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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③-김성일의

임영천의 한국 기독교소설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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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3.05.3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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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의 기독교 역사소설 <제국과 천국>은 그 스토리를 엮어 나가는 데 있어서 다분히 추리소설적인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숨 막히는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시종 흥미진진한 분위기 가운데 이끌리도록 만들었는데, 그 점에 있어서도 <제국과 천국>은 <위대한 몰락>과의 유사성을 크게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사 자료, 그중에서도 기독교회 수난사를 어느 작품의 소재로 다루게 되면 자연히 핍박과 수난, 그리고 순교와 배교의 문제들이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순교와 배교의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슈사쿠와 김성일이 서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는 않다고 하겠다. 슈사쿠의 <위대한 몰락>은 그의 또 다른 작품 <여자의 일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의의를 높이 사는 그런 결미를 지은 작품이다. 그러면 김성일의 작품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말하면, <제국과 천국>에서는 순교의 문제가 정면으로 다루어져 있지는 않다. 순교의 문제 자체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상태라곤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어 보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사실상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본 작품에서 조금이라도 순교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탄압과 박해에 대한 상대적 고난의 양상으로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즉 객관적 사실(수난의 실상)만 나타날 뿐 순교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상태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 대신 이 작품은 ‘배교’라는 문제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이처럼 배교의 문제에 직접적인 도전을 감행하고 있다는 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슈사쿠의 <침묵>의 경우와도 일맥 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본 작품 <제국과 천국>에서의 칼리마쿠스란 청년의 아버지 오네시포루스의 배교 같은 것이 <침묵>에서의 로드리꼬 신부의 배교와 거의 같은 유형인 것이다.

 

말하자면 변명의 여지가 있는, 즉 이유 있는 배교라고 보겠다. 달리 표현하자면 대의명분이 있는 그런 유형의 배교라는 말이다. 참고로 부연한다면, <침묵>의 로드리꼬 신부는 자신이 배교를 하게 되었을 때, 여러 신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그런 대의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것의 의미에 대해선 더 숙의해 보아야 할 논점이 뒤따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김성일의 <제국과 천국>에서는 이런 유형의 배교가 주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여기서 중점적으로 부각되는 배교의 유형은 사도 요한의 경우에서와 같은, 인간의 심층심리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배교의 유형이라고 하겠다. 잠재의식이 무의식과도 통하듯이, 잠재해 있는 내재적 유형의 배교는 일종의 무의식적 배교가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스스로 그 점을 아래와 같이 실토하고 있다.

 

“그를 내 일에 이용하려 했던 내 야심은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서 분노하게 된 것은 그분이 새 정부에 예루살렘 사람들을 들여놓지 않으리라고 소문냈던 나 때문이었다. 그를 판 것은 유다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내 목적을 위해서 그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이런 요한의 고백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이 배교자가 아니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예수를 판 사람은 유다가 아니라 바로 자기였다고 자백한 요한은, 그러므로 그 자신이 스승 예수를 세 차례나 부인한 베드로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처지임은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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