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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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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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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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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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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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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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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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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문화/여성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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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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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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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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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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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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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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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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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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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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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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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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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6] 맑고 순수한 기도생활의 삶 - 유혜목의 「어느 빛으로 눈부신 가슴이기에」
- 어느 빛으로 눈부신 가슴이기에 새벽을 열고 어둠을 밀고 그 빛 앞에 자꾸 앉게 되는가 어느 빛으로 설레는 이 마음이기에 더 이상 잠 못 이루고 새벽 창 앞에 무릎꿇게 되는가 어느 빛 어느 사랑 기대하는 고픈 이 마음이기에 그 일렁이는 빛의 풀밭에 나를 훑는가 나를 쏟는가 - 「어느 빛으로 눈부신 가슴이기에」의 전문 이 시는 유혜목의 〈어느 빛으로 눈부신 가슴이기에〉(시문학사 펴냄·2011년)란 시집의 표제시이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세련되고 절제된 시어로 맑고 순수한 기도생활의 삶을 승화시켰다. 신앙인의 삶 중에서도 기도생활은 기본이다. 기도는 어떤 목적에 의한 자의적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행해져야 한다. 신앙의 생활화로 비롯될 수 있다. 신앙인의 생활화로 신앙이 육화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기도의 모습이다. ‘눈부신 가슴’이나 ‘설레는 이 마음’, 그리고 ‘고픈 이 마음’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앉게 되고 무릎을 꿇어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새벽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각 연의 첫 행에 ‘어느 빛’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집약해 표현했다. ‘어느’란 지칭을 ‘하나님’으로 표현했다면, 시적 깊이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랜 시작경험과 고뇌에서 얻어내는 결과이다. 또한 첫 연은 하나님 앞에 앉게 되고, 둘째연은 무릎을 꿇게 되고, 셋째 연은 화자의 모든 것을 아뢰인다. 새벽기도의 과정을 시적 재치로 형상화했다. 첫 연은 신앙의 생활화로 순종하는 삶을 보여준다. ‘눈부신 가슴’은 이미 하나님께로 경도되어 순종의 삶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둠이 남아있는 새벽녘에 하나님 앞에 앉게 된다. 그것도 ‘자꾸’란 표현이 주는 것은, 생활화된 삶임을 암시한다. 새벽기도가 생활화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 연은 전능하신 하나님 때문에 설레이는 마음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잠을 못 이루고 새벽녘에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게 된다. 전형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다. 셋째 연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축복을 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아뢰고, 그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다. ‘기대’나 ‘고픈’이란 시어가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 일렁이는 빛의 풀밭에”란 구절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함축해 표현했다. 또한 “나를 훑는가”나 “나를 쏟는가”란 구절은,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훑어 내기도 하고, 쏟아 내놓는다는 의미이다. 