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배안호선교사의 선교사를 위한 서평(1)

「글 쓰는 그리스도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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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5.1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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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글쓰는 그리스도인>(성서유니온선교회, 2009)


글쓰는 그리스도인.PNG

 

 

들어가기(서론)

“그리스도인에게 작가(author)가 된다는 것은 창조주(Author)께서 행하신 일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이다. 그렇다면 모든 예수쟁이는 창조주께서 행하신 일을 글쓰기를 통해서 이어가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그것이 예수를 살아내는 방법이다. 교회는 예수를 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기록한다.”(책 뒤 표지)

 

더구나 신구약 성경은 대부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삶의 현장에서 기록되었다. 신약성경 27권의 거의 절반은 모두 선교현장에서 쓴 서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모든 선교사는 이미 글쓰기의 DNA를 갖고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선교보고, 선교서신을 쓰는 것도 너무 버거워서 할수만 있으면 글쓰기를 피할려고 온갖 핑개거리를 찾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이 책의 저자는 C.S. 루이스의 안목과 필립 얀시의 가슴을 지닌 기독교작가이다. 김기현 목사(부산 수정로침례교회)는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의 제자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침례교신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였다(Ph.D). <공격적 책읽기와 공감적 책읽기(SFC)>, <가룟 유다 딜레마(IVP)>, <예배, 인생최고의 가치(JOY)> 등의 저자이다. 이 책은 목차만 읽어도 이 책이 얼마나 매력적인 책인지 가늠할 수 있다. 2부 10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1부 왜 글을 쓰는가? 

1장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자서전과 기도문. 2장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일기. 3장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서평. 4장 글쓰기는 관계를 소통한다: 편지. 5장 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 컬럼

제2부 어떻게 글을 쓰는가?

6장 독서: 읽고 또 읽으라. 7장 메모: 머리가 아니라 손을 믿으라. 8장 개요: 물 흐르듯이 구상하고 촘촘히 구성하라. 9장 문장: 그냥 당장 쓰라. 10장 퇴고: 사랑하니까

 

이제사 고백하건데 서평자(필자)는 10년전에 김기현 목사(저자)의 글쓰는 그리스도인을  읽은후에 서평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등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서평을 하고자한다. 

 

왜 무엇을 쓰는가? 어떻게 쓸것인가? (저자의 프롤로그)

 

“유진 피터슨은 신자의 공동체를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라 지칭했다. 이 공동체의 독서법은 아예 성서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먹으라”.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성서를 먹는다는 말은 성서를 암송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공동체를 창조하고, 성서를 먹는 공동체는 성서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실한 제자를  양육한다.” (p. 13, 필자 강조) --> '너는 받은 것을 먹으라'(겔3:1). 성경말씀은 먹어야 한다.

 

“성서와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서를 먹는 거룩한 교회와 제자되기 위함이라면, 글을 쓰고 책을 짓는 목적은 무엇인가? 왜 글으 쓰는가? 피터슨이 사도 요한으로 독서 방법과 목적을 알려주었듯이 나도 요한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글 쓰는 목적을 찾는다 ...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의 생명을 얻고 누리게 하는 것이듯, 무릇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도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증언하고 표현하며, 그 글을 읽는 이들도 생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p. 14, 필자 강조) 

 

“글은 결국 그 사람이다. 무릇 모든 책은 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책과 글은 쓰는 이의 인격이요 얼굴이다. 과장하여 쓸 것도, 부끄럽다고 감출 것도 없다 ... 글쓰기는 내 속의 나, 이런 저런 가면 속에 감추어진 맨얼굴 그대로의 나를 찾는 도구다.” (p. 15, 필자 강조)

 

“왜, 무엇을 쓸 것인가? 이 말은 곧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글로 쓰면 된다. 사도요한은 우리더러 목격자라 했다. 내가 만난 하나님과 내가 겪었던 사건을 본 대로 진솔하게 진술하면 그만이다. 목격자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순교의 각오와 결단으로 증언하는 증인이다.” (p. 16, 필자 강조) --> 예수쟁이의 글쓰기도 순교의 각오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글쓰기는 어떻게 쓸것인가? 

