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문화/여성Home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
[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
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
[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
-
[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
-
[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
-
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
-
[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실시간 문학 기사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4] ‘하나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 - 김태규의 「편지」
- 나에게 온 편지는 그이의 말씀 다사로운 미소파아란 하늘에 피어오른 꽃구름처럼 내 눈길을 황홀케 하시더니 그이의 말씀은 언제나 나긋한 입김 오롯이 스며오는 사랑의 속삭임인가 호심(湖心)에 파도가 인다 어느 날엔가 그이의 말씀은 내 영혼의 잠을 깨우는 우룃소리가 되어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시더니 그이의 말씀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예리한 칼 아픔을 이긴 자에게 평화를 주시는 복된 소식이었다 편지는 언제나 새롭다. - 「편지」의 전문 김태규의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인 편지로 인식해 형상화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겐 기쁜 소식인 복음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오늘의 모두에게 보낸 기쁜 소식의 편지이다. 날마다 읽는 성경은 하나님이 보낸 편지를 읽는 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쁜 소식과 함께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기 때문에 편지로 인식한다. 이 「편지」는 기독교시의 전형을 보여준 역작이다. 재치있는 시적 발상이나 전개, 그리고 무리없이 펼친 이미지는 기독교시의 극치를 보여준 시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고, ‘사랑의 속삭임’과 ‘평화를 주시는 복된 소식’인가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그것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함몰된 신앙인의 고백이다. 날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는 편지이다.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되었다. 5연을 제외한 4연까지는 ‘그이의 말씀’이 전제된 후, 시적 이미지가 전개된다. 각 연의 시적 구성을 지탱한 중심적인 기둥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 시의 핵심적인 구절이다. 이 ‘그이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이의 말씀’은 ‘다사로운 미소’, ‘나긋한 입김’, ‘사랑의 속삭임’, ‘내 영혼의 잠을 깨우는 우룃소리’,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예리한 칼’, ‘평화를 주시는 복된 소식’으로 형상화했다. 제1연과 제2연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의 복음’임을 일깨워 준다. 제1연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화자인 나에게 온 편지이다. 그것은 ‘다사로운 미소’로 파아란 하늘에 피어오른 꽃구름처럼 황홀케 한다고 감탄한다. 황홀할 정도로 매혹적인 말씀, 즉 다사로운 미소를 지닌 편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제2연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긋한 입김’이며, ‘오롯이 스며오는 사랑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호수에 이는 파도처럼 ‘나긋한 입김’과 ‘사랑의 속삭임’으로 화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것은 ‘황홀’의 경지에 이르도록 감동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가치성을 표현했다. 제3연과 제4연은 하나님의 말씀이 화자에게 ‘가르침’과 ‘깨우침’, 그리고 ‘치유의 도구’임을 표현했다. 제3연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날엔가, 내 영혼의 잠을 깨우는 우룃소리가 되어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가르침과 깨우침을 준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내 영혼의 잠을 깨우며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함몰된 화자의 신앙고백이다. 제4연은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예리한 칼이며, 이 아픔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복된 소식임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못된 스스로를 회개하고, 치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치유의 도구로 평화의 복된 소식임을 고백했다. 마지막 연은 “편지는 언제나 새롭다”란 한 줄로 화자의 느낌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황홀하게 하며 마음속 깊이 감동을 주고, 무지의 잠을 깨우며 치유의 도구이다. 그래서 언제나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형상화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의 생명성을 집약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4] ‘하나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 - 김태규의 「편지」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3] 예수를 맞는 신앙인의 자세 - 석용원의 「종려」
