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출판/문화/여성
Home >  출판/문화/여성  >  문학

실시간뉴스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3-12-07
  • [부활절특집: 부활절 에세이] 부활이 가져온 능력
      진실로 ‘성령 받은 자’가 숨길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셨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평강을 주셨다. 평강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될 때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제자들의 모임 중에 받은 기름부음이었다. 제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에 평강이 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교회도 제자들처럼 모임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본능이다.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영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생활이 영적인 현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지체는 서로 교통하며 연합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별적인 역할을 위해 택함 받지 않고 주님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순기능에 속한다. “모이기를 힘쓰는~”(행2:46),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10:25)는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평강의 축복임을 알수 있다.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주님의 두 번째 축복은 바로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은 것이다. 숨을 내쉬며 주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성령의 생명이시다. 이 생명을 주심으로써 저들을 우리 중에 하나와 같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일이 성취되었다.(요17:11) 성령을 주심으로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물의 역사를 증거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받았음을 알게 하신다.(요일5:13)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의지하여 천국 시민의 삶인 거룩한 생활을 살게 된다.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힘없는 믿음이 될 뿐이다. 옛사람을 의지하는 본능적인 삶을 떠나 성령이 인도하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생명은 믿는 자 누구든지 새사람의 삶이 가능하도록 축복하셨다. 죄 사함의 권세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명령하셨다. 성령을 받은 자가 행하는 일이 기사와 이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자가 숨길 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이다.   만약 우리들의 믿음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 해도 이 죄 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성령의 속성을 약화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죄 사함의 권세는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이다. 주님은 주기도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구하기 전에 죄 사함받는 길을 가게 하셨다.    우리는 매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이 권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한 신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죄사함의 권세로 형제를 용납하는 만큼 용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며 악의 사슬이 끊어지는 죄 사함의 권세를 회복하는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자.   이러한 일에 놀라운 영성과 축복의 주인이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영성은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은 죄 사함의 권세에 있었다. 부활의 아침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이 세 가지의 축복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3-04-06
  • 이해경시집 「사랑의 향기」 화제
      이해경시인(사진)의 시집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사랑의 향기〉를 도서출판 사랑의 장막에서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시인은 2013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노래〉란 첫 시집과 함께 등단했다. 그러나 2018년 『시선』 신인추천으로 재 등단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목사이며, 간호사와 상담사, 선교사란 직책을 지니고 있다.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형상화 행복한 삶의 여정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길로 인도      ‘끝없는 사랑’의 길   이해경시인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그 사랑은 순수한 사랑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오늘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근원’인 아가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늘은/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하늘은/또다시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이제야/그 말의 의미를/조금씩 깨닫는 오늘이다 -「하늘의 사랑」의 전문     이 시에서는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하나님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표현했다. 첫연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보라고 일러 준다”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제2연과 제3연은 첫 연의 가르침에 대한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제4연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의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고 또다시 가르쳐 주고, 제5연에서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첫 연에서 “산 너머 있는 것을”이란 구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한다. 화자가 위치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너머’란 장소를 지칭한 것은 ‘산’이 주는 신비스러움으로 ‘산 너머’를 신비스럽게 격상시켜 준다. 그 ‘산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란 구절은 제1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연유한 가르침이다. 제2연과 3연은 결과이다. “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제2연)거나, “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제3연)고 하나님을 향한 초보적인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   기독교인의 행복한 삶은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보상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 즐겁고 복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몸과 마음이 흐뭇하고 만족하여 부족이나 불만이 없는 삶이다. 성경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나와 있다     다음의 시는 행복주의적인 삶을 볼수 있다. 