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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결제
- 우리는 꿈꾸는 것 같은 연말연시를 보냈다. 그야말로 초현실적 현실을 지나고 있다. 불의의 비상계엄과 비상착륙이라는 악몽을 실제 상황으로 겪고 있다. 충격과 분노와 슬픔과 고통이 뒤엉킨 시간이다. 무슨 글을 쓴다는 게 참 힘들고, 일손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형국이다. 탄핵 정국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이어지는 작금의 현실은 아픈 역사와 억울한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 와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있었다. 작가는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에서 평생의 화두와 같은 다음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진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제주 4.3항쟁과 80년 5월 광주의 죽음을 마주한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어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그 아픈 과거를 현재가 치유할 수 있을까? 수학여행 갔던 배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 축제를 즐기려고 나섰던 이태원 거리, 다정한 가족 친지들과 남쪽나라 여행을 다녀오던 무안 공항에서 잃어버린 우리들의 학생, 젊은이, 식구들의 영혼을 마주한다. 형식만 달라졌을 뿐 역사는 반복된다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부터 우리의 민중들이 그랬듯 그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동행하고, 광장에서 거리에서 외치고 또 외치고 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오월 광주 YWCA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 박용준의 글이다. 그 문장들을 읽는 순간, 한강 작가는 이전의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벼락처럼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과거에 빚지고 있다. 죽은 자의 선결제를 받았다. 죽은 자들의 선결제를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고,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 산 자의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 이번 탄핵 시위에서 보여줬던 선결제 문화는 이미 성경에 나왔던 일이었다. 나의 벗님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장 박흥순 선생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25-37)에서 선결제 이야기를 해주어 공감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준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돌보아줄 것을 부탁한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선뜻 말한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인은 선결제로 자비를 베푼다. 근현대사를 거치며 앞서간 의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선결제가 되어 민주주의 자양분과 한겹 한겹 쌓인 성숙한 시민의식을 이끌어내는 깊은 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마음은 우리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하나님의 마음이다. 함께 강도 만난 것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움이 어디서 올꼬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곁에 늘 머물며 곁을 내주는 선한 이웃들의 실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결제이다. 광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집회를 주도하는 2030 젊은이들, 특히 여성 청년들의 압도적인 존재와 활약이다. 알록달록 각양각색 빛깔과 목소리를 그대로 담는 '응원봉'과 '선결제'라는 놀라운 문화를 대하게 된다. 아이돌 콘서트나 팬미팅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굿즈나 음식을 나누어주는 팬덤 문화가 탄핵 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작지만 심오한 선결제 행위를 통해 친절과 선의의 연대를 베푸는 오늘의 선린들을 본다. 나 또한 그런 선한 이웃이 되기를 소망한다. 정치적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팽배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이 선결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영하의 추위 속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베푼 따뜻한 커피, 어묵 꼬치는 단지 따스히 몸 녹이고 시장기를 채우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대는 혼자가 아니며,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그대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였다. 저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보내준 벗님들의 어묵트럭은 엄동설한을 녹이고도 남는 사랑 그 자체였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민주 시민 사이의 근본적인 연결, 사람과 사람 간의 선의의 연대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언어를 뛰어넘는 서사였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을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견딜 수 없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릅 눈뜨고 직시해야 한다. 젊은 층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편견은 무색해졌다. 맑고도 진정한 외침과 몸짓, 심각한 이슈를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풀어내는 다른 세대의 에너지와 지혜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비폭력 평화는 빛이 가진 힘을 지녔다. 악다구니 거짓 선동만 무성한 폭력의 낡은 시대가 저무는 걸 목도한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야광봉을 흔드는 우리 딸 같은 청년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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