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24(목)

교회/목회
Home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실시간뉴스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아쉬레! 마카리오이!(마태복음 28:1~10)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을 히브리어로 ‘아쉬레’라 하고(시 1:1), 헬라어로 ‘마카리오이’라고 한다(마 5:3~11). 하나님은 성도들이 복 있는 자가 되고 복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복 있는 인생만이 하나님을 높이고 세상을 축복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아쉬레와 마카리오이는 다음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는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수행할 때를 의미한다. 마지막 넷째는 그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서 복 있는 사람에게 중심적으로 나타나는 실제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평강과 기쁨을 풍성히 누린다. 다른 한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도 근심과 염려,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근심의 포로는 되지 않으며, 그 염려에 함몰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채우고도 남는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외견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없는 경우에도 실제적으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가라고 한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으며, 또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평안으로 웃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은혜가 전파되고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이 때를 따라 미래와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갖기를 원한다.  “주여! 주 앞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복 있는 인생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나부터 먼저 복 있는 인생으로 서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복 있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마태복음의 마지막 28장 말씀은 부활의 아침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이라는 두 부류가 나타난다.    우선 복 없는 사람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그들에게서 무덤 소식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이다. 경비병들은 예수님이 그 무덤에 장사되시던 순간부터 부활의 아침까지 무덤을 견고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현장과 빈 무덤 그리고 천사의 모습과 지진이 나고 돌이 굴러간 모든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경비병에게서 무덤 소식을 들은 자들로서 사회적으로 힘 있는 기득권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으로도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없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복 있는 사람으로서 여인들이다.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두 사람이다. 이들은 약한 자들이었으나 복 있는 사람으로 세움 받고 쓰임 받는 자들이 되었다. 이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어야 함을 증언한다. 세상에 있을지라도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원주중부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6-20
  •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는 하나님(로마서 8:26~30)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려울 때 어김없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있다. 그것을 ‘탄식’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탄식하다’는 말의 뜻은 ‘절박한 상황이나 안타까운 상황에서 절망을 느끼다’란 뜻이다. 그런데 ‘탄식’ 하다는 말의 한자를 살펴보면 그 절박한 상태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된다.   먼저, ‘탄식하다’라는 말에서 ‘탄’ 자는 ‘탄식할 탄’이다. ‘진흙 근’ 자와 ‘하품 흠’ 자가 합쳐져서 늪과 같이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입을 벌려 하품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상태에서 입을 벌리느냐에 따라 ‘한숨을 쉬다’라는 의미도 나타내지만, ‘감탄하다’는 의미도 나타낸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정말 빠져 나오기 어려운 일을 당하여 크게 입을 벌리고 절망의 소리를 낼 때는 ‘한숨을 쉬다’ 혹은 ‘탄식하다’ 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반대로 무척 어려운 일인데도 거뜬히 해 내는 사람을 보고 입을 벌려 감탄할 때에는 ‘감탄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한편, ‘탄식하다’ 는 말에서 ‘식’자는 ‘숨을 쉴 식’ 자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숨을 한 번 들이 마시고 내쉬는 동작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이 ‘식’ 자를 순 우리말로 바꾸면 ‘한 숨’이 된다. 그러니까 ‘탄식’하다는 말은 몹시 어려운 상황에서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한숨을 짓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탄식을 해 보셨는지요! 아마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탄식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세상은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쉽지 않은데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겹쳤으니 사람들이 입만 열면 그 입에서 한 숨이 나오고 탄식 소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탄과 통탄과 개탄과 애탄과 한탄 등, 온갖 종류의 탄식 소리가 우리 주변을 메우고 있다. 비탄(한매)은 몹시 슬퍼하면서 내뱉는 한숨을 말하며, 통탄은 그런 탄식의 정도가 아주 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개탄은 정말 분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서 나오는 한숨이고, 애타는 억장이 무너지듯이 슬픔이 가득할 때 나오는 한숨이며, 한탄은 원통하거나 뉘우치는 일이 있을 때 탄식하며 쉬는 한숨을 말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그저 이 한숨을 가지고 사정을 하소연하며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우리 하나님께 탄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6절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탄식을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 짊어지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28절은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30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소망이 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에 감탄이 되게 하시고, 우리 입술에서 탄복과 경탄과 찬탄과 영탄이 나오게 하사, 우리가 소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제 6월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가정마다 그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탄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대전중앙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6-18
  • 다시 일어 나세요(스바냐 3:14-17)
