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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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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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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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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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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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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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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 우리나라의 기독교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등에 이어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이르러 그 큰 진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세 작품들에 대하여 특히 유의하는 것은 이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그 다성문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앞의 두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작가 이승우(1959~ )는 먼저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월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1989년 계간 <문예중앙>에 <에리직톤의 초상·2>를 발표했는데, 그 다음해(1990)에 이 두 편의 중편소설들을 한데 합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작품이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앞서 이미 발표했던 중편을 보완하여 새로이 장편으로 확대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전례를 따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 이른바 기독교 사상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그것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이 탄생했음을 서로 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長篇化)를 보면서 먼저 그 과정이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의 경우와, 우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 유사함을 지적해 볼 수 있겠다. 1979년에 나왔던 중편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은 1987년에 장편으로 확대시켰는데, 마찬가지로 이승우 역시 1981년에 펴냈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을 1989년에 장편으로 키워 놓았다. 두 작가는 다 같이 첫 중편 발표 이후 8년의 기간을 경과한 뒤 그것의 장편화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같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새로이 선을 보이게 된 이 두 작품들은, 이처럼 장편화 과정상의 표면적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그 장편화의 내부적 실상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점도 보여주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므로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의 장편화를 ‘평판적 확대’라고 한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입체적 심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개보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개보작(장편화)도 원작 중편을 기본 틀로 놓고서 단순히 그 양적인 팽창, 즉 평면적 확대만을 결과 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은 것임에 반하여, <에리직톤의 초상>의 장편화는 양적인 확장은 물론 그 질적 변화, 곧 입체적 심화까지도 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아들>의 그것보다는 한결 차원 높은 장편화를 이루어 놓은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작 <사람의 아들>이 개보작(장편)으로 확대되었다 해서 그것이 특별히 원작 이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의 경우 그것의 장편화는 확실히 우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양적 확장 외에도 분명한 질적 변화가 그것의 장편화 과정에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적 변화의 배경에는, 그 원작엔 없었던 새로운 등장인물 신태혁이 개작본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 자체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상의 장치나 상황 전환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놓았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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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문화/여성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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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정치신학적 주제의 다성소설적 형상화 (1) -이문열의 '에리직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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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 그러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우레 같은 목소리가 조정인의 청각을 두들기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제 남편 이동영과는 영원히 나란히 설 수 없게 된 영혼의 낙인을 받았다는 것이 문득 아득한 슬픔으로 떠올랐으나 그녀는 한숨 한 번 짓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낙인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인간적 인식 안에서일 터이고, 이제 자신이 첫발을 내디딘 세계는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원리에 지배되고 그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어떤 신적 영역임을 그녀는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자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풀어본 교인들의 선물꾸러미 속엔 성화 액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노라. 더럽기에 추하기에 사랑하노라.” 