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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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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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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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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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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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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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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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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문화/여성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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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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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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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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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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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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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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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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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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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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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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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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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5] 행복한 삶위한 하나님의 축복 - 이해경의 「선물의 향기」
- ▲ 시인 최규창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변치 않는 믿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뜻이 있는 소망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깊은 사랑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넘치는 기쁨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바다같은 평안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의 나의 정원에는 당신이 주신 선물의 향기로 가득히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 「선물의 향기」의 전문 이 시는 지난 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믿음과 소망, 사랑과 기쁨, 평안을 선물로 주시고, 그 선물을 받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삶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선물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축복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각 연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면 받을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한 요소들이다. 이 풍성한 선물들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이러한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주어지는 즐겁고 복된 상태를 가리킨다(신명기 10장 13절). 건강을 비롯한 성공, 생명, 많은 자손, 안전, 풍성함 등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행복의 내용들이다. 첫 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변치 않은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앙의 행위를 지닐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심이다.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일컫는다(에베소서 2장9절).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미래를 위해 그를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뜻이 있는 소망”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래에 실현될 것에 대한 기대를 지닐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제3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깊은 사랑”을 선물로 주셨다. 그 사랑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신적(神的)인 사랑이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요한1서 4장 10절).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제4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넘치는 기쁨”을 선물로 주셨다. 이 기쁨은 주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하나님의 속성이자(시편 104편 31절),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제5연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바다같은 평안”을 선물로 주셨다.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마음에 걱정이 없음을 표현했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 늘 평안하게 해주시기기 때문이다(빌립보서 4장 7절) 제6연은 화자의 가정이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향기가 가득히 피어오르고 있다. 행복한 가정과 삶임을 고백한 것이다. “나의 정원”이란 화자의 삶이나 가정으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변치 않는 믿음”을 비롯한 “뜻이 있는 소망”, “깊은 사랑”, “넘치는 기쁨”. “바다같은 평안”이 가득한 가정이나 삶은 ‘행복한 가정’과 ‘행복한 삶’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 시는 “변치 않는 믿음”과 “뜻이 있는 소망”, “깊은 사랑”, “넘치는 기쁨”, “바다같은 평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선물임을 인식시켜 준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보여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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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5] 행복한 삶위한 하나님의 축복 - 이해경의 「선물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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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4] 하나님 앞에 간구와 그 응답 - 윤병춘의 「기도할 때에」
- ▲ 시인 최규창 기도는 어둠의 골짜기로 서성이는 검은 그림자를 지워 버린다 기도는 하와를 꾀이던 유혹의 혀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린다 기도는 봄날의 꽃향기처럼 높은 곳에서 은총의 선물을 내려 보낸다 기도는 어둠의 소리들을 샘물같은 언어로 바꾸어 주신다 기도는 잠든 영혼의 숨결을 푸른 종소리로 기지개를 켜게 하고 먼 곳을 보여 주신다 -「기도할 때에」의 전문 이 시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을 형상화했다. 신앙적이지 못한 주위의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의 삶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섭리하심과 바른 신앙의 삶을 위한 길로 인도해 주심을 표현했다. 바른 신앙의 삶을 위한 기도생활의 결과이다. 첫 연은 기도를 통해 잘못된 생활을 간구하고, 그 삶을 청산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어둠의 골짜기로 서성이는 / 검은 그림자”란 구절은 비신앙적인 삶이며, 잘못된 생활을 상징한다. “어둠의 골짜기”란 신앙적이지 못한 세상적인 삶의 테두리를 의미하고, “검은 그림자”는 기도를 드리기 전인 주변의 생활에 대한 환경이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앞에 기도로 회개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검은 그림자를 / 지워 버린다”는 것은, 잘못된 삶을 청산한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제2연은 불순종의 삶을 회개하고, 순종의 삶에 대한 응답이다. “하와를 꾀이던 / 유혹의 혀”는 창세기 3장 4절의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란 구절에서 하와를 유혹하는 ‘뱀의 혀’를 떠올린다. 뱀의 꼬임으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삶을 의미한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와를 꾀이던 / 유혹의 혀”인 ‘유혹의 혀’를 회개함으로써, “어둠 속에 / 가두어 버린다”란 구절처럼 ‘유혹의 혀’로 상징된 불순종의 비신앙적인 언어를 어둠 속에 가두워 버린다. ‘유혹의 혀’를 버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응답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불순종의 삶’을 ‘순종의 삶’으로의 전환이다. 제3연은 기도의 응답인 “은총의 선물”을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은 “높은 곳”인 하늘나라에서 봄날의 꽃향기처럼 내려 보내 주신다. “봄닐의 꽃향기”는 꽃나무에서 내려온다. 봄날의 꽃나무에서 풍겨오는 꽃향기처럼 “은총의 선물”도 하늘나라의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 하나님은 은총의 선물을 주신다. 바른 신앙의 삶에서 비롯된 기도에 대한 결과이다. 제4연은 기도를 통해 비신앙적인 언어들을 신앙적인 언어로 바꾸어 주신다. “어둠의 소리”는 긍정적이지 못한 부정적인 언어이며, 타인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상처의 언어로 상징된다. 하나님은 그 언어를 “샘물같은 언어”로 바꾸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다. “샘물같은 언어”란 신앙적인 언어로 때가 묻지 않은 맑은 언어이고, 희망의 언어이며 축복의 언어이다. “어둠의 언어”에 대한 반대 개념은 “샘물같은 언어”인 “빛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제5연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잠든 영혼의 숨결”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이다. 그 구절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자들을 표현하고, “푸른 종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의미한다. “기지개를 켜게 하고”란 구절은 “잠든 영혼의 숨결”이 “푸른 종소리”인 복음으로 “잠든 영혼의 숨결”이 깨어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그 깨어난 영혼에게 “먼 곳”인 하늘나라를 향한 구원의 길을 보여 준다.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간구하고, 그 결과는 “푸른 종소리로/기지개를 켜게 하고/먼 곳을 보여 주신다”고 표현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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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4] 하나님 앞에 간구와 그 응답 - 윤병춘의 「기도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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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 최은하의 「황혼에 서서」