- 사철 푸른 너를 심었노라 애타게 그리움이 스미여 쌓여 향방을 잃은 내 가슴 뜰에 노란 네 꽃을 어여삐 피워 연상 기다리노라 님만 기다리노라. 먼 훗날도 아닌 어느 날 구비치는 왕의 대열이 홀연히 뜰을 메워 내 앞뜰에 흐를 적에 잎을 깔고 비단처럼 너를 깔고 가지를 들어 횃불처럼 너를 들어 호산나——— 호산나——— 목쉬게 터지게 외칠 날 내게 있어 아아 종려 사철 푸른 너를 심었노라. - 「종려(棕櫚)」의 전문 이 시는 오늘의 삶 속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의 의미와 상징을 형상화했다. 종려나무가 주는 성서적 상징성을 이 시의 바탕에 두고, 예수의 재림을 갈망한 신앙적인 고백시이다. 예수를 기다리는 열렬한 갈망의 신앙이 승화되었다.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인 구성은 예수를 기다리기 위해 준비하는 성숙된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재림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성숙한 신앙의 결과이다. 제1연은 내면적인 신앙의 표현이다. 화자인 자기 가슴의 뜰에 푸른 종려나무를 심어 놓고 예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애타게 그리움이 스미어 쌓여”란 구절은 예수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다. 그것은 “노란 네 꽃을 어여삐 피워”와 “연상 기다리노라”란 구절에서 그리움의 절정을 볼 수 있다. 사철 푸른 종려나무를 심어 놓고 노란 꽃까지 피워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리고 ‘연상’이란 언어를 통해 단시적인 마음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의 마음을 표현해 준다. 제2연과 3연은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된 마음이다. 먼 훗날도 아닌 어느 날 재림할 예수가 앞뜰을 지날 때에 종려나무 잎을 비단처럼 깔고 가지를 횃불처럼 들어 환영하겠다는 마음의 의지이다. ‘먼 훗날’도 아닌 ‘어느 날’은 이미 성숙한 신앙으로 예수의 재림을 예측하는 시기이다. 예수의 재림은 모든 정황으로 ‘먼 훗날’이 아니라, ‘어느 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신앙적 예측이다. 또한 ‘내 앞뜰’은 내면적인 성숙한 신앙의 표현이다. 1연의 사철 푸른 종려나무를 심은 ‘내 가슴 뜰’이다. 그리고 3연은 재림한 예수를 맞이하는 자세이다. 종려나무 잎을 ‘비단처럼’ 깔고나, 종려나무 가지를 ‘횃불처럼’ 들고서 맞이한다. ‘비단처럼’이나 ‘횃불처럼’이 주는 이미지가 예수를 귀한 존재로 부각시켜 준다. 제4연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목이 터지게 ‘호산나’를 외치던 승리의 그때를 연상시켜 준다. 화자는 그때처럼 ‘호산나’를 목이 쉬고 터지게 외치며,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서 가슴의 뜰에 사철 푸른 종려나무를 심어놓았다고 고백한다. 이 시는 어느 날에 재림할 예수를 기다리고, 맞이할 성숙한 신앙인의 마음을 노래했다. 그 기다림은 가슴의 뜰에 종려나무를 심어놓은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특히 예수가 재림할 때에 종려나무 잎을 비단처럼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횃불처럼 들고서 맞이하겠다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로 형상화했다. 이러한 그의 첫시집인 〈종려〉의 대부분의 시들은 가장 순박한 믿음의 자세에서 기다림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제2시집인 〈잔〉은 고뇌자로서의 열도하는 자세이다. “이 잔을 나에게서 면케 하소서/나는 방초동산 사슴되어 뛰놀고 싶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마신 잔을 그가 마신다는 동행자로서의 결의를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그 자체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려는 몸부림과 고통 속에서 고민하고 얻는 귀중한 유산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3] 예수를 맞는 신앙인의 자세 - 석용원의 「종려」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삶 - 임인수의 「서시」
- 괴로움과 슬픔이 다하는 그날 나는 백지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외로이 무심은 불타올라 임의 품에 안기는 버릇 모습은 말씀이 되고 글자가 되고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림이어 임은 항상 나를 부르시도다. - 시집 〈땅에 쓴 글씨〉의 「서시(序詩)」 전문 임인수는 1955년 〈땅에 쓴 글씨〉(새사람사 간행)란 첫 시집을 발간했다. 이 시집에는 37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시」는 이 시집의 첫 장에 편집되어 시집 전체의 시세계를 암시해 준다. 이 「서시」 는 기독교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습과 지향하는 삶의 지표를 추구했다. 이 시의 ‘임’은 삶 속에 나타난 감상적 대상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이다. 즉 하나님을 ‘임’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것은 ‘임’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가까운 관계로 설정했다. 특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나, ‘신’이란 어휘는 시어로서는 관념적인 시어이다. 이 어휘를 ‘임’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감정이 어색함이 없도록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를 개척했다. 