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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9.1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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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1885년 당시, 문명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개화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어렵고도 힘든 신문 발행을 결심한다.

 

언더우드는 신문이 조선의 인민을 개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즉 기독교인들이 이 신문을 열독하여 각지역의 의견선도자가 됨으로써 신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함께 전달하게 되면 조선의 인민과 사회가 개화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호 사설은 “누가 와서 우리에게 묻기를 조선이 이 때를 당하여 그중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들이 첫째로 말할 것은 지식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창간호 사설의 제목에서 그 정도로 그는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열망하였다.

 

그래서 신문 발행을 위해 관련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언문(諺文, 한글)과 양반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두 배웠고, 또 그들의 일상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문에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의 전파뿐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민을 깨우는 수고를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신문 발행뿐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지방에까지 여러 주간 여러 달을 고생하는 전도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 번역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수고를 집중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 역시 수도 없이 시도하였다.

 

그런 와중에 풍토병이 들었다. 〈그리스도신문〉 1897.8.6.일자에서 “월전부터 원목사께서 열병이 들어 만만 위중한 상태였다 (중략) 목사의 아들 한경이도 병이 들었다. 더욱 황황(遑遑)한 것은 조선 사람도 열병을 두려워하는 병인데, 외국 사람은 수토(水土)가 다른 고로 열병이 들면 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걸렸다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풍토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또 같은 기사에서 “원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구주의 도를 펴라 하시는 명령을 받들고 (중략) 한 때도 한가한 틈이 없이 몸이 매우 곤할지라도 자기 몸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항상 열심을 내어 주를 위하는 일만 하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주의 일을 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역자들의 믿음과 기도와 수고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되었고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신자의 수가 많지 않은 미미한 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를 선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은 무뎌졌고, 오늘날 교회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개독교’로 목사는 ‘먹사’로 교회는 ‘사업장’으로 불리고 있다. 복음과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과 시스템을 우선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 과정에 돈이 ‘억’ 소리 나게 뿌려지고 있다고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믿음을 강조하고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목사는 오히려 홀대를 당할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담보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정신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진 순교자들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예수를 따르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갱신되며 다시금 사회를 선도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론학박사, 전 김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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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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