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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황광은이 그려준 유토피아,이 반 작 김윤태 연출 소년 공화국 우신 (牛臣) 황광은(1923-1970)은 1923년 2월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지북동 25번지에서 황도성 장로와 김도순 권사의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2004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이반 작 김윤태 연출<소년 공화국>이 극단 ‘반딧불이’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1923-1970)는 47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48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중앙YMCA 소년부 연습 간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성은 그 당시 YMCA 현동완 총무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황광은은 서울 중앙 YMCA 간사로 YMCA 지하실에서 유랑소년 20여 명을 모아 밤마다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구두닦이를 시켜 일하게 했다. 그는 6.25 피난시절에는 서울에 남아 있던 고아들 30여 명을 돌보다가 1.4 후퇴 때에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도에 있는 한국보육원에서 고아들의 벗이 되었다. 황광은은 어린시절 일본 목사 가가와 도요히꼬의 소설 ‘사선을 넘어서 ’를 읽고 큰 감화로 가난한 자의 벗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되던 1939년,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삼각산 기슭에 있던 향린원이란 고아원에서 8년간 고아들의 벗으로 일하면서 일제 말 암울했던 시기를 보냈다. 해방 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청소년운동, 기독교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연극단체 ‘원예술좌’의 창립동인이었고 아동영화 ‘하늘은 맑건만’ 등을 제작하였다. ‘크리스찬신문’ ‘기독교교육’, ‘새벗’의 창간과 편집,집필을 하였다. 황광은 목사 목회적으로서 새문안교회 부목사, 대광중고 교목을 거쳐 1961년부터 영암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김활란 박사와 함께 전국복음화운동 실무를 담당했다. 너무나 짧은 삶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크고도 넓고 깊다. 황광은 목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어린이의 참벗, 고아의 아버지, 선한 목자,화해의 사도,짧으나 긴 삶을 사신 분" 황광은은 아동작가,훌륭한 설교가,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은 맑고 너그럽고 착하였다, 그가 한 일은 크고 곱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한 스토리가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년 공화국》이다. 1970년 5월 어느날, 황광은 목사는 병상에서 이반 극작가를 불렀다. 소설 ‘소년 공화국’이라는 제목과 200자 원고지 다섯 장에 적어 놓은 서문과 두 장의 목차를 내밀었다. 구겨진 일곱 장의 원고지가 그로부터 33년이 지나서 희곡 《소년 공화국》으로 탈고된 것이다. 황광은은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소설로 완성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반 극작가에 의하여 2003년 12월에 희곡이 되었고 2004년 12월에 연극이 되어 우리 앞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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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행함으로 열매 맺는다
정인숙 목사 간증집 《일어나 걷게 하소서》를 읽고 강성애 권사 뜨거운 마음의 소유자 우리 남편 안병호목사는 정인숙목사의 간증집 <일어나 걷게 하소서>를 읽자마자 50권을 구입하여 교회 안내석에 갖다 놓고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읽도록 했습니다. 한 권사님이 이 책을 읽고 이러한 소감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이제까지 이처럼 눈물범벅이 되어 읽은 책은 없었습니다. 어떤 고난도 믿음과 기도로 승리 못 할 일은 없겠구나 깨달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저자는 꽃다운 이십 대에 결혼하여 딸을 낳고 알콩달콩 사는 어느 날, 감기인가 가볍게 생각하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류마치스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을 때만 해도 이리 불치병까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좋다는 이 병원, 저 병원, 한방 치료, 온갖 효험이 있다는 약초,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관절 마디마디 끊어질 듯 한 고통은 한시도 몸을 그냥 놔두질 않았습니다. 결국 새우처럼 꼬부러저 있는 몸이 되어 이혼을 당하고, 시골 친정에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손가락조차 쓸 수 없어 엄마가 매 끼 식사와 대소변을 받아 주시는 병 수발로 수년의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아버지는 앉은뱅이 딸을 만들 수 없다며,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달래면서 매일 다리를 잡아당기고 펴는 운동을 일 년 동안 시키셨지만 고문처럼 고통만 심해졌지 함께 지쳐갈 뿐이었습니다. 방문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고 꼬부라져 신음하며 사는 동안 생각하는 건 오직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 나를 도대체 누가 존재하도록 했을까’ 알 수 없어서 경전을 읽어봐도 답은 없었습니다. 교회라고는 가 본 적이 없었는데 교회 다니는 고모가 가끔씩 와서 하는 말에는 짜증만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찾아와 눈치를 보면서 ”이번 집회는 병 고치는 부흥회란다“ 슬쩍 던지는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고모와 많은 교인들의 극진한 떠받침을 받으며 난생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누워 구경(?)을 하는데 찬송 인도자나 온 교인들의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 그녀의 심령을 깨트렸습니다. 설교는 기대하던 병 고친다는 얘기는 없고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 못 박혀 죽었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등 열정적으로 아멘을 부르짖는 청중들속에서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환자들을 위한 안수기도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병이 나았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펄쩍 펄쩍 뛰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눈앞에 역사하시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훅 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가 내 구주라고 믿어졌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며 감격이 몰려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누가 회개라는 단어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이제까지의 잘못과 하나님을 무시했던 죄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신의 근거가 창조주 하나님임을 알면서 기쁨이 샘솟아 안수기도를 청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방언이 터지고 기쁨과 평화가 흘러 넘쳤습니다. 부흥회 후, 들것에 실려 돌아와 옛 꼬부라진 모습으로 다시 누워서 지내는 생활이 계속 되었지만, 그녀는 예전의 내면이 아닌 완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6) 원망과 비관은 사라지고 그녀는 기쁨과 감사와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애타게 갈망하며 누워서 구약을 40회 이상, 신약은 100독은 했습니다. 뼈가 맞닿은 엉덩이와 복사뼈의 욕창이 심하여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성경이 꿀처럼 달다는 말씀은 진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기록한 책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라는 것을 알아 왔으니 혼자서 있는 힘껏 소리쳐 기도하고, 있는 힘껏 찬송도 한 시간씩 소리쳐 불렀습니다. “저 집 딸이 이제는 정신까지 어떻게 되었나 보네” 동네 소문이 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주님, 나를 일으켜 주소서. 다시 걸을 수 있게 하소서!”라며 기도하는 매일 매일이 신명이 났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고 나는 다시 일어나 걷게 될 것이다.” 그녀는 현재의 몸 상태를 보지 않고 믿음의 결과만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순간 가슴이 후끈거리며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걸 느꼈습니다. 믿음은 행해야 역사하심이 따른다는 깨우침에 꽂혔습니다. 그녀는 그때부터 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목회 서신쯤 가니 글씨 모양도 조금은 자리를 잡아가고 통증도 확연히 줄었습니다. 정말이지 행동할 때 역사했습니다. 수년 동안 방바닥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엉덩이가 몇 번의 엎어짐에도 믿음으로 성령님을 의지할 때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 좁은 방안에서 날마다 일어났습니다. 조심스레 무릎으로 방을 기어 보았습니다. 시퍼런 멍든 자국이 무릎을 더욱 아프게 했지만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만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지도 4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그녀는 믿음을 한 순간도 놓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측은하다고 찾아온 방문객에게도 확신이 있게 전도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2) 이 말씀을 붙들고 싸워온지 수년, 1989년 봄, 그녀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꽃들과 파릇파릇한 잎들, 찬란한 햇빛의 환영을 받으며 통증을 견디면서 드디어 앞마당에서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자는 온전한 몸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담임 목회를 하며, 여러 환우들을 돕고, 글을 쓰며, “오직 믿음은 행함으로 열매 맺는다”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책을 세 번째 반복해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오랜 신앙생활이란 것이 얼마나 말씀 따로, 행함 따로의 거짓이었나를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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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여의도순복음교회 뮤지컬 빌 게이더 작 이반 연출 <알렐루야> 뮤지컬 <알렐루야>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가든그로브코뮤니티교회의 정기공연 작품이다. 