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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황광은이 그려준 유토피아,이 반 작 김윤태 연출 소년 공화국 우신 (牛臣) 황광은(1923-1970)은 1923년 2월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지북동 25번지에서 황도성 장로와 김도순 권사의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2004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이반 작 김윤태 연출<소년 공화국>이 극단 ‘반딧불이’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1923-1970)는 47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48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중앙YMCA 소년부 연습 간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성은 그 당시 YMCA 현동완 총무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황광은은 서울 중앙 YMCA 간사로 YMCA 지하실에서 유랑소년 20여 명을 모아 밤마다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구두닦이를 시켜 일하게 했다. 그는 6.25 피난시절에는 서울에 남아 있던 고아들 30여 명을 돌보다가 1.4 후퇴 때에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도에 있는 한국보육원에서 고아들의 벗이 되었다. 황광은은 어린시절 일본 목사 가가와 도요히꼬의 소설 ‘사선을 넘어서 ’를 읽고 큰 감화로 가난한 자의 벗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되던 1939년,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삼각산 기슭에 있던 향린원이란 고아원에서 8년간 고아들의 벗으로 일하면서 일제 말 암울했던 시기를 보냈다. 해방 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청소년운동, 기독교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연극단체 ‘원예술좌’의 창립동인이었고 아동영화 ‘하늘은 맑건만’ 등을 제작하였다. ‘크리스찬신문’ ‘기독교교육’, ‘새벗’의 창간과 편집,집필을 하였다. 황광은 목사 목회적으로서 새문안교회 부목사, 대광중고 교목을 거쳐 1961년부터 영암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김활란 박사와 함께 전국복음화운동 실무를 담당했다. 너무나 짧은 삶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크고도 넓고 깊다. 황광은 목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어린이의 참벗, 고아의 아버지, 선한 목자,화해의 사도,짧으나 긴 삶을 사신 분" 황광은은 아동작가,훌륭한 설교가,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은 맑고 너그럽고 착하였다, 그가 한 일은 크고 곱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한 스토리가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년 공화국》이다. 1970년 5월 어느날, 황광은 목사는 병상에서 이반 극작가를 불렀다. 소설 ‘소년 공화국’이라는 제목과 200자 원고지 다섯 장에 적어 놓은 서문과 두 장의 목차를 내밀었다. 구겨진 일곱 장의 원고지가 그로부터 33년이 지나서 희곡 《소년 공화국》으로 탈고된 것이다. 황광은은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소설로 완성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반 극작가에 의하여 2003년 12월에 희곡이 되었고 2004년 12월에 연극이 되어 우리 앞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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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행함으로 열매 맺는다
정인숙 목사 간증집 《일어나 걷게 하소서》를 읽고 강성애 권사 뜨거운 마음의 소유자 우리 남편 안병호목사는 정인숙목사의 간증집 <일어나 걷게 하소서>를 읽자마자 50권을 구입하여 교회 안내석에 갖다 놓고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읽도록 했습니다. 한 권사님이 이 책을 읽고 이러한 소감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이제까지 이처럼 눈물범벅이 되어 읽은 책은 없었습니다. 어떤 고난도 믿음과 기도로 승리 못 할 일은 없겠구나 깨달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저자는 꽃다운 이십 대에 결혼하여 딸을 낳고 알콩달콩 사는 어느 날, 감기인가 가볍게 생각하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류마치스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을 때만 해도 이리 불치병까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좋다는 이 병원, 저 병원, 한방 치료, 온갖 효험이 있다는 약초,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관절 마디마디 끊어질 듯 한 고통은 한시도 몸을 그냥 놔두질 않았습니다. 결국 새우처럼 꼬부러저 있는 몸이 되어 이혼을 당하고, 시골 친정에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손가락조차 쓸 수 없어 엄마가 매 끼 식사와 대소변을 받아 주시는 병 수발로 수년의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아버지는 앉은뱅이 딸을 만들 수 없다며,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달래면서 매일 다리를 잡아당기고 펴는 운동을 일 년 동안 시키셨지만 고문처럼 고통만 심해졌지 함께 지쳐갈 뿐이었습니다. 방문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고 꼬부라져 신음하며 사는 동안 생각하는 건 오직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 나를 도대체 누가 존재하도록 했을까’ 알 수 없어서 경전을 읽어봐도 답은 없었습니다. 교회라고는 가 본 적이 없었는데 교회 다니는 고모가 가끔씩 와서 하는 말에는 짜증만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찾아와 눈치를 보면서 ”이번 집회는 병 고치는 부흥회란다“ 슬쩍 던지는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고모와 많은 교인들의 극진한 떠받침을 받으며 난생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누워 구경(?)을 하는데 찬송 인도자나 온 교인들의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 그녀의 심령을 깨트렸습니다. 설교는 기대하던 병 고친다는 얘기는 없고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 못 박혀 죽었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등 열정적으로 아멘을 부르짖는 청중들속에서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환자들을 위한 안수기도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병이 나았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펄쩍 펄쩍 뛰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눈앞에 역사하시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훅 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가 내 구주라고 믿어졌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며 감격이 몰려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누가 회개라는 단어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이제까지의 잘못과 하나님을 무시했던 죄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신의 근거가 창조주 하나님임을 알면서 기쁨이 샘솟아 안수기도를 청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방언이 터지고 기쁨과 평화가 흘러 넘쳤습니다. 부흥회 후, 들것에 실려 돌아와 옛 꼬부라진 모습으로 다시 누워서 지내는 생활이 계속 되었지만, 그녀는 예전의 내면이 아닌 완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6) 원망과 비관은 사라지고 그녀는 기쁨과 감사와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애타게 갈망하며 누워서 구약을 40회 이상, 신약은 100독은 했습니다. 뼈가 맞닿은 엉덩이와 복사뼈의 욕창이 심하여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성경이 꿀처럼 달다는 말씀은 진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기록한 책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라는 것을 알아 왔으니 혼자서 있는 힘껏 소리쳐 기도하고, 있는 힘껏 찬송도 한 시간씩 소리쳐 불렀습니다. “저 집 딸이 이제는 정신까지 어떻게 되었나 보네” 동네 소문이 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주님, 나를 일으켜 주소서. 다시 걸을 수 있게 하소서!”라며 기도하는 매일 매일이 신명이 났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고 나는 다시 일어나 걷게 될 것이다.” 그녀는 현재의 몸 상태를 보지 않고 믿음의 결과만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순간 가슴이 후끈거리며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걸 느꼈습니다. 믿음은 행해야 역사하심이 따른다는 깨우침에 꽂혔습니다. 그녀는 그때부터 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목회 서신쯤 가니 글씨 모양도 조금은 자리를 잡아가고 통증도 확연히 줄었습니다. 정말이지 행동할 때 역사했습니다. 수년 동안 방바닥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엉덩이가 몇 번의 엎어짐에도 믿음으로 성령님을 의지할 때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 좁은 방안에서 날마다 일어났습니다. 조심스레 무릎으로 방을 기어 보았습니다. 시퍼런 멍든 자국이 무릎을 더욱 아프게 했지만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만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지도 4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그녀는 믿음을 한 순간도 놓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측은하다고 찾아온 방문객에게도 확신이 있게 전도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2) 이 말씀을 붙들고 싸워온지 수년, 1989년 봄, 그녀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꽃들과 파릇파릇한 잎들, 찬란한 햇빛의 환영을 받으며 통증을 견디면서 드디어 앞마당에서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자는 온전한 몸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담임 목회를 하며, 여러 환우들을 돕고, 글을 쓰며, “오직 믿음은 행함으로 열매 맺는다”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책을 세 번째 반복해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오랜 신앙생활이란 것이 얼마나 말씀 따로, 행함 따로의 거짓이었나를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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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여의도순복음교회 뮤지컬 빌 게이더 작 이반 연출 <알렐루야> 뮤지컬 <알렐루야>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가든그로브코뮤니티교회의 정기공연 작품이다. 