행동과 행위에 의해 성취되는 삶이며, 윤리적 목적 및 궁극적 목표가 행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대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세상의 눈을 감고/세상의 귀를 닫고/빛의 음성을 듣는다//그의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빛의 눈을 뜨고/빛의 귀를 열고/빛의 옷을 입는다.  - 「그대 곁에서」의 전문     이 시에서의 ‘그대’는 하나님을 가르킨다. 첫 연의 ‘빛’과 제2연의 ‘빛’의 의미가 다르다. 첫 연의 ‘빛’은 하나님을 지칭하고, 제2연의 ‘빛’은 화자의 ‘신앙’을 의미한다. 화자는 신앙적인 삶 속에서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신앙에 두고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행복주의 자의 삶이다. 첫 연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나, 세상의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신앙의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 신앙의 옷을 입는 것이다.    어머니·아버지의 삶 속에 나타난 사랑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시들은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그 자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고, 그것은 사랑에 연유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임을 보여 준다.      「어머니의 하루」란 시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삶을 간결하게 형상화했다. 오직 가족을 위한 삶이었음을 보여 준다. “차가운 하루의 문을 열고”란 구절의 ‘차가운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함축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이다. 또한 “우리의 밭을 일구셨다”란 구절의 ‘우리’란 화자를 비롯한 가족을 의미하고, ‘밭’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로는 비바람이 되고”나, “때로는 햇빛이 되어”서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인 ‘밭’을 일구신 것이다. 이 ‘비바람’과 ‘햇빛’은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표현이다. 화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희생을 떠올리는 오늘이다. “어머니의 의자에 앉아”란 구절은,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의 무게」란 시는 가정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형상화했다. 아버지의 삶을 ‘무게’로 표현했다. 무거울수록 힘든 생활임을 보여 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아버지가 가장(家長)이 되고, 가정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세상의 세찬 비바람에”란 구절로 집약된 삶에 대한 어려운 환경이고, 그 어려움은 “쌓이고 쌓인 아픔의 세월”인 것이다. 그래서 밤마다 가족들 몰래 눈물을 흘린다. 주위 환경으로 인해 “날마다 무게를 더하고”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극대화시켰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9-16
  •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복음의전함서 전도 플랫폼 세미나
    ◇광교선교단체 복음의전함은 들어볼까 세미나를 연다. 사진은 인천지역 세미나.   유명인 간증과 목회자들이 풀어낸 콘텐츠를 짧은 영상에 담아 지역별 각 교회서 「들어볼까」란 세미나로 새로운 전도법 소개   사단법인 복음의전함(이사장=고정민)은 광고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다음달 13일까지 전국의 교회에서 「들어볼까 세미나」를 진행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완화와 함께 이전에 참여했던 교회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7개 지역 교회에서 열린다. 7월 5일 10시에 고양시 일산광림교회를 비롯한 7월 7일 10시에 서울시 여의도침례교회, 7월 8일 10시에 서울시 광림교회, 7월 8일 20시에 춘천시 순복음춘천교회, 7월 11일 10시에 강릉시 강남성결교회, 7월 12일 10시에 부산시 포도원교회, 7월 13일 10시에 용인시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가진다.   세미나는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이 대표연사로 참여한다. 전도 플랫폼 「들어볼까」 구성을 안내하고, 새신자를 교회에 오게 하는 「들어볼까」의 활용방법을 설명한다. 또한 코로나19를 겪으며 온라인 위주로 바뀐 문화의 흐름에 따라 SNS 등 미디어를 활용한 실질적인 전도 방법을 제안한다.   세미나 참석 교회에 제공되는 특별혜택도 있다. 「들어볼까」 내에 지역교회 연결 서비스인 ‘교회찾기’에 교회를 무료로 등록할 수 있다. 또한 명함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명함을 받은 사람이 교회로 찾아올 수 있게 하는 ‘복음명함’의 원본 디자인 파일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미자립교회에 제공되는 혜택도 있다. 세미나에 사전 신청한 미자립교회 중 각 지역 선착순 30교회에 복음 광고 전도지가 무료 제공될 예정이다.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세미나를 통해 미디어 전도가 전국 각지 교회에서 시작되어 5천만 국민 전도운동으로 이어지고, 주님의 복음이 곳곳으로 흘러가 대한민국 교회가 새롭게 믿음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전국 교회의 참여를 독려했다. 「들어볼까」를 통해 제안되는 새로운 전도 방식은 대한민국 복음의 불씨를 다시 한번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동 단체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전도플랫폼 「들어볼까」를 공개했다. 「들어볼까」에는 유명인의 간증과 목회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낸 기독교 교리 콘텐츠가 5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담겨있다. 동 단체는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나,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올바르게 소개하고 전도하기 위해 「들어볼까」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동 단체는 교회에서 「들어볼까」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교회 대상으로 설명회를 계속 개최해 오고 있다. 기존 설명회는 사전신청한 교회를 대상으로 줌 온라인 설명회로 개최됐었다.     이전 설명회에 참여했던 목사들은 “전도에 대한 막막함이 있었는데 너무 좋은 정보와 콘텐츠를 알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며,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콘텐츠를 이용해서 비신자들과의 접촉점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사하고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단법인 복음의 전함은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비영리 광고선교단체다. 광고라는 도구를 통하여 비신도들을 대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노출하고 사람들의 생활권 안에서 녹아든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광고선교사역의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24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5) -김말봉의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 윤창섭은 언니 허윤숙의 애인이었다. 윤창섭의 돌연한 출현이 최순애의 생활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이다. 언니의 애인이 왜 순애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을까. 윤창섭은 말하자면 염상섭의 <삼대> 속의 김병화와 같은 인물이었다. 당시의 유행어로 ‘마르크스 보이’인 셈이다.     그 청년 앞에서 순애는 돌연 <삼대> 속의 홍경애의 위치로 변해버린다. 