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처가는 충청남도 청양이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단일 민족 국가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시골 동네 이장도 5개 국어를 말해야 감당이 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청양에는 처의 조카가 살고 있는데, 남편의 사업과 건강 문제로 인해서 여러 해 동안 극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약 20여 년을 고생을 하다가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되었다.
그런데 그 동네에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여자가 살고 있었고, 한국 시골의 삶에 적응을 못해서 거의 삶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베트남에서 온 신부가 제 처의 조카를 만나게 되었고, 자기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게 되었다. 처의 조카는 베트남 신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네가 겪는 고통은 내가 겪은 고통의 10분의 1도 안된다”라고 대답하자 베트남 신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해 주고 자기가 겪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은 사람도 이렇게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 신부는 자주 처의 조카를 찾아와서 위로를 받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제 처의 조카도 너무나 착한 신랑을 새로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아픈 고통을 겪은 사람은 아픈 사람을 이해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이다. 위로한 사람이나 위로받는 사람이나 고통의 때는 지나가는 것이고, 행복한 시간도 찾아오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모두 이해하시고 위로하시기에 넉넉한 고통을 다 겪으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아픔을 고하는 순간 위로의 물결이 몰려올 것이다.
성령님의 다른 명칭은 보혜사라고 했고 보혜사는 영어로 Comforter 즉, 위로자 라는 의미인 것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로써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성도로서 살아갈 때 교회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