훑는 거나 쏟는 것은 벌거벗듯이 회개와 감사, 그리고 소망까지도 아뢰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하나님 앞에 요구사항보다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회개에 비중을 두고 있다. 회개를 통해 신앙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기도의 본질인 순수성을 그대로 표현했다. 특히 “그 빛 앞에 자꾸 앉게 되는가”나, “새벽 창 앞에 무릎 꿇게 되는가” 그리고 “나를 훑는가”나 “나를 쏟는가”란 구절은, 시적 구성의 상승작용을 통한 화자의 신앙에 대한 척도이다. 자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앙적인 삶의 순수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가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이 시는 화자의 새벽기도에 대한 과정을 형상화했다. 새벽기도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새벽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은, 신앙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온전한 신앙의 생활화로 순수한 삶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화자의 신앙적인 삶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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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6] 맑고 순수한 기도생활의 삶 - 유혜목의 「어느 빛으로 눈부신 가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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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5] 물소리를 ‘가슴의 기도’로 승화 - 유승우의 「물소리」
- 맑은 물일수록 잠들지 못하고 한 밤내 맑게 눈뜨고 운다. 밤이 깊어 갈수록 산 속의 냇물은 더욱 목청을 돋구어 소리친다. 아무런 바램도 없이 소리로만 살아서 밤새도록 흐느끼는 가슴의 기도. 나뭇잎들이 모두 경건히 손을 모으고, 바람도 멈추어 숨을 죽인다. 하늘이 하나의 커다란 귀가 되어 다 듣고 있다. - 「물소리」 의 전문 유승우의 기독교시 대부분은 참신한 비유와 상징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구태의연한 관념적 용어의 나열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이미지들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하얗다’는 색채어는 순수 지향애의 꿈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하얀 모래섬’과 ‘흰 돛배’, 그리고 ‘귀가 밝구나’나 ‘맑디맑은 별들’ 등 순수의 세계에 집착하여 형상화했다. 이 「물소리」란 시는 ‘물소리’를 통해 ‘기도소리’를 듣는다. 즉 ‘물소리’는 ‘기도소리’이다. 물소리가 지닌 이미지는 맑은 소리이기 때문에 기도소리로 대치할 수 있다. ‘기도소리’도 구분한다면 ‘맑은 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승우의 기독교시는 기독교가 지닌 이미지를 비유와 상징의 체계로 형상화했다. 1행부터 3행까지는 자연의 현상이지만, 시적 의미를 부여했다. 밤이 깊을 수록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낮의 소음도 밤이 깊을 수록 잠들고, 지저귀던 새도 잠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에는 물소리, 그 자체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깊은 밤에 ‘맑은 물’은 잠들지 못하고, 한 밤내 맑게 눈뜨고 운다. 그것은 ‘맑은 물’이란 이미지에서 비롯 되었다. 그리고 ‘눈뜨고 운다’는 것도 ‘맑은 물’이 주는 이미지이다. ‘맑은 물’이 ‘잠들지 못하고’나, ‘맑게 눈뜨고 운다‘는 것은 의인화의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4행부터 6행까지도 자연의 현상을 바탕에 두고, 시적 상승작용으로 끌어올린다. 이 구절은 적막강산을 떠올린다. 밤이 깊어 갈수록 산 속의 냇물소리는 크게 들릴 수 밖에 없다. 밤이 깊어 갈수록 새소리 등 잡다한 소음은 없어지고, 냇물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현상인 ‘냇물소리’를 ‘더욱 목청을 돋구어 소리친다’고 의인화했다.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시의 중심이 된 부분이다. ‘물소리’가 ‘가슴의 기도’로 대치된다. ‘물소리’는 “아무런 바램도 없이/소리로만 살아서”에서, “밤새도록 흐느끼는/가슴의 기도”가 된 것이다. 물소리는 아무런 바램도 없이 들리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살아 있다고 진술한다. 그 소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밤새도록 흐느끼는 기도소리이다. 그리고 ‘가슴의 기도’도 ‘맑은 물소리’란 이미지에서 연유되었다. 그것은 ‘맑은 물소리’→‘가슴의 기도’→‘진실한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11행부터 13행까지는 종교적 경건성을 승화시킨다. 이 구절은 밤의 정적을 느끼게 한다. 그 정적은 종교적 경건성으로 형상화했다. 기도소리에 나뭇잎들이 손을 모으고, 바람도 멈추고 숨을 죽인다. 기도소리에 나뭇잎과 바람도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기도는 경건한 모습으로 드린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에 모두가 함께할 수밖에 없다. 14행부터 16행까지는 하나님이 진실한 기도를 듣고 있다고 승화시켰다. 그 기도는 나뭇잎도 손을 모으고, 바람도 멈추어 숨을 죽이는 가슴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도소리를 듣고 있다는 서술적 설명을 하늘이 하나의 커다란 귀가 되어 듣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관념적인 용어에서 탈피해 격조높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것을 보여준다. 특히 ‘하늘’이 ‘하나의 커다란 귀’로 의인화한 것은, 성숙한 시적 재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은 가슴의 기도, 즉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서나 듣고 계신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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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5] 물소리를 ‘가슴의 기도’로 승화 - 유승우의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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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4] 신앙의 삶을 위한 길 - 최은하의 '비추사이다'
