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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5)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 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 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 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맨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46-48쪽) 정대는 이미 죽어 혼만 있는 상태에서 5.18 희생자들의 죽음을 증언한다. <소년이 온다>의 등장인물은 고립된 상황에서도 타인의 삶과 죽음을 관찰하고 증언한다.동호는 정대의 삶을, 정대는 공터에 버려진 시신들을 증언한다.  한강 작가는 5월 광주를 증언하는 900여 명의 증언록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광주 뿐만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다른 사례와 자료를 구해 인간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에 대한 책을 읽었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나미 검정볼펜으로 고문을 당한 23살의 교대 복학생 ‘나’는 평범한 모나미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였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어진 볼펜을 이용한 고문을 당했다. 하얗게 뼈가 드러나고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 들어 갔던 자리를 쓸어본다. 그들은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었고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거였다고 자조했다.  ‘나’는 대학 신입생 진수를 증언한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 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 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건, 유난히 가냘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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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9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 (14)
       오늘밤 시민군이 모두 죽더라도 유족에게 확실히 연락이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동호 혼자서 여섯 시 안에 이것들을 정리해 관마다 붙여 놓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동호야아 ”하고 부르며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동호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 냈다. “군대가 들어 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동호는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다 떼어내고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쳤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동호의 엄마는,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에 가로 막힌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데요 엄마” “문 닫으면 나도 들어 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동호가 목격한 정대의 죽음은, 그로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에 남게 했다. 그렇게 해야된다는 그날의 양심이 죽음을 회피하지 못한 것이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 끝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은숙은 동호를 데리고 가려 했다. 동호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선 동호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동호의 눈꺼풀은 떨렸다. 작가는 동호를 ‘너’라고 2인층으로 서술한다. 동호는 친구 정대와 시위대 선두에 같이 있다가 정대가 총에 맞는 것을 목격한다. 그후 동호는 도청에 남아 시신을 거두고 기록하며 정대의 시신을 찾는다. 정대는 시위대에 있다가 총탄에 맞아 죽은뒤 유령으로 남아 버려진 시신을 목격한다. 검은 숨, 공터에 버려진 시신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 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 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도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 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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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3)
       동호는 키 순서로 배정되는 교실에서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열일곱살 고1 어린 동호를 보고 여기 있는건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동호는 고3이라고 둘러대며 상무대 자리를 지켰다.  동호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은 진수가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사자의 몸을 덮고 있는 흰천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흰천은 죽은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입관을 마친뒤 약식으로 치루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 놓았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그 앞에서 애국가를 부른다. 왜일까?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 군인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총을 쐈다. 그들은 나라가 아니기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쓰러진 사자를 추도하며 유족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빼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24-25쪽)  동호는 일요일에 천변길에서 목격한 성경 찬송가책을 손에든 신혼부부가 군인들에게  곤봉으로 마구 난타당하는 광경이 뇌리에 박혔다. 동호네 사랑채에 세들어 살던 정대와 그의 누나 정미는 방직공장에 다니며 검정고시 보기 위해 공부를 했다. 동호 친구 정대가 광장에서 옆구  리에 총을 맞는 것을 봤다. 동호는 친구 정대와 정미 누나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동호는 상무관 출입구의 탁자 앞에 앉아 있다. 탁자 왼편에 장부를 펼쳐놓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일련번호, 전화번호나 주소를 십육절 갱지에 큼직하게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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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1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2)