그 당시 그 공연을 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부인되는 김성혜 목사가 미국에서 가져온<알렐루야>카세트 녹음테이프와 악보를 구해서 이영훈 전도사에게 넘겨주어 영산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코이노니아회가 다방교회라 할 수 있는’선교의 집‘ 모금을 위하여 이영훈 회장을 중심으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를 유료공연으로 기획하였다. 1979년 7월 1일에 선교센터 406호실에서 이반 각색,연출의 음악 정명소, 이영훈 회장, 안준배, 최완기, 김용덕, 윤남인, 오무석 등이 실무회의로 모였다. 먼저 《알렐루야》 원 카세트 녹음을 들은후 이 반 교수의 연극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예배극 형식으로 선교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뮤지컬 알렐루야 빌 게이더 부부의 공작인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선교무대는 한국 기독교의 팔십년대 선교방향을 제시해 주는 작품이었다. 음악의 빌리 그래함이라고 불리고 있는 빌 게이더 부부의 《알렐루야》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시도된 예배극이다. 노래와 춤과 연기를 통한 복음선포는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음악성과 문장력이 있는 이영훈 의 가사 번역은 미국의 감각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코라스를 맡은 정명소 음악은 그의 호산나 성가대의 가창력을 뛰어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이 반 연출은 하르트만에게 사사받은 예배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백여 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호산나 성가대와 사십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열 명의 연기자등 총 백오십여 명이 열연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은 팔십년대 문화선교를 보여주었다.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으로 인하여 《알렐루야》의 주제곡 ’살아계신주’ ‘주께 찬양을 드리세’는 한국교회 애창곡이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1979년의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감격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반은 숭실대학교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함경남도 홍원에서 피난내려와 정착한 제2의 고향이 된 속초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이반을 초청하여 재연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기념 뮤지컬 《알렐루야》를 2023년 5월 3일에 윤의중 지휘, 홍석임 연출로 다시 대성전 무대에 올려져 성전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사이에 실향민 이반은 2018년 9월 24일에 속초에서 본향으로 떠났다./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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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주여,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 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 (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라고 말한다. (이반, 연극과 예배, 하르트만의 예배극론 도서출판 연극과인간 2003 참조)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향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예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 연예인교회의 예언자와 목수 연예인교회가 1976년 12월 10일에서 11일까지 이화여대 강당에서 3회에 걸쳐 올린 전도공연 《새롭게 하소서》 중에 제1부 연극부문에 해당하는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요나(이영후 분)가 타고 가는 지중해상의 선박이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뱃속이나, 또 니느웨의 언덕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요나가 외친 심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매 순간 심판을 받아가면서 최후의 심판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목에서 목수(신영균 역)를 만난다.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는 목수의 손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폭을 깨닫게 된다. 하르트만은 예배극에서 직접 예수를 등장시키지 않고 간접으로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르트만이 요나서에 예수를 상징하는 목수를 등장시켰다. 예배극 속에서 이반은 하르트만에게 전수받은 대로 예수의 이미지를 목수로 등장시켜 상징적으로 부각시킬 뿐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 연출을 하였다. 이반 연출은 니느웨의 작은 생명을 아끼고 깨어진 것을 고치는 목수를 등장시켜 요나서에서 니느웨가 심판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배극에서 예수를 등장시켜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배극의 기능이 예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꾀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중재자이다. 예배극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으로, 화해의 중재역을 담당하고 있다.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에 있어서의 지중해상의 요나가 탄 배는 교회고, 교회는 곧 세상을 상징한다. 1976년 성탄절을 앞두고 이화여대 강당에서 일만이천 명의 관객에게 펼쳐진 연예인교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연출자 이반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류에게 예수의 구원을 증언했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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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극작가 이반은 연극을 하게 되면서 갖게 된 관심사가 ‘종교극’이었다. 분단극은 스웨덴에서 종교극 유학 중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했다. 그는 1967년에 루터교회에서 <죽음의 계곡을 찾아서> 라는 성극을 극작하여 공연하고 나서 종교극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반의 그런 모색은 마침내 종교극의 대가인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울로프 하르트만 교수에게 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기독교 연극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카톨릭 미사의 극화 작업과 잉글랜드의 조지 벨 주교가 주관하는 성공회의 종교극 운동, 네델란드와 독일의 중세극 공연, 미국의 선교극 운동, 스웨덴을 비롯한 북구라파의 예배극 운동을 들 수 있다. □ 올로프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 1906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하르트만은 어린 시절을 구세군 소년으로 보냈다. 그의 양친은 구세군 사관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키웠다. 하르트만은 웁살라대학 신학부를 졸업한후 스웨덴 국교인 루터파 목사로 오랫동안 교회 일을 도왔다. 그의 자서전적인 소설 《바다의 소리》 는 오 캐시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소년기의 그의 고민이었던 선과 악,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하르트만을 일약 유명한 작가로 출세시킨 작품은 그의 세 번째 소설 <성스러운 무도회>였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의 동역자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즐겨 다루는 원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구해 나갔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르트만은 희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톡홀름 근처의 스웨덴 최초의 도읍지인 시그투나 파운데이션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웨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스웨덴 정부는 하르트만이 창조해낸 모든 예배형식을 개체 교회에 보급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다. 하르트만은 희랍극과 중세극 중에서 현대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의적 요소와 전통적인 루터교의 예배의식의 극적 요소의 만남을 꾀해 예배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극이론을 창조해 내고 예배극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 《예언자와 목수》, 《생명의 면류관》, 《용광로의 불길》 등은 그의 극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제임스 영은 “나는 하르트만을 혼자서 소리를 내지 않는 목소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어 혼자서 외치지 않는다. 하르트만은 반독연자로 전체 작품의 드라마는 대화로 엮어졌다. 하르트만은 신비스러우리만치 노련한 솜씨로 고립적이거나 독백을 배제하고 작품 속 에서 사회성과 사귐이 일어나게 한다”고 극작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과 무대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르트만은 1968년 W.C.C 4차 웁살라 총회에서 희곡 《그 날에》, (독일어로는 《아모스 ‘70》 으로 번역되었음)를 발표하여 현대 기독교 국가들과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두고 행동하여야 할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아모스 선지자를 등장시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찾아 나서게 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대리석 궁과 전쟁터에서 작고 하얀 어린 양을 찾는다. 그리고 정의의 대림줄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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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이렇게 만날 줄 모르고 공연히 고생길을 걸은 장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로는 홀로 아름다운 천국에 취해 있다가 같은 곳에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사형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한 장로는 천사에게 물어본다. “지옥은 어디 있냐”고. 그러자 천사는 본래 지옥은 없고 천당만 있다고 일러준다. 장로는 평생을 교회에 잘 다니고 선행을 한 자신은 천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범죄자도 같은 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불쾌해 졌다. 그 순간부터 장로는 죄수가 있는 천당이 싫어졌다. 극작가 주태익 주태익이 각색한 <천당 간 사나이> 는 이범선 문학에 내재해 있는 신관이나 인간의 운명에 대해 원작자가 제기한 문제점을 살리는 것보다 연극으로서의 객관성을 담아냈다. 