- ▲ 시인 최규창 언제고 나는 정작 자유롭지 못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란 그 말씀만은 자유이옵니다 오늘도 나는 그 자유가 그리워 알맞게 세상을 떠도는 눈먼 하루살이이옵니다. - 「황혼에 서서」 전문 이 시는 「황혼에 서서」란 제목 자체가 암시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삶과 오늘의 삶을 반추(反芻)한 것이다. 그것은 “정작 자유롭지 못하옵니다”나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란/그 말씀만은 자유이옵니다”란 구절의 두갈래인 삶의 현장에서 ‘자유’에 대한 고뇌의 명상으로 전개했다. 그 자유는 일상의 삶인 세속적인 세상살이의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통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자유롭게 하는 자유에 대한 의미를 사유하도록 한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의 자유는 자유롭지 못한 삶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찾아 나서는 삶의 행적에 대한 고백이다. 이 시에서의 ‘자유’와 ‘진리’는 사전적인 의미 속에 성경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유’란 세속적인 삶의 현장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유’로 분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법률이 정한 범위 안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성경적으로는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적인 권세, 죄와 죽음, 율법의 속박으로 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언제고 나는 / 정작 자유롭지 못하옵니다”란 구절은,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자유롭지 못한 삶임을 깨닫게 한다. 누구나가 세상 속에서 누리는 자유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닌 “자유롭지 못하옵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언제고 나는”이란 구절은 언제나 일상의 생활 속에서는 자유롭지 못함을 암시해 준다. 그것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지켜 왔던 관습이나 생활습관 등의 비신앙적인 행위들이 신앙의 삶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신앙적인 자유의 삶을 향한 고뇌가 함축되어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란 / 그 말씀만은 자유이옵니다”란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자유롭게 하는 그 자유만이 자유인 것을 천명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언제고 나는 / 정작 자유롭지 못하옵니다”란 구절의 자유가 아니라,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구절의 진리에 의한 자유만이 자유인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 자유가 그리워 / 알맞게 세상을 떠도는 눈 먼 하루살이이옵니다”란 구절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기 위해 그리워하고, 그 자유를 찾아 나선 삶임을 고백한 것이다. “정작 자유롭지 못합니다”란 구절의 자유란 세속적인 자유이기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란 / 그 말씀만은 자유이옵니다”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그리워한다. “정작 자유롭지 못합니다”나 “알맞게 세상을 떠도는 눈먼 하루살이이옵니다”란 구절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깊은 고뇌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나선 삶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알맞게 세상을 떠도는’ 삶이거나 ‘눈먼 하루살이’란 표현은 자유를 향한 고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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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 최은하의 「황혼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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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2] 하나님찬양과 감사의 삶 - 권오숙의 「축복 · 2」
- ▲ 시인 최규창 TV로 K2 산의 정상을 보는데 밤이 되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나는 하나님을 찬양해요 나는 하나님을 찬양해요 노래한다 나의 눈이 그것을 보고 나의 귀가 그 찬양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한다 - 「축복·2」의 전문 이 시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형상화했다. TV로 K2산의 정상을 보는데 밤이 되자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반찍이는 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인식한다. 그 찬양의 노래를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는 삶이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의 삶이 생활화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깊은 신앙심에 연유한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신앙의 생활화에서 작용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첫 연은 TV로 보았던 K2산의 정상이었으나, 밤이 되자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한 두개가 아니라 수많은 별들이다. 공해로 찌든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볼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에 감동일 수 밖에 없다. K2산은 청정지역이다. 