    다 쓴 음료수 병에 꽂은 양초들이 그들의 얼굴 곁에서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다. 강당의 안쪽 끝까지 너는 걸어 들어간다. 구석 자리에 뉘어 놓은 일곱사람의 기름한 형상을 본다. 이들은 정수리까지 완전히 흰 무명천으로 덮어 놓고, 젊은 여자나 아이를 찾는 사람들 에게만 잠깐씩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모습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맨 끝 모서리에 있는 사람의 상태가 가장 나쁘다. 처음 네가 보았을 때 그녀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딸이나 여동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천을 걷어 보일 때마다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정강이를 넉넉히 덮었던 물방울무늬 주름치마는 이제 부풀어오른 무릎을 다 덮지 못한다. 너는 출입문으로 돌아온다. 탁자 아래 둔 박스에서 새 양초를 꺼내들고 모서리의 사람에게 돌아간다. 머리맡에서 가물가물 타고 있는 몽당초 불꽃에 새 초의 무명 심지를 기울인다. 불이 옮겨붙자 입김을 불어 몽당초를 꺼버리고, 데지 않게 조심조심 유리병에서 빼낸뒤 새 초를 꽂는다. 아직 뜨거운 몽당초를 한 손에 쥔 채 너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다.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시취를 견디며 초의 불꽃을 들여다본다. 냄새를 태워준다는 반투명한 겉불꽃이 어른어른 타오른다. 주황색 속불꽃은 눈을 홀리듯 따스하게 너울거린다. 그 속에 작은 심장이나 사과 속씨 모양으로 흔들리는, 심지를 둘러싼 파르스름한 불꽃심을 노는 본다.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더 갈아줘야 할 초들이 없는지 찬찬히 살피며 너는 출입구를 향해 걷는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 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10-13쪽) 동호는 키 순서로 배정되는 교실에서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열일곱살 고1 어린 동호를 보고 여기 있는건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동호는 고3이라고 둘러대며 상무대 자리를 지켰다. 동호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은 진수가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사자의 몸을 덮고 있는 흰천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흰천은 죽은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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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 (11)
      작가는 세 여성의 시각으로 칠 년에 걸쳐 서사했다. 정심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오빠 정훈의 뼈 한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웠다. 작가는 인간성의 바다 아래로 계속 내려가서 마침내 심해의 바닥에서 촛불을 밝혔다. 정심이 그녀의 오빠 정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별을 짓지 않음은 지극한 사랑인 것이다. 불어 번역 제목처럼 불가능한 작별Impossibles adieux이다. 제주 4.3의 피해자들은 한강 작가에 의해서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간 것이다. 4.3 은 사랑이 고통으로 이어져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시적 서사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누구에게나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 지를 알게 한다. 작가는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끝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오월 광주, 소년이 온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의 영문 제명이 휴먼 액츠 Human Acts 로서 소년 동호의 넋이 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 동호 정대 정미 은숙 선주 진수는 인간이라는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1986년 5월 18일부터 28일 까지 열흘 간 자행된 국가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행위 앞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한강 작가는 묻고 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제 와서 인간을 믿을 수 있고 또 인간적 삶을 껴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어린새 동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한강은 ‘광주의 열흘’ 간 벌어진 잔혹한 학살의 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어린 새, 동호는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당장 집에 들어와 동호는 단단히 화가 나 있던 작은형의 목소리를 털어 내버리고 상무관에 있는 관을 지킨다. 동호는 장부에다 그들의 이름과 관 번호를 덧붙여 쓴뒤, 긴 괄호로 목록을 묶고 ‘합동추도식 3’ 이라고 적었다. 다음 추도식을 할 때 같은 관이 또 나가지 않으려면 잘 기록해 둬야 한다고 진수 형이 당부했기 때문이다. 애국가가 끝났는데도 아직 관이 정리되지 않았나보다. 군중의 웅성거림 사이로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시간을 벌기 위해선지, 마이크를 쥔 여자가 이번엔 아리랑을 부르자고 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울음소리가 잦아들 즈음 여자가 말한다. 먼저 가신 임들을 위해 묵념합시다. 수천사람의 웅성거림이 일제히 멎은 순간, 주변의 정적이 갑자기 도드라지게 느껴져 너는 놀란다. 함께 묵념하는 대신 일어선다. 옆구리에 장부를 끼우고, 반쯤 열어 놓은 상무관 출입문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바지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쓴다. 초를 태워도 아무 소용 없네. 냄새를 견디며 너는 강당에 들어선다. 날이 흐려 실내는 마치 저녁 무렵 같다. 출입문 쪽으로는 추도식을 마친 관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고, 아직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입관을 못한 서른 두 사람의 몸들은 흰 무명천에 덮인 채 넓은 창 아래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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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4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0)
    내가 미리 보지 않았다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을, 흑과 백만 남기고 그 사이의 색조와 세부가 지워진 사진이다. 그 페이지의 갈피에 중앙 석간지 사회면의 단신 스크랩이 끼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손때가 묻은, 가로와 세로로 접혔다 펴지며 생긴 십자 선이 희끗하게 닳아 있는 신문 조각이다. ‘사형언도’라는 단어에서 가장 복잡한 글자 아래 독음을 적은 청색 볼펜 글씨‘도’를, 그 옆의 여백에 눌러쓴 대구 국번 전화번호를 나는 읽는다. 이 번호는········ 이것과 같아,  손을 뻗어 소책자의 페이지를 더 넘겨간 인선의 손이 마지막 장 하단을 가리킨다. 회비와 성금을 보낼 농협 계좌번호와 예금주의 이름, 그리고 대구 국번의 전화번호가 인쇄되어 있다. (278-279쪽) 그후로는 강정심이 모은 자료가 없다. 삼십사 년 동안. 군부가 물러가고 민간인이 대통령 될 때 까지. 결국 인선의 엄마는 실패했다. 오빠 강정훈의 뼈를 찾지 못했다. 단 한 조각도.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광산을 방문했다. 인선의 엄마 정심의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이 악화되던 때이다. 인선의 아버지는 대구형무소에서 십오 년의 형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고문으로 얻은 수전증이 있었지만, 신세 지는 집의 귤 농사를 거들었다. 감옥에서 보낸 마지막 몇 년간 타일 기술도 배워서, 보수 없이 마을 일을 해주며 천천히 평판을 쌓았다. 허지만 군사 정권하에 한 달에 두 번 경찰이 동태를 조사 하러 오는 전과자와 허물없이 지내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인선의 아버지는 아내 정심을 대면하고 그후로도 오 년이 더 흘러서 중산간 집에 들어왔다. 