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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6)-황순원의

임영천의 한국 기독교소설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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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5.0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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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을화>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움직이는 성>에서의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세계가 상호 크게 대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기독교와 샤머니즘에 대한 김동리와 황순원의 평소의 종교관 내지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일로 볼 수 있다.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의 샤머니즘 세계는 기독교 세계에 비해서 훨씬 열세에 빠져 있는 세계이다. <을화>의 샤머니즘이 그 스스로 독립적인 데가 있는 것에 비하면 <움직이는 성>의 샤머니즘은 크게 자립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런 샤머니즘이다. 윤성호에게 훼방당한 명숙이의 샤머니즘이 그러했고, 송민구에게 기대기만 했던 박수 변씨의 샤머니즘이 또한 그러했다. 준태에게 기댔던 돌이엄마의 샤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 의하면 <움직이는 성>에서의 샤머니즘은 분명히 ‘흔들리는 터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세계 이상의 것이 아니다. 특히 변씨나 그의 이종 사촌(갓 제대한 청년)이 송민구와 함께 벌이는 무교적 분위기의, 3각의 동성애 행각은 매우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무교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대체로 부도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작가 황순원은 무교의 세계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임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러한 무교 세계는 처음엔 순진하던 민구마저 감염(?)시켜 부도덕한 행위에 휘말리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무당인 돌이엄마가, 비교적 냉정한 타입의 비판적 지성인인 준태로 하여금 동거의 관계를 맺게 한 것도 같은 이치라 하겠는데, 몰인정한 그 무당이 죽음을 앞둔 준태를 버려두고 떠나버린 그 한 가지 일로써도 이 무교 세계의 무근성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 때문에 <움직이는 성>에서의 샤머니즘 세계는 아무래도 ‘무교’라기보다는 ‘무속’의 세계에 오히려 더 가까운 그런 세계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반면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에 보이는 기독교는 샤머니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상당히 우월한 종교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김동리의 <을화>의 경우에 있어서 그렇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황순원의 경우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을화>의 보수적인 기독교에 비하여 <움직이는 성>의 다소 진보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실천지향의 종교에 대해서 신뢰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런 면보다도 <움직이는 성>이 보여주는 강점은 등장인물, 특히 윤성호가 드러내는 종교적인 면의 심적 갈등, 곧 성격 면에서의 근대적 면모라고 하겠다. 그는 불륜 관계로 인한 죄를 저지른 경험도 있었고, 그 일로 인해 고민에 빠져 보기도 했으며, 후엔 자진해 속죄의 고행 길을 걸어가기도 한 것이다. 그가 이처럼 내면의 연소 과정을 거쳐 성숙한 인격을 이룰 수 있었음은 다행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 결과 성호는 성공(?)을 보장받는 도시목회의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길을 박차고 빈민선교의 길을 자청해 나간 것이며, 또한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겉치레밖에 되지 못할 그 목사직까지도 흔쾌히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민구의 출세 지향적인 실리 추구의 삶이나 준태의 회의주의적인 삶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은 아량과 신앙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성호의 신앙이 샤머니즘적인 것들을 모두 용해시켜 자신 안에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틸리히 식의 ‘궁극적 관심’을 지녔기 때문이며, 또한 일시적 실리 추구의 삶에 대하여 거리를 둘 줄 알았던 때문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기독교 신앙은 개인구원은 물론 사회구원의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발전, 성숙될 수 있었다고 보겠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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