술집 바커스의 여급 신분이었던 홍경애가 김병화(마르크스 보이)와의 관계를 성숙시켜 가면서 여걸의 위치로 점차 격상되듯이, 최순애 역시 윤창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여성 사회운동가로 서서히 변화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참다운 동지를 얻게 되어 기뻤던 윤창섭은 최순애에게 처음엔 동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더니, 다음에는 자기 애인 허윤숙과의 합의를 거쳐서인지 윤숙의 언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구혼 공세를 해 온 것이다. 언니(윤숙이)가 자기 애인 윤창섭을 최순애에게 넘겨주기로 작심해 버렸다는 뜻이었다.     순애가 반신반의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언니 허윤숙은 주의자(主義者)로서의 윤창섭이 동지애로 긴밀히 결속되어 있는 최순애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두 사람, 또는 세 사람 모두에게 결과적으로 좋을 일이라고 하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망명녀>(1932)에서의 이런 상황 전개는 그보다 1년 앞서 나온 염상섭의 <삼대>(1931)에서의 경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지금껏 보아온 윤창섭·허윤숙·최순애의 삼각관계는 <삼대>에서의 이필순·김병화·조덕기의 삼각관계의 변이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망명녀>에선 남성 윤창섭을 가운데에 놓고 두 여성이 서로 사랑을 양보하는 모습이지만, <삼대>에서는 여성 이필순을 가운데에 놓고 남성들이 사랑을 양보하는 형국이다. <삼대>의 이런 국면이 <망명녀>에 와서 하나의 변이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망명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어떻든 결과는 세 사람 모두가 순조로운 합의에 이르게 되고, 한 쌍의 남녀는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에 이르러 의외의 돌발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최순애가 각기 두 사람 앞으로 쓴 편지들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만 것이다.     순애는 윤창섭의 동지들로부터 날아온 어떤 지령(암호문)을 접한 뒤, 자기 예비 신랑을 대신해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 일방적 파혼 선언을 해버린 뒤 목적지를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망명녀>는 한마디로 ‘사랑의 노래’이다. 이 사랑의 노래는 결코 애가(哀歌)일 수 없고, 찬가(讚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비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의 모처에서 망명녀의 신세로 살아가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최순애는 자신이 바라서 스스로 그런 지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조금도 비극적이지 않다.     윤창섭은 결혼식 당일에 신부가 될 여인이 잠적해 버리는 불행에 잠시 처해지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코 비극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윤창섭이 최순애의 지극한 사랑을 당시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보하였던 사랑을 되찾게 된 허윤숙의 경우도 결코 비극에 이른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약간의 해프닝을 치른 코믹한 감정에 그녀가 빠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또 그들 세 사람 중에 어느 누구가 그런 것 외에 다른 경망한 감정에 휘둘린 일은 있었던가? 아니, 세 사람 모두가 매우 엄숙하리만큼 진지하기만 할 뿐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11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4)-김말봉의
        김경순, 여운영 등에 이어서 전상범의 세 번째 부인이 된 바 있었고, 또한 이석현, 전상범에 이어서 세 번째 남자 이종하와 또다시 결혼을 한 바 있는 김말봉은,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속칭 인생의 쓴맛과 단맛은 다 경험해 본 바 있는, 어찌 보면 최적의 통속(대중) 작가 감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그 결실이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데뷔작 <망명녀>(1932)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명녀>를 무슨 통속소설의 샘플(모범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기에는 그 작품 자체가 결코 허락하지 않는, 그 결과 어느 정도의 품위는 스스로 지니고 있는 소설 작품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이 소설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하겠다. 김말봉의 작품 <망명녀>에는 세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등장하여 ‘사랑’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여기서 세 명의 젊은이들이란 최순애(산호주), 허윤숙, 윤창섭 등, 두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애정의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생 신분인 산호주(최순애)는 요리집 명월관에서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힘겨운 하루하루의 삶을 버텨 나간다.   그런데 오 주사의 몰인정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오 주사에게 폭력적 자세로 맞서게 되고, 그 결과 순사에게 끌려가기까지에 이른다. 얼마 뒤 훈방되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허윤숙의 명함이 놓여 있었고, 저녁때 만나자고 하는 내용의 글발도 거기에 함께 적혀 있었다. 허윤숙은 최순애(산호주)의 여학교 시절 상급생 언니였는데, 그동안 외국 유학을 갔다가 그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던 것이다. 이 허윤숙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산호주(최순애)는 8년 전의 과거사를 회상해 보게 된다.   C여학교 3학년 시절, 최순애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 십 원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그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딸(그녀) 때문에 직장마저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자기(그녀)가 직접 직업전선에 나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신분, 곧 명월관의 기생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허윤숙이 나타나 산호주에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내용인즉슨, 허윤숙이 요리집 명월관 주인의 요구대로 몸값 3백 원을 지불하고 산호주를 기생 신분에서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후 최순애는 언니 허윤숙을 따라 그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녀는 점차로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명월관에서 나온 이래 잠깐 잊고 있었던 모르핀 주입의 악습마저 되살아나게 되었다. 궐련을 자기(언니) 면전에서 빨고 몰래 모르핀 주사도 맞는 최순애를 구원하기 위해 언니 허윤숙은 그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석 달을 겨우 넘기고 최순애는 교회 출석마저 그만둬 버렸고, 하나님 앞에서의 간구(기도)까지도 ‘아이들의 숨바꼭질 장난’ 정도로 여겨 중지하고 말았다. 최순애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자기신세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점차로 자학적인 몽상에 사로잡히고, 더할 수 없는 자신의 비운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갑작스런 어떤 새로운 인물의 출현으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 새로운 인물이란 일본에서 최근 귀국한 윤창섭이란 이름의 청년이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08

실시간 문학 기사

  • 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중)