    계속되는 바이러스로 인해 저마다 기가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교인들의 기가 죽었는데 교회가 부흥될리 없고, 사원들의 기가 죽었는데 기업이 잘 될 리가 없고, 남편과 아내의 기가 죽어 있는데, 그런 가정이 행복할리 만무한 거다.   16절에서 “그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기죽지 말고 힘을 내라는 말입니다. 비록 너희들이 처한 환경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오히려 노래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주신 시대적 배경은 요시아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인데, 임금의 할아버지인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폭정을 한 사악한 왕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태양신과 바알신이 득실거렸고 우상숭배와 매춘행위가 나라 안팎에서 기승을 부렸으며, 국민들은 한결같이 가난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저마다 낙망에 빠져 있었다.   이런 도탄속에서 겨우 갓 여덟살 된 요시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너무 어린 왕이 권좌에 앉자,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풀이 죽어 있었고, 국민들은 어리고 철도 들지 않은 임금에게 나라와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당시 모든 것이 부패하고 타락한 상황속에서도 정절을 지키고 살던 남은 자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 살던 그때에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을 움켜쥐고 희망의 줄을 놓지 않았던 「남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날마다 죄앞에 넘어지고 스러져서 실추된 자녀로서의 명예와 기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러면서 15절에서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즉,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므낫세와 아몬이 지은 끔직한 죄를 어린왕 요시아에게 형벌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형벌에 대한 탕감선언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해치고 넘어뜨리는 원수와 대적들의 도전이 있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방패와 요새가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셔서 매순간마다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면서 결코 여러분들이 잡은 손을 뿌리치치 아니하신다.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주저 앉아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다시 한번 주안에서 힘을 내시기 바란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라는 복음가사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항상 도와 주심을 믿으시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잇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시고 다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동신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6-08
  • “신앙과 삶의 기초-가정”(창37:19)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자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동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독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검토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언가를 해 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기감을 갖게 되고 이것을 지원해 주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 때 사랑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만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 않고 삶이 실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녀들에게는 똑똑한 부모보다는 무지한 부모나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자녀의 시행착오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결국 자기 스스로 해 내도록 기다릴 줄 안다. ‘자아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짓으로 인생을 살거나 눈치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자기의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감은 하나님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은 바로 이 자기감이라는 곳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했다.(창32:28) 때문에 ‘자기부정’은 먼저 이 ‘자기감’이 잘 구축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청지기로서 자녀의 이 본성이 짓밟히지 않고 잘 발현되게 해 주어야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 힘은 거짓 인생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 현실을 창조적으로 잘 변형시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무엇이며 믿음에서도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자기라는 느낌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의 의미다. 이 기초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너는 왜 꿈이 없니, 왜 비전을 갖지 못하니?” 라고 야단칠 수는 없다.   성공의 공식과 원리를 아는 우리는 자녀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꿈은 위에서 오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받은 야곱의 꿈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꿈이었다. 야곱은 사랑타령 돈타령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자기부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깨달은 다음의 일이었다. 반면에 요셉은 17살 때부터 성화의 과정에 던져졌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사랑과 야곱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감이 구축되었기에 하나님은 자신있게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나서 형들의 눈치를 살필 줄 알았고 자기감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면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이 결핍을 군대에서 채우려 하는 군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진할 힘도 구호를 외칠 힘도 없어 치료만 받고있는 병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성도들은 주님의 사랑, 성육신의 과정에서 평생을 머물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거나 왜 비전을 갖지 못하냐고 야단칠 수 없다. 저들의 삶과 말씀은 항상 분열속에 머물게 된다. 삶의 기초는 인생의 초기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감에 상처받은 성도는 복음을 어려워하고 평생 사랑받기만을(유유) 고집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이 교회와 인간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양지평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28
