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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 선 행복칼럼-60

한국전쟁 최초 승전과 여교사의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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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7.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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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학창시절 동락전승비에 자주 소풍을 갔었다.

 

 

필자의 고향은 충북 충주시 신니면이다. 그곳의 지역적인 특징은 음성과 충주가 겹쳐 있는 가섭산(710M)과 용원저수지 아래로 전답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사과, 복숭아, , 다양한 과일나무, 고추재배 등을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또한 군수사/탄약지원사령부 칠성대 제7탄약창 3800부대(특수탄약 저장시설)이 있는 지역이다.

가섭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송암리에 한국전쟁 당시 최초 승전지라고 하는 동락전승비가 있다. 필자가 청소년 학창시절에는 그곳으로 소풍을 자주 다녀왔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의 역사가 담긴 고향에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은 가섭산 644고지에서 적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중화기로 무장하고 충주 동락초등학교에 집결하고 있었다. 당시 20세의 김재옥(1931. 3. 12-1963. 10. 19) 여교사는 충주사범학교 1회로 졸업하였고 1950620일 동락초등학교에 부임했다. 그리고 5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마을주민과 다수 학생들은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학교에 돌아오면 교사가 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김재옥 교사는 교정을 지키며 일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이 동락교정에 진지를 구축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무렵, 74일부터 10일까지 주변에서 교전이 있었다. 특히 동락전투는 당월 76.25 전쟁에서 최초로 아군이 300명의 병력으로 천 명 가까운 북한군을 대상으로 승리한 전투지로 전쟁역사에 남아 있다. 김재옥 여교사는 국군이 남쪽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 적군을 안심시키고 동락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동향을 자세히 제보했다. 이로 인해 국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동락전투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군 제6사단 7연대 2대대 화기중대에서 박격포로 북한군 주둔지인 동락초교까지 발사하여 적 800명을 사살하고 90여명을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병사는 81mm박격포를 직접 팔로 높낮이를 조정해 적의 탄약고를 명중시켰다. 북한군은 휴식을 취하거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 한국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총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패전했다.

 

승전한 국군이 노획한 무기들은 곡사포, 기관총, 권총 및 소총 2,000여정, 장갑차 10, 모터사이클 20, 지프 20, 2.5톤 차량 40 대 등 이였다. 이 전투에서 역사적으로 특별한 점은 동락전투에서 노획한 소련제 무기는 소련이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가 되어 UN16개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7연대 전 장병들을 대상으로 1계급씩 특진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동락전승비에 담겨 있는 박혜숙 글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임들이 흘린 피 덕분이라네. 임들이 흘린 땀 덕분이라네. 임들의 숭고한 뜻 기리노니, 흘러가는 남한강도 기쁨으로 출렁 일지어라.”라고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13년이 지난해에는 잊을 수 없는 엄청난 대 사건이 교사와 살인마라는 제목으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신문과 방송에서 대서특필한 이 사건은 전쟁이 끝나고 근대화의 산업으로 잘 살아 보자라는 염원을 안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는 국민들을 허탈하게 했으며 가족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사건의 기막힌 사연은 이렇다. 19631112일 오후 620분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범인 고재봉(27, 1109야포단 소속 상병)이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 5가에서 버스 정류장 앞에서 외사촌 동생을 만나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땅콩행상 김복수(20)씨의 신고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고재봉은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몸수색으로 칼 3자루가 나오자 즉시 자백했다. 그는 무려 6명을 한꺼번에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 살인마였다. 그는 201병기 대대장 박모 중령의 집에서 당번병으로 근무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 집에 있던 고기를 훔쳐 가져나오다 박중령의 가정부에 들키자 도끼로 협박했다 체포돼 6개월 동안 육군형무소에서 살인미수 혐의로 복역 만기출소 후 부대 복귀 했다. 그 후 탈영하였고 복수심으로 불타 박중령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고야 말았다.

 

강원도 인제군에 도착한 고재봉은 제3군단에서 박중령 집 주변에 숨어 새벽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동년 1019일 한밤에 박중령(사실은 현역 이득주 중령)이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침입해 훔친 도끼로 이중령을 참살하고 잠에서 깬 부인, 자녀3, 가정부 등 차례로 무려 6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을 자행했다. 고재봉은 박중령을 죽이려했지만 박중령은 인사이동으로 그 자일에 없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은 이중령이었다. 고재봉은 당시 신문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다시 박중령을 찾아서 살해하려고 여비 마련 차 서울에 왔다가 시민의 신고로 경찰에 의해 붙잡혔던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득주 중령과 그 아내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한국전쟁 중 한국군 최초로 승전하게 된 계기를 주었던 동락전투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김재옥 여교사는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에 모여 있다는 고급 정보를 가지고 가섭산 644고지에 있었던 아군에게 무려 산속 4KM를 달려 알렸고, 후퇴하던 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인민군을 공격해 전쟁 발발 최초로 대승을 거뒀다.

 

세월이 흐른 후에 그 2대대의 이득주 소대장과 김재옥여교사는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대령과 전혀 관계가 없이 영문도 모르고 이들은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과 동락전투의 특별한 이야기는 1966<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 국립묘지 동작동 현충현에 안장돼 있다. 이후 2011년 국가보훈처는 김재옥 교사를 호국영웅으로 선정했으며, 충북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 동락초등학교에는 김교사의 기념관과 전승비를 세워 국민들에게 안보의 소중함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최초 승전과 여교사의 슬픈 이야기는 국민들에게 말 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국제정세가 복잡했던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남침을 감행했다. 그러나 1949630일 미군이 철수한 후 군사력이 매우 약했던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되었고 정부수립 2년 만에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하였다.

 

한반도에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자유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와 정치, 모든 분야에서 정상적으로 발전하여 자유 평화를 후대에 물려주고 장차 세계를 주름잡고 이끌어 가는 지구촌 리더의 국가로 부상하는 그 날을 기대하며 국민 모두가 힘을 합하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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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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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우

오랜만에 동락에 전승비를 보네.
중학교때 생각이 잠깐 스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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