- ▲ 시인 최규창 비추사이다 비추사이다 열린 돌문 안으로 가득 넘쳐드는 빛살 빛살의 소리 소리의 빛보라로 비추사이다. 죽어도 영영 죽지 않고 죽어서 다시 사는 법을 이르시며 보이신 이여. 내 떠도는 죽음의 골짜기에 한줄기 꽃바람으로든지, 지금도 역력한 우리 어머니 마지막 손실로든지 눈부셔 캄캄하더라도 속속들이 비추사이다 비추사이다. 사위거나 그림자지지 않을 그 빛살 속에서 스스로를 이겨내게 하소서 웃으며 버리는 법을 익히게 하소서 다시 사는 법 안에서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을 참으로 참으로만 살게 하소서 죽음의 고통을 넘어서서 빛으로 살게 하소서 빛살이게만 하소서. - '비추사이다' 전문 이 시의 제목인 '비추사이다'는 그 자체가 신앙인의 삶을 형상화했다. '비추사이다'는 ‘비추게 해주십시오’로 이해할 수 있다. 타동사인 ‘비추사’에 존칭인 ‘-사이다’란 어미를 삽입함으로써, 신앙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세를 내포시키고 있다. 이러한 것은 ‘비취다’는 옛말인 ‘비치다’로 빛을 보내어 밝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다. 즉 ‘비추이다’의 피동사로 비췸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시는 ‘빛’을 형상화했다. 그 빛은 ‘빛살’과 ‘빛보라’, ‘꽃바람’으로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비추사이다’로 빛의 생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빛은 일상의 빛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닌 ‘빛’으로 환원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빛’은 ‘가르침’이나 ‘삶의 표상’으로 환원된 것이다. 기독교란 종교의 특징을 빛으로 함축하고, 신앙인의 삶으로 환원되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시의 문학적 성취인 것이다. 제1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인 부활신앙을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무덤의 돌문 안에는 ‘빛’이 가득 넘친다. 그 빛은 빛살로 가득 넘쳐들고, 그 소리의 빛보라로 비친다. 특히 ‘빛살’은 비쳐나가는 빛의 가닥이며, ‘소리’를 지닌 ‘빛살’은 생명성을 지닌다. 첫 행의 ‘비추사이다’를 반복하는 것은, ‘빛’에 대한 강조로 기독교의 영원성을 드러낸다. 제2연은 기독교의 영원성을 노래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죽어서도 다시 사는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로 보여준 것이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제3연은 그 빛이 세속의 삶 속에 비추어 달라고 간구한다. 그 빛은 “한줄기 꽃바람으로든지”나, “지금도 역력한 우리 어머니 마지막 손길로든지”로 비추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꽃바람으로든지’나 ‘…손길로든지’, ‘…하더라도’는 간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떠도는 죽음의 골짜기에”는 세속적인 삶의 현장을 함축시킨다. ‘죽음의 골짜기’와 ‘빛’, 즉 기독교의 영원성을 대비함으로써 신앙의 삶을 추구한다. 스스로를 죽음의 골짜기인 세속적인 삶의 현장에서 떠돈다고 직시하고, 그 빛이 눈 부셔 캄캄하더라도 속속들이 비추어 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특히 그 빛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제4연은 신앙인의 바른 삶에 대한 길을 제시한다. 신앙의 빛 속에서 스스로를 이겨내게 하고, 웃으며 사는 법과 버리는 법, 그리고 다시 사는 법으로 신앙의 삶을 영위하도록 간구한다. ‘웃으며 버리는 법’은 신앙인이 지향해야 할 삶에 대한 총체적 표현이다. 또한 ‘다시 사는 법’은 기독교신앙의 집약된 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행인 “빛살이게만 하소서”에서 ‘…만’이란 어미를 붙임으로써 신앙인의 소박한 삶을 보여주고, 기독교신앙으로만 삶을 영하도록 간구한 것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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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4] 신앙의 삶을 위한 길 - 최은하의 '비추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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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3] 하늘나라로 가는 아름다운 마음 - 천상병의 「귀천」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의 전문 천상병(千祥炳)은 누구보다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인 맑은 시들을 남겼다. 1967년 7월 동백림(東伯林)사건에 연류되어 6개월이나 갖은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 “전기 고문이 너무너무 무서웠다”라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이기심과 악을 뛰어넘는 정제된 깨끗함을 보여주었다. 전쟁과 고문, 그리고 가난 등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하늘나라’를 꿈꾸므로써 맑은 시심(詩心)을 키운 것이다. 그의 행적 속에서 신앙적인 삶을 지닌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한때에 성당에도 나가고, 한때는 교회도 다녔다. 1981년에는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옆 연동교회를 출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연동교회 김형태목사의 설교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좥귀천좦은 천상병의 신앙적인 삶의 모습이 용해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죽는다’의 뜻이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하늘나라’를 연상시키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나,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신앙인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시키고 있다. 그것은 신앙인의 덕목인 ‘감사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가난과 아픔의 삶을 ‘감사의 삶’으로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 시는 기독교신앙이 육화된 삶에서 형상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지난 삶을 아름다움으로 노래했다. 