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옥합]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김미선 작가
김미선
일전에 주님을 모르는 한 지체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한 적이 있다. 참 좋은 성품과 착한 심성을 가진 그분은 비록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진 못했지만, 나는 때때로 그분의 언행과 선행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의 실재를 느끼곤 한다. 그래서 그분을 만날 때마다 그분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꼭 만날 수 있도록 내 삶의 간증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예수님의 사랑과 역사하심을 전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마음 깊이 ‘진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의 동함이 생겨 용기 있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보혈의 공로로 죄인이었던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게 되었어요.”
이렇게 복음을 접한 대다수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어 본 역사적 사건으로 예수님과 십자가를 떠올리며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다. 비단 믿지 않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역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잘 알고만’ 있는 듯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고,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만’ 한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느끼는 것인데, 생각에 갇혀있는 사랑을 표현하려다 보니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어느 순간 이성적으로 너무나 당연해지곤 한다. 이 모습은 철저히 회개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분의 반응 역시 그러했다. 내 일 같지 않아 믿어질 리 없고,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무미건조한 반응에 나는 다급히 다른 표현을 적용해 보았다.
“만약에 선생님이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 사회적으로 매장되기까지 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볼께요. 모두가 선생님께 등을 돌리고 돌을 던지는 상황에서, 내가 유일하게 선생님을 대변해 주고, 대신 돌 맞아주고, 심지어 선생님이 지은 죄를 내가 뒤집어쓰고 대신 형을 살고, 피 흘려 죽기까지 한다고 생각해 봐요. 그런 나에게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분은 “그럼 안돼지! 쌤이 왜 나 때문에 그래?”
“쌤을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그럴 수 있어요... 그럼... 그런 나에게 어떤 마음이 드나요?”
“너무 눈물 난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도, 하지도 못할 존재인 걸 안다. 그럼에도 그 순간, 너무나 먼 이야기 같던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실체가 있는 소중한 사람의 희생으로 빗대어 설명하니 그분의 반응은 사뭇 달라졌다. 그날의 대화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울컥한 마음이 인다. 전하는 나와 전해 받은 그분, 먼저 믿은 나와 아직 믿지 못한 그분,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그 뜨거운 희생적 사랑이 실재화(實在化)되어 눈물로 고였기 때문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 그 죄인을 살리신 우리 주님의 보혈의 공로.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빚진 자’로서의 정체성을 잊을 때마다 나는 처절하리만큼 주님을 깊이 묵상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거듭난 자에겐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시고, '이미' 전해주신 사랑이 가득하다. 그 사랑을 증거해야 함을 앎에도 여전히 나 중심의 자기애(愛)에 빠져 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난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랑을 머리가 아닌 마음 깊이 고백하며, 나는 오늘도 ‘사랑 받는 자,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말씀 굽는 타자기’ 블로거, 논술교사,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