 

글쓰기 인생의 3가지 기쁨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그가 누구를 독자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작가는 책과 담 쌓고 사는 이들까지 책에 끌리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영화나 책과 무관하던 아저씨와 아줌마들도 보고 읽을 때 그 영화는 대박이 되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나 역시 독자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p. 17, 필자 강조) -->  실제로 김기현 목사의 글쓰기는 다방면이다. 참 부럽다.  

--> 선교현장의 선교사가 정기적으로 쓰는 선교서신과 선교보고의 대상은 파송/후원교회이다. 선교현장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과 경험하였던 선교현장의 사건을 진솔하게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쉽게 쓰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쓰려고 애쓴다.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 쉽다는 것이 가볍다는 것도 아니고, 비논리와 동의어도 아니다. 쉬우면서도 얼마든지 논리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명령한다. “너는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게 하여라”(합2:2). 큼직하게 적으라는 말이다. 동시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쓰라는 의미도 내표한다. 논리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쓰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p. 19, 필자 강조)

--> 사실상 글쓰기의 요체는 쉽게,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에 맞게 써야한다. 초보자는 이런 글쓰기의 기본을 공부해야 한다. 대개 목회자, 선교사들은 매주 설교문을 작성하면서도 이런 글쓰기의 기본을 무시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해오던 습관을 따라서 너무 쉽게 쓰는 것 같다.

 

“안정효에 따르면, 글쓰기 인생에는 세 가지 기쁨이 있다. 그 첫째는 자유다. 정시 출근하는 직장인과 달리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많은 부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음, 정년퇴직이 없다. 상상력이 고갈되지 않는다면, 손가락을 움직일 힘만 있다면, '전직'(前職) 작가라는 소리 듣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언제가까지나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마지막이 존경이다. 단서는 있다. 존경받을 만한 작품을 남겨야 한다... 그리스도인 작가의 기쁨은 말과 글로 세상의 생명을 만들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데 있다” (p. 20, 필자 강조) --> 예수쟁이의 글쓰기는 따라서 구원의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작가(author)가 된다는 것은 창조주(Author)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말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이 되시고, 기록된 언어와 그 집을 자기 존재로 삼으셨다. 그것이 성서이다. 하나님은 성서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말과 글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은 말과 글인 성서가 되셨고, 성서다. 하나님은 말이고, 글이다. 작가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다. (pp. 20, 21, 필자 강조) --> 예수쟁이 작가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자이다. 얼마나 가슴뛰는 일인가?

 

“왜 글을 쓰는가? 아니 왜 글을 써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리 하고 계시니까. 그리하라 하시니까. 내 안에 주체하지 못할 생명과 기쁨이 있으니까. 그리고 글 쓰는 것이 내게 생명이고 기쁨이니까. 내 글을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내가 누렸던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니까.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p. 21)

--> 필자도 매주 1편의 서평을 쓰는 기쁨이 충만하다. 서평하는 책의 저자의 깊은 속 마음과 뜻을 알아차리며 대화하는 착각을 갖기도 한다. 잔잔한 기쁨이 넘친다. 매주 쓰는 내 서평을 꼼꼼히 읽는 상당수의 전세계의 선교현장의 선교사들도 내가 누렸던 그 무엇을 경험한다는 문자들이 큰 기쁨이다.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참 영성은 '영을 몸으로 살아 내는 것'

 

“영과 몸이 온전히 통합된 삶이 영성이다. 영성 깊은 삶은 육체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며, 육체를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 육체 없는 영혼의 신비를 추구하지도, 영혼 없는 육체의 방탕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혼과 몸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양자 없이는 누구도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영이 있는 몸, 몸이 있는 영이 참 인간이듯, 영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을 육체로 풀어내는 것이 참 영성이다.” (p. 25, 필자 강조)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 시대의 영적인 질병이 바로 피상성이라고 진단했다.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피상성은 “시끄러움과 조금함과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한다.” (p. 28, 필자 강조)