  • “신앙과 삶의 기초-가정”(창37:19)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자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동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독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검토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언가를 해 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기감을 갖게 되고 이것을 지원해 주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 때 사랑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만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 않고 삶이 실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녀들에게는 똑똑한 부모보다는 무지한 부모나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자녀의 시행착오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결국 자기 스스로 해 내도록 기다릴 줄 안다. ‘자아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짓으로 인생을 살거나 눈치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자기의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감은 하나님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은 바로 이 자기감이라는 곳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했다.(창32:28) 때문에 ‘자기부정’은 먼저 이 ‘자기감’이 잘 구축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청지기로서 자녀의 이 본성이 짓밟히지 않고 잘 발현되게 해 주어야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 힘은 거짓 인생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 현실을 창조적으로 잘 변형시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무엇이며 믿음에서도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자기라는 느낌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의 의미다. 이 기초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너는 왜 꿈이 없니, 왜 비전을 갖지 못하니?” 라고 야단칠 수는 없다.   성공의 공식과 원리를 아는 우리는 자녀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꿈은 위에서 오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받은 야곱의 꿈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꿈이었다. 야곱은 사랑타령 돈타령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자기부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깨달은 다음의 일이었다. 반면에 요셉은 17살 때부터 성화의 과정에 던져졌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사랑과 야곱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감이 구축되었기에 하나님은 자신있게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나서 형들의 눈치를 살필 줄 알았고 자기감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면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이 결핍을 군대에서 채우려 하는 군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진할 힘도 구호를 외칠 힘도 없어 치료만 받고있는 병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성도들은 주님의 사랑, 성육신의 과정에서 평생을 머물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거나 왜 비전을 갖지 못하냐고 야단칠 수 없다. 저들의 삶과 말씀은 항상 분열속에 머물게 된다. 삶의 기초는 인생의 초기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감에 상처받은 성도는 복음을 어려워하고 평생 사랑받기만을(유유) 고집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이 교회와 인간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양지평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21
  • 모세의 인생 고백(출 18:1~12)
    “이름값 한다”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를 말한다. 동시에 히브리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거나 고달픈 인생길을 자녀의 이름이나 지명을 통해서 고백했다.    이처럼 이름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는 경우를 보자. 사무엘이 미스바 기도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에서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었다는 뜻에서 ‘사무엘’, 비느하스의 아내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위기 때 아들을 낳으며 ‘이가봇’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했다. 더 구체적으로 모세의 120년의 삶을 세 이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❶ 모세(물에서 건졌다 (출 2:10))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은 ‘모세’로 요약된다. 나일강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아 바로의 궁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학문적으로, 지도자로 준비하는 기간이다.    ❷ 게르솜(거기 나그네가 됨)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출18:2-3)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을 때, 모든 것이 허망했을 것이다. 그때 모세의 기분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죽겠다고 자살소동을 벌이거나 늘 방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인생을 한탄하는 것과 같다. 모세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원망스럽고, 사는 것이 귀찮았다. 그때 십보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 게르솜이라 지었다. ‘게르솜’이란 “내가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미디안 광야에서 희망없이 살아가는 미디안 광야 40년의 삶을 대변한다. 이 모세처럼 우리도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것이 게르솜으로 대변할 수 있다.    ❸ 엘리에셀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출18:4)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애굽에서 전해지는 바로 왕의 정치보복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왕은 한때 모세와 왕권 다툼을 했던 왕자가 애굽의 파라오 즉 왕이 되어 정적들을 다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때 모세는 비로소 자신이 미디안 광야로 도망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애굽에 있었다면 바로 왕에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미디안 광야로 도망 옴으로 살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로 오게 했다는 뜻에서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을 ‘엘리에셀’이라 지었다.    엘리에셀은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을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순간, 게르솜 즉 원망스러운 인생이 물러가고 미디안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명을 맡기셨기에 엘리에셀은 출애굽을 한 후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40년을 보냈던 모세의 삶을 대변하여 준다./제7영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14
  • 순항할 수 있는 비결(사도행전 27장 13-25절)
