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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2)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
        이하에선 <에리직톤의 초상>의 그 질적 변화 문제에 대하여 논의해 보기로 하련다. 이러한 논의는 원작 중편과 개보작 장편 상호간의 비교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일이다. 이에 우리는 먼저, 1981년 발표된 원작 중편이 별로 대중의 눈길을 끌지 못한 채 외면당하다시피한 그 주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한마디로 말하면, 원작 중편은 작가의 종교사상, 곧 기독교적 세계관을 피력하는 일종의 토론장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어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또는 현학적인) 소설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그런 자리에 위치한 작품이었다. 그러므로 장편 제2부의 새로운 등장인물인 신태혁, 즉 이 소설의 ‘충격 인자’로서 출현하기 시작한 새 인물 등장 이전의, 일종의 미완성작에 해당하리라고 보이는 원작만으로써는 독자 대중의 관심도, 비평가의 호응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원작 중편은 마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비평가들로부터 받았던 평가 그 이상을 뛰어넘기가 어려웠다고 보겠다. 아니, 일단은 스토리 전개 면에 있어서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는 중편 <사람의 아들>보다는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스토리의 그 미완의 성격 때문에서도 비교적 더 혹독한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작 중편의 ‘장편으로의 변형’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의 진입이란 문제를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제1부의 만연체, 화려체 중심의 문체가 제2부에 들어와서 간결체, 건조체 형식의 직설적 문체로 바뀐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결과, 이런 문체의 변화로 작품내(특히 제1부)의 정태적 분위기가 후반(제2부)에 들어와 역동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지적될 만하다. 물론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제2부의 상황(장면) 변화가 결과적으로 그 문체의 변화를 동시에 초래했다고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체의 변화를 수반한 제2부의 상황 변화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는 바로 신태혁이란 인물의 새로운 등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신태혁의 새 출현으로써 이 소설의 상황은 급전한다. 제1부에 있어서의 수직·수평 관계의 종교적 논의라고 할 일종의 관념적 유희 분위기가 제2부에 이르러 실천적 참여의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되는 것도 신태혁의 출현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신태혁은 이 소설에서 하나의 큰 ‘충격 인자’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가 수행한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가 시위의 주동자로 모모 건물들에 방화를 주도하거나 노동운동가로서 일선 지휘를 맡은 일이었다기보다는, 이 소설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女性] 정혜령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충격 인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그 점일 것이다.  정상훈 교수의 딸로서 철두철미한 완고성을 지닌 보수주의적 신앙인 상을 결코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정혜령에게 ‘새로운 존재’(new beings)로의 변화를 가져다준 일, 이것이 곧 신태혁의 역할 가운데서는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정혜령의 변화가 신태혁의 수평축으로 완전히 수렴된 것은 결코 아닌 채, 그녀는 그녀 나름의 제3의 길로 그 자신의 행보를 내딛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옛 애인 혜령을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하는 화자 ‘나’(김병욱)의 점진적인 변화까지 예고해주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면, 그런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촉진시킨 충격적 요인이 바로 신태혁이란 점에서 그의 역할은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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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8
  • [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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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9
  • [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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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7
  • [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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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4-09-30
  • 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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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4-06-25
  • [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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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4-06-21