인선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주정공장에서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이북 말을 쓰던 남자가 옷을 벗기고 의자에 거꾸러 매달 때마다 한 말을 들려 주었다.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깨끗이 청소 하갔어.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  수건이 덮인  아버지 얼굴에 그 사람이 끝없이 물을 부었다. 젖은 가슴을 야전 전화선으로 묶고 전기를 흘러 넣었다. 산사람과 내통한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그 사람이 속삭일 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모루쿠다.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297쪽) 정심은 남편이 당한 고문의 이야기를 듣고 오빠에게 했던, 오래 후회하게 될 말을 기억한다. “오빠 머리가 무사그러멘? 머리가 이상해” 정심은 인간이 인간성을 포기해야 하는 고문의 증상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정심은 맥락없이 자책했다. 누군가가 퓨즈를 끊은 것 같이 우두망찰 정신이 반나마 나가 있었다.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게 한 사랑의 서사 한강은 2014년 여름, 오월 광주에 대한 < 소년이 온다>를 낸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작가가 꾼 꿈이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장에 해당하는 4페이지이다. 한강 작가는 2014년 여름에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 나서 기록해 두었다. 무언가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에.  그후 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작가는 그 꿈의 의미를 되새겼다. 소설의 처음은 경하와 인선이 함께 끌고 가지만. 이어 달리기에서 마지막 주자가 중요한 것처럼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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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5] 물소리를 ‘가슴의 기도’로 승화 - 유승우의 「물소리」
      맑은 물일수록 잠들지 못하고  한 밤내 맑게 눈뜨고 운다.  밤이 깊어 갈수록  산 속의 냇물은  더욱 목청을 돋구어 소리친다.  아무런 바램도 없이  소리로만 살아서  밤새도록 흐느끼는  가슴의 기도.  나뭇잎들이 모두 경건히 손을 모으고, 바람도 멈추어 숨을 죽인다. 하늘이  하나의 커다란 귀가 되어  다 듣고 있다.              - 「물소리」 의 전문 유승우의 기독교시 대부분은 참신한 비유와 상징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구태의연한 관념적 용어의 나열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이미지들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하얗다’는 색채어는 순수 지향애의 꿈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하얀 모래섬’과 ‘흰 돛배’, 그리고 ‘귀가 밝구나’나 ‘맑디맑은 별들’ 등 순수의 세계에 집착하여 형상화했다. 이 「물소리」란 시는 ‘물소리’를 통해 ‘기도소리’를 듣는다. 즉 ‘물소리’는 ‘기도소리’이다. 물소리가 지닌 이미지는 맑은 소리이기 때문에 기도소리로 대치할 수 있다. ‘기도소리’도 구분한다면 ‘맑은 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승우의 기독교시는 기독교가 지닌 이미지를 비유와 상징의 체계로 형상화했다. 1행부터 3행까지는 자연의 현상이지만, 시적 의미를 부여했다. 밤이 깊을 수록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낮의 소음도 밤이 깊을 수록 잠들고, 지저귀던 새도 잠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에는 물소리, 그 자체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깊은 밤에 ‘맑은 물’은 잠들지 못하고, 한 밤내 맑게 눈뜨고 운다. 그것은 ‘맑은 물’이란 이미지에서 비롯 되었다. 그리고 ‘눈뜨고 운다’는 것도 ‘맑은 물’이 주는 이미지이다. ‘맑은 물’이 ‘잠들지 못하고’나, ‘맑게 눈뜨고 운다‘는 것은 의인화의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4행부터 6행까지도 자연의 현상을 바탕에 두고, 시적 상승작용으로 끌어올린다. 이 구절은 적막강산을 떠올린다. 밤이 깊어 갈수록 산 속의 냇물소리는 크게 들릴 수 밖에 없다. 밤이 깊어 갈수록 새소리 등 잡다한 소음은 없어지고, 냇물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현상인 ‘냇물소리’를 ‘더욱 목청을 돋구어 소리친다’고 의인화했다.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시의 중심이 된 부분이다. ‘물소리’가 ‘가슴의 기도’로 대치된다. ‘물소리’는 “아무런 바램도 없이/소리로만 살아서”에서, “밤새도록 흐느끼는/가슴의 기도”가 된 것이다. 물소리는 아무런 바램도 없이 들리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살아 있다고 진술한다. 그 소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밤새도록 흐느끼는 기도소리이다. 그리고 ‘가슴의 기도’도 ‘맑은 물소리’란 이미지에서 연유되었다. 그것은 ‘맑은 물소리’→‘가슴의 기도’→‘진실한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11행부터 13행까지는 종교적 경건성을 승화시킨다. 이 구절은 밤의 정적을 느끼게 한다. 그 정적은 종교적 경건성으로 형상화했다. 기도소리에 나뭇잎들이 손을 모으고, 바람도 멈추고 숨을 죽인다. 기도소리에 나뭇잎과 바람도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기도는 경건한 모습으로 드린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에 모두가 함께할 수밖에 없다. 14행부터 16행까지는 하나님이 진실한 기도를 듣고 있다고 승화시켰다. 그 기도는 나뭇잎도 손을 모으고, 바람도 멈추어 숨을 죽이는 가슴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도소리를 듣고 있다는 서술적 설명을 하늘이 하나의 커다란 귀가 되어 듣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관념적인 용어에서 탈피해 격조높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것을 보여준다. 특히 ‘하늘’이 ‘하나의 커다란 귀’로 의인화한 것은, 성숙한 시적 재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은 가슴의 기도, 즉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서나 듣고 계신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6-12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4] 신앙의 삶을 위한 길 - 최은하의 '비추사이다'
    ▲ 시인 최규창   비추사이다 비추사이다 열린 돌문 안으로 가득 넘쳐드는 빛살 빛살의 소리 소리의 빛보라로 비추사이다. 죽어도 영영 죽지 않고 죽어서 다시 사는 법을 이르시며 보이신 이여. 내 떠도는 죽음의 골짜기에 한줄기 꽃바람으로든지, 지금도 역력한 우리 어머니 마지막 손실로든지 눈부셔 캄캄하더라도 속속들이 비추사이다 비추사이다. 사위거나 그림자지지 않을 그 빛살 속에서 스스로를 이겨내게 하소서 웃으며 버리는 법을 익히게 하소서 다시 사는 법 안에서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을 참으로 참으로만 살게 하소서 죽음의 고통을 넘어서서 빛으로 살게 하소서 빛살이게만 하소서.              - '비추사이다' 전문 이 시의 제목인 '비추사이다'는 그 자체가 신앙인의 삶을 형상화했다. '비추사이다'는 ‘비추게 해주십시오’로 이해할 수 있다. 타동사인 ‘비추사’에 존칭인 ‘-사이다’란 어미를 삽입함으로써, 신앙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세를 내포시키고 있다. 이러한 것은 ‘비취다’는 옛말인 ‘비치다’로 빛을 보내어 밝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다. 즉 ‘비추이다’의 피동사로 비췸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시는 ‘빛’을 형상화했다. 