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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5.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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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뫼 김말봉이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한 해가 1923년이고 졸업한 때는 1927년이었다. 그 가운데(중간) 해인 1925년에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공모에 <시집살이>란 소설 작품으로 응모해 ‘입상’을 한 바 있다. ‘당선’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앞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자신감)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졸업하고 나서 귀국한 뒤, 1929년 중외일보 신춘문예 현상 공모에 <고행>이 당선되었고, 이어서 1932년에는 <망명녀>가 조선중앙일보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끝뫼가 문학에의 열정을 어떤 하나의 목표(문단 데뷔)를 향해 치열하게 불태우던 시기, 곧 1920년대 중반으로부터 30년대 초반까지의 7년여의 시기라고 하면, 문학사적으로 대단한 의의를 지닌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특히 이 기간에 국내의 신경향파 문학 내지는 카프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학운동이 국제적 추세에 발맞춰, 즉 러시아에서의 라프 문학이나 일본에서의 나프 문학 운동처럼, 한반도 내에서도 맹위를 떨치던 실정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다녔던 일본의 도시샤대학이 자리한 도시 교토(京都)가 유독 사상범들이 들끓는 곳이었다는 점 역시 참고가 될 만한데, 그녀가 받았을 정신적 영향 같은 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도시샤대학의 그의 후배 문인들, 곧 정지용이나 윤동주 같은 시인들과 함께, 그(끝뫼)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본다고 한다면 이들 세 문인들이 모두 기독교도였다는 사실과, 또 하나, 그들 모두가 당대의 현실 문제나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결코 눈감지 않은 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정지용은 가톨릭교도, 김말봉과 윤동주는 개신교도, 이렇게 3인은 모두 넓은 의미의 기독교도였는데, 정지용은 해방기의 문맹(文盟)과 그들의 문학에 대하여 포용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현실 문제에 어두워지지 않으려 노력했고, 윤동주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자신의 시를 통하여 드러냄으로써 그 자신의 역사의식을 확고히 세웠으며, 김말봉 역시 일면으로는 윤락녀의 구제와 공창 폐지운동에 앞장섬으로써 여권 신장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세운 동시에, 타면으론 동반작가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상에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말봉과 정지용은 1년 선후배 관계로 도시샤대학 캠퍼스에서 같이 공부한 인연으로 제법 우의가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만은 그들과 연령 차이가 커서 훨씬 뒤에 그 대학에서 수학했으니 함께 만나지는 못했다.) 1926년 여름방학 때 김말봉이 정지용과 함께 ‘조선지광’이란 월간잡지사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이 잡지는 당시 카프 문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였으며, 경성제국대학에 재학 중인 유진오·이효석 등의 작가들이 이른바 동반자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던 월간지였다. 김말봉이 정지용과 함께 이 잡지사엘 더러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시사(示唆)하는바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1931년 초부터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었으니, 끝뫼 역시 그 소설(‘삼대’)의 주요인물 김병화(또는 홍경애)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 사상가들의 활동상에 일말의 동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반 사정이 그 1년 뒤인 1932년 초의 그녀의 조선중앙일보 데뷔작 (‘망명녀’)에는 혼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겠다. 이로써 보건대, <망명녀>에게서 보게 되는 김말봉 소설의 언필칭 동반자적 성격도 어느 면 그 근원을 짐작케 해 주는바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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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2)-김말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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