논리와 신앙 간의 모순을 천착하면서 그 어떤 결론에 도달한 작가의 한 신앙고백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역시 <사람의 아들>과 <영웅시대>의 작가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믿음은 이처럼 역설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나의 훌륭한 민족문학 작품이라는 데엔 이의가 없을 줄 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쓰라림, 전후(戰後)까지 지속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산가족의 문제,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 등, 소재 상(上)만으로도 민족문학적 내용으로 충일한 작품이며, 특히 좌익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한 피 받은 백의민족으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일 지향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점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거부하고 인간해방의 찬가를 드높이 부름으로써, ‘이념’과 그것이 추구하는 ‘권력’에의 집착을 맹타하는, 이른바 우상파괴정신을 작품 전편에 견지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데올로기의 우상화, 또는 특정 권력자에 대한 신격화 등은 확실히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의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람의 아들>의 결미에서 보여준 것과 <영웅시대>의 결말에서 보여준 것과를 대비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엔 주인공이 필연적인 동기 없이, 좌절감 때문에 불가불 기독교에 복귀하는 식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뚜렷한 어떤 신앙으로 기독교로 귀의한다는 점에서 신앙 선택의 동기 제시가 확실히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의 강점은 기독교와 민족의식의 서로 만남에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위클리프·루터 같은 개혁자들이 시도한 ‘교회’와 ‘민족’의 연합 작업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의 우리 기독교회가 민족을 논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논의하는 지경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차제에 우리는 하나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작가 자신이 이 작품 가운데서 그 같은 내용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작품의 결미가 보여주는 단순한 ‘기독교의 입문’이라는 한계성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작가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으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점이 <사람의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영웅시대>의 작가 이문열이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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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소설산책]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6)-이문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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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 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자기 나름으로의 신을 설정하고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불가피하게 예전의 기독교로 복귀하게 되는 신학도 민요섭의 경우처럼, 이동영의 부인 조정인도 남편을 통해 무슨 절대 신앙처럼 간직해 오던 좌익사상과 그 활동에 대한 회의(懷疑)를 통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 무슨 뚜렷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 정도로, 또는 든든한 피난처로나, 혹은 매달릴 존재를 붙드는 정도의 의미 이외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시어머니가 기독교라면, 비록 교인들로부터는 현실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으면서도 무조건 배타적 반응을 일으키기만 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 갑자기 우익 인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랄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명 직전에 며느리에게 “예수 믿는 거 꼭 잊지 마래이. 지금 세상 보니 그 귀신이 제일로 힘 있는 거 같다.”라며 조상 귀신은 자기에게 맡기고 며느리는 참말로 예수한테 복 받는 사람 돼야 한다고 당부하던 때의 소박한 신앙 자세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요섭의 복귀와 조정인의 귀의가 그 성격상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요섭의 복귀는 비교적 단순한(?) 신학적 사고, 또는 관념적 성찰을 거친 결과에서 나온 갑작스런 선회였지만, 조정인의 귀의는 처절한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요섭이 조동팔과 서로 헤어지자고 한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던 신에게 공허감과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단순한 절망감과도 같은 그런 종류에 불과했지만, 조정인이 기독교에 몸을 전적으로 투신한 데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뒤의 그녀 나름의 삶의 절실한 이유와 관련되는 성격의 것이었다. 교리문답을 진행하던 목사가 이제는 그녀 자신의 믿음의 미숙성을 간파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세례를 받을 때가 못 된 것 같다.”면서 사양의 뜻을 표했으나 목사는, “교우께서는 이미 믿음이 소망이 되셨다.”라고 하며 초월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출발은 충분하다면서 그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인해준 것도 실은 그녀가 어느 정도 ‘논리’의 해독(害毒)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사상가들은 그들의 논리로써 기독교를 부정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삶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또 그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기를 찾으며 구원의 소망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의 신앙생활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문답에 통과되어 마침내 세례식에 참가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때 조정인은 기묘한 의식 상태에 줄곧 빠져들곤 했는데, 아마도 세례라는 말 속에 강조되고 있는 거듭남[重生], 또는 새로남[新生]이란 뜻이 지니는 어떤 최면효과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세례식 도중에도 여러 번잡한 상념에 젖어들곤 하는 것이었다. 여러 많은 추억 가운데서도 그녀를 가장 크게 사로잡는 것은 역시 남편 이동영과의 꿈 많은 시절이었다. 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비몽사몽간에 받게 된 최후의 속세의 유혹처럼 그녀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잠깐 세속적 유혹의 질긴 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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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소설산책]이념을 넘어선 인간해방의 찬가 (5) -이문열의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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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안디옥교회의 일제강점기와 6.25때 수난사에 숙연한 마음 지녀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감동을 주고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는 제24회 문학기행과 제43회 문학사랑방을 갖고,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주력키로 다짐했다. 