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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황광은이 그려준 유토피아,이 반 작 김윤태 연출 소년 공화국    우신 (牛臣) 황광은(1923-1970)은 1923년 2월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지북동 25번지에서 황도성 장로와 김도순 권사의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2004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이반 작 김윤태 연출<소년 공화국>이 극단 ‘반딧불이’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1923-1970)는 47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48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중앙YMCA 소년부 연습 간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성은 그 당시 YMCA 현동완 총무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황광은은 서울 중앙 YMCA 간사로 YMCA 지하실에서 유랑소년 20여 명을 모아 밤마다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구두닦이를 시켜 일하게 했다. 그는 6.25 피난시절에는 서울에 남아 있던 고아들 30여 명을 돌보다가 1.4 후퇴 때에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도에 있는 한국보육원에서 고아들의 벗이 되었다.    황광은은 어린시절 일본 목사 가가와 도요히꼬의 소설 ‘사선을 넘어서 ’를 읽고 큰 감화로 가난한 자의 벗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되던 1939년,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삼각산 기슭에 있던 향린원이란 고아원에서 8년간 고아들의 벗으로 일하면서 일제 말 암울했던 시기를 보냈다. 해방 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청소년운동, 기독교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연극단체 ‘원예술좌’의 창립동인이었고 아동영화 ‘하늘은 맑건만’ 등을 제작하였다. ‘크리스찬신문’ ‘기독교교육’, ‘새벗’의 창간과 편집,집필을 하였다.   황광은 목사    목회적으로서 새문안교회 부목사, 대광중고 교목을 거쳐 1961년부터 영암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김활란 박사와 함께 전국복음화운동 실무를 담당했다. 너무나 짧은 삶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크고도 넓고 깊다. 황광은 목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어린이의 참벗, 고아의 아버지, 선한 목자,화해의 사도,짧으나 긴 삶을 사신 분"  황광은은 아동작가,훌륭한 설교가,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은 맑고 너그럽고 착하였다, 그가 한 일은 크고 곱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한 스토리가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년 공화국》이다.  1970년 5월 어느날, 황광은 목사는 병상에서 이반 극작가를 불렀다. 소설 ‘소년 공화국’이라는 제목과 200자 원고지 다섯 장에 적어 놓은 서문과 두 장의 목차를 내밀었다. 구겨진 일곱 장의 원고지가 그로부터 33년이 지나서 희곡 《소년 공화국》으로 탈고된 것이다. 황광은은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소설로 완성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반 극작가에 의하여 2003년 12월에 희곡이 되었고 2004년 12월에 연극이 되어 우리 앞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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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11-07
  • 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여의도순복음교회 뮤지컬 빌 게이더 작 이반 연출 <알렐루야>    뮤지컬 <알렐루야>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가든그로브코뮤니티교회의 정기공연 작품이다. 그 당시 그 공연을 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부인되는 김성혜 목사가 미국에서 가져온<알렐루야>카세트 녹음테이프와 악보를 구해서 이영훈 전도사에게 넘겨주어 영산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코이노니아회가 다방교회라 할 수 있는’선교의 집‘ 모금을 위하여 이영훈 회장을 중심으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를 유료공연으로 기획하였다. 1979년 7월 1일에 선교센터 406호실에서 이반 각색,연출의 음악 정명소, 이영훈 회장, 안준배, 최완기, 김용덕, 윤남인, 오무석 등이 실무회의로 모였다. 먼저 《알렐루야》 원 카세트 녹음을 들은후 이 반 교수의 연극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예배극 형식으로 선교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뮤지컬 알렐루야    빌 게이더 부부의 공작인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선교무대는 한국 기독교의 팔십년대 선교방향을 제시해 주는 작품이었다. 음악의 빌리 그래함이라고 불리고 있는 빌 게이더 부부의 《알렐루야》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시도된 예배극이다. 노래와 춤과 연기를 통한 복음선포는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음악성과 문장력이 있는 이영훈 의 가사 번역은 미국의 감각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코라스를 맡은 정명소 음악은 그의 호산나 성가대의 가창력을 뛰어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이 반 연출은 하르트만에게 사사받은 예배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백여 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호산나 성가대와 사십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열 명의 연기자등 총 백오십여 명이 열연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은 팔십년대 문화선교를 보여주었다.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으로 인하여 《알렐루야》의 주제곡 ’살아계신주’ ‘주께 찬양을 드리세’는 한국교회 애창곡이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1979년의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감격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반은 숭실대학교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함경남도 홍원에서 피난내려와 정착한 제2의 고향이 된 속초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이반을 초청하여 재연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기념 뮤지컬 《알렐루야》를 2023년 5월 3일에 윤의중 지휘, 홍석임 연출로 다시 대성전 무대에 올려져 성전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사이에 실향민 이반은 2018년 9월 24일에 속초에서 본향으로 떠났다./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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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3
