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9(목)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출판/문화/여성 검색결과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9)
    생생히 번쩍이는 눈으로 영혜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 더 큰소리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 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마침내 그녀는 영혜의 몸을 힘주어 밀었다. 과연 다리부터 바닥으로 털썩 무너졌다. 그녀는 영혜의 목에 팔을 받쳐 들어 올렸다. ……언니. 영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언제 왔어? 마치 좋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혜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보고 있던 보호사가 다가와 그녀들을 로비 한 켠의 면담실로 안내했다. 원무과 옆의 면회실로 내려오기 어려울 만큼 증상이 무거운 환자들은 이곳에서 가족과 면회한다고 했다. 아마 의사와의 면담이 진행되는 곳인 것 같았다. 그녀가 탁자에 음식을 풀어 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홀린 듯이 영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밝은 영혜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그녀는 물었다. 아까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까르륵 영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 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 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 없어. 물이 필요한데. 영혜는 가부장제라는 육식 문화에 채식이라는 소극적 저항으로 탈주하려 했다. 그녀는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고 싶다며 물구나무서서 햇빛과 물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죽어가고 있는 영혜를 실은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이길을 달려가고 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폭력과 억압의 공동체를 탈주시키고자 했다. 가부장적 폭력으로 무너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자연과 화합하게 하는 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한강의 은유가 가득한 이 산문은 여성의 삶에 대해 뚜렷하게 느껴지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2025-06-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