직전 이사장인 김영진시인을 비롯한 동협회 회원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적 교류와 친교의 시간이 되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이영춘원로시인도 참석해 함께 동행했다. 이번 행사는 춘천 안디옥교회(담임=이준복목사)와 소양댐, 김유정문학관에서 진행했다. 춘천안디옥교회 수난사와 성장사를 기행 춘천안디옥 교회서 진행된 문학사랑방 광경 제43회 문학사랑방은 명예이사장인 최규창시인을 좌장으로 가졌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와 춘천 안디옥교회에서 진행했다. 최시인의 문학적인 이야기와 참석한 회원들의 작품낭독 등으로 문학적 사유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이날 두 번째 진행된 안디옥교회에서의 문학사랑방에 앞서 수필가인 박정미목사의 기도, 이수영시인의 「인사말」, 동교회 이준복담임목사의 「환영사」와 유진형원로목사의 「안디옥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들었다. 그리고 동협회 발전과 이번 문학기행, 그리고 문학사랑방에 기여한 동교회 원로목사인 유진형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이수영이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본협회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은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과 확산에 기여해 왔다”면서, “이번 모임을 통해 회원간에 문학적 교류의 장이 되고, 문학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준복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인 유진형목사님이 시인이시기에 어느 교회보다 문학적 정서가 풍성하다”면서, “우리 교회는 1919년에 설립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유진형목사는 “이 교회는 1919년 8월 2일 유한익전도사가 개척했으나, 1941년 일제가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 1945년 해방후 교회를 부활시켰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8개월간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당시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설명했다. 이날 문인들은 이러한 동교회의 수난사와 성장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이 수난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형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공감했다. 시와 수필낭독 등 문학적 이야기로 진행 이번 작품낭송에서 시에는 권오숙시인의 「삶」, 권은영시인의 「길 위에서」, 김석림시인의 「가시고기」, 김영진시인의 「노란 동백꽃」, 김종욱시인의 「잔잔한 바람」, 김한나시인의 「민들레꽃 찾다」, 김홍섭시인의 「그리움 크면 산되지」, 박재화시인의 「덤이란 말」, 박종권시인의 「폭염」, 양효원시인의 「맨 나중에」, 유진형시인의 「희망노래」, 윤병춘시인의 「사모곡」, 이문수시인의 「바이브레이션」, 이실태시인의 「새날의 각오」, 이자숙시인의 「신록의 6월」, 이행자시인의 「역전을 꿈꾸며」, 임만호시인의 「역사의 숨결」, 정이녹수필가의 「오직 오늘」, 조정태시인의 「분수」, 김순규시인의 「사랑」, 홍금자시인의 「살다가 보며는」, 수필에는 김명환시인의 「울산바위」, 박정미수필가의 「대나무의 꿈」, 유금희수필가의 「연꽃 문양」 등을 낭독했다. 특히 홍금자시인은 “살다가 보며는/괜한 말 주고받아/서로가 상처 만들고/속울음 삼킬 때가 있다//사랑하는 맘 간절하면서도/사랑하지 않는다고/빈 말을 할 때가 있다//돌아서지 않을 때에/돌아서 버리고/소용없는 눈물 흘릴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모든 것 다 떠난 후/혼자서 혼자서 울 때가 있다//저 멀리/교회 첨탑 바라보며/때늦은 후회로/고백처럼 혼잣말 할 때가 있다//살다가 보며는”라고 「살다가 보며는」란 시를 낭송했다. 또한 조정태시인은 “비록 하늘에 닿지는 못해도/솟구쳐 오르는 것은 나의 기도//비록 곡조를 빚지는 못해도/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나의 노래//솟구치고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흩날리는 물보라는/푸르름에 보내는 나의 수줍은 입맞춤//6월의 정원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를/받아주소서”라고 「분수」란 시를 낭송했다. 또 김순규시인도 “번개처럼 다가와/불꽃 하나로 온몸을 사르는/나는 없어지고 그대만 보이는 세상/타다가 하얀 재로 남아도/벅찬 가슴/사랑이여”라고 「사랑」이란 시를 낭송했다. 박정미수필가는 「대나무의 꿈」이란 수필에서 “나도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고 전제한 후 “속이 비어서 좋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겁이 많아서 하늘을 경외함이 좋은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마다마디 하늘을 나는 꿈을 접어 하늘로 곧장 오른 대나무의 속사랑을 들여다본다. 유월의 대나무 숲을 보며 꿈을 꾼다. 하늘의 존귀함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을 사랑하며 함께 뻗어가는 세상을…”라고 낭독했다. 이러한 문학사랑방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좌장인 최시인의 문단야사와 시와 수필의 감상으로 감동의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 ‘김유정문학촌’ 기독교문협 회원들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했다 이날 서울로 상경에 앞서 소양댐을 둘러보고,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문학촌을 방문했다. 이 문학촌 곳곳에서 김유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김유정은 ‘한국의 영원한 청년작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의 소설을 남겼다. 이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게 특징이다. 이 문학촌은 2002년 8월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은 것이다. 한국 근대 단편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부근에 김유정역과 김유정우체국 등이 들어서며 김유정마을이 형성되었다. 특히 그의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사료관, 체험관, 야외공연장, 농산물판매장 등이 이색적이었다. 이 문학촌에는 김유정의 동상과 그의 대표작인 「봄봄」을 펼쳐놓은 모양의 조형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유정기념전시관과 김유정이야기집에는 1930년대 우리 문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날 관람한 문인들은 “이러한 김유정 생애의 흔적과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다가 왔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문수시인은 “1935년에 등단해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창작했다”면서, “등단한지 2년만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유정문학촌에 마련된 커피숍에서의 향기 짙은 커피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감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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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협, 춘천서 문학기행과 문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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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 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박요한 작가의 <불타는 땅>(1990)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기독교 역사소설 형식의 이 작품은 <인자의 땅>(1987)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목사 신분에 어울리게도 첫 번째 장편에 이어, 이 두 번째 장편에서도 기독교 세계와 관련된 소재를 그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단 전작이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 소재를 찾아본 것이었다 한다면, 후작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여기서 과거의 역사란 주후 1세기, 특히 예수 시대 또는 신약성서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시대, 특히 그(예수)의 처형 시기가 정점을 이루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화한 소설들로는 외국의 경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등이 있고, 국내의 경우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백도기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박요한의 <불타는 땅> 한 편이 더 보태어지게 된 셈이다. 