풋이 보이는 희망의 수평선입니다 눈물은 이슬이 되고 꽃잎이 향기가 되어 당신께 날아갈 수만 있다면 이 밤 한 송이 분꽃이 되어 당신 가슴에 흩날리고 싶어요                - 「눈물·1」 의 전문 눈물은 슬픔이나 고통에 연유한다. 대부분 정신적인 감동이나 자극에 의해 비롯된다. 눈물을 흘린다는 그 자체는 진실된 표정의 행위로 간주한다. 이 세상 어느 곳도 눈물없는 곳은 없다. 또 눈물을 한번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눈물에 대한 기독교적 이미지는 참회의 모습을 떠올린다. 잘못에 대한 뉘우침, 즉 죄를 뉘우쳐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것은 참회의 기도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참회는 눈물없이 고백할 수 없다. 눈물이 없는 참회는 거짓된 행위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의 「눈물·1」은, 눈물을 ‘추억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 그리고 ‘기다림의 눈물’로 형상화한다. 눈물이 지닌 정신적 충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과 기다림으로 승화시켰다. 눈물을 통해 끝없는 사랑과 고독한 기다림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이나 사랑, 그리고 기다림은 눈물의 상승작용을 통해 눈물에 대한 가치성과 생명력을 확대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기다림의 절정은 눈물로 나타난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추억이나 깊은 사랑으로 인한 눈물, 그리고 멈추지 않는 눈물 속에서의 기다림은 최상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시의 첫 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노래한다. 눈물을 통해 획득한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을 확대시킨다. “아직도 멈추지 않는/두 볼에 흐르는 눈물”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다. ‘아직도’는 지금도 감격의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과거인 어제의 ‘추억’과 현재인 오늘의 ‘사랑’, 그리고 미래인 내일의 ‘기다림’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 눈물로 계속 진행되고, 추억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으로 지속된다. 제2연부터 4연까지는 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홀로 지내고 고독한 삶이 제2연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홀로 기다리던/지상의 시간이”나, “쓸쓸하고 고독하였을지라도”는 화자의 지나온 삶에 대한 표현이며, 고독한 기다림의 절정을 승화시킨 구절이다. 제3연이나 4연도 기다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가슴에 새긴 사랑이나 가슴에 품은 기다림은, ‘사랑’과 ‘기다림’의 지순하고 영원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다림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지나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희망의 수평선’으로 어렴풋이 보인다고 고백한다. 마지막 연은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의 눈물이 확산되고 있다. 눈물에는 추억과 사랑, 기다림이 그대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상승작용을 통해 이슬이 되고, 꽃잎이 향기가 된다. 또한 분꽃이 되어 주님께로 가고 싶다는 그리움이다. 깊은 밤에 눈물이 이슬이 되고, 꽃잎이 향기가 되어 한 송이 분꽃으로의 염원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러한 이 시는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기다림의 그리움을 승화시켰다. 눈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신앙적인 삶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이 그대로 표현한 신앙고백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7-10
  • 문화선교연구원서 문화성경학교
    ▲ 문화선교연구원은 영화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어린이 문화성경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문화선교연구원(원장=백광훈목사)는 지난 6일 신촌 필름포럼(대표=성 현목사)에서 「해설이 있는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란 주제로 어린이 문화성경학교를 열고, 기독교 고전문학을 통한 신앙교육의 장을 열었다. 이번 어린이 문화성경학교는 8월 17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하며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영화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를 통해 어린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문화로 신앙심을 키우는 시간을 갖는다. 성경학교 관계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이 애니메이션 영화〈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로 우리 곁에 찾아왔다”며, “영화는 17세기 영국 작가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을 토대로 희망도, 기쁨도, 자비도 없는 멸망도시의 국경을 넘어서 천국도시를 찾아서 떠나는 크리스천의 이야기를 담았다. 율법언덕, 세속의 숲, 절망의 성, 허영시장, 죽음의 골짜기 등 진리를 향한 신앙인의 험난한 여정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볼거리와 의미 모두 잡았다”고 전했다. 이어 “필름포럼에서 상영하는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를 감상하고 준비된 영화가 모두 끝난 후에는 문화선교연구원 소속 전문가의 영화 해설을 통해 〈천로역정〉이 전해주는 신앙인을 향한 은혜와 진리,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어린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며, “성경학교가 끝난 후 영화를 가지고 신앙적인 교육을 통한 영화나눔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돕고자 〈무비톡가이드〉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번 성경학교를 통해 〈천로역정〉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많은 이들을 들을 수 있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7-10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8] 순수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 -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
      그대의 눈빛 익히며  만남이 익숙해져  이제는 서로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이 거리에서  나, 그대만 있으면  언제나 외롭지 않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내 마음에 젖어드는  그대의 향기가 향기로와  내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만  안겨줄 것을 믿고  나도 그대 가슴에만  머물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우리 한가롭게 만나  평화롭게 있으면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우리 사랑의 배를 탔으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의 전문 용혜원의 시 속에 승화된 사랑은 지란지교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지초와 난초같은 향기로운 사귐의 사랑, 그리고 벗 사이의 맑고도 높은 사귐의 사랑에 대한 향기이다. 우리 모두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의 시들은 절망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다리를 놓고, 사랑의 꽃이 피어난 마을을 향한 동행의 노래이다. 깊은 산 속의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처럼, 맑고 청순한 목소리로 사랑의 관계를 만든다. 