이 산은 인간들이 쉽게 정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운 공해도 유발되지 않았다. 파괴나 훼손되지 않아 그대로 보전되어 왔기 때문에 밤하늘의 별들이 유별나게 반짝일 수 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듯한 별들을 볼수 있다. 이러한 이 산은 인도 카라코람산맥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토속명(土俗名)으로 ‘답상(Dapsang)’, 또는 ‘초고리(Chogori)’라고 불린다. 발토로 빙하 북쪽에 솟아 있는 고봉으로 높이 8,611m이며, 에베레스트산에 이은 세계 제2의 고봉이다. 화자는 TV로 K2산 정상을 보았으나, 밤이 되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발견한다. 그 반짝이는 별들을 감동의 장관으로 본 것이다. 그것은 TV에서 K2산의 정상을 보는 시선이 반짝이는 별들로 이동한 것이다. 그것은 이 별들을 보는 순간부터 시작(詩作)을 위한 전환의 시발이다. 제2연은 반짝이는 별들의 광경을 ‘찬양’과 ‘노래’로 의인화했다. 제1연에서 보았던 별들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의인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인식한다. 시편 147편 7절인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를 떠올린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무한한 은총에 대한 찬양의 노래이다. 그것은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이나, 1장 16절의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란 것처럼,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이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은 의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신앙적인 시각에서 유추하면 반짝이는 별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제3연은 욥기 13장 1절인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를 떠올린다. 여기서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는 개인적인 관찰을 통하여 아는 것이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던 것을 가리킨다. “통달하였느니라”는 ‘이해하다’나 ‘분별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눈은 관찰을 통해 정보를 획득하게 되고, ‘귀’는 구두나 소리로 판단하게 된다. 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광경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생활화된 신앙이 작용한 관찰과 경험의 결과이다. 이 눈과 귀를 지닐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다. 그것은 화자가 지닌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준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고, 반짝이는 별들의 행위도 화자가 지닌 신앙의 동일선상에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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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2] 하나님찬양과 감사의 삶 - 권오숙의 「축복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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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1] ‘웃음’의 생활습관을 생활화 - 이명희의「웃음 도돌이」
- ▲ 시인 최규창 화나고 짜증날 때 -한번 웃자 헤헤헤 히히히 친구 웃고 나 웃고 하하하 호호호 낄낄낄 깔깔깔. - 「웃음 도돌이」의 전문 이 동시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웃는 모습으로 기쁨의 생활을 추구했다. 웃는 생활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순수하고 밝은 동심을 지닐 수 있도록 인도한다. 화가 날때나 짜증이 날때도 웃을 수 있도록 ‘웃음’의 생활습관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웃는 모습의 생활이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이며, ‘웃음’은 곧 ‘기쁨’의 생활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라”란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기뻐하는 것을 포함한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에도 웃을 수 있는 생활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기쁨의 생활은 웃음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웃음 도돌이」는 《웃음 도돌이》(2018년, 시선사 펴냄)의 표제시이며, 제37회 한국기독교문학상 수상 동시집이다. 이 시의 제목인 ‘도돌이’는 악곡에서 줄음표의 한 가지인 ‘도돌이표’에 연유한 것이다. 그것은 악곡의 어떤 부문을 두 번 되풀이하라는 뜻이다. 「웃음 도돌이」는 웃음을 계속 되풀이 하듯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웃음의 생활화를 의미한다. 제목 자체가 이 시의 주제를 그대로 담고 있으며, 시인의 기발한 창조적인 발상이다. “화나고/짜증날 때//-한번 웃자//헤헤헤/히히히”이란 구절은 기쁨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웃음의 생활이란 기쁨의 생활이 전제된 구절이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에도 웃자는 것은, 웃음만이 화가 난 마음과 짜증스러운 마음을 풀어 줄수 있기 때문이다. 웃는 마음과 모습은 기쁨의 생활을 갖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친구 웃고/나 웃고//하하하/호호호//낄낄낄/깔깔깔”이란 구절은 친구와 함께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이다. 친구와 함께 잔뜩 참고 있던 ‘웃음보’를 터뜨리고,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리는 ‘웃음바다’의 장면이다. 이 광경은 즐거운 ‘웃음꽃’을 한바탕 피우거나 어우러져 웃는 자리인 ‘웃음판’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화나고/짜증날 때//-한번 웃자”란 것은, 타의의 설득에 의한 웃음이다. 그러나 “친구 웃고/나 웃고”란 것은 자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다. 