  • 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주여,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 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 (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라고 말한다.   (이반, 연극과 예배, 하르트만의 예배극론 도서출판 연극과인간 2003 참조)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향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예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 연예인교회의 예언자와 목수     연예인교회가 1976년 12월 10일에서 11일까지 이화여대 강당에서 3회에 걸쳐 올린 전도공연 《새롭게 하소서》 중에 제1부 연극부문에 해당하는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요나(이영후 분)가 타고 가는 지중해상의 선박이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뱃속이나, 또 니느웨의 언덕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요나가 외친 심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매 순간 심판을 받아가면서 최후의 심판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목에서 목수(신영균 역)를 만난다.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는 목수의 손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폭을 깨닫게 된다. 하르트만은 예배극에서 직접 예수를 등장시키지 않고 간접으로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르트만이 요나서에 예수를 상징하는 목수를 등장시켰다.   예배극 속에서 이반은 하르트만에게 전수받은 대로 예수의 이미지를 목수로 등장시켜 상징적으로 부각시킬 뿐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 연출을 하였다.   이반 연출은 니느웨의 작은 생명을 아끼고 깨어진 것을 고치는 목수를 등장시켜 요나서에서 니느웨가 심판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배극에서 예수를 등장시켜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배극의 기능이 예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꾀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중재자이다. 예배극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으로, 화해의 중재역을 담당하고 있다.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에 있어서의 지중해상의 요나가 탄 배는 교회고, 교회는 곧 세상을 상징한다. 1976년 성탄절을 앞두고 이화여대 강당에서 일만이천 명의 관객에게 펼쳐진 연예인교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연출자 이반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류에게 예수의 구원을 증언했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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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10-24
  • 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극작가 이반은 연극을 하게 되면서 갖게 된 관심사가 ‘종교극’이었다. 분단극은 스웨덴에서 종교극 유학 중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했다. 그는 1967년에 루터교회에서 <죽음의 계곡을 찾아서> 라는 성극을 극작하여 공연하고 나서 종교극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반의 그런 모색은 마침내 종교극의 대가인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울로프 하르트만 교수에게 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기독교 연극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카톨릭 미사의 극화 작업과 잉글랜드의 조지 벨 주교가 주관하는 성공회의 종교극 운동, 네델란드와 독일의 중세극 공연, 미국의 선교극 운동, 스웨덴을 비롯한 북구라파의 예배극 운동을 들 수 있다.   □ 올로프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     1906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하르트만은 어린 시절을 구세군 소년으로 보냈다. 그의 양친은 구세군 사관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키웠다. 하르트만은 웁살라대학 신학부를 졸업한후 스웨덴 국교인 루터파 목사로 오랫동안 교회 일을 도왔다. 그의 자서전적인 소설 《바다의 소리》 는 오 캐시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소년기의 그의 고민이었던 선과 악,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하르트만을 일약 유명한 작가로 출세시킨 작품은 그의 세 번째 소설 <성스러운 무도회>였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의 동역자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즐겨 다루는 원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구해 나갔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르트만은 희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톡홀름 근처의 스웨덴 최초의 도읍지인 시그투나 파운데이션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웨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스웨덴 정부는 하르트만이 창조해낸 모든 예배형식을 개체 교회에 보급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다. 하르트만은 희랍극과 중세극 중에서 현대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의적 요소와 전통적인 루터교의 예배의식의 극적 요소의 만남을 꾀해 예배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극이론을 창조해 내고 예배극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 《예언자와 목수》, 《생명의 면류관》, 《용광로의 불길》 등은 그의 극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제임스 영은 “나는 하르트만을 혼자서 소리를 내지 않는 목소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어 혼자서 외치지 않는다. 하르트만은 반독연자로 전체 작품의 드라마는 대화로 엮어졌다. 하르트만은 신비스러우리만치 노련한 솜씨로 고립적이거나 독백을 배제하고 작품 속 에서 사회성과 사귐이 일어나게 한다”고 극작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과 무대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르트만은 1968년 W.C.C 4차 웁살라 총회에서 희곡 《그 날에》, (독일어로는 《아모스 ‘70》 으로 번역되었음)를 발표하여 현대 기독교 국가들과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두고 행동하여야 할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아모스 선지자를 등장시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찾아 나서게 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대리석 궁과 전쟁터에서 작고 하얀 어린 양을 찾는다. 그리고 정의의 대림줄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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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10-17
  • 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이렇게 만날 줄 모르고 공연히 고생길을 걸은 장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로는 홀로 아름다운 천국에 취해 있다가 같은 곳에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사형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한 장로는 천사에게 물어본다. “지옥은 어디 있냐”고. 그러자 천사는 본래 지옥은 없고 천당만 있다고 일러준다. 장로는 평생을 교회에 잘 다니고 선행을 한 자신은 천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범죄자도 같은 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불쾌해 졌다. 그 순간부터 장로는 죄수가 있는 천당이 싫어졌다.     극작가 주태익     주태익이 각색한 <천당 간 사나이> 는 이범선 문학에 내재해 있는 신관이나 인간의 운명에 대해 원작자가 제기한 문제점을 살리는 것보다 연극으로서의 객관성을 담아냈다. 세속적인 장로가 죽어 황천길을 가던 중 저승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한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때 세상에서 살인하여 사형을 당한 죄수와 그에게 죽은 사람들과 구공탄 가스로 죽은 철학자가 등장하여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벌인다. 주태익은 이범선의 소설을 보수적으로 각색했다.     1976년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을 때 연출가 이반 교수와 극작가 주태익 선생이 필자에게 종로 2가 디즈니다방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주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문인극을 하는데 기획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원들로 문인극을 만들게 되어 이범선 원작, 주태익 각색, 이반 연출의 《천당 간 사나이》가 공연작이 되었다. 