그 당시 그 공연을 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부인되는 김성혜 목사가 미국에서 가져온<알렐루야>카세트 녹음테이프와 악보를 구해서 이영훈 전도사에게 넘겨주어 영산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코이노니아회가 다방교회라 할 수 있는’선교의 집‘ 모금을 위하여 이영훈 회장을 중심으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를 유료공연으로 기획하였다. 1979년 7월 1일에 선교센터 406호실에서 이반 각색,연출의 음악 정명소, 이영훈 회장, 안준배, 최완기, 김용덕, 윤남인, 오무석 등이 실무회의로 모였다. 먼저 《알렐루야》 원 카세트 녹음을 들은후 이 반 교수의 연극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예배극 형식으로 선교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뮤지컬 알렐루야 빌 게이더 부부의 공작인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선교무대는 한국 기독교의 팔십년대 선교방향을 제시해 주는 작품이었다. 음악의 빌리 그래함이라고 불리고 있는 빌 게이더 부부의 《알렐루야》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시도된 예배극이다. 노래와 춤과 연기를 통한 복음선포는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음악성과 문장력이 있는 이영훈 의 가사 번역은 미국의 감각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코라스를 맡은 정명소 음악은 그의 호산나 성가대의 가창력을 뛰어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이 반 연출은 하르트만에게 사사받은 예배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백여 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호산나 성가대와 사십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열 명의 연기자등 총 백오십여 명이 열연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은 팔십년대 문화선교를 보여주었다.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으로 인하여 《알렐루야》의 주제곡 ’살아계신주’ ‘주께 찬양을 드리세’는 한국교회 애창곡이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1979년의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감격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반은 숭실대학교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함경남도 홍원에서 피난내려와 정착한 제2의 고향이 된 속초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이반을 초청하여 재연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기념 뮤지컬 《알렐루야》를 2023년 5월 3일에 윤의중 지휘, 홍석임 연출로 다시 대성전 무대에 올려져 성전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사이에 실향민 이반은 2018년 9월 24일에 속초에서 본향으로 떠났다./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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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주여,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 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 (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라고 말한다. (이반, 연극과 예배, 하르트만의 예배극론 도서출판 연극과인간 2003 참조)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향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예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 연예인교회의 예언자와 목수 연예인교회가 1976년 12월 10일에서 11일까지 이화여대 강당에서 3회에 걸쳐 올린 전도공연 《새롭게 하소서》 중에 제1부 연극부문에 해당하는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요나(이영후 분)가 타고 가는 지중해상의 선박이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뱃속이나, 또 니느웨의 언덕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요나가 외친 심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매 순간 심판을 받아가면서 최후의 심판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목에서 목수(신영균 역)를 만난다.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는 목수의 손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폭을 깨닫게 된다. 하르트만은 예배극에서 직접 예수를 등장시키지 않고 간접으로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르트만이 요나서에 예수를 상징하는 목수를 등장시켰다. 예배극 속에서 이반은 하르트만에게 전수받은 대로 예수의 이미지를 목수로 등장시켜 상징적으로 부각시킬 뿐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 연출을 하였다. 이반 연출은 니느웨의 작은 생명을 아끼고 깨어진 것을 고치는 목수를 등장시켜 요나서에서 니느웨가 심판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배극에서 예수를 등장시켜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배극의 기능이 예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꾀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중재자이다. 예배극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으로, 화해의 중재역을 담당하고 있다.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에 있어서의 지중해상의 요나가 탄 배는 교회고, 교회는 곧 세상을 상징한다. 1976년 성탄절을 앞두고 이화여대 강당에서 일만이천 명의 관객에게 펼쳐진 연예인교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연출자 이반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류에게 예수의 구원을 증언했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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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극작가 이반은 연극을 하게 되면서 갖게 된 관심사가 ‘종교극’이었다. 분단극은 스웨덴에서 종교극 유학 중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했다. 그는 1967년에 루터교회에서 <죽음의 계곡을 찾아서> 라는 성극을 극작하여 공연하고 나서 종교극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반의 그런 모색은 마침내 종교극의 대가인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울로프 하르트만 교수에게 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기독교 연극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카톨릭 미사의 극화 작업과 잉글랜드의 조지 벨 주교가 주관하는 성공회의 종교극 운동, 네델란드와 독일의 중세극 공연, 미국의 선교극 운동, 스웨덴을 비롯한 북구라파의 예배극 운동을 들 수 있다. □ 올로프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 1906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하르트만은 어린 시절을 구세군 소년으로 보냈다. 그의 양친은 구세군 사관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키웠다. 하르트만은 웁살라대학 신학부를 졸업한후 스웨덴 국교인 루터파 목사로 오랫동안 교회 일을 도왔다. 그의 자서전적인 소설 《바다의 소리》 는 오 캐시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소년기의 그의 고민이었던 선과 악,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하르트만을 일약 유명한 작가로 출세시킨 작품은 그의 세 번째 소설 <성스러운 무도회>였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의 동역자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즐겨 다루는 원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구해 나갔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르트만은 희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톡홀름 근처의 스웨덴 최초의 도읍지인 시그투나 파운데이션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웨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스웨덴 정부는 하르트만이 창조해낸 모든 예배형식을 개체 교회에 보급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다. 하르트만은 희랍극과 중세극 중에서 현대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의적 요소와 전통적인 루터교의 예배의식의 극적 요소의 만남을 꾀해 예배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극이론을 창조해 내고 예배극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 《예언자와 목수》, 《생명의 면류관》, 《용광로의 불길》 등은 그의 극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제임스 영은 “나는 하르트만을 혼자서 소리를 내지 않는 목소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어 혼자서 외치지 않는다. 하르트만은 반독연자로 전체 작품의 드라마는 대화로 엮어졌다. 하르트만은 신비스러우리만치 노련한 솜씨로 고립적이거나 독백을 배제하고 작품 속 에서 사회성과 사귐이 일어나게 한다”고 극작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과 무대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르트만은 1968년 W.C.C 4차 웁살라 총회에서 희곡 《그 날에》, (독일어로는 《아모스 ‘70》 으로 번역되었음)를 발표하여 현대 기독교 국가들과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두고 행동하여야 할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아모스 선지자를 등장시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찾아 나서게 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대리석 궁과 전쟁터에서 작고 하얀 어린 양을 찾는다. 그리고 정의의 대림줄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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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이렇게 만날 줄 모르고 공연히 고생길을 걸은 장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로는 홀로 아름다운 천국에 취해 있다가 같은 곳에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사형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한 장로는 천사에게 물어본다. “지옥은 어디 있냐”고. 그러자 천사는 본래 지옥은 없고 천당만 있다고 일러준다. 장로는 평생을 교회에 잘 다니고 선행을 한 자신은 천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범죄자도 같은 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불쾌해 졌다. 