소설 <불타는 땅>은 그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다분히 <사반의 십자가>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을, <사반의 십자가> 식 명명을 본떠서 <에벳의 십자가>로 별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바 있다. [에벳은 이 작품 속의 주요 등장인물로, 화자역을 맡은 인물이다.] 어느 평론가가 <사반의 십자가>를 가리켜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망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지만, <불타는 땅>도 역시 로망스에 가깝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예시한 작품들 가운데서 <사반의 십자가>와 <불타는 땅>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는 로망스에 속하리라 보이는 작품은 있지 않은데, 그 작품들에 비하여 <사반의 십자가>나 <불타는 땅>이 그 진지성이나 심각미가 덜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의 로망스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는 편인데, 곧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처형 시의 좌우 두 도적들이 그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좌도가 사반으로서 그 작품의 주인공이며, 우도는 ‘이름 모를 도둑’또는 ‘낯선 도둑’으로 사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만, <불타는 땅>의 경우에는 좌도에 아각, 우도엔 에벳이 설정되어 이 둘은 서로 경중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난형난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반에 맞먹을 만한 인물은 이 둘 중에서는 역시 아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반은 혈맹단장이고, 아각은 젤롯당 참모부장인데, 이 둘은 무용이 뛰어난데다 특히 전투 중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고 하겠다. 성서에서 보듯이, 이 둘은 마지막에 예수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일(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단순히 낯선 도둑(이름 모를 도둑)으로 나오는 우도는 <불타는 땅>에서는 에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역시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에 예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구원 얻게 되는 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사반의 십자가>의 경우와는 달리, <불타는 땅>에서의 에벳은 이 작품의 화자(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의 역을 맡고 있다. 이 점이 두 작품의 인물설정 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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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산책]민중과 투사들에게 보내는 헌사(1) -박요한의 '불타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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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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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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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목회 「마음이 상하다」를 특집, “정신질환, 신체적 건강 손상된 상태”
- 월간목회 성경, 절대적 진리로 행동과 심리에 위대한 교과서 「창조문예」는 300호 특집·문인들 신년설계도, 「신앙계」는 정인찬총장의 인생스토리 게재 SNS 시대에 맞는 종교의 새로운 실천을 고민해야 기독교사상 1월호 기독교잡지들이 발행됐다. 〈월간목회〉는 「광야의 시간(1)-마음이 상하다」를 특집으로, 〈기독교사상〉은 「SNS 시대와 기독교」란 특집을 기획했다. 〈신앙계〉는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 정인찬총장의 인생 스토리가 실렸다. 〈창조문예〉는 300호 특집으로 임만호회장의 기념사를 비롯하여 축시, 축사, 문인들의 신년 설계가 실렸다. 〈월간목회〉는 「광야의 시간(1)-마음이 상하다」란 특집에서 한혜성원장은 정신과 질환을 건강의 문제로 이해하는 관점이 한국 기독교 안에 확장되어야 한다. 정신과 질환을 의지와 영성의 문제가 아닌 신경계의 불균형이 물리적으로 일어나 신체적인 건강이 손상된 상태로 접근해야 한다. 정신과 치료의 본질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곁에 그저 함께 있는 것으로서 교회에도 판단과 정죄, 권면 대신에 그들과 함께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김선화박사는 기독교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관계가 성숙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절대적 진리로서 인간행동과 심리에 가장 분명하고 위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제적 치유의 과정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치유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사상〉은 「SNS 시대와 기독교」란 특집에서 이성민교수(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SNS 시대에 맞는 종교의 새로운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SNS 소통의 특징으로 ‘비동기성’을 꼽았다. SNS를 이용하면 실시간 소통이 아니라 원할 때 소통할 수 있으며, 다수의 사람과 동시에 소통이 가능해진다. 또한 SNS는 권위가 아닌 ‘주목’을 가장 큰 가치로 만들고 상향식 소통을 보편화했다. 또한 조성돈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먼저 매체가 변화하면 콘텐츠도 변해야 함을 강조하며, 유튜브 설교와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 모임을 예시로 들어 그 내용과 구성이 변화해야 함을 지적했다. 두 번째로 필자는 SNS가 개인주의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다’고 말하는 SNS의 관계 맺기를 살폈다. 세 번째로 필자는 SNS로 인해 조직 중심, 건물 중심의 교회와 목회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손승호박사(명지대학교 강사)는 그중에서도 유튜브를 통해 에큐메니컬 진영을 비판하는 세력을 소개 및 분석하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NCCK는 지난 10월 NCCK에 대해 비합리적인 비난을 가하는 채널들에 대해 대응할 것을 결정했다. 〈신앙계〉는 특집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정인찬 총장의 은혜로운 인생 스토리가 실렸다. 베스트셀러 ‘풀꽃’의 나태주 시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노숙인자활쉼터 ‘소중한 사람들’을 운영하고 있는 유정옥 사모,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민 이야기 등이 연재 중이다. 