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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 감사 또 감사
추수감사절기에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인자한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감사와 우리가 갖고 있는 감사의 개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얼마큼 받았으니 얼마를 감사한다는 계산이 우리의 감사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 때문에 라는 조건 있는 감사가 아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136:1) 이는 감사의 내용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창조주요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과거에 입었던 은혜를 더듬어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후 이런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해보니 그 은혜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어 그저 감사가 북받치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구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감사했다. 불평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는 것이 몸에 배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불평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와야 하겠다.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인도하여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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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 같이 실행되지 않은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변주(變奏)한다. 남녀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을 통하여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위임명령을 실행한다. 부모는 본능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녀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심각한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친구간의 우정을 통하여 생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다윗과 요나단, 관중과 포숙, 오성과 한음의 우정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모든 사랑의 변주가 고귀하지만 사랑의 영원한 모델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요3:16). 이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3:16)고 사도요한은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행동을 수반한다.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심성을 잘 아셨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실천은 중심을 나에서 주님으로, 나에서 이웃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쉬운일이겠는가. 우선권을 이웃에게 두기 전에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마련이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사랑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랑보다 말이 앞서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신뢰도를 올리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 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사랑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이지만 사랑의 실천은 감정을 넘어 의지를 동반하는 언어이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최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동사다. 자기 중심성을 이웃중심으로 이동시키고 감정을 넘어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크로스로드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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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고 한경직 목사님이 생전에 영락교회 목회사역에서 은퇴 후 남한산성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을 때, 교계의 중진 목회자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병문안하였다. 이날 교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 목사님이 “한목사님, 모처럼 이렇게 교계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간곡한 어조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풋내기 목사들도 아니고 나름대로 한국교계를 이끌고 있는 유명한 중진 목사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한말은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도 지배욕과 명예욕과 소유욕과 이성의 유혹이 항상 따라 다닌다. 목회자는 바울이 교훈함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지능과 학식과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어느 조사기관에 따르면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 스님, 교사 그 다음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게 살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라고 하거나,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마지막 심판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경고하셨다. 사도바울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전에 택하셔서 이 시대를 위하여 사명자로 쓰시고자 세상에 보내셨다. 스위스의 위대한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며 하나님이 나를 이 목적에 쓰시겠다고 작정한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명자는 오직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 따라 헌신하는 일 외에는 한눈을 팔지 말아야한다. 세상에 빛이요 본이 되어야 할 목회 사명자는 자신의 마음과 언행과 처신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자신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임과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장합동선목총회측 총회장·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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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 박사 어록] 고향사람들에게 받은 영향
칠보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나의 예술적 감각을 촉발시켰다면, 명천 지방 사람들의 남달리 강인한 기질과 뜨거운 교육열도 나의 성격을 형성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방사람들은 무엇보다 남성적 기질이 다분한데, 특히 생활력과 투지와 자주력이 아주 강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강의 체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함북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대체로 그렇지만 그 중에도 명천 사람들이 가장 끈질기고 억척스럽다고 하여 마치 그 표본처럼 불리었던 것이다. 이런 기질을 갖게 된 원인을 케자면 복잡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지리적 환경과 그 조건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뜨거운 교육열과 강인한 기질을 갖게 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산간지방의 농도가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다는 얘기이다. 어쨋든 그런 명천 사람들의 투지와 자주 정신이 나의 기질에도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고향이 나에게 준 가장 준엄한 영향을 꼽는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라는 투철한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의 여러 친지와 선배들로부터 명천출신의 선인들이 벌인 눈부신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특히 명천군 아간면을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던 끈질긴 항일민족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무척 감동시켰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나아게는 어릴 때 이미 내가 걸아가야 할 인생 행로가 희미하게나마 비춰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음악에 대한 흥미라던가.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인자하신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것이라든가. 그리고 여기에 명천의 아름다운 산천과 명천인의 투지 넘치는 기질 등에서 받은 영향들이 한데 어우려져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빛과 소금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육영사업에 투신한 뒤에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내 뜻을 실현할 수 있었던 기초는 어린시절부터 그 윤곽이 잡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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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돌보신 예수