--> 오늘날 개신교는 너무나 경박하다. 시끄러움/조급함/혼잡함! 이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대부분의 복음송 찬양들은 '입술의 열매'에만 머무는 것같다. 무엇보다도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깊이 없는 설교들이 난무한다. 깊은 영성에서 길어 올린 생명력 넘치는 신선한 설교가 그립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사셨고, 그것이 육화의 본질이듯, 영이 몸이 되어 사는 것이 영성의 본령이라면 글쓰기는 영성의 문자적 표현이요, 영성 훈련의 방편이 된다는 뜻이다. 글이 된 삶, 즉 내 삶이 글이 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자서전과 기도문이다. 무릇 모든 글쓰기가  나름 영성적 차원을 지니고 있지만 유독 자서전과 기도문은 영성의 요체가 된다.” (p. 29, 필자 강조).

--> 삶이 곧 글이다. 글쓰기는 영성의 문자적 표현이라는 말에 100% 공감한다.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자의 설교와 기도는 기름부음이 넘칠 것이다. 주여! 안팍이 갖은 삶 살게하소서!  

 

“글쓰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면 자기가 가장 잘 알거나, 관심이있거나, 배경 지식이 풍부한 분야에서 글쓰기를 훈련하는 것이 좋다. 자기 이야기만큼 편안하고 만만한 주제는 없다.” (p. 30, 필자 강조)

 

“그러므로, “전기는 최상의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최상의 신학이고, 기록하는 글쓰기는는 최상의 영성 훈련이 될 수 있다.” (p. 31) --> 그래서 필자는 전기, 자서전을 즐겨 읽는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변화를 발견하게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나누어 주게 된다. 기도문과 자서전 쓰기로 앝음에서 깊이로, 속도에서 느림으로, 조급함에서 인내로 성숙하는 영성에 다다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글쓰기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p. 38-39, 필자 강조)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영성)일기로 내면 정돈! 

 

“사람은 생각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생각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여 사울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게 되었다. 묵상으로 내면을 채우고, 시를 써서 내면을 정화하였다. 그것이 사울과 비교되는 다윗의 승리의 원동력이다.” (p. 45, 필자 강조)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통로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성찰하는 도구이자 치유하는 수단이다. “단 한 문장이라도, 서툰 글솜씨로도, 아무렇게나 꺼적인 낙서로도 치유의 효과가 나타”난다. 글쓰기를 통해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면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온갖 상처들로 갈가리 찟겨진 내면과 마주치게 된다.” (p. 46, 필자 강조)

--> 그래서, 영성일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최고의 수단이요 첩경이라고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는 계속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직한 글쓰기는 자기성찰의 도구로서 내면을 치유한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긋지긋한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게하는 능력을 주었고, 역으로 글쓰기를 통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칼 융은 “환자들에게 그들이 겪은 경험들을 글로 쓰게 했다.” 우울증, 청소년기의 방황, 가족과 부부의 정신 치료 등에도 많은 효과가 있다. 이것을 루시쇼는 강력한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글이 나를 바꾼다.” (p. 48, 필자 강조)

 

“맥도날드가 일기를 쓰는 방법은 참고로 할 만하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지만 못 쓰는 경우는 개의치 않고 넘어간다. 일기 쓰기란 노동이기는  하지만 의무는 아니다. 약속이다. 그가 일기에 쓰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전날에 한 일들과 만나 사람들, 배운 것들, 느낀 감정들,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감명 등이다. (중략) 내가 기록하고 싶다고 느낄때에는 기도도 포함하고, 성경과 다른 영적인 책들을 읽다가 얻은 통찰, 내가 한 행동에 대한 걱정 등도 포함시킨다.” (p. 51, 필자 강조)

--> 글쓰기는 작정하고 실제로 시간을 내서 쓰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2016년 L.A 세계선교대회 참석하면서 유기성 목사님의 영성일기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부터 크게 도전받아서 곧바로 일기쓰기를 시도하였으나 여러번 실패하였다.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한다'. 