이 시에는 짙은 우수가 깔려 있으면서도, 절제된 목소리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맑은 심성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신앙인의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3연 9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연에서 하늘로 돌아갈 때에 동반하는 것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이다. 그리고 둘째 연의 ‘노을빛’이다. 이 세상의 소유물들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고, 자연현상 속에서의 ‘떠남’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라며 노래한다. 둘째 연도 노을빛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이 손짓하면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구름의 손짓’은 하늘로 돌아가라는 부름이다. 이 첫째 연과 둘째 연은 하늘로 돌아가는 상황을 표현했다. 셋째 연은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서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고백한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지금까지의 살아온 날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형적인 신앙인의 삶이 아니면, 그렇게 표현할 수 없다. 바로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상병은 1993년 4월 28일 63세로 이 세상을 떠난 ‘천상(天上)의 시인’이었다. 누구보다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맑은 시심을 지닌 소유자였다. ‘초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시들은, 오늘의 찌든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넉넉하고 여유있는 인격자의 모습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1971년 가을에는 동백림사건의 고문 후유증과 심한 영양실조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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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3] 하늘나라로 가는 아름다운 마음 - 천상병의 「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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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2] 맑고 깨끗한 순결의 눈물 - 김현승의 「눈물」
- ▲ 시인 최규창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눈물」의 전문 이 시는 김현승 자신이 말하는 그의 대표작이다. 6·25 전쟁후 서정주시인이 광주에서 발간한 〈시정신(詩精神)〉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그의 시작품중에서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눈물」일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다. (산문집 〈고독과 시〉 -「고요한 면을 지닌 눈물」- 나의 처녀작과 대표작). 이 「눈물」은 짙고 견고한 기독교정신을 형상화한 시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는 〈예레미야 애가〉를 연상시키고 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으며,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레미야는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 보실 때까지니라”(3장 49절~50절)처럼, 눈물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이 시의 ‘눈물’은 〈예레미야 애가〉의 죄지은 자의 눈물이 아니라, 현세적 고뇌를 신앙적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김현승은 산문집 〈고독과 시〉에서 “이 시의 기저에는 기독교정신이 깔려 있다. 이 시는 내가 그렇게도 아끼던 나의 어린 아들을 잃고 나서 애통해 하던 중 어느날 문득 얻어진 시다. 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려고 하였었고, 그러한 심정으로 이 시를 썼었다.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라는 것이 이 시의 주제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눈물을 좋아하는 나의 타고난 기질에도 잘 맞는다”(「굽이쳐가는 물굽이 같이-나의 시, 그 변모의 과정」에서)라고 적고 있다. 이 시의 ‘눈물’은 김현승 자신의 비애의 심정으로 축출된 맑고 깨끗한 산물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얻은 ‘눈물’을, 맑고 깨끗한 ‘생명의 눈물’로 창조한 것이다. ‘눈물’은 생명 혹은 거듭남의 삶을 상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의 힘이다. 현세적 삶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한 거듭난 자의 삶이다. 슬픔과 분노와 좌절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순결의 눈물로 승화시켰다. 신앙의 윤리적 삶에서 비롯된 거듭난 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자신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눈물을 드리는 고백적 기도이다. 이 시는 순결을 지향하는 참회의 심정을 노래했다. 이 시의 바탕에는 깨끗하고 맑은 신앙의 마음이 승화된 고요한 정서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 가장 깨끗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신앙의 정성이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이 시는 제1연과 2연은 ‘눈물’에 대한 가치성을 부여하고 있다. 제1연은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의 씨앗으로 표현하고, 제2연은 흠도 티도 없고, 금가지도 않는 가장 깨끗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3연과 4, 5연은 하나님께 드리는 ‘눈물’에 대한 설명이다. 제3연과 4연 1행은 하나님께서 더욱 값진 것을 요구해도 ‘눈물’뿐임을 고백한 것이다. 제4연 2행과 3행, 그리고 제5연은 하나님의 섭리, 즉 창조성에 대한 신앙이다. 특히 마지막 행인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는 하나님 앞에서 참회할 수 있는 자각에 대한 ‘눈물’이며, 부활의 정신을 상징한 생명성을 부여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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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2] 맑고 깨끗한 순결의 눈물 - 김현승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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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1] 신앙인의 바른 삶과 실천의지 - 윤동주의 「서시」