세속적인 장로가 죽어 황천길을 가던 중 저승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한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때 세상에서 살인하여 사형을 당한 죄수와 그에게 죽은 사람들과 구공탄 가스로 죽은 철학자가 등장하여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벌인다. 주태익은 이범선의 소설을 보수적으로 각색했다. 1976년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을 때 연출가 이반 교수와 극작가 주태익 선생이 필자에게 종로 2가 디즈니다방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주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문인극을 하는데 기획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원들로 문인극을 만들게 되어 이범선 원작, 주태익 각색, 이반 연출의 《천당 간 사나이》가 공연작이 되었다. 배우들도 자체적으로 선발해 노인 김광식, 장로 황금찬, 철학자 이보라, 춘심 윤경남, 아저씨 강정규, 아줌마 김정기, 만석 유성윤, 옥이 고계영이 배역을 맡았다. Y극회 ‘탈’의 김호태가 조연출을 했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중앙신학교 야간부가 있었다. 중견 문학인들이 배우가 되어 신학교 강의실에서 대본 연습을 하였다. 나는 연습실과 식당, 유전다방에 이르기까지 매일 출근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종로 2가 한국기원이 들어있는 빌딩 1층에 있는 유전다방에 가면 나중에 ‘목요회’가 된 ‘수요회’ 멤버 조향록 목사, 이범선 소설가, 김광식 소설가, 황금찬 시인, 주태익 극작가, 김봉삼, 강형요,김세익, 노정팔, 홍성건, 장하구 등이 언제나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때로는 윤남경, 송영 작가도 자리에 있었다 나는 기획을 맡아서 공연을 앞두고 남산에 있는 공연윤리위원회를 찾아가 대본 심의를 받아냈다. 공연 티켓을 이화여대 앞의 파리다방과 명동의 필하모닉음악감상실, 종로서적, 을지서점 등 서점가에 예매를 맡기는 일을 하였다. 1975년에 《최후의 유혹》에서 연극을 제작한 경험이 있어서 언론사로 보도 자료도 보내는 등,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보았다. 연극《천당 간 사나이》는 1976년 12월 25일 낮 3시와 밤 7시에 세실극장에서 2회로 공연하였다. 오십대 문인들이 어설프지만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여,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성탄의 은총을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각색자 주태익 선생이 1979년에 타계한 이후 원작자 이범선, 연출 이반, 노인 역 김광식, 철학자 역 이보라, 장로 역 황금찬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별세해 ‘천당 간 사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 ‘ 천당 온 사나이’를 연극하고 있을지도.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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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 황광은이 그려준 유토피아,이 반 작 김윤태 연출 소년 공화국 우신 (牛臣) 황광은(1923-1970)은 1923년 2월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지북동 25번지에서 황도성 장로와 김도순 권사의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2004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이반 작 김윤태 연출<소년 공화국>이 극단 ‘반딧불이’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1923-1970)는 47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48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중앙YMCA 소년부 연습 간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성은 그 당시 YMCA 현동완 총무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황광은은 서울 중앙 YMCA 간사로 YMCA 지하실에서 유랑소년 20여 명을 모아 밤마다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구두닦이를 시켜 일하게 했다. 그는 6.25 피난시절에는 서울에 남아 있던 고아들 30여 명을 돌보다가 1.4 후퇴 때에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도에 있는 한국보육원에서 고아들의 벗이 되었다. 황광은은 어린시절 일본 목사 가가와 도요히꼬의 소설 ‘사선을 넘어서 ’를 읽고 큰 감화로 가난한 자의 벗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되던 1939년,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삼각산 기슭에 있던 향린원이란 고아원에서 8년간 고아들의 벗으로 일하면서 일제 말 암울했던 시기를 보냈다. 해방 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청소년운동, 기독교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연극단체 ‘원예술좌’의 창립동인이었고 아동영화 ‘하늘은 맑건만’ 등을 제작하였다. ‘크리스찬신문’ ‘기독교교육’, ‘새벗’의 창간과 편집,집필을 하였다. 황광은 목사 목회적으로서 새문안교회 부목사, 대광중고 교목을 거쳐 1961년부터 영암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김활란 박사와 함께 전국복음화운동 실무를 담당했다. 너무나 짧은 삶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크고도 넓고 깊다. 황광은 목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어린이의 참벗, 고아의 아버지, 선한 목자,화해의 사도,짧으나 긴 삶을 사신 분" 황광은은 아동작가,훌륭한 설교가,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은 맑고 너그럽고 착하였다, 그가 한 일은 크고 곱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한 스토리가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년 공화국》이다. 1970년 5월 어느날, 황광은 목사는 병상에서 이반 극작가를 불렀다. 소설 ‘소년 공화국’이라는 제목과 200자 원고지 다섯 장에 적어 놓은 서문과 두 장의 목차를 내밀었다. 구겨진 일곱 장의 원고지가 그로부터 33년이 지나서 희곡 《소년 공화국》으로 탈고된 것이다. 황광은은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소설로 완성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반 극작가에 의하여 2003년 12월에 희곡이 되었고 2004년 12월에 연극이 되어 우리 앞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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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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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 여의도순복음교회 뮤지컬 빌 게이더 작 이반 연출 <알렐루야> 뮤지컬 <알렐루야>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가든그로브코뮤니티교회의 정기공연 작품이다. 그 당시 그 공연을 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부인되는 김성혜 목사가 미국에서 가져온<알렐루야>카세트 녹음테이프와 악보를 구해서 이영훈 전도사에게 넘겨주어 영산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코이노니아회가 다방교회라 할 수 있는’선교의 집‘ 모금을 위하여 이영훈 회장을 중심으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를 유료공연으로 기획하였다. 1979년 7월 1일에 선교센터 406호실에서 이반 각색,연출의 음악 정명소, 이영훈 회장, 안준배, 최완기, 김용덕, 윤남인, 오무석 등이 실무회의로 모였다. 먼저 《알렐루야》 원 카세트 녹음을 들은후 이 반 교수의 연극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예배극 형식으로 선교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뮤지컬 알렐루야 빌 게이더 부부의 공작인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선교무대는 한국 기독교의 팔십년대 선교방향을 제시해 주는 작품이었다. 음악의 빌리 그래함이라고 불리고 있는 빌 게이더 부부의 《알렐루야》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시도된 예배극이다. 노래와 춤과 연기를 통한 복음선포는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음악성과 문장력이 있는 이영훈 의 가사 번역은 미국의 감각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코라스를 맡은 정명소 음악은 그의 호산나 성가대의 가창력을 뛰어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이 반 연출은 하르트만에게 사사받은 예배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백여 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호산나 성가대와 사십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열 명의 연기자등 총 백오십여 명이 열연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은 팔십년대 문화선교를 보여주었다.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으로 인하여 《알렐루야》의 주제곡 ’살아계신주’ ‘주께 찬양을 드리세’는 한국교회 애창곡이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1979년의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감격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반은 숭실대학교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함경남도 홍원에서 피난내려와 정착한 제2의 고향이 된 속초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이반을 초청하여 재연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기념 뮤지컬 《알렐루야》를 2023년 5월 3일에 윤의중 지휘, 홍석임 연출로 다시 대성전 무대에 올려져 성전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사이에 실향민 이반은 2018년 9월 24일에 속초에서 본향으로 떠났다./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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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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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주여,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 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 (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라고 말한다. (이반, 연극과 예배, 하르트만의 예배극론 도서출판 연극과인간 2003 참조)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향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예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 연예인교회의 예언자와 목수 연예인교회가 1976년 12월 10일에서 11일까지 이화여대 강당에서 3회에 걸쳐 올린 전도공연 《새롭게 하소서》 중에 제1부 연극부문에 해당하는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요나(이영후 분)가 타고 가는 지중해상의 선박이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뱃속이나, 또 니느웨의 언덕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요나가 외친 심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매 순간 심판을 받아가면서 최후의 심판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목에서 목수(신영균 역)를 만난다.