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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8.0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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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평론가에 의해 반문화주의의 작품으로 규탄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작가 김동리의 전작(前作) <무녀도>(1936, 1947)는 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럴 때 흔히 쓰인 용어들이 패배의 미학또는 소멸의 미학이란 것들로서, 말하자면 단편소설 <무녀도>가 소설미학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런데 이럴 때의 패배소멸이니 하는 용어들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비극이란 말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비극의 미학 원리를 끌어들여 비교적 성공적인 경지에 이르도록 만든 작품이 바로 <무녀도>란 뜻이다.

 

필자 역시 이에 대해서는 별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안다. 문제는 이러한 <무녀도>가 장편소설 <을화>로 확대 개작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점들이 없지 않다는 데 있다. 이들의 중심 테마가 전통적 샤머니즘외래의 기독교사이의 갈등관계란 공통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두 작품의 차이점이 천이두평론가의 적절한 표현처럼, ‘동굴의 미학으로부터 광장의 신학으로 바뀐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차이점의 발생은 특히 <을화>의 경우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됐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무녀도>짙은 소멸의 분위기를 드러낸 동굴의 미학만으로써도 성공적일 수 있었지만, <을화>광장의 신학을 작품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샤머니즘에 관한 신학의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작품 자체의 소설미학상의 성공 여부에도 문제점을 제기해 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위기 소설로서의 단편 <무녀도>는 샤머니즘에 관한 신학에 대해선 별로 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지만, 사상소설 내지는 본격 종교소설로 탈바꿈한 작품이라고 내세워진 <을화>의 경우에서는 작가 자신이 그것에 대하여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껏 <을화> 속의 샤머니즘 문제를 기독교와의 상관관계 속에서만 논의하려 했고, 또 그러한 논의조차도 샤머니즘의 구원의 긍정가치여부라는 국한된 관점에서만 취급하려고 했다. 이재선에 의해 적절히 구사된 이 용어는 결국 작가 김동리 자신의 잡초에 묻혀 있는 샤머니즘 속에서 새로운 인간종교를 발견하려고 했다는 말과 관련 되는데, 김동리가 샤머니즘을 새로운 인간종교로 봤다는 것은 곧 그것의 종교로서의 구원의 긍정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도 계속 강조했듯이 <을화>가 작가의 창작 의도대로 샤머니즘의 구원의 긍정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필자의 기본 논조였다. 그러나 필자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하여, 흠이 많은 무당들은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며, 또 그런 인물들이 등장하여 작품의 미학적 성공이 저해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이미 <무녀도>가 익히 증거해 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무녀도>에서 거둔 앞서의 예술미학적 성공과

 

또 새 작품 <을화>에서 거두게 될 사상소설(본격 종교소설)로서의 성공이란 양면의 종합적 결실을 작가가 <을화> 속에서 거두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신비의 세계는 <무녀도>에 비해 <을화>에서 많이 약화됐고, 사상 내지 종교의 세계는 설득력을 잃고 만 셈이다.

 

 <을화>는 실로 샤머니즘의 철학(신학)적인 주장을 매우 헐겁게 전개함으로써 창작 의도문학적 형상화가 상호 일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괴리를 드러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창작의 의도의 오류란 실례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 셈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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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6)-김동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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