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 선 행복칼럼-58
초대교회 사랑의 실천가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목사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한 사람이 새 소망을 갖도록 인도해 주는 삶은 고귀한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땅 1,200평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소 건립에 기꺼이 기증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사랑의 실천가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목사이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지도자였으며, 해방 후 김구 선생으로부터 혼란한 정치 현장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그는 목회자와 약자들을 위한 삶과 사역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강대국들이 식민 지배를 다투고 있었던 1880년 조선왕국의 패망이 짙어지던 말미에 최흥종(예수 믿기 전 본명, 영종)목사는 평민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살림은 피폐하였고 백성들은 기댈 곳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 중에 최흥종 목사의 모친은 5세에 부친은 19세에 별세했다. 마음의 평화가 없이 떠돌던 그는 23세까지 광주지역에서 ‘철주먹(무쇠주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건달패의 두목으로 장날에는 상인들에게 돈을 빼앗고 행패를 부리는 악행을 저지르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최흥종 목사는 양림동 언덕에서 선교센타 건축공사를 하던 책임자인 믿음의 사람, 김윤수 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걸어 온길, 기독교인이 된 이유와 신앙의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듣고 마음에 변화를 크게 받고 성탄절 예배에 참석하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렸다. 김윤수의 소개로 선교사 부인이었던 유진벨 여사를 만나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신앙 안내를 받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그는 바른 믿음을 고백하고 거듭나는 체험과 비전을 찾아 주님을 섬기고 매일 감격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는 1904년 무렵에 광주 양림동(애장터)선교센터에서 사역을 하였던 선교사 오웬C.C. Owen)이 급성폐렴에 걸리자 나주 나루터로 의료선교사 포사이드(W.H. Forsythe)를 만나 특별한 체험을 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선교사와 함께 나귀를 타고 가던 중에 길가에 한센병으로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 있던 한 여인을 만났다. 선교사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고가의 외투 옷을 벗어주었다. 나병환자의 실수로 지팡이를 당나귀 등에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선교사는 최흥종 목사에게 그것을 주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하지만 피고름으로 더러운 지팡이를 만지면 혹시나 자신에게 나병이 옮길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멍하게 있을 때, 포사이드 선교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올려주는 그 상황을 목격하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피부와 언어가 다른 외국인 선교사도 손으로 안아서 나귀에 태우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데, 동포이면서도 돌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회개하면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뜨거운 감동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을 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최흥종 목사는 평생 나환자들의 목자로 살았다. 선교사들처럼 예수의 참 제자로서 살겠다는 작정으로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예배의 삶, 그리고 유진벨 선교사의 권면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안수를 받아 광주지역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살면서 나병환자를 간호하고 치료하는 법을 4년 동안 익히면서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국권이 상실된 것에 가슴아파하였던 그는 1919년 삼일운동 거사가 광주에서 일어났을 때 주동이 되어 참가하였고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심문 중에 광주만세운동 책임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약 1년 4개월 구속되었다.
이처럼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와 낮은 자를 위한 봉사와 섬김으로 여수 애광원 설립과 소록도 한센병 환자 전용 거주지를 조성했다, 그리고 예수의 희생정신으로 국내 교회 개척과 목회, 소련 선교사로 가서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1925년 11월 4일에는 상경하여 조병옥, 김병로, 송진후, 김구를 만나 그의 높은 뜻과 믿음에 감동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는 일본 총독부에 나환자 집단 치료소와 수용시절 확장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관청의 협조가 미미하고 제안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32년에는 자신이 개척한 광주제일교회 담임목회자로서 약 15일 동안 걸어서 상경하여 나환자 50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시위하였고, 100여 명의 수용시설을 6천 명이 나병환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큰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결국 우가끼 총독을 대면하여 이 모든 제안을 승인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런데 불굴의 의지와 믿음으로 전진하던 최흥종 목사는 1935년 3월 17일 이후 부고장을 문서로 지인들과 목사들에게 사망 통고서를 발송하였다. 해방 후에는 공직을 모두 내려놓고 86세가 되던 해 무등산 토방집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금식기도 95일 만에 1966년 5월 14일에 소천 하였다.
광주시민들과 도지사와 시도인사들 그리고 걸인들, 음성 나환자들 수 백 명이 매일 울었다. 최흥종 목사의 예수 사랑 실천과 업적을 기리면서 광주의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면서 애도하기를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홀로 먼저 가십니까!” 통곡하면서 장례 행렬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선한 목자의 삶과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최흥종 목사의 일생은 현재의 한국교회 목회자, 성도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는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았다. 우리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되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복종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사회적 소외자들과 함께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을 비우고 영생의 상급을 기대하면서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자.
최 선(Ph.D., Th.D.)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