그 순간부터 장로는 죄수가 있는 천당이 싫어졌다. 극작가 주태익 주태익이 각색한 <천당 간 사나이> 는 이범선 문학에 내재해 있는 신관이나 인간의 운명에 대해 원작자가 제기한 문제점을 살리는 것보다 연극으로서의 객관성을 담아냈다. 세속적인 장로가 죽어 황천길을 가던 중 저승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한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때 세상에서 살인하여 사형을 당한 죄수와 그에게 죽은 사람들과 구공탄 가스로 죽은 철학자가 등장하여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벌인다. 주태익은 이범선의 소설을 보수적으로 각색했다. 1976년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을 때 연출가 이반 교수와 극작가 주태익 선생이 필자에게 종로 2가 디즈니다방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주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문인극을 하는데 기획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원들로 문인극을 만들게 되어 이범선 원작, 주태익 각색, 이반 연출의 《천당 간 사나이》가 공연작이 되었다. 배우들도 자체적으로 선발해 노인 김광식, 장로 황금찬, 철학자 이보라, 춘심 윤경남, 아저씨 강정규, 아줌마 김정기, 만석 유성윤, 옥이 고계영이 배역을 맡았다. Y극회 ‘탈’의 김호태가 조연출을 했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중앙신학교 야간부가 있었다. 중견 문학인들이 배우가 되어 신학교 강의실에서 대본 연습을 하였다. 나는 연습실과 식당, 유전다방에 이르기까지 매일 출근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종로 2가 한국기원이 들어있는 빌딩 1층에 있는 유전다방에 가면 나중에 ‘목요회’가 된 ‘수요회’ 멤버 조향록 목사, 이범선 소설가, 김광식 소설가, 황금찬 시인, 주태익 극작가, 김봉삼, 강형요,김세익, 노정팔, 홍성건, 장하구 등이 언제나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때로는 윤남경, 송영 작가도 자리에 있었다 나는 기획을 맡아서 공연을 앞두고 남산에 있는 공연윤리위원회를 찾아가 대본 심의를 받아냈다. 공연 티켓을 이화여대 앞의 파리다방과 명동의 필하모닉음악감상실, 종로서적, 을지서점 등 서점가에 예매를 맡기는 일을 하였다. 1975년에 《최후의 유혹》에서 연극을 제작한 경험이 있어서 언론사로 보도 자료도 보내는 등,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보았다. 연극《천당 간 사나이》는 1976년 12월 25일 낮 3시와 밤 7시에 세실극장에서 2회로 공연하였다. 오십대 문인들이 어설프지만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여,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성탄의 은총을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각색자 주태익 선생이 1979년에 타계한 이후 원작자 이범선, 연출 이반, 노인 역 김광식, 철학자 역 이보라, 장로 역 황금찬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별세해 ‘천당 간 사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 ‘ 천당 온 사나이’를 연극하고 있을지도.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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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 황광은이 그려준 유토피아,이 반 작 김윤태 연출 소년 공화국 우신 (牛臣) 황광은(1923-1970)은 1923년 2월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지북동 25번지에서 황도성 장로와 김도순 권사의 3대 기독교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2004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이반 작 김윤태 연출<소년 공화국>이 극단 ‘반딧불이’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1923-1970)는 47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48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중앙YMCA 소년부 연습 간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성은 그 당시 YMCA 현동완 총무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황광은은 서울 중앙 YMCA 간사로 YMCA 지하실에서 유랑소년 20여 명을 모아 밤마다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구두닦이를 시켜 일하게 했다. 그는 6.25 피난시절에는 서울에 남아 있던 고아들 30여 명을 돌보다가 1.4 후퇴 때에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도에 있는 한국보육원에서 고아들의 벗이 되었다. 황광은은 어린시절 일본 목사 가가와 도요히꼬의 소설 ‘사선을 넘어서 ’를 읽고 큰 감화로 가난한 자의 벗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되던 1939년,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삼각산 기슭에 있던 향린원이란 고아원에서 8년간 고아들의 벗으로 일하면서 일제 말 암울했던 시기를 보냈다. 해방 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청소년운동, 기독교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연극단체 ‘원예술좌’의 창립동인이었고 아동영화 ‘하늘은 맑건만’ 등을 제작하였다. ‘크리스찬신문’ ‘기독교교육’, ‘새벗’의 창간과 편집,집필을 하였다. 황광은 목사 목회적으로서 새문안교회 부목사, 대광중고 교목을 거쳐 1961년부터 영암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김활란 박사와 함께 전국복음화운동 실무를 담당했다. 너무나 짧은 삶이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크고도 넓고 깊다. 황광은 목사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어린이의 참벗, 고아의 아버지, 선한 목자,화해의 사도,짧으나 긴 삶을 사신 분" 황광은은 아동작가,훌륭한 설교가,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은 맑고 너그럽고 착하였다, 그가 한 일은 크고 곱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한 스토리가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년 공화국》이다. 1970년 5월 어느날, 황광은 목사는 병상에서 이반 극작가를 불렀다. 소설 ‘소년 공화국’이라는 제목과 200자 원고지 다섯 장에 적어 놓은 서문과 두 장의 목차를 내밀었다. 구겨진 일곱 장의 원고지가 그로부터 33년이 지나서 희곡 《소년 공화국》으로 탈고된 것이다. 황광은은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소설로 완성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반 극작가에 의하여 2003년 12월에 희곡이 되었고 2004년 12월에 연극이 되어 우리 앞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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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1)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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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 여의도순복음교회 뮤지컬 빌 게이더 작 이반 연출 <알렐루야> 뮤지컬 <알렐루야>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가든그로브코뮤니티교회의 정기공연 작품이다. 그 당시 그 공연을 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부인되는 김성혜 목사가 미국에서 가져온<알렐루야>카세트 녹음테이프와 악보를 구해서 이영훈 전도사에게 넘겨주어 영산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코이노니아회가 다방교회라 할 수 있는’선교의 집‘ 모금을 위하여 이영훈 회장을 중심으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를 유료공연으로 기획하였다. 1979년 7월 1일에 선교센터 406호실에서 이반 각색,연출의 음악 정명소, 이영훈 회장, 안준배, 최완기, 김용덕, 윤남인, 오무석 등이 실무회의로 모였다. 먼저 《알렐루야》 원 카세트 녹음을 들은후 이 반 교수의 연극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예배극 형식으로 선교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하기로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뮤지컬 알렐루야 빌 게이더 부부의 공작인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선교무대는 한국 기독교의 팔십년대 선교방향을 제시해 주는 작품이었다. 음악의 빌리 그래함이라고 불리고 있는 빌 게이더 부부의 《알렐루야》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시도된 예배극이다. 노래와 춤과 연기를 통한 복음선포는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음악성과 문장력이 있는 이영훈 의 가사 번역은 미국의 감각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코라스를 맡은 정명소 음악은 그의 호산나 성가대의 가창력을 뛰어나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이 반 연출은 하르트만에게 사사받은 예배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백여 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호산나 성가대와 사십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열 명의 연기자등 총 백오십여 명이 열연한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은 팔십년대 문화선교를 보여주었다. 뮤지컬 알렐루야의 공연으로 인하여 《알렐루야》의 주제곡 ’살아계신주’ ‘주께 찬양을 드리세’는 한국교회 애창곡이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1979년의 예배 뮤지컬 《알렐루야》의 감격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반은 숭실대학교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함경남도 홍원에서 피난내려와 정착한 제2의 고향이 된 속초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이반을 초청하여 재연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 기념 뮤지컬 《알렐루야》를 2023년 5월 3일에 윤의중 지휘, 홍석임 연출로 다시 대성전 무대에 올려져 성전을 가득 채운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사이에 실향민 이반은 2018년 9월 24일에 속초에서 본향으로 떠났다./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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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10)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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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주여,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 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 (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라고 말한다. (이반, 연극과 예배, 하르트만의 예배극론 도서출판 연극과인간 2003 참조)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향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예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 연예인교회의 예언자와 목수 연예인교회가 1976년 12월 10일에서 11일까지 이화여대 강당에서 3회에 걸쳐 올린 전도공연 《새롭게 하소서》 중에 제1부 연극부문에 해당하는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요나(이영후 분)가 타고 가는 지중해상의 선박이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뱃속이나, 또 니느웨의 언덕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요나가 외친 심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매 순간 심판을 받아가면서 최후의 심판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목에서 목수(신영균 역)를 만난다.