    여러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우리의 한 문제작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겠다. 배교와 인간구원의 문제,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나약한 인간이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의 심리적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강한 질문을 던지는 농도 짙은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리고 비록 이 작품이 순교와 배교의 문제, 특히 그중에서도 배교의 문제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다음의 문제, 곧 배교자가 되지 않으려고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는 교도들의 극단적인 수난 사례들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결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선교회 최고위 성직자요 교주 격인 권일신 사교(司敎)와, 작품상 그저 안가(安哥)라고만 알려진 평신도 등의 경우에서 확인되는 사례이다. 권일신은 실학자였던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요, 그 자신이 신분상으로도 양반인 지체 높은 분이었지만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부풀려진 사교(邪敎) 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금부에 자진 출두했다. 국문이 시작되었다. “천주교란 나라의 임금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무지막지한 미신인데, 네 어찌 양반으로서 그 같은 사교를 신봉하느냐.” 또 이어졌다. “너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 바른 대로 대어라.” “천주교에선 제사를 금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해괴한 짓이로군.” 둘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은 후 아래와 같은 주문과 응답이 서로 교환되었다.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선언만 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게야.” “백 번 죽어도 배교는 못합니다.” 이제 상황은 극한의 지경으로 바뀌어졌다. 다음날엔 그가 형틀에 묶이고, 고문을 당할 채비가 되었다. 고문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니 여기서 굴복함이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권일신은 “천주님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단칼에 잘랐다. 이에 지체 없는 명령이 떨어진다. “무릎을 쳐라.” 곧 아랫도리는 온통 붉게 물들고 살점들이 해어졌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정강이를 쳐라.” 명한다. 곧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두부(頭部) 경련 현상도 일어났다. “아직도 개심할 생각이 없느냐?” 권일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금부도사가 또다시 다른 말로 달래본다. 그러나 권일신은 답한다. “천주님의 명이 더 소중하니 죽는 길밖엔 없을까 합니다.” 결국 국왕이 그의 목숨만은 다치지 말라고 해서 그를 예산으로 귀양 보냈다고 한다. 안가(安哥)의 이야기는 더 처절하다. 그는 군월(軍月)에서 아홉 친구들과 함께 붙잡혀 왔다. 한 차례 고문을 받고 나자 일곱 명이 배교를 선언하고 말았다. 옥사(獄事)가 시작된 지 닷새째, 남은 둘 중의 하나로 그가 심문을 받고 있다. 천주를 버리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회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사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겠소이다.” 식이었다. “저놈을 쳐라.”는 명령과 함께 그의 엎어진 벌거숭이 등허리로 무자비한 곤장 세례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사또가 “안 되겠다. 주리를 틀라.”고 더 무서운 형벌을 명했다. 처절한 비명이 긴 여운을 남긴다. 처음 정채가 넘쳐흐르던 그의 용모는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다음에도 “어서 끌어내다 매를 쳐라.”는 분부였다. 지속적으로 고문을 당하던 마지막 날 그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들것에 실려 나온 안가가 장판(杖板) 위에 엎어져 사지가 붙들려 매어있다. 그런데 이번엔 단 한 방의 곤장에 온몸이 뒤틀리고 거품마저 뿜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순교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7
  • 이인영시인 활발한 유튜브 활동
    이인영시인(사진)이 시집 「신의 선물, 어머니」는 출간하고 유투브 방송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한양대 유성호교수 평론에 의하면 이인영은 자신의 시 쓰기를 통해 자아와 타자를 동시에 품어 안는다. 그녀의 따뜻한 성정(性情)이 반영된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세상의 거칠고 막막하고 가파른 속도감을 넘어서는 위안과 치유의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다. 따스한 마음을 통해 번져오는 그녀의 언어 안에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의 가없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아름답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인영 시인은 성찰과 다짐이 반영된 성숙의 언어로 낯선 시를 쓴다. 서정시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모티프를 얻고 언어적으로 완성되어간다.   그런가 하면 이인영의 시는 만만찮은 사회적 상상력을 담아가기도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기억이든, 시간이 지나간 후의 흔적을 통해 그녀는 우리가 겪어온 삶과 죽음의 역사, 신생과 소멸의 상황들을 찾아내고 그 안에 자신을 투사(投射)해간다. 그녀에게 ‘역사’란 정지된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현재형일 때가 많다. 그것이 오래된 그녀만의 시적 존재론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설의 언어가 부조(浮彫)해내는 힘은, 공동체 차원이건 개인 차원이건, 일종의 ‘희망의 전언’으로 이어져가게 된다./안계정기자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2
  • 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상)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
      서기원 작가의 장편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1979)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서기원(1930-2005)은 〈암사지도〉(1956)로 등단한 후 1961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당시 사상계사가 주는 동인문학상 후보상을 받으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여 〈혁명〉이나 〈왕조의 제단〉과 같은 장편소설들을 통해 작가 특유의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의식은 또 다른 작품 〈조선백자 마리아 상〉에 이르러서는 ‘정치권력과 종교’에 관한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본고와 관련하여 우리가 특별히 관심 두어야 할 부분은 국가권력과 기독교회와의 상호 대립관계이다. 때의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국가권력이 교회에 집요한 탄압을 가할 때에는 기독교 신자들 중에 부득불 배교자가 생길 수밖에 없고, 한편 자랑스러운 순교자도 구별되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 후에는 이들 배교자와 순교자 그룹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내분이 또한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그 대립의 실상이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고 본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한국의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의 전도 사업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싹이 튼 지 겨우 5년 만에 약 4천 명을 헤아리는 신도수로 증가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입교한 신도들 가운데에는 권일신·권철신 형제와 정약전·정약용 형제들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의 어느 누구도 닥쳐오는 정치 파쟁의 와중에서 수난과 희생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역사적 결과만을 이야기하면 이승훈, 정약종이 참수 당했고 권철신, 이가환 등이 혹형으로 옥사했으며 정약용, 김범우 등은 지방으로 유배당했던 것이다(김범우는 거기서 곧 죽었다). 