그 빛은 ‘빛살’과 ‘빛보라’, ‘꽃바람’으로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비추사이다’로 빛의 생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빛은 일상의 빛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닌 ‘빛’으로 환원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빛’은 ‘가르침’이나 ‘삶의 표상’으로 환원된 것이다. 기독교란 종교의 특징을 빛으로 함축하고, 신앙인의 삶으로 환원되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시의 문학적 성취인 것이다. 제1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인 부활신앙을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무덤의 돌문 안에는 ‘빛’이 가득 넘친다. 그 빛은 빛살로 가득 넘쳐들고, 그 소리의 빛보라로 비친다. 특히 ‘빛살’은 비쳐나가는 빛의 가닥이며, ‘소리’를 지닌 ‘빛살’은 생명성을 지닌다. 첫 행의 ‘비추사이다’를 반복하는 것은, ‘빛’에 대한 강조로 기독교의 영원성을 드러낸다. 제2연은 기독교의 영원성을 노래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죽어서도 다시 사는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로 보여준 것이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제3연은 그 빛이 세속의 삶 속에 비추어 달라고 간구한다. 그 빛은 “한줄기 꽃바람으로든지”나, “지금도 역력한 우리 어머니 마지막 손길로든지”로 비추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꽃바람으로든지’나 ‘…손길로든지’, ‘…하더라도’는 간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떠도는 죽음의 골짜기에”는 세속적인 삶의 현장을 함축시킨다. ‘죽음의 골짜기’와 ‘빛’, 즉 기독교의 영원성을 대비함으로써 신앙의 삶을 추구한다. 스스로를 죽음의 골짜기인 세속적인 삶의 현장에서 떠돈다고 직시하고, 그 빛이 눈 부셔 캄캄하더라도 속속들이 비추어 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특히 그 빛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제4연은 신앙인의 바른 삶에 대한 길을 제시한다. 신앙의 빛 속에서 스스로를 이겨내게 하고, 웃으며 사는 법과 버리는 법, 그리고 다시 사는 법으로 신앙의 삶을 영위하도록 간구한다. ‘웃으며 버리는 법’은 신앙인이 지향해야 할 삶에 대한 총체적 표현이다. 또한 ‘다시 사는 법’은 기독교신앙의 집약된 표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행인 “빛살이게만 하소서”에서 ‘…만’이란 어미를 붙임으로써 신앙인의 소박한 삶을 보여주고, 기독교신앙으로만 삶을 영하도록 간구한 것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6-04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3] 하늘나라로 가는 아름다운 마음 - 천상병의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의 전문  천상병(千祥炳)은 누구보다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인 맑은 시들을 남겼다. 1967년 7월 동백림(東伯林)사건에 연류되어 6개월이나 갖은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 “전기 고문이 너무너무 무서웠다”라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이기심과 악을 뛰어넘는 정제된 깨끗함을 보여주었다. 전쟁과 고문, 그리고 가난 등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하늘나라’를 꿈꾸므로써 맑은 시심(詩心)을 키운 것이다.   그의 행적 속에서 신앙적인 삶을 지닌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한때에 성당에도 나가고, 한때는 교회도 다녔다. 1981년에는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옆 연동교회를 출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연동교회 김형태목사의 설교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좥귀천좦은 천상병의 신앙적인 삶의 모습이 용해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죽는다’의 뜻이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하늘나라’를 연상시키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나,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신앙인의 심성을 그대로 반영시키고 있다. 그것은 신앙인의 덕목인 ‘감사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가난과 아픔의 삶을 ‘감사의 삶’으로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 시는 기독교신앙이 육화된 삶에서 형상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지난 삶을 아름다움으로 노래했다. 이 시에는 짙은 우수가 깔려 있으면서도, 절제된 목소리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맑은 심성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신앙인의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3연 9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연에서 하늘로 돌아갈 때에 동반하는 것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이다. 그리고 둘째 연의 ‘노을빛’이다. 이 세상의 소유물들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고, 자연현상 속에서의 ‘떠남’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라며 노래한다. 둘째 연도 노을빛 함께 단 둘이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이 손짓하면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구름의 손짓’은 하늘로 돌아가라는 부름이다. 이 첫째 연과 둘째 연은 하늘로 돌아가는 상황을 표현했다.  셋째 연은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서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고백한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지금까지의 살아온 날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형적인 신앙인의 삶이 아니면, 그렇게 표현할 수 없다. 바로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상병은 1993년 4월 28일 63세로 이 세상을 떠난 ‘천상(天上)의 시인’이었다. 누구보다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맑은 시심을 지닌 소유자였다. ‘초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시들은, 오늘의 찌든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넉넉하고 여유있는 인격자의 모습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1971년 가을에는 동백림사건의 고문 후유증과 심한 영양실조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5-22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2] 맑고 깨끗한 순결의 눈물 - 김현승의 「눈물」
