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종은 종의 위치를 뛰어넘어 주인의 친구가 되어 사명을 신중히 시행한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는 종은 순탄한 길을 얻기 위해 우물가에서 기도를 한다. 이 우물물을 나로 마시게 하는 그 여인이 주인 집 아들의 며느리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구한 것이다. 더구나 나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를 찾기를 구했다. 어여쁜 외모나 소유의 많음을 구하지 않았다. 종은 주인 아브라함이 말하지 않는 것 까지도 헤아려 하나님께 구했다. 그건 바로 자비와 너그러운 인격의 소유자를 얻고자 함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친구라고 했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5) 주님과 친구의 관계가 된 믿음은 성령의 계시를 따라 그의 뜻을 알게 된다. 그가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한 제자 관계에 놓이게 된다.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는 관계를 제자라고 부른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지만 주인과 종의 관계를 뛰어넘는 위치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종은 결코 주인의 하는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하시는 일의 측면은 구주가 되시지만 인격적으로는 친구로 대하신다.
아브라함과 종의 관계도 주종의 관계를 뛰어 넘는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된 선지자이다. 주종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체험한 사람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집에서 일하는 종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원하심을 배우게 된다. 이로인해 종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자비로운 사람을 구하게 된다. 이러한 일은 종이 알 수 있는 계시가 아니다.
주님도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히2:17) 구원의 주가 되셨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은 “자비와 사람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딛3:4)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한 받은 사람은 ‘자비’의 사람이라야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하고 따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는 것은 마땅히 그의 일꾼으로 쓰임받는 자들의 속성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님과 친구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고전7:25) 일하는 일꾼의 영성이 필요하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