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는 목수의 손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폭을 깨닫게 된다. 하르트만은 예배극에서 직접 예수를 등장시키지 않고 간접으로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르트만이 요나서에 예수를 상징하는 목수를 등장시켰다. 예배극 속에서 이반은 하르트만에게 전수받은 대로 예수의 이미지를 목수로 등장시켜 상징적으로 부각시킬 뿐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 연출을 하였다. 이반 연출은 니느웨의 작은 생명을 아끼고 깨어진 것을 고치는 목수를 등장시켜 요나서에서 니느웨가 심판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배극에서 예수를 등장시켜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배극의 기능이 예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꾀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중재자이다. 예배극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으로, 화해의 중재역을 담당하고 있다.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에 있어서의 지중해상의 요나가 탄 배는 교회고, 교회는 곧 세상을 상징한다. 1976년 성탄절을 앞두고 이화여대 강당에서 일만이천 명의 관객에게 펼쳐진 연예인교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연출자 이반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류에게 예수의 구원을 증언했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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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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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극작가 이반은 연극을 하게 되면서 갖게 된 관심사가 ‘종교극’이었다. 분단극은 스웨덴에서 종교극 유학 중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했다. 그는 1967년에 루터교회에서 <죽음의 계곡을 찾아서> 라는 성극을 극작하여 공연하고 나서 종교극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반의 그런 모색은 마침내 종교극의 대가인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울로프 하르트만 교수에게 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기독교 연극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카톨릭 미사의 극화 작업과 잉글랜드의 조지 벨 주교가 주관하는 성공회의 종교극 운동, 네델란드와 독일의 중세극 공연, 미국의 선교극 운동, 스웨덴을 비롯한 북구라파의 예배극 운동을 들 수 있다. □ 올로프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 1906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하르트만은 어린 시절을 구세군 소년으로 보냈다. 그의 양친은 구세군 사관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키웠다. 하르트만은 웁살라대학 신학부를 졸업한후 스웨덴 국교인 루터파 목사로 오랫동안 교회 일을 도왔다. 그의 자서전적인 소설 《바다의 소리》 는 오 캐시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소년기의 그의 고민이었던 선과 악,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하르트만을 일약 유명한 작가로 출세시킨 작품은 그의 세 번째 소설 <성스러운 무도회>였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의 동역자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즐겨 다루는 원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구해 나갔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르트만은 희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톡홀름 근처의 스웨덴 최초의 도읍지인 시그투나 파운데이션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웨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스웨덴 정부는 하르트만이 창조해낸 모든 예배형식을 개체 교회에 보급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다. 하르트만은 희랍극과 중세극 중에서 현대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의적 요소와 전통적인 루터교의 예배의식의 극적 요소의 만남을 꾀해 예배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극이론을 창조해 내고 예배극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 《예언자와 목수》, 《생명의 면류관》, 《용광로의 불길》 등은 그의 극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제임스 영은 “나는 하르트만을 혼자서 소리를 내지 않는 목소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어 혼자서 외치지 않는다. 하르트만은 반독연자로 전체 작품의 드라마는 대화로 엮어졌다. 하르트만은 신비스러우리만치 노련한 솜씨로 고립적이거나 독백을 배제하고 작품 속 에서 사회성과 사귐이 일어나게 한다”고 극작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과 무대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르트만은 1968년 W.C.C 4차 웁살라 총회에서 희곡 《그 날에》, (독일어로는 《아모스 ‘70》 으로 번역되었음)를 발표하여 현대 기독교 국가들과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두고 행동하여야 할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아모스 선지자를 등장시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찾아 나서게 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대리석 궁과 전쟁터에서 작고 하얀 어린 양을 찾는다. 그리고 정의의 대림줄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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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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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이렇게 만날 줄 모르고 공연히 고생길을 걸은 장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로는 홀로 아름다운 천국에 취해 있다가 같은 곳에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사형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한 장로는 천사에게 물어본다. “지옥은 어디 있냐”고. 그러자 천사는 본래 지옥은 없고 천당만 있다고 일러준다. 장로는 평생을 교회에 잘 다니고 선행을 한 자신은 천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범죄자도 같은 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불쾌해 졌다. 그 순간부터 장로는 죄수가 있는 천당이 싫어졌다. 극작가 주태익 주태익이 각색한 <천당 간 사나이> 는 이범선 문학에 내재해 있는 신관이나 인간의 운명에 대해 원작자가 제기한 문제점을 살리는 것보다 연극으로서의 객관성을 담아냈다. 세속적인 장로가 죽어 황천길을 가던 중 저승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한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때 세상에서 살인하여 사형을 당한 죄수와 그에게 죽은 사람들과 구공탄 가스로 죽은 철학자가 등장하여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벌인다. 주태익은 이범선의 소설을 보수적으로 각색했다. 1976년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을 때 연출가 이반 교수와 극작가 주태익 선생이 필자에게 종로 2가 디즈니다방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주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문인극을 하는데 기획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원들로 문인극을 만들게 되어 이범선 원작, 주태익 각색, 이반 연출의 《천당 간 사나이》가 공연작이 되었다. 배우들도 자체적으로 선발해 노인 김광식, 장로 황금찬, 철학자 이보라, 춘심 윤경남, 아저씨 강정규, 아줌마 김정기, 만석 유성윤, 옥이 고계영이 배역을 맡았다. Y극회 ‘탈’의 김호태가 조연출을 했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중앙신학교 야간부가 있었다. 중견 문학인들이 배우가 되어 신학교 강의실에서 대본 연습을 하였다. 나는 연습실과 식당, 유전다방에 이르기까지 매일 출근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종로 2가 한국기원이 들어있는 빌딩 1층에 있는 유전다방에 가면 나중에 ‘목요회’가 된 ‘수요회’ 멤버 조향록 목사, 이범선 소설가, 김광식 소설가, 황금찬 시인, 주태익 극작가, 김봉삼, 강형요,김세익, 노정팔, 홍성건, 장하구 등이 언제나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때로는 윤남경, 송영 작가도 자리에 있었다 나는 기획을 맡아서 공연을 앞두고 남산에 있는 공연윤리위원회를 찾아가 대본 심의를 받아냈다. 공연 티켓을 이화여대 앞의 파리다방과 명동의 필하모닉음악감상실, 종로서적, 을지서점 등 서점가에 예매를 맡기는 일을 하였다. 1975년에 《최후의 유혹》에서 연극을 제작한 경험이 있어서 언론사로 보도 자료도 보내는 등,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보았다. 연극《천당 간 사나이》는 1976년 12월 25일 낮 3시와 밤 7시에 세실극장에서 2회로 공연하였다. 오십대 문인들이 어설프지만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여,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성탄의 은총을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각색자 주태익 선생이 1979년에 타계한 이후 원작자 이범선, 연출 이반, 노인 역 김광식, 철학자 역 이보라, 장로 역 황금찬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별세해 ‘천당 간 사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 ‘ 천당 온 사나이’를 연극하고 있을지도.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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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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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6)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Ⅱ 이반의 종교극 황광은, 주태익, 김원식, 김창열 등은 서울 YMCA에서 1964년부터 기존해 있던 극회 ‘탈’을 1967년에 재건하게 되어 그 작업을 극작가 이반에게 맡기게 되었다. 극회 ‘탈’은 조성현, 송종환, 전진호,이반, 차관, 이효춘 등이 모여 재건 첫 작품으로 1968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YMCA강당에서 이반 작 전진호 연출의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를 상연했다. 극작가 이반은 성경 속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현대적 입장에서 과감하게 해석했다.