- ▲ 시인 최규창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의 전문 이 시는 해방 후에 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序詩)」이다. 시집에 수록된 맨 첫 작품이며, 1941년 11월 20일에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1년은 윤동주가 북간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연희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때는 일제말 수난기에 해당되며, 〈문장(文章)〉 등의 문예지가 폐간되고, 무수한 지식인을 예비검속 및 투옥되었던 암흑기이었다. 이 시는 우주적 교감으로 삶의 비약과 희망을 형상화시키고, 꿈과 삶의 정직성을 보여 준다. 그것은 기독교신앙으로 비롯되고 있으며, 기독교신앙의 경건과 진솔성을 함축시켰다. 이러한 시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신념의 바탕 위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서시」는 2연 9행으로 되어 있다. 구성상 모두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면, 첫 번째의 단락은 4행까지이며, 두 번째 단락은 5행부터 8행,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2연의 1행이다. 이 시를 기독교신앙의 측면에서 분석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속죄와 회개, 찬양, 그리고 십자가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사명으로 세분하여 분류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속죄와 회개의 모습이다. 1행과 2행은 신앙에 의한 도덕적 결백성을 나타내고 있다. 3행과 4행은 바른 신앙에서 비롯된 윤리적 삶이다. ‘하늘’과 ‘바람’은 절대자, 즉 하나님의 영역이고, ‘부끄러움’과 ‘괴로움’은 세속적 인간의 관습이다. 특히 이 시에서 ‘바람’은 과거의 갈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신앙적 도덕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4행까지는 삶의 신앙적 자세로 신앙의 지조를 지켜 가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찬양과 십자가의 가르침, 십자가의 사명으로 분석할 수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나, 신앙의 경건함을 지니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가르침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심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지니고 살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7행과 8행인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십자가의 사명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이다. ‘나한테 주어진 길’이란 십자가의 길이며, ‘걸어가야겠다’는 십자가의 사명에 대한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 단락인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대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윤동주는 그의 시에서 일제 식민지시대를 어둠의 역사로 규정했으며, ‘오늘밤’은 식민지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을 하나의 행으로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러한 「서시」는 윤동주의 좌우명이며,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적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삶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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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1] 신앙인의 바른 삶과 실천의지 - 윤동주의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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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0] ‘꽃’의 ‘창조과정’을 형상화 - 유재하의 「꽃의 사명」
- ▲ 시인 최규창 p.p1 {margin: 0.0px 0.0px 0.0px 0.0px; text-align: justify; font: 12.0px Helvetica} p.p2 {margin: 0.0px 0.0px 0.0px 0.0px; text-align: justify; font: 12.0px Helvetica; min-height: 14.0px} 이 세상 고운 빛깔 모두 모아 하나님은 꽃을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빛깔 중에서 진달래에게 진분홍빛을 개나리에게 노란빛을 벚나무에게 흰빛을 예쁘고 샘이 많은 장미에겐 가지와 함께 빨강, 노랑, 하얀, 분홍 까망…. 원하는 대로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꽃들마다 향주머니 하나씩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꽃은 제각기 다른 빛깔로 제각기 다른 향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며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 「꽃의 사명」의 전문 이 시는 유재하(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총무·원로목사)의 제2동시집인 <꿈꾸는 반달>(아동문학사 펴냄, 2001년)에 수록된 동시로,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 세상의 고운 빛깔만을 모아 꽃을 만드셨던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된 빛깔과 향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꽃은 하나님이 고운 빛깔만을 모아 만들었지만, 꽃의 종류에 따라 다른 빛깔로 만들었다. 특히 장미는 가시와 함께 여러가지의 빛깔로 꽃을 만든 것이다. 