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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모스 영성6] 시험의 땅, 광야
    광야에서 예수에게 다가온 3번째 유혹은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 즉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땅의 통치권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역할을 하려면 권력이 필요할 것이고 이것이 현재는 나에게 속해 있으니 내게 절을 하면 너에게 넘기겠다는 말이다. 왕국의 통치권은 왕에게 있고 공화국의 통치권이 국민에게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보낸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기름이 부어지고 보냄을 받은 권력 수임자가 바로 메시아이다. 따라서 메시아라는 개념에는 이미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가 당신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겠다. 여기에 따라오는 영광스러움도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사탄의 말을 해석하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은 현재 사탄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를 넘겨받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거짓이며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이를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고대의 정치체제를 예로 들자면, 사탄을 천자국의 황제로 삼고 그 밑에서 제후국이나 부마국의 왕 자격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테면 로마 황제와 분봉왕 헤롯의 관계에 해당 될 것이다.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굴종과 타협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때때로 합리화 될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정치가들에게도 끊임없이 요구되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6:13).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마무리 한다. “나라(kingdom)와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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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1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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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에레모스 영성 5] 시험의 땅, 광야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난 뒤 곧 바로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예수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구별된 의식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메시아 자의식이 재확인이 되는 일은 광야에서이다. 이 과정에서 사탄은 이렇게 시험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다치지 않도록 할 것 아니냐. 이것보다 더 좋은 메시아에 대한 증명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는 그럴듯한 속삼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아의 사적 단계에서 다음 공적 단계로 객관화되는 아주 좋은 계기일터이니까.   그러나 예수는 즉시 이것이 영적 유혹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짓은 하늘 아버지를 인간의 얄팍한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에 그럴듯한 형상으로 보여져야 하는 분이 아니고 그럴듯한 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지고 들려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상이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보여지고 그때마다 들려진다. 우상 숭배는 그 옛날 이집트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로마 땅이나 페르시아 땅에 거대한 신상으로만 세워져 있지 않는다.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도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참 신은 우리 눈에 아니 보이고 우리 눈에 아니 들려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시다.   수많은 대중들 보이는 그 한가운데 뛰어내리면서 메시아의 존재를 확인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이냐. 이 양자택일의 요구는 예수에게도 쉽게 풀 수 없는 유혹이고 시험이었다. 뛰어내려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중명해 보라는 은근한 귀뜀은 예수님 공생애 3년의 기간 뿐 아니라 끝내 십자가에 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그 요구를 거절하시고 못 박혀 죽음으로 맡겨진 메시아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있었기에 대속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라는 파라독스를 통하여 비로소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었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오피니언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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