전라도 진산 땅의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또한 앞서 참형되었었다.  이런 인물들이 살아 있었던 당시를 그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써진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 상〉은, 그러나 그들이 거의 생존해 있는 상태로 작품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순교’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작가의 애초의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이 작품이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가 ‘배교’의 문제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초기 천주교 전래시의 박해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기원의 이 소설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비견될 수 있겠다. 같은 기독교 역사소설로서 순교와 배교의 면에(그중에서도 특히 배교의 면에) 더욱 작가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상호 유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감동의 비중에 있어서 서기원의 것이 슈사쿠의 것을 따라잡기엔 다소 부족하지 않나 느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지나친 간결체 문장의 연속이 오히려 중후한 감동을 감쇄시키는 역효과를 내지 않았나 생각되며, 동시에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묘사가 단순히 대화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치 소설이 아닌 희곡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데, 그러나 그 희곡적 구성이 가져다주어야 할 성격묘사나 긴박감 조성을 이 소설은 별로 형성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평면적 인물설정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또한 이 소설이 너무 대화 중심으로만 전개됨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효과적인 지문의 서술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약점도 지니고 있으므로(즉 너무 압축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사건의 실상이 난삽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결점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1
  • 모든 순간 나의 마지막 순간
    모든 순간, 나의 마지막 순간, 난 어제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나는 당뇨환자라 모두가 걱정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가에 빛이 환히 비치고 나는 눈을 뜬다. 나는 그 순간을 느낀다. 밖으로 나와 당을 체크해 내본다. 신문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무슨 주제로 쓸까’ 잠깐 고민하고 글 제목을 써 내려갔다. 신앙 고백 철학 여행 등 나의 과거를 이야기할까 하다 오늘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을 적기로 한다. 글 쓰는 이와 글 보내는 이 생각하는 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여야 하니까. 글의 홍수시대에 산다. 한 사람의 생각과 글은 순식간에 모든 사람에게 퍼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남의 좋은 생각을 공감하여 보내면 나는 사라지고 그분만 남는다. ‘비워라, 너를 비워라’ 지난달 나는 등산 중에 어느 사찰을 갔다. “스님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생각은 무슨 생각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생각해봤자 모두 잡생각 아닙니까?” 옳거니, 나도 가끔 오늘 무얼 할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생각하다 ‘주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하고 묵상을 시작해 본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면 무엇이 남을까? 작은 여인, 소녀, 질투, 시기, 부러움, 겨우 하는 게 청소 독서 그림 그리기 정도 아닐까? 그래서 소아적 나를 버리고 기도해본다. 오늘 언니가 직장을 가지 않고 쉬는 날이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을 끝내고 수지로 아침을 먹으러 갈 것이다. 눈을 뜬 아들이 먼저 괜찮냐, 열이 안 나느냐 묻는다. 딸 지희의 전화가 온다. 괜찮냐고~ 어젯밤에는 구미코가 전화를 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할 때, 그들은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주님 혹 저가 염려하고 걱정해 주어야 하는 영혼이 있나요? 제가 지금 입고 있는 노란 원피스처럼 노란 신호등을 주셔요.‘ ‘말씀이라는 지도, 성령이라는 내비게이션, 기도라는 파워 전력-이런 것이 제 옆에 있네요’ 여행을 하면서, 기차를 타며, 비행기를 타며 늘 읇조린 말 ‘주여 내 영혼을 거두소서, 당신의 품에’ 오늘 나는 또 다른 묵상을 한다. 집에 앉아서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당신의 깃털로 써주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기도하는 순간, 글을 읽는 순간. 또 카톡이 온다. 우리는 수도 없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최후 마지막 말이다. 나의 최후는 어떨까? 지난 2월 21일 나는 내 어머니 박소년여사를 내 품에 안고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대명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가끔 그를 그분이라 부르고 그녀를 그 사람이라 부른다. 내게 하나님은 그분이 아닌 내속의 사시는 분, 나를 이끄시는 혼 속에 계신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 속에, 꽃이 피는 순간, 꽃이 지는 순간, 모두가 시를 사는 순간, 신을 사는 순간이다. ‘주여 나를 돌아보소서, 당신의 딸이옵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떴다, 오늘 아침 여기 있는 나를 본다 세상을 본다 하늘 바다 산 수많은 나무들 수많은 생각 속의 사람들 그들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 속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나./화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18
  • 상처받은 심령들을 보듬는 시골교회 교역자 -박혜원의
     고 박혜원 작가의 문단 데뷔작 <구만리 하늘>(2002)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편소설은 강원도가 그 지역적 배경으로 되어 있다. 강원도 정선의 나전 마을에 세워진 한 시골교회에 새로 부임한 젊은 전도사가 신앙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단순한 내세지향적·보수적 신앙이 아닌, 하나님나라 지향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신앙에 새로이 눈을 떠가는 한 젊은 교역자의, 삶의 성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데에서 2천 년대에 나온 기독교소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아직 목사 안수조차 받지 못한 전도사 신분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건주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금 그 지역 교회에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 정선의 나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는, 아직도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교회 전도사 건주는 그 마을 교회에 부임한 후, 아직 음주의 타성을 버리지도 못한 처지였는데, 당시 그의 음주 사실을 안 그 교회 성가대의 이은희 반주자가 "말도 안 돼. 진짜 전도사 맞아요?"란 질문을 그에게 던졌으며, 또 이런 비판도 그에게 가해 건주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렇잖아도 전도사님의 설교에는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이 빠져 있어요. 