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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는 평화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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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12.1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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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 2:14)”

 

성탄절이 되면 땅에는 평화” “Peace on Earth”라고 인사를 전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천사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한 후 부른 찬송 속에 이 말이 나온다. 세 아이를 임신하고 낳았던 사람으로서 나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더럽고 비위생적인 구유에 신생아를 눕혀야 했던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까? 제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소망이다. 나는 첫 아이를 낳고 그 기쁨과 감격에 천 기저귀를 일일이 다림질했던 적이 있었다.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긴 했지만 면 소재 기저귀 천을 깔아 기저귀를 갈곤 했다. 내 소중한 아이 몸에 닿는 천이 구겨져 있는 게 내키지 않아 정성 뻗치게 기저귀천을 반듯하게 다렸었다. 그렇게 잠이 모자라던 산모시절에 그저 평범한 엄마라고 여기는 나조차도 이렇게 평소에 하지 않았을 법한 행동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곁에서 말려도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축의 여물통에 갓 태어난 아기를 누인 그 모습에 소위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까지 받으셨다니?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니 할 말이 없으나, 그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오신 갓난아기 예수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니? 그냥 아무 생각없이 관습적으로 들어왔던 예수 탄생의 풍경이 아이를 낳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담하다 못해 기괴하게 보인다.

 

그토록 참담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가 어떻게 이 땅에 평화를 주었을까 묵상해 본다. 서구인들에게 평화, Peace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동양의 평화(平和)쌀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 상태라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이다. 더 나아가 성경이 말하는 평화, 샬롬은 몸과 마음과 영혼 그리고 물질적으로 안정된, 전인적인(holistic) 평화이다.

 

누군가는 집값이 폭락해도 집 한 칸 장만할 수 없을 때 다른 누군가는 몇 백 채의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는 사회는 성경이 말하는 평화로운 사회가 아니다. 누군가는 강단에서 상처주는 말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을 때, 교인들은 생각과 고민과 의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교회도 평화로운 교회가 아니다. 성평등, 세대간 평등이 없고, 평등을 위한 시스템과 환경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교회는 평화로운 교회가 아니다.

 

이 땅에서 평화로운 상태가 되려면 가진 자와 박탈당한 자 양쪽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평화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자신이 누려야 할 평화의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가진 자, 가해자는 자신이 누려야 할 샬롬의 권리를 양보할 필요가 있다. 권력의 최고봉이요 소위 왕중왕이신 분이 그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평화를 위한 극적인 권한 이양이라 할 것이다. 우리를 품에 안고 돌보셔야 할 분이 우리 품에 자신을 맡기셨다.

 

‘Peace on Earth’를 위해 최소한 성탄절만이라도 권한 이양, 자리 바꿈을 해보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절기 때마다 어린이들이 어른들 앞에서 찬양과 율동으로 재롱잔치를 하는데, 성탄절만은 장로님과 목사님들이 어린이들에게 재롱잔치를 하며 웃음거리를 제공하면 어떨까? 점심식사 준비와 설거지는 남성들이 한다면? 자리 바꿈을 할 소재들은 무궁무진하다.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치며, 사자가 양과 함께 풀을 뜯는 평화의 세상을 성탄절 하루만이라도 누려봤으면 좋겠다. 땅에서는 사랑하시는 모든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시기를!/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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