 

“신앙은 지성을 배제하기는커녕 지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그래서 스텐리 존스는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는 구절에서 길은 의지로, 진리는 지성, 생명은 감정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진, 선, 미이고, 윤리, 철학, 종교이다.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성서 신학적으로 타당한가는 차치하더라도 분명 그리스도의 진리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점은 확실하다.” (p. 57, 필자 강조) 

 

“다른 어떤 신앙과 견주어도 기독교는 통전적이다. 동양적 명상은 생각을 비우라 하지만, 성서적 묵상은 바른 생각으로 채우라 한다. 지성을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지성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그러므로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pp. 57-58)

--> 저자, 김기현의 목사의 통찰에 전적으로 아멘한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헌신하며 섬기는 삶과 더불어서 합리적인 삶과의 균형이 필요하다. 합리적인 삶은 지성을 요구하기 때문일께다.  

 

“그러면 왜 이다지도 신앙생활에서 지성이 중요한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하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의 전당에는 주인이 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하면 누군가가, 무엇인가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생각에 물들게 된다. 세상 풍조에 흡수되고 세상 가치를 좇아 살게 된다.” (p. 59, 필자 강조)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곧 가난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큰 죄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난이라고 했다. 가난 중에도 제일 위험한 가난이 생각의 가난이라 했다. 스캇 펙은 더 강력한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원죄다. 스캇 펙은 인간의 원죄를 '게으름'으로 규정한다.” (p. 61, 필자 강조) 

-->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무슨 죄인가?' 필자도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이즘은 생각없이 사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삶의 분명한 목적이 없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유튜브나 인터넷상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으며 소일하는 자들은 사실상 가장 위험한 인생이다. 이런 자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다. 선교현장이다. 생각하지 않은 것이 제일 위험한 가난이요 원죄 그 자체임을 명심하여야 할것이다. 

 

“좋은 예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최종 기획자였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그의 범죄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그것을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은 나치가 선전했던 문구나 표현 외에는 다른 식으로 말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p. 61, 필자 강조)  --> 정말 생각지 않고 시세에 떠밀려 살게되면 오늘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유튜부에서 좌/우 편향된 정치이야기를 듣고 '생각없이' 얼마나 주위에 많은가? 

 

글쓰기는 생각하기다: 지성 계발, 논리적 사고형성(論理的 思考形成)을 돕는다.

 

“논리적인 글쓰기는 지성 계발과 글쓰기가 만나는 접점이다. 미국의 이공계 대학인 MIT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무척 강조하고, 구내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왜 글쓰기를 중시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이 놀랍다. 그런 걸 질문하는 것이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은 사회의 리더가 될 사람이고, 그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p. 62, 필자 강조) 

 

“글쓰기가 중요한 까닭은 단연 사고 형성에 있다. 정희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나는 그것이 글쓰기가 지난 뛰어난 사고 형성 기능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희려 글쓰기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지식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중략) 우리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 글쓰기가 논리적 사고, 창조적 사고를 키운다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pp. 62-63, 필자 강조)

 

서평을 쓰라. 서평쓰기의 유익: 서평쓰기의 실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글쓰기는 단연 서평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독서가 생각의 내용을 채운다면, 서평은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한다. 지성계발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이란 것이 그저 지금부터 '생각하기 시작!' 이라고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 진공상태에서 생각할 수 없다.” (p. 64, 필자 강조) 

--> 필자는 2-3년전 전부터 서평을 본격적으로 쓰기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공부하였던 지식이 체계화되고 정리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있는 것같다. 때 늦은 깨달음이지만, 이제라도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할렐루야! 