사랑의 마음이 샘솟도록 용기를 주고,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로 그리운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도록 일깨운다. 용혜원은 ‘사랑의 시인’이다. 사랑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사랑의 고뇌와 그리움을 노래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을 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열정과 그리움으로 성숙한 사랑에 이른다. 그 사랑의 대상은 ‘그대’이며, ‘당신’이다. 그대나 당신은 누구나가 정겹고 사랑스럽게 일컫는 대상이다. 화자인 나의 그대이며, 나의 당신이다. 화자인 ‘나’를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 객관화시키는 것도, 깊은 감동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준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승화시켰다. 아름다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추구했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란 맑고 순수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1연은 서로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관계를 고백한다. 그것은 그대와의 만남으로 사랑에 대한 눈빛을 익히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에 대한 관계를 구체화했다. 제2연과 3연은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고백한다. 쓸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거리에서도, 그대만 있으면 언제나 외롭지 않음을 실토한다. 그리고 3연에서는 함께 있으면 그대의 향기가 향기로워 마음이 따뜻함을 고백한다. 1연과 같이 깊은 사랑의 관계를 구체화했다. 제4연은 무르익어 가는 사랑의 바람이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믿음을 승화시켰다. 그래서 그대는 내 가슴에만 안겨줄 것을 믿고, 나도 그대 가슴에만 머물고 싶다는 바람이다. 제5연은 사랑의 만남으로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진다. 사랑하기 위해 온갖 말잔치나 꾸밈의 어떤 계산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가롭게 만나 평화롭게 있으면,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진다는 사랑의 관계를 승화시켰다. 마지막 연은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사랑의 배’에 승선했음을 단정한다. 이 지상에서의 삶, 즉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세상의 바다를 향해 떠나고 싶은 소망이다. 이러한 이 시는 순수한 사랑의 관계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사랑의 길 위에서 성숙한 사랑에 이르는 관계를 보여 준다. 한 폭의 수채화로 그린 아름다운 사랑의 풍경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7-02
  • 기독인문학연구원서 도서세미나
    ▲ 기독인문학연구원은 엔도 슈사쿠의 저서를 통해 서구에서 수입된 종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교인 개인이 이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양적 관점 접근통한 그리스도와 기독교 이해를 조명 “그의 문학은 일본인으로서 울수 있는 예수를 그려낸다” 기독인문학연구원(대표=고재백교수)은 지난달 24일 역삼동 크리스찬살롱에서 「사해 부근에서 ; 예수의 흔적을 좇아서」란 주제로 도서 세미나를 열고, 일본 기독교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신앙관과 내적 고민을 조명했다. 이날 세미나는 김승철교수(난잔대)가 엔도 슈사쿠의 저서 〈사해 부근에서〉를 가지고 엔도의 문학관과 신앙적 정체성, 그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관해 강의했다. 김교수는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문학을 통해 인간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고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 발견한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했다”며, “인간이란 무엇이고 내면에서 만나게 되는 궁극적인 실존인 하나님이 누구인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풀어나갔다”고 전했다. 또한 “그의 소설 속에는 미츠라는 이름의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반대로 읽으면 일본어로 죄를 뜻하는 ‘츠미’가 된다”며, “엔도는 독자가 자신의 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로서 여성의 삶과 모습을 수려하게 꾸몄다”고 말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통해 가쿠레키리시탄 박해를 조명했다고 밝힌 김교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을 수입하고자 서구 문명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후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밀까 걱정하면서 키리시탄을 탄압하게 된다”며, “당대 많은 키리시탄들은 막부의 지독한 박해를 피하고자 살아있는 동안 매해 예수가 그려진 나무판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엔도는 그들의 모습을 돌이켜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앙을 저버린 이들을 용서하셨는지 물으며 전국시대 소설을 지었다”며, “관원들의 감시가 소홀해 키리시탄이 많이 숨어살던 나가사키에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건립된 것은 평소 그가 지녔던 문학관을 반영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신앙의 자각을 지니지 않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던 엔도는 평생 자신에게 신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했다고 역설한 김교수는 “엔도는 자신이 받은 세례를 비자발적 세례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며, 이러한 고민은 이러한 고민은 〈사해 부근에서〉의 주인공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며, “그는 필생 과제로서 결단 없이 받아들인 신앙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더불어 일본인인 자신에게 서양의 기독교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숙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엔도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믿고는 있지만, 동양인인 자신의 정체성으로 맞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벗을 수 없는 기성복으로 이를 표현한 엔도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으로 옷을 수선하듯 일본인인 자신에게 맞는 예수의 모습을 찾고자 고심했다”며, “전통과 교리에서 가르치는 예수가 아니라 자신만의 예수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엔도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김교수는 “예수를 찾고자 이스라엘을 찾아간 주인공 ‘나’의 모습은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이를 위해 대신 목숨을 내놓은 코바르스키 신부의 흔적을 좇는 일과 오버랩된다”며, “작품은 ‘내’가 예수를 좇는 것이지만, 예수께서 내 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흔적을 좇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렇기에 엔도 슈사쿠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찾고자 나아가지만, 그 여정은 예수 자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찾아오셨던 발자취가 아니었는가 하는 역설을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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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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