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옥합] 스토리의 미학
서나영
미학을 연구하다 보면 그 방대한 예술의 스펙트럼과 내용에 갈피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나나를 테이프로 미술과 전시벽에 붙여 놓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되고, 2억이라는 고가에 팔리는 일들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러나 고민하고 공부하고 경험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세계’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는데, 이 과정 또한 미학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내용’을 알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개개인에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무니없고 어처구니가 없어보이는 예술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작품에 심겨진 ‘내용’ 또는 ‘개념,’ 즉, ‘스토리’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은 ‘개념’ 예술의 시대이며, ‘스토리’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 시의 미학을 정립했던 빈사우프의 고드프리(Godfrey)는 일찍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시라는 예술에 대해 “마음, 귀, 그리고 관습에 의해서 판단되게 하라”고 말했다. 시의 미학은 운율로 귀를 즐겁게 하고, 상징적 ‘내용’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 ‘내용’은 아름다운 스토리여야만 하며,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시학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시뿐 아니라 보이는 예술의 가시적(可視的)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非可視的) 아름다움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지속되기 힘든 성질이 있으며 그 깊이에 한계가 있지만, 그 안에 스토리가 있는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유기적 관계로 인해 더 깊고 밝게 빛나는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면은 아름답지 않고 더럽게 내버려둔 채 겉만 치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 23:27). “먼저 안을 깨끗이” 하면 “겉도 깨끗”해지는 것이 예수가 가르쳐주신 ‘아름다움의 순서’인 것이다(마 23:26).
성경은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자 축복임을 말하고 있다(빌 1:23). 죄로 타락한 인간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중심을 바꾸게 되는 계기, 그 엄청난 사건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 3:3).
그리고 그 거듭남의 사건 후에도 우리는 ‘순례의 길’을 가며 끊임없이 연습하고 단련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훈련은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스토리를 보는 훈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고난들 속에 새겨지는 ‘그의 스토리(His Story)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바로, 그 삶 속에 ‘진정성 있는 내용’을 지니는 것이다.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의 주권자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여 죄인을 구하시고, 그 하찮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소통해 나가는 ‘그의 스토리’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언어와 행동과 매일의 삶의 흔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것은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상실의 연속이며, 때로는 탄식 가득한 눈물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생명을 구하는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일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려퍼질 것이다.
아직 아름답지 않은 자, 겉만 아름다운 자, 아름답고 싶은 자, 먼저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들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총신대 객원교수,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