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는 예수의 이적에 의해 문둥병을 고치고 그에게로 와서 감사를 전한 한 문둥이의 이야기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할 때의 그의 모습과 부활했을 때의 결단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극회 ‘탈’은 이반 작 연출 《눈먼 가축사》, 《제4의 박사》, 《다른 목자》등 D.C.월슨의 작품을 공연했다. 극회 ‘탈’ 은 신인 창작극으로 소설가 황석영의 《환영의 돛》, 극작가 김상열의 《성야》, 이반의 《실향민》 등을 상연했다고 이반은 극회 ‘탈’의 성과를 밝혔다. □ 이범선 작 이반 연출 천당 간 사나이 월남한 작가 이범선은 《오발탄》, 《피해자》로 6.25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이들에 대한 인간 본성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이범선이 1976년 발표한 소설집 《표구된 휴지》 에 수록된 단편 소설 《천당 간 사나이》는 그의 후기작으로 기독교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앞서 1958년에 발표한 《피해자》에서 종교의 위선을 문제 삼았던 작가는 《천당 간 사나이》 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의 내세관, 구원관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얀 수의를 입고 저승길을 걷고 있는 뚱뚱한 사나이는 이승에서 장로였고, 파란 수의를 입은 야윈 사나이는 이승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살인자이다. 장로는 자신이야말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겠지만, 사형수는 지옥에 갈 것이라 여긴다. 죄수는 자신은 사형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장로에게 말해주며, 장로와 죄수가 서로 가야 할 곳을 말한다. 장로 “나는 하나님 앞으로 가는 사람이요.” 죄수 “하나님 앞으로?” 장로 “그렇소만, 노 형은 어디까지 가슈?” 죄수 “글쎄요. 우선 염라대왕 앞으로 가야 된다던대요.” 장로 “염라대왕이요?” 죄수 “네, 거기 가서 염라대왕에게 재판받고 전생의 값을 치러야 한다던데요.” 장로 (고개를 가로저어).‧…… 죄수 “그렇담,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구 한 사람은 길을 잘못 들은 셈이군요.” 장로 “………” 죄수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하나님 앞으로 갈 분, 저는 염라대왕 앞으로 가는 길인데 같은 길로 왔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뚱뚱한 장로와 염라대왕을 향해 가는 야윈 살인범은 두 갈래 길에 이른다. 장로는 천국으로 가려면 왼쪽 험난 한 길이 분명할 것으로 여겨 왼쪽 길로 들어선다. 사형수는 어차피 가야 할 길인지라 평탄한 길을 택한다. 장로는 험난한 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천당 길로 들어섰는데 두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면서 살인범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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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물들의 메아리없는 항변(상) - 이청준의
- 작가 이청준의 소설집 〈벌레 이야기〉(심지, 1988) 속에 수록되어 있는 표제작 〈벌레 이야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의 제목 속에 보이는 ‘벌레’ 이야기는 작품 자체 속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에 나오는 무슨 벌레[갑충]의 모습 같은 것을 이 소설은 조금치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독자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야 여기에서의 벌레란, 미물(곤충)과도 같은 하찮은 존재인 인간을 비유한 말임을 알게 된다. 이 작품 속에 미물과도 같은(‘벌레’와도 같은) 존재는 화자인 남편(‘나’)에 의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알암이 어머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미 현세의 여인은 아니다. 그녀는 벌써 생명을 잃은 존재로서, 그녀가 어떻게 해서 궁극적으로 그 귀한 생명을 잃게 되었는가의 과정을 이 작품은 진술해 보여주고 있다.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알암이 어머니는 이를테면 신의 횡포에 의해 그녀의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적어도 작가의 의중은 이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신에 의해 벌레와도 같은 미물로 취급되어 죽음에 처하게 된 여인이 바로 알암이 어머니라는 것이다. 이런 결론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이 기독교 세계관을 옹호하고자 하여 쓴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오히려 기독교적 계율에 도전하려는 의도를 더 많이 지니고 쓴 작가의 문학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을 기독교문학 작품이라고 강변하려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작품이 기독교문학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 소설은 기독교적 소재를 갖고 씌어졌으며, 또 기독교의 문제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기독교의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고도 진지한 물음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비기독교적인 세계에서는 논의되기 힘들 것이 아니겠는가. 초등학교 4학년의 아들(알암이)을 유괴당해 결국 피살체로 목도하게 된 아내의 고통스런 모습과 막바지에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처절한 아픔을 남편인 ‘나’의 시점에서 묘사한 작품이 〈벌레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4학년에 갓 올라온 순진무구한 소년 알암이가 아무런 죄 없이 주산학원 원장 선생, 곧 알암이의 스승에 의해 납치되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현장을 보고 독자들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벌레 이야기〉라는 제목에 보이는 벌레는 죽은 알암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 작품 속에는 두 마리(?)의 벌레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미물인 벌레가(어린 알암이가) 속절없이 죽어갔으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 전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아내 역시 불가피한 미물이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자살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굳이 그녀에게 미물이란 표현을 쓸 만한 사정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피살체로 발견되고 나서 그 사실을 목도한 아내가 겪는 심적 고통은 극한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이웃집에 사는 김 집사 아주머니가 끈질기게 접근하여, 기독교 신앙에 의지해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 집사로서는 결코 악의 없는 접근이요, 친절이기도 하였다. 처음엔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알암이 어머니는 그 정성에 감복했던지 마침내 동의하고 교회에도 나가게 된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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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물들의 메아리없는 항변(상) - 이청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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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적극적인 순교 자세(중) - 이병주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 고(故) 이병주 작가의 이 가톨릭 역사소설의 이해를 위해 잠깐 그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대건은 1821년 태생(충남 당진)으로 1836년 프랑스 신부 모오방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그해 12월 최방제, 최양업 등과 함께 유학길에 올라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신학 수업을 받게 된다. 1845년(8월)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 후 1846년(9월)에 사형선고를 받아 새남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말하자면 1820년대부터 1840년대 중반까지의 20수 년 간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어 있다. 여기까지 이르기는 데 두어 차례의 박해가 앞서 있었다. 신해년의 박해(1791) 및 신유년(1801)의 大박해, 곧 신유사옥(辛酉邪獄) 등이었다. (이들 중 특히 후자, 즉 신유박해에 대해서는 서기원의 역사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을 통해 그 실상이 어떠했던가를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김대건이 모오방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 뒤 마카오로 떠날 때(1836)까지 그 어간에는 별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카오에서 정신없이 신학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던 1839년에 이르러 고국 조선 땅에서는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상을 신학수업 중이었던 김대건 소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일은 1839년 1월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조선 땅에 세 명의 외국 신부들이 들어와 있었다. 앵베르 주교, 모오방 신부, 샤스땅 신부 등 프랑스 출신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에는 약 1만 명 정도로 신도들이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무서운 박해가 일어나게 되자 많은 신도들이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국가 권력이 단순하게 교회를 박해한다고만 해도 많은 이들이 다칠 것이었지만,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게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세도가(勢道家)들 간의 알력과 당쟁의 와중에 기독교도들이 일종의 희생물로 제단에 바쳐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헌종 5년 기해년(1839)에 일어난 박해, 곧 기해사옥(己亥邪獄)의 배후에는 어떤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었던가? 