구약 오경에는 나그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유난히 많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창 22:21).”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34).” “하나님은 · · ·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신 10:18).”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 19:10).” 왜 나그네를 꼭 집어 사랑하라고 했을까. 당시에 나그네가 많았고, 그들이 기왕의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사회경제적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겁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겁니다. 추수할 때 주울 것을 남겨놓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나그네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신약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한 여러 기적을 전합니다. 유난히 많은 기적이 마태복음 8장 등에 기록한 대로 병자를 낫게 한 기적입니다. 놀라운 신적 기적을 과시하고자 했을까. 그것, 아니라면 왜 고쳐주셨을까. 2천 년 전 위생 조건이 어떠했겠습니까. 아픈 식구가 없는 가정이 없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질병이 실존적 고통이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몸과 주변을 비교적 청결하게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닥 사람들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질병 같은 실존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을 질병에서 해방해 줍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마 14:15~21등)도 전합니다. 역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왜 그런 기적을 행하셨을까. 당시 보통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쟁여놓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풍부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세 끼를 때우나. 일용할 최소한의 양식조차 가지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는 배고픔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질병,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였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는 그랬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실존적 고통 중에 있는 이를 거기서 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살아 보이신 사랑입니다. 너를 나와 같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함입니다. 배제, 차별,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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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의 열매
중학생인 마크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서가던 한 학생이 발을 헛딛어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책과 두 벌의 스웨터,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작은 카세트 등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마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학생이 물건을 줍는 걸 도와 주었습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학생의 짐을 나눠 들었습니다. 걸어가면서 그 학생의 이름이 빌이라는 것과 비디오게임, 야구와 역사과목을 좋아하며 다른 과목은 점수가 형편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져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학교에서 종종 만나며 점심삭사도 같이 하였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날 빌이 마크의 교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 많은 물건들을 집으로 가지고 갔는지 아니? 그때 난 학교 사물함에서 내 물건들을 전부 꺼내오던 중이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복용하던 수면제를 모아놓았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 그걸 먹고 자살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너와 웃고 대화하는 사이 생각이 달라졌어”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마음, 마크가 그의 일상에 아주 평범하게 행한 행동 하나가 빌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변화의 세계로 인도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일이라는 시간안에서 다른사람과 의미 있거나 없거나 스치며 만나는 일상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소한 생각들, 행동 하나 하나가 어떤 다른사람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어느 청년의 일기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뉴스거리가 되는 커다란 사건에는 사람들은 크게 반응 하지만 사소한 일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여운을 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소한 삶의 여운에서 우리들의 따뜻한 사회구성은 이어져 갑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 잃어버리기 쉬운 사소한 시간들 속에서 따뜻한 미소와 관심이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키며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편지 발행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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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 감사 또 감사
- 추수감사절기에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인자한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감사와 우리가 갖고 있는 감사의 개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얼마큼 받았으니 얼마를 감사한다는 계산이 우리의 감사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 때문에 라는 조건 있는 감사가 아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136:1) 이는 감사의 내용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창조주요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과거에 입었던 은혜를 더듬어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후 이런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해보니 그 은혜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어 그저 감사가 북받치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구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감사했다. 불평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는 것이 몸에 배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불평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와야 하겠다.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인도하여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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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 감사 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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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 같이 실행되지 않은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변주(變奏)한다. 남녀간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을 통하여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창조위임명령을 실행한다. 부모는 본능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녀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심각한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친구간의 우정을 통하여 생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다윗과 요나단, 관중과 포숙, 오성과 한음의 우정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모든 사랑의 변주가 고귀하지만 사랑의 영원한 모델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요3:16). 이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3:16)고 사도요한은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행동을 수반한다.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심성을 잘 아셨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말씀하셨다. 사랑의 실천은 중심을 나에서 주님으로, 나에서 이웃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쉬운일이겠는가. 우선권을 이웃에게 두기 전에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마련이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사랑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랑보다 말이 앞서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신뢰도를 올리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 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사랑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이지만 사랑의 실천은 감정을 넘어 의지를 동반하는 언어이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최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동사다. 