    ▲ 시인 최규창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눈물」의 전문 이 시는 김현승 자신이 말하는 그의 대표작이다. 6·25 전쟁후 서정주시인이 광주에서 발간한 〈시정신(詩精神)〉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그의 시작품중에서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눈물」일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다. (산문집 〈고독과 시〉 -「고요한 면을 지닌 눈물」- 나의 처녀작과 대표작). 이 「눈물」은 짙고 견고한 기독교정신을 형상화한 시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는 〈예레미야 애가〉를 연상시키고 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으며,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레미야는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 보실 때까지니라”(3장 49절~50절)처럼, 눈물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이 시의 ‘눈물’은 〈예레미야 애가〉의 죄지은 자의 눈물이 아니라, 현세적 고뇌를 신앙적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김현승은 산문집 〈고독과 시〉에서 “이 시의 기저에는 기독교정신이 깔려 있다. 이 시는 내가 그렇게도 아끼던 나의 어린 아들을 잃고 나서 애통해 하던 중 어느날 문득 얻어진 시다. 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려고 하였었고, 그러한 심정으로 이 시를 썼었다.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라는 것이 이 시의 주제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눈물을 좋아하는 나의 타고난 기질에도 잘 맞는다”(「굽이쳐가는 물굽이 같이-나의 시, 그 변모의 과정」에서)라고 적고 있다. 이 시의 ‘눈물’은 김현승 자신의 비애의 심정으로 축출된 맑고 깨끗한 산물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얻은 ‘눈물’을, 맑고 깨끗한 ‘생명의 눈물’로 창조한 것이다. ‘눈물’은 생명 혹은 거듭남의 삶을 상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의 힘이다. 현세적 삶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한 거듭난 자의 삶이다. 슬픔과 분노와 좌절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순결의 눈물로 승화시켰다. 신앙의 윤리적 삶에서 비롯된 거듭난 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자신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눈물을 드리는 고백적 기도이다. 이 시는 순결을 지향하는 참회의 심정을 노래했다. 이 시의 바탕에는 깨끗하고 맑은 신앙의 마음이 승화된 고요한 정서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 가장 깨끗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신앙의 정성이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이 시는 제1연과 2연은 ‘눈물’에 대한 가치성을 부여하고 있다. 제1연은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의 씨앗으로 표현하고, 제2연은 흠도 티도 없고, 금가지도 않는 가장 깨끗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3연과 4, 5연은 하나님께 드리는 ‘눈물’에 대한 설명이다. 제3연과 4연 1행은 하나님께서 더욱 값진 것을 요구해도 ‘눈물’뿐임을 고백한 것이다. 제4연 2행과 3행, 그리고 제5연은 하나님의 섭리, 즉 창조성에 대한 신앙이다. 특히 마지막 행인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는 하나님 앞에서 참회할 수 있는 자각에 대한 ‘눈물’이며, 부활의 정신을 상징한 생명성을 부여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5-20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1] 신앙인의 바른 삶과 실천의지 - 윤동주의 「서시」
    ▲ 시인 최규창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의 전문 이 시는 해방 후에 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序詩)」이다. 시집에 수록된 맨 첫 작품이며, 1941년 11월 20일에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1년은 윤동주가 북간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연희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때는 일제말 수난기에 해당되며, 〈문장(文章)〉 등의 문예지가 폐간되고, 무수한 지식인을 예비검속 및 투옥되었던 암흑기이었다.  이 시는 우주적 교감으로 삶의 비약과 희망을 형상화시키고, 꿈과 삶의 정직성을 보여 준다. 그것은 기독교신앙으로 비롯되고 있으며, 기독교신앙의 경건과 진솔성을 함축시켰다. 이러한 시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신념의 바탕 위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서시」는 2연 9행으로 되어 있다. 구성상 모두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면, 첫 번째의 단락은 4행까지이며, 두 번째 단락은 5행부터 8행,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2연의 1행이다. 이 시를 기독교신앙의 측면에서 분석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속죄와 회개, 찬양, 그리고 십자가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사명으로 세분하여 분류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속죄와 회개의 모습이다. 1행과 2행은 신앙에 의한 도덕적 결백성을 나타내고 있다. 3행과 4행은 바른 신앙에서 비롯된 윤리적 삶이다. ‘하늘’과 ‘바람’은 절대자, 즉 하나님의 영역이고, ‘부끄러움’과 ‘괴로움’은 세속적 인간의 관습이다. 특히 이 시에서 ‘바람’은 과거의 갈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신앙적 도덕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4행까지는 삶의 신앙적 자세로 신앙의 지조를 지켜 가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찬양과 십자가의 가르침, 십자가의 사명으로 분석할 수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나, 신앙의 경건함을 지니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가르침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심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지니고 살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7행과 8행인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십자가의 사명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이다. ‘나한테 주어진 길’이란 십자가의 길이며, ‘걸어가야겠다’는 십자가의 사명에 대한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 단락인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대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윤동주는 그의 시에서 일제 식민지시대를 어둠의 역사로 규정했으며, ‘오늘밤’은 식민지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을 하나의 행으로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러한 「서시」는 윤동주의 좌우명이며,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적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삶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5-08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20] ‘꽃’의 ‘창조과정’을 형상화 - 유재하의 「꽃의 사명」