배우들도 자체적으로 선발해 노인 김광식, 장로 황금찬, 철학자 이보라, 춘심 윤경남, 아저씨 강정규, 아줌마 김정기, 만석 유성윤, 옥이 고계영이 배역을 맡았다. Y극회 ‘탈’의 김호태가 조연출을 했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중앙신학교 야간부가 있었다. 중견 문학인들이 배우가 되어 신학교 강의실에서 대본 연습을 하였다. 나는 연습실과 식당, 유전다방에 이르기까지 매일 출근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종로 2가 한국기원이 들어있는 빌딩 1층에 있는 유전다방에 가면 나중에 ‘목요회’가 된 ‘수요회’ 멤버 조향록 목사, 이범선 소설가, 김광식 소설가, 황금찬 시인, 주태익 극작가, 김봉삼, 강형요,김세익, 노정팔, 홍성건, 장하구 등이 언제나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때로는 윤남경, 송영 작가도 자리에 있었다   나는 기획을 맡아서 공연을 앞두고 남산에 있는 공연윤리위원회를 찾아가 대본 심의를 받아냈다. 공연 티켓을 이화여대 앞의 파리다방과 명동의 필하모닉음악감상실, 종로서적, 을지서점 등 서점가에 예매를 맡기는 일을 하였다. 1975년에 《최후의 유혹》에서 연극을 제작한 경험이 있어서 언론사로 보도 자료도 보내는 등,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보았다. 연극《천당 간 사나이》는 1976년 12월 25일 낮 3시와 밤 7시에 세실극장에서 2회로 공연하였다. 오십대 문인들이 어설프지만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여,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성탄의 은총을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각색자 주태익 선생이 1979년에 타계한 이후 원작자 이범선, 연출 이반, 노인 역 김광식, 철학자 역 이보라, 장로 역 황금찬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별세해 ‘천당 간 사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 ‘ 천당 온 사나이’를 연극하고 있을지도.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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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10-10
  • 문학평론(6)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Ⅱ 이반의 종교극     황광은, 주태익, 김원식, 김창열 등은 서울 YMCA에서 1964년부터 기존해 있던 극회 ‘탈’을 1967년에 재건하게 되어 그 작업을 극작가 이반에게 맡기게 되었다. 극회 ‘탈’은 조성현, 송종환, 전진호,이반, 차관, 이효춘 등이 모여 재건 첫 작품으로 1968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YMCA강당에서 이반 작 전진호 연출의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를 상연했다. 극작가 이반은 성경 속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현대적 입장에서 과감하게 해석했다.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는 예수의 이적에 의해 문둥병을 고치고 그에게로 와서 감사를 전한 한 문둥이의 이야기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할 때의 그의 모습과 부활했을 때의 결단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극회 ‘탈’은 이반 작 연출 《눈먼 가축사》, 《제4의 박사》, 《다른 목자》등 D.C.월슨의 작품을 공연했다.   극회 ‘탈’ 은 신인 창작극으로 소설가 황석영의 《환영의 돛》, 극작가 김상열의 《성야》, 이반의 《실향민》 등을 상연했다고 이반은 극회 ‘탈’의 성과를 밝혔다.   □ 이범선 작 이반 연출 천당 간 사나이     월남한 작가 이범선은 《오발탄》, 《피해자》로 6.25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이들에 대한 인간 본성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이범선이 1976년 발표한 소설집 《표구된 휴지》 에 수록된 단편 소설 《천당 간 사나이》는 그의 후기작으로 기독교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앞서 1958년에 발표한 《피해자》에서 종교의 위선을 문제 삼았던 작가는 《천당 간 사나이》 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의 내세관, 구원관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얀 수의를 입고 저승길을 걷고 있는 뚱뚱한 사나이는 이승에서 장로였고, 파란 수의를 입은 야윈 사나이는 이승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살인자이다. 장로는 자신이야말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겠지만, 사형수는 지옥에 갈 것이라 여긴다. 죄수는 자신은 사형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장로에게 말해주며, 장로와 죄수가 서로 가야 할 곳을 말한다.   장로 “나는 하나님 앞으로 가는 사람이요.” 죄수 “하나님 앞으로?” 장로 “그렇소만, 노 형은 어디까지 가슈?” 죄수 “글쎄요. 우선 염라대왕 앞으로 가야 된다던대요.” 장로 “염라대왕이요?” 죄수 “네, 거기 가서 염라대왕에게 재판받고 전생의 값을 치러야 한다던데요.” 장로 (고개를 가로저어).‧…… 죄수 “그렇담,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구 한 사람은 길을 잘못 들은 셈이군요.” 장로 “………” 죄수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하나님 앞으로 갈 분, 저는 염라대왕 앞으로         가는 길인데 같은 길로 왔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뚱뚱한 장로와 염라대왕을 향해 가는 야윈 살인범은 두 갈래 길에 이른다. 장로는 천국으로 가려면 왼쪽 험난 한 길이 분명할 것으로 여겨 왼쪽 길로 들어선다. 사형수는 어차피 가야 할 길인지라 평탄한 길을 택한다. 장로는 험난한 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천당 길로 들어섰는데 두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면서 살인범을 만나게 된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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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받은 심령들을 보듬는 시골교회 교역자 -박혜원의
     고 박혜원 작가의 문단 데뷔작 <구만리 하늘>(2002)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편소설은 강원도가 그 지역적 배경으로 되어 있다. 강원도 정선의 나전 마을에 세워진 한 시골교회에 새로 부임한 젊은 전도사가 신앙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단순한 내세지향적·보수적 신앙이 아닌, 하나님나라 지향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신앙에 새로이 눈을 떠가는 한 젊은 교역자의, 삶의 성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데에서 2천 년대에 나온 기독교소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아직 목사 안수조차 받지 못한 전도사 신분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건주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금 그 지역 교회에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 정선의 나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는, 아직도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교회 전도사 건주는 그 마을 교회에 부임한 후, 아직 음주의 타성을 버리지도 못한 처지였는데, 당시 그의 음주 사실을 안 그 교회 성가대의 이은희 반주자가 "말도 안 돼. 진짜 전도사 맞아요?"란 질문을 그에게 던졌으며, 또 이런 비판도 그에게 가해 건주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렇잖아도 전도사님의 설교에는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이 빠져 있어요. 항상 조심하셔야 한다구요." 그런가 하면, 그로 하여금 신학 공부를 하게 한 그의 절친한 친구, 한의사 영빈이 그에게 각별한 충고를 한 일까지 있었다. 목사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힘들면 기도해라. 기왕지사 택한 길, 의심 없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안 되겠니?