선왕 순조의 비(순원왕후)는 안동 김씨로서, 헌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하였을 때 대왕대비로 섭정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써 왔는데, 그 이유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를 천주교도였던 정약용이 의술로 치료를 해 준 일이 있었고, 더욱이 효명세자가 서거하자 그 일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부인은 풍양 조씨였고, 이 조씨 일파에서는 김 대비의 대(對) 천주교 온건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결국은 김씨 세도의 축출까지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버니 김유근 역시 천주교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행정의 실권이 우의정 이지연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새 정승 이지연이 천주교 박멸을 주창했으므로, 섭정 순원왕후는 본의 아니게 대세에 몰려 이를 허락함으로써 박해의 분위기가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고관들이나 하급 관리들도 이지연 정승에게 영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천주교 탄압도 말하자면 그 움직임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14세의 소년으로부터 79세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이 고난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파급된 박해에 의해 체포된 자의 수가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 박해가 끝날 즈음에는 순교자의 숫자만도 113명에 이르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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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적극적인 순교 자세(중) - 이병주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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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적극적인 순교 자세(상)-이병주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 작가 이병주(1921-92)의 실명소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소설 김대건’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역사상의 실재 인물인 김대건 신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교역자(성직자) 신분의 실재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 작품으로 완성한 일들이 ‘소설 김대건’의 출현 이전에 몇 작가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연희 작가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1983)란 제목의 소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의 특수 목회에 종사한 맹의순 전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에서인지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도 그만큼 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작품이 나온 바로 다음 해(1984)에 이병주의 작품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나왔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 두 작품들이 1인칭 시점의 작품들 못지않은 간증적 효과를 크게 거두고 있는 것은 두 작품들의 후반에 삽입된, 주인공들 자신의 서간문들이 상당한 분량으로 배열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와 확연히 다른 점은 이 작품이 일종의 역사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지나치게 역사적 사실에만 충실한 탓인지, 이 작품이 소설인지 아니면 전기(傳記)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독자들로 하여금 갖도록 만들고 있다. 1838년부터 시작된 마카오 경리부에서의 신학수업 장면들만 아니었더라면 이 작품은 분명히 하나의 ‘김대건 전기’로 되어 버렸을 개연성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후반의 많은 편지글들의 나열이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왜냐면 허다히 나열된 김대건의 서간문들은 그것이 결코 작가에 의해서 소설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김대건 자신에 의한 편지글 자체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양의 신부들에게 김대건 자신이 보낸 거의 비슷비슷한 서간들, 아니라면, 얼마간은 완전히 똑같은 내용의 서간들을 거듭 나열한 것은 독자들에게 매우 지루한 느낌을 가져다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하는 비판을 금치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하나의 전기 작품이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 그 이상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었으리란 짐작을 하게 한다. 결과를 두고 말하자면 사실이 그러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신부인 김대건이 살았던 시대(19세기)의 역동성을 살리고, 그 속에서의 우리 민족의 비운과 천주교의 전래에 따른 신도들의 수난, 그리고 그러한 여건 하에서의 김 신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의 고뇌와 순교라는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밀도 있게 다룰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독자들의 그런 기대에는 미흡한 작품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저 전기적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처리한 속에서 약간의 소설적 요소를 가미시킨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다. 차라리 그러려면 아예 ‘김대건전’을 처음부터 시도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만큼 이 소설은 이런 유(類)의 작품들이 대체로 테마로 삼게 되는 어떤 순교나 배교 등의 문제에 정면 도전을 하고 있지도 못하고, 또 김대건 신부 자신의 개인적 고뇌나 아니면 신앙적 승리의 개선을 부각시키는 일에도 결코 득의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주제의식이 희박한 소설이 기독교문학 작품으로서 성공하기가 매우 어려우리라는 교훈을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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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적극적인 순교 자세(상)-이병주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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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 황악문학회 활동 활발
- 김천과 상주지역 목회자와 평신도 시인들이 모여 정기모임 작품 속에 기독교적 색채 드러내 문학을 통한 신앙의 삶 표현 경상북도 김천지역의 기독교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인 배명식목사(모동제일교회)를 비롯한 목회자와 평신도 시인과 앞으로 등단을 준비하는 20여명이 지난해부터 모여 황악문학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김천에 위치한 복전교회(민길성목사)의 사모가 운영하는 ‘로뎀나무’란 커피숍에서 모여 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문학회 회장인 시인 배명식목사(사진)는 황악문학회에 대해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에 걸쳐 있는 황악산 주변 지역에서 평소 문학에 관심을 가진 담임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모여 정기적인 시낭송회와 작품품평회로 모이는 문학모임”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배목사는 “문학을 통해 신앙의 삶을 표현하고 그 작품으로 전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모임은 상주 모동제일교회에 부임한 배목사가 지역 내에서 시인이라는 소문이 돌며 주위에서 문학에 관심을 가진 목사들이 개인적인 교제를 가지면서 시작되었고, 김천 복전교회 민길성목사의 사모가 운영하는 ‘로뎀나무’ 커피숍에서 2020년 11월부터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해 문학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모임의 역사는 짧지만 회원들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단단한 문학회로 성장하고 있다. 회원은 20여명 정도이나, 벌써 민길성목사와 이상원목사(상주영오교회)가 문단에 등단하였다. 또한, 박연수목사 등 몇 사람이 등단을 준비하고 있다. 회원들은 네이버 밴드 ‘황악문학‘밴드에 수시로 글을 올리고, 매달 셋째 주 목요일 오후 2시에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문학공부와, 시낭송회, 그리고 품평회를 하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하여 회원 전체가 모이는 정기모임은 자제하고 있으나 몇 사람이 모이는 ‘번개모임’과 황악산 일대의 거주하는 기존 등단시인을 찾아가는 ‘시인순레’를 통해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지니고 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네이버밴드 ‘황악문학.시낭송회’에서 시와 사진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모임의 구성원이 목회자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독교 사상을 작품 속에 녹여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앞으로 기독교 문단의 빛나는 인재들로 활동해 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 회원으로는 김천의 김정숙시인과 구미 선산의 김정자시인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황악문학회 회장인 시인 배명식목사는 “시작품에서 드러나는 순수 서정이 시골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꽃들에 대한 작품을 다듬어 가고 있다”면서 “문학을 통한 ‘신앙의 삶’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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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 황악문학회 활동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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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하)