전자는 가식적이고 타의에 의한 웃음이었다면, 후자는 감정에 의해 자발적인 웃음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웃는 모습이 생활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특히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웃음의 상승작용이다. 웃음의 형태에 따라 웃는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이 웃어야 하는 웃음부터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형태를 고조시킨다. ‘헤헤헤’ → ‘히히히’→ ‘하하하’ → ‘호호호’ → ‘낄낄낄’ → ‘깔깔깔’의 웃음으로 상승시킨다. 시어에 대한 깊은 고뇌 속에서 구성시켰다고 볼수 있다. ‘헤헤헤’의 웃음은 힘없이 조금 벌린 모양이거나 입을 조금 벌리면서 경망스럽게 웃는 모양이다. ‘히히히’는 만족감을 느끼고 싱겁게 웃거나 비웃을 때에 내는 소리이다. 그것은 “-한번 웃자”란 구절이 암시하듯이 타의에 의한 웃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하하’의 웃음은 반가워서 웃는 소리이고, ‘호호호’는 입을 오므리고 입김을 많이 불어내는 웃음소리이다. ‘낄낄낄’이나 ‘깔깔깔’은 억지로 참으려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이다. 이 웃음들은 참지 못하고 감정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웃음의 과정을 보면 웃음이 많이 쌓여있는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은 듯한 장면을 보여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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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1] ‘웃음’의 생활습관을 생활화 - 이명희의「웃음 도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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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0]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추구 - 소강석의 「윤동주 무덤 앞에서·3」
- ▲ 시인 최규창 님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고서야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으랴 그대처럼 아파하지 않고서야 어찌 시를 쓴다 할수 있으리오 부끄러움 하나 느끼지 않고 시를 썼던 가짜 시인을 꾸짖어 주십시오 눈물 없이 쓴 껍데기 시를 심판해 주십시오 참회록 없는 이 시대의 시인들을 파면해 주십시오 당신 무덤에 피어오른 동주화를 내 마음의 무덤에 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윤동주 무덤 앞에서·3」의 전문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윤동주의 삶과 고고한 시정신을 추구했다. 화자인 소강석시인(새에덴교회 목사)은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 그의 삶과 시정신을 기리고, 스스로의 시작(詩作)에 계승하려는 결의를 표현했다. 그것은 시인으로서의 삶과 시작(詩作)의 자세로 형상화시켰다. 이 시대를 사는 시인이 지녀야 할 품성(品性)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신앙인의 바른 삶에 대한 길을 의미한다. 이 시는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전제한 후에, 화자의 시인적인 삶을 되돌아보는 형태로 구성했다. “있으랴”나 “있으리오”, 그리고 “주십시오”란 구절의 반복을 통해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화자에 대한 삶과 시정신으로 극대화시킨다. 특히 “있으랴”나 “있으리오”란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전제한 후에 화자인 스스로의 시인적인 삶을 되묻는다. 또한 “주십시오”도 오늘의 현재를 돌아보며 결단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심판’과 ‘파면’, ‘허락’은 법률적으로 판결에 대한 언어이다. ‘심판’과 ‘파면’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내리고, ‘동주화’를 심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님의 무덤을 찾아오지 않고서야/어찌 시를 쓴다 할수 있으리오”란 구절에서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표현했다. 윤동주의 고고하고 지순한 시정신을 알지 못하면 시인이 될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제의 서슬퍼런 시대에 순교자적인 각오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로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볼수 있다. 또한 “그대처럼 아파하지 않고서야/어찌 시를 쓴다 할수 있으리오”란 구절은 윤동주처럼 아파하지 않고서는 시를 쓴다고 할수 없다. 윤동주의 아픔이란 시대적인 상황인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서 비롯되었다. 오늘의 시인도 윤동주처럼 고고하고 지순한 시정신과 현대사회의 시대적인 아픔을 지녀야 한다고 일깨워 준다. 그리고 ‘부끄러움’이나 ‘눈물’, ‘참회록’은 윤동주의 시를 연상시키고, 윤동주의 시를 상징한 시어들이다. 이 시어를 통해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떠올리고, 시인의 자세를 일깨워 준다. “부끄러움 하나 느끼지 않고”란 구절은, 「서시(序詩)」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란 구절을 떠올려 준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은 ‘가짜 시인’으로 간주한다. 또한 “눈물 없이 쓴 껍데기 시를”이란 구절은 눈물이 없는 시란 껍데기에 불과하고 기교만 앞세워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또 “참회록 없는 이 시대의 시인들을”이란 구절은, 윤동주의 「참회록(懺悔錄)」이란 시를 떠올려 준다. 과거의 죄악을 깨달아 뉘우치고, 죄를 뉘우쳐 하나님께 고백함으로써 바른 삶과 이 시대와 함께 하는 시를 쓸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 무덤에 피어오른 동주화를/내 마음의 무덤에 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란 구절의 ‘동주화’는 화자가 윤동주의 무덤에 피어있는 꽃을 동주화로 명명한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발한 시인적인 발상이다.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동주화로 함축했다. ‘내 마음의 무덤’에 심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은, 윤동주의 바른 삶과 시정신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윤동주와 화자 간에 일체적(一體的)인 삶을 희구한 것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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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0] 윤동주의 삶과 시정신을 추구 - 소강석의 「윤동주 무덤 앞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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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9] 오늘의 삶을 위한 잠언 - 김석림의 「산상수훈」