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이 없이는 전도란 불가능한 거야." 이처럼 교역자로서의 자신의 내적인 부실과 허약성도 문제이지만, 시골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시무 조건의 취약성 또한 그의 근무 의욕을 떨어드리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끝없는 교회보수 공사, 교회기둥 역할을 해야 할 황 집사의 간암말기 확진, 첫 아이의 죽음으로 실성한 강릉댁의 정신이상 증세, 이미 헌금했던 패물을 되돌려 달라는 신도가정 내 불신자의 강압적 자세, 거기에다 군청에서 지시한 경로행사를 교회가 대행해 달라는 면사무소 직원의 청탁… 등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런 속에서 그가 목회하는 그 시골 교회의 교세나 재정 상태는 어떠했던가. "겨우 스무 명을 웃도는 신도들 중, 그나마 반은 폐광으로 직업을 잃고는 날품팔이로 가난했고, 반은 아무 능력도 없는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달에 만 원의 헌금도 벅차 보였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목회 여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그 나름의 믿음의 성장을 보이는 건주의 건강한 교역자 상은 다음의 인용문이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것 같다. "(그는) 이곳의 가난한 신도들을 놔두고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 시골 교회는 이제야 처음으로 목회자다운 목회자를 맞이하게 될 모양이다. 자기 출세(?)를 위해 이 시골 교회를 무슨 정거장마냥 가벼이 거쳐 가는 그런 목회자가 아니라, 상처받은 심령들이 신음하고 있는 이곳에다 뿌리를 든든히 박고 일생[종신]의 목회사역에 투신하기를 마음 다짐하는 젊은 목회자 건주의 앞날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일을 위해 그에게는 이은희와 같은 그 고장 출신 '토박이 처녀'가 또한 배우자로서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녀는 이제 이 교회 목회자의 '비판적 조력자'가 되어 이 시골 교회공동체가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열심히 그를 도와나갈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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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8
  • 신도들의 결연한 ‘마음 비우기’ 실천운동(하)-김병로의 〈산촌의 소리〉
                                                한편 김병로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를 읽고 나서 필자는 G.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혀 이질적인 것 같은 이 두 작품들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게 된 것은 독일 신학자 타이센이 그의 신학적 연구 결과를 소설로 형상화했듯이 우리 목회자 김병로도 그의 목회 체험을 같은 소설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타이센은 그의 소설을 통해 예수 시대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는데, 예수 시대에 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그런 소설을 그가 써 냈던 것이다. 그 원리가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의 목회 경험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써 내기 힘든 작품을 김병로 작가는 그의 나이 회갑을 넘긴 때 써낼 수 있었다.  그의 노련한 목회 경험에 의해 수집된 각종의 소재(또는 에피소드)들이 이 작품 속에는 허다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런 소재들은 생경한 자료들로 나열돼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답게 등장인물의 실천적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사실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오랜 목회체험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리라. 소설 작품 속에서 ‘묘사’가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묘사(‘보여주기’showing) 같은 것은 이 작품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간체 소설의 형식이므로 단순한 서술(‘말하기’telling)이 있을 뿐이다. 서술 일변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경지가 거의 묘사의 수준으로까지 독자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의 근원은 아무래도 작가의 실제적 체험의 반영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사이비 그리스도인은 모두 작가의 준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태삼 목사나 한용범 장로 같은 분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용범 장로를 위시해서 장도환 장로, 김상수 장로와 같이 그들은 후에 대부분이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된다. 특히 한 회장(한 장로)의 변화된 모습은 놀랄 만한 정도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가히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은 한국 교회의 한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의 노년 결혼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장면 설정은 이 작품의 초반에 이미 설정해 놓은 처녀 여전도사들의 독신 생활 중도 포기에 대한 풍자와 수미상응(首尾相應)한 구성법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민 교수(목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작가는 한국교회의 병폐 한 가지를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민 목사(교수) 자신은 이런 교계의 치부에 자기가 한 사건을 더 보태 줄지도 모를 ‘성직자의 노년 결혼’에 대하여 스스로 회개(포기)하고 결연히 제 길을 찾아 떨쳐나서는 것이다. 민 목사의 ‘마음 비우기’ 결단에 우리의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마지막은 주인공 송상희 전도사가 몸담고 있는 기도원의 공석 중인 원장 자리를 그녀 자신이 취하지 않고 선배인 하 전도사에게 양보하기 위해 편지를 띄우는 것으로 끝나지만, 짐작건대 하 전도사 역시 그 청을 흔쾌히 수락할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마음가짐’이 이 작품 속에서는 크게 강조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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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신도들의 결연한 ‘마음 비우기’ 실천운동(상) - 김병로의 〈산촌의 소리〉
    김병로 작가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1988)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병로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좀 생경하다는 반응을 일으킬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 이 작가에 대하여 조금은 소개해야 될 것 같다.   1926년 평안북도 태생인 김 작가는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신교회(예장)에서 상당 기간 실제 목회를 한, 일명 ‘목사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을 작가였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후 수십 편의 단편소설들과 수(數) 권의 장편소설을 써낸 역량 있는 소설가였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지 않은 것으로 그의 신상 기록에 보이는데, 몰沒 연대가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는 시종일관 ‘준열한 비판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 작가는 보수 정통적 신학이론에 굳게 서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으로 신자(목회자)의 생활을 영위하되, 다른 신도(평신도·교역자)들의 교회공동체에서의 삶이 비(非)기독교적(또는 反기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준열한 비판을 가하는 위치에 서있다.   