자기 중심성을 이웃중심으로 이동시키고 감정을 넘어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크로스로드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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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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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 고 한경직 목사님이 생전에 영락교회 목회사역에서 은퇴 후 남한산성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을 때, 교계의 중진 목회자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병문안하였다. 이날 교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 목사님이 “한목사님, 모처럼 이렇게 교계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간곡한 어조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풋내기 목사들도 아니고 나름대로 한국교계를 이끌고 있는 유명한 중진 목사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한말은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도 지배욕과 명예욕과 소유욕과 이성의 유혹이 항상 따라 다닌다. 목회자는 바울이 교훈함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지능과 학식과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어느 조사기관에 따르면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 스님, 교사 그 다음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게 살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라고 하거나,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마지막 심판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경고하셨다. 사도바울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전에 택하셔서 이 시대를 위하여 사명자로 쓰시고자 세상에 보내셨다. 스위스의 위대한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며 하나님이 나를 이 목적에 쓰시겠다고 작정한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명자는 오직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 따라 헌신하는 일 외에는 한눈을 팔지 말아야한다. 세상에 빛이요 본이 되어야 할 목회 사명자는 자신의 마음과 언행과 처신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자신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임과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장합동선목총회측 총회장·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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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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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 박사 어록] 고향사람들에게 받은 영향
- 칠보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나의 예술적 감각을 촉발시켰다면, 명천 지방 사람들의 남달리 강인한 기질과 뜨거운 교육열도 나의 성격을 형성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방사람들은 무엇보다 남성적 기질이 다분한데, 특히 생활력과 투지와 자주력이 아주 강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강의 체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함북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대체로 그렇지만 그 중에도 명천 사람들이 가장 끈질기고 억척스럽다고 하여 마치 그 표본처럼 불리었던 것이다. 이런 기질을 갖게 된 원인을 케자면 복잡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지리적 환경과 그 조건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뜨거운 교육열과 강인한 기질을 갖게 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산간지방의 농도가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다는 얘기이다. 어쨋든 그런 명천 사람들의 투지와 자주 정신이 나의 기질에도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고향이 나에게 준 가장 준엄한 영향을 꼽는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라는 투철한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의 여러 친지와 선배들로부터 명천출신의 선인들이 벌인 눈부신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특히 명천군 아간면을 근거로 하여 전개되었던 끈질긴 항일민족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무척 감동시켰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나아게는 어릴 때 이미 내가 걸아가야 할 인생 행로가 희미하게나마 비춰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음악에 대한 흥미라던가.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인자하신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한 것이라든가. 그리고 여기에 명천의 아름다운 산천과 명천인의 투지 넘치는 기질 등에서 받은 영향들이 한데 어우려져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빛과 소금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육영사업에 투신한 뒤에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내 뜻을 실현할 수 있었던 기초는 어린시절부터 그 윤곽이 잡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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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 박사 어록] 고향사람들에게 받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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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돌보신 예수
- 구약 오경에는 나그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유난히 많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창 22:21).”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34).” “하나님은 · · ·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신 10:18).”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 19:10).” 왜 나그네를 꼭 집어 사랑하라고 했을까. 당시에 나그네가 많았고, 그들이 기왕의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사회경제적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겁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겁니다. 추수할 때 주울 것을 남겨놓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와 사는 나그네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신약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한 여러 기적을 전합니다. 유난히 많은 기적이 마태복음 8장 등에 기록한 대로 병자를 낫게 한 기적입니다. 놀라운 신적 기적을 과시하고자 했을까. 그것, 아니라면 왜 고쳐주셨을까. 2천 년 전 위생 조건이 어떠했겠습니까. 아픈 식구가 없는 가정이 없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질병이 실존적 고통이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몸과 주변을 비교적 청결하게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닥 사람들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질병 같은 실존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을 질병에서 해방해 줍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마 14:15~21등)도 전합니다. 역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왜 그런 기적을 행하셨을까. 당시 보통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쟁여놓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풍부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세 끼를 때우나. 일용할 최소한의 양식조차 가지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는 배고픔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질병,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였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는 그랬습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실존적 고통 중에 있는 이를 거기서 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살아 보이신 사랑입니다. 너를 나와 같은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함입니다. 배제, 차별,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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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돌보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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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의 열매