이 시는 3연과 마지막 연 뒤에 작은 활자로 4행의 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1, 2, 3연을 감상하기에 앞서 마지막 부분의 4행을 이해해야만, 그 맥락에서 시 전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4행은 “보이지 않는 손길에/이끌림이어/임은 항상 나를/부르시도다”라고 적고 있다. 전형적인 신앙인의 삶에 대한 고백이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이끌리어 살아왔고, 그는 나를 부르고 있다고 고백한다. “임은 항상 나를/부르시도다”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삶이다. 이 「서시」 의 본문 말미에 있는 귀절은, 시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출발점의 역할을 감당한다. 제1연은 만나고자 하는 ‘임’, 즉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의 ‘백지’상태를 표현했다.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괴로움과 슬픔이/다하는 그날”로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날에는 “나는 백지로/돌아가리라”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육체적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괴로움과 슬픔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관문이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백지’상태,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의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을 지니겠다는 다짐이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순수한 모습 그 자체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제2연은 제1연의 순수한 신앙의 삶을 심화시키고 있다. 즉 신앙적인 삶에 대한 표현이다. “이렇게 외로이/무심은 불타올라”는 현실적 삶에서 벗어나, “나는 백지로/돌아가리라”란 다짐의 신앙을 승화시킨 구절이다. 그래서 신앙의 삶을 “임의 품에 안기는 버릇”으로 표현했다. 신앙의 삶은 ‘임’,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그의 품에 안기는 삶이기 때문이다. 제3연의 “모습은 말씀이 되고/글자가 되고”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을 떠올리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중략”(14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습 자체가 ‘말씀’이 되고, ‘글자’가 되는 삶을 표현했다. 그것은 신앙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체가 된 경지, 즉 영적 자각의 상황이다. 이 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했다. 육체의 죽음 이후 ‘백지’상태로 돌아가고, 일상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버릇, 그리고 “모습은 말씀이 되고/글자가 되고”란 신앙의 깊은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 삶은 신앙의 육화, 즉 신앙의 생활화에서 비롯되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삶 - 임인수의 「서시」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1] 사랑의 실천위한 희생정신 - 황금찬의 「촛불」
-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 「촛불」 의 전문 황금찬(黃錦燦)의 「촛불」은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형상화했다.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 희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 시이다. 촛불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존재한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몸을 태우는 촛불의 희생으로, 누구나가 밝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촛불의 희생은 순수한 사랑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촛불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촛불의 희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신의 몸을 드렸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이 시는 촛불, 그 자체를 생명체로 인식하고 기독교정신의 시각에서 형상화했다. 촛불의 생명은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데에 있다. 즉 촛불의 생명, 산다는 것은 생명의 연소이며, 그 연소가 순수하고 온전한 것일수록 아름다운 희생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사상에서 비롯된 형상화의 결과이다. 특히 촛불의 존재, 그 생명의 가치성을 통해 사랑의 실천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제1연은 촛불의 존재, 제2연은 촛불의 임무, 제3연은 촛불의 운명, 제4연은 촛불의 정신을 형상화했다. 제1연은 촛불의 ‘시작’과 ‘종말’을 노래하고 있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은 촛불의 탄생이며 출발이다. 