또한 소설가 김성일 장로의 간증, ‘연탄길’의 이철환 작가 등의 글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의 원고 중 엄선해 ‘다시 읽는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연재를 새로 시작했다. 〈창조문예〉는 300호 특집으로 임만호회장의 기념사를 비롯하여 축시, 축사, 문인들의 신년설계가 실렸다. 「작가연구」스물여덟 번째로 김지원시인의 「가을음계」외 9편과 연보 「나의 문학 나의 신앙」 작품론 등을 수록했다. 「신작 다섯 편」으로 허형만, 박재화시인의 시가 수록됐고, 또한 이성교시인의 추모 특집으로 연보, 시 「강릉에 오면」 외, 추모사, 조시, 시평이 실렸다. 그리고 「망우리공원 문인열전(6)」으로 정종배시인의 「일제와 독재에 까칠했던 민족시인 김동명」, 「‘자연’과 ‘인간’, 그리고 ‘회복’의 삶(22)」으로 박정미수필가의 「바다의 정원」이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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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목회 「마음이 상하다」를 특집, “정신질환, 신체적 건강 손상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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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에세이] 새해 하나님과 동행하기
-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앞에 큰 은혜의 바다물결이 넘쳐오고 새해에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운 사실은 무엇인가? 사람은 마땅히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완성의 밑그림이 되어 줄 깨달음이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삶의 응답은 매우 풍성하고 안정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사람을 향한 역사 또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친히 선포하심으로 알 수 있다(창1:28). 사람이 신의 소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삶의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때로는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 수반되지만, 역사의 체험은 인류애를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당위성과 인간의 선한 의지를 불려온다. 정의와 공의는 강해지고 확장되어 꽃피게 될 것이다. 이사야 11장 9절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는 환희에 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쫓아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으로 견인되어 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온 세상에 가득함으로 모든 전쟁과 다툼과 시기와 분쟁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세상은 자기애가 아닌 이타적인 사랑의 지식으로 충만케 될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오직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사야 5장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요구는 우리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사명을 깨닫는 일은 어디에서나 싹이 틀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믿음의 인지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모든 악함과 약점을 고치시려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임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너무나도 보편적인 사실이 되어 버린 복음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감화와 감동으로 느껴져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느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 모든 것을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이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며 은혜로운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힘 있는 믿음의 소망으로 나아가자. 내가 형통할 때 삶이 가볍고 즐거운 전진을 할 수 있다면 감정에 속한 믿음일 뿐이다. 오직 주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그 사랑에 감화되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런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는 참된 자아가 행한 것이 된다. 안전하고 편안한 삶에 대한 불안한 감정보다 참된 의지로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앞에 큰 은혜의 바다 물결이 넘쳐오는 새해의 아침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위한 새로운 과정 앞에 담대히 사랑에 신뢰를 보내자. 희망의 의지와 벅찬 기쁨의 마음 문을 열고 힘차게 출발선을 향해 나아가자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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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에세이] 새해 하나님과 동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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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시 - 새해 새 아침의 선물] 박이도 시인의 내 각성의 눈을 뜨게 하소서
- 새해 새 아침이 밝았다 내가 매일 꿈꾸던 내일에의 희망 그 희망의 날이 오늘 또 내 앞에 찾아왔다 오늘은 한 해의 첫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날 생명의 선물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 벅찬 아침 내 각성의 눈도 뜨게 하소서 매일매일 새 생명을 주시고 새 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경배하세 신령한 노래로 경배하세 새봄에 씨앗 뿌리고 노고지리 지저귀는 동산에 올라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자연의 세상 봄의 전령사 제비도 날아오르는구나 하늘을 가르며 곡예를 펼치는 날렵한 몸매 사랑과 소망의 포물선을 그리니 여기가 지상낙원일세 무지개 뜨는 언덕에 보라 새날이 밝았도다 동해의 수평선을 가르며 새날을 밝히시는 우리 주님에게 기쁨의 찬송 부르세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해님을 마주하며 감사의 기도 드리세. *시편 119편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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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시 - 새해 새 아침의 선물] 박이도 시인의 내 각성의 눈을 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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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5)-심훈의 「상록수」