이 꽃마다 향기를 주는 향주머니를 안겨 준 것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임을 일깨워 주는 시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꽃을 통한 기발한 발상과 구성, 꽃이 주는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가운데 재치있는 전개는 유재하의 문학적인 원숙한 역량에 기인한다. 이 시의 ‘꽃’은 하나님의 창조에 따라 아름다운 꽃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처럼, 모든 인간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꽃이다. 아름다움의 상징이 꽃이기 때문이다. 첫 연부터 4연까지는 하나님이 꽃을 창조한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셋째 날에 식물을 만들었지만, 구체적으로 꽃의 창조과정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식물 중에 꽃이 들어 있으며, 그 꽃에 대한 섬세한 부분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대변한 것이다. 마지막 연인 꽃의 사명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깊은 성찰에 연유한 결과이다. 꽃의 빛깔과 향기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명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꽃의 사명으로 전개한 것도 시인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 연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고운 빛깔만을 모아 꽃을 만들었다고 단정했다. 꽃이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적인 기발한 발상이다. 꽃을 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고운 빛깔 / 모두 모아”란 구절처럼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꽃을 만들었습니다”고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표현했다. 제2연부터 4연까지도 마찬가지이다. 3연은 장미꽃이 예쁘고 샘이 많아 가지와 함께 빨강꽃을 비롯한 노랑꽃, 하얀꽃, 분홍꽃, 까망꽃 등 원하는 대로 주었다. 장미꽃의 가지에 가시와 한가지 빛깔이 아닌 여러가지 빛깔을 지닌 꽃을 피우기에 샘이 많다고 표현했다. 4연은 꽃들마다 향기를 담은 향주머니를 안겨 주었다. 이러한 것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음을 일깨워 준다. 제5연은 꽃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준다. “제각기 다른 빛깔”과 “제각기 다른 향기”로 꽃의 사명인 아름다움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란 구절은 의인화된 표현으로 ‘피어난다’는 의미의 진행형이다.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것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 시는 ‘꽃’을 ‘꽃’으로 인식하지 않고, ‘꽃’의 탄생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꽃’이 태어난 과정과 ‘꽃’의 존재의미를 구체화시켰다. 어린이들의 동심 속에 꽃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꽃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사명으로 피어나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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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0] ‘꽃’의 ‘창조과정’을 형상화 - 유재하의 「꽃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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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8] 부활의 아침 - 이 수 영
- ▲ 시인 최규창 몸이 향기로운 꽃봉오리였을 때 그 꽃이파리 낱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일 상상도 못했습니다 몸이 타오르는 불꽃이었을 때 그 심지 다하도록 흘리는 눈물의 태산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 사망을 걸어 잠근 돌문이 열리듯 이제 진흙덩어리 이 몸 부수겠습니다 저의 손바닥에도 굵은 대못을 박아 주십시오 못자국 선명한 이 두 손으로 주님의 잔에 붉은 포도주를 딸아 올리겠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통해 ‘신앙의 삶’에 대한 성찰로 깨닫는 길 이 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신앙의 삶을 성찰한 고백이다. 예수가 부활한 아침에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화자인 스스로의 신앙에 대한 돌아봄과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보여 준다. 화자인 스스로의 신앙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의 죽음과 우리를 위해 희생한 생애를 깨닫도록 한다. 또한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화자인 스스로도 돌문이 열리듯 진흙덩어리인 이 몸을 부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승리의 부활에 대한 경배와 기쁨을 형상화했다. 첫 연은 죽음과 희생을 떠올려 준다. “몸이 향기로운 꽃봉오리였을 때 / 그 꽃이파리 / 낱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일 / 상상도 못했습니다”란 구절은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의 생애 자체가 “향기로운 꽃봉오리”로 함축했고, “낱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일”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형상화했다. 그의 생애는 오늘의 모두에게 신앙의 대상이고, 온 인류를 구원해 주는 구주이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과 처절한 죽음은 “상상도 못했습니다”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누구나가 예수의 죽음은 놀라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몸이 타오르는 불꽃이었을 때 / 그 심지 다하도록 / 흘리는 눈물의 태산 /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란 구절은 예수의 사랑과 희생, 눈물을 떠올려 준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스스로의 몸을 태워가며 밝음을 주는 것은, 촛불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의 생애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개인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했기 때문이다. 