작가는 오로지 절대자 하나님을 믿고 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권능을 힘입어 우리 신도들이 교회공동체의 삶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며, 또 어떻게 거듭난 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구호를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변화를 입어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참사람이 되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인인 체 행세하는 허다한 군상들을 향해 사이비 그리스도인의 자리에서 과감히 뛰쳐나와 참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줄기차게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외침이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타락성에 대한 그의 ‘준열한 비판’과 함께 토로되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의 ‘인간화’를 목표로 한 ‘새로운 존재’(New being)에의 열망과, 중생(重生) 지향적인 작가의 문학적 메시지가 어느 면에서는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자기(기독교) 옹호적이고 나아가서는 체제 옹호적인 것으로 평가받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일그러진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비인간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준열한 비판을 견지하는 예언자적 선포의 정신이 충일한 작품이라 볼 수 있기에, 이 작품이 아무리 자기(기독교) 옹호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선교 목적적이거나 교권(체제) 옹호적인 그런 의도의 작품으로까지 평가 절하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N. 호손의 〈주홍 글씨〉와 같이 기독교문학 작품으로서 순수문학(본격문학) 계열에 드는 작품이 될 수 없으리란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 소설이 코리 텐 붐의 〈피난처〉나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와 같은 간증문학적 특성을 지닌 신앙수기 계열에 드는 작품으로 볼 수도 없으리란 판단이다.   일인칭 시점의 서간체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것이 픽션(소설)이므로 좁은 의미의 간증문학이나 신앙수기로 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본격문학(순수문학)으로 분류하기에도 미흡하다 하겠으므로 결국 〈산촌의 소리〉는 양자 절충 양식의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이란 데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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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8
  •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예수의 사랑 - 정을병의 〈본회퍼의 죽음〉
      정을병의 단편소설 〈본회퍼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주는 제2회 한국소설문학상(1976)을 수상한 작품인 〈본회퍼의 죽음〉은 아마도 한신대학교에서 수학한바 있는 작가 정을병(1934-2009)이 불세출의 독일 진보적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의 생의 말기 행보를 만천하의 독자들, 특히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광포(廣布)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작품을 써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게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울림이 매우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본회퍼(1906-1945)는 독일 히틀러 총통의 세계 정복 야욕을 미리 간파하고 나치스 제3제국의 잘못된 야망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앞서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과 어울려 그 계획을 실현하려고 동참했다가 실패함으로써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1943.4.5.) 수형생활을 하던 도중,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1945.4.9.) 독일 고백교회 반(反)나치 저항운동의 기수라고 할 젊은 목사였다.   소설 〈본회퍼의 죽음〉은 그 본회퍼 목사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갇혀 지내던 때로부터 그의 죽음(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실제 모습을 다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10월경부터 1945년 4월 9일(본회퍼 처형일)까지 독일의 형무소들에서 일어난 일들을 수형자 본회퍼의 거동과 그에 대한 관변 측의 대응 등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1944년 10월경의 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니 그가 감옥에 수감된 지 1년 반(전체 수감 기간의 4분의 3)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뒤의 사건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이후 그가 1945년 4월9일 처형된 것을 감안하면 그는 구속 수감된 지 만2년 4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로부터 21일, 곧 3주 뒤에 히틀러는 자살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음의 부분이 독자들에게 어필한다. 수감자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 음모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형무관 크노블로흐가 본회퍼의 생명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를 구출하기 위해 탈옥을 권유하고 또한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정작 장본인은 다소의 동요 끝에 탈출 불가 쪽으로 아예 요지부동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본회퍼의 심리적 추이가 독자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것이다.   본회퍼는 수차 크노블로흐 형무관의 우정 어린 탈옥 권고를 받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갈등하는 순간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결국 자기의 탈출로 인해 어느 누구라도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앞으로의 그의 행동 방향을 정했다. 자기가 탈옥할 경우 게슈타포가 자기 부모든 형제든 약혼녀든 잡아다 고문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면 차라리 자기 한 목숨 희생당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형무관 크노블로흐와 수감자 본회퍼 사이의 밀고 당기는 ‘생명 지키기 작전’과 ‘생명 버리기 의지’의 숨 막히는 대결이 이 소설 속에서는 가장 광채 나는 대문으로 보인다. 처형장에서의 그의 최후 진술이다. “나는 기독교의 사랑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국가의 이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며, 마지막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본회퍼는 결국 예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그런 일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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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8
  • 김성한의 단편 〈바비도〉
