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옥합] 글쓰기와 치유
이난희
나는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내용 중의 하나는 글 쓰는 작가들의 수명이 짧은 편이라는 것으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수명이 가장 긴 직업은 종교인이었다. 나는 종교인, 기독교인이므로 글쓰기로 인해 짧을 뻔한 나의 수명은 기독교인으로서 성실하게 삶으로써 훨씬 연장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품어 보았다.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말을 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글을 쓴다. 나는 나의 말을 하고 나의 글을 쓴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쓰는 것이므로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면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나 스스로에게 납득되는 경험을 종종 했다. 글을 씀으로, 내 마음 속 저 깊고 어두운 지하실에 함부로 처박아 두고 욱여 넣어둔 나의 복잡하고 혼란한 생각, 감정, 상처 덩어리들을 하나하나 꺼내 와서 찬찬히 살펴보고 언어로 표현하고 정리함으로써 그 덩어리들이 명료해지고 치료된다.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자유롭고 해방된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글쓰기와 글 읽기 (글 읽기 역시, 처음엔 누군가가 쓴 글을 읽는 것이니 글쓰기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다)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는 학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학문은 도구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 생각해 보니,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도 도구이고, 나아가 신학도 도구이다 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전공한 신학도 신학 그 자체 즉 어느 특정한 신학자의 사상, 이론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사상, 로즈마리 류터의 개혁주의 여성신학 사상 그 자체를 위해 내가 노력하고 헌신, 봉사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신학은 세상을, 하나님을, 남성과 여성을 더 잘 보고 이해함으로써, 나의 삶과 신앙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사람들의 삶과 신앙을 더 낫게,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이라는 책을 소그룹 연구모임에서 읽고 토론한 적이 있다. 사회에서 약한 자들, 낮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도록 애쓰기, 지배적인 지배자들의 목소리에 속지 않기 등이 주요 요지라고 생각된다. 내가 공부하고 활동해 온 여성신학이라는 것도 한편으로 보면, 그동안 역사와 문화에서 가려지고 은폐되어 온 여성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인 여성들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서구 유명인들, 유명 신학자들의 말과 글을 주목하고 인용하기보다는, 내 주변의 평범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싶다. 신앙과 신학은 유명 신학자들의 지식독점물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나는 지식, 이론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안의 어른 아이 (혹은 성인 아이- 기독교 상담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신체적으로 그리고 나이로는 성인이지만 내면에 어린 아이 때의 문제나 심리를 여전히 갖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대화하며 위로하고 사랑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는 나의 지금의 어려움을 치료하고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을 되돌이켜 보며 분석하게 된다. 음악 치료, 미술 치료가 있듯이, 나에게는 글쓰기가 일종의 치료인 셈이다. 그 글쓰기는 글 읽기인 공부와 사색, 숙고를 포함하는 글쓰기이다. 나의 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나의 의식의 흐름, 나아가 생각, 느낌, 무의식의 흐름까지도 포함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이것은 아마도 프로이드가 주창한 자유연상 방법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들, 느낌들을 쫓아가며 서술하는 것이다. 좋은 아침, 청량하고 싱그러운 아침에 나는 라떼 한잔을 마시며 글을 쓴다. 지금 나는 최고로 행복하다/한국여신학자협 홍보출판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