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는 목수의 손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폭을 깨닫게 된다. 하르트만은 예배극에서 직접 예수를 등장시키지 않고 간접으로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르트만이 요나서에 예수를 상징하는 목수를 등장시켰다. 예배극 속에서 이반은 하르트만에게 전수받은 대로 예수의 이미지를 목수로 등장시켜 상징적으로 부각시킬 뿐 직접 등장시키지 않는 연출을 하였다. 이반 연출은 니느웨의 작은 생명을 아끼고 깨어진 것을 고치는 목수를 등장시켜 요나서에서 니느웨가 심판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배극에서 예수를 등장시켜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배극의 기능이 예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꾀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중재자이다. 예배극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으로, 화해의 중재역을 담당하고 있다. 하르트만 작 이반 연출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에 있어서의 지중해상의 요나가 탄 배는 교회고, 교회는 곧 세상을 상징한다. 1976년 성탄절을 앞두고 이화여대 강당에서 일만이천 명의 관객에게 펼쳐진 연예인교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는 연출자 이반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류에게 예수의 구원을 증언했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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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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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극작가 이반은 연극을 하게 되면서 갖게 된 관심사가 ‘종교극’이었다. 분단극은 스웨덴에서 종교극 유학 중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했다. 그는 1967년에 루터교회에서 <죽음의 계곡을 찾아서> 라는 성극을 극작하여 공연하고 나서 종교극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반의 그런 모색은 마침내 종교극의 대가인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울로프 하르트만 교수에게 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기독교 연극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카톨릭 미사의 극화 작업과 잉글랜드의 조지 벨 주교가 주관하는 성공회의 종교극 운동, 네델란드와 독일의 중세극 공연, 미국의 선교극 운동, 스웨덴을 비롯한 북구라파의 예배극 운동을 들 수 있다. □ 올로프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 1906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하르트만은 어린 시절을 구세군 소년으로 보냈다. 그의 양친은 구세군 사관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를 키웠다. 하르트만은 웁살라대학 신학부를 졸업한후 스웨덴 국교인 루터파 목사로 오랫동안 교회 일을 도왔다. 그의 자서전적인 소설 《바다의 소리》 는 오 캐시의 작품과 비교되는데, 소년기의 그의 고민이었던 선과 악,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하르트만을 일약 유명한 작가로 출세시킨 작품은 그의 세 번째 소설 <성스러운 무도회>였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도 그의 동역자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즐겨 다루는 원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탐구해 나갔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르트만은 희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톡홀름 근처의 스웨덴 최초의 도읍지인 시그투나 파운데이션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웨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스웨덴 정부는 하르트만이 창조해낸 모든 예배형식을 개체 교회에 보급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다. 하르트만은 희랍극과 중세극 중에서 현대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의적 요소와 전통적인 루터교의 예배의식의 극적 요소의 만남을 꾀해 예배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극이론을 창조해 내고 예배극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 《예언자와 목수》, 《생명의 면류관》, 《용광로의 불길》 등은 그의 극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제임스 영은 “나는 하르트만을 혼자서 소리를 내지 않는 목소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어 혼자서 외치지 않는다. 하르트만은 반독연자로 전체 작품의 드라마는 대화로 엮어졌다. 하르트만은 신비스러우리만치 노련한 솜씨로 고립적이거나 독백을 배제하고 작품 속 에서 사회성과 사귐이 일어나게 한다”고 극작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과 무대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르트만은 1968년 W.C.C 4차 웁살라 총회에서 희곡 《그 날에》, (독일어로는 《아모스 ‘70》 으로 번역되었음)를 발표하여 현대 기독교 국가들과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두고 행동하여야 할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는 아모스 선지자를 등장시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찾아 나서게 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대리석 궁과 전쟁터에서 작고 하얀 어린 양을 찾는다. 그리고 정의의 대림줄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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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8)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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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이렇게 만날 줄 모르고 공연히 고생길을 걸은 장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로는 홀로 아름다운 천국에 취해 있다가 같은 곳에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사형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한 장로는 천사에게 물어본다. “지옥은 어디 있냐”고. 그러자 천사는 본래 지옥은 없고 천당만 있다고 일러준다. 장로는 평생을 교회에 잘 다니고 선행을 한 자신은 천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범죄자도 같은 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불쾌해 졌다. 그 순간부터 장로는 죄수가 있는 천당이 싫어졌다. 극작가 주태익 주태익이 각색한 <천당 간 사나이> 는 이범선 문학에 내재해 있는 신관이나 인간의 운명에 대해 원작자가 제기한 문제점을 살리는 것보다 연극으로서의 객관성을 담아냈다. 세속적인 장로가 죽어 황천길을 가던 중 저승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한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때 세상에서 살인하여 사형을 당한 죄수와 그에게 죽은 사람들과 구공탄 가스로 죽은 철학자가 등장하여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벌인다. 주태익은 이범선의 소설을 보수적으로 각색했다. 1976년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을 때 연출가 이반 교수와 극작가 주태익 선생이 필자에게 종로 2가 디즈니다방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주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문인극을 하는데 기획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원들로 문인극을 만들게 되어 이범선 원작, 주태익 각색, 이반 연출의 《천당 간 사나이》가 공연작이 되었다. 배우들도 자체적으로 선발해 노인 김광식, 장로 황금찬, 철학자 이보라, 춘심 윤경남, 아저씨 강정규, 아줌마 김정기, 만석 유성윤, 옥이 고계영이 배역을 맡았다. Y극회 ‘탈’의 김호태가 조연출을 했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중앙신학교 야간부가 있었다. 중견 문학인들이 배우가 되어 신학교 강의실에서 대본 연습을 하였다. 나는 연습실과 식당, 유전다방에 이르기까지 매일 출근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종로 2가 한국기원이 들어있는 빌딩 1층에 있는 유전다방에 가면 나중에 ‘목요회’가 된 ‘수요회’ 멤버 조향록 목사, 이범선 소설가, 김광식 소설가, 황금찬 시인, 주태익 극작가, 김봉삼, 강형요,김세익, 노정팔, 홍성건, 장하구 등이 언제나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때로는 윤남경, 송영 작가도 자리에 있었다 나는 기획을 맡아서 공연을 앞두고 남산에 있는 공연윤리위원회를 찾아가 대본 심의를 받아냈다. 공연 티켓을 이화여대 앞의 파리다방과 명동의 필하모닉음악감상실, 종로서적, 을지서점 등 서점가에 예매를 맡기는 일을 하였다. 1975년에 《최후의 유혹》에서 연극을 제작한 경험이 있어서 언론사로 보도 자료도 보내는 등,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잡무를 보았다. 연극《천당 간 사나이》는 1976년 12월 25일 낮 3시와 밤 7시에 세실극장에서 2회로 공연하였다. 오십대 문인들이 어설프지만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여,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성탄의 은총을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각색자 주태익 선생이 1979년에 타계한 이후 원작자 이범선, 연출 이반, 노인 역 김광식, 철학자 역 이보라, 장로 역 황금찬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별세해 ‘천당 간 사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 ‘ 천당 온 사나이’를 연극하고 있을지도. /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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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7)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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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6)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 Ⅱ 이반의 종교극 황광은, 주태익, 김원식, 김창열 등은 서울 YMCA에서 1964년부터 기존해 있던 극회 ‘탈’을 1967년에 재건하게 되어 그 작업을 극작가 이반에게 맡기게 되었다. 