- 중학생인 마크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서가던 한 학생이 발을 헛딛어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책과 두 벌의 스웨터,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작은 카세트 등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마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학생이 물건을 줍는 걸 도와 주었습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학생의 짐을 나눠 들었습니다. 걸어가면서 그 학생의 이름이 빌이라는 것과 비디오게임, 야구와 역사과목을 좋아하며 다른 과목은 점수가 형편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져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학교에서 종종 만나며 점심삭사도 같이 하였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날 빌이 마크의 교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 많은 물건들을 집으로 가지고 갔는지 아니? 그때 난 학교 사물함에서 내 물건들을 전부 꺼내오던 중이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복용하던 수면제를 모아놓았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 그걸 먹고 자살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너와 웃고 대화하는 사이 생각이 달라졌어”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마음, 마크가 그의 일상에 아주 평범하게 행한 행동 하나가 빌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변화의 세계로 인도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일이라는 시간안에서 다른사람과 의미 있거나 없거나 스치며 만나는 일상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소한 생각들, 행동 하나 하나가 어떤 다른사람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어느 청년의 일기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뉴스거리가 되는 커다란 사건에는 사람들은 크게 반응 하지만 사소한 일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여운을 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소한 삶의 여운에서 우리들의 따뜻한 사회구성은 이어져 갑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 잃어버리기 쉬운 사소한 시간들 속에서 따뜻한 미소와 관심이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키며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편지 발행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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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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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에게 물어보고 계신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시고 간청을 하고 있다. 가르치는 것과 먹이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가르침은 종교에서 사람의 참된 인격의 형성을 위하여 도덕, 윤리, 철학, 등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먹이는 것은 생명의 유지 및 성장을 위하여 양식을 먹이는 것이다. 가르침으로는 어느 정도 인격의 변화를 가져 올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생명은 넣어 줄 수 없다. 종교로 타락한 이 시대의 교회 회복은 신학, 교리,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을 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타락한 이 시대에 하나님은 죽어가는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대언할 자를 찾고 계시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생기의 말씀을 대언 할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시다. 하나님의 외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신의 영의 귀를 열고 들어 보자. 주의 간곡한 외침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 외침의 음성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겠는가?”(사6:8)이다. 타락한 이 시대에 지금 우리를 향하여 외치는 하나님의 간곡한 음성의 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하신다.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것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무엇을 먹일까?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여야 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나를 먹고 마셔라”(요6:57-58). 예수님께서 유월절 밤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먹이셨다.(마26:26-27).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에게 가서 나를 먹이라고 하셨다. 당신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를 먹이자.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참된 사랑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생명의 떡집)에서 떠나 여리고 (세상 종교)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라고 했다.(눅10:30-36) 이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사) 성경원형(본질) 회복 연합회 대표, 전 보수교단체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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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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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명적 교회로 돌아가자
- 미국에 미래교회 학자인 레너드 스위트 박사는 이 땅에는 4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첫번째 교회는 사명적 교회(Mission Church)가 있다. 두번째 교회는 목회적 교회 (Ministry Church)가 있다. 세번째 교회는 현상유지적 교회(Maintenance Church)가 있다. 마지막 네번째 교회는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가 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사명적 교회로 출발하다가 두 번째 교회인 목회적 교회로 변질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때는 목사 중심으로 교회 행정조직이 중요해지면서 많은 교회들이 두 번째 교회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본래적 사명은 뒷전으로 물러가면서 드디어 세번째 교회인 현상유지적 교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교인들이 다 떠나간 박물관 교회가 되어 가는데, 바로 이런 교회들 이 역사적 유물만 남기는 유럽에 있는 교회들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마16:15-18)고 고백했을 때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명적 교회이지, 묵회적 교회나 현상유지적 교회 가 아니며 더욱이 박물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사명적 교회를 세우시고 그 사명을 위해 지도자를 세우고 일꾼을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 세워진 오늘의 교회들이 사명적 교회로 가고 있는가를 냉철히 돌아보며 바른 진단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의 사명이 중심되지 못하고 사명적 교회로써의 순수한 열정이 사라지고 많은 교회들이 목회자 중심에 목회적 교회로 가고 있으며 드디어 보이는 교회 중심으로 현상 유지해 가는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본래의 사명을 소홀히 하면서 교회 자체를 위한 교회로 타락해 가고 있기에 초대교회 이후 사명적 교회가 인간 교황이 중심되어가는 중세에 카톨릭 교회가 변질됨으로 결국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올 불러오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사명적 교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개신교회들마저 목회적 교회에서 현상유지교회로 그리고 드디어 유럽에 많온 교회들이 박물관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교회 위기시대가 온 것이다. 현재는 미국 교회들마저 이런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도 사명적 교회에서 목회적 교회와 현상유지적 교회가 되지 않을까 심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회심한 후 당시에 영국교회도 현상유지교회에서 박물관 교회로 내려가고 있을 때 웨슬리를 통해 위기에 찬 영국교회를 사명적 교회로 변화시켰고, 결국 이 땅에 사명적 교회인 감리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본래의 사명적 교회 위치에 굳게 서야 한다. 세계의 교회들이 목회적 교회에서 현상유지교회와 박물관 교회로 갈지라도 한국교회는 첫 사랑의 사명이 변질되지 않도록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깊은 회개과 결단으로 이 마지막 시대에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소원을 반드시 이뤄 드리는 사명적 교회(Mission Church)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집자가를 바로 지고 가는 건강한 한국교회가 되자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에 계 간곡히 호소하는 바이다. /기감 전 감독회장·도봉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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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명적 교회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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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존재감을 들어내면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세속적인 어떤 인물보다 더 탁월하고 월등한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특히 영적 지도자로 진취적인 삶을 살며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삶의 질, 신앙의 질, 사고의 질을 높여야만 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정하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신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하려면 첫째로 거듭나야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셨다. 거듭남의 증거는 외형적인 것보다 내면적이고 영적인데 있다. 