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국들과의 충돌이 빈번하다. 사상과 정치, 그리고, 체제 대립이 살벌하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가 활발하여 도시화가 가속화 된다. 감정 표현과 본능 추구의 자유로운 로맨티시즘이 예술, 문학, 가치관 등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그런데 개인들은 더욱 외롭다. 교통과 통신 기술이 놀랍도록 발전하며 새로워지지만, 사람들의 간극은 더해지고, 삶은 더 절망적이다.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더욱 제기되며, 거부한다.'
오늘의 세상을 말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럽 사회의 현상이다. 그렇게 혼란한 시대를 고민하며 살던 청년 키르케고르(1813~1855)에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다. 사람들을 위하는 사명감도 주셨다. 그 후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42세에 건강 악화로 죽기까지 헌신하며, 기독교 사상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간극으로 인해 불안과 절망을 벗어 날 수 없으며, 절망은 곧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곧 자기 상실이라 했다. 이는 죄와 죽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선 구원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은 추상적 교리나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며, 존재와 행동이 통일된 것이다”고 했다. 영성과 실행이 일치하는 실천 신앙과 실존 철학을 명확히 세워 준 것이다. 그 당시 못지않은 이 시대에 우리도 다시 서서, 강건하기를 소원한다.
키르케고르는 삶을 세 모습으로 구분했다(‘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단상’). △감각과 충동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미적(美的) 존재 (aesthetic existence) △도덕적으로 살지만 신앙 세계에는 미치지 못하는 윤리적인 존재(ethical existence) △종교적 가치로 살면서 신앙을 통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종교적인 존재 (religious existence)이다. 인생은 또한 ‘다이브’(dive)와 ‘점프’(Jump)의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라 했다.
‘다이브’가 목표와 계획을 위해 뛰는 행위라면, ‘점프’는 예측과 보장이 없이, 뛰어내리는 모험적 선택이다. 안정과 불안, 예측 가능성과 무작위성 사이에서, 선택하고, 만들어진 결과가 인생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이브’와 ‘점프’ 하는 삶의 모습 외에, 요즘에는 ‘레이드’(laid; 안주)를 선택하는 생활 모습도 있다. 그렇게 다르게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 생활을 거미와 개미, 나비로 비유해서 생각해 본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 놓고, 그 망에 걸리는 것을 잡아 먹고 산다. 누구나 거미처럼 ‘레이드’하며 사는 시절이 있다. 특별히 갓 태어난 생명은 다른 사람들을 통한 도움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거미줄을 한번 쳐 놓고 앉아서, ‘다이브’도 ‘점프’도 안 하며, 들어오는 것만 먹고 산다면 어떨까? 더 이상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과 함께 시작된 의미는 ‘안정’ 속에 녹아 버린다. 예수 믿고, 구원 받고, 물세례를 받은 것은 새로 태어난 생명의 ‘시작’이지, 완성품이 아니다. 복음에 위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을 계속 받아들이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개미는 열심히 일한다. 항상 바쁘다. 부지런하다. 좋다고 하는 것을 취하는 즐거움으로 산다.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정적인 것이 거미보다는 훨씬 낫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맛을 보고, 성령 세례를 받은 후, 안정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열심히 ‘다이브’한다. 그러나 그 열정이 또 다른 ‘레이드’를 위한 것이라면, 부자 거미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이미 얻은 것들을 쌓아 놓고, 더 찾기 위해 부지런 할 뿐이다. 세워놓은 목표와 계획을 위해, 열심히 뛰느라, 주님과 주님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없다. 주님의 뜻을 보고 ‘점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나비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꽃가루를 찾아다니지만, 자기의 것을 모으기 위한 열심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안정을 위한 부지런함이 아니다. 나비가 날아다닐 때마다 다른 꽃들은 생명을 시작하고, 살아난다. 나비가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는 거듭나는 과정이 있다. 그동안 안전하게 지켜준 고치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성장했지만, 새로워지기 위해서,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 연약한 애벌레가 부서지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며, 두꺼운 껍질을 깨느라 찢기는 살에서 날개가 나온다. 그리고 넓고 높은 세상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전한다.
최근 세바시 강연에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세대는 시간과 노력을 바치기 전에, 당장 주어질 보상과 결과를 먼저 확인한다”고 말이다. 생존과 안정, 축적과 목표, 이러한 것들을 좇는 것일까?
유대인의 지도자 A.J.헤셀은 “인간이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고 했다. 절망하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신앙을 세워 주는 한국의 키르케고르가 많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