항상 조심하셔야 한다구요." 그런가 하면, 그로 하여금 신학 공부를 하게 한 그의 절친한 친구, 한의사 영빈이 그에게 각별한 충고를 한 일까지 있었다. 목사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힘들면 기도해라. 기왕지사 택한 길, 의심 없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안 되겠니?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이 없이는 전도란 불가능한 거야." 이처럼 교역자로서의 자신의 내적인 부실과 허약성도 문제이지만, 시골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시무 조건의 취약성 또한 그의 근무 의욕을 떨어드리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끝없는 교회보수 공사, 교회기둥 역할을 해야 할 황 집사의 간암말기 확진, 첫 아이의 죽음으로 실성한 강릉댁의 정신이상 증세, 이미 헌금했던 패물을 되돌려 달라는 신도가정 내 불신자의 강압적 자세, 거기에다 군청에서 지시한 경로행사를 교회가 대행해 달라는 면사무소 직원의 청탁… 등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런 속에서 그가 목회하는 그 시골 교회의 교세나 재정 상태는 어떠했던가. "겨우 스무 명을 웃도는 신도들 중, 그나마 반은 폐광으로 직업을 잃고는 날품팔이로 가난했고, 반은 아무 능력도 없는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달에 만 원의 헌금도 벅차 보였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목회 여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그 나름의 믿음의 성장을 보이는 건주의 건강한 교역자 상은 다음의 인용문이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것 같다. "(그는) 이곳의 가난한 신도들을 놔두고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 시골 교회는 이제야 처음으로 목회자다운 목회자를 맞이하게 될 모양이다. 자기 출세(?)를 위해 이 시골 교회를 무슨 정거장마냥 가벼이 거쳐 가는 그런 목회자가 아니라, 상처받은 심령들이 신음하고 있는 이곳에다 뿌리를 든든히 박고 일생[종신]의 목회사역에 투신하기를 마음 다짐하는 젊은 목회자 건주의 앞날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일을 위해 그에게는 이은희와 같은 그 고장 출신 '토박이 처녀'가 또한 배우자로서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녀는 이제 이 교회 목회자의 '비판적 조력자'가 되어 이 시골 교회공동체가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열심히 그를 도와나갈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18
  • 신도들의 결연한 ‘마음 비우기’ 실천운동(하)-김병로의 〈산촌의 소리〉
                                                한편 김병로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를 읽고 나서 필자는 G.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혀 이질적인 것 같은 이 두 작품들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게 된 것은 독일 신학자 타이센이 그의 신학적 연구 결과를 소설로 형상화했듯이 우리 목회자 김병로도 그의 목회 체험을 같은 소설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타이센은 그의 소설을 통해 예수 시대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는데, 예수 시대에 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그런 소설을 그가 써 냈던 것이다. 그 원리가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의 목회 경험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써 내기 힘든 작품을 김병로 작가는 그의 나이 회갑을 넘긴 때 써낼 수 있었다.  그의 노련한 목회 경험에 의해 수집된 각종의 소재(또는 에피소드)들이 이 작품 속에는 허다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런 소재들은 생경한 자료들로 나열돼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답게 등장인물의 실천적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사실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오랜 목회체험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리라. 소설 작품 속에서 ‘묘사’가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묘사(‘보여주기’showing) 같은 것은 이 작품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간체 소설의 형식이므로 단순한 서술(‘말하기’telling)이 있을 뿐이다. 서술 일변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경지가 거의 묘사의 수준으로까지 독자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의 근원은 아무래도 작가의 실제적 체험의 반영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사이비 그리스도인은 모두 작가의 준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태삼 목사나 한용범 장로 같은 분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용범 장로를 위시해서 장도환 장로, 김상수 장로와 같이 그들은 후에 대부분이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된다. 특히 한 회장(한 장로)의 변화된 모습은 놀랄 만한 정도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가히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은 한국 교회의 한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의 노년 결혼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장면 설정은 이 작품의 초반에 이미 설정해 놓은 처녀 여전도사들의 독신 생활 중도 포기에 대한 풍자와 수미상응(首尾相應)한 구성법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민 교수(목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작가는 한국교회의 병폐 한 가지를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민 목사(교수) 자신은 이런 교계의 치부에 자기가 한 사건을 더 보태 줄지도 모를 ‘성직자의 노년 결혼’에 대하여 스스로 회개(포기)하고 결연히 제 길을 찾아 떨쳐나서는 것이다. 민 목사의 ‘마음 비우기’ 결단에 우리의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마지막은 주인공 송상희 전도사가 몸담고 있는 기도원의 공석 중인 원장 자리를 그녀 자신이 취하지 않고 선배인 하 전도사에게 양보하기 위해 편지를 띄우는 것으로 끝나지만, 짐작건대 하 전도사 역시 그 청을 흔쾌히 수락할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마음가짐’이 이 작품 속에서는 크게 강조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11
  • 신도들의 결연한 ‘마음 비우기’ 실천운동(상) - 김병로의 〈산촌의 소리〉
    김병로 작가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1988)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병로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좀 생경하다는 반응을 일으킬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 이 작가에 대하여 조금은 소개해야 될 것 같다.   1926년 평안북도 태생인 김 작가는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신교회(예장)에서 상당 기간 실제 목회를 한, 일명 ‘목사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을 작가였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후 수십 편의 단편소설들과 수(數) 권의 장편소설을 써낸 역량 있는 소설가였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지 않은 것으로 그의 신상 기록에 보이는데, 몰沒 연대가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장편소설 〈산촌의 소리〉는 시종일관 ‘준열한 비판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 작가는 보수 정통적 신학이론에 굳게 서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으로 신자(목회자)의 생활을 영위하되, 다른 신도(평신도·교역자)들의 교회공동체에서의 삶이 비(非)기독교적(또는 反기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준열한 비판을 가하는 위치에 서있다.   