- 11면 기독교 소설 산책14 우리는 이제 이 작품의 주인공의 믿음 또는 배교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역사적 인물이 아닌, 가공인물 김신봉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사기장이 직업을 가진 청년이다. 원래 여주 땅에서 사기장이 노릇을 하다가 그 마을의 가마들이 아궁이를 닫는 바람에 그곳을 떠나 광주 땅으로 향하던 도중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이 운길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릇들을 만들면서 생활에의 의욕을 불태운다. 김신봉은 자신이 만든 그릇을 가지고 마재 마을의 정 부사 댁으로 갔다가 그의 아들 정약종을 거기서 만나게 되고, 그 집의 하인인 은돌이도 만나게 된다. 하룻밤 신세를 그 집에서 지게 되면서 신봉이는 하인 은돌이의 전도를 받게 되고, 후에 그는 천주교인이 되는 것이다. 김신봉의 신앙인으로의 변화는,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의 친구 덕환이가 끝내 신도가 되지 못한 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고 하겠는데, 성서의 모델로 말하면, 김신봉이 예수의 좌우에 달렸던 강도 둘 중에서 곧 회개하고 구원의 대열에 들어간 한 인물에 해당한다고 할 때, 친구 덕환이는 그중에서도 끝까지 예수의 구세주 됨을 부인하고 오히려 모욕적인 언동을 일삼은 다른 한 강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도 덕환이는 후에 운길 마을의 천주교도들을 관아에 알리는 밀고자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한편 무녀인 장모와 그녀의 딸인 아내가 끝까지 김신봉의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모와 아내는, 온갖 고문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배교를 거부하던 이 주인공(신봉)으로 하여금 결국엔 맥없이 배신을 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배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그의 아내에게 가해진 무서운 매질 소리와 그에 따른 갓난 아들의 울음소리였다. 이 작품 속의 다른 주요인물은 이가환인데, 그는 신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가환이 천주교도들을 고문하는 장면이 이 작품 속에서는 가장 생생하다고 할 만큼 그 장면은 작가에 의해 박진감 있게 묘사되고 있다. 가히 극단적 매저키스트라 할 가학적 행위가 이가환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그의 무서운 고문 때문에 결국 사기장이 김신봉은 배교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불신앙이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화로의 불씨처럼 신앙의 불씨가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을 당한다. 신자들 속에서는 배교자로 배척당하고 그래서 그는 다시 사기장촌으로 들어가 볼까 했지만 거기서는 그를 신자로 알고 두려워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찾아갈 곳이 어디인가? 이제 그는 신(神)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단단히 결심하고 좌포청의 포졸들 앞에 나서게 된 것이다. 자기를 천주교도로 치죄해 달라고 자수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순교를 자청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배교자의 명단에 이미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이 확인되자 심문관은 그에게 방면(석방)을 선포해 버린 것이다. “네 놈은 이미 천주장이가 아니야. 여기 명단에 네 이름이 버젓이 올라 있다. 알겠느냐?” 그리고 그 군관은 신봉이의 품에서 빼앗은 ‘백자 마리아 상’을 디딤돌에다 냅다 내동댕이쳤다. 그것들이 반짝이는 사기 조각들로 뜰 안에 어지러이 흩어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그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배교자로 한 번 낙인찍힌 신도가 온전히 정상적인 신자의 위치로 회복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 작품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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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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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무엇인가
- 아침에 일어나면 마주보고 웃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녀가 그렇고 사라가 그렇다. 얼마 전 내가 쓴 글이 활자화 되어 나왔다. 카톡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던 글이 생명을 가지고 꽃이 피었다. 물론 그 글이 나오기까진 산파의 아름다운 손길 사랑과 도움이 있었다. 사라는 말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고. 그 글을 읽는 데는 2분 정도 걸릴 거다. 그런데 나는 안다 가슴 뛰며 쓴 글은 친구의 가슴도 뛰게 된다는 것을. 한때는 시를 쓴다고 글을 다듬었다. 그것은 마음을 다듬는 것이었다. 그때는 마음을 보이는 것도 글을 주는 것도 쉽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편지나 책이라서 지금처럼 바로 날아가는 속사포가아니라 종이비행기, 종이배였다. 지식과 지혜 감성의 글들은 인터넷의 문을 열면 가득 차있다. 과거 세계역사 시작이래로 오늘까지 모든 것이 저장되어있고, 오늘 지금도 수많은 글이 생산되어 마치 나이아가라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미궁 속에서 나온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오 듯 수많은 글, 수많은 책들이 수산시장의 생선처럼 산채로 펄펄뛰면서 날마다 나오고 있고, 채소가게의 채소처럼 생산되고 있다. 우리의 글도 ‘농사지은 농부의 노고의 결과인가? 저 푸른 대양에서 건져 올린 생선인가?’ 아니면 ‘그를 만든 신의 산물인가? 우리의 생각은 어디서 오며 우리의 글은 또 어디서 오는 건가?’ 데이브호킨스는 고민했다. ‘인간의 행복은 왜 이렇게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늘 깨어지며 옮겨 다닐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유도하는 감정, 그 감정은 생각과 경험에서 만들어지고, 그 생각으로 감정의 애착관계가 만들어진다. 호킨스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애착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것은 본인의 의존성에 문제가 있지만 독재자와 같이 사람을 노예화 시키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도둑과 악마는 돈을 노리고 물질을 노리는 것 같으나 사람의 마음을 먼저 강탈하고 영혼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는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이고 마음을 약탈하듯 수많은 시스템과 기술, 글들도 이와 같이 본마음을 숨기고 장사하는 것이 많다. 오늘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남의글로 양털 옷을 입고 다가서는 세상, 어쩌면 더 악랄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는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자기생각을 버리고 자기내면을 남의 글이나 말로 포장하며 사는 세상, 그래서 수많은 위선자가 생긴다. 보통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말만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말과 글 대신 푸른 나무 잎을 읽어본다. 나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위대함도 구별해야한다. 참과 진리처럼~.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인가?’ 글은 사람의 인격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제 세대가 달라져서 수많은 글이 일초도 안 되어 복사되어 나온다. 성경을 인용하고 왜곡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만드는 인간들, 개탄해야하는 세대에 나는 산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하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뿌리 깊은 나무’도 생겼다. 그런데 생각을 내려놓고, 감정을 내려놓고, 욕망을 내려놓고 사는 길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레팅 고 서렌더>라는 기전도 결국 글이라는 매체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좋은 방법이다. 글, 글, 글, 글에서도 정직하자. /화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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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중)
- 여러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우리의 한 문제작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겠다. 배교와 인간구원의 문제,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나약한 인간이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의 심리적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강한 질문을 던지는 농도 짙은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리고 비록 이 작품이 순교와 배교의 문제, 특히 그중에서도 배교의 문제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다음의 문제, 곧 배교자가 되지 않으려고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는 교도들의 극단적인 수난 사례들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결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선교회 최고위 성직자요 교주 격인 권일신 사교(司敎)와, 작품상 그저 안가(安哥)라고만 알려진 평신도 등의 경우에서 확인되는 사례이다. 권일신은 실학자였던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요, 그 자신이 신분상으로도 양반인 지체 높은 분이었지만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부풀려진 사교(邪敎) 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금부에 자진 출두했다. 국문이 시작되었다. “천주교란 나라의 임금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무지막지한 미신인데, 네 어찌 양반으로서 그 같은 사교를 신봉하느냐.” 또 이어졌다. “너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 바른 대로 대어라.” “천주교에선 제사를 금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해괴한 짓이로군.” 둘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은 후 아래와 같은 주문과 응답이 서로 교환되었다.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선언만 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게야.” “백 번 죽어도 배교는 못합니다.” 이제 상황은 극한의 지경으로 바뀌어졌다. 다음날엔 그가 형틀에 묶이고, 고문을 당할 채비가 되었다. 고문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니 여기서 굴복함이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권일신은 “천주님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단칼에 잘랐다. 이에 지체 없는 명령이 떨어진다. “무릎을 쳐라.” 곧 아랫도리는 온통 붉게 물들고 살점들이 해어졌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정강이를 쳐라.” 명한다. 곧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두부(頭部) 경련 현상도 일어났다. “아직도 개심할 생각이 없느냐?” 권일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금부도사가 또다시 다른 말로 달래본다. 그러나 권일신은 답한다. “천주님의 명이 더 소중하니 죽는 길밖엔 없을까 합니다.” 결국 국왕이 그의 목숨만은 다치지 말라고 해서 그를 예산으로 귀양 보냈다고 한다. 안가(安哥)의 이야기는 더 처절하다. 그는 군월(軍月)에서 아홉 친구들과 함께 붙잡혀 왔다. 한 차례 고문을 받고 나자 일곱 명이 배교를 선언하고 말았다. 옥사(獄事)가 시작된 지 닷새째, 남은 둘 중의 하나로 그가 심문을 받고 있다. 천주를 버리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회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사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겠소이다.” 식이었다. “저놈을 쳐라.”는 명령과 함께 그의 엎어진 벌거숭이 등허리로 무자비한 곤장 세례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사또가 “안 되겠다. 주리를 틀라.”고 더 무서운 형벌을 명했다. 처절한 비명이 긴 여운을 남긴다. 처음 정채가 넘쳐흐르던 그의 용모는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다음에도 “어서 끌어내다 매를 쳐라.”는 분부였다. 지속적으로 고문을 당하던 마지막 날 그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들것에 실려 나온 안가가 장판(杖板) 위에 엎어져 사지가 붙들려 매어있다. 그런데 이번엔 단 한 방의 곤장에 온몸이 뒤틀리고 거품마저 뿜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순교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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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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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시인 활발한 유튜브 활동