- 이제 마지막으로, 좀 다른 방향에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심훈의 <상록수>(1935)가 어쩌면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1982)이란 유명한 소설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하는 판단이 들어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이 이야기를 하자고 하니 그 <여자의 일생>에 대하여 독자 측에서 최소한의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주(!) 간략히 그 작품의 이야기 골자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가난한 여주인공 기꾸는 가톨릭 신자인 남주인공 세이기찌를 몹시 사랑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해서 결국 그가 투옥되고 말았다. 기꾸는 옥중의 세이기찌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치금을 마련해야 했고, 마지막 수단으로 환락가에서 몸을 팔아 영치금을 마련해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세월이 흘러 세이기찌가 징역살이를 끝내고 출소했으나, 중병에 걸린 기꾸는 이미 운명을 하고 만 뒤였다. 이런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는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이 그보다 훨씬 앞서 나온 심훈의 <상록수>와 구조적 일치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우리의 관심을 유발한다. 만일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이 심훈의 <상록수>로부터 소설 구조상의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하나의 가정이지만), 우리가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두 작품 상호 간에 어떤 영향을 서로 주고받은 문제는 명확히 실증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영향사적 관점에서 분명한 ‘영향의 주고받음’이 증명될 수 있는 형편은 지금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두 작품 상호 간의 결과적 일치점 내지는 유사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선에서, 단지 시기적으로 앞서 나온 우리 소설(‘상록수’)로부터 뒤에 나오게 된 일본 작품(‘여자의 일생’)이 막연하게나마 어떤 영향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적 관점에서의 개연성만을 시사(示唆)하고자 한다. <상록수>의 구조가 그러하듯 <여자의 일생>의 구조 역시 남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각기 번갈아서 지그재그식으로 엮어나가는 이른바 격자소설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두 주인공이란 (동혁과 영신에 대응하는) 세이기찌와 기꾸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구조는 흔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이 뒤따를 법도 하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식의 구조가 흔한 게 아니라 오히려 희귀한 편이란 데 우리의 관심이 기울어지는 것이다. 박동혁과 채영신, 이 두 청년들은 그들 각자가 추진하는 농촌계몽 사업, 또는 농촌봉사 활동에 있어서 거의 막상막하의 열정을 보이면서도 그 사업을 중심축으로 하여 두 사람 다 사랑과 이념에 깊이 빠져 있는 편인데, 특히 채영신은 사랑에, 박동혁은 보다 더 이념에 몰두해 있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인물 설정 면의 특징이 일본 작가 슈사쿠의 <여자의 일생>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채영신·기꾸 등의 소박한 사랑의 소유자(여성)들이 박동혁·세이기찌 등의 강력한 이념의 소유자(남성)들을 만나 그 소박한 사랑이나마 꽃피워 보지 못한 채 희생·봉사의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 두 작품들은 서로 흡사한 구조적 일치점 내지는 유사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런 개연성에 대해서만 소루하게 언급했지만, 이후 작가들의 생애 연구, 또는 전기적인 자료 연구, 나아가서는 한일문학의 교류사 연구 등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이끌어내는 후속적인 논의가, 그 누구에 의해서든 나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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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5)-심훈의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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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 우리는 지금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습니다. 백향목 숲 향기가 도열해 있는 길에 샛별은 청보석처럼 손짓합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태어나신 베들레헴 마굿간으로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성결한 분이 처음 누우셨던 말구유,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베푸실 은혜와 기적을 생각하며, 두 다리에 힘을 모으고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걷습니다. 해는 이미 졌지만 어둡지 않고 처음 딛는 땅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손에 손에 아기 예수께 드릴 선물을 들었습니다. 어떤 손에는 찬양을 어떤 손에는 감사를 어떤 손에는 사랑을 어떤 손에는 영광을 어떤 손에는 소망을 어떤 손에는 감격을 어떤 손에는 아, 어떤 손에는 뜨거운 눈물을. 황금의 쟁반에 받쳐 들고서 믿으며 노래하며, 노래하며 믿으며 걸어갑니다. 바람은 은빛 종을 흔들면서 어서 오라, 오라고 부릅니다. 동서와 남북, 사방천지에서 구름 같은 사람들이 베들레헴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가는 사람들, 기뻐하러 가는 사람들. 등성이를 넘어서 산굽이를 돌 때마다 주님의 생명은 샘처럼 솟아나고 주님의 진리는 대양처럼 파도쳐 우리의 발걸음이 환희로 넘칩니다. 가다가 벼랑을 만나면 날아서 갈 것입니다. 가다가 가시덤불에 갇히면 주님의 지팡이로 헤치고 나갈 것입니다. 어떤 짐승도 우리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러 갑니다. 길은 길을 불러 이어지고 마음은 타올라 발부리를 지킵니다. 아무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우렁찬 행군,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세계의 만민이 한마음으로 가는 길,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감사하러 가는 길, 경배하러 가는 길. 우리는 주님의 병사, 아기 예수 만나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이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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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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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4)-심훈의 「상록수」
- 이제부터는 <상록수>(1935)의 기독교문학적 특성을 몇 가지 관점에서 밝혀보고자 한다. <상록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독교 세계를 반영한 소설 작품은 모두 ‘도시소설’ 부류였다. 이광수의 <무정>(1917)이나 <재생>(1924)을 비롯하여 염상섭의 <삼대>(1931) 등 소위 도시소설들에 기독교적인 세계가 반영된 면이 있었다. 그런데 <무정>이나 <재생> 등에서 어느 정도 기독교 세계를 보여주었던 춘원도 그의 농촌소설 <흙>(1932)에서는 기독교 세계를 거의 반영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상록수>는 ‘농촌소설’에 기독교 문제를 끌어들인 첫 번째 작품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기독교 농촌소설’의 본격적인 첫 작품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으로 <상록수>란 작품의 의의는 이 소설이 기독교 세계관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맨 처음으로 반영시킨 작품이란 점이다. 도시소설이건 농촌소설이건을 불문하고 <상록수> 이전에는 기독교 세계관을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이 거의 없었다. 