    ▲ 시인 최규창   p.p1 {margin: 0.0px 0.0px 0.0px 0.0px; text-align: justify; font: 12.0px Helvetica} p.p2 {margin: 0.0px 0.0px 0.0px 0.0px; text-align: justify; font: 12.0px Helvetica; min-height: 14.0px} 이 세상 고운 빛깔 모두 모아 하나님은 꽃을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빛깔 중에서 진달래에게 진분홍빛을 개나리에게 노란빛을 벚나무에게 흰빛을 예쁘고 샘이 많은 장미에겐 가지와 함께 빨강, 노랑, 하얀, 분홍 까망…. 원하는 대로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꽃들마다 향주머니 하나씩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꽃은 제각기 다른 빛깔로 제각기 다른 향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며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 「꽃의 사명」의 전문 이 시는 유재하(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총무·원로목사)의 제2동시집인 <꿈꾸는 반달>(아동문학사 펴냄, 2001년)에 수록된 동시로,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 세상의 고운 빛깔만을 모아 꽃을 만드셨던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된 빛깔과 향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꽃은 하나님이 고운 빛깔만을 모아 만들었지만, 꽃의 종류에 따라 다른 빛깔로 만들었다. 특히 장미는 가시와 함께 여러가지의 빛깔로 꽃을 만든 것이다. 이 꽃마다 향기를 주는 향주머니를 안겨 준 것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임을 일깨워 주는 시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꽃을 통한 기발한 발상과 구성, 꽃이 주는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가운데 재치있는 전개는 유재하의 문학적인 원숙한 역량에 기인한다.  이 시의 ‘꽃’은 하나님의 창조에 따라 아름다운 꽃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처럼, 모든 인간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꽃이다. 아름다움의 상징이 꽃이기 때문이다. 첫 연부터 4연까지는 하나님이 꽃을 창조한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셋째 날에 식물을 만들었지만, 구체적으로 꽃의 창조과정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식물 중에 꽃이 들어 있으며, 그 꽃에 대한 섬세한 부분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대변한 것이다. 마지막 연인 꽃의 사명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깊은 성찰에 연유한 결과이다. 꽃의 빛깔과 향기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명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꽃의 사명으로 전개한 것도 시인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 연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고운 빛깔만을 모아 꽃을 만들었다고 단정했다. 꽃이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적인 기발한 발상이다. 꽃을 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고운 빛깔 / 모두 모아”란 구절처럼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꽃을 만들었습니다”고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표현했다. 제2연부터 4연까지도 마찬가지이다. 3연은 장미꽃이 예쁘고 샘이 많아 가지와 함께 빨강꽃을 비롯한 노랑꽃, 하얀꽃, 분홍꽃, 까망꽃 등 원하는 대로 주었다. 장미꽃의 가지에 가시와 한가지 빛깔이 아닌 여러가지 빛깔을 지닌 꽃을 피우기에 샘이 많다고 표현했다. 4연은 꽃들마다 향기를 담은 향주머니를 안겨 주었다. 이러한 것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음을 일깨워 준다.  제5연은 꽃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준다. “제각기 다른 빛깔”과 “제각기 다른 향기”로 꽃의 사명인 아름다움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란 구절은 의인화된 표현으로 ‘피어난다’는 의미의 진행형이다.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것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 시는 ‘꽃’을 ‘꽃’으로 인식하지 않고, ‘꽃’의 탄생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꽃’이 태어난 과정과 ‘꽃’의 존재의미를 구체화시켰다. 어린이들의 동심 속에 꽃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꽃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사명으로 피어나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5-03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8] 부활의 아침 - 이 수 영
    ▲ 시인 최규창   몸이 향기로운 꽃봉오리였을 때 그 꽃이파리 낱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일 상상도 못했습니다 몸이 타오르는 불꽃이었을 때 그 심지 다하도록 흘리는 눈물의 태산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 사망을 걸어 잠근 돌문이 열리듯 이제 진흙덩어리 이 몸 부수겠습니다 저의 손바닥에도 굵은 대못을 박아 주십시오 못자국 선명한 이 두 손으로 주님의 잔에 붉은 포도주를 딸아 올리겠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통해 ‘신앙의 삶’에 대한 성찰로 깨닫는 길 이 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신앙의 삶을 성찰한 고백이다. 예수가 부활한 아침에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화자인 스스로의 신앙에 대한 돌아봄과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보여 준다. 화자인 스스로의 신앙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의 죽음과 우리를 위해 희생한 생애를 깨닫도록 한다. 또한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화자인 스스로도 돌문이 열리듯 진흙덩어리인 이 몸을 부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승리의 부활에 대한 경배와 기쁨을 형상화했다.  첫 연은 죽음과 희생을 떠올려 준다. “몸이 향기로운 꽃봉오리였을 때 / 그 꽃이파리 / 낱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일 / 상상도 못했습니다”란 구절은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의 생애 자체가 “향기로운 꽃봉오리”로 함축했고, “낱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일”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형상화했다. 그의 생애는 오늘의 모두에게 신앙의 대상이고, 온 인류를 구원해 주는 구주이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과 처절한 죽음은 “상상도 못했습니다”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누구나가 예수의 죽음은 놀라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몸이 타오르는 불꽃이었을 때 / 그 심지 다하도록 / 흘리는 눈물의 태산 /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란 구절은 예수의 사랑과 희생, 눈물을 떠올려 준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스스로의 몸을 태워가며 밝음을 주는 것은, 촛불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의 생애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개인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했기 때문이다. 눈물도 마찬가지이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린 안타까움의 눈물인 것이다. 둘째 연은 예수가 부활하듯이 화자인 스스로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겠다는 신앙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의 무덤을 걸어 잠근 돌문이 열리고, 그 부활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삶을 결단한다. “돌문이 열리듯”이나 “부수겠습니다”란 표현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가 돌문을 열고 부활한 것처럼, 화자도 “진흙덩어리 이 몸”을 부수겠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특히 “진흙덩어리 이 몸”은 창세기 2장 7절인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성령이 되니라”란 구절을 떠올린다. 