작가는 오로지 절대자 하나님을 믿고 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권능을 힘입어 우리 신도들이 교회공동체의 삶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며, 또 어떻게 거듭난 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구호를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변화를 입어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참사람이 되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인인 체 행세하는 허다한 군상들을 향해 사이비 그리스도인의 자리에서 과감히 뛰쳐나와 참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줄기차게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외침이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타락성에 대한 그의 ‘준열한 비판’과 함께 토로되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의 ‘인간화’를 목표로 한 ‘새로운 존재’(New being)에의 열망과, 중생(重生) 지향적인 작가의 문학적 메시지가 어느 면에서는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자기(기독교) 옹호적이고 나아가서는 체제 옹호적인 것으로 평가받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일그러진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비인간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준열한 비판을 견지하는 예언자적 선포의 정신이 충일한 작품이라 볼 수 있기에, 이 작품이 아무리 자기(기독교) 옹호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선교 목적적이거나 교권(체제) 옹호적인 그런 의도의 작품으로까지 평가 절하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N. 호손의 〈주홍 글씨〉와 같이 기독교문학 작품으로서 순수문학(본격문학) 계열에 드는 작품이 될 수 없으리란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 소설이 코리 텐 붐의 〈피난처〉나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와 같은 간증문학적 특성을 지닌 신앙수기 계열에 드는 작품으로 볼 수도 없으리란 판단이다.   일인칭 시점의 서간체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것이 픽션(소설)이므로 좁은 의미의 간증문학이나 신앙수기로 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본격문학(순수문학)으로 분류하기에도 미흡하다 하겠으므로 결국 〈산촌의 소리〉는 양자 절충 양식의 기독교 실천문학 작품이란 데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6-08
  •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예수의 사랑 - 정을병의 〈본회퍼의 죽음〉
      정을병의 단편소설 〈본회퍼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주는 제2회 한국소설문학상(1976)을 수상한 작품인 〈본회퍼의 죽음〉은 아마도 한신대학교에서 수학한바 있는 작가 정을병(1934-2009)이 불세출의 독일 진보적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의 생의 말기 행보를 만천하의 독자들, 특히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광포(廣布)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작품을 써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게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울림이 매우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본회퍼(1906-1945)는 독일 히틀러 총통의 세계 정복 야욕을 미리 간파하고 나치스 제3제국의 잘못된 야망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앞서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과 어울려 그 계획을 실현하려고 동참했다가 실패함으로써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1943.4.5.) 수형생활을 하던 도중,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1945.4.9.) 독일 고백교회 반(反)나치 저항운동의 기수라고 할 젊은 목사였다.   소설 〈본회퍼의 죽음〉은 그 본회퍼 목사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갇혀 지내던 때로부터 그의 죽음(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실제 모습을 다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10월경부터 1945년 4월 9일(본회퍼 처형일)까지 독일의 형무소들에서 일어난 일들을 수형자 본회퍼의 거동과 그에 대한 관변 측의 대응 등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1944년 10월경의 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니 그가 감옥에 수감된 지 1년 반(전체 수감 기간의 4분의 3)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뒤의 사건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이후 그가 1945년 4월9일 처형된 것을 감안하면 그는 구속 수감된 지 만2년 4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로부터 21일, 곧 3주 뒤에 히틀러는 자살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음의 부분이 독자들에게 어필한다. 수감자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 음모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형무관 크노블로흐가 본회퍼의 생명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를 구출하기 위해 탈옥을 권유하고 또한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정작 장본인은 다소의 동요 끝에 탈출 불가 쪽으로 아예 요지부동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본회퍼의 심리적 추이가 독자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것이다.   본회퍼는 수차 크노블로흐 형무관의 우정 어린 탈옥 권고를 받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갈등하는 순간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결국 자기의 탈출로 인해 어느 누구라도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앞으로의 그의 행동 방향을 정했다. 자기가 탈옥할 경우 게슈타포가 자기 부모든 형제든 약혼녀든 잡아다 고문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면 차라리 자기 한 목숨 희생당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형무관 크노블로흐와 수감자 본회퍼 사이의 밀고 당기는 ‘생명 지키기 작전’과 ‘생명 버리기 의지’의 숨 막히는 대결이 이 소설 속에서는 가장 광채 나는 대문으로 보인다. 처형장에서의 그의 최후 진술이다. “나는 기독교의 사랑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국가의 이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며, 마지막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본회퍼는 결국 예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그런 일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5-28
  • 김성한의 단편 〈바비도〉