      우리의 기준인 성경 말씀대로만 살아간다면, 코로나19라는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를 경험해도 우리는 안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 속에 있으면 지금 내가 깊은 고난 속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수 있고, 소망을 회복하며 그 가운데 비전을 발견하고, 사명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많은 시간을 죄수로 지내야 했습니다. 끊임없이 박해를 당하고, 재판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에서 좌절하거나 고통에 몸서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고, 평안해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정답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했기에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습니다. 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개척하고, 사역했던 교회들을 향해 서신을 보냈구요. 재판을 받을 때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변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이에 유대총독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바울의 상소를 인정하고, 그를 로마로 이송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로마로 이송되는 여정 중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 직전의 여정에서 보면 “간신히 이르렀다.”,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났다.” 라는 말이 연달아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항해가 굉장히 어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울을 지내기 위해 뵈닉스로 가자는 의견들이 있어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이동을 만류합니다. “지금 출발하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하고, 손해가 심할 것이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통솔권이 있는 백부장은 어떤 선택을 했나요? 사도행전 27장 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은 사도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뵈닉스로 향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탄한 항해가 시작되어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상대로라면 큰 위기 없이 뵈닉스에 잘 도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우려대로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결국 사도바울의 말대로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주처럼 자신들이 정답을 내고 앞으로 향합니다. 그러니 세상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치듯,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답답합니다. 속상합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있지만 바울처럼 정답을 외칠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역전하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으시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선장과 선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바울의 경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장은 배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중해를 통해 여러 대륙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장은 평생을 지중해에서 배를 타왔기에 항해에 대한 지식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광풍과 같은 상황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없다.   사도바울은 광풍 유라굴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들을 23절처럼 안심시킵니다. 마치 유라굴로를 만난 것과 같은 이 시간 속에서 주님과 함께 순항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서광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13
  • 거울이 있습니까?(시편119편 135절)
      옛날 거울이 없던 시절, 선조들은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곤 했습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옷매무시 등을 고치곤 했던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물에 비친 내 모습은 그야말로 나의 표면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의 겉모습만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티가 있으면 있는 대로, 화장을 곱게 했으면 화장을 곱게 한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만 보여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에 비친 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의 표면을 비춰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과 같이 표면에 비치는 내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물에다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말라(무감어수 無鑒於水)고 한 것입니다. 대신에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감어인 鑒於人)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계에서 만족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한 단계 더 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감어인’이 아닌 ‘감어신’(鑒於神)의 단계, 곧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어보는 삶에까지 이르게 돼야 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명,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우리의 인격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하나님 앞에서 독대하였을 때의 내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적으로 공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감어신’(鑒於神)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나를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나를 비춰보는 것이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 가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감어경’(鑒於經), 성경에 나를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 앞에 나를 비추지 못한다면 ‘감어인’뿐 아니라 ‘감어신’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에 천한 목자 출신의 사람이 한 나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고향 집을 찾아 방 한 칸에서 낡은 항아리를 열고는 그 안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낡은 목동의 옷가지와 막대기 하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재상은 “재상의 자리는 제게 많은 유혹과 탐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유혹이 들 때마다, 그래서 마음에 동요가 있을 때마다 저는 고향 집의 이 항아리를 찾아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저의 지난날이 어떠했는지 끊임없이 상기하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 역시 육신의 본성에 못 이겨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안에 육신의 정욕으로 평정을 잃고 파문이 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일하시는 방법이 이해되지 않고 내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때마다 들여다볼 거울이 있습니까? 마음의 평정을 찾을 거울,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거울,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힘들어도 들여다볼 말씀의 항아리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일어설 새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석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07
  • 질병이 없는 천국을 소망하는 자가 되라(요한계시록21:1-8)