이광수·김동인의 작품들은 물론, 염상섭의 <삼대>마저도 기독교 세계관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반영시켰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는 기독교소설로서도 문제작의 하나임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기독교 세계관이 독자 대중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전달되는 작품이라곤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어느 면 부정 위에다 희미한 긍정의 세계를 구축해 보려는 노력이 엿보인 작품 정도로 봐줄 수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상록수>는 기독교 긍정에의 굵은 선을 드러내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작품의 다른 의의를 찾는다면 그것은 <상록수>가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 계열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방면에서도 이 작품은 한국 기독교문학사에서 아마도 효시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의 소설계에 이른바 실천문학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 양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도 그 수십 년 전에 산출된 소설 작품 <상록수>의 위상은 결코 도외시될 수 없는 면이 있다 하겠다. (70년대에서의 이 방면의 희귀한 예외가 황순원의 1973년 작품 <움직이는 성>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상록수>에서 한 가지 더 어떤 의의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이 소설이 한국 기독교소설사에서 명실상부한 여성 주인공을 첫 번째로 등장시킨 작품이란 것이다. 물론 필자는 우리나라의 ‘장편소설’들을 대상으로 해서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가령 염상섭의 <삼대> 속의 홍경애가 주요인물 김병화의 짝으로서 여성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하더라도 역시 그녀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교회 내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위상(희생적인 실천적 신앙인 상)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이 명실상부한 기독자 여주인공을 맨 처음 부조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록수>보다 십여 년 앞서 나온 이광수의 <재생>의 여주인공 순영이도 여기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녀의 ‘자진(自盡)’ 사건으로 인하여 그녀 자신의 기독교도로서의 최소한의 위상마저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는 점을 도외시할 수 없다면, <재생>의 순영이는 <상록수>의 채영신과는 나란히 논할 수 있는 위치의 여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불가불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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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4)-심훈의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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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문학회 30주년 행사, 목양문학상 시상과 공로패를 증정
- ◇「목양문학」이 30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목양문학 30주년 기념 목양문학상 시상 및 한국목양문학 제25집 출판기념식’을 가졌다. 목양문학회가 30주년을 맞아 지난달 30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목양문학 30주년 기념 목양문학상 시상 및 한국목양문학 제25집 출판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감사예배와 출판기념식, 시상식, 공로패 증정식 등 풍성한 행사로 드려졌다. 그럼에도 참여 인원을 제한하여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는 등 안전한 환경 속에서 모든 일정이 진행됐다. 이날 한국목양문학상 김정석목사(시)와 문장식목사(수필), 안준배목사(평론)가 수상했다. 이 행사에서는 창립회원과 공로회원들을 향한 공로패 증정식도 마련됐다. 이에 따라 고훈, 정려성, 박영률, 박재천, 최세균, 유한귀, 박종구목사가 창립회원으로, 김재남, 홍문표목사가 심사위원으로, 고환규목사가 시 낭송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패를 증정받았다. 또한 이날 차기 임원진이 발표된 가운데 전담양목사가 한국목양문학회 신임회장으로 추대됐으며, 박상기전임회장에게 공로패가 증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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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문학회 30주년 행사, 목양문학상 시상과 공로패를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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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3)-심훈의
- 이광수의 <흙>(1932) 연재와 심훈의 <상록수>(1935) 연재가 겨우 3년이란 시간차밖에는 나지 않는데도 두 작품이 상당한 세계관의 차이를 보여주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두 작품 모델의 생동감 여부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이광수의 <흙>에는 평소 그 주인공의 모델로 채수반이란 인물이 내세워졌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어떤 살아있는 모델이 따로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좀 억지스럽게 표현해 본다면, 그 작품의 남녀 모델은 바로 그의 처녀 장편소설 <무정>(1917)의 남녀 등장인물들이었다고 표현해 볼 수 있으리라. <흙>의 허숭의 모델은 <무정>의 이형식이며, 마찬가지로 윤정선의 모델은 김선형, 그리고 유순의 모델은 박영채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두 작품 상호간의 짜임새는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말하자면 이 두 소설은 <무정>의 도시 무대가 <흙>의 농촌 배경으로 바꾸어지고, 등장인물 ‘이형식-박영채-김선형’ 사이의 삼각연애 관계가 ‘허숭-유순-윤정선’ 사이의 그것으로 바뀌어 나타났을 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작품 상호간에는 구성 면에서의 핍진(逼眞)한 친근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춘원 이광수의 <흙>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바로 그(춘원)의 전작 <무정>의 주요 인물들이 그 모델로 쓰이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해 주는 바 있다. 그러나 심훈의 <상록수>의 남녀 주인공은 그 실제 모델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박동혁의 모델은 심재영, 그리고 채영신의 모델은 최용신이라고 한다. 심 군은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권유하는 부모의 뜻을 거슬러 충남 당진군(송악면 부곡리)에서 농촌운동을 전개한 작가의 큰 조카이고, 최 양은 경기도 수원군(반월면 천곡리)에서 역시 농촌봉사 활동을 하다가 과로에 지쳐 쓰러진 채 운명한 기독교(YWCA) 계통의 여성운동가였다. 특히 모델 최용신은 일제 강점기에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활동했었던 무교회주의 종교가 김교신 선생의 각별한 관심까지 끌었던 여성 지도자로서, 그녀의 투철한 신앙심이 바로 그녀의 그 불굴의 정신력의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두 모델이 실존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사람(심재영과 최 용신)이 실제로 서로 사귀거나 사랑해 본 적은 없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이 두 인물을 소설 구성을 위하여 허구적으로 접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농촌봉사 활동에 뛰어든 남녀 생존 인물들을 작품의 모델로 사용한 <상록수>가 전혀 그렇지 못한 <흙>보다 더 생동감 있는 표현을 얻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박동혁이 자기 고향 한곡리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관심을 기울인 곳은 경제적 모순을 타파하고 사회개혁을 실현하는 분야였다. 