 

“글을 쓸 때는 항상 뇌를 풀가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고력이  향상된다.” 그렇지만 요즘 휴대전화 문자나 개인 홈피의 대략산만한 글을 쓰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못된다. 주제를 제시하거나 자유로운 글이라도 써보면 간단치 않다. 논리와 내용, 문장을 갖춘 글을 쓰면서 치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력을 키우면 독서 능력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생각하는 힘'도 기를 수 있다는 점이다.” (p. 63, 필자 강조) 

--> 제대로 된 선교서신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어느 정도의 내용과 문장을 갖춘 글을 기대한다. 필자는 이제부터 논리와 내용 그리고 문장을 제대로 갖춘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다.

 

“무릇 모든 학문의 기초는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책 한 권 바로 읽지 못하는데 다섯 수레를 읽은들 무슨 소용 있을까. 오독과 왜곡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곁에 두고 아끼며 읽고, 몇 번이고 겹쳐 읽으면서 우리 정신은 자라게 된다.” (pp. 65-66, 필자 강조) 

 

“그럼 왜 서평이 지성 계발을 원할히 하는데 유용한가? 서평을 쓰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책을 대충 읽어서는 단언컨대 쓸 수 없다. 공격적으로 읽지 않으면 책을 잘 읽을 수 없을뿐더러 막상 서평을 쓸라치면 앞이 캄캄해진다.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밀하게 읽고, 거저 맞장구치면서  읽지 않고 대화하면서도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자연히 지성이 활발해지게 된다.” (p. 66, 필자 강조) 

--> 필자는 매주 1편의 서평을 쓰고 있다. 솔직히 서평 1개를 쓰기위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먼저, 책을 촘촘히 읽는다. 작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정독, 재독한다. 완성된 서평을 선교사의 단톡방에 올릴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린다. 이 책의 저자가 내 서평을 읽고 빙그레 미소를 지을정도의 서평을 쓰는 것이 필자의 1차 목표이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쓴 서평중에서 저자들로 부터 저자 자신도 내 서평을 읽고 더 감동을 받았다는 칭찬을 3-4번 들었다. 

 

“서평을 많이 읽으라. 이는 로이드 존스도 말한 바 있다. 조금 짧은 신문의 서평이나 좀 더 긴 잡지의 서평을 읽으면서 독서 지존들과 서평고수들이 어떻게 쓰는지 관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책의 여백이나 본문 사이에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인상과 단상을 놓치지 말고 책에다 메모하라. 그것이 짧든 길든 개의치 말고 적어두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서평이 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단평이다. 책 뒤표지에 추천하는 짧은 글 말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휼륭한 서평 쓰기의 시작으로 최상이다. (pp. 66-67, 필자 강조, 필자는 김목사의 이 충고를 아멘하며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나가는 말(결론)

 

우리는 날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예수쟁이는 예수학교(Jesus College)의 학생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각각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다 내게 오라'(Come to Me)고 우리를 부르셨고, 아울러서 “내게 배우라'(Learn from Me)고 하셨다. 이 땅의 모든 주님의 제자들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의 영역에도 새로워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골3:10)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평생학습자로 끊임없이 배우는 제자이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우리가 매일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말씀으로 기도할때 성령께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던'(히3:7, 15)이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알아 들을  수있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날마다 순종함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 지식과 사고 능력이 새로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든 선교현장의 선교사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요, 목회자요, 신학자이기 전에 선교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의 제자들과 책을 남겼다. 곧 '그 책의 사람들'을 남겼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글쓰기를 이제 시작하기를 원하는 목사, 선교사들에 이 책은 최고의 안성맞춤의 책임이 분명하다. 이 책은 한, 두번 읽을 책이 아니다. 강추하고 싶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가 쓴 서평을 1-2개정도를 모델로 제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50:4) 아멘 아멘. 할렐루야!/GMS 배안호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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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안호선교사의 선교사를 위한 서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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