- ▲ 시인 최규창 하늬바람 눈뜨는 우이동 골짜기 4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면증 끌어안고 절뚝거리며 일어서는 진달래꽃을 보라 삼각산 이슬 머금고 태고의 생기 품는 고깔제비꽃 풍상에도 꺾이지 않는 시리도록 투명한 미소를 마주하라 변변한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끈질긴 목숨 연명하는 잡초 땅의 풍식(風蝕)을 막아 옥토로 가꾸는 소중한 땅방울을 기억하라 수목들과 풀꽃에 얹혀 살아가는 곤줄박이, 접동새 일용할 양식으로 풍족한 피조물의 감사기도를 들어라 그러므로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지니라 - 「산상수훈(山上垂訓)·1」 이 시는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현상을 통해 섭리하심에 대한 삶의 길을 일깨워 준다. 산에서 피어나는 진달래꽃과 고깔제비꽃, 그리고 잡초와 접동새 등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승화시켰다. 꽃과 잡초의 현상, 소중한 땀방울의 결과, 수목과 풀꽃에 얹혀 살아가는 새들의 존재가 무한한 일깨움의 지혜를 주는 메시지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처럼 오늘의 삶을 위한 잠언적인 메시지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첫 연은 자연현상의 식물과 새 등에 신앙의 삶이 육화(肉化)된 성서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제2연은 마태복음 6장 34절을 재구성해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한다. 첫 연은 산에 서식하는 식물과 나무, 새를 통해 바른 삶의 길을 일깨워 준다. ‘진달래꽃’은 불면증을 끌어안고 절뚝거리며 일어선다고 의인화했다. 절망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이다. 또한 우이동 근처인 수유리 4·19 묘지도 함께 떠올려 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고깔제비꽃은 삼각산의 이슬을 머금고 태고적인 생기를 품었다고 형상화했다. 그래서 풍상에도 꺾이지 않고 시리도록 투명한 미소를 머금었다. 70년대의 성지처럼 여겼던 삼각산의 이슬을 머금었으니, 태고적인 생기를 품었다고도 볼수 있다. 풍상에도 꺾이지 않은 꽃의 미소는 시리도록 투명할 수밖에 없다. 잡초는 이름도 얻지 못한 채로 끈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옥토로 가꾸는 땀방울을 기억하도록 일깨운다. 바람에 의하여 암석이나 지대가 침식되지만, 농부의 땀방울은 침식을 막아주고 옥토로 가꾸기 때문이다. 곤줄박이나 접동새는 나무와 풀꽃에 얹혀 살아가는 것은 공동체적인 삶의 길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고, 이러한 삶을 지닌 피조물은 감사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풍족하게 주셨기 때문이다. 제2연은 마태복음 6장 34절인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란 구절을 시적인 발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첫 행인 “그러므로”는 첫 연의 잠언적인 메시지를 구체화시키고 전환시키기 위한 방법의 구절이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란 구절의 ‘괴로움’은 인간이 감내(堪耐)하기 힘든 고초와 역경을 뜻한다.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을 의미한다. ‘그 날에 족하니’란 그날에 주어진 것은 그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지니라”란 구절은 아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않은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에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 하면 새로운 은혜를 입어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하였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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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9] 오늘의 삶을 위한 잠언 - 김석림의 「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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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8]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 양효원의 「어느 한 순간에」
- ▲ 시인 최규창 어느 한 순간에 머어먼 옛날부터 저를 아신 듯 저도 모르는 저를 아신다는 듯, 무척 익숙하신 다정하심으로 저에게 말을 걸어 오시네요 울게 하시고 웃게 하시고 버리게 하시고 세우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품게 하시네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바람결 따라 나뭇잎이 살랑대듯이 저의 심장을 부비시며, 오늘도 저와 함께 사시네요 -양효원의 「어느 한 순간에」의 전문 이 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심을 형상화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의 섭리에 의한 삶임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음을 깨닫도록 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다. 인간과 자연의 세계가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와 붙드심에 힘입고 있다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우주와 인간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연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나눈다면 3개 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연은 1행부터 5행, 둘째 연은 6행부터 8행, 셋째 연은 9행부터 마지막 행까지이다. 