      김성한의 단편소설 〈바비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1953년 장준하씨가 창간한 〈사상계〉 잡지에 발표되었던 〈바비도〉(1956)는 그 〈사상계〉지가 작가 김성한에게 제1회 동인문학상(1956)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그만큼 문학계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편 역사소설 〈바비도〉는 15세기 초엽의 영국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의 영국 왕은 헨리4세였다. 그는 1399년 사촌형인 상왕 리처드2세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악명 높은 임금이었다. 그는 왕좌에 오른 2년 뒤에 ‘이단분형령’(1401)이란 것을 통과시켰다.    기독교의 이단자들을 골라내어 불에 태워 죽여 버리라는 무서운 법령이었다. 1407년 이후엔 개혁자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 독회를 금지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바비도는 1410년 이런 조치에 의해 ‘이단 분형령’에 따라 화형을 당하게 된, 재봉직공 신분의 독실한 기독 청년이다. 그가 생각해 볼 때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별 못된 일을 저지르고서도 아무 탈 없이 지내면서도 평신도들에게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일은 할 수 없다.   또는 이 사람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번다한 규제들이 그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과 세속권력자들이 합세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규제하는 일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행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 사실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계가 분열하여 교황청이 원래의 로마에도 있고, 또 새로 아비뇽이란 곳에도 세워졌다. 교황청이 두 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그곳을 다스리는 교황이 각기 따로 있었다는 뜻이 된다. 교황이 둘이나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409년 피사종교회의에서 두 교황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새로운 제3의 교황을 선출했다.   그러나 앞서의 두 교황들이 그들의 자리를 절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이젠 교황이 셋으로 불어난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있었던 독실한 기독 청년 바비도가 기성 교회의 권위를 인정할 리 만무하고 또 그들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를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무슨 법이 만들어졌든 말든, 무슨 구실을 대어서 자기들을 규제하려고 하든 말든 자기의 신앙 노선만을 굳게 지키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법 때문에 제 신앙노선을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이것저것 따져 보았으나 자기는 역부족일 뿐이라 생각되었다. 위로 교황부터 아래로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조르는 위압감을 느꼈다. 로마교회 전체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큰 대조가 아닐 수 없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사교가 심문을 시작했다. “밤이면 몰래 영역복음서를 읽었다지?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느냐?” 무슨 물음에도 바비도는 사교의 뜻과는 반하는 말만 해댔다.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사교는 그에게 분형에 처하는 판결을 내리고, 그는 스미스필드 사형장으로 옮겨졌다. 헨리 태자가 나타나 그를 회유해 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바비도는 결국 한 줌의 재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 아니었을까?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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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1-05-17
  • 스스로 끝낸 고아 명숙의 짧은 한 생애(상) - 유재용의
    이범선 작가의 중편소설 〈피해자〉(1958)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학촌 이범선(1920~82)은 〈학마을 사람들〉과 〈오발탄〉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이다. 〈피해자〉는 남녀 크리스천이 주인공들로 설정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 남녀가 최요한과 양명숙이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 최 장로의 아들이 요한이고, 그 고아원에서 원생으로 살아온 여자 고아가 명숙이다.   요한은 서너 살 위였고 명숙은 그만큼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둘이 너무도 다정하게 학교엘 함께 다녔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 둘이 오누이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원장인 최 장로가 외아들이었던 요한을 장가보내려 하면서 아들 요한의 짝으로 명숙이가 아닌, 그 고아원의 후원자였던 어느 교회 목사의 딸을 지목해 놨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최 장로와 아들 요한 사이엔 상당 기간 냉기가 흘렀다. 요한은 자기가 명숙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음을 아버지 최 장로가 모르지도 않으면서 다른 처녀를 들여 밀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아원 운영이 어려웠던 때 그 목사 교회의 재정 지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원장 최 장로는 그 목사의 딸을 마다할 처지가 못 되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명숙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고아원을 박차고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요한으로서는 무슨 묘책을 찾을 수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결국 세월이 약이라고,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는 명숙이만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된 요한이 현실타협책으로 아버지의 요구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 목사의 딸과 결혼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루어진 가정이 화기애애하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요한은 어느 기독교계 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교회 출석을 잘 하는 모범적인 크리스천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편(요한)이 옛날의 고아 애인(명숙)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런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는 한 방편이라고나 할까,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회심하고 바른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들 내외는 그렇게 한 이십 년여의 세월을 사는 동안 어느새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른 요한과 명숙이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도 학교 동창들의 회식 자리였던 어느 한식 요릿집(흔히 술집이라고도 불리는)에서였다. 거기서 참으로 기적적으로 그 둘은 상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4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던 그 둘이 서로 동기 동창일 리는 만무하니까 정말이지 이해될 리 없는 운명적 만남이었다고 할 수밖에…. 요한은 손님, 명숙은 그 요릿집의 마담 신분으로였으니 말이다.   요한이 다음날 아침 학생들을 인솔하고 경주 불국사에 수학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명숙이 무조건 옛 애인 요한을 따라붙어 경주에까지 가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경유하여 다음날 새벽의 해돋이 구경을 하는 언덕에까지 마치 구경 온 학생이기라도 한 것처럼 동행하다가, 요한이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명숙은 그곳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그녀의 짧은 한 생애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이 사건이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문학평론가·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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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1-04-23