실시간 문학 기사

  • 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5) -황순원의
    우리는 샤머니즘에 대하여 취한 자세를 놓고 세 등장인물들에 대해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결의 강도로 보면 그 순서는 민구, 준태, 성호의 역순(逆順)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즉 민구는 대결이 아니라 오히려 포용 쪽이고, 준태가 다소 중도적이라고 한다면, 성호는 그 대결의 강도가 가장 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세 인물들 가운데 유랑인 근성을 제일로 대표할 사람은 민구이고, 그 다음이 준태이며, 성호만은 비유랑적인 인물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판단은 작가가 샤머니즘을 유랑성의 대표적 요인으로 설정했다는 전제를 놓고 볼 때 당연한 결론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약간 미심쩍은 것은 민구와 준태 두 사람 중에서 전자(민구)를 가장 유랑적인 인물로 잡았다는 앞서의 평가에 대한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얼른 보아 창애, 지연, 돌이엄마 등 세 ‘여성 편력’과 서울, 강원, 전북 등 세 ‘지역 유랑’으로 보아 가장 유랑적인 인물로 보이는 이가 준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세 사람들 중 가장 유랑적인 인물로 준태가 아닌 민구를 택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준태의 그러한 면은 외형적(표면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임에 반하여, 민구의 그것은 내면적(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유랑성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논의 결과, 우리는 다음의 결론도 내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성호, 준태, 민구의 이러한 서열(?)은 곧 기독교도로서의 자격(자질)의 서열과도 일치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성호를 1번순위로 잡을 때 나머지 둘 중에 누가 더 기독교도로서의 자질(자격)을 갖추었느냐는 물음과 같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결론은, 민구보다는 준태가 더 앞서는 인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지금 기독교를 떠났고 교회당 출석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에겐 아직 기독교도로서의 자질이 소멸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되겠다.    이 문제에 대해선 김병익 평론가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는 게 필요할 것이다.그는, 준태는 실상 끝까지 기독교를 버리지 못한 ‘부정적인 크리스천’이라 규정하고, 그가 아무리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선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설적인 기독교인의 반신론적 고백’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준태가 자기소멸과 에고로의 귀속을 통해 ‘부정적 기독교’를 구현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준태의 기독교 부정은 곧 ‘긍정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그런 부정적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들이 베푸는 사랑의 정도(밀도)와도 비례되는 것으로 보인다.    성호가 이타적 인물이란 것은 재언이 필요 없겠다. 준태 역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인물임은 앞서 우리가 본 바이다. 그러면 두 이타적인 인물 성호와 준태 중 어느 쪽이 더 사랑의 밀도가 강한가 하는 물음이 발해질 수도 있겠다. 그 답은 이미 작품상에 드러난 셈이다. 준태는 단순히 그의 친구에게 베푼 사랑을 보인 데 불과했지만, 성호는 보다 더 사회정의의 실현이란 고차원적 사랑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인의 자질은 그들이 베푸는 사랑의 밀도에 비례하는 것이란 말이 되겠다. 윤성호의 사랑을 실증해주는 상징적 장치가 바로 돌이와 영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즉 동거했던 무당여인이 남겨놓은 돌이마저 놔두고 준태가 죽게 되자, 지연의 손을 통해 그 아이를 건네받아 기르게 된 성호에겐 이미 그 아이보다 먼저 책임졌던 또 다른 고아 영이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성호라고 하는 넓은 사랑의 바다는 준태의 것보다는 한 차원 높았음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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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4-27
  • 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3)-황순원의
      <움직이는 성>에서의 다른 인물 함준태는 송민구와는 달리 기독교를 자신의 출세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중·고교 학생 시절 모범적인 기독교도였던 그는 후에 그 교회를 떠나버린다. 교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비판적이었던 그는 결국 그 교회를 박차고 세속사회로 나와 버렸다. 그는 이 소설 속에서 마치 이반 카라마조프의 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준태는 <삼대> 속의 병화와도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준태에게도 역시 구원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시사(示唆)하는 점이 이 소설의 한 특징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준태가, 실질적인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명목상의 무신론자라고 할 이반과 많이 닮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의 약점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속에서도 그는 그래도 신뢰할 만한 데가 있는 인물로 보인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과욕을 부릴 줄 모르는 그는 친구가 산간벽지로 전근을 가야만 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자청하여 저 자신이 친구 대신 벽지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희생적인 삶의 자세는 불가불 민구의 실리적인 생활 태도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도라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송민구에 비하여 교회를 박차고 떠나버린 함준태의 이웃사랑의 삶이 크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 즉 ‘이웃사랑’이라고 할 때 민구의 이기적인 삶과 준태의 이타적인 삶이 서로 대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진정한 사랑이 소멸되는 수가 있으며, 반대로 ‘교회 밖’에서도 그 사랑이 회복되는 수가 있음을 보게 된다.   