그것은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출발하는 것이다”고 생명성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즉 촛불의 생명은 심지에 불을 붙이면 시작되고, 그 생명은 종말인 죽음을 향해 출발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제2연은 촛불의 임무, 즉 책임과 역할을 노래하고 있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밝음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촛불의 희생에서 연유한다. “어두움을 밀어내는/그 연약한 저항”은, “누구의 정신을 배운/조용한 희생일까”라고 물음을 던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희생정신을 배운 촛불의 희생을 극대화시켰다. 이 시에서 ‘누구’로 지칭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촛불의 희생은 조용한 희생이며, 그 조용한 희생은 댓가 없는 희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3연은 촛불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촛불은 초 한자루의 한정된 생애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시간의 국한”인 것이다. 이러한 촛불의 생애를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고 단정하고 있다. 촛불의 운명, 즉 “존재할 때/이미 마련되어 있는/시간의 국한을/모르고 있어”라고 일깨워 준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제4연은 촛불의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그 정신은 희생이다. 촛불의 운명인 “한정된 시간”을 지니고 있다. 어둠 속에서 밝음을 주기 위해 “불태워 가도/슬퍼하지 않고”라고 희생정신을 형상화했다.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춤추는 촛불-.”은 촛불의 아름다운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촛불의 ‘한정된 시간’인 ‘순간’을 아름다운 꽃으로 향유하는 삶이다. 그 삶은 아름다운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 시는 촛불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고, 순수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촛불은 성서적으로 희생의 제물이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렸던 것처럼, 촛불의 희생으로 우리들에게 밝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1] 사랑의 실천위한 희생정신 - 황금찬의 「촛불」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0]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소망 - 김찬양의 「보이는 길
- 눈물날 때 하늘 보면 바람 길 보이고 볼을 비비며 다가와서 하늘소식 전해요 기다리고 참고 있으면 무지개가 길되어 꿈망울을 가득 싣고 다가오지요 기쁠 때에 하늘 보면 분홍 길 보이고 다웃지 못한 함박 웃음 뭉개구름 되어요 몽실 몽실 기쁜 꽃망울 휘파람 소리되어 가슴마다 소망의 빛 비춰주어요 - 「보이는 길」 의 전문 김찬양의 동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특징을 지닌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모습을 지향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 위안과 희망,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어린이다운 마음의 상태에서 관찰하고, 포착한 동심의 세계를 시적 표현 속에 담아내는 것도, 그의 독특한 시적 발상이다. 「보이는 길」은 ‘하늘’이 주는 소망의 길을 형상화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하늘’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에는, 우리 조상들이 하늘을 향해 빌었다.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계속되면 기우제를 지내고, 가을에 풍년이 들면 감사의 풍년제를 지냈다. 그리고 가정마다 문제가 생기면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하늘을 향해 모든 문제를 아뢰고, 위안과 소망의 응답을 간구했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의 행위였다. 하늘에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초월할 수 있는 신이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은 상징적이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다. ‘하늘 보면’은 기도의 행위이다. 하늘을 보면 ‘보이는 길’이 있다. 기독교 신앙인들만이 볼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한마디로 집약하면, ‘구원’의 길이다. 그래서 ‘하늘 보면’이란 행위의 그 자체는,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슬플 때나 기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인의 삶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슬플 때나 기쁠 때에 위안과 소망을 준다. 화자는 눈물 날 때와 기쁠 때에 하늘 향해 기도한다. ‘눈물이 날때’와 ‘기쁠 때’의 기도의 모습에서 응답되는 상황을 전개했다. 눈물이 날 때, 즉 슬플 때에 하늘을 보면 바람의 길이 보인다. 그 바람의 길을 통해 기쁜 소식을 전해 온다. 그 눈물을 참고 견디면 무지개가 길이 되어 꿈을 가득 담아준다. 그것은 희망과 소망이다. 그리고 기쁠 때에 하늘을 보면 분홍의 길이 보이고, 다 웃지 못한 웃음이 뭉게구름이 된다. 그 뭉게구름은 기쁜 꽃망울과 휘파람소리가 되어 소망의 빛이 된다. ‘하늘소식’과 ‘무지개’, ‘꿈망울’과 ‘분홍길’, ‘함박웃음’과 ‘꽃망울’ 등이 위안과 소망을 가득 담아주는 이미지이다. ‘눈물 날 때’와 ‘기쁠 때’는 인간의 삶이다. 누구나가 이러한 일상사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기도생활로 극복한다. 눈물 날때는 간구의 기도를 하고, 기쁠 때도 감사의 기도를 한다. 