진흙덩어리로 만들어진 이 몸을 부수겠다는 것은, 걸어 잠근 돌문을 열고 부활한 예수처럼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결의를 보여 준다.  셋째 연은 십자가에 두 팔과 두 발이 대못으로 박힌 예수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한 자세로 부활의 예수를 경배하는 결연한 신앙을 형상화했다. 화자가 “굵은 대못을 박아 주십시오”라고 간구한 것이나, “못자국 선명한 / 이 두 손”은 예수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한 자세이다. “굵은 대못”과 “못자국 선명한”이란 표현으로 그 고통과 아픔의 깊이를 극대화시켜 준다. 그 두 손으로 “주님의 잔에 / 붉은 포도주를 딸아 올리겠습니다”는 것은 부활승리에 대한 기쁨과 경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포도주는 신앙생활의 기쁨(사사기 55:1)으로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첫연의 “못했습니다”는 돌아봄, 그리고 “못해 봤습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또한 둘째연의 “부수겠습니다”와 셋째연의 “박아 주십시오”는 결단의 자세, “올리겠습니다”는 경배의 모습이다. 화자의 순수한 신앙에 의한 고백적인 자세를 보여 준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4-19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7] 비신앙적인 삶을 향한 메시지 - 김 석의 「말씀·6」
    ▲ 시인 최규창   다 이루었다 알파와 오메가 너희들이 잠잠하면 저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 다 이루었도다      - 「말씀 · 6」의 전문 김 석의 「말씀 · 6」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앞두고, 모진 수난을 당하는 예수의 초췌한 모습을 떠올린다. 그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우리를 위한 “다 이루었다”란 말씀에 대해 지그시 눈 감아 묵상하도록 한다. 죽음 직전에 “다 이루었다”란 말씀을 통해 오늘의 비신앙적인 삶을 향한 메시지를 형상화했다. 지금도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 성취된 구속사역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 시는 성경구절을 적절하게 구성함으로써 구속사역에 대한 메시지를 승화시켰다. “다 이루었다”란 구절은 요한복음 19장 30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란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너희들이 잠잠하면 / 저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란 구절은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인용했다. “다 이루었다”란 예수의 말씀을 전제한 후, 이 성경구절을 통해 구속사역의 성취에 대한 의미를 전개했다. 이러한 시적인 영감과 기발한 발상, 재치있는 기교와 치밀한 구성은, 김 석의 원숙한 시작(詩作)에서 연유한 것이다. 특히 예수는 죽기 직전인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와 “다 이루었다”란 두 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죽음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성취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구절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구속계획의 성취임을 예수 자신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모든 육체적인 고통을 참고 순종했다. 십자가죽음의 직전에 최후의 절규인 “다 이루었다”란 말씀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였다.  첫 행인 “다 이루었다”란 구절은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여섯 번째로 온갖 방해에도 지상사역을 완수하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죽음 직전에 “다 이루었다”는 이 한 마디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선언은 예수 자신에 의하여 마지막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짧으면서도 장엄한 한 마디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모든 희망의 근거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천명한 것이다. 제2행인 “나는 알파와 오메가”란 구절은 예수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란 뜻이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의한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와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마침’은 관용적 표현으로서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원토록 존재하고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며, 이를 심판하는 최후 심판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제 3행과 4행인 “너희들이 잠잠하면 / 저 돌들도 외치게 하리라”란 구절은 누가복음 27장 40절에서 연유한 것이다. 특히 “저 돌들로 외치게 하리라”란 구절은 피조물들이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돌들이 찬양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비신앙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표현이다. 마지막 행인 “다 이루었도다”란 구절은 첫 행인 “다 이루었다”를 강조함으로써 구속사역의 성취를 새롭게 일깨워 준다. 이러한 이 시는 오늘의 모두에게 주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신앙적이지 못한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한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모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4-10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6] 낮은 자세로 하나님과의 만남 - 홍금자의 「오늘밤은」
    ▲ 시인 최규창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후에만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 몇 번이고 절망의 눈물을 넘어서야 잡을 수 있는 옷자락 사랑, 또 사랑 맨발로 서야만 만날 수 있는 이시여 오늘밤 내 폐허의 땅에서 당신의 이마에 겸손히 입술을 댑니다. - 「오늘밤은」의 전문 홍금자의 「오늘밤은」이란 시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걷는 듯한 힘겨운 세상살이 속에서 절망의 눈물을 딛고 일어서야만 주님의 곁에 갈수 있음을 깨달도록 한다.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맨발인 낮은 자세, 그리고 참회의 기도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간구의 기도로 만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단계적인 과정을 치밀하게 구성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후”에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은,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만 주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고,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 만날 수가 있다. 또한 “내 폐허의 땅에서” 만난 주님의 이마에 입술을 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후에만’ →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 →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 → ‘내 폐허의 땅에서’ → ‘당신의 이마에 / 겸손히 입술을 댑니다’고 주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을 보여 준다. 