      오늘날 세계는 질병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코로나19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질병 때문에 하루에도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세계의 하늘 길, 육지, 바다길이 다 막히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이때에 믿는 자들은 깨어있어 영적인 싸인(Sign)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신부로 단장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첫째로 질병의 기원을 알아보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이 세상에는 질병도 죽음도 없었다.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은 고통과 슬픔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그러한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종은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서 증명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이 중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세상에는 질병과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다. 나이가 들어 노환인 경우도 있고 건강관리를 잘못하거나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다가 몸에 질병이 생기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는 질병이 사람들의 범죄의 대가로 온다고 믿었다. 물론 모든 질병이 아담의 원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범죄 행위로 인해 질병이 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질병을 허락하시기도 한다(요9:3).    둘째로, 모든 질병의 치료자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마9:35).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병자를 고치는 일을 많이 하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치유하신 각종 질병들은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진 질병들 이었다. 문둥병, 중풍 등은 현대의 의학으로도 쉽게 고칠 수 없는 심각한 질병들이다.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을 능력으로 치유하시고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임을 증거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여 주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 함이었다(막1:23-26). 예수께서는 병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치유해주셨는데 이는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뿐 아니라 질병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보고 불쌍히 여기심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질병 치유와 목적은 영혼구원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다.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하심으로서 사망권세를 이기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질병치유사역은 부활사건에서 완성 되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모든 질병과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자유를 선포하셨다. 질병을,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은 질병을 완전히 확실하게 제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므로 직접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치유하셨다. 그러나 성도의 질병 치유역사는 성령의 은사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음으로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질병이 없는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한다(계21:4). 하나님나라는 죄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된 곳으로 질병과 죽음이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할 때 병 고침의 초자연적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믿음으로 질병을 이길 수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개혁) 총회장·유향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4-23
  • 고난은 탈출하게 한다(출 1:1-1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변개치 않으시고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은 출애굽 때 만들어진 유월절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건립하게 하여 자기 백성과 만나는 길을 열어주시는 분으로 말씀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을 통해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과 그 후손들의 근황을 소개한다.   1절-7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번성했음을 말씀했다. 특히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창세기에 이어 계속되는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임을 묘사했다.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임과 동시에 언약 백성들인데 그 언약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말씀하기기 위해 야곱의 열두 아들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6절에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다고 함으로써 세월이 많이 지나갔음을 암시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다. 처음에 애굽에 내려갈 때는 칠십 명이었는데 그처럼 번성했다는 것이다. 번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창세기에 여러 번 나온다.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했다.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는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애굽의 바로 왕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좋은 관계는 끝났다는 것이다. 애굽의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것에 대한 대책으로 심한 노동을 시켜 학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해 국고성을 건축하게 했다. 강제 노동을 시킨 것이고 노예처럼 부려먹은 것이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라고 했다. 마치 이것은 초대교회가 핍박 중에도 크게 부흥했던 것과 같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번성의 축복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심히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닥쳤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그렇게 해서 출애굽을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그들에게 고통이 없다면 애굽을 떠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을 때는 그 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고 무조건 떠나고 싶어진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다. 신명기 32:11-12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심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고난은 탈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애굽을 떠나야 한다. 애굽을 탈출해야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애굽 탈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에서의 탈출이고 또는 세상에서의 탈출이다. 그리고 포로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눌린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세워진 견고한 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이것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시므로 완전히 탈출을 이루게 하시어 참 자유와 평화를 주신다. 하지만 모든 성도는 평안하면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세상과 죄를 즐기며 살려고 한다.   고난은 탈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신속히 탈출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탈출을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출애굽을 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4-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