기도를 통해 위안과 소망,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찬양의 시는 오늘의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되찾아 준다. 그의 시에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의 갖가지 나무와 꽃, 사물들이 등장하고, 그 자연물과 생활의 소재가 되어 동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러한 그의 시들은 정형시로의 묘미를 통해 적절한 음악의 노랫말이 되기도 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자연 친화성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인도해 준다. 또한 눈에 보이듯, 손으로 만져지듯, 지금 여기 앞에 서 있듯이, 생생하게 표현해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0]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소망 - 김찬양의 「보이는 길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9]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 소강석의 「눈물·1」
- 아직도 멈추지 않는 두 볼에 흐르는 눈물 당신과의 추억, 사랑, 기다림 홀로 기다리던 지상의 시간이 홀로 정원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쓸쓸하고 고독하였을지라도 당신을 가슴에 새긴 사랑이었다면 당신을 가슴에 품은 기다림이었다면 아픔과 고통을 넘어 슬픔의 파도를 지나 어렴풋이 보이는 희망의 수평선입니다 눈물은 이슬이 되고 꽃잎이 향기가 되어 당신께 날아갈 수만 있다면 이 밤 한 송이 분꽃이 되어 당신 가슴에 흩날리고 싶어요 - 「눈물·1」 의 전문 눈물은 슬픔이나 고통에 연유한다. 대부분 정신적인 감동이나 자극에 의해 비롯된다. 눈물을 흘린다는 그 자체는 진실된 표정의 행위로 간주한다. 이 세상 어느 곳도 눈물없는 곳은 없다. 또 눈물을 한번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눈물에 대한 기독교적 이미지는 참회의 모습을 떠올린다. 잘못에 대한 뉘우침, 즉 죄를 뉘우쳐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것은 참회의 기도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참회는 눈물없이 고백할 수 없다. 눈물이 없는 참회는 거짓된 행위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의 「눈물·1」은, 눈물을 ‘추억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 그리고 ‘기다림의 눈물’로 형상화한다. 눈물이 지닌 정신적 충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과 기다림으로 승화시켰다. 눈물을 통해 끝없는 사랑과 고독한 기다림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이나 사랑, 그리고 기다림은 눈물의 상승작용을 통해 눈물에 대한 가치성과 생명력을 확대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기다림의 절정은 눈물로 나타난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추억이나 깊은 사랑으로 인한 눈물, 그리고 멈추지 않는 눈물 속에서의 기다림은 최상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시의 첫 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노래한다. 눈물을 통해 획득한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을 확대시킨다. “아직도 멈추지 않는/두 볼에 흐르는 눈물”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다. ‘아직도’는 지금도 감격의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과거인 어제의 ‘추억’과 현재인 오늘의 ‘사랑’, 그리고 미래인 내일의 ‘기다림’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 눈물로 계속 진행되고, 추억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으로 지속된다. 제2연부터 4연까지는 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홀로 지내고 고독한 삶이 제2연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홀로 기다리던/지상의 시간이”나, “쓸쓸하고 고독하였을지라도”는 화자의 지나온 삶에 대한 표현이며, 고독한 기다림의 절정을 승화시킨 구절이다. 제3연이나 4연도 기다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가슴에 새긴 사랑이나 가슴에 품은 기다림은, ‘사랑’과 ‘기다림’의 지순하고 영원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다림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지나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희망의 수평선’으로 어렴풋이 보인다고 고백한다. 마지막 연은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의 눈물이 확산되고 있다. 눈물에는 추억과 사랑, 기다림이 그대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상승작용을 통해 이슬이 되고, 꽃잎이 향기가 된다. 또한 분꽃이 되어 주님께로 가고 싶다는 그리움이다. 깊은 밤에 눈물이 이슬이 되고, 꽃잎이 향기가 되어 한 송이 분꽃으로의 염원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러한 이 시는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기다림의 그리움을 승화시켰다. 눈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신앙적인 삶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이 그대로 표현한 신앙고백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9] 하나님과의 추억과 사랑 - 소강석의 「눈물·1」
-
-
문화선교연구원서 문화성경학교
