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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1.2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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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주

 

바디매오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알려진 병자이다.

육체적으로는 앞을 볼 수 없는 장애인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죄인 취급을 받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최하위 계층인 걸인이었다.

길바닥에 엎드린 채,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과 그렇게 부과된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생을 지탱하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어느 날, 그는 뜻밖의 당황스런 사건의 중심에 서있게 되었다.

예수가 오셨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평소 눈에 띄지도 않던 그가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거리를 시끄럽게 하는 낯선 풍경에 사람들은 바로 그를 저지했다. 그럴수록 그의 절규는 더욱 격앙되었고 인파 속 예수에게까지 도달되었다. 예수는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고쳐주었다. 그의 절규는 구원의 통로가, 그의 이름은 치유의 대명사가 되었다.

 

바디매오의 외침은 구원에 대한 간절한 태도의 귀감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감화를 준다. 동시에,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구조의 한계 속에서 외침은 약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구조요청이자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도 눈 뜨게 도와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대꾸하지 마라’ ‘밥 먹을 때는 말하지 마라’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게 마라’ ‘선생님 말씀에 토를 달지 마라’ ‘좋은 게 좋은 거다등 다양한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했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약자들이다. 아이들, 여성들, 학생들, 노동자들, 장애인들 등등.

 

세상은 기득권의 안정과 질서유지의 명목으로 변혁을 위한 시끄러운 외침보다는 침묵과 순응을 약자의 덕목으로 가르쳐왔다. 하지만 예수는 침묵과 순응의 굴레에서 벗어나 세상의 불의와 불합리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자이셨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의 종교적인 위선에 목소리를 높이셨다. 백성을 돌보지 않는 지배계층에 대한 노골적인 악감정을 비추셨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삶은 고요한 침묵의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힘의 균형이 무너진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강력한 외침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약자들의 절규에 반응하시는 분이었다. 바디매오의 절규가 사람들의 억압에 다시 침묵이 되지 않도록 그를사람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에게귀를 기울이시고 그가다시 보게 되어 주를 좇게 하였다. 그의 절규는 침묵을 강요하던 세상에는 놀라움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세상은 여전히 절규하는 약자들의 외침이 있다. 미투운동, 페미니즘운동을 이끌어 온 여성들, 차별금지법을 외치는 소수자들, 난민들, 해외노동이주자들, 심지어 병들어가는 지구와 생태계 등 곳곳에서 변화와 변혁을 호소하는 절규가 있다. 이들을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를 퇴보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들의 외침이 이 땅의 굳건해진 불평등과 차별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통로가 될 줄 누가 알겠는가?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공의와 평화의 대명사가 될 줄 누가 알겠는가?

 

 

 / 목사,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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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바디매오의 절규에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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