눈물도 마찬가지이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린 안타까움의 눈물인 것이다. 둘째 연은 예수가 부활하듯이 화자인 스스로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겠다는 신앙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의 무덤을 걸어 잠근 돌문이 열리고, 그 부활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삶을 결단한다. “돌문이 열리듯”이나 “부수겠습니다”란 표현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가 돌문을 열고 부활한 것처럼, 화자도 “진흙덩어리 이 몸”을 부수겠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특히 “진흙덩어리 이 몸”은 창세기 2장 7절인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성령이 되니라”란 구절을 떠올린다. 진흙덩어리로 만들어진 이 몸을 부수겠다는 것은, 걸어 잠근 돌문을 열고 부활한 예수처럼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결의를 보여 준다. 셋째 연은 십자가에 두 팔과 두 발이 대못으로 박힌 예수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한 자세로 부활의 예수를 경배하는 결연한 신앙을 형상화했다. 화자가 “굵은 대못을 박아 주십시오”라고 간구한 것이나, “못자국 선명한 / 이 두 손”은 예수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한 자세이다. “굵은 대못”과 “못자국 선명한”이란 표현으로 그 고통과 아픔의 깊이를 극대화시켜 준다. 그 두 손으로 “주님의 잔에 / 붉은 포도주를 딸아 올리겠습니다”는 것은 부활승리에 대한 기쁨과 경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포도주는 신앙생활의 기쁨(사사기 55:1)으로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첫연의 “못했습니다”는 돌아봄, 그리고 “못해 봤습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또한 둘째연의 “부수겠습니다”와 셋째연의 “박아 주십시오”는 결단의 자세, “올리겠습니다”는 경배의 모습이다. 화자의 순수한 신앙에 의한 고백적인 자세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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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8] 부활의 아침 - 이 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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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7] 비신앙적인 삶을 향한 메시지 - 김 석의 「말씀·6」
- ▲ 시인 최규창 다 이루었다 알파와 오메가 너희들이 잠잠하면 저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 다 이루었도다 - 「말씀 · 6」의 전문 김 석의 「말씀 · 6」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앞두고, 모진 수난을 당하는 예수의 초췌한 모습을 떠올린다. 그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우리를 위한 “다 이루었다”란 말씀에 대해 지그시 눈 감아 묵상하도록 한다. 죽음 직전에 “다 이루었다”란 말씀을 통해 오늘의 비신앙적인 삶을 향한 메시지를 형상화했다. 지금도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 성취된 구속사역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 시는 성경구절을 적절하게 구성함으로써 구속사역에 대한 메시지를 승화시켰다. “다 이루었다”란 구절은 요한복음 19장 30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란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너희들이 잠잠하면 / 저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란 구절은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인용했다. “다 이루었다”란 예수의 말씀을 전제한 후, 이 성경구절을 통해 구속사역의 성취에 대한 의미를 전개했다. 이러한 시적인 영감과 기발한 발상, 재치있는 기교와 치밀한 구성은, 김 석의 원숙한 시작(詩作)에서 연유한 것이다. 특히 예수는 죽기 직전인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와 “다 이루었다”란 두 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죽음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성취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구절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구속계획의 성취임을 예수 자신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모든 육체적인 고통을 참고 순종했다. 십자가죽음의 직전에 최후의 절규인 “다 이루었다”란 말씀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였다. 첫 행인 “다 이루었다”란 구절은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여섯 번째로 온갖 방해에도 지상사역을 완수하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죽음 직전에 “다 이루었다”는 이 한 마디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선언은 예수 자신에 의하여 마지막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짧으면서도 장엄한 한 마디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모든 희망의 근거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천명한 것이다. 제2행인 “나는 알파와 오메가”란 구절은 예수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란 뜻이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의한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와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마침’은 관용적 표현으로서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원토록 존재하고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며, 이를 심판하는 최후 심판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제 3행과 4행인 “너희들이 잠잠하면 / 저 돌들도 외치게 하리라”란 구절은 누가복음 27장 40절에서 연유한 것이다. 