- ▲ 문화선교연구원은 영화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어린이 문화성경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문화선교연구원(원장=백광훈목사)는 지난 6일 신촌 필름포럼(대표=성 현목사)에서 「해설이 있는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란 주제로 어린이 문화성경학교를 열고, 기독교 고전문학을 통한 신앙교육의 장을 열었다. 이번 어린이 문화성경학교는 8월 17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하며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영화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를 통해 어린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문화로 신앙심을 키우는 시간을 갖는다. 성경학교 관계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이 애니메이션 영화〈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로 우리 곁에 찾아왔다”며, “영화는 17세기 영국 작가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을 토대로 희망도, 기쁨도, 자비도 없는 멸망도시의 국경을 넘어서 천국도시를 찾아서 떠나는 크리스천의 이야기를 담았다. 율법언덕, 세속의 숲, 절망의 성, 허영시장, 죽음의 골짜기 등 진리를 향한 신앙인의 험난한 여정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볼거리와 의미 모두 잡았다”고 전했다. 이어 “필름포럼에서 상영하는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를 감상하고 준비된 영화가 모두 끝난 후에는 문화선교연구원 소속 전문가의 영화 해설을 통해 〈천로역정〉이 전해주는 신앙인을 향한 은혜와 진리,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어린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며, “성경학교가 끝난 후 영화를 가지고 신앙적인 교육을 통한 영화나눔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돕고자 〈무비톡가이드〉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번 성경학교를 통해 〈천로역정〉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많은 이들을 들을 수 있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문화선교연구원서 문화성경학교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8] 순수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 -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
- 그대의 눈빛 익히며 만남이 익숙해져 이제는 서로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이 거리에서 나, 그대만 있으면 언제나 외롭지 않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내 마음에 젖어드는 그대의 향기가 향기로와 내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만 안겨줄 것을 믿고 나도 그대 가슴에만 머물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우리 한가롭게 만나 평화롭게 있으면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우리 사랑의 배를 탔으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의 전문 용혜원의 시 속에 승화된 사랑은 지란지교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지초와 난초같은 향기로운 사귐의 사랑, 그리고 벗 사이의 맑고도 높은 사귐의 사랑에 대한 향기이다. 우리 모두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의 시들은 절망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다리를 놓고, 사랑의 꽃이 피어난 마을을 향한 동행의 노래이다. 깊은 산 속의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처럼, 맑고 청순한 목소리로 사랑의 관계를 만든다. 사랑의 마음이 샘솟도록 용기를 주고,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로 그리운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도록 일깨운다. 용혜원은 ‘사랑의 시인’이다. 사랑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사랑의 고뇌와 그리움을 노래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을 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열정과 그리움으로 성숙한 사랑에 이른다. 그 사랑의 대상은 ‘그대’이며, ‘당신’이다. 그대나 당신은 누구나가 정겹고 사랑스럽게 일컫는 대상이다. 화자인 나의 그대이며, 나의 당신이다. 화자인 ‘나’를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 객관화시키는 것도, 깊은 감동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준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승화시켰다. 아름다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추구했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란 맑고 순수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1연은 서로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관계를 고백한다. 그것은 그대와의 만남으로 사랑에 대한 눈빛을 익히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에 대한 관계를 구체화했다. 제2연과 3연은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고백한다. 