전번의 아내 창애와 헤어진 뒤, 새 여인 남지연이 끈질기게 준태를 따라다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약간의 끌림을 당하면서도 결코 거기에 빠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가 이렇게 매사에 자신이 없고 결단력이 없어 보이는 것은 그의 지병인 천식 때문인 성싶기도 하다. 그의 이 원인 모를 병은 그가 유랑의 생활이 아닌 ‘정착에의 기대’를 갖는 순간 그에게 다가오곤 했었던 것 같다. 그가 이 사실을 자각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후에 강원도의 오지로부터 전북의 어느 오지로 자신의 거처를 옮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거처를 지연에게는 전혀 알리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그는 그곳에서 끝내 운명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얼마간은 사모하고 있었던 지연과의 상봉을 다시는 이루지도 못한 채로였다.   이러한 준태의 상 역시 유랑인의 상 그것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자신은 기독교 세계 이외의 유랑인의 대표적 인물로 함준태를 설정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기독교인이기를 스스로 거부한 만큼 또 무교 신앙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면서, 그가 마지막에 만난 여인이 바로 무당인 돌이엄마였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유랑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기독교도 송민구’가 샤머니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역시 유랑인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함준태라고 할 때 그가 어떤 식으로든 샤머니즘의 세계와 관련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바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운명(죽음)은 그 무당 여인이 자기(준태)를 버리고 달아나버린 뒤에야 찾아왔었다는 데에서 그가 궁극적으로는 무속세계와 동류일 수가 없음이 증거 되기는 한 셈이다. 이 점에서 같은 유랑성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민구의 그것과 준태의 그것이 동질일 수는 없다 하겠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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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3
  • 다시 사는 4월의 은혜 - 부활절에 (유승우)
    정재규목사의 「생명의 부활」   다시 사는 4월의 은혜 - 부활절에 (유승우) 4월이 되면서 올해에도  코로나의 악몽을 뚫고,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봄볕과 봄바람을 보내시어 산과 들의 잠든 생명을 깨우신다. 겨울바람 속에서 춥게 잠들었던 알몸의 가지들이 파랗게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 짓고, 아파트 그늘 밑 콩크리트 사이에서 메말랐던 민초 같은 풀꽃들도 사랑의 꽃등을 켜들고 환하게 웃는다. 아. 생명사랑의 끝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4월이여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번 부활절에는 성령의 빛이 되어,  성령의 봄볕으로 오시어, 부디 오시어 돈 우상에 얼어붙은 겨울들판 같은 우리들의 가슴을 녹여 주시어  우리들의 가슴에 사랑의 새싹이 돋고, 성령의 꽃이 활짝 피어나, 모두의 가슴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듬뿍 맺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가슴에 성령의 열매가 열려 백성사랑의 열매가 채워지게 하소서. 새로운 봄 동산이 열매를 많이 맺는 여름의 푸른 숲이 되게 하소서. 특히 이번 부활절에는  성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어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저 북한의  3대세습의 괴물이 녹아나게 하시고, 모스크바의 전쟁귀신 푸틴의 가슴에서 전쟁의 얼음뿌리가 녹아나게 하시고, 아프리카의 가난의 뿌리가 삭아져 아름다운 열매의 숲이 되게 하소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성령의 훈풍과 사랑의 봄볕으로 아름답게 꽃피는 아름다운 부할절이 되게 하소서.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4-13
  • 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1)-황순원의
    황순원의 장편소설 <움직이는 성>(1973)은 실로 기독교적 문제의식이 충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가 기독교 문제를 중심으로 이를 정면에서 다루기보다는 한국인의 유랑민 근성을 다루는 과정에서 기독교 문제를 끌어들였다는 데에 우리의 관심이 기울어진다. 이 작품은 유랑적인 기독교와 비유랑적인 기독교, 그리고 유랑적인 샤머니즘, 이렇게 세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축을 대표하는 송민구 윤성호 함준태 등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관련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셈이다. 