  • 크리스천들의 삶 또는 신앙 양태 - 유재용의 (상)
      작가 유재용의 기독교적 내용의 중편소설 〈위대한 환상〉(1996)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대한 환상〉은 김원일의 중편소설 〈믿음의 충돌〉(1994)을 많이 연상시키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아마 〈위대한 환상〉 가운데서도 예의 그 ‘믿음의 충돌’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의 충돌〉이 세 가지 양태의 기독교 신앙의 충돌 현상을 그려 주었던 것처럼, 〈위대한 환상〉도 역시 같은 세 가지 양태의 기독교 신앙적인 면의 갈등 양상을 묘사하고 있음이 둘 사이의 우연의 일치 아닌 일치점으로 보인다.   두 작품 사이의 유사점 가운데 특히 복수주인공 설정 면이 두드러지는데, 목자 신주엽, 모친 윤 권사, 화자 성문규, 이렇게 세 사람이 〈믿음의 충돌〉에서의 복수주인공들이라면, 〈위대한 환상〉에 있어서의 복수주인공들은 김장수 목사, 정치구 집사, 박만준 집사 등이다.  두 작품 사이의 유사점 가운데 또 하나는 이들의 소설 형식이 일종의 여로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원일의 것이 염상섭의 〈만세전〉처럼 배를 타고 여행하는 데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유재용의 것은 장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의 움직임 가운데서 시간이 점차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저한 차이점도 발견된다. 이제 다른 각도에서 지적할 수 있을 두 작품 사이의 상이점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시점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김원일의 것이 ‘일인칭 복합 시점’이라고 한다면, 유재용의 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동원하고 있다는 데에서 상호 차이점을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세 가지 양태의 신앙인 상에서 두 작품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문제는 다소 달라진다고 보겠다. 김원일의 것이 교인들의 보편적인 세 가지 신앙 유형을 드러내 준 것이라 한다면, 유재용의 것은 신앙인들의 개인적 기질이나 신앙 행태 등과 관련된 문제점을 세 가지로 구별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위대한 환상〉 속의 주요인물들인 김장수, 박만준, 정치구 등은 이 중편소설 속에서 복수주인공 급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주님영광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다. 김장수 목사는 며칠 전까지 이 교회의 담임목사 겸 당회장 신분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서 다섯 사람 속에 들어갈 정도로 명망이 있는 목회자였다. 이제 죽어서, 그 주검이 장지로 향하게 된 실정에 놓여 있다. 박만준 집사는 이 교회에서 사찰집사로 있으면서 김 목사를 보좌하고 있는 충직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집사는 김 목사가 정년이 되어 은퇴한 ‘참빛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찰집사 일을 보다가, 김 목사가 주님영광교회의 담임목사로 새로 부임하게 되자 그를 따라 이 새 교회에 와서도 김 목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일을 다시 맡게 된, 김 목사의 두터운 신망을 얻은 사람이다.   정치구 집사는 주님영광교회의 집사로 있으면서, 새로 부임한 김 목사가 교회신축운동을 전개하자 이를 반대하는 일을 벌이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그 교회에서 추방(제적)당하는 처지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그 후 이 교회에서 물러나 있다가 김 목사의 장례식 때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어 또다시 거센 폭풍을 일으키게 된다. 교회 당회원들의 처지에서 볼 때는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로 보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4-16
  • [세계명작과 성경의 만남 49] 독제국가에서의 무자비한 고문 - 조지 오웰의 「1984」
      누가복음 23:9, 10에서 헤롯이 여러 말로 물어 보았으나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고 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1903-1950)의 『1984』에서 독제국가 오세아니아는 반역하는 자들을 악랄하게 육체적, 정신적, 지능적 고문을 가하여 마음과 영혼까지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소설가 오웰은 고문이 끝났을 때 반역하는 자들은 인간의 껍데기에 불과하게 만들었음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세아니아 국가의 세계는 개인의 특권이 없는 세계이다. 이 국가에서는 정당의 지배권에 대한 항의나 반항을 하면 투옥당하여 고문당하거나 살해된다. 언어, 사상, 역사 같은 학문조차도 당(국가)의 지배로 조종된다. 목사들도 결창서의 감시를 철저하게 받으며, 각 방에 설치된 쌍방용 텔레스크린을 통해 감시를 받았다. 세계의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등 3개국은 영원히 전쟁 중이며, 적을 미워하도록 끊임없이 선동했다. 전쟁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독제 통치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영혼이 없는 획일화된 사회였다. “오세아니아”의 비밀 소수 독재 권력자 중의 한 사람인 오브라이언(45세)은 “진실성”에 근무하는 내부당원으로서, 독제정권에 항거하는 마음을 가진 외부당원인 윈스턴 스미스(39세)와 그의 정부 줄리아를 체포했다. 그들의 죄목은 당(국가)보다 그들 서로간의 사랑이 더 크며 국가에 반역했다는 것이다. 간첩, 태업, 반역 등 기다란 죄목을 덮어 쉬웠다. 자백은 형식이고, 고문이 진짜였다. 윈스턴은 수 없이 매질, 주먹질, 발길질, 곤봉구타를 당했다. 매를 피하려 이리저리 피하면, 갈비에, 배에, 정강이에, 사타구니에, 불알에, 척추에 매질을 더 가했다. 그 후엔 고문관이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만 해도,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고문자들은 윈스턴의 뺨을 때리고, 귀를 비틀고,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오줌을 못 보게 했다. 고문자들은 윈스턴의 자존심을 꺾어서 자기의 주장하고 분별을 하는 능력을 없애 버리게 했다.   윈스턴은 침대에 완전히 묶여있었다. 오브라이언이 모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가 윈스턴의 귀에 대고 “걱정마라. 7년 동안 자네를 관찰해 왔다네, 내가 너를 완전하게 해줄게!”라고 했다. 윈스턴은 침대 옆에 장치한 다이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다이얼의 숫자가 높이 올라갈수록 이상야릇한 고통이 가해졌다. 오브라인은 “윈스턴, 자네 일기에 ‘자유는 2+2=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다’고 했지?” “네.” 오브라이언은 왼손을 들어 윈스턴에게 엄지손가락을 감추고 4손가락을 펴면서 물었다. “지금 손가락이 몇인가?” “4개입니다.” “그럼 당이 5개라고 말하면 몇 개가 되나?” “4 개입니다.” 윈스턴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이얼의 바늘이 55를 가리켰다. 윈스턴은 고통과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숨이 가빠졌다.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이 몇 개인가?” “넷, 넷, 넷.” 바늘이 더 올라갔다. “손가락이 몇 개인가?” “넷! 그만해요! 그만해! 넷이요!” 바늘이 더 올라갔다. “몇 개인가?” “으악! 5개! 5개 입니다.” 윈스턴은 기절했다. 바늘이 70, 75로 올라갔다. 바늘이 80, 90에 와 있을 때, 윈스턴은 기억이 오락가락했다. 주사 바늘이 윈스턴의 팔에 꽂혔다. 온 몸에 퍼졌다.    전체주의자란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다. 소련 사람들은 종교재판 때보다 더욱 참혹하게 이단자를 처형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용의주도하게 순교자를 만들지 않았다. 고문과 고독으로 완전히 녹초로 만들어 비열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다.  /라이프신학원 총장, 국제크리스천학술원 원장,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 총재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4-02