극회 ‘탈’은 조성현, 송종환, 전진호,이반, 차관, 이효춘 등이 모여 재건 첫 작품으로 1968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YMCA강당에서 이반 작 전진호 연출의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를 상연했다. 극작가 이반은 성경 속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현대적 입장에서 과감하게 해석했다.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는 예수의 이적에 의해 문둥병을 고치고 그에게로 와서 감사를 전한 한 문둥이의 이야기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할 때의 그의 모습과 부활했을 때의 결단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극회 ‘탈’은 이반 작 연출 《눈먼 가축사》, 《제4의 박사》, 《다른 목자》등 D.C.월슨의 작품을 공연했다. 극회 ‘탈’ 은 신인 창작극으로 소설가 황석영의 《환영의 돛》, 극작가 김상열의 《성야》, 이반의 《실향민》 등을 상연했다고 이반은 극회 ‘탈’의 성과를 밝혔다. □ 이범선 작 이반 연출 천당 간 사나이 월남한 작가 이범선은 《오발탄》, 《피해자》로 6.25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이들에 대한 인간 본성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이범선이 1976년 발표한 소설집 《표구된 휴지》 에 수록된 단편 소설 《천당 간 사나이》는 그의 후기작으로 기독교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앞서 1958년에 발표한 《피해자》에서 종교의 위선을 문제 삼았던 작가는 《천당 간 사나이》 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의 내세관, 구원관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얀 수의를 입고 저승길을 걷고 있는 뚱뚱한 사나이는 이승에서 장로였고, 파란 수의를 입은 야윈 사나이는 이승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살인자이다. 장로는 자신이야말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겠지만, 사형수는 지옥에 갈 것이라 여긴다. 죄수는 자신은 사형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장로에게 말해주며, 장로와 죄수가 서로 가야 할 곳을 말한다. 장로 “나는 하나님 앞으로 가는 사람이요.” 죄수 “하나님 앞으로?” 장로 “그렇소만, 노 형은 어디까지 가슈?” 죄수 “글쎄요. 우선 염라대왕 앞으로 가야 된다던대요.” 장로 “염라대왕이요?” 죄수 “네, 거기 가서 염라대왕에게 재판받고 전생의 값을 치러야 한다던데요.” 장로 (고개를 가로저어).‧…… 죄수 “그렇담,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구 한 사람은 길을 잘못 들은 셈이군요.” 장로 “………” 죄수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하나님 앞으로 갈 분, 저는 염라대왕 앞으로 가는 길인데 같은 길로 왔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뚱뚱한 장로와 염라대왕을 향해 가는 야윈 살인범은 두 갈래 길에 이른다. 장로는 천국으로 가려면 왼쪽 험난 한 길이 분명할 것으로 여겨 왼쪽 길로 들어선다. 사형수는 어차피 가야 할 길인지라 평탄한 길을 택한다. 장로는 험난한 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천당 길로 들어섰는데 두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면서 살인범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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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42] 처절하게 회개하는 삶 - 전길자의 「관계」
- 그 분은 제일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제일 좋은 것을 버리시고 제일 아끼는 것을 버리시고 그 분은 제일 낮은 자리 제일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오늘 나는 제일 높은 자리만 제일 좋은 것만 제일 앞에 서기만을 고집합니다 다 가지고 있는 데도 풍족함을 모르는 다 주셨는 데도 다 누리지 못하는 나는 전신 장애자입니다. - 「관계」의 전문 전길자의 「관계」는 신앙시집 〈이루어지이다〉(은혜기획 펴냄ㆍ1999년)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는 새로운 형태로 회개하는 기도시이다. 시의 구성도 기도시에서 벗어나, 오늘의 삶에 대한 회개의 모습을 추구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을 생활화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됐다. 1연과 2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함축했다. 3연과 4연, 5연은 화자인 나의 삶을 되돌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되돌아 보고, 오늘의 삶을 처절하게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제1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형상화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류의 구주이기 때문에 제일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것과 아끼는 것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일 높은 자리’와 ‘제일 좋은 것’, 그리고 ‘제일 아끼는 것’도 버리셨다. 이 ‘제일 높은 자리’나, ‘제일 좋은 것’, ‘제일 아끼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함축한 것이다. 제2연은 인류의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천한 환경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는 화려한 환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추운 겨울날 유대 베들레험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셉과 약혼했는데, 결혼 전에 예수를 잉태하였다. 호적령에 의해 고향인 베들레헴에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예수를 낳았다. 아버지는 다윗의 자손으로 집을 짓는 목수였다. 이러한 환경은 ‘제일 낮은 자리’나 ‘제일 천한 자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제3연부터는 화자의 ‘나’에 대한 삶이며, 그 삶에 대한 회개이다. 스스로가 지닌 죄악에 대한 고백이다. 제3연은 제1연과 대비시켜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오늘의 나는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것은 오늘의 인간들이 지닌 욕심의 행태이다. 제4연도 인간이 지닌 끝없는 욕심을 표현했다. 특히 “다 가지고 있는 데도”나, “다 주셨는 데도”란 구절은, 풍족한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그리고 그 축복의 삶에 대한 “풍족함을 모르는”나, “다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죄의 행위이다. 그것은 축복의 삶을 모르고, 누리지 못하는 욕심의 죄 때문이다. 마지막 연은 제3연과 4연에 대한 결과이다. “나는/전신 장애자입니다” 라고 진단보고서를 내놓았다. ‘정신 장애자’로 함축한 것은, 처절한 모습의 결과에 대한 표현이다. 회개를 통한 거듭나려는 과정이다. 특히 이 장애자는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행위에 대한 결과인 정신적인 장애이다. 이러한 이 시는 오늘의 삶에 대한 처절한 회개이다.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 속에서 신앙적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처절한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도이다. 특히 시적 구성이 분명하게 짜여져 있다. 언어의 배열도 간결함과 통일된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시의 틀이 견고하다. 전길자의 신앙시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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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42] 처절하게 회개하는 삶 - 전길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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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읽기 41] 절망을 극복하는 용기와 사랑 -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상한 영혼을 위하여」의 전문 고정희(高靜熙)는 1970년대와 1980년 초에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주목받았던 시인이다. 그의 시는 억압을 받는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의 시의 배경은 1970년대 유신시대를 거쳐 1980년 신군부 독재정권, 그리고 5·18광주민주화항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는 제4연 20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힘찬 언어의 시적 표현으로 지금에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진행형이다. 상처받은 영혼을 사랑과 용기로 위로하고, 희망의 내일을 향한 걸음걸이다. 그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연유한다. 1연은 상처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회복심리를 추구했다. 1행의 ‘상한 갈대’는 5행의 ‘상한 영혼’으로 대치되고 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는 절망하지 않고 삶을 지탱해 나가는 모습이다. 또한 “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는 자연의 이치이다. 뿌리가 깊으면 밑둥이 잘리어도 새 순이 돋기 때문이다. 특히 4행의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에서 절망을 극복한 모습을 강조했다. 1행에서 4행까지 상한 갈대의 자연적 현상을 보여주고, 절망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추구했다. 그리고 5, 6행은 현실적 극복의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제2연은 상처받은 영혼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개하고 있다. 물에 떠있는 부평초잎은 흔히 개구리밥이라고 말한다. 이 부평초잎은 물만 고이면 꽃이 핀다. 또한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등불도 켜진다. 이러한 현상처럼 상한 영혼도 어딘들 못 가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고 공동체적 삶을 추구한다. 그리고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나,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고 반문하는 것은, 절망을 극복하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제3연은 절망의 현실이다. 고통은 계속되지 않는다고 일깨워 준다. 그것은 ‘영원한 눈물’이나 ‘영원한 비탄’은 없다고 가르쳐 준다. 고통과 설움의 땅을 지나 뿌리 깊은 벌판에 서면, 고통과 설움에 의한 눈물이나 비탄은 지난 과거의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신앙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4연에서도 기독교신앙에 대한 믿음을 형상화했다. ‘하늘’은 ‘하나님’으로 기독교신앙을 의미하고 있다. ‘캄캄한 밤’은 현실적 절망과 고통의 상황이다. 그리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는 구원의 손길이다. ‘하늘 아래’에서는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기독교신앙은 새로운 삶을 주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연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형상화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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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읽기 41] 절망을 극복하는 용기와 사랑 -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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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40] 고통과 역경을 이긴 영원한 생명 - 유안진의 「들국화」