이리하여 <움직이는 성>은 유랑적 기독교의 송민구와 비유랑적 기독교의 윤성호, 그리고 다른 유랑적인 세계의 함준태 등 세 명의 복수주인공들을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기독교도이면서 샤머니즘에도 대단한 흥미를 지니고 있는 민속학자 송민구는 전형적인 유랑인 기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실리적인 인물로서 평소에 그 자신이 제창하던 ‘유랑민 근성의 극복’이란 구호 자체가 무색하리만큼 종국에 그 스스로 유랑적 근성을 드러내고 말며, 함준태는 비판적이면서 솔직한 면은 지니고 있으나 마침내 스스로 현실에 좌초해 버림으로써 유랑의 본질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윤성호만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하여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신(神)의 인류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로서의 실제적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터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 세 남자들에게는 각각 상대적 여성들이 등장함으로써 각기 한 쌍씩을 이루므로, 이 세 쌍이 펼치는 복잡다기한 이야기들이 그들 나름의 흥미를 독자에게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민구에게는 한은희가, 성호에게는 한 여사가, 그리고 준태에게는 남지연이 각기 상대역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세 쌍의 등장인물들이 각기 남녀주인공으로 나오는 독립적인 이야기가 한 작품 안에서 합동으로 만나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복잡다기하게 얽혀지는 이야기가 곧 <움직이는 성>인 것이다. 스케일의 웅대함과 정교한 구조의 절묘함 및 소재 면의 다양성 때문에서도 이 작품은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을 전개한다거나 또 어느 한편에 치우친 편향적 진술을 하기 곤란하도록 스스로 장치된 셈이라 하겠지만, 작가 자신의 노련한 솜씨에 의해 적어도 한국의 6,70년대적 시대상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30년대 초에 염상섭이 장편 <삼대>를 내어놓음으로써 2,30년대의 한국 사회풍속도를 그려 놓았던 역할을 황순원이 70년대 초에 재현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70년대 초에 이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의 6,70년대 사회풍속도를 효과적으로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삼대>의 경우에는 봉건주의와 기독교 및 사회주의 등이 통시적으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었지만, <움직이는 성>에 있어서는 개인주의(개인의 정숙주의)와 기독교 및 샤머니즘 등이 공시적으로 부딪치고 긴장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년대와 30년대 초에는 확실히 ‘봉건주의·기독교·사회주의’ 간의 상호갈등이 심화되었던 게 사실이지만,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봉건주의나 사회주의의 심각한 대두가 물러난 대신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개인주의 등이 기독교와 서로 부딪치는 양상을 노정했던 것으로 작가는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지 이야기하고 보면, 위의 각각의 세 요소들 가운데 유독 기독교만은 양(兩) 시대에 두루 걸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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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3-30
  • 한국 기독교, 그 심층적 해부(5)-염상섭의
      <삼대>의 여주인공 홍경애는 조상훈의 아들 덕기와 어느 소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동기 동창 관계이다. 그 학교는 조상훈이 얼마간의 기부금을 낸 관계로 그가 설립자의 명의를 한 몫 가지고 있는 교회학교였다. 바로 이 학교에서 덕기와 경애는 함께 공부하는 가운데 서로 알게 된 것이었다. 경애는 이처럼 덕기와는 동창 관계이고, 덕기의 부친 조상훈과는 사제지간의 관계이다.   이러한 그들 상호간의 관계는 얼마 지난 뒤 바뀌어지게 되었다. 경애가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때, 그리고 애국지사였던 그녀의 부친이 감옥에서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가출옥하였을 때 운명의 장난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부친이 위태하다는 소문을 듣고 조상훈은 그를 문병하러 간 것이었다. 병자는 신장염에다 기관지병이 겹쳐서 한마디로 중태였다. 상훈은 문병이 끝나고 귀가한 뒤, 인삼 몇 뿌리에 쌀 한 가마니 표와 돈 얼마가 든 봉투를 경애를 통해 보낸다. 며칠 후에는 자기 집 단골 의사를 소개하여 진찰을 받게 해 주기도 하였으나 병자의 건강이 근본적으로 호전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해가 바뀐 뒤, 노 지사는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임종 현장에서 당사자의 유언도 있고 하여 상훈은 지사의 남은 모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교회 안에서도 애국지사의 유가족을 끝끝내 돌보아주는 상훈의 그 독지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럴 즈음 여학교를 졸업한 경애가 설립자 대표인 상훈의 추천으로 그 학교의 선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훈과 경애의 관계를 두고 심상찮은 소문들이 오고갔다. 당황한 경애는 자신을 수원 지역의 학교로라도 옮겨 달라고 부탁해 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 아래, 결국 감기로 인해 한 이틀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조상훈을 만나러 그의 댁을 찾아갔다. 그녀의 이 잦은 방문이 빌미가 되어 두 사람 사이는 깊은 관계로 변한 것이었다. 경애는 딸아이를 낳게 되었으며, 상훈의 실제적인 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 태어난 그 계집아이는 덕기의 이복누이 동생이 되었고, 경애는 덕기의 단순한 동창생의 신분에서 이제는 그의 서모의 위치로까지 뒤바뀌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변화는 경애 모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전도부인이던 경애 모친은, 세상을 숨기고 낳은 목숨(손녀) 때문에 교회에서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으며 당사자(경애) 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경애의 처지는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조상훈은 경애가 아이를 낳자 세상 이목이 두려워 그녀를 의식적으로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생활 대책조차 세워주지 않았다. 