첫째 연의 1행인 “어느 한 순간에”란 구절을 임의로 구분한 각 연의 첫 행에 삽입할 경우에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인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스스로가 깨닫기 때문이다. “머나먼 옛날부터 저를 아신 듯 / 저도 모르는 저를 아신다는 듯, / 무척 익숙하신 다정하심으로 / 저에게 말을 걸어 오시네요”란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특히 “머나먼 옛날부터 저를 아신 듯 / 저도 모르는 저를 아신다는 듯”이란 구절은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떠올린다.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인생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섭리와 영원한 지혜의 계획하심 아래 놓여 있었음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또한 “무척 익숙하신 다정하심으로 / 저에게 말을 걸어 오시네요”란 구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섭리하고 계심을 깨닫게 한다. “울게 하시고 웃게 하시고 / 버리게 하시고 세우게 하시고 / 용서하게 하시고 품게 하시네요”란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표현했다. 이 세상에는 상반(相反)되는 두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외없이 작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뜻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도록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 사랑의 이름으로 / 바람결 따라 나뭇잎이 살랑대듯이 / 저의 심장을 부비시며, 오늘도 / 저와 함께 사시네요”란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나타냈다. 우리의 삶과 활동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사랑이다. 창세기 26장 28절에서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란 구절을 연상시킨다. 이 시에서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의 능력을 제한받지 않고, 완전하게 행하신다. 무슨 일이 든지 못하는 일이 없고,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능력의 소유자이다. 자신의 능력을 제한받지 않고 완전하게 행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다 이루시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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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8]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 양효원의 「어느 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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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7] 낮은 자세의 겸손한 신앙 - 홍계숙의 「죄인」
- ▲ 시인 최규창 지난 사순절 의롭게 살겠노라 성찬에 참여했지만 뒤돌아 보니 입을 열어 고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믿음의 바구니 열매있다 한들 당신 앞에 내어놓 기엔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죄인」의 전문 홍계숙의 「죄인」은 화자인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한 시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신앙의 삶을 고백했다. 순수하고 겸손한 신앙에서 비롯된 참회하는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그 죄인임을 사유(思惟)하도록 일깨워 준다. 성경에서 죄인을 판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이시다(창세기 13장 13절). 이는 도덕적 윤리적인 죄를 범한 자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죄,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가르켜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시에서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기준의 죄인보다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치부해 버린 순수한 신앙에서 연유(緣由)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하고 낮은 신앙인의 자세로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1연은 사순절에 참여한 성찬식은 지금까지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의롭게 삶을 영위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사순절에는 누구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을 회상하면서 보낸다. 이 기간에는 참회와 금식으로 지키고, 구제와 경건훈련으로 보내기도 한다. 이 기간에 갖는 성찬식은 예수의 십자가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이때에 나눈 떡은 주님의 몸을, 포도즙은 주님의 피를 기념한다. 이 의식에서 참회를 통해 죄인이었던 스스로는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난 사순절/의롭게 살겠노라/성찬에 참여했지만”이란 구절은 의롭지 못했던 스스로를 참회하고 의롭게 살겠다는 결심으로 성찬식에 참여했다고 고백한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간구, 신앙의 삶에 대한 다짐이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했지만”이란 구절은, “의롭게 살겠노라”란 다짐을 지키지 못함에 대한 회개가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제2연에서 구체화된다. 제2연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한 삶이다. 1연의 마지막 행인 “성찬에 참여했지만”이란 구절에서 주는 망설임의 여운과 “되돌아 보니”란 구절에서 죄인의 삶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입을 열어/고할수 없”을 정도의 죄인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죄인된 자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것은 순결한 마음, 그리고 진실한 삶에서 생성(生成)된 고백이다. 일상의 생활속에서 거짓과 허식(虛飾)이 없는 삶이었음을 보여 준다. 