  • (사)한국기독교문인협서 서면총회
    ‘감사’ 주제로 수필집과 동화집, 연간집 「기독교문학」 펴내기로 세미나와 문학사랑방, 회원확장과 계간 잡지발간 위한 모금도     새이사장에 이수영시인 선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제56회 총회를 ‘코로나19’로 인해 서면총회를 지난달 2일부터 진행하고, 이번 회기도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했으며, 새이사장에 이수영시인을 선출했다. 또한 동협의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수필집과 동화집 등 발간에 주력키로 했다.   이번 총회는 명예이사장에 최규창시인, 이사장에 이수영시인, 부이사장에 김행숙시인, 한상남아동문학가, 양효원시인, 박종권시인, 김예성시인, 상임이사에 김석림시인을 선출했다. 그리고 감사에는 이문수시인과 윤병춘시인을 연임키로 했다. 이사장단 구성은 임원선거관리규정에 따라 이사장으로 구성된 평의회와 법인이사회들이 선출해 총회에 보고했다.   특히 평의회 및 법인이사회는 “명예이사장은 사업 및 활동을 지도하기 위해 최규창시인을 유임하고, 이사장은 1993년에 등단한 이수영시인으로 선출했다. 이시인은 본협회 사무국장과 상임이사, 부이사장과 법인이사를 역임해 왔다. 시집 〈깊은 잠에 빠진 방의 열쇠〉를 비롯한 8권과 산문집 등을 펴냈다“면서, “부이사장은 김행숙시인과 한상남아동문학가는 유임키로 하고, 공석인 3명의 부이사장은 양효원시인(1992년 등단)과 박종권시인(1999년 등단), 김예성시인(2001년 등단)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상임이사는 김석림시인을 유임키로 했다”고 덧붙혔다.   동협회는 △제39회 한국기독교문학상 시상식, △세미나, △문학사랑방, △연건집 「기독교문학」 제43집 발간, △동화집 발간, △‘감사’를 주제로 한 수필집 발간, △회원확장운동 전개, △계간 「기독교문학」발간을 위한 1억원 기금 모금 등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특히 현재 1년에 1회 발간중인 「기독교문학」을 계간으로 발간하기 위해 1억원 기금조성 중에 있다.   한편 이번 총회에서 감사보고를 통해 “총수입금은 일반회계, 사랑시집, 수필집, 계간 〈기독교문학〉기금 포함 총 40,498,987원이었고, 총지출금은 38,418,006원이었으며, 잔액은 2,080,981원 이었다”면서, “수입금은 회비 11,929,930원과 〈기독교문학〉 제42집 광고비 3,200,000원, 사랑시집 7,361,000원, 수필집 6,664,567원, 계간 〈기독교문학〉 발행 기금 11,273,456원, 기타 이월금과 은행이자가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지출내역은 〈기독교문학〉 제42집 출판비 5.200,000원, 회보제작 및 발송비869,000원, 행정사무비 601,090원, 사랑시집(초판, 제판) 구입비 7,360,000원과 발송비 1,384,030원, 수필집 구입비 5,700,000원, 그리고 기독교문학과 수필집 발송비 2,377,230원 등 37,468,006원이 지출되었다”면서, “특별회계는 기본자산 3,000만원과 계간 〈기독교문학〉 발행기금 24,678,560 원이 통장에 입금되어 있음을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사업보고에서는 △본협회의 공익재단 확정 △‘사랑’을 주제로 한 시집 「사랑은 저렇듯 끝이 없어라」(창조문예사 펴냄) 출간 △‘사랑’을 주제로 한 수필집 「다시 더 사랑하기」(창조문예사 펴냄) 출간 △연간집 「기독교문학」제42집 출판 등을 보고했다.   한편 새이사장인 이수영시인은 “무엇보다도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하겠다”면서, “기독교문학인은 문학사역자임을 자각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복음화와 전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이사장은 ”코로나19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문학단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사단법인으로써의 위상에 맞는 사업을 추진할 것이다“고 덧붙혔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4-02
  • [세계명작과 성경의 만남 47] 독제체제에서 ‘무지는 힘’이다 - 조지 오웰의 「1984」
      마가복음 15장 15절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했다. 빌라도는 정치적이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1903~1950)은 <1984>에서 독제국가 오세아니아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노예’,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있다. 오웰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왜 자유는 노예가 되느냐를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와 그의 정부 줄리아 두 사람을 통해 극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윈스턴은 일터에서 두 사람을 알게 되는데, 그들은 윈스턴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 사람은 줄리아로서 26세의 처녀이다. 그녀는 윈스턴 스미스의 정부가 되는데, 이것은 당에 도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다른 한 사람은 오브라이언이란 강력한 내부당원으로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줄리아와 윈스턴을 국가 지도자인 ‘빅 브라더’를 타도하려는 방향으로 유도하여, 결국은 배신하여 줄리아와 윈스턴이 스스로 반역죄를 덮어쓰도록 유도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라는 이름에서 스미스는 영어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름을 상징하며, 윈스턴은 2차 대전 때 불굴의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름을 딴 것으로 위대한 영국인의 이름이다. ‘윈스턴’과 ‘스미스’란 두 이름을 합침으로써 풍자적인 대조를 이루게 한다. 윈스턴 스미스는 개성이 뚜렷하고 지적인 사람이었으나 전체주의적 독제국가에서 개성을 상실하고 로봇 같이 되고, 두려워하고 자식들조차 부모를 사상경찰에 고발 할 가보아 경계하는 얼간이가 되어 버렸다.   소설 <1984>의 마직 장면들 대부분은 윈스턴 스미스의 심문, 고문, 윈스턴의 잘못에 대한 부인, 배교행위, 궁극적인 고문에 더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지냈으며 사랑한다는 인간인 줄리아의 배신, 그리고 영적인 파괴는 너무나 철저하여, 소설 마직 장면에서는 윈스턴은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당은 그를 철저하게 파괴한 것이다. 당이 윈스턴을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당의 무자비한 고문 자행자인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고문을 계속 가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윈스턴은 당이 원하는 힘을 구사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고 있었다.   적나라한 힘은 당의 신인 것이다. 그 힘을 구사할 수 있는 제한 없는 기회가 있어야만 했다. 그런 기회가 없으면 당의 존재가치는 상실되는 것이다. 윈스턴의 사알행각이 바로 그런 기회를 준 것이다. 윈스턴은 당이 쳐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었다. 당의 집합적인 노력은 윈스턴 개인보다 훨씬 지적이었다.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었다. 내부당의 목적은 필요한 어떤 수단으로든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권력유지를 위해서 고문이 필요했다. 무자비한 고문이 오래 지속되어, 윈스턴은 지능은 서서히 파괴되었다. 당이 명령을 하면, 윈스턴은 검은 것은 흰 것이요, 2 곱하기 2은 5라는 것을 믿도록 했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손에 무자비하게 지능적으로 고문을 당했다. 윈스턴은 당이 개조한 인간이었다. 윈스턴은 당이 인정하지 않는 생각은 생각 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오세아니아 국가의 평화성은 전쟁과 관련된 기관이요, 전쟁은 <1984> 세계에서는 진실로 사회의 평화였다. 국가의 애정성은 방어할 수 없는 희생자에게 끊임없는 지긋지긋한 고문을 가하여, 백성들을 위한 ‘빅 브라더’의 사랑이 들어나도록 하는 곳이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쇠하여지고 붕괴되었다. 윈스턴은 육체는 살아있으나 사실은 죽은 인간이었다. 윈스턴은 당이 하라는 것 외에는 모르도록 하여 무지는 힘이었다. /라이프신학원 총장, 국제크리스천학술원 원장,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 총재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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