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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2) 그의 뺨은 또 입술은? 손은? 배는?
- 5:13 그의 뺨은 향나무밭 같으며 향기로운 꽃 같고, 그의 입술은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도다. 이는 신랑 예수님의 뺨이 향으로 풍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의 향기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다(고후2:14~16).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이나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온몸으로 이루신 일의 결과는 주님의 얼굴(뺨)에 나타난다.따라서 ‘그의 뺨이 향나무밭 같고 향기로운 꽃 같다’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살리시는 분이요, 열매 맺는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시한다. 그 생명은 나를 살리고 영생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셨다. 또 이 주님의 뺨으로 인하여 신부성도의 뺨이 석류 한쪽이 된 것이다(아 4:3). 또 ‘그의 입술은 향기로운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다.’고 하였다. 주님의 입술은 입을 맞추어 하나 되게 하시는 입술이다. 아1:2에 주님의 입술에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입에서는 말씀이 나온다. 또 몰약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 예수님이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해주신 복음이 곧 예수님의 입술이 몰약이 떨어지는 향기로운 백합화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가지고 사는 신부성도의 입술이 주홍색 실 같다고 하였다(아4:3). 주홍색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맥을 같이 한다. 주님의 피로 영원히 죄사함 받은 은혜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입술이 주홍색 실 같은 신부성도의 입술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입술에 두 번째 입맞춤이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같이(골1:24), 미리 우리에게 보여준 하늘나라 영광을 소망하면서 주님과 같은 피 흘림의 고난을 본받아 기쁘게 뒤따르게 하는 것, 즉 영광의 복음이 주님의 입술에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향기로운 백합화 같은 것이다. 주님의 남은 고난 중에 순교까지 하게 해주시는 그 길을 따라가게 되므로 최고의 첫째부활의 영광까지 주시는 분이 곧 주님의 입술에 몰약이 떨어지는 백합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의 동지들은 서로 문안할 때 사랑의 입맞춤을 한다. 만일 예수님의 입과 내 입이 하나가 됐고 자기 자신이 순교의 제물로 준비가 됐다면 그 하나 된 믿음의 동지들과 뜨겁게 거룩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지 않으랴? 5:14 그의 손은 녹보석이 박힌 금 고리들 같으며, 그의 배는 사파이어들로 입힌 빛나는 상아 같도다. 주님의 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신 손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주님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재림하실 주님이 금촛대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일곱별을 붙잡고 금촛대교회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님의 손은 일곱 금촛대교회의 일곱별을 붙잡고 계신 그 손이다. 즉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환란날에 이기는 자로 세우시는 계시이다. 일곱 금촛대교회의 사자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끌어서 감추인 만나와 새이름이 새겨진 흰 돌까지 주시는 역사를 통해서 금촛대교회의 이기는 자로 세워서 결국은 금면류관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손이 금 고리들 같은 것이다. 또 금고리에 녹보석이 박힌 것은, 첫째부활의 영광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지면 그 영광이 아버지 집에서 영원토록 계속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계시한 것이다. 계4:3에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가 녹보석 같다고 하신 것이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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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2) 그의 뺨은 또 입술은? 손은?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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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 김미선 일전에 주님을 모르는 한 지체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한 적이 있다. 참 좋은 성품과 착한 심성을 가진 그분은 비록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진 못했지만, 나는 때때로 그분의 언행과 선행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의 실재를 느끼곤 한다. 그래서 그분을 만날 때마다 그분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꼭 만날 수 있도록 내 삶의 간증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예수님의 사랑과 역사하심을 전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마음 깊이 ‘진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의 동함이 생겨 용기 있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보혈의 공로로 죄인이었던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게 되었어요.” 이렇게 복음을 접한 대다수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어 본 역사적 사건으로 예수님과 십자가를 떠올리며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다. 비단 믿지 않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역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잘 알고만’ 있는 듯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고,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만’ 한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느끼는 것인데, 생각에 갇혀있는 사랑을 표현하려다 보니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어느 순간 이성적으로 너무나 당연해지곤 한다. 이 모습은 철저히 회개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분의 반응 역시 그러했다. 내 일 같지 않아 믿어질 리 없고,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무미건조한 반응에 나는 다급히 다른 표현을 적용해 보았다. “만약에 선생님이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 사회적으로 매장되기까지 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볼께요. 모두가 선생님께 등을 돌리고 돌을 던지는 상황에서, 내가 유일하게 선생님을 대변해 주고, 대신 돌 맞아주고, 심지어 선생님이 지은 죄를 내가 뒤집어쓰고 대신 형을 살고, 피 흘려 죽기까지 한다고 생각해 봐요. 그런 나에게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분은 “그럼 안돼지! 쌤이 왜 나 때문에 그래?” “쌤을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그럴 수 있어요... 그럼... 그런 나에게 어떤 마음이 드나요?” “너무 눈물 난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도, 하지도 못할 존재인 걸 안다. 그럼에도 그 순간, 너무나 먼 이야기 같던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실체가 있는 소중한 사람의 희생으로 빗대어 설명하니 그분의 반응은 사뭇 달라졌다. 그날의 대화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울컥한 마음이 인다. 전하는 나와 전해 받은 그분, 먼저 믿은 나와 아직 믿지 못한 그분,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그 뜨거운 희생적 사랑이 실재화(實在化)되어 눈물로 고였기 때문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 그 죄인을 살리신 우리 주님의 보혈의 공로.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빚진 자’로서의 정체성을 잊을 때마다 나는 처절하리만큼 주님을 깊이 묵상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거듭난 자에겐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시고, '이미' 전해주신 사랑이 가득하다. 그 사랑을 증거해야 함을 앎에도 여전히 나 중심의 자기애(愛)에 빠져 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난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랑을 머리가 아닌 마음 깊이 고백하며, 나는 오늘도 ‘사랑 받는 자,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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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