제3연은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신앙적인 삶에 대한 결과를 ‘부끄러운 것뿐’으로 함축해 표현했다. “믿음의 바구니 열매”는 신앙적인 삶에 대한 결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뿐”으로 스스로 자신을 책망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열매를 내어놓기에는 부끄러운 것뿐으로 치부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꾸짖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이 먼저 책망하기 전에 스스로 자책하는 회개었음을 유추(類推)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바구니 열매있다 한들”이란 구절처럼,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다가서는 신앙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이 시는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 신앙의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의 겸손한 삶에서 비롯되고 있다. 신앙인이 지녀야 할 모습으로 승화시켰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의 순수한 삶을 지녀야 한다고 일깨워 준다. 특히 간결한 이미지와 함축된 메시지는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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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7] 낮은 자세의 겸손한 신앙 - 홍계숙의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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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6]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한 간구 - 김행숙의 「새 아침에」
- ▲ 시인 최규창 지혜의 근본을 찾으러 나 여기 왔습니다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속사람의 비밀을 날로 새롭게 하시고/당신 닮은 사랑 내게서 피어나게 하소서 간구하옵기는 오로지 당신의 온유 그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새 아침의 소망을 간절히 말씀드리나이다 —「새 아침에」의 전문 김행숙의 「새 아침에」란 시는 새해의 아침에 드린 기도이다. 성숙한 신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이다. 이 삶을 위해 ‘지혜의 근본’을 찾기 위해 하나님 앞에 왔다고 고백한다. ‘속사람의 비밀’을 새롭게 하고, ‘당신 닮은 사랑’과 ‘당신의 온유’를 지니도록 간구한다. 성숙한 신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새해의 소망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삶에서 비롯된 고백과 간구이다. 이 기도는 고백과 간구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의 근본을 찾으러/나 여기 왔습니다/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새 아침의 소망을/간절히 말씀드리나이다”란 구절은, 하나님 앞에 스스럼없이 털어 놓은 고백이다. 그리고 “속사람의 비밀을 날로 새롭게 하시고/당신 닮은 사랑 내게서/피어나게 하소서”나, “간구하옵기는/오로지 당신의 온유/그뿐”이란 구절은,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고백을 통해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고, 간구하므로써 응답이 온다는 견고한 믿음을 보여 준다. 제1연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거듭난 삶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지니도록 간구한다. 바른 신앙인의 삶을 소망한 것이다. “지혜의 근본을 찾으로/나 여기 왔습니다”란 구절은 태초적 부터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왔음을 고백한다. 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바탕, 즉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인 태초의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속사람의 비밀을 날로 새롭게 하시고”란 구절의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심령(에베소서 3장 16절),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새사람(에베소서 4장 24절)을 의미한다. 또 “당신 닮은 사랑 내게서/피어나게 하소서”란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스스로가 지닐 수 있도록 간구한 것이다. 또한 “피어나게 하소서”란 구절은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닮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신적(神的)인 사랑이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요한일서 4장 10절). 스스로에게서 피어날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간구한 것이다. 제2연은 이 세상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닐 수 있도록 간구한다. “당신의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 ‘온유’는 부유하고 거만한 사람들에 반대되는 진실로 경건한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의 태도나 타인에게 보이는 태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온유’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묘사하는 데서 완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 시는 하나님 앞에 새해의 소망을 간구한 것이다. 주변과 가정, 물질적 요구의 외적인 삶에 대한 간구가 아니다. 내적인 성숙을 위한 간구로 성숙한 신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습을 보여 준다. 바른 신앙인의 자세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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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6]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한 간구 - 김행숙의 「새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