- 이인영시인(사진)이 시집 「신의 선물, 어머니」는 출간하고 유투브 방송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한양대 유성호교수 평론에 의하면 이인영은 자신의 시 쓰기를 통해 자아와 타자를 동시에 품어 안는다. 그녀의 따뜻한 성정(性情)이 반영된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세상의 거칠고 막막하고 가파른 속도감을 넘어서는 위안과 치유의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다. 따스한 마음을 통해 번져오는 그녀의 언어 안에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의 가없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아름답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인영 시인은 성찰과 다짐이 반영된 성숙의 언어로 낯선 시를 쓴다. 서정시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모티프를 얻고 언어적으로 완성되어간다. 그런가 하면 이인영의 시는 만만찮은 사회적 상상력을 담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기억이든, 시간이 지나간 후의 흔적을 통해 그녀는 우리가 겪어온 삶과 죽음의 역사, 신생과 소멸의 상황들을 찾아내고 그 안에 자신을 투사(投射)해간다. 그녀에게 ‘역사’란 정지된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현재형일 때가 많다. 그것이 오래된 그녀만의 시적 존재론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설의 언어가 부조(浮彫)해내는 힘은, 공동체 차원이건 개인 차원이건, 일종의 ‘희망의 전언’으로 이어져가게 된다./안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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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상)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
- 서기원 작가의 장편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1979)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서기원(1930-2005)은 〈암사지도〉(1956)로 등단한 후 1961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당시 사상계사가 주는 동인문학상 후보상을 받으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여 〈혁명〉이나 〈왕조의 제단〉과 같은 장편소설들을 통해 작가 특유의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의식은 또 다른 작품 〈조선백자 마리아 상〉에 이르러서는 ‘정치권력과 종교’에 관한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본고와 관련하여 우리가 특별히 관심 두어야 할 부분은 국가권력과 기독교회와의 상호 대립관계이다. 때의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국가권력이 교회에 집요한 탄압을 가할 때에는 기독교 신자들 중에 부득불 배교자가 생길 수밖에 없고, 한편 자랑스러운 순교자도 구별되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 후에는 이들 배교자와 순교자 그룹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내분이 또한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그 대립의 실상이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고 본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한국의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의 전도 사업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싹이 튼 지 겨우 5년 만에 약 4천 명을 헤아리는 신도수로 증가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입교한 신도들 가운데에는 권일신·권철신 형제와 정약전·정약용 형제들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의 어느 누구도 닥쳐오는 정치 파쟁의 와중에서 수난과 희생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역사적 결과만을 이야기하면 이승훈, 정약종이 참수 당했고 권철신, 이가환 등이 혹형으로 옥사했으며 정약용, 김범우 등은 지방으로 유배당했던 것이다(김범우는 거기서 곧 죽었다). 전라도 진산 땅의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또한 앞서 참형되었었다. 이런 인물들이 살아 있었던 당시를 그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써진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은, 그러나 그들이 거의 생존해 있는 상태로 작품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순교’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작가의 애초의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이 작품이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가 ‘배교’의 문제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초기 천주교 전래시의 박해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기원의 이 소설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비견될 수 있겠다. 같은 기독교 역사소설로서 순교와 배교의 면에(그중에서도 특히 배교의 면에) 더욱 작가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상호 유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감동의 비중에 있어서 서기원의 것이 슈사쿠의 것을 따라잡기엔 다소 부족하지 않나 느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지나친 간결체 문장의 연속이 오히려 중후한 감동을 감쇄시키는 역효과를 내지 않았나 생각되며, 동시에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묘사가 단순히 대화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치 소설이 아닌 희곡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데, 그러나 그 희곡적 구성이 가져다주어야 할 성격묘사나 긴박감 조성을 이 소설은 별로 형성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평면적 인물설정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또한 이 소설이 너무 대화 중심으로만 전개됨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효과적인 지문의 서술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약점도 지니고 있으므로(즉 너무 압축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사건의 실상이 난삽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결점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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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상)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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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 나의 마지막 순간
- 모든 순간, 나의 마지막 순간, 난 어제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나는 당뇨환자라 모두가 걱정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가에 빛이 환히 비치고 나는 눈을 뜬다. 나는 그 순간을 느낀다. 밖으로 나와 당을 체크해 내본다. 신문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무슨 주제로 쓸까’ 잠깐 고민하고 글 제목을 써 내려갔다. 신앙 고백 철학 여행 등 나의 과거를 이야기할까 하다 오늘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을 적기로 한다. 글 쓰는 이와 글 보내는 이 생각하는 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여야 하니까. 글의 홍수시대에 산다. 한 사람의 생각과 글은 순식간에 모든 사람에게 퍼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남의 좋은 생각을 공감하여 보내면 나는 사라지고 그분만 남는다. ‘비워라, 너를 비워라’ 지난달 나는 등산 중에 어느 사찰을 갔다. “스님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생각은 무슨 생각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생각해봤자 모두 잡생각 아닙니까?” 옳거니, 나도 가끔 오늘 무얼 할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생각하다 ‘주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하고 묵상을 시작해 본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면 무엇이 남을까? 작은 여인, 소녀, 질투, 시기, 부러움, 겨우 하는 게 청소 독서 그림 그리기 정도 아닐까? 그래서 소아적 나를 버리고 기도해본다. 오늘 언니가 직장을 가지 않고 쉬는 날이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을 끝내고 수지로 아침을 먹으러 갈 것이다. 눈을 뜬 아들이 먼저 괜찮냐, 열이 안 나느냐 묻는다. 딸 지희의 전화가 온다. 괜찮냐고~ 어젯밤에는 구미코가 전화를 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할 때, 그들은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주님 혹 저가 염려하고 걱정해 주어야 하는 영혼이 있나요? 제가 지금 입고 있는 노란 원피스처럼 노란 신호등을 주셔요.‘ ‘말씀이라는 지도, 성령이라는 내비게이션, 기도라는 파워 전력-이런 것이 제 옆에 있네요’ 여행을 하면서, 기차를 타며, 비행기를 타며 늘 읇조린 말 ‘주여 내 영혼을 거두소서, 당신의 품에’ 오늘 나는 또 다른 묵상을 한다. 집에 앉아서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당신의 깃털로 써주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기도하는 순간, 글을 읽는 순간. 또 카톡이 온다. 우리는 수도 없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최후 마지막 말이다. 나의 최후는 어떨까? 지난 2월 21일 나는 내 어머니 박소년여사를 내 품에 안고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대명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가끔 그를 그분이라 부르고 그녀를 그 사람이라 부른다. 내게 하나님은 그분이 아닌 내속의 사시는 분, 나를 이끄시는 혼 속에 계신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 속에, 꽃이 피는 순간, 꽃이 지는 순간, 모두가 시를 사는 순간, 신을 사는 순간이다. ‘주여 나를 돌아보소서, 당신의 딸이옵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떴다, 오늘 아침 여기 있는 나를 본다 세상을 본다 하늘 바다 산 수많은 나무들 수많은 생각 속의 사람들 그들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 속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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