아이는 병들어 40도의 고열을 호소하는 형편인데도 아버지는 그의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점차 경애의 타락상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친구가 경영하는 자그마한 술집 ‘바커스’의 여급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인들 어찌할 것인가. 현실 타개책의 일환으로, 그리고 절망감의 가벼운 해소책의 일환으로도 그녀는 이런 길을 택할 수밖에는 없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훌륭한 아버지(애국지사)와 전도부인인 어머니, 그리고 그녀 자신도 교회학교를 거쳐 후에는 그 기독교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던 독실한 여신도 홍경애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그녀의 몰락상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홍경애는 미래지향적인 청년 김병화를 만나게 되면서, 소아적이었던 그녀의 삶이 이후 점차로 대승적인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3-17
  • 한국기독교문협 제56회 서면총회,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 다짐
    130명의 작품 수록한 「기독교문학」 제43집과 동화집 발행 문학사랑방과 세미나, 계간 문학잡지 발행 등 사업을 추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사진)는 제56회 총회를 자난 8일 ‘코로나19’로 인해 서면으로 가졌다. 이번 총회는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에 중점을 두고, 문학사랑방과 세미나, 에세이집과 연간집 발간 등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또한 계간 〈기독교문학〉발행을 위한 기금모금에 앞장 서기로 했다.   이번 총회에서 이수영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해서 모임과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세미나와 문학사랑방 등 행사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동문학분과 주관으로 동화집 <안녕, 상상 숲 오두막>을 발간하여 회원들과 전국 도서관 400여 곳에 배포하고, 전국 서점에서도 판매중이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에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또한 이이사장은 “해마다 발행되고 있는 〈기독교문학〉을 계간으로 발행하기 위해 기금모금 중에 있다. 지난 회기에도 회원들이 참여해 620만원을 입금해 주셨다. 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적극 참여해 주시길 바란다”고 덧붙혔다.   이번 총회를 기해 연간집인 〈기독교문학〉 제43집과 동화집 〈안녕, 상상 숲 오두막〉(창조문예사 펴냄)을 펴냈다.    〈기독교문학〉은 이이사장의 「권두단상」을 비롯한 평론에 6명, 시에 90명, 소설에 5명, 희곡 1명, 동시에 6명, 동화에 7명, 수필에 14명 등 130여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수록된 작품들은 지난 해인 2021년의 한국 기독교문학에 대한 현주소이다. 지난 해에 발표된 작품과 그 수준의 작품 중에서 자선해 게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화집은 동협회 아동분과(위원장=이명희아동문학가)의 회원이 중심이 되어 펴냈다. 엄기원원로아동문학가의 「짹짹이네 크리스마스」를 바롯한 강정규의 「엿이야기」, 한상남의 「피피와 어린양 세모」 등 19명의 동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수영이사장은 “‘코로나19’로 모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2020년 시집과 에세이집을 펴내고, 이번에는 동화집을 편집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이사장은 “금년에도 ‘코로나19’로 활발한 활동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에세이집을 펴낼 계획을 세웠다”고 덧붙혔다. 이 에세이집은 ‘감사’를 주제로 편집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회보」4회 발행을 비롯한 △연간집 〈기독교문학〉제44집 발행 △‘감사’를 주제로 「에세이집」발행, △교회순회해 문학적 간증과 시낭송 등으로 갖는 「문학사랑방」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한 세미나 △계간 〈기독교문학〉발행을 위한 기금모금 등 사업을 확정했다.   한편 동협회는 이날 임원회를 기독교신문에서 갖고 서면총회에 따른 결의사항을 점검했다. 이이사장은 “무엇보다도 금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세미나와 문학사랑방 등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할 것 같다”면서, “문학을 통한 하나님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문학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날 임원회에서는 에세이집 발간을 위한 편집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현재 수필분과 위원장인 박정미수필가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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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3-16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5)-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의 주인공 최문선은, 자신이야 이왕 실명(失明)되었지만 이 청년(이치한)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실제적으로 그 청년 대신, 자신이 모든 범행을 저지른 당사자라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진범인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마는 것이다. 이리하여 최문선은 꼼짝없이 인순이란 이름의 여인을 살해한 살인범이 되고 만다. 그가 사형이란 극형을 언도받기까지, 수사를 받던 과정에서 형사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악형(고문)을 받고 있었으며 그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일시 유혹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진범(이치한)을 고해바치지 않았다.