-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라빛 연보라 천상(天上)의 웃음 띠우고 마중나오신 성녀(聖女) 막달라 마리아 - 「들국화」의 전문 유안진의 「들국화」는 한얼산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피어난 들국화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시킨다. 이 들국화는 일상의 들국화가 아니다. 뜨거운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피어난 들국화이다. 이러한 들국화와 성녀 막달라 마리아를 시적 이미지로 대치해 전개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육체의 정열 속에서 헤매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신실하고 순결한 성녀(聖女)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엔 모리아끄가 지적한 것처럼, 허무와 육욕의 생활에서 온갖 죄를 짓는 동안 영혼이 허물어졌다. 일곱 사귀가 들렸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면 그녀의 성격이 무척 정열적이었다. 또한 그녀의 생활이 굉장히 육욕적이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가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간교에 걸려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창녀이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몸과 마음이 변화된 후에는 예수를 섬기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순결한 여인이 되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생애를 통해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속죄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 「들국화」는 한얼산기도원을 배경으로 ‘들국화’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시키고, 그의 삶을 형상화했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의 멸시와 통곡을 이기고 구원을 얻은 막달라 마리아의 생애를 재현시켰다. 4연의 짤막한 시 속에 막달라 마리아의 일대기를 함축시키고, 오늘의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시적 가치성을 획득했다. 제1연에는 들국화와 막달라 마리아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한얼산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피어난 들국화는 멸시와 천대를 받던 막달라 마리아로 대치시킨다. 기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이 한얼산기도원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기도를 향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 지난 생애의 질곡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연은 고유 명사인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보통 명사인 ‘여자’와 ‘남성’으로 끌어들여 오늘의 현실 세계로 바꿔놓고 있다. 멸시를 이기고 통곡을 삼키는 아픔을 통해 구원을 얻은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것은 숱한 고통과 역경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을 보여 주었다. 제3연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막달라 마리아의 빛깔을 표현했다. 그것은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이다. 그 빛깔은 제4연의 ‘보라빛 연보라’로 표현했다. 숱한 질곡을 극복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의 자리로부터 성녀의 자리로 옮겨 앉아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죄인들을 마중 나온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그 생애와 신앙은 우리의 신앙에 깊은 가르침을 준다. 그의 「저녁기도」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의 관계를 똑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 “어쩌면 내/눈감을 수 있을까요/막달라 마리아/당신의 여인은/날이 저물면/왜 자꾸 눈물나지요”(「저녁기도」의 마지막 연)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모두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정신적 전력(前歷)을 지녔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한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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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40] 고통과 역경을 이긴 영원한 생명 - 유안진의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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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9] 깨달음에 대한 삶 - 장수철의 「소망」
- 가식(假飾)이 아닌 마음으로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으로 옥상(屋上)의 하얀 눈을 밟는다. 너무나 많았던 미움의 얼굴들에게 지금의 미소를 던질 수 있는 이 아침의 공기로 믿음이 새로워지는 이 순간이 황홀하다. 사랑의 깊은 의미와 행복의 참된 가치가 이렇듯 눈부시게 와 닿는 옥상에서 봄을 기다리는 반가운 소식이 이미 와있는 저 산봉(山峰)의 숨결이 이렇게 고맙게 들린다. - 「소망」 의 전문 향토적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수철(張壽哲)의 시는 인생적인 서정과 현실의식, 북녘에 있는 고향에의 향수 등 다양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제4시집인 〈관악산 뻐꾸기〉부터 기독교의 정신적인 맥락이 뿌리내리고, 하나님 앞에서 고독한 언어를 교신(交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4시집 이전의 시에서도 그의 정신의 바탕은 기독교적인 맥락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그의 아동문학에서 대표작인 장편 소년소설 〈해바라기의 노래〉는 철저한 권선징악의 정신과 서민생활을 돋보이도록 묘사했다. 그 정신적 바탕은 기독교의 신앙에 두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적 정신은 그의 시에서 갖가지 색깔로 형상화되었다. 소망은 현존치는 않지만 장래에 실현될 것에 대한 기대이다. 성경의 구약에 있어서의 소망은, 의로운 자의 삶의 근거가 되는 구원사적 표적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신뢰와 소망으로써 미래에 대하여 약속을 주시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에 있어서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소망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된다. 이 시는 성경에서 일깨워 준 소망을 바탕에 두고 형상화했다. 신앙의 삶이 육화(肉化)된 이미지로 전개했다. 특히 “사랑의 깊은 의미와/행복의 참된 가치가/이렇듯 눈부시게 와 닿는”이란 구절이 신앙의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랑의 깊은 의미’나, ‘행복의 참된 가치’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부시게 와 닿는”이란 표현도 신앙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결과이다. 이 시는 6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시적 전개로 보면 3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2연과 3연, 4연부터 마지막 연까지를 두 개의 연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연은 깨끗하고 안온한 마음으로 옥상의 하얀 눈을 밟는다. 그것은 일상의 삶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일상의 삶은 가식적일 수도 있고, 생활에 찌든 불안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옥상’이 상징하듯 도시민의 삶이다. 제2연과 3연은 용서의 삶에 대한 기쁨을 표현했다. 화자는 눈을 밟으며, 미움의 얼굴들을 미소로 용서하는 사랑을 깨닫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믿음이 새로워지는 그 순간 자체가 황홀하다. 이 순간에는 어떤 꾸밈이나, 가식된 마음의 표현도 필요없다. 그대로 내보이면 된다는 실상을 일깨워 준다. 특히 ‘눈’이 주는 깨끗함의 이미지가 ‘용서’로 환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4연부터 마지막 연은 ‘깨달음’과 ‘소망’을 깨우쳐 준다. 신앙의 삶을 표현했다. ‘사랑의 깊은 의미’나, ‘행복의 참된 가치’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봄을 기다리는 반가운 소식이 고맙게 들리는 삶도, 신앙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저 산봉의 숨결이/이렇게 고맙게 들린다”란 표현은, 시의 가치성을 높여 준다. 산봉우리의 숨소리를 듣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깨끗하고 평온한 마음을 지닐 때만이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장수철의 시 대부분은 일상적인 서정 속에서, 짙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시를 읽어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초기에 보여준 향토적 서정성은, 인생적 서정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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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9] 깨달음에 대한 삶 - 장수철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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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기독인문학연구원서 세미나