거듭남이란 생명의 본체이시며 근본인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웨슬레는 거듭남의 의미를 신적변화, 내적변화, 완전한 변화, 신비로운 변화라고 했다. 거듭나야할 이유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적인 것은 항상 죄와 연결되어 있고 영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구습을 버리고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을 죄에 내맡겨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 성령을 좇아 살라”고 했다. 거룩함을 동반한 성장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지만 성화(聖化)가 없는 성장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케 하며 파괴로 이끌기 위한 마귀의 방해공작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서는 학문의 질을 업그레이드해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고등학문이고 세상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항상 내적 전환, 마음의 변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서는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항상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시듯 성경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됨을 확인하고 인간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복음화가 우선되어야 하며, 복음화는 인간화,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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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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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성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 주요 장로교단의 총회가 마무리됐다. 장로교회는 총회 앞에 꼭 ‘거룩한 성’자를 붙여 ‘성총회’라고 말한다. 다른 감리교나 성결교 등 다른 교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총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칫하면 총회가 거룩성을 잃어버린 채 정치싸움의 장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지듯이 교회와 교회의 회의도 거룩성을 잃으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코로나를 거치면서 위기는 한층 더 심화됐다. 특히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감소와 이에 따른 지방의 소멸에 한국교회는 존립을 걱정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주일학교는 갈수록 줄고, 2030 청년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이다. 위기에 대처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성의 회복이다. 총회장이 되고, 대표회장이 되는 것은 어떤 권력과 힘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진정한 리더십이 생기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려면 당연히 목회자 스스로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과 기도에 전력하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성 위에서 교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이다. 목회자부터 거룩함을 회복하고, 교회가 거룩함 위에 견고히 세워지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교인이 몇 명 모이고, 교회건물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거룩성의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지금부터 거룩함의 회복을 위한 연습과 훈련에 돌입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4~45)” /한기총·한장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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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성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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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 스위스를 매년 회의차 다니면서 스위스의 옆 나라인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몇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의 안내로 그곳 시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그림은 「기회」라는 큼직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머리에 뒷머리 부분은 없이 앞머리만 길게 늘어져 있고, 발은 말과 같아서 뛰기를 잘하게 생겼으며, 괴상하여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한 폭의 추상화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주는 의미는 크게 감명을 줬다. 설명하는 안내자에 의하면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지 지나가 버린 후 잡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었다. 해설을 듣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까, 그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에서 못 잡으면 뒤통수에는 머리마저 벗겨져 있어서 뒤에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기회’와 같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현재라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후회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교훈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고 만다. 사랑의 실천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오늘이요, 바로 지금이다.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곧 섬김의 삶이다. ‘더 건강하고 더 시간이 나면 하리라’, ‘더 넉넉하면 섬기고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빨리 스쳐 지나가고, 사랑의 실천은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천을 통해 보람을 찾고, 좋은 결과로 사랑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향기를 멋지게 남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본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결과 그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미담이다. 가룟유다는 ‘그 아까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하고 위선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고 이 사랑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야말로 사랑을 실천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절)고 했다. 선한 일은 사랑을 지금 바로 실천하는 일이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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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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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 성경의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분복이다. 특히 가족과 직업은 많은 성취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허무한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의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바는 만물을 괴롭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한 조각, 어리석음이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분복은 소홀히 하고 머나먼 지평선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헛된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나오는 틸틸과 미틸의 여행처럼 말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주리라 믿고 거침없이 자연을 훼손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환경파괴의 저주로 불행해 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자. 선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므로 비록 우리의 선행에 대해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선행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지만 많은 사람은 일시적 욕망과 목전의 이익 때문에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 헛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하니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혹은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며 위로이다.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나도 우리 이웃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이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나도 남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를 다 함께 노력해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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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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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만 70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휴전 곧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70년 동안 휴전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을 모두 따지면 78년이나 된다.