      김성한의 단편소설 〈바비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1953년 장준하씨가 창간한 〈사상계〉 잡지에 발표되었던 〈바비도〉(1956)는 그 〈사상계〉지가 작가 김성한에게 제1회 동인문학상(1956)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그만큼 문학계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편 역사소설 〈바비도〉는 15세기 초엽의 영국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의 영국 왕은 헨리4세였다. 그는 1399년 사촌형인 상왕 리처드2세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악명 높은 임금이었다. 그는 왕좌에 오른 2년 뒤에 ‘이단분형령’(1401)이란 것을 통과시켰다.    기독교의 이단자들을 골라내어 불에 태워 죽여 버리라는 무서운 법령이었다. 1407년 이후엔 개혁자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 독회를 금지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바비도는 1410년 이런 조치에 의해 ‘이단 분형령’에 따라 화형을 당하게 된, 재봉직공 신분의 독실한 기독 청년이다. 그가 생각해 볼 때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별 못된 일을 저지르고서도 아무 탈 없이 지내면서도 평신도들에게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일은 할 수 없다.   또는 이 사람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번다한 규제들이 그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과 세속권력자들이 합세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규제하는 일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행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 사실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계가 분열하여 교황청이 원래의 로마에도 있고, 또 새로 아비뇽이란 곳에도 세워졌다. 교황청이 두 군데나 있었다는 것은 그곳을 다스리는 교황이 각기 따로 있었다는 뜻이 된다. 교황이 둘이나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409년 피사종교회의에서 두 교황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새로운 제3의 교황을 선출했다.   그러나 앞서의 두 교황들이 그들의 자리를 절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이젠 교황이 셋으로 불어난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있었던 독실한 기독 청년 바비도가 기성 교회의 권위를 인정할 리 만무하고 또 그들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를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무슨 법이 만들어졌든 말든, 무슨 구실을 대어서 자기들을 규제하려고 하든 말든 자기의 신앙 노선만을 굳게 지키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법 때문에 제 신앙노선을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이것저것 따져 보았으나 자기는 역부족일 뿐이라 생각되었다. 위로 교황부터 아래로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조르는 위압감을 느꼈다. 로마교회 전체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큰 대조가 아닐 수 없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사교가 심문을 시작했다. “밤이면 몰래 영역복음서를 읽었다지?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느냐?” 무슨 물음에도 바비도는 사교의 뜻과는 반하는 말만 해댔다.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사교는 그에게 분형에 처하는 판결을 내리고, 그는 스미스필드 사형장으로 옮겨졌다. 헨리 태자가 나타나 그를 회유해 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바비도는 결국 한 줌의 재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 아니었을까?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5-17
  • 스스로 끝낸 고아 명숙의 짧은 한 생애(상) - 유재용의
    이범선 작가의 중편소설 〈피해자〉(1958)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학촌 이범선(1920~82)은 〈학마을 사람들〉과 〈오발탄〉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이다. 〈피해자〉는 남녀 크리스천이 주인공들로 설정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 남녀가 최요한과 양명숙이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 최 장로의 아들이 요한이고, 그 고아원에서 원생으로 살아온 여자 고아가 명숙이다.   요한은 서너 살 위였고 명숙은 그만큼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둘이 너무도 다정하게 학교엘 함께 다녔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 둘이 오누이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원장인 최 장로가 외아들이었던 요한을 장가보내려 하면서 아들 요한의 짝으로 명숙이가 아닌, 그 고아원의 후원자였던 어느 교회 목사의 딸을 지목해 놨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최 장로와 아들 요한 사이엔 상당 기간 냉기가 흘렀다. 요한은 자기가 명숙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음을 아버지 최 장로가 모르지도 않으면서 다른 처녀를 들여 밀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아원 운영이 어려웠던 때 그 목사 교회의 재정 지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원장 최 장로는 그 목사의 딸을 마다할 처지가 못 되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명숙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고아원을 박차고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요한으로서는 무슨 묘책을 찾을 수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결국 세월이 약이라고,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는 명숙이만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된 요한이 현실타협책으로 아버지의 요구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 목사의 딸과 결혼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루어진 가정이 화기애애하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요한은 어느 기독교계 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교회 출석을 잘 하는 모범적인 크리스천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편(요한)이 옛날의 고아 애인(명숙)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런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는 한 방편이라고나 할까,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회심하고 바른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들 내외는 그렇게 한 이십 년여의 세월을 사는 동안 어느새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른 요한과 명숙이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도 학교 동창들의 회식 자리였던 어느 한식 요릿집(흔히 술집이라고도 불리는)에서였다. 거기서 참으로 기적적으로 그 둘은 상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4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던 그 둘이 서로 동기 동창일 리는 만무하니까 정말이지 이해될 리 없는 운명적 만남이었다고 할 수밖에…. 요한은 손님, 명숙은 그 요릿집의 마담 신분으로였으니 말이다.   요한이 다음날 아침 학생들을 인솔하고 경주 불국사에 수학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명숙이 무조건 옛 애인 요한을 따라붙어 경주에까지 가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경유하여 다음날 새벽의 해돋이 구경을 하는 언덕에까지 마치 구경 온 학생이기라도 한 것처럼 동행하다가, 요한이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명숙은 그곳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그녀의 짧은 한 생애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이 사건이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문학평론가·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4-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