- 기독인문학연구원(대표=고재백교수)은 오는 7일 역삼동 크리스찬살롱에서 「기독교 신앙과 과학의 건강한 관계 정립을 위한 한 크리스천 천문학자의 호소」란 주제로 독서 세미나를 열고, 반과학주의 경향을 지닌 한국교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날 세미나를 통해 한국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전할 방침이다. 강사로는 우종학교수(서울대)가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이란 책을 놓고 강의할 예정이다. 세미나 관계자는 “한국교회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반과학주의·반지성주의적 풍토는 교회 내부는 물론 외부에 있는 사람들조차 기독교와 과학이 상극인 존재로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며, “이러한 오해를 풀고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추구한 유구한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잇고자 노력하고 있는 우종학교수를 초청해 강의를 진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기독교 신앙과 과학 간의 건강한 관계 정립을 추구하는 저서를 집필하는 등 크리스천 과학자의 간절한 호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이 교회 내에서 존중받는 분위기가 세워질 필요가 있다”며, “창조과학 일변도인 한국교회의 변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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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기독인문학연구원서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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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학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 △ 한국 기독교문인협회는 '사단법인' 허가에 대한 감사예배를 드리고, 한국기독교문학 향상의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기관지 「기독교문학」발행, 문학강연회와 세미나 등 추진 교회순회 「문학사랑방」개최, 기독교문학인 양성에 중점 ◇ 김영진 이사장 한국기독교문인협회가 문화예술관계 비영리법인인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지난달 30일 감사예배를 드리고, 한국기독교문학 향상과 확산에 주력할 것을 다짐했다. 민법 제32조(비영리법인의 설립과 허가)와 문화체육관광부 및 문화재청 소관 비영리법인의 설립 및 감독에 관한 규칙 제4조(설립허가)에 의거하여 문화예술관계 비영리법인 설립을 허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협회는 1967년 1월 21일 창립된 이후 지금까지 임의단체에서 이제는 ‘사단법인’허가와 함께 공적인 단체로 활동하게 됐다. 이날 초동교회 난곡홀에서 드린 감사예배는 동협회 상임이사인 김석림시인의 사회와 하나은시인의 특송, 동협회 고문인 김상태 수필가의 기도, 김순권시인(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의 「또 하나의 업그레이드」란 제목의 설교, 동협회 수필 분과위원장인 박정미수필가(대전 반석교회 목사)의 축도 등 순서로 드렸다. 그리고 축하식은 사단법인 추진위원장인 최규창시인의 사회로 진행했다. 최시인의 경과보고에 이어 평의회 서기인 유승우원로시인의 임원선출 보고, 임승천전임이사장과 김영진신임이사장에 대한 이취임식도 가졌다. 또한 「축하의 말」에는 한국현대문학작가연대 이사장인 김용언 시인을 비롯한 〈창조문예〉 발행인 임만호시인, 이성교원로시인, 최은하원로시인 등이 전했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명예이사장에 최규창시인, 이사장에 김영진시인, 부이사장에는 엄원용시인을 비롯한 이수영시인, 김행숙시인, 한상남아동문학가, 이춘원시인, 상임감사에는 김석림시인, 사무국장에는 장재옥아동문학가, 사무차장은 이해경시인, 감사에는 이문수시인과 윤병춘시인이다. 그리고 시분과위원장에 홍계숙시인, 소설분과위원장에 성지혜소설가, 아동문학분과위원장에 이명희아동문학가, 문학평론분과위원장에 정선혜문학평론가, 수필분과위원장에 박정미수필가 등을 선출했다. 최규창추진위원장은 사단법인 추진에 대한 경과보고에서 “1996년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오피스텔을 구입한 이후 사단법인을 추진해 왔다”면서, “금년 1월 21일 제53회 총회에서 결의함에 따라 7월 26일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최위원장은 “1996년 이후 부동산은 준비되었으나, 기본자산인 3천만 원과 설립비용 2천만 원이 마련되지 않아 늦어졌다.”고 덧붙혔다. 이러한 동 협회는 △기독교문학 확산을 위한 교회순회 등 ‘문학사랑방’개최, △기독교문학인 양성 및 회원영입을 위한 사업 등을 추진한다. 지금까지 동 협회는 연례사업으로 〈기독교문학〉 발행과 세미나, 문학사랑방 등을 진행해 왔었다. 새로 선임된 김영진이사장은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사업을 계속 추진하면서, 한국 기독교문학의 발전과 확산에 주력할 것이다”고 밝혔다. 또한 김이사장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문학사역자이다. 문학을 통한 하나님나라 확장에 주력해야 한다”면서 “문학사역자란 사명감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덧붙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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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학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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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8] 성숙한 삶을 위한 길 - 김한나의 「엎어지는 연습」
- 장밋빛 두 볼에 아랫니 두 개 하루에도 열두번씩 내 딸아이는 엎어지는 연습을 하지. 딸아이 잠든 방 수만의 장미가 피고 또 지고 작은 별이 베개 밑에 잠들고. 배꽃잎에 꿀벌이 잉잉대는 아침 딸아이 잠을 깨 또 엎어지고. 나도 세상 바로 살고 싶어 엎어지는 연습을 하지 - 「엎어지는 연습」의 전문 김한나의 이 시는 시집 〈엎어지기〉(코람데오 펴냄·2001년)에 수록되어 있다. 엎어지는 행위를 통해 일어서기 위한 행위로 발전시키고,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과정으로 승화시켰다. ‘엎어진다’는 것은, 스스로 ‘일어선다’는 행위가 전제된다. 똑바로 일어설 수 없고, 똑바로 걸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엎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반복된 행위를 통해 넘어지지 않도록 신체적인 견고함을 지닐 수가 있다. 화자는 어린 딸의 행위를 일상생활 속에서의 삶으로 비약시키고 있다. 어린 딸이 엎어지는 것은 일어서기 위한 행위인 것처럼, 화자도 엎어지므로써 또다시 일어서서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어린 딸의 엎어지기는 신체적인 단련에 있지만, 화자의 엎어지기는 바른 삶을 위한 정신적인 행위이다. 엎어지는 것은 바른 삶을 위한 자성이다. 신앙적인 시각에서 보면 회개기도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화자의 어린 딸은 하루에도 수없이 엎어진다. 어린 딸의 행위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다닐 수 있을 만큼의 성장을 못했기 때문이다. 화자의 시각으로는 잠에서 깨자마자 엎어지는 어린 딸을 자의적 행위로 인식한다. ‘엎어지는 연습을 하지’나 ‘또 엎어지고’는 화자의 의식이다. 견고한 삶을 위한 행위가 전제되어 있다. 제4연에서 “나도/세상 바로 살고 싶어/엎어지는 연습을 하지”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화자 스스로가 또다시 일어서기 위해 엎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자 스스로가 엎어지므로써 또다시 일어설 수 있고, 엎어지지 않도록 훈련되어 견고한 신체기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삶을 그대로 영위하기 보다는 어느 계기를 통해 돌아봄으로써 성숙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화자는 시간적 고향인 유년에로의 회귀를 자신의 어린 딸을 통해서 성취한다. 제1연부터 3연까지는 어린 딸의 일상적인 생활이고, 4연은 화자의 삶이다. 어린 딸의 일상은 행복한 나날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의 일상은 어린 딸의 일상과는 다른 고뇌의 삶으로 전개했다. 특히 제4연은 이 시의 핵심으로 화자의 행위이다. 오늘의 세상을 새롭게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고백이다. 제1연부터 3연까지는 어린 딸의 ‘엎어지는 연습’을 보여주고, 화자의 삶을 위해 ‘어린 딸의 엎어지는 연습’이 그대로 이어진다. 그것은 “세상 바로 살고 싶어”서 ‘엎어지는 연습’이다. ‘엎어지는 연습’은 계속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러한 이 시는 바른 신앙인의 삶이다. 어린 딸의 행위를 통해 신앙적인 시각으로 스스로를 자각하고, 바른 삶을 위해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우리의 삶은 계기를 통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듯이, 자각하는 삶만이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삶도 회개를 통해 바른 삶을 획득할 수 있다. 끊임없는 기도생활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죄악이 가득한 오늘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한나시인은 1994년 〈아동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엎어지기〉 등 시집을 펴냈다. 김시인은 사물의 속성을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순결한 동심의 세계를 통한 우리의 원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추구한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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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8] 성숙한 삶을 위한 길 - 김한나의 「엎어지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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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7] 깨달음을 통한 바른 신앙의 길 - 김상길의 「그릇」