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날카롭게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기억과 여전히 다투는 중이다. 나는 10살에 6.25를 경험하였다. 내 고향 강화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인접한 위험한 섬이었다. 유년으로 소년으로 성장하던 무렵에 겪은 전쟁은 70년이 지나도록 평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우리 노년 세대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전쟁을 넘어서 미국과 소련이란 체제를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목숨과 소중한 가정을 잃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등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흘러야 심리적 종전을 선언할 수 있을까? 언제쯤 지나야 남북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공동체는 너무나 커다란 시대의 우울과 분노를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갈등이나,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하는 진영논리는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길 빈다. 그럼에도 희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은 고난은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분단은 앞으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 없는 민족공동체로 나아갈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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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실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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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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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사랑의 실천’위한 삶의 길
- 성자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실천’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 뿐 아니라 원수들에게 까지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을 삶과 몸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 사람들 중에 세 사람을 지적하면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라고 고백하면서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사랑과 섬김’의 부스러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파키스탄으로 중국의 연변 지역으로 때로는 일본으로 북한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 다니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만큼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강변교회 원로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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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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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사랑의 실천’위한 삶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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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 인간의 역사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네 삶속의 미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들이다. 나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갈등 구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내가 살고 죽는 문제로 인해 그 갈등을 피해갈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면 그 갈등의 고리를 풀 수있는 데 그 양보가 어려워 끝내는 아픔의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등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감추거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침잠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갈등은 당장 편하다고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꺼내놓고 해소하고 치유한 다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큰 갈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나 가정 안의 갈등의 문제가 정말 나의 생존권에 관한 것인가? 나의 양보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99.99%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상의 문제이든 최소한 신앙사회 속에서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해결의 의지, 치유의 의지를 가지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신앙안에서는 그 방법이 있다. 먼저 기쁨으로 손해 보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신앙사회는 이기고 지는 곳이 아니다. 내 의견이 꼭 관철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조금 손해 보아 은혜롭다면 그 또한 주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을까? 상호간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보씩 양보하면 의외로 문제는 풀릴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기쁨으로 손해보라. 자신의 권위를 기쁨으로 조금만 내려놓으라 자신의 체면을 조금만 내려놓고 기쁨으로 손해 보기로 마음먹어보라. 문제는 은혜중에 해결될 수 있다. 왼뺨을 치려하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은 엄청난 손해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기쁨으로 그 손해를 감당하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웃으며 오른뺨을 돌려대는 사람에게 그 뺨마져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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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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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 톨스토이가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소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톨스토이가 그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이라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지만 일단 소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울지말아라, 오늘은 이 가방을 줄 수 없지만 내일은 이 가방이 내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꼭 내일주마.” 목을 놓아 울던 소녀는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톨스토이의 목에 매달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 가방을 들고 다음날 소녀의 집에 갔을 때 소녀는 죽은 상태였다.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무덤에 그 가방을 바쳤다.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아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지만 제 약속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많은 약속을 한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자와 앞으로의 어떤 일에 관하여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둔 것’이라고 되어있다. 한번 한 약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무덤 속에 남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고 상대방이 그 약속을 명확하게 믿고 있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나님과 한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으시다. 어허 저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저렇게 거짓말을 하네 하며 기억하시곤 질타하신다. 톨스토이는 한 철없는 소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하물며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기도제목을 이렇게 삼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중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생각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언뜻 일방적인 나만의 약속처럼 느껴져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성령이 역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만큼 진실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내가 무슨 약속을 드렸는지, 그 약속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다. 톨스토이의 가방을 받아든 소녀의 영혼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 또한 굉장히 기뻐할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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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