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아픔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간 살인 누명에 따른 정신적 고통에다가 고문이라는 육체적 고통까지 극한에 달해 있었던 그의 처지를 헤아리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곧 진리를 말로만 하거나 글로만 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생활(실천)할 수 있는 첫 문이 열리게 된 기회가 그 혐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신에게 찾아오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받아들이자 문선은 진리를 비로소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기쁘게 여기게 되었고, 또한 진리를 생활(실천)할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준 그 청년에 대하여 우정마저 느끼게 되었다. 불행의 근원인 원수가 당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친구로 변했던 것이다. 결심 공판에서 문선은 자신의 추악한 누명을 “나의 십자가로 여겨 기뻐한다.”고 하였다.   강간(미수) 살인이라고 하는 추악한 누명조차도 십자가의 기쁨으로 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문선의 신앙에 깃들어 있는 ‘고난의 신비주의’ 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십자가의 고난의 신비주의로 인하여 문선은 사형이라는 극형을 언도받고서도 그 얼굴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실망하는 빛도 없이 태연할 수 있었으며, 객관적인 부당한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항소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기가 앞으로 당하게 될 처형(處刑)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신 은혜요 선물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느끼면서 감격의 오열마저 터뜨리는 최문선의 경지는 가위 ‘사랑의 신비주의’의 극한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다는 감격과 함께 그러한 사랑의 은혜를, 이웃(이치한)에 대한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갚음으로써 곧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는 최문선의 심적 상태는 ‘사랑의 신비주의’의 한 전형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이용도의 신비주의적 태도를 대비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드리고 싶은 그 의복을 불쌍한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주님께 대접하고 싶은 그 음식을 거지에게 나눠 먹이어 이로써 예수를 사랑하고 싶은 애끓는 정을 표하는 것이올시다.”   최문선의 이치한에 대한 사랑은 곧 그(치한)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주님께 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랑의 신비주의’ 정신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원수를 친구로 여기며, 불행을 행복으로 여기는 일, 그리고 누명 쓴 것을 십자가로 여겨 기뻐한 일, 게다가 앞으로 당할 처형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 내지는 사랑이라고 여겨 ‘감격의 오열’을 터뜨린 일 등, 이러한 사실들은 곧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라는 관점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특이 사항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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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2-08
  • 「창조문예」서 시상식 · 300호 발행 감사예배, 한국문학 발전과 향상에 기여키로
    25년동안 한 호도 결호없이 300호까지 발행한 저력을 과시 ‘창조문예’통해 한국문학 속에 기독교문학의 육성에 기여 월간 『창조문예』(발행인=임만호시인)는 제18회 『창조문예』문학상 및 제9회 『창조문예』문예상, 그리고 지난 해에 등단한 신인 5명에 대한 등단패 수여식을 지난 18일 밀알학교 강당에서 갖고, 한국문학의 발전과 향상에 기여키로 다짐했다. 『창조문학상』은 김년균원로시인, 『창조문예』문예상은 권은영시인이 수상했다. 또한 『창조문예』 300호 발행과 크리스찬서적 46주년을 맞아 감사예배도 드렸다. 이날 제1부 감사에배는 『창조문예』문인회 부회장인 김광영시인의 사회로 시인인 김상곤목사의 기도, 시인인 소강석목사의 「사과나무 아래서 쓴 연서」란 제목의 설교, 시인인 박종구목사의 축도 등 순서로 진행했다. 제2부 시상식은 『창조문예』주간인 최규창시인의 사회로 진행했다. 임만호 발행인의 인사말에 이어 문학평론가인 이명재교수(중앙대)의 심사평, 시상식, 등단패 및 공로패 수여. 축사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인 이광복작가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직전 이사장인 손해일시인, 복음성가 가수인 김석균목사의 축가, 케익절단 등 순서로 진행했다. 특히 『창조문예』문학상 수상자인 김년균원로시인과 『창조문예』문예상 수상자인 권은영시인에게 상패와 상금을 수여했다. 또한 지난해부터 ‘제2회 추천’제도에 의해 등단한 최귀례시인과 박예손소설가, 신현숙시인, 신길자수필가, 김영애수필가에 대한 등단패수여식과 『창조문예』문인회 직전회장인 김송수시인에게 권은영회장이 공로패도 수여했다.   이날 『창조문예』문학상을 수상한 김년균시인의 시집 『자연이다』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연환경 문제에 대한 걸맞은 소재와 주제로 형상화했다. 심사위원 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전’이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해 주셨고, 우리는 그대로 보전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전보다는 파괴만 일삼아 왔음을 일깨워 주는 잠언적인 시들이다. 