쓸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거리에서도, 그대만 있으면 언제나 외롭지 않음을 실토한다. 그리고 3연에서는 함께 있으면 그대의 향기가 향기로워 마음이 따뜻함을 고백한다. 1연과 같이 깊은 사랑의 관계를 구체화했다. 제4연은 무르익어 가는 사랑의 바람이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믿음을 승화시켰다. 그래서 그대는 내 가슴에만 안겨줄 것을 믿고, 나도 그대 가슴에만 머물고 싶다는 바람이다. 제5연은 사랑의 만남으로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진다. 사랑하기 위해 온갖 말잔치나 꾸밈의 어떤 계산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가롭게 만나 평화롭게 있으면,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진다는 사랑의 관계를 승화시켰다. 마지막 연은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사랑의 배’에 승선했음을 단정한다. 이 지상에서의 삶, 즉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세상의 바다를 향해 떠나고 싶은 소망이다. 이러한 이 시는 순수한 사랑의 관계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사랑의 길 위에서 성숙한 사랑에 이르는 관계를 보여 준다. 한 폭의 수채화로 그린 아름다운 사랑의 풍경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8] 순수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 -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2」
-
-
기독인문학연구원서 도서세미나
- ▲ 기독인문학연구원은 엔도 슈사쿠의 저서를 통해 서구에서 수입된 종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교인 개인이 이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양적 관점 접근통한 그리스도와 기독교 이해를 조명 “그의 문학은 일본인으로서 울수 있는 예수를 그려낸다” 기독인문학연구원(대표=고재백교수)은 지난달 24일 역삼동 크리스찬살롱에서 「사해 부근에서 ; 예수의 흔적을 좇아서」란 주제로 도서 세미나를 열고, 일본 기독교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신앙관과 내적 고민을 조명했다. 이날 세미나는 김승철교수(난잔대)가 엔도 슈사쿠의 저서 〈사해 부근에서〉를 가지고 엔도의 문학관과 신앙적 정체성, 그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관해 강의했다. 김교수는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문학을 통해 인간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고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 발견한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했다”며, “인간이란 무엇이고 내면에서 만나게 되는 궁극적인 실존인 하나님이 누구인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풀어나갔다”고 전했다. 또한 “그의 소설 속에는 미츠라는 이름의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반대로 읽으면 일본어로 죄를 뜻하는 ‘츠미’가 된다”며, “엔도는 독자가 자신의 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로서 여성의 삶과 모습을 수려하게 꾸몄다”고 말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통해 가쿠레키리시탄 박해를 조명했다고 밝힌 김교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을 수입하고자 서구 문명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후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밀까 걱정하면서 키리시탄을 탄압하게 된다”며, “당대 많은 키리시탄들은 막부의 지독한 박해를 피하고자 살아있는 동안 매해 예수가 그려진 나무판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엔도는 그들의 모습을 돌이켜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앙을 저버린 이들을 용서하셨는지 물으며 전국시대 소설을 지었다”며, “관원들의 감시가 소홀해 키리시탄이 많이 숨어살던 나가사키에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건립된 것은 평소 그가 지녔던 문학관을 반영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신앙의 자각을 지니지 않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던 엔도는 평생 자신에게 신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했다고 역설한 김교수는 “엔도는 자신이 받은 세례를 비자발적 세례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며, 이러한 고민은 이러한 고민은 〈사해 부근에서〉의 주인공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며, “그는 필생 과제로서 결단 없이 받아들인 신앙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더불어 일본인인 자신에게 서양의 기독교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숙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엔도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믿고는 있지만, 동양인인 자신의 정체성으로 맞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벗을 수 없는 기성복으로 이를 표현한 엔도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으로 옷을 수선하듯 일본인인 자신에게 맞는 예수의 모습을 찾고자 고심했다”며, “전통과 교리에서 가르치는 예수가 아니라 자신만의 예수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엔도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김교수는 “예수를 찾고자 이스라엘을 찾아간 주인공 ‘나’의 모습은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이를 위해 대신 목숨을 내놓은 코바르스키 신부의 흔적을 좇는 일과 오버랩된다”며, “작품은 ‘내’가 예수를 좇는 것이지만, 예수께서 내 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흔적을 좇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렇기에 엔도 슈사쿠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찾고자 나아가지만, 그 여정은 예수 자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찾아오셨던 발자취가 아니었는가 하는 역설을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고 마무리했다.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기독인문학연구원서 도서세미나
-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7] 하나님과 혼연일체된 신앙의 삶 - 김순권의 「금을 긋습니다」
- 점, 점, 점을 놓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호흡으로 이어지는 은총입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따사로운 햇살로 비추이는 꿈속에서도 그리움으로 사랑을 닮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이제는 세초부터 세말까지 새로 놓는 이 점과 선으로 내가 당신께로 당신이 내게로 오고 가는 금을 긋습니다. 멍드는 가슴일랑 보드라운 그 손으로 쓰다듬기를 고동치는 점으로 피가 돌게 다독거립니다. 무거운 짐으로 힘겨워 어깨가 눌려 지칠 땐 당신께로 향하는 기도로 희망이 솟구칠 선을 긋습니다. - 「금을 긋습니다」 의 전문 이 시는 온전한 ‘신앙의 삶’을 승화시킨 노래이다. 화자인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앙적인 삶으로 연결된다. 바른 신앙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혼연일체가 되는 삶을 영위한다. 그것은 온전한 신앙의 삶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시는 ‘금’과 ‘점’, 그리고 ‘선’이란 명사를 시어로 사용한다. 화자의 ‘신앙의 삶’을 ‘금’과 ‘점’, 그리고 ‘선’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금’은 ‘선’이다. ‘금’은 긋거나 접거나 한 자리로, 한계선을 정할 때에 사용된다. ‘선’은 수학에서 ‘점’의 이동에 따라 생기는 도형이다. 여러 개의 ‘점’이 이어져 ‘금’이 그어지고 ‘선’을 만든다. 그래서 그 ‘금’은 화자가 하나님을 연결하는 ‘선’이다. 이 시의 제목인 「금을 긋습니다」는 화자의 분명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분적인 상황의 삶 속에서 신앙의 삶을 선택한 결과로 표현했다. ‘긋습니다’란 결단의 의지로 한계선을 그은 것을 의미한다. 즉 세상적인 삶이 아닌 신앙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선언한 표시이다. 첫 연은 이 시를 구성하는 ‘점’과 ‘선’을 구체화한다. 1행인 “점, 점, 점을 놓으면서”는 선이 되는 과정이다. 2행과 3행인 “하나씩 하나씩 호흡으로 / 이어지는 은총입니다”란 구절은 선을 형상화했다. “하나씩 하나씩 호흡으로”도 점의 연속이고, 점이 선으로 연결된 “이어지는 은총입니다”고 표현되었다. 제2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여러 개의 점이 이어져 선으로 관계된 하나님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고, “따사로운 햇살로 비추이는” 관계로 발전되었다. ‘따사로운 햇살’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는 ‘사랑’이나, ‘은총’, 그리고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꿈속에서도 그리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3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시켜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새해 첫 날부터 한 해의 마지막인 섣달그믐까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켜 가고 있다. “새로 놓은 이 점과 선”은 어제가 아닌 오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매일 새로워지는 신앙의 삶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했다. 그 관계는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제4연은 화자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섭리를 형상화했다. “멍드는 가슴일랑”이란 구절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상처를 함축시켰다. ‘멍드는’이란 시어는 ‘멍들다’의 자동사로 타의에 의해 깊은 상처를 지닌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드라운 그 손’은 하나님의 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마지막 연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표현했다. 일상의 삶 속에서의 힘겨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로 의지하고 있다. ‘무거운 짐’이나 ‘힘겨워’, 그리고 ‘어깨가 눌려 지칠 땐’은 일상의 삶에 대한 모습이다. 그 삶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의 삶이며, 희망의 삶이 된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 출판/문화/여성
- 문학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7] 하나님과 혼연일체된 신앙의 삶 - 김순권의 「금을 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