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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3.2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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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안준배.jpg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 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했다.

경산에 있는 코발트 광산에서 약 삼천오백 명이 총살됐다. 대구형무소 재소자, 대구보도연맹 가입자, 경산경찰서 인근 창고에 수용됐던 경북 지역 가입자까지.

여러 날에 걸쳐서 새벽부터 밤까지 총소리가 들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갱도가 시체로 가득찬 다음에 근처 골짜기로 옮겨서 총살하고 매장했다.

인선은 외삼촌 강정훈이 골짜기가 아니라 광산에서 총살됐을 확률이 높다고 추정했다.

1960년 여름이야, 여기서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 처음 모인 건. 전쟁 당시 수뇌부가 4.19로 물러난 직후에.

귀퉁이가 삭은 신문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넘겨간 인선의 손이 반으로 접힌 스크랩을 꺼낸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걸 펼치자, 광고가 실렸을 하단을 오려낸 사회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위령제 기사가 실렸던 곳과 같은 신문이다. 날짜는 위령제보다 한 달가량 앞서있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갱도에 들어간 유족들에 대한 기사야. 그때 찍은 사진이 이건데, 어디서도 실어주지 않으니까 후일을 기약하고 유족들이 나눠 가진거야.

인선의 말대로 기사에는 갱도 사진이 실려 있지 않다. 대신 광산 입구의 전경이 머리기사 옆에 실렸고, 사진 왼편에 유족회 대표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다.

십 년 동안 갱도에 물이 흐르고 뼈들이 삭아서 흩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온전한 형체를 갖춘 유해는 한 구도 없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수습할 장비도 인력도 없이 무작정 내려가 본 거여서 사진 한 장만 찍고 올라왔습니다.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추정한 숫자는 삼천 명이 넘는데, 제가 본 제1수평갱도에는 대략 오륙백 구의 유골이 있었습니다. 수직갱도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 놨는데, 그걸 뚫고 내려가 아래쪽 수평갱도를 살펴봐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다. 경북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선의 어머니 강정심이 대구 위령제에서 직접 사온 신문의 기사이다.

대구역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석해서 강정심이 그날 받아온 유인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발신인 자리에 대구 주소와 함께 찍힌 청보랏빛 직사각형 스탬프에 촛불을 비춰 나는 묵독한다. 경북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나는 싸늘한 봉투 속에 손을 넣는다. 팔절 갱지 십여 장을 반으로 접어 중철한 소책자를 꺼내든다. 따로 두꺼운 종이를 쓰지 않은 표지를 넘기자 첫페이지에 편지글이 실려 있다.

유가족들의 피맺힌 원을 받들어 십 년 세월 그리던 임을 만나 고이 쉬게 해드릴 날이 곧 옵니다.

피해 유가족들은 낡은 공포심을 극복하고........’ 라는 문장을 쓴 사람과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되는 길고 격앙된 문장이다. 다 읽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자 조악한 화질의 흑백단체 사진이 나온다. 1960년 겨울에 코발트광산 앞에서 찍은 사진이야. 이때 엄마는 가지 않은 것 같아. 대신 유족회원으로서 회비를 냈기 때문에 이 우편물을 받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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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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