- 비울 줄 모르고 채우기에만 허둥거렸습니다. 남보다 앞서서 수북히 쌓아 놓았습니다. 그 부패하여 냄새나는 떡 덩어리를 은택의 향기로 알고 이웃을 불러들여 자랑했습니다. 채울 줄 모르고 비우기에만 바둥거렸습니다. 그 귀한 보배들을 실속 없는 선물, 그릇을 상하게 하는 티끌로 알고 사람들이 잠든 사이 소리내지 않고 비웠습니다. 별이 만발한 이 새벽 당신의 음성에 잠을 치우고 비로소 눈을 떠 비워서 얻는 것과 채워서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아름다운 그릇이 무엇인가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 「그릇」의 전문 이 「그릇」 은 〈숨겨진 빗장〉(종로서적 펴냄·1989년)에 수록된 시이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인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를 형상화하고 있다. 즉 보배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질그릇은 전도자를 가리킨다. 이 시에서 ‘그릇’이란 사물을 신앙행위로 대치했다. 그릇에 담기는 것은 신앙의 보물이며, 신앙행위의 실적이다. 외적인 모습이 아닌 내적인 삶의 형상화이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통해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한다. 이 시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신앙의 행위로 깨달음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릇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신앙적 행위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즉 그릇이 지니고 있는 용도를 삶의 형태로 환원시켰다. 채우기도 하고, 비울 수도 있다는 평범한 이치를 스스로의 생활에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은 채우기만 하고, 2연은 비우기만 했다는 고백이다. 1연과 2연은 ‘그릇’이 지닌 속성을 신앙적 행위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1연과 2연은 행위에 대한 깨달음이다. 제1연은 그릇에 채우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허둥거렸습니다”나, “남보다 앞서서/수북히 쌓아 놓았습니다”는 부지런한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부패하여 냄새나는 떡 덩어리를/은택의 향기로 알고/이웃을 불러들여 자랑했습니다”로 나타난다. 그릇에 담긴 보화를 사용하지 않고, 부패되어 냄새나는 떡 덩어리가 된다. 그것을 은택의 향기로 알고 이웃을 불러들여 자랑했다는 고백이다. 제2연은 제1연의 채우기만한 행위에서 비우기만 하는 행위로 전환한 상황을 형상화했다. 그릇에 담긴 보화를 사용하지 않고, 비우기만 했다는 행위이다. 그 귀한 보배들을 “실속없는 선물”이거나, “그릇을 상하게 하는 티끌로 알고” 비웠다며 고백한다. 그것도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소리내지 않고 비웠다고 실토한다. 신앙의 보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제3연은 별이 만발한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비로소 깨달음의 눈을 뜨고, 비워서 얻는 것과 채워서 버리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아름다운 그릇이 무엇인가를 분별한 것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그릇의 용도에 대한 깨달음이다. 어떤 것이 담겼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릇을 통한 신앙의 깨달음이며, 신앙의 교훈이다. 이 시는 “비울 줄 모르고/채우기에만 허둥거렸습니다”와 “채울 줄 모르고/비우기에만 바둥거렸습니다”란 고백은, “아, 아름다운 그릇이 무엇인가를/뒤늦게 깨달았습니다”란 신앙의 길에 도달한다. 또한 “그 부패하여 냄새나는 떡 덩어리를/은택의 향기로 알고”나, “그 귀한 보배들을/실속 없는 선물./그릇을 상하게 하는 티끌로 알고”, 그리고 “비로소 눈을 떠/비워서 얻는 것과/채워서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란 구절은, 신앙의 삶이 작용한 깨달음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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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7] 깨달음을 통한 바른 신앙의 길 - 김상길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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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6] 성숙한 신앙으로 ‘믿음의 삶’ 추구 - 권택명의 「믿음」
-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되었다. 거두어 들이기에만 황황하던 그 심사 조금씩이라도 버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을 때가 되었다. 실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데 내 미망의 눈에서 비늘을 걷어내고 오직 마음에만 와서 분명하게 자리잡는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확신할 때가 되었다. 간절한 바람만으로도 카메라 필름보다 더 확실한 영상을 맺는 그런 견고한 반석 하나 가질 때가 되었다. - 「믿음」 의 전문 이 시는 ‘믿음’이란 신앙적 행위를 점층적 기법으로 승화시켰다. 연이 구별되지 않고 15행으로 구성되었다. 연을 구별한다면, 1행과 2행, 3행부터 5행, 6행부터 11행, 12행부터 15행까지로 구분해 감상할 수 있다. 1행과 2행인 “이제/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되었다”는 믿음의 성숙함을 함축했다. ‘이제’는 신앙의 연륜을 의미한다. 신앙의 삶을 지난지 오래됐음을 시간적으로 암시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지닌 삶을 보여 준다. “거두어 들이기에만 황황하던/그 심사 조금씩이라도 버리고/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을 때가 되었다”란 구절은 현실의 삶을 청산하고, 신앙의 삶을 영위하는 시기임을 고백한다. 특히 “거두어 들이기에만 황황하던”은, 신앙이 없는 현실적 삶이다. 그러나 “그 심사 조금씩이라도 버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을 때가 되었다”는 신앙적 행위이다. “그 심사 조금씩이라도 버리고”는 세상적 삶에서 신앙의 삶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을 때가 되었다”는, 신앙의 믿음에 대한 자신감을 고백했다. “실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데/내 미망의 눈에서 비늘을 걷어내고/오직 마음에만 와서/분명하게 자리잡는/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확신할 때가 되었다”란 구절은, 신앙 즉 믿음의 확신이다. 특히 “내 미망의 눈에서 비늘을 걷어내고”는, “거두어 들이기에만 황황하던/그 심사 조금씩이라도 버리고”란 구절과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세상적 삶에서 신앙의 삶을 향한 걸음걸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확신할 때가 되었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되었다”란 구절의 의미를 구체화시켰다. 그것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연유한다. 즉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이니”란 구절을 연상시켜 준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기적과 표적, 천국 등을 말한다. “간절한 바람만이라도/카메라 필름보다 더 확실한 영상을 맺는/그런 견고한 반석 하나/가질 때가 되었다”란 구절은, 성숙한 신앙의 믿음에 대한 바램이다. ‘반석’은 ‘믿음’을 의미한다. 그 믿음은 카메라 필름보다 확실한 영상을 지닌 견고한 반석으로 비유한다. 이 구절에서 ‘확실한’이나 ‘견고한’은 믿음의 성격이다. 다시 말해 단단한 믿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되었다”란 구절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을 때가 되었다”와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확신할 때가 되었다”로 신앙의 믿음에 대한 시기와 확신을 구체화시켰다. 그 믿음은 “견고한 반석 하나/가질 때가 되었다”고 고백적 마음을 표현했다. 시적 구성의 질서를 철저하게 유지하면서, 믿음에 대한 시기와 확신을 지닐 수 있도록 유도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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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6] 성숙한 신앙으로 ‘믿음의 삶’ 추구 - 권택명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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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5] 쓰임받는 삶의 길 - 권숙월의 「그저 그런거나」
- 큰 집엔 금그릇 은그릇이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 다 있다셨네. 나는 그 중에 뭐 되어 곱게 뵈나? 금그릇이야 어림있나 은그릇도 될 수 없어 나무그릇 그거 돼도 잠도 안 오겠다만 윤도 없는 질그릇 그런거나 되었으면. 성령의 오짓물 입혀지면 더 좋겠네. 그래서 그 왜 그런거 있지 갓이 큰 어르신네 상에서도 제 실 참 잘 해낸 조선의 뚝배기 더도 말고 그저 그런거나 되었으면. 아니지, 뚝배기는 이 빠지면 개밥그릇 금이 가도 테 메우면 새로 쓰이는 큼직한 독 그러거나 되었으면. 믿음도 담고/소망도 담고 사랑도 아구까지 차게 담아 갈릴리 가나의 돌항아리 여섯처럼 주인에게 곱게 뵈어 귀히 쓰이는 질그릇 그저 그런거나 되었으면. - 「그저 그런거나」 의 전문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됐다. 일상적인 삶을 그릇의 종류와 사용의 용도에 비유하고, 그 사용의 용도를 전개한다. 화자는 귀히 쓰이는 금그릇과 은그릇보다, 질그릇으로 쓰임 받기를 바란다. 그릇 중에서도 화려한 그릇보다, 소박한 질그릇과 뚝배기, 그리고 큼직한 독(항아리)으로 쓰임 받기를 희구한다. 1연은 디모데후서 2장 20절인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란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큰 집에 있는 그릇의 종류를 열거한다. 큰 집은 부잣집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릇을 사용한다. 그릇에 따라 사용하는 용도도 다르다. 금그릇과 은그릇은 맛있는 음식이나 귀한 것을 담는 데에 사용된다. 그리고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사용된다. 그래서 ‘큰 집’, 즉 부잣집을 떠올리며 그릇의 용도를 말해 준다. 금그릇과 은그릇은 소중하게 보관하면서 사용하지만,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아무렇게나 사용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제2연은 신앙인의 겸손한 삶을 보여 준다. 여러 가지 그릇 중에서도, 윤기도 없는 질그릇이 되었으면 한다. 금그릇으로 사용되기는 어림도 없이 될 수 없고, 은그릇도 될수 없다고 고백한다. 또한 나무그릇만 돼도, 고맙고 황홀한 마음 때문에 잠이 안 올 것으로 여긴다. 이 얼마나 겸손한 삶인가.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명예나 사치스러움을 지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염원한다. 그것은 신앙인의 겸손한 삶을 소유해야만, 선택할 수 있는 겸손함도 지닌다. 제3연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염원한다. 성령의 오짓물을 입혀 구운 뚝배기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짓물은 윤기를 내는 잿물이다. 흙으로 만든 그릇에 발라 구우면 윤기가 난다. 성령의 오짓물을 입혀 구운 뚝배기는, 성령의 윤기가 나는 뚝배기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무장한 신앙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뚝배기는 갓이 큰 어르신네의 상에서도, 뚝배기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 갓이 큰 어르신은 선비이며, 학덕을 갖추고 어질고 순한 사람이다. 선비집의 뚝배기로 비유한다. 또한 ‘조선의 뚝배기’는 시류(時流)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의미를 지닌다. 제4연은 하나님으로부터 귀히 쓰임받는 삶을 희망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뚝배기는 이가 빠지면 개밥그릇이 된다. 항아리인 독은 금이 가도 철사로 테를 두루고 메우면 새로 쓰임을 받는다. 그래서 화자는 큼직한 독이 되어 믿음도 가득 담고, 소망도 가득 담고, 사랑도 가득 담아 귀히 쓰임 받겠다는 의지이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지닌 신앙인이다. 그리고 “주인에게 곱게 뵈어 귀히 쓰이는”란 구절에서, ‘주인’은 하나님이다. 또한 ‘곱게 뵈어’는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의 삶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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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35] 쓰임받는 삶의 길 - 권숙월의 「그저 그런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