시적인 가치성을 획득하기 위한 상승작용의 결과로 볼수 있다. 첫 연은 대부분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삶을 형상화했다. 힘겨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출렁이는 바다”란 순탄한 세상이 아니라, 험한 세상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바다 위를 걸은”이란 험한 세상살이를 함축한 것이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걸은” 삶이란  힘겨운 세상살이다. 고난과 역경 속의 삶이다. 그리고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제2연은 절망의 눈물을 딛고 일어서야만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가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일깨워 준다. 첫 연의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걷는 삶이란 절망적일 수도 있다. 이 절망을 넘는다는 자체가 신앙의 행위이다.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 / 잡을 수 있는 옷자락”이란 구절의 ‘옷’은 성경에서 구원의 상징이다(이사야 61장 10절).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이란 구절은 이러한 성경적인 의미인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일깨워 준다. 제3연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린 화자는 하나님께 사랑의 표시인 이마에 입술를 대는 것은 존경의 인사이다. “오늘밤”이란 구절은 ‘기도의 시간’이 함축되어 있다. 밤에 ‘참회’와 ‘간구’의 기도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표현했다. 참회의 기도로 “페허의 땅”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비신앙적인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폐허의 땅’일 수밖에 없다. 신앙적으로 보면 참회를 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이마에 / 겸손히 입술을 댑니다”란 구절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다. 이러한 이 시는 은유적인 기법으로 구성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걷는 후에만”이나, “닿을 수 있는 주님의 땅”, 그리고 “몇 번이고 절망의 / 눈물을 넘어서야”나 “사랑, 또 사랑 / 맨발로 서야만”, “내 폐허의 땅에서” 등의 구절은 이 시가 추구하는 주제를 적절한 표현으로 형상화했다. 절제된 시어선택으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이러한 것은 원숙한 시작(詩作)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19-04-03
  • [한국 기독교시 다시 읽기 15] 행복한 삶위한 하나님의 축복 - 이해경의 「선물의 향기」
    ▲ 시인 최규창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변치 않는 믿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뜻이 있는 소망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깊은 사랑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넘치는 기쁨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나에게 바다같은 평안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의 나의 정원에는 당신이 주신 선물의 향기로 가득히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 「선물의 향기」의 전문 이 시는 지난 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믿음과 소망, 사랑과 기쁨, 평안을 선물로 주시고, 그 선물을 받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삶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선물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축복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각 연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면 받을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한 요소들이다. 이 풍성한 선물들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이러한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주어지는 즐겁고 복된 상태를 가리킨다(신명기 10장 13절). 건강을 비롯한 성공, 생명, 많은 자손, 안전, 풍성함 등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행복의 내용들이다. 첫 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변치 않은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앙의 행위를 지닐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심이다.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일컫는다(에베소서 2장9절).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미래를 위해 그를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뜻이 있는 소망”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래에 실현될 것에 대한 기대를 지닐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제3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깊은 사랑”을 선물로 주셨다. 그 사랑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신적(神的)인 사랑이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요한1서 4장 10절).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제4연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넘치는 기쁨”을 선물로 주셨다. 이 기쁨은 주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하나님의 속성이자(시편 104편 31절),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제5연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바다같은 평안”을 선물로 주셨다.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마음에 걱정이 없음을 표현했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 늘 평안하게 해주시기기 때문이다(빌립보서 4장 7절) 제6연은 화자의 가정이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향기가 가득히 피어오르고 있다. 행복한 가정과 삶임을 고백한 것이다. “나의 정원”이란 화자의 삶이나 가정으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변치 않는 믿음”을 비롯한 “뜻이 있는 소망”, “깊은 사랑”, “넘치는 기쁨”. “바다같은 평안”이 가득한 가정이나 삶은 ‘행복한 가정’과 ‘행복한 삶’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 시는 “변치 않는 믿음”과 “뜻이 있는 소망”, “깊은 사랑”, “넘치는 기쁨”, “바다같은 평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선물임을 인식시켜 준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보여 준다.  /시인·한국기독교문인 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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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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