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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대신측 60주년 기념대회 등 준비

‘자생적 총회’로 시작, 대형 교단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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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6.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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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교단60주년준비위원회는 기념예배, 김치선 전집발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신학교 중심으로 교단 창립해 주류교단에 합류했다는 독특성

교단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총회로의 비전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측(총회장=이상재목사)이 교단설립 60주년을 맞아 오는 21일 기념예배를 드리는 등 다양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대신교단은 ‘자생교단’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왔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이종전원장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분열이 없이 만들어진 교단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흐름에서 분열로 인한 교단형성은 주류교단들의 형태였다. 적어도 고신측, 기장측, 그리고 합동과 통합측의 분열의 과정에서는 나름의 분열의 명분을 갖고 있다”며, “하지만 대신측은 그러한 명분을 갖지 않고 자생적으로, 즉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져서 한국장로교회의 주류교단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단설립과 ‘성경장로회’ 시대

대신교단의 시작은 한국장로교회의 3차분열의 시기와 같다. 예장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과 함께 구 대한신학교가 기로에 섰을 때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단이 출범됨으로써 ‘대신의 60년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신교단이 출범하는 결정적인 동기는 대한신학교의 졸업생들의 진로문제와 함께 대한신학교에 대한 김치선목사의 경영권 유지, 그리고 ICCC측의 한국에서의 회원교단 확보라고 하는 간절함 때문에 만들어졌다.

 

매킨타이어와 김치선은 1960년 9월 6일 교단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했고, 이 합의에 따라서 ICCC측은 법인을 만드는 일과 재정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용산구 서계동 33-2(구 소련 영사관 터)의 건물을 매입했고, 1962년 3월에 대한신학교를 이전함으로 소위 서계동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때 학교법인 이사장은 ICCC의 한국지부장이었던 마두원이 맡았고, 김치선목사는 대한신학교의 교장과 성경장로회 총회의 총회장을 맡았다. 교단설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 후속조치가 진행되었는데 다음 주간인 9월 14일 발기인 모임을 갖고 노회를 구성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때 발기인으로는 김치선, 마두원, 황하운, 최순직, 김의창 목사 등이 참석했다.

 

교단설립취지에 대해 “대한예수교장로회는 현대 세계적 신학사조의 물결을 타고 50여 년의 전통을 깨고 사분오열로 분열되어 교계는 혼란 속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마두원 선교사와 김치선목사의 발기로서 시대의 요청과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근본주의를 토대로 하는 교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도하시던 중에 개최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종전원장은 “대신교단은 출발점에서 현대교회의 신학적 흐름이 세속화 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주의적 입장, 즉 철저한 성경신앙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있으며, 훗날 이러한 신학적인 입장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이 시기에는 교단의 설립과 함께 부흥운동에 집중한 시기라고 할 것이다”고 평했다.

 

 

성장측 시대, 그리고 대신측 시대

신생 대신교단은 곧 큰 아픔을 맞는다. ICCC의 선교부측과 김치선의 갈등에서 비롯된 사실상 분열이 발생했고, 결국 김치선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신학교에 속한 교회들의 신학교측과 마두원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 총회집행부와 대부분의 교회가 속한 교부측으로 양분됐다. 이원장은 “양측의 갈등의 원인은 김치선이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김치선의 공과 함께 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동안 이에 대해서 적극적인 해석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기간 동안에 사실상 오늘날 대신교단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확립했다. 여기서 김치선의 사위인 최순직목사가 대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과 신학의 정립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이원장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가 최순직목사가 대한신학교와 교단을 이끌었던 기간인데, 한국장로교회사에서 오늘의 대신교단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교단의 신학을 정립하는 시기였다. 그가 1975년 8월 김세창 목사에 의해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은 당초 말로는 2년이라는 유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더 이상 대한신학교와 교단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이후 대신교단은 크게 성장했다. 1981년 제16회 총회에 보고된 교회가 235개 처에 달했는데, 1972년 ‘대신측’ 선언 당시 실제로는 10개 미만의 교회였으므로 9년 만에 약 30배의 성장을 했다는 의미이다.

 

 

도전과 응전의 시대

1994년 성경장로회 총회와 통합을 이룬 후 대신교단은 다방면에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물론 세계선교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나타내면서 한국장로교단들 가운데 유력한 교단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대신교단은 교단의 도약과 사명을 다하기 위한 기반을 만드는 일들을 진행했다. 첫째로 총회회관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대학원대학교를 인가받아서 총회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전국교회가 뜻과 성을 다해서 기도와 모금을 했고, 그렇게 해서 안양시 석수동에 총회회관을 마련했다. 그리고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개교했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했고, 대학원대학교는 교단과는 상환 없는 학교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됐다.

 

둘째, 세계선교의 중심에 대신교단의 위치가 분명하게 되었다. 즉 대신세계선교회의 영향력이 전 세계를 커버할 만큼 커졌다는 의미이다. 교단 설립50주년이던 2011년 파송선교사수가 노회파송의 경우 258가정, 파송노회가 없는 경우 60가정이었다. 전체적으로 318가정의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단으로 성장을 했다. 이것은 교단의 교세에 비해서 선교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대신교단은 내외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2015년 일어난 교단의 분열사건은 대신교단의 가장 큰 아픔이다. 그러한 현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원장은 “2015년에 겪어야 했던 분열의 아픔은 결과적으로 교단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그것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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