이러한 그의 시들은 자연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꽃을 비롯한 풀과 산 등 시적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은유와 상징의 기법으로 깊은 의미를 담아 감동을 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박하고 순수한 서정적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간결한 서정적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의 창출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시어의 배열과 간결함, 구성의 통일된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시의 틀이 견고한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다. 또한 『창조문예』문예상을 수상한 권은영시인의 시집 『길 위에서』는 자연과 고향, 그리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했다. 깊은 서정과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신앙의 시각이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들은 서정과 신앙을 접목해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시들은 선명한 이미지와 부드럽고 따뜻한 시어로 추구해 ‘일깨움’과 ‘깨달음’의 감동을 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이미지로 구성하고 전개하는 기법의 성숙함을 보여 준다. 시적 대상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신앙의 삶을 그대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화된 삶의 모습으로 대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 대부분은 ‘일깨움’과 ‘깨달음’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권은영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적 대상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삶이 지닌 이미지를 객관화된 삶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존재하는 대상을 설명해 전달하기 위한 수식적 형식이 아니라, 역동적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로 변용시킨다.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에 의존하여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며 감성적이다. 이미지는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2-08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4)-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타난 기독교 정신은 한마디로 말해 고난과 사랑의 정신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사실상 극도의 아픔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고통은 마치 예수께서 커다란 아픔(고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작 장본인인 예수는 그 아픔을 통감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그런 성격의 것일 뿐이다.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제삼자(독자)의 처지에서 보면 무척 고통스러울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등장인물)들은 신비스럽다고 할 정도로 ‘태연스러운’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순애보>의 등장인물은 일종의 ‘이용도의 분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쫓기는 위치에 처해 있는 한준명이나 최태용, 또는 김성실과 같은 사람들(모 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멀리함으로써 지금껏 자신에게 가해져온 오해를 스스로 풀어볼 궁리는 전혀 해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포용함으로써 그 자신이 그들과 똑같다는 평가를 받는 위치에 처해짐으로 인해 완전히 피해만 입는 이용도였지만,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거나 하지 않는 경지에 들어가 있었으니 그가 괴로울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마찬가지이다.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은 거개가 이용도의 이러한 마음을 닮아 있다. 그러나 이용도의 그 ‘고난을 감내하는 마음’이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그 무한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듯이,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의 그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마음’들도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있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용도에게 있어서 ‘고난과 사랑’이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의 그 ‘고난과 사랑’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때의 고난과 사랑은 거의 신비적인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신비주의에 깊이 빠진 이용도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견딜 수 없는 고난, 또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실천에 옮기기 힘든 사랑, 마치 산상수훈에나 나타나는 그런 극한적인 사랑이 박계주의 <순애보>엔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순애보’) 속에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가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등장인물들은 고난 속에서도 극한적인 사랑을 기울이는, 무아와 황홀의 지경에 빠져 있는 열광주의적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그 때문에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이 작품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이라고 표현하여 대과(大過)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강조적으로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이용도에게 