특히 “저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란 구절은 피조물들이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돌들이 찬양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비신앙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표현이다. 마지막 행인 “다 이루었도다”란 구절은 첫 행인 “다 이루었다”를 강조함으로써 구속사역의 성취를 새롭게 일깨워 준다. 이러한 이 시는 오늘의 모두에게 주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신앙적이지 못한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한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모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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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7] 비신앙적인 삶을 향한 메시지 - 김 석의 「말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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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6] 낮은 자세로 하나님과의 만남 - 홍금자의 「오늘밤은」
- ▲ 시인 최규창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후에만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 몇 번이고 절망의 눈물을 넘어서야 잡을 수 있는 옷자락 사랑, 또 사랑 맨발로 서야만 만날 수 있는 이시여 오늘밤 내 폐허의 땅에서 당신의 이마에 겸손히 입술을 댑니다. - 「오늘밤은」의 전문 홍금자의 「오늘밤은」이란 시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걷는 듯한 힘겨운 세상살이 속에서 절망의 눈물을 딛고 일어서야만 주님의 곁에 갈수 있음을 깨달도록 한다.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맨발인 낮은 자세, 그리고 참회의 기도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간구의 기도로 만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단계적인 과정을 치밀하게 구성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후”에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은,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만 주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고,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 만날 수가 있다. 또한 “내 폐허의 땅에서” 만난 주님의 이마에 입술을 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후에만’ →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 →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 → ‘내 폐허의 땅에서’ → ‘당신의 이마에 / 겸손히 입술을 댑니다’고 주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을 보여 준다. 시적인 가치성을 획득하기 위한 상승작용의 결과로 볼수 있다. 첫 연은 대부분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삶을 형상화했다. 힘겨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출렁이는 바다”란 순탄한 세상이 아니라, 험한 세상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바다 위를 걸은”이란 험한 세상살이를 함축한 것이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삶이란 힘겨운 세상살이다. 고난과 역경 속의 삶이다. 그리고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제2연은 절망의 눈물을 딛고 일어서야만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가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일깨워 준다. 첫 연의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걷는 삶이란 절망적일 수도 있다. 이 절망을 넘는다는 자체가 신앙의 행위이다.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 / 잡을 수 있는 옷자락”이란 구절의 ‘옷’은 성경에서 구원의 상징이다(이사야 61장 10절).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이란 구절은 이러한 성경적인 의미인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일깨워 준다. 제3연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린 화자는 하나님께 사랑의 표시인 이마에 입술를 대는 것은 존경의 인사이다. “오늘밤”이란 구절은 ‘기도의 시간’이 함축되어 있다. 밤에 ‘참회’와 ‘간구’의 기도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표현했다. 참회의 기도로 “페허의 땅”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비신앙적인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폐허의 땅’일 수밖에 없다. 신앙적으로 보면 참회를 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이마에 / 겸손히 입술을 댑니다”란 구절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다. 이러한 이 시는 은유적인 기법으로 구성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걷는 후에만”이나,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 그리고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나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 “내 폐허의 땅에서” 등의 구절은 이 시가 추구하는 주제를 적절한 표현으로 형상화했다. 절제된 시어선택으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이러한 것은 원숙한 시작(詩作)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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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6] 낮은 자세로 하나님과의 만남 - 홍금자의 「오늘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