이에 비하여 채영신이 낯선 고장 청석골에서 벌인 봉사활동은 이른바 문맹퇴치 운동과 같은 문화사업을 추진하며 정신적인 계발에 힘쓰는 일이었다. 이것마저도 그녀의 건강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고 그곳 주민들을 위해 제 몸을 온전히 불살랐던 것이다. 그녀는 속죄양 의식, 곧 투철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살신성인의 ‘희생 봉사’ 정신이 너무도 강하고 또 확고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봉사활동)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과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은 이렇게 서로 행복하게 결합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적인 구원의 여인상들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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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3)-심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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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 시집 「지상의 언어」 영역본 출간
- 박이도시인(사진)의 시선집 「지상의 언어」(창조문예사)의 영역본 「Language on the Surface of the Earth」가 출간됐다. 이 시집은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영원성을 추구했다. 「지상의 언어」는 지난 2013년 일본에서 출간된 시집으로, 그 대역본이 같은 해에 국내에서 국문으로 발간됐다. 이 시선집은 시인의 대표적 시들을 엮은 만큼 그의 시적 경향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이도시인은 “후반기에 와서 특히 시가 짧아지는 등 어쩔 수 없이 인생론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흔히 ‘서정적 자아’라고 말하는데, 사물을 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발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확인으로 나아가는 것을 경험한다”고 이 시선집을 소개했다. 「지상의 언어」는 △황제와 나 △어느 인생 △을숙도에 가면 보금자리가 있을까 △축제의 노래 △민담 시집에서 등 5부로 구성됐으며 110여 편의 시를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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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 시집 「지상의 언어」 영역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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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2)-심훈의
-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보다는 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할 것이다. <흙>의 주인공 허숭은 단지, 지식인이 우리 농민들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농촌봉사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시혜적 입장(만)을 토로하고 있음에 비하여,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은 지식인이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유리된 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농민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가 농촌의 실상을 체험을 통해 파악하고 그들의 경제적 자활운동을 힘써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보건대, 작가 심훈은 전혀 선배인 춘원(이광수)의 체질과는 다른 체질을 지닌 이였다고 하겠으니, 농촌계몽 소설이란 범주에 들 수 있을 두 편 소설 작품들의, 어느 정도의 상호 유사성으로 인하여 심훈이 다소 춘원과 유사한 체질로 인상 지어진 것은 심훈 자신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왜냐면 춘원이 ‘하강적 모델’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심훈은 ‘상승적 모델’에 해당하는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흙>의 주인공 허숭의 입장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춘원이 내세웠던 브나로드 운동의 기본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상록수>의 주인공 동혁의 그것은 신문사의 그 공식적 입장을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동아일보가 내세운 브나로드 운동의 기본 입장이란 것은 ‘동족을 사랑하는 열성’과 ‘문맹을 물리치려는 헌신적 노력’에 모아져 있었다. 곧 동족을 사랑하는 열성으로 농촌계몽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할진대 문맹을 퇴치하게 될 헌신적 노력은 자연히 기울여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봉사활동에 대한 결과보고를 부탁받고 일어선 박동혁은 그 경지를 뛰어넘는 발언을 하여 결과적으로 사회자의 간섭(곧 그 발언이 제지당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박동혁은 이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신,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발언에 대하여 사회자는 절대로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차례로 발언하도록 지목을 받은 채영신 역시 동혁과 같은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녀는 처음엔 발언을 사양했는데, 이유인즉슨 남학생을 먼저 발언하게 하고 여학생인 자기를 후에 발표하게 한 것이 불쾌하다는 것과 또 사회자가 무어라고 제재를 하게 될 것 같으니 그런 구속을 받아 가면서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마지못한 듯이 일어나서 한 말은 이러했다. “우리 계몽대의 운동이 글자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한절대다수인 농민들의 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우선 그네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넣어주자는 박동혁 씨의 의견은 저도 전적 동감입니다!” 결국 박동혁이나 채영신이나 모두 문맹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농민들에게 그들의 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 ‘희망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 긴요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던 것이다. 이광수의 <흙>의 주인공 허숭은 화려한 경력에다 출세에의 욕망이 뒤범벅이 되어 농민들과의 동화라는 게 사실상 어려웠지만(아니, 수상쩍은 인물로나 비쳐지고 배척을 당하기까지도 했었지만), 심훈의 <상록수>의 주요인물들인 박동혁과 채영신은 투철한 사명감과 농민에 대한 사랑으로써 쉽게 그들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과 동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로부터 신임까지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결코 쉽사리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보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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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2)-심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