있어서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결코 무슨 신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것은 언행일치의 실천 단계로 곧장 이어진 것이란 바로 그 점이었듯이, <순애보>의 등장인물들도 그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최문선은 자기를 눈멀게 하고 강간 살인범으로 몰아넣은 진범(이치한)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에게 원망의 감정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인공이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돼 있으면서도 진범을 고해바치지 않은 행위 속에는 거의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 수반되고 있으며, 그의 그런 행위 속에 극한적 이웃사랑의 정신이 엿보인다 하겠으니, 이런 이상주의적이고 현실초월적인 장면 설정 속에서 우리는 예의 그 신비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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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1-26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3)-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타난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용도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이용도 사상의 골자는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이다. 먼저,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특징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의 목표는 십자가를 진 고난의 주를 몸소 체험하고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아픔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는 데 두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그는 주로 요한복음을 통해 받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시작하자 곧 그에게 죽음의 위협(고난)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내용 설정이라면, 예수의 고난은 숙명적이요 불가피한 것이며, 그런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야 할 이용도나 다른 신도들의 고난도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자연히 성 프란체스코처럼 가난을 거룩하게 보고 청빈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이용도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 실천적인 삶을 스스로 살았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 사상은 그의 그런 삶의 실천이란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는 동시에 ‘사랑의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그에게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는 불가분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할 것이다. 이용도의 그리스도 사랑의 이해 기반에는 시무언(是無言)의 사랑, 곧 침묵의 사랑이 개입되어 있으니, 이는 곧 무차별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아가서적 모티브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그 열도가 역시 아가서의 한 구절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정도만큼 강렬하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에는 예수께서 그 중심에 있다. 이용도는 예수를 요한복음과 아가서에 기준하여 아픔(고난)과 사랑의 본질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용도는 예수의 사랑의 지상 명령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켰지만, 그러나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어느 면에서 사랑의 무제약적인 면을 보이는 약점도 노출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문학자 조동일이 <순애보>를 논하는 가운데 아래와 같은 해석을 내린 것이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함에 역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같다.   “주인공이 강간, 살인의 누명을 쓰게 한 원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주인공이 사형언도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무의미한 희생이 기독교 정신의 발로라고 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물론 주인공의 그런 행위가 ‘무의미한 희생’일는지도 모르며, 어느 면에선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기독교 정신’ 발로의 결과인 것만은 분명한데, 그 정신이 곧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때만 그 ‘사랑의 무제약적인 면’, 또는 주인공의 ‘소박한 무차별의 사랑’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국문학자 조동일은 이 작품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이광수 소설에서보다 더욱 강하게 역설했다.”라고 했는데, 여기 ‘이광수의 기독교적 사랑’보다 더욱 강하게 역설된 내용이란 것이 달리 말하면 곧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적인 사랑이 곧 이광수의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사랑보